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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김 內系外系

인천이씨 고려 11세기 정치 (안산김씨 외가)

by 연송 김환수 2008. 5. 31.

 

 원인재 자리는 원래 이곳이 아니다. 현 인천여고 부근에 있던 것을 연수택지개발공사로 철거하게 되자 인천이씨 대종회가 나서서 이곳 묘소 자리로 옮긴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인천시로부터 자연녹지로 지정된 토지 일부를 불하 받아 부지를 조성했고, 지방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인정돼 인천시문화재 자료 제 5호로 지정됐다.

  

 

 원인재

 

  

 군고실

 

 

 경선문

 돈인재

승휴당

 

  

 

 

 

 

 

  

 

 

 

 

 

  

고려국 상서좌복야 상주국 소성백이공허겸지묘

(高麗國尙書左僕射上柱國邵城伯李公許謙之墓)란 비석

  후문 첨소문 

이허겸 신도비 

시조공소성후휘허겸묘 (始祖公邵城侯諱許謙墓) 

               연못                                                                 묘소출입문              

             

 

 

인천이씨의 비밀 인천 이야기

           1890년경 근대개항기의 인천                          

 

인천에 세거해 온 성씨로 인천이씨가 있다.

김해허씨가 그 원 뿌리로 알려져오는 인천이씨는 역사상 인천을 

대표하는 성씨이니 지역 토호土豪였던 것이다.

인천이씨의 전송기는 고려때로서 그 시조로 알려진 이허겸

으로부터 고려말의 이인로에 이르기까지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명멸했다.

고려는 인천이씨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구 수봉공원에서 본 월미도쪽                         

 

고려의 역신으로 유명한 이자겸도 인천이씨이다.

그를 경원이씨로 기록해 인천이씨의 문중에서 제외한 것은 

잘못 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1122년 고려 예종이 죽자

외손자인 인종을 왕위에 오르게 하여 벼슬로 협모안사공신 수태사

중서령 소성후(協謀安社功臣 守太師 中書令 邵城侯)에 책봉되었

다고 했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소성후의 소성은 바로 인천이다.

역신이라고 하여 그를 문중에서 축출하는 것은 역사를 속이는

것이다.

           고대시대 인천의 발원지 문학산 원경                                    

 

인천이씨 세보에 따르면 인천이씨의  시조 는 이허겸[李許謙]

으로서 시조의 유래가 있으니  인천이씨(仁川李氏)는 본래 가락국

수로왕자로서 모후의 성을 따라 허씨(許氏)가 되었으나, 그 후손 기

(奇=허기)가 신라 경덕왕때 아찬으로 사신이 되어 당나라에 공을 세워

 당나라 현종으로부터 이씨(李氏)의 성을 사성 받았다고 했다.

 

그러므로 許奇=李奇인데 이 부분에 대해 신당서와 구당서를 

뒤져 보았지만 관련 기록이 나타나지 않았다. 기록이 없다

하여 근거 없다고 단정할 것은 아니라고 본다. 당나라 

시대에 많은 신라인들이 건너가서 활동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인천의 활력 남동공단                                                    

이후 허기(이기)의 10세손인 허겸(許謙)이 상서좌복야를 지내고

상주국에 올라 소성백에 봉해졌다고 했다. 어떤 기록에는 

17세손이라고도 하는데 세대를 30년으로 잡아 계산하면 

10대가 맞다고 본다.   

그리하여 그 후손들이 이허겸(李許謙)을 시조로 받들고, 그가 식읍

으로 하사받은 인천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온 것이다. 

인천이씨는 명문의 지위를 굳혔는데 이는 인천이 고려 수도 

개경과 가까운 때문도 있는 것이다.신라시대 서라벌 주변이나

조선시대 한양 근처지역사람들이 출세하듯 고려시대에도 그러한

것이다.

           1914년의 부평지역  항공촬영                            

 

고려시대 인천이씨 가문의 인물로는 이자연(子淵 이허겸의 손자)

이 문종때 문하시랑평장사,태사 겸 중서령 감수국사상주국에 

이르렀고, 그의 맏아들 이호(顥)는 선종의 국구로 문종때 호부낭중을

지낸 후 경원백에 추봉되었다.(경원은 고려시대 인천의 또 

다른 이름이다)그외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명멸한다.

 

인천이씨(仁川李氏)의 시조 이허겸(李許謙)은 고려 현종 조에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 상주국(上柱國) 소성현개국후(邵城縣開國侯)에

올랐고 소성현(인천)에 식읍 1천 5백호를 하사받았다고 했다.

이허겸은 고려사에 등장하는 인물로서 그의 사돈인 안산김씨와 깊은

관련을 지닌다. 이허겸의 사위가 김은부로서, 김은부는 거란 침입때

개경을 떠나 남으로 몽진한 현종을 도운 인물이다.

고려사에 나타난 이허겸을 찾으면 이렇다.

 

○ 원성 태후(元成太后) 김씨(金氏)는 안산인(安山人)이니 시중(侍中) 김은부의

 딸이다.  덕종(德宗)·정종(靖宗)·인평 왕후(仁平王后)·경숙 공주(景肅公主)를

낳았다. 그녀를 왕비로 삼자 외조(外祖) 이허겸(李許謙)은 상서 좌복야

(尙書左僕射) 상주국(上柱國) 소성현개국후(邵城縣開國侯) 식읍(食邑)

1,500호(戶)를 증(贈)하였다.

 

당시 인천만에서 세력을 떨친 안산김씨(원래 경주김씨에서 유래.

현종은 모후 신성왕후가 신라계이므로 신라계를 가까이 했다)와

인천이씨는 서로 손을 잡은 것이다.   

 

인천이씨의 기원은 김해허씨(金海許氏)라고 했는데 이것은 

인천에서 멀지 않은 다른 허씨인 양천허씨와 관련성을 

알려주는 것이다.

          2007년의 부평구                                                     

인천이씨는 김해허씨의 후손인 양천허씨의 한 갈래라는데 이들

족보를 통합하면 이렇다. 허기(이기 경덕왕때 인물)와 인천이씨

시조 이허겸 사이에 허선문(許宣文)과 허사문(許士文) 형제가

있다.

형인 허선문(許宣文)은 양천허씨의 시조이고 아우 허사문

(許士文)은 김해허씨의 또 다른 갈래인 태인허씨 시조이다.

허사문은 인천이씨의 족보에 허준으로 나타난다)

이 허사문은 수로왕비 보주태후의 30세손이라고 했고 고려 태조

왕건의 딸과 결혼하여 허즙(許楫)과 허도(許棹=李許謙)을 낳았는데 

형인 허즙은 태인허씨를 잇고 동생인 허도=이허겸은 인천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러므로 가장 큰 집은 김해허씨>양천허씨>태인허씨>인천이씨

인 것이다.

      2007년의 인천경제자유지역  일부(연수구)                                   

 

 

여기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이 있으니 이허겸의 조상

허사문이 왕건의 딸과 결혼한 것이다.

이는 후삼국시대 대부분의 성씨들이 생겨난 것과 일치하는데 

당시 고려건국에 공을 세운 지방의 호족들이 각기 본관지역

에서 시조로서 일가를 연 것이다. 태조 왕건에게는 29명의

왕비가 있었고 각기 그 지역의 호족의 딸이었다.

그 29명의 면면을 보면 이렇다.

 

1 神惠왕후(神惠王后) 柳씨=개성

2 莊和왕후 오씨=나주

3 神明順成왕후 劉씨=충주

4 神靜왕후 황보씨=황주

5 神成왕후 김(이)씨=경주(합천)

6 정덕왕후 貞德王后 柳씨=개성

7 헌목 대부인獻穆大夫人 평씨(平氏)=황해도 평산

8 정목부인(貞穆夫人) 왕씨=강릉

9 東陽院夫人 庾씨=평산

10 숙목 부인(肅穆夫人) 林씨=진천

인천이씨 시조 이허겸을 모신 원인재(연수동) 원경, 순조7년에 건립된

이허겸의 묘로서 인천이씨  근원. 지방유형문화재 제5호.            

 

11 천안부원부인(天安府院夫人) 임씨(林氏)=경주

12 흥복원부인(興福院夫人) 홍씨(洪氏)=홍주

13 대량원부인(大良院夫人) 이씨=합천

14 대명주원부인(大溟州院夫人) 왕씨=강릉

15 광주원부인廣州院夫人 = 광주

16 소광주원부인小廣州院夫人 왕씨 = 광주

17 동산원부인東山院夫人 박씨(朴氏) = 승주(昇州)

18예화부인禮和夫人 왕씨 = 춘천

19대서원부인(大西院夫人)김씨=서흥

20소서원부인(小西院夫人) 김씨 = 황해도 출신

 

21서전원부인(西殿院夫人) 김씨 =  황해도 평산

22신주원부인(信州院夫人) 康씨 = 신천

23월화원부인(月華院夫人) = 수군장군 영창의 딸로 해상세력

24소황주원부인(小黃州院夫人) = 영천

25성무부인(聖茂夫人) 박씨=평산

26의성부원부인(義城府院夫人) 洪씨 = 의성

27월경원부인(月鏡院夫人) 박씨 = 평산

28몽량원부인(夢良院夫人) 박씨 = 평산

29해량원부인(海良院夫人) 김씨추정 = 해평(선산)

 

이 중에 허씨는 보이지 않지만 허사문은 누구의 딸과 

결혼했을까 하는 점이다. 고려사가 소략하여 그 상대를 

밝혀내기는 난망한 편이다.

인천이씨 시조 이허겸의 묘           

 

필자의 추정이지만, 허사문의 배필은 왕건의 제5비

신성왕태후 김(이)씨 소생으로 확신한다. 

신성왕태후 김씨는 베일에 싸인 미스테리의 왕비이다. 

제1비부터 제4비까지는 그 소생이 확실히 전해오고 있다. 

이 제5비 신성왕태후 이후 29번째비까지는 왕자와 공주의

이름이 많이 누락되어 있다.

 

인천이씨는 고려 현종 이후에 크게 출세하는데 고려 현종은

이 신성왕태후 소생이다. 그러므로 현종이 왕자시절

(잠저시)살해위협에 사달릴 때 도와준 이들이 인천이씨와 양천허씨,안산김씨로 보아야 한다.

현종은 대량군 왕자시절 남경(한양)의 사찰에 숨어 있기도 했다.  

그래서 허사문의 부인을 신성왕태후의 딸로 보는 것이다.

인천이씨 시조 이허겸을 모신 원인재(연수동)  근경            

 

인천이씨 시조 이허겸(李許謙)의 아들이 이한(李翰)이라고 했다.

그의 벼슬이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이르렀고 이한의 아들이 

이자연(李子淵)이다.

그는 덕종(德宗) 때에 과거에 장원으로 뽑히고, 문종(文宗) 때에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고 나중 문종(文宗)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덕종(德宗)은  고려 제9대 왕(1032∼1034)이다.고려개국으로 

부터 약 100년이 흐른 시대에 이허겸의 손자가 벼슬을 

살았으므로 인천이씨 시조 이허겸이나 허사문,허선문(許宣文

양천허씨의 시조)까지 모두가 인천과 서부경기 지역의

호족들로서 고려건국에 기여한 인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1914년의 문학산 청학동, 신선이 살던 곳으로 전해온다                

 

 2007년의 문학산 청학동, 고대의 문화향기와 신선지향의 

청학동 전설은 잊혀져 가는가........               

 

     

고려 11세기의 정치와 인주 이씨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BK 연구교수 김창현

 

Ⅰ. 머리말

Ⅱ. 현종~선종 때의 왕조중흥

Ⅲ. 인주이씨의 성장

Ⅳ. 이자연의 등장과 활약

Ⅴ. 인주이씨 세력의 형성

Ⅵ. 이자의와 계림공의 대결

Ⅶ. 맺음말

 

Ⅰ. 머리말

 

태조 왕건이 건국하고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광종의 개혁과 성종의 제도정비로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성종 때 거란의 1차 침략, 목종 때 정변, 현종 때 거란의 2차 침략과 3차 침략, 상장군 김훈 등의 정변 등을 거치면서 흔들렸고, 특히 거란의 2차 침략 때는 현종이 나주까지 피난하고 개경이 함락당해 불타는 위기였다.

 

하지만 성종 때 서희의 담판, 현종 때 양규, 강감찬 등의 활약으로 거란군을 성공적으로 물리쳤으며 김훈 등을 제거해 왕권을 회복하였다.

 

위기를 극복한 고려는 현종에서 선종에 이르는 11세기에 국가를 재건하고 문물을 정비해 중흥을 이루었고, 특히 문종 때 태평성대의 전성기를 달성하였다.

 

정치.경제.사회가 안정되고 부국강병이 달성되었으며, 대장경의 조판, 사학 12도의 융성 등 문화적 측면의 발전도 괄목하였다. 이는 몇몇 문벌가문이 아니라 고려인들에 의해 달성된 것이지만 인주(경원) 이씨를 중심으로 한 문벌가문의 역할도 어느 정도 작용하였다.

 

인주(경원) 이씨는 고려를 대표하는 문벌가문으로 많은 조명을 받아 왔다. 이 가문은 이른바 이자의 난, 이자겸 난으로 인해 부정적인 인식을 많이 받아 왔지만 11세기의 전성기를 이끌었다는 점은 어느 정도 인정해도 좋을 것이다. 또한 이 가문이 주변부에 머물던 인주(인천) 지역을 핵심부로 떠오르게 만들었다는 점도 일정한 의의를 갖는다1)

 

본고는 11세기에 뚜렷한 모습을 드러낸 이자연과 인주 이씨를 고찰한 것인데, 현종~선종 때 모습을 개략적으로 설명하고 인주 이씨의 성장, 이자연의 활약, 인주이씨 세력의 형성, 헌종 때 정변을 다루어 나가려 한다.

 

 

Ⅱ. 현종~선종 때의 왕조중흥

 

목종을 몰아낸 정변 세력의 추대로 1009년에 즉위한 현종은 많은 시련에 직면하였지만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원년에 거란군의 제2차 침략이 임박하자 팔관회를 열었으며,

나주에서 돌아오는 도중 청주에서 연등회를 열었다2,3)

 

성종이 유교화 정책을 추구한 나머지 연등회와 팔관회를 폐지해 사람들의 많은 반발을 샀었는데 현종이 부활시킨 것이었다.

3) 또한 피난 도중에 부처의 도움으로 거란군을 물리치기 위해 대장경의 조판을 부처에게 약속한 현종은 대장경의 조판을 시작하였다.

4) 팔관회와 연등회의 부활, 대장경의 제작은 민심을 수습하고 국력을 결집하는 데 기여하였다. 현종은 5년에 상장군 ..訓과 崔質등 의 정변으로 타격을 입지만 이자림(이가도)의 계획에 따라 서경에 행차해 김훈과 최질 등 을 제거해 권위를 회복하였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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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증동국여지승람..권 9 인천 인물조‘高麗’항에는 인주 이씨가 ..許謙, 아들 ..翰, 손자 ..子淵을 비롯해, 이자연의 손자인 ..資諒...資仁...資玄, ..子祥(이자연의 동생)의 아들인 ...., 손자인 ..公壽, 이공수의 아들인 ..之.., 이오의 손자인 ..光縉, 증손인 ..仁老, 이자연의 5대손인 ..藏用, 계통 불명의 ..穎등 13명이 나 실려 있다.

2).. 고려사..권4 현종원년11월.2년2월

3).. 고려사..권69 예지가례잡의仲冬八關會儀.上元燃燈會儀.., 고려사..권94 서희전

4).. 동국이상국집..권25 大藏刻板君臣祈告文

5).. 고려사..권4 현종5년11월.6년3월.., 고려사..권94 황보유의전.., 고려사..권94 왕가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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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은 불행하게 세상을 뜬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9년 6월에 大慈恩玄化寺를 창건하였다.6) 법상종의 사찰인 현화사는 훗날 인주 이씨의 주요한 세력기반이 된다.

현종은 불탄 개경의 복구에 착수해 두 차례에 걸쳐 대궐을 증축하면서 새로운 정전인 회경전을 창건해 대궐(황성)을 완성하였으며, 개경의 방어를 위해 외성인 나성을 건설하였고 이에 맞춰 5부 방리를 개편하였다.7)

 

최사위는 현화사 창건을 주관하고, 봉은사, 大廟, 보제사 金堂.羅漢殿, 송림현 普賢鏡.., 서경 사천왕사, 장락궁 태조진전 등을 수리하는 등 개경과 지방의 많은 종교시설을 건설하였다.8)

 

대궐의 건설은 장연제.왕가도(이가도) 등이 맡았으며,

나성의 건설은 강감찬이 건의하고 왕가도.이응보.황보유의.황주량 등이 주관하였다.9) 현종의 아들인 덕종은 ..韶에게 북쪽 국경에 거란과 여진을 방어하기 위한 천리장성을 쌓도록 하였다.10)

 

덕종의 동생인 靖宗은 팔관회 때 신봉루에서 동경.서경, 東北..路兵馬使, 4都護, 8牧으로부터 축하 표문을 받고 宋商客.東西蕃.탐라국으로부터 方物을 받는 것, 연등회 때 국왕이 친히 봉은사의 태조진전에 행차해 분향하는 것, 회경전에서 藏經道場을 봄과 가을에 여는 것, 京城街衢를 세 길로 나누어 반야경을 받들고 돌면서 민을 위해 복을 비는‘經行’을 상례로 삼도록 하였다.11)

 

정종의 동생인 문종은 6년 2월에 사직단을 황성 내 서쪽에 신축하였다.12) 10년 2월에 덕수현에 흥왕사를 창건하기 시작해 21년 정월에 완공시켰는데 규모가 무려 2800間으로

12년이 걸려 완성되었다.13)

 

10년에는 西江餠嶽의 남쪽에 長源亭을 지었고, 22년에 남경

에 新宮을 창건하였다.14) 문종 때 시중을 지낸 大寧(해주) 최충이 9齋즉 侍中崔公徒(文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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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고려사..권4 현종9년6월

7) 김창현.., 고려개경의구조와그이념..(신서원, 2002) 제1장및제6장

8).. 고려묘지명집성..최사위 묘지명. 이에 따르면 최사위는 목종 치세에 侍御史로 재직시 김치양과 천추태후가 大良院君(현종)을 해치려 하자 대량원군을 보호하기 위한 檢衛파견을 주도하였다. 목종 12년 정월 大府油庫의 화재로 천추태후가 머무는 천추전이 연소된 직후 목종이 앓아 누웠으며 호부시랑 최사위가 大定門別監이 되어 諸宮門을 닫고 계엄하고 오직 長春門.大定門만 열었다고 한다(..고려사..권 3). 현종파인 최사위가 궁문들을 장악한 것인데 이는 현종파에 의해 방화와 정변이 일어나고 목종이 유폐되었음을 시사한다. 현종의 즉위에 지대한 공헌을 세운 최사위는 측근으로서 수상에까지 오른다.

9).. 고려사..권4 현종2년10월.., 고려사..권94 강감찬.왕가도전

10).. 고려사..권94 유소전

11).. 고려사..권 6 靖宗즉위년 11월.4년 2월.7년 4월.11년 12월. 장경도량은 봄은 6일, 가을은 7일 동안 하도록 하였다.

12).. 고려사..권7 문종6년2월

13).. 고려사..권7 문종10년2월.., 고려사..권8 문종21년정월

14).. 고려사..권7 문종10년末尾.., 고려사..권8 문종22년末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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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徒)를 열어 후학을 지도하니 이에 자극받아 私學이 11개가 더 생겨‘十二徒’라 불려졌다. 이에 따라 학교와 유학이 흥기하였는데 문헌공도가 단연 독보적이었다.15)

 

문종 때에는 여진이 집단으로 이주해 고려의 백성으로 편입되는 경우가 많았고, 천리장성 밖의 여진촌락들이 고려의 州郡으로 편입해 주기를 요청하는 사례가 빈번하자 고려는 일종의 자치주 인 羈..州를 설치해 그들을 지배하였다.16)

 

문종은 성종 때 만든 정치제도를 다듬어 완비하고 전시과를 更定하고 功蔭田柴를 제정하고 녹봉제를 정비하는 등 체제를 완성하였다.17)

 

문종 때는 내사문하성이“우리나라 文物...樂이 興行한지 이미 오래고 상선이 이어져 珍寶가 날마다 이르니 중국에 실로 의지 할 바가 없습니다”라고 자부하고,18)

 

훗날 이제현이“송나라가 매해 포상하는 사절을 보내고, 요나라가 매해 장수를 경축하는 예를 행하고, 倭가 바다를 건너와 보물을 바치고, 여진이 관문을 두드려 살 곳을 얻었다”19) 라고 찬양할 정도로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37년간 재위한 문종이 1083년에 죽은 후 장자인 순종이 즉위하였지만 넉달 만에 죽자 순종의 동생인 선종이 계승해 부왕의 위업을 보존하려 노력하였다.

 

이제현은, 현종과 덕종.정종.문종 때 아버지가 만들고 아들들이 이어받고 형이 마치 면 동생이 이어받기를 80년 동안 했으니 융성하다고 하였고 특히 문종 때의 모습을 大平(太平)이라 하였는데20)

 

그러한 흐름은 문종의 아들인 순종.선종 때로 이어진다. 중흥을 이끈 재상들은..고려사..를 참고하면 현종 때는 韋壽餘, ..瑨, 崔士威, 崔沆(崔彦..의 손자), ..審言, ..殷傅, ..仁渭, 姜邯贊, 庾方, 蔡忠順, 徐訥(徐熙의 아들), ...., 王可道등이 었고, 덕종 때는 서눌, 왕가도, ..韶, ..端등이었고, 정종 때는 서눌, ..韶, ..端, 皇甫兪義,

..徵弼, 黃周亮, 崔齊顔(최승로의 손자), 崔.., 皇甫穎, ..作忠, ..元.. 등이었고, 문종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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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고려사..권95 최충전

16) 최규성.., 북방민족과의관계....한국사..15(국사편찬위원회, 1995), pp. 318.319

17).. 고려사..권76 백관지1 및권77 백관지2,.. 고려사..권78 식화지1 및권80 식화지2. 채웅석은, 11세기

지배층이 특정가문의 독점적 지위를 보장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고 士.庶의 구분이라는 차원에서 제도화하고 四民分業論으로 공장.상인.잡류의 벼슬을 제한하였으며, 문종대는 지배층이 문벌화하고 사.서의 구분이강화되었지만성취적요소를강하게지닌문벌사회였다고하였다... 고려문종대관료의사회적위상과

정치운영..,.. 역사와현실..(27, 1998), pp. 115~127. 남인국은, 문종치세의정국은문종주도하에운영되어서 정치세력이 국왕의 정국운영에 대응하는 세력으로결집하지 못 하였다고 하였다... 고려중기정치세력연구..(서울: 신서원, 1999), p. 63.64

18).. 고려사..권8 문종12년8월

19).. 고려사..권9 문종세가末尾이제현贊

20).. 고려사..권9 문종세가末尾이제현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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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崔.., ....器, ..元.., ..子淵, 王寵之, ..廷俊, 朴成傑, ..元鼎(김인위의 아들), 崔惟善 (崔..의 아들), ..義珍, 王懋崇, 異惟忠, ..徵望, ....(이자연의 아들), 鄭惟産, ..若珍, .. 行瓊, 文正, 崔奭(崔錫), ....鑑(김정준의 아들), ..靖恭등이었고, 순종이 넉 달 정도만에

세상을 뜨자 즉위한 선종 때는 ..靖恭, 崔奭, ....鑑, ..洪, 王錫, 崔思諒(崔..의 손자), 崔思齊(최유선의 아들), ..顔(이자연의 아들), 邵台輔등이었다.

현종은 성종의 두 딸, 경장태자(성종의 동생)의 딸, 안산 김은부(인주 이허겸의 사위)의 세 딸, 이천 서눌의 딸, 경주 김인위의 딸, 청주 왕가도의 딸, 양주 한인경의 딸 등과 혼인하였고,

 

덕종은 현종의 두 딸(김인위의 외손녀와 김은부의 외손녀), 왕가도의 딸, 부여 .... 焉의 딸 등과 혼인하였다. 靖宗은 湍州..祚의 두 딸, 이품언의 딸, 경주 김원충의 딸 등과 혼인하였고,

 

문종은 현종의 딸(김은부의 외손녀), 인주 이자연의 세 딸, 김원충의 딸 등과 혼인하였다. 순종은 경주 ....儉의 딸, 인주 ..顥(이자연의 아들)의 딸과 혼인하였고, 선종은 인주 ..預(이자상의 아들, 이자연의 조카)의 딸, ..碩(이자연의 아들)의 딸, ....(이자연의 아들)의 딸과 혼인하였다.21)

 

현종에서 문종에 이르는 왕들은 왕실의 공주 및 다양한 가문의 딸과 혼인하였지만 세 명 딸이 后妃가 된 안산 김은부(이허겸의 사위) 가문, 세 명의 외손녀가 후비가 된 인주 이허겸 가문, 세 명의 딸이 후비가 된 인주 이자연(이허겸의 손자) 가문이 단연 돋보이며, 더구나 김은부의 외손녀 즉 이허겸의 외증손녀 둘이 또한 후비가 되었으니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선종 때 가서는 후비를 아예 인주 이씨가 독점하였다.

인주 이씨는 고려의 중흥기인 현종~선종 때 정치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이허겸의 아들인 ..翰이 현종 무렵에 재상에 올랐으며, 이허겸의 사위이자 이한의 매부인 김은부가 현종에게 딸 셋을 바쳐 세력을 떨쳤다. 이한의 아들 이자연은 현종 15년에 과거에 급제한 후 현종, 덕종, 정종을 거치며 요직을 역임하다가 문종 때 최충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며 황금시대를 연출하였다.

 

그리고 이자연의 아들들과 이자상의 아들들이 이어서 세력을 떨쳐 나간다.

현종~선종에 걸친 11세기의 전성기는 왕실이나 어느 한 가문이 아니라 고려인들이 만든 것이지만 인주 이씨를 중심으로 한 몇몇 가문과 그 구성원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 점 도 인정된다. 大寧(해주) 최충.최유선.최사제.최사량, 인주 이자연.이정.이안, 樹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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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고려사..권88 후비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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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 이정공, 금주(시흥) 강감찬, 안산 김은부, 水州(수원) 최사위, 이천 徐訥, 철원 崔奭, 충주 ..瑨, 청주 왕가도 등 중부 세력이 중심을 이루고 崔沆, 김인위, 김원정, 김원충, 崔齊顔등 경주 세력이 가세하는 형국이었는데,22) 특히 인주 이씨는 옛 신라 계열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었다.

 

Ⅲ. 인주이씨의 성장

 

..子淵은 崔..과 더불어 고려왕조의 전성기인 11세기를 이끌었던 핵심 정치가였다. 그의 고향은 邵城이니23) 곧 仁州(慶源)로 오늘날 인천이다.

 

이곳은 고구려와 백제 때 買召忽(彌..忽, 彌趨忽), 신라 경덕왕 때 邵城이라 하였으며, 고려 현종 9년 樹州(부평)에 속하게 하였다가 숙종 때 모후인 인예태후(이자연의 딸)의 內鄕이라 하여 승격시켜 慶源郡이라 하였고, 인종 때 모후인 순덕왕후(문경태후: 이자겸의 딸)의 內鄕이라 하여 知仁州事로 고쳤고, 공양왕은 인주가 7代御鄕이라 하여 慶源府로 승격시켰다.

 

조선 태조 원년에는 다시 인주로 되었고, 태종 13년에는 仁川郡으로 고쳤고, 세조 6년에는 昭憲王后의 外鄕이라 하여 仁川都護府로 승격시켰다.24) 수주(부평)에 속했던 소성이 이자연 집안의 활약으로 인해 경원 내지 인주로 승격되어 독립하고 발전한 것이 오늘날 부평 등을 흡수한 인천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씨는..세종실록..지리지 인천의 土姓에,.. 신증동국여지승람..인천 성씨조에 첫 번째로 기재되었는데, 이는 이씨가 일찍부터 이 지역을 지배한 토착 세력이었음을 말해준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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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고려사..권 93 최승로전.崔沆傳,.. 고려사..권 94 徐熙傳...瑨傳.강감찬전.최사위전.김은부전.왕가도전,.. 고려사..권 95 崔..傳.최사량전.이자연전.김원정전,.. 고려사..권 98 ..璹傳,.. 고려사..권 99 최유청전,.. 고려사..권88 후비전1. 최사량은..씨족원류..大寧崔氏편에따르면최충의손자였다.

..元鼎은 ..씨족원류..경주김씨 편에 따르면 김인위의 아들인데, ..元..도 김인위의 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중부세력은 숙종, 예종 때 파평 윤관이 가담하면서 더욱 힘을 얻는데 윤관은 인주 이씨의 딸과 혼인한다.

23).. 고려묘지명집성..이자연.이정묘지명. 이정묘지명에따르면樹州邵城縣이니소성(인천)은당시만해도 수주(부평) 소속이었다.

24).. 고려사..권 56 지리지 1 南京..守官仁州,.. 세종실록..지리지 경기 仁川郡,.. 신증동국여지승람..인천도호부

25) 인주 이씨의 가계와 통혼에 대해서는 다음 글들이 참고된다.

藤田..策.., ..子淵と其の家系(상)(하)...., 靑丘學叢..(제13호.제15호, 1933.1934)

윤경자.., 고려왕실과인주이씨와의관계...., 숙대사론..(제2집, 1965)

이만렬.., 고려경원이씨가문의전개과정....한국학보..(제21집, 1980)

정용숙.., 고려시대의후비..(서울: 민음사, 1992)

박용운.., 고려사회와문벌귀족가문..(서울: 경인문화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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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연의 선대는 신라의 大官이었는데 중국 당에 사신으로 갔다가 천자가 가상히 여겨 ‘..’성을 하사하였다고 한다.26) 그 신라 대관의 자손은 邵城縣으로 거주지를 옮기는데 이로 말미암아 이곳을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 자손 중에 ..許謙이라는 자가 있어 邵城伯에 책봉되고 尙書右僕射..翰을 낳았으며, 이한이 ..子淵과 ..子祥을 낳았다.27)..보한집..상권에 따르면 慶源이씨는 國初(고려초)부터 대대로 大官이 되었다고 한다.

 

이허겸은 현종의 배우자이자 安山..殷傅의 딸인 원성태후 김씨의 외조부였다. 현종은 연경궁주(원성태후) 김씨를 왕비로 책봉하고 15년에 그 친인척을 추증하면서 외조인 이허겸을 尙書左僕射上柱國邵城縣開國侯食邑1500戶에 추증하였다.28)

 

이허겸은 이정 묘지명에 추증 상서좌복야.太子太傅로 나온다. 公.侯.伯은 왕자인‘諸王’과 공이 많은 신하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작위였으니 이허겸이 소성백과 소성후에 책봉되었음은 그가 중요한 비중을 지닌 인물이고 인주이씨 가문의 지위가 높았음을 말해준다.

 

이허겸의 외손녀 즉 김은부의 딸이 현종의 배우자가 된 것은 인주 이씨를 도약시킨 계기가 되므로 중요하다. 인주 이허겸이 안산 김은부를 사위로 맞아들인 것은 인주와 안산이 하나의 생활권이라는 점에서 자연스런 현상으로 볼 수도 있지만 두 집안이 각각 지역토호 로 비슷한 위상을 지녔음을 시사해준다.

 

현종이 거란의 침략으로 남천해 공주에 이르렀을 때 공주절도사 김은부가 맞이해 衣帶와 土物을 바치자 옷을 갈아입고 토물을 호종관에게 나누어주었으며, 巴山驛에 이르렀을 때 驛吏가 모두 도망해 음식을 마련할 수 없자 김은부가 음식을 바치고 옆에서 모셨다.

 

나주에 머물던 현종이 돌아오다가 공주에 이르렀을 때 김은부가 맏딸로 하여금 御衣를 만들어 바치게 하니 현종이 들여서 延慶院主라 칭하였다.

 

그녀가 덕종을 낳고 현종 9년에 靖宗을 낳자 延慶宮主로 승격하고 13년에 부모를 추증하였다. 그리고 이윽고 그녀를 왕비로

삼고는 15년에 조부와 조모를 추증하면서 외조인 이허겸까지 추증한 것이었다.

 

그녀는 인평왕후와 경숙공주까지 낳았으며 사후 원성왕후를 거쳐 원성태후로 추증되었다. 김은부는 생전에 딸 둘을 현종에게 더 바쳤다. 하나는 문종.평양공 基.효사왕후를 낳았는데 안복궁주라 칭해지다가 현종 11년에 延德宮主로 개칭되고 사후 원혜왕비, 평경왕후를 거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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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고려사..권95 이자연전

27).. 고려사..권95 이자연전

28).. 고려사..권88 후비전1 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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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혜태후로 추증되었으며, 다른 하나는 효경공주를 낳고 원평왕후로 추증되었다.29)

이처럼 김은부가 무려 딸을 셋씩이나 현종에게 바친 것은 그와 안산 김씨를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외척 문벌가문으로 급부상시켰으며 덩달아 그녀들의 외조부 이허겸의 인주이씨가 정계에 대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김은부가 딸 셋을 현종의 배우자로 만들 수 있던 이유는 그가 피난의 어려움에 빠진 현종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쳤다는 사실 외에 이허겸 집안의 위상 때문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씨족원류..에 따르면 이허겸은 경주 출신의 工部侍郞..殷悅의 딸과 결혼했는데 그녀는 경순왕 김부의 외손녀였으며, 경순왕과 김은열은 원성왕의 후손으로 친척이었다.

경순왕의 딸과 김은열이 혼인을 했고 거기에서 태어난 딸이 바로 이허겸과 혼인을 했던 것이다.

 

경순왕은 신라를 들어 태조 왕건에게 바쳐 태조의 맏딸 낙랑공주(광종의 누이)와 혼인하였으며 경순왕의 딸은 광종의 아들인 경종과 혼인하였다.30)

 

경순왕과 그 집안은 신라 계열의 대표로서 왕실의 외척으로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녔는데 경순왕의 손녀가 이허겸과 결혼했다는 사실은 이허겸 집안이 위상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경순왕 계열과 어떤 관계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허겸의 선대는 신라의 大官을 지녔으니 신라 계열과 연결된다. ....氏家錄..에 따르면 가락국 수로왕의 후예인 許奇가 신라 경덕왕 때 아찬으로 당에 갔다가 안록산의 난을 만나 현종을 蜀에까지 수행하여 皇姓이씨를 하사받아 소성백에 봉해져, 원래의 성씨인‘許’앞 에‘..’를 붙여‘..許’를 성으로 사용해‘..許奇’라 했고, ..許謙까지 그러하다가 그 아들 ..翰부터‘허’를 버리고‘이’만 성으로 사용했다고 한다.31)

 

崇禎甲申파평 尹鳳九의 서문이 있는..인천이씨세보..에 실린 舊譜序에도 가락국 김수로왕과 왕후 許氏사이에 태어난 아들들 중 일부가 허씨를 칭하였는데 인천 이씨가 바로 여기서 기원하였다고 하였다.

 

가야국의 지배층은 신라의 지배층으로 흡수되므로 이허겸의 선대가 가야 계열이라 하더라도 신라 계열이라 볼 수 있다. 이허겸의 현손인 ..公壽의 묘지명에는, 선대는 信州사람 인데 □三世祖兵馬使大匡奇平이 邵城에 出守한 것을 인연으로 여기에 거처하면서 소성 즉 인주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許奇는 奇平과 동일 인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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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고려사..권88 후비전1 현종.., 고려사..권94 김은부전

30).. 고려사..권2 태조18년11월.., 고려사..권88 후비1 태조신명순성왕태후유씨.경종헌숙왕후김씨

31) 이만열, 앞의 글, p.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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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말에는 경주의 귀족이나 6두품이 지방으로 내려가 자리잡아 호족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허겸의 선대도 신라의 귀족 내지 6두품 출신으로 신주를 거쳐 인주에 자리잡아32) 호족으로 변신하였고 태조 왕건의 후삼국 통일전쟁에 기여하였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에 이허겸은 신라의 왕이었던 경순왕의 외손녀이자 신라의 왕족이었던 김은열의 딸과 혼인할 수 있었다고 정리된다.

 

이허겸은 인주이씨를 넘어서 옛 신라왕실의 사위로 격상되었으며, 그의 딸은 신라왕실의 피가 흐르는 고귀한 신분이 되었다. 그녀가 안산 김은부와 결혼하였고 거기에서 태어난 딸들이 현종의 배우자가 되었던 것이다.

 

이허겸의 외손녀들이 현종과 대거 혼인하게 된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으니 현종 자신이 신라 계열이었기 때문이다. 신라의 경순왕이 고려의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려 할 때 백부 ..億廉의 딸 즉 자신의 사촌누이를 왕건에게 바쳤는데, 그녀는 안종(추증)을 낳고 신성 왕태후에 추증되었다. 안종은 경종의 배우자였다가 과부로 지내던 헌정왕후와 사통해 아들을 낳았는데 바로 현종이었다.33) 이허겸의 외손녀들과 현종은 신라왕실의 피가 흐르는 공통점이 있었기에 혼인관계를 맺게 되었던 것이다.

 

..씨족원류..에 따르면 이허겸과 김은열 딸 사이에는 ..翰외에도 ..訥등의 아들이 있었는데, 상서우복야 이한은 檢校少監崔領의 딸((國子司業崔閏의 증손녀이자 尙書崔巨業의 손녀)과 혼인해 이자연과 이자상을 낳았고, 대장군 이눌은 상장군 ..成幹을 낳았고, 이

성간의 딸은 파평 尹瓘과 결혼하였다.34)

 

상서 최거업은 광종 17년 한림학사 王融이 주관한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한 인물이었다.35) 광종 23년 8월에 송에 파견된 사신단에서 內議侍郞徐熙는 正使였고, 內奉卿崔業은 副使였는데,36) 이 최업을 최거업과 동일인물로 보는 견해가 있다.37)

 

이한의 처 최씨는 이자연 묘지명에 ..浪郡大夫人으로, ..인천이씨세보..에 경주 崔領의 딸로 나타나는데, 처조부 최거업이 과거에 장원급제해 상서에까지 이른 것으로 보아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가문으로 여겨진다.

 

이한은 이자연 묘지명에 따르면 中樞副使..部侍郞을 지냈고, 이정 묘지명에 따르면 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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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信州는 金州혹은 慶州의 판독 오류일 가능성도 있다.

33).. 고려사..권88 후비전1

34) 尹瓘은檢校太子少保..成幹의딸인慶源郡夫人이씨와결혼해尹彦旼을낳았다... 고려묘지명집성..윤언민 묘지명

35).. 고려사..권73 선거지과목選場

36).. 고려사..권2 광종23년8월

37) 강희웅.., 고려초과거제도의도입에관한소고...., 한국의전통과변천..(고려대출판부, 1973), p. 280~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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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左僕射를 지냈고, 뒤에 언급하는 혜덕왕사(소현)의 비문에 따르면 同知樞密院事를 지내고 太傅상서좌복야를 추증받았다. 이한은 중추원의 재상으로 국왕을 시종하였고 이부시랑으로서 인사행정에 참여하였고 좌복야를 추증받았다고 정리된다.

 

Ⅳ. 이자연의 등장과 활약

 

 

 시조 이허겸 묘소

이자연은 현종 15년(1024) 3월에 예부상서 ..徵弼이 知貢擧로 주관한 과거에 22세로 장원으로 급제해38) 화려하게 정계에 입문하였다.

 

....令을 시작으로 御書..院官, 直史館, 秘書省校書郞, 監門衛..事參軍事를 거쳐 어사대의 監察御史에 임명되더니 右補闕知制誥로 옮겼다.39) 감찰어사(종6품)와 보궐(정6품)은 신분상 하자가 없어야 임명되고 출세가 보장되는 淸要職인 臺諫의 직책이었고 지제고는 문장력이 뛰어난 자들이 임명되는 국왕의 문필비서였다.

 

그가 우보궐에 임명된 것은 덕종 즉위년(1031) 9월이었으니40) 29살 때 의 일이다.

그는 덕종 때에 중추원의 右副承宣에 임명되고 刑部員外와 ..部員外, ..部..中, 御史雜端을 더하더니 左副承宣에 임명되고 덕종 2년(1033) 9월에는 31세로 이부낭중.어사잡단.右承宣에 임명되었는데, 寃滯의 獄을 잘 처리하고 銓衡의 권한을 바르게 썼다고 한다.41)

 

승선은 국왕의 정무비서이고, 형부는 형벌을 담당한 부서이고, 이부는 문반의 인사를 담당한 부서이고, 어사잡단은 어사대의 직책이다.

 

그는 국왕의 대변인인 승선으로서 뿐만 아니라 이부의 員外와 ..中으로서 銓衡즉 인사를 맡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국왕 측근인 우승선으로서 왕명출납을, 이부낭중으로서 인사를, 어사잡단으로 서 감찰.언론.署經을 동시에 담당해 실세로 떠올랐다.

 

이자연은 1034년에 덕종이 세상을 뜨고 靖宗이 즉위하자 32세로 이전의 직책을 그대로 띤 채 起居注에 제수되었으며, 內史舍人, 중추원 知奏事, 給事中, 知尙書..部事, ..部侍郞, ..賓卿을 역임하고 다시 知..部事를 맡았다.

 

이윽고 이전의 직책을 그대로 띤 채 中樞副使에 임명되었고, 38세에 知中樞院事右散騎常侍를 역임하고 40세에 中樞使右散騎常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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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고려사..권73 선거지과목選場. 이자연의 시기별 나이는 그가 59세에 세상을 뜬데에서 추론할 수 있다.

39).. 고려묘지명집성..이자연묘지명

40).. 고려사..권5 덕종즉위년9월

41).. 고려묘지명집성..이자연묘지명.., 고려사..권5 덕종2년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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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명되었다.42) 기거주(종5품), 내사사인(종4품), 급사중(종4품), 산기상시(정3품)는 중서 문하성의 ..舍즉 諫官이며, 지주사(정3품)는 승선의 우두머리이고, 이부시랑(정4품)과 지이부사(겸직)는 이부 소속이고, 중추부사(정3품)와 지중추원사(종2품)는 중추원의 재상이다. 言官인 간관, 비서실장인 지주사, 인사담당의 이부 고위직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30대 후반에 중추원의 재상으로 승진하였던 것이다.

 

이자연은 문종이 1046년에 즉위하자 44세로 檢校尙書右僕射를 역임하고 45세에 ..部尙書..知政事判尙書..部事를 제수받고 곧 西京..守使를 겸하였으며, 이윽고 48세에 內史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權判尙書刑部事에 제수되었다.

 

重熙중에, 社稷의 설치가 因巡하여 아직 설치되지 못하자 문종이 조칙을 내려 舊制를 살펴 新壇을 축조하도록 명령하였는데, 이는 문종 6년(1052) 2월의 일이었다.

 

50세의 이자연이 ..使로서 그 일을 감독하여 적절하게 끝마치니 開府儀同三司를 더하였다. 그 해에 長女가 왕비에 책봉됨에 따라 守大尉(守太尉)가 더해지고 51세에 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에 제수되더니 檢校太保推誠佐運保社功臣이 더해지고 53세가 되는 문종 9년(1055)에 門下侍中判尙書..部事監修國史에 제수되었다.

 

문종 8년 2월에 외손인 원자가 儲副즉 태자에 책봉되자 檢校大師(太師)가 더해지고 또 守大傅(太傅) 重大匡, 三重大匡判三司事가 더해졌다.43)

 

이자연은 상서성의 장관인 복야를 잠깐 맡았다가 45세에 참지정사로 내사문하성(중서문하성)의 재신에 진입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부의 장관인 이부상서를 맡았고 예부의 판사를 겸하였다.

 

 

곧 평장사로 형부의 판사를 겸하여 사직단 신설을 감독하고 딸을 문종의 왕비로 들여 공신에 책봉되고 53세에 문하시중으로 이부의 판사와 감수국사를 겸하여 국왕아래 최고의 지위인 수상에 올랐다.

 

이부의 제2장관인 이부상서를 거쳐 이부의 제1장관인 판이부사를 맡아 최고위 인사권자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판삼사사를 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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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고려묘지명집성..이자연 묘지명... 고려사..권 6에 따르면 이자연이 급사중에 임명된 때는 정종 원년(1035) 8월이고, 지중추원사에 임명된 때는 정종 6년(1040) 9월이고, 中樞副使에 임명된 때는 정종 8년 (1042) 8월인데, 中樞副使는 中樞使의 誤記로 판단된다. 33세로 급사중에, 38세로 지중추원사에, 40세로 중추사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43).. 고려묘지명집성..이자연묘지명. 이자연은문종원년(1047) 4월에이부상서참지정사, 3년2월에守司徒, 4년(1050) 정월 내사시랑평장사에, 6년 3월 守太尉에, 7년 7월 문하시랑평장사에, 8년 4월 太傅에, 9년 7월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에 임명되었다(..고려사..권 7). 그는 45세로 이부상서 참지정사, 47세로 수사도에, 48세로 내사시랑평장사에, 50세로 수태위에, 51세로 문하시랑평장사에, 52세로 태부에, 53세로 문하시중 판이부사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사직단은 문종 6년 2월 皇城안 서쪽에 신축되었고, 태자 책봉은 문종 8년 2월에 있었다(..고려사..권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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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권까지 장악하였다.

이자연은 지방직으로 나간 적 없이 중앙의 요직인 언관인 대간, 政曹인 이부, 비서인 승선을 두루 역임하고 중추원재상을 거쳐 중서문하성 재신에 오르더니 문하시중 판이부사에까지 올랐다. 승선직은 우부승선→좌부승선→우승선→지주사로 승진해 가며 맡았고,

이부직은 이부원외랑→이부낭중→지이부사, 이부시랑→이부상서→판이부사로 승진해 가며 맡았다.

 

崔..이 문종 원년부터 문종 9년까지 문하시중으로 재직할 때 이자연은 참지정사 내지 평장사로서 그를 보좌하였으며, 최충이 문종 9년에 內史令으로 은퇴하자 이자연이 최충의 시중직을 이어받아 문종 15년에 사망할 때까지 유지하며 국정을 주도하였다.

 

최충은 은퇴했지만 軍國大事를 모두 자문하다가 문종 22년에 세상을 떴다.44) 문종 前半期를 이끈 쌍두마차가 바로 각각 장원급제를 거쳐 시중에까지 오른 해주 최충과 인주 이자연 이었던 것이다.

 

이자연은 중추원과 내사문하성에 20년 동안 있으면서 나라에 이익 되는 것을 행하지 않음이 없었고, 寵戚의 귀함과 爵祿의 중함을 내세워 남에게 교만하거나 자랑하지 않았다고 한다. 신축년(문종 15년: 1061) 8월에 妙覺寺에서 세상을 뜨니 향년 59세였다. 문종이 슬퍼해 예를 갖춰 장례를 치르게 하고 守大師中書令을 추증하고‘章和’라는 시호를 내렸다.

 

죽기 직전에 佛域茶毗의 법을 따르라는 유언에 따라 화장을 하고 유골을 그 해 10월에 임진현에 장사지냈다.45)

 

이자연이 정국을 운영한 사례와 특징을 살펴보자. 문하시중 판이부사 이자연은 문종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天地災祥은 매양刑.政의득실과서로응하니상벌을신중히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신이 엎드려 보건대 이부.형부는 임무가 辨理를 요하는데 날마다

..夷하고 달마다 廢替하여 稽留되어 결정하지 못하는 것이 많습니다.

 

..部(이부와 형부)의 員寮로 하여금 事理를 精..하고 관리의 勤怠를 고과하여 黜陟하도록 한다면 聖上이 勤政하고 恤刑하는 뜻에 합치하여 寃抑을 녹이고 休祥을 부를 수 있습니다.”문종은 이자연 의 건의를 받아들였다.46)

 

이자연은 하늘과 땅 즉 자연의 재앙과 祥瑞가 인간의 형벌 및 政事(인사)와 서로 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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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고려사..권95 최충.이자연전

45).. 고려묘지명집성..이자연묘지명

46).. 고려사..권95 이자연전.., 고려사절요..권4 문종9년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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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음양오행가 내지 그것을 받아들인 儒家의 天人感應說을 믿고 있다. 인사관부인 이부와 형벌관부인 형부가 맡은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면 자연이 감응해 寃抑이 없어지고 休祥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문종은 10년 2월에 개경 도성 밖 남쪽 덕수현에 흥왕사라는 사원을 건설하였는데 덕수현을 楊川으로 옮기는 대규모의 공사였다.

 

지중추원사 崔惟善(시중 崔..의 아들)은 태조가 訓要에서,“ 國師道詵이 국내 산천의 順逆을 고찰해 무릇 사원을 창조할만한 곳은 營建하지 않음이 없으니 후세에 嗣王및 公侯.貴戚.后妃.臣僚는 願宇를 다투어 修築하여 地德을虧損하지말도록하라”고하였다면서,“

 

지금 폐하가祖宗이쌓은基業을계승하여 昇平이 오래되었으니 마땅히 節用하고 愛人하고 持盈하고 守成하여 後嗣에게 전해주어야 하는데, 어찌하여 민의 재산과 민의 힘을 다해 급하지 않은 비용에 써서 邦本을 위태롭게 합니까”라고 따졌다.

 

은혜가 두텁게 대답한 왕은 다른 날 최유선이 閑..에 入侍하니 조용하게 위로하고 장려하며 말하기를,“ (임금을) 간쟁함은忠이요(임금의) 좋아함을 따름은 아첨이다”라고하였다. 최유선이 대답하기를,“ 創業은 오히려 쉬우나 守成은 어렵습니다” 라고 하였다.47)

 

문하시중 이자연도 흥왕사의 창건과관련해 발언하였다.“ 근래 흥왕사를 창조함으로 인해 덕수현을 楊川으로 옮기니 백성이 ..舍를 營葺하느라 편안히 거처할 겨를이 없으며 남자는 등에 지고 여자는 손에 들고 도로에 서로 이어져 貧者는 구렁에 빠져 죽는 근심이 있고 富者는 安堵할 곳이 없으니 청컨대 덕수현 민의 1년 賦役을 면제해 蘇息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하였다.

 

이에 문종은 특별히 2년 부역을 면제하도록 조처하였다.48) 지중추원사 최유선이 흥왕사 창건을 정면으로 비판해 반대한 반면 문하시중 이자연은 흥왕사 창건에 따른 백성의 피해를 줄이는 대책을 제시해 그 결과 피해 당사자인 덕수현의 민이 부역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문종은 이자연이 공이 높고 임무가 중하다고 여겨 衣...銀器.鞍馬.穀帛을 하사해 式目都監使로 삼았다.49) 庾仲卿은 공부상서 庾逵의 아들인데 문종이 制하여 降等하여 蔭職을 제수하였다. 式目都監使시중이자연등11인이논박하기를,“ 유중경의舅인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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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고려사..권95 최충첨부최유선전.., 고려사절요..권4 문종10년2월

48).. 고려사..권95 이자연전.., 고려사절요..권4 문종10년11월

49).. 고려사..권95 이자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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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형인 少卿..蒙의 딸과 간통해 유중경의 모친을 낳았으니 유중경은 朝..에 나란히 하도록 해서는 안됩니다.”라고 하였다. 반면 평장사 ..元鼎등 4인은 논의하기를, “이는 .... 의 죄이지 유중경 父子가 범한 것이 아니며, 또한 공신 庾黔弼의 후예이니 仕途를 막아서 는 안됩니다. 청컨대 前制에 의거해 강등해 음직을 제수하십시오.”하였다.50)

 

문종이 음직을 근친과 간통해 낳은 자의 후손에게 비록 강등했지만 제수하자 이자연 등 다수가 사회윤리의 입장에서 반대하고, 김원정 등 소수가 정상참작의 입장에서 찬성한 것 인데,

 

문종은 자신의 조치를 지지한 김원정 등 소수의 의견을 따랐다. ..씨족원류..에 따르면 이자연은 경주 ..仁渭의 사위이고, 김원정은 김인위의 아들이니 처남매부 사이에도 인사정책을 놓고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가족.친인척의 구성원 사이에도 노선을 달리할 수 있다는 점이 고려사회의 한 특징이었던 것이다.

또한 式目都監使시중 이자연이 아뢰기를, “製述業康師厚가 과거에 10번 응시해 합격하지 못했는데 例에 따라 갑오년 赦詔에 의거해 脫麻함이 마땅하나 강사후는 儒林郞堂引上貴의 증손입니다.

 

堂引은 驅史官이니 엎드려 무자년 制를 보건대 電吏.所由.注膳. 幕士.驅史.門僕자손이 製述.明經.律.書.算.醫.卜.地理學業을 공부해 登科하거나 兵陳아래에서 大功을 이룬 자는 朝行에 오르기를 허용하라고 하였고, 또한 병신년 制를 보건대 上項人자손으로 은혜를 입어 入仕한 자는 祖.父의 仕路에 의거해 헤아려 제수하라고 하였으니, 지금 강사후는 脫麻함이 마땅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참지정사 ..顯등 5인은 아뢰기를, “강사후의 증조 上貴는 직책이 비록 堂引이지만 儒林郞을 겸할 수 있었고, 부친 序應은 과거에 10번 응시해 또한 脫麻하고 入仕할 수 있었는데, 강사후가

10년 동안 쏟은 螢雪의 功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또한 脫麻를 허용 하십시오.”라고 하였다.51)

 

脫麻는 과거에 10번 응시해 합격하지 못하면 합격시켜 주는 것을 일컫는다. 雜類인 堂引의 탈마 문제가 벌어졌을 때 이자연 등은 법제에 근거한 원칙론을 주장한 반면 김현 등 은 해당자의 노력과 증조.부친의 예를 참작한 변통론을 주장한 것인데, 문종은 이자연 등 의 원칙론을 따랐다.

 

이자연은 윤리.법제에 근거한 원칙주의자였으니52) 문벌명문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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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고려사..권95 김원정전.., 고려사절요..권5 문종12년5월

51).. 고려사..권95 이자연전.., 고려사절요..권5 문종12년5월

52) 이러한 모습은 이자연이, 開城監牧直..啓가 사사로이 起頭..仁과 驅史加達을 파견해 府軍..祚를 체포하려 하자 ..祚가 물에 투신해 죽은 사건의 관련자에 대한 처벌 형량을 놓고 원칙을 강조한 형부의 입장에 동조한 데에서도 엿볼 수있다... 고려사..권95 왕총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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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사회질서를 고수하려는 입장이었다고 하겠다.

이자연은 유생이면서 불교에 심취하였다. 그는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潤州에 있는 甘露寺를 보고 빼어난 경치에 반하였다. 귀국한 이자연은 사람을 시켜 윤주와 같은 경치를 지닌 장소를 물색하도록 해 6년만에 서강(예성강)변 벽란도 북쪽 五鳳峰아래에 그러한 곳을 찾고 윤주의 감로사를 모방해 건물들을 짓고 이름까지‘감로사’라 하였다.

 

후에 감로사의 절경을 승려 시인 惠素가 읊었고 김부식이 이어 시를 지었는데 이를 듣고 사람들이 화답한 것이 몇 千餘편이나 되어 鉅集을 이루었다.53)

 

개경 일대 절들은 대부분 왕이나 왕실의 주도하에 건축되었다. 하지만 감로사는 이자연 개인의 힘에 의해 창건된 인주 이씨 집안의 사적인 원찰이었으니 이는 이자연의 권력이 컸음을 말해준다. 감로사는 감로왕이 아미타불을 지칭하므로 아미타신앙과 관련되는데, 법상종이 미륵보살을 주존으로 하면서 아미타불을 같이 모시니 법상종 계열의 사찰로 보인다.

 

이자연은 법상종에 심취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그가 아들 소현을 법상종에 출가 시키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이자연은 과거에 장원급제할 만큼 유학에 조예가 깊었지만 감로사를 경영하고 유골의 화장을 유언할 정도로 불교에 심취하였으며, 아들 韶顯.손자 世良.증손 智炤와 義莊은 출가해 중이 되고, 아들 이정은 아미타불을 염송하고 보살계를 받았고,

 

조카 이오는 불교를 酷信해 금강거사라 했고, 손자 이자현은 급제해 大樂署丞을 역임하다가 청평산 문수원에 은거해 중처럼 지냈고, 從孫이공수는 불교를 좋아했다.54)

 

이처럼 인주 이씨가 불교에 심취한 경향은 왕실과 통혼을 많이 하고 이자연 계열이 음서를 중시한 모습과 더불어, 최충의 해주 최씨가 유학과 과거를 중시하고 왕실과 별로 통혼하지 않은 경향55)과 대비되지만 인주 이씨와 해주 최씨는 문벌명문으로서 통혼관계를 형성한다.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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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신증동국여지승람..권 4 개성부 상 불우 감로사. 조선초에 권근은 감로사 重創記에서, 이자연의 딸로 문종

의 배우자인 인예태후가 낳은 순종.선종.헌종(숙종의 오류?)이 즉위한 일, 인종의 배우자인 공예태후가 이 절을 중창해 願刹로 삼아 그녀가 낳은 의종.명종.신종이 즉위한 일, 閔霽의 先塋이 모두 이 절의 後崗에 위치해 그 딸이 태종(이방원)의 배필이 되어 元良을 포함한 아들들을 낳아 기르고 있는 일이 감로사의 영험 때문이라고 하였다.

54).. 고려사..권95 이자연전.., 고려묘지명집성..이자연.이정묘지명.., 고려사..권127 이자의.이자겸전

55).. 고려사..권88 후비전1에따르면예종의淑妃최씨는..政崔湧의딸인데, 崔湧은..고려묘지명집성..崔允儀묘지명에 따르면 해주 崔..의 증손자였다. 이에 대해서는 정용숙이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앞의 책, pp. 181.184

56) ..預는 최유선(최충의 아들)의 딸과, 이자겸은 崔思諏(최충의 손자)의 딸과 혼인하고, 崔淪(최충의 증손)은 이자덕의 딸과 혼인한다. 藤田..策, 앞의 글(상), pp. 33.37 및 박용운, 앞의 책, 제2부 제1장. 이자연은 왕

실외척으로서, 최충은 州吏의 아들(..신증동국여지승람..해주 인물조)로서 장원급제했다는 점이 두 가문의 경향에 차이를 가져온 요인으로 보인다. 최충이 두 아들에게“士以勢力進鮮克有終以文行達乃..有慶” (..보한집..상)이라고 경계한 말에서 세력보다 文行을 중시한 그 가문의 가풍이 드러나는데, 최충의 자손대로 가면서 학벌과 문벌을 겸비한 명문으로 자리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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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인주이씨 세력의 형성

 

이자연은 낙랑군 京兆氏...林國大夫人金氏와 혼인해 8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을 낳았다. 문종은 이자연의 딸을 들여 왕비로 삼자 이자연의 처 ..浪郡君..氏를 大夫人으로 삼고, 아들 ....를 軍器注簿에 임명하고, ..顥와 ....에게 각각 9품직을 제수하였으며, 이윽

고 김씨를 ..林國大夫人에 봉하였다. 이자연이 세상을 떴을 때 맏아들 ....은 檢校衛尉卿行尙書右丞知閤門事였고,

 

그 다음 ....은 殿中少監, ..碩은 ..部員外郞, ....는 閤門祗候楊州使였고, 韶顯은 어릴 적에 출가해 瑜伽業大選場에 합격해 大德이 되었고, ..顥는 尙食直長同正이었고, ....은 세상을 떴고, ..顔은 ..賓注簿同正이었다. 딸 셋은 모두 문종의 배우자였는데, 맏딸은 延德宮主王妃로 太子및 國原侯를 낳았고, 둘째딸은 壽寧宮主로 朝鮮侯를 낳았고, 셋째딸은 崇慶宮主였다.57)

 

이자연의 배우자 계림국대부인은 이정 묘지명에 따르면 내사시랑평장사 ..因謂(..仁渭)의딸이었다... 고려사..권88 후비1 현종편에따르면元順淑妃김씨는史書에서 그 고향을 잃었는데 평장사 ..仁渭의 딸로 敬成王后를 낳았으며,

 

처음에는 景興院主라 칭하다 가 현종이 15년 정월에 德妃에 책봉하고 9월에 김인위를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京兆縣開國男식읍 300호를 주고 致仕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김인위 딸의 고향을 모른다고 하였지만..씨족원류..에 따르면 김인위는 경주 김씨의 한 갈래인 장군 ..順雄의 아들이고 김인위의 아들은 ..元鼎이었다. 그러니까 경주 김인위는 한 딸을 현종과, 다른 한 딸을 이자연과 혼인시켰던 것인데, 현종. 김인위. 이자연 모두 신라 계열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자연과 김원정은 매부 처남 사이로 정계를 이끄는 주요 인물이었다.

이자연은 신묘년(문종 5년)에 과거의 고시관인 지공거를 담당해 급제자들을 선발했는데 그 중에서 명망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58) 이자연이 주관한 과거에서 급제한 문생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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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고려묘지명집성..이자연 묘지명,.. 고려사..권 95 이자연전. 문종의 배우자가 된 이자연의 딸 중 인예태후 (연덕궁주)는 순종, 선종, 숙종, 대각국사, 상안공, 普應僧統, 금관후, 변한후, 낙랑후, 聰慧首座, 적경궁주, 보

녕궁주를 낳았고, 인경현비(수녕궁주)는 조선공, 부여공, 진한공을 낳았고, 인절현비(숭경궁주)는 자식이 확인 되지 않는다... 고려사..권88 후비전문종

58).. 고려묘지명집성..이자연 묘지명. 내사시랑 이자연은 문종 5년 4월에 지공거를 맡아 崔錫(崔奭) 등의 급제자를 선발 하였다... 고려사..권73 선거지과목選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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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망가는 평장 崔奭, 평장 ....鑑, ..政崔思訓.朴寅亮, 학사 崔澤.魏齊萬등이었고, 아들 ............顔이 재상에 올랐으니, 어떤 사람이 시를 짓기를,“ 庭下芝蘭三宰相門前桃李十公卿”이라 하였다.59) 이자연의 쟁쟁한 문생들은 인주이씨 세력의 확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은 문장에 능했지만, 과거응시를 불허하고 門蔭으로 出身하도록 강요한 부친의 뜻을 따랐다. 20살인 정종 10년(1044)에 內庫副使, 23살인 문종 원년(1047)에 ..賓省注簿, 25살인 문종 3년(1049)에 閤門祗候(정7품)를 역임하였고, 28살에 尙書考功員外郞(정6품)을 제수받고 나가 楊州를 맡았다.

 

31살에 임기를 채우고 중앙으로 돌아와 尙書戶部員外郞을 거쳐 호부의 正郞(..中: 정5품)이 되었다. 32살에 衛尉少卿(종4품) 知閤門事, 35살에 尙書右丞(종3품), 36살에 尙書..部侍郞(정4품), 38살에 殿中監(종3품) 知尙書.. 部事를 역임하였다.

 

40살인 문종 18년(1064)에 同知中樞院事(종2품)로 三司使를 겸하고, 44살에 右散騎常侍를 겸하고, 46살에 戶部尙書中樞使權西京..守使를 역임하고 47살에 ..部尙書로 옮겼다. 48살인 문종 26년(1072)에 ..知政事判三司事, 51살인 문종

29년(1075)에 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判尙書兵部事西北面兵馬事兼西京..守使에 제수되었다.

 

53살이 되는 문종 31년(1077)에 앓자 국왕이 守太傅문하시중을 제수하였지만 佛恩寺에서 아미타불을 염송하고 스스로 보살 8戒를 받고 5월에 세상을 떴다. 불교식으로 서쪽 京畿의 山麓에서 茶毗를 하고 유해를 임시로 절에 봉안하였다가 孟冬月에 임진현 白嶽의 先塋인근에 장사지냈다.60)

 

....은 문음으로 벼슬길에 들어선 지 9년 정도만인 28세에 조정회의에 참여할 수 있는 ..職에 속하는 고공원외랑에 오른 빠른 승진이었다. 36세~40세에는 이부의 고위직인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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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보한집..상권. 여기서芝蘭은이자연의아들을, 桃李는이자연의문생을비유한다.

60).. 고려묘지명집성...... 묘지명. 이정은 1024(현종 15년) 내지 1025년(현종 16년) 무렵에 태어났다고 볼 수 있다. 이자연이 이정에게 과거를 불허한 요인은“賈誼之年多相如之病”으로 말미암았다고 되어 있는데,

김용선 편..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한림대 출판부, 2001)에 실린 이정 묘지명의 역주에는“賈誼의 나이에 이르러서도 相如의 병이 지나칠까 하여”로 번역하고, 賈誼는 뛰어난 문장을 썼으나 33세에 요절하였고,

相如(司馬相如)의 병이란 글에만 심취하는 것을 말한 듯하다고 주석하였다. 이자연은 자신이 장원급제한 인물인데 아들이 문장실력이 뛰어났음에도 과거응시를 금하고 음서를 이용하도록 한 것은 언뜻 납득하기 어려우니 문벌외척으로서의 겸양.경계나 기득권고수 등의 숨은 이유가 있었는지 추구해 볼 일이다. 이자연의 응시불허 때문인지 그 아들들 중에는 급제자가 없고 손자 중에는 ..資仁, ..資玄정도가 급제하고, 대부분 음서를 이용해 벼슬하였다. 반면 이자상의 아들인 이예와 이오, 이예의 아들인 이공수, 이공수의 아들인 ..

之..는 과거급제를 통해 벼슬에 나아갔다... 고려사..권95 이자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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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랑 내지 지이부사로서 문반에 대한 인사를 관장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벼슬에 나아간지 21년 정도만인 40세에 동지중추원사로 재상이 되었으며, 47살에는 이부상서 중 추사로서 문반에 대한 인사를 관장하였다.

 

48세에는 참지정사로 중서문하성의 재신이 되더니 51세에 평장사 판병부사로 亞相이 되어 무반에 대한 인사를 총관하고 서북면 병마판사로 군권을 장악하였다.

 

이정은 부친 이자연과 문종의 왕비인 세 누이의 후광으로 요직을

역임하고 초고속으로 승진해 51세에 아상이 될 수 있었으며 53세에는 죽기 직전이지만 문하시중을 제수받았던 것이다.

 

....는 좌승선을 역임하고 여진족 토벌에 공을 세웠다. 문종 34년 12월에 東蕃이 난을 일으키자 중서시랑평장사 文正을 判行營兵馬事로, 동지중추원사 崔奭과 병부상서 ..漢을 兵馬使로, 좌승선 ....를 兵馬副使로 삼아 步騎3만을 거느리고 치게 하니 431명을 사로

잡아 베었던 것이다.61)

 

이의는 35년 2월에 太子賓客에, 12월에 左散騎常侍知中樞院事에 임명되었다.62) 문종은 36년 9월에 개경에서 남쪽으로 행차를 떠나 峯城縣에서 重陽宴을 베풀고 천안부를 거쳐 溫水郡에 이르렀다.

 

그리고 10월 초하루에‘暮秋南幸次天安府’라 는 시를 친히 지어 보여주고는 近臣들에게 韻을 따라 화답하도록 하여 등급을 매겼는데 가장 빼어난 시를 지은 좌산기상시 (지중추원사) ....에게 廐馬1필을 하사하였다.63)

 

이의는 이후 기록에서 사라진 것으로 보아 문종말~순종 무렵에 죽은 것으로 보인다.

....가 諫垣에 있을 적에 陰陽者流가 각기 도참을 고집하여 서로 裨補를 말하니 임금(문종)이 이의에게 물었다. 이의가 대답하기를, 음양은 大易에 근본을 둔 것인데 易에는 地理裨補를 말하지 않았으니 후세에 詭誕者들이 그것을 曲論해 文字를 이루어 衆人을 미혹한 것이며, 하물며 도참은 荒虛怪妄하여 하나도 취할 만하지 않다고 하니 임금이 마음속으로 그렇게 여겼다고 한다.64)

 

간관 이의는 도참에 근거한 풍수지리 裨補의 효능을 부정한 것인데 문종은 그렇게 여겼다고 하였지만 지리 도참설을 떨쳐 버리지 못하였다.

 

..顔은 中樞院副使로 재직하던 선종 5년 정월에 요나라가 ..場을 압록강 연안에 설치하기를 의논하자 왕명을 받고 藏經燒香使를 가탁해 귀주에 가서 변방의 일에 비밀히 대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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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고려사..권9 문종34년12월

62).. 고려사..권9 문종35년2월.12월

63).. 고려사..권9 문종36년9월.10월

64).. 보한집..상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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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65) 선종 5년 12월에는 형부상서 참지정사에 임명되었으며, 이 때 이자인은 殿中監중 추원부사에 임명되었다.66) 그 후 문하시랑평장사에 오른 이안은 선종 8년 12월에 세상을 떠 襄愼이라는 시호를 받았다.67)

 

..碩은 문종 26년 7월에 한림학사 國子祭酒鄭惟産이 知西北面秋冬番兵馬事로 나갈 때 兵部侍郞으로서 東北面秋冬番兵馬副使로 나갔으며, 문종 31년 정월에 工部尙書에 임명되었다.68) 선종이 국원공이었을 때 공부상서 이석의 딸을 배우자로 맞이하고 왕위에 오른 후 왕비로 삼았으며

 

그 아들 헌종이 즉위해 어머니를 태후(사숙태후)로 삼았음에도69) 이석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선종이 즉위하기 전에 이석이 공부상서로 사망했음을 시사해준다. ..

 

顥는 慶源伯을 추증받았다는 기록, 순종이 즉위해 호부낭중 ..顥의 딸을 들여 왕비로 삼았다는 기록70)으로 보아 비록 그녀가 순종의 사후 宮奴와 사통해 폐비된 사실을 참작하더라도 호부낭중으로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거나 아니면 힘을 상실했을 것이다.

 

....은 이자연 이 사망했을 때 殿中少監에 재직하였지만 그에 대한 기사가..고려사..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역시 젊은 나이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은..고려사..권 95 이자연전에 재상으로 소개되었지만 이자연 묘지명에 부친보다 먼저 세상을 떴다고 했음으로 요절한 것으로 보이니 이자연전에 언급된 재상‘....’은‘..顔’과 혼동한 오류로 판단된다.

 

韶顯은 靖宗4년(1038)에 闕南佛嶺의 부모 私第에서 태어나 11세에 부친의 뜻에 따라 海安寺에서 海麟에게 출가하여 법상종의 승려가 되고 해린을 따라 현화사에서 정진하였다.

 

문종은 24년(1070)에 여섯째 왕자를 소현의 문하에서 출가하도록 하였는데 바로 그가 법주사 주지가 되는 導生僧統이었다. 소현은 현화사, 해안사, 금산사를 오가며 법상종의 교리를 정리하고 전파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가 선종에게 요청한 바에 따라 현화사가

중창되었는데 선종 6년(1089)~숙종 원년(1096)에 걸쳐 완공되었다.

 

소현은 이자의가 계림공(숙종)에게 패배한 다음해인 숙종 원년 12월에 세상을 떴는데 숙종으로부터 王師를 추증받고 慧德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예종 6년(1111)에 비문이 새겨졌다.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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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고려사..권10 선종5년정월

66).. 고려사..권10 선종5년12월

67).. 고려사..권10 선종8년12월

68).. 고려사..권9 문종26년7월.31년정월

69).. 고려사..권88 후비1 선종.., 고려사..권127 이자의전,

70).. 고려사..권95 이자연전.., 고려사..권88 후비1 순종

71) 금구 금산사 혜덕왕사 진응탑비문(이지관,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고려편 3).., 가산불교문화연구원,1996). 이자연 부부가 소현을 낳은 私第가 위치한 闕南(대궐 남쪽) 佛嶺은 佛恩寺와 관련되지 않을까 싶다.

불은사는 대궐(황성) 밖 남쪽 인근의 유암산에 위치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권 4 개성부 상 불우 불은사. 불은사가 위치한 유암산(혹은 유암산의 불은사 부근)이 佛嶺이라 불려졌고 이자연의 사제는 유암산 기슭에 위치했다고 생각된다. 이자연의 손자인 이자겸이 딸 둘을 인종에게 연달아 바치자 인종은 담당관청에 명해 이자겸의 祖先이 거처했던 開明..을 脩葺하도록 하고 완공되자 重興..이라 개칭해 이자겸에게 들어가 거처 하도록 하였다... 고려사..권127 이자겸전. 이자겸祖先의개명택(→중흥택)은 곧 대궐남쪽佛嶺에 위치한 이자연의 사제를 가리켰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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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청주 王可道(..可道)의 딸과 결혼해 6남 4녀를 낳았다. 장자는 ..資仁인데 22세에 과거에 급제해 벼슬했으며, 다음은 ..資義...資忠...資孝순인데 문음으로 벼슬길에 올랐으며, 다음은 현화사 승려 世良이고, 막내 아들은 이정의 사망 때 어려서 이름이 없었는데 ..資禮(水州崔滋盛의 장인)로 보인다.72) 이정의 맏딸은 ....鑑의 嫡男인 ..義英과 혼인하였고, 다른 딸들은 이정의 사망 때 미혼이었는데 그 중 하나는 선종의 배우자가 되는 元信宮主이다.73) ..顥는 광양 평장사 ..廷俊(김양감의 부친)의 딸과 혼인해 ..資謙

과 ..資諒(..資訓)을 낳았고, ....는 ..資玄과 ..資德을 낳았다. ..碩의 딸은 광양 ..義元(....鑑의 아들)과 혼인하였는데, 그녀가 세상을 뜨자 김의원은 예부상서 지추밀원사 이자인의 딸과 재혼하였다.74)

 

인주 이씨는 이호가 김양감의 누이와 혼인하고, 이정이 김양감의 아들인 김의영을 사위로 맞이하고, 이석과 이자인(이정의 아들)이 김양감의 아들인 김의원을 사위로 맞이할 정도로 광양 김씨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75)

 

이자연의 문생으로 문하시중에까지 오른 광양 김양감의 선대는 본래 신라계통인데 신라말에 난을 피해 광양에 거주하였다고 한다.76) 이자연 집안과 김양감 집안은 신라 계통의 문벌이라는 공통점, 김양감이 이자연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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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최자성은 현종 때 수문하시중 판이부사를 지낸 水州(水原←..川) 崔士威(..海府阿干庾鬱行의 외손)의 증손이다. 최자성은 이자연의 손자인 左司..中..資禮의 딸과 혼인해 崔..抗과 崔....을 낳았다. 최유항은 工部尙書..彦林의딸과혼인하는데 이언림은 이자상의 손자, ....의아들이다... 고려묘지명집성..崔士威.崔

..抗.崔..묘지명,.. 고려사..권94 최사위전,.. 고려사..권98 최자성전. 수주최씨에대해서는박용운, 앞의 책, 제2부 제4장이 참고된다.

73).. 고려묘지명집성..이정묘지명

74).. 고려사..권95 이자연전,.. 고려묘지명집성....義元묘지명,.. 씨족원류..인천이씨.광주김씨. ..廷俊이..씨 족원류..광주김씨 편에는 ..貞俊으로 되어 있다.

75) 훗날 정변을 일으킨 이자겸은 자신의 重興..으로 들어가도록 인종을 강요했고 大卿..義元과 崔滋盛이 重興..執事로서 인종을 맞이하였다... 고려사..권127 이자겸전. 김의원과 최자성은 인척인 이자겸의 私第집사로서 이자겸을 도왔던 것이다.

76).. 고려묘지명집성..김의원 묘지명. 이에 따르면 광양 김씨는 김의원의 부친인 김양감이 문하시중 監修國史, 조부인 ..廷俊이 문하시랑평장사, 증조인 ..策이 좌복야 한림학사, 고조인 ..峻이 三重大匡, 김준의 부친인 ..佶은 重大匡을 지낸 문벌 명문이었다. ..고려사..권 97 김약온전과..씨족원류..광주김씨 편에 따르면 평장사를 지내고 문하시중으로 치사한 ..若溫(..義文)은 김양감의 아들이자 김의원과 형제였고, 김약온의 아들은 ..璇이고 사위는 파평 윤언이(윤관의 아들)였다. 병부상서 ..璇(..璿)의 딸은 인종과 혼인해 선평왕후가 되었고, 아들 ..貽永은 동래 鄭沆(鄭..의 부친)의 사위가 되었다. ..고려사..권 88 후비전 1 인종 선평왕후, ..고려사..권97 정항전. 김이영의 딸은 鄭筠(정중부의아들)과 혼인하였다... 고려사..권128 정중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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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이라는 점으로 인해 겹사돈으로 맺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자상은 ..預와 ....를 낳았다.

 

이예는 문종 때 과거에 급제해 尙書工部員外郞을 지냈고, 선종 때 예부시랑 한림학사, 知中樞院事병부상서 한림학사승지를 지냈고, 헌종초에 정당문학 형부상서를 지냈다. ..

 

資義의 黨으로 파면되었다가 예종이 즉위해 延和宮主(이예의 외손녀, 貞信賢妃의 딸)를 왕비로 삼으면서 그를 含元殿으로 불러 선물을 내리고 檢校太尉형부상서 정당문학을 제수하더니 중서시랑평장사로 승진시켰다.

 

이오는 과거에 급제해 直翰林院에 임명되고, 문종.순종.선종.헌종.숙종.예종을 섬겨 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守太保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判尙書..部.翰林院事修國史에 이르렀고 시호는 文良이었다. 그는 恬靜하고 욕심이 적어 俸祿외에는 産業을 일삼지 않았고 불교를 酷信하여 諸經章..를 두루 보고 금강경을 더욱 좋아해 스스로 호를 금강거사라 했다.77)

 

이예는 해주 시중 崔惟善(崔..의 아들)의 딸과 결혼해 ..公壽와 貞信賢妃(선종의 배우자)를 낳았고 上黨(청주) 王懋崇의 딸과 재혼하였으며, 이오는 ..彦林을 낳았다.78)

 

호부낭중 ..顥의 딸은 순종이 즉위한 후 들여서 왕비로 삼아 長慶宮主가 되었지만 순종이 세상을 뜬 후 外宮에서 宮奴와 사통하였다가 발각되어 폐위당하였다. 평장사 ..預의 딸은 선종이 國原公으로 있을 때 들여서 公妃로 삼았는데 敬和王后를 낳고 죽어 貞信賢妃로 불렸다.

 

공부상서 ..碩의 딸은 선종이 국원공으로 있을 때 들여서 延和宮妃라 불리는데 獻宗및 遂安..主를 낳았으며 선종이 즉위후에 왕비로 책봉하고 헌종이 즉위하여 태후로 올렸으니 思肅太后이다. 평장사 ....의 딸은 선종이 들여 元禧宮妃(元信宮主)라 불렸는데 漢山侯를 낳았다.79)

 

이자연의 세 딸이 문종의 배우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자연의 아들인 이호의 딸이 순종의 배우자, 이자연의 아들인 이석과 이정의 딸이 각각 선종의 배우자가 되었고, 이자상의 아들인 이예의 딸이 선종의 배우자가 되었으니, 이자연의 손녀 셋과 이자상의 손녀 하나, 즉 이한의 증손녀 넷이 국왕의 배우자가 된 것이었다.80) 이허겸의 외손녀 셋이 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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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고려사..권95 이자연전및첨부이예.이오전

78).. 고려묘지명집성..이공수묘지명.., 고려사..권95 이자연전첨부이예.이공수전.., 씨족원류..

79).. 고려사..권88 후비1 순종.선종편

80) 김당택은, 문종이 이자연의 딸들과 혼인한 이유는 왕실과 밀착되었을 뿐만 아니라 문신을 대표할만한 존재

인 이자연의 후원을 받아 문신들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서였고, 선종이 인주 이씨 집안의 딸과 혼인한 이유는

군사력을 장악한 동생 계림공(숙종) 등의 위협으로부터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고 하여, 인주 이씨가 왕

권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고려 문종~인종조 인주이씨의 정치적 역할..,.. 한국중세사회

의 제문제..(한국중세사학회, 2001), pp. 184.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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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배우자가 되고, 이자연의 딸 셋이 문종의 배우자가 된 데 이어 이호.이석.이정.이예의 딸이 국왕의 배우자가 되면서 인주 이씨는 확고하게 최고의 문벌명문으로 자김매김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정계를 좌우하는 정치세력을 형성하였다.

 

이는 경원이씨 貴戚의 성함이 지금이나 예전이나 비할 데가 드물었다는 최자(..보한집..상권)의 발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인주 이씨는 문종 15년 이자연 사후에도 그의 아들 이정, 이의, 이안과 이자상의 아들 이예와 이오가 재상으로서, 외척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또한 이자연의 손자인 이자겸, 이자량, 이자인, 이자의, 이자효, 이자현, 이자덕과 이자상의 손자인 이공수.이언림이 뒤를 받치고 있었는데, 특히 이자의는 선종 때 호부상서를 역임하고 헌종 때 중추원사에 올라 가문 신세대의 선봉으로 떠올랐다.

 

Ⅵ. 이자의와 계림공의 대결

 

문종이 37년(1083) 7월에 세상을 뜨고 태자인 순종이 즉위하지만 병약해 10월에 세상을 떠 친동생인 선종이 즉위하였고, 선종이 11년(1094) 5월에 46세로 세상을 뜨자 원자인 헌종(사숙태후 이씨의 아들)이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6월의 인사발령에서, 邵台輔...子威는 門下侍郞平章事, ..奭은 상서좌복야, ....는 참지정사, ..資義는 지중추원사, 崔思諏는 동지중추원사 좌산기상시에 임명되었다. 헌종 원년 정월에는 王國..가

權尙書兵部事에 임명되었고, 5월에는 유석이 판삼사사, ..預가 정당문학 형부상서, 이자의가 중추원사, 孫冠이 지중추원사 한림학사승지에 임명되었다.81)

 

인주이씨 집안의 이예, 이자의가 눈에 띈다.

헌종 때 정국은 헌종의 모후인 사숙태후(이석의 딸)가 섭정을 하는 가운데 중추원의 재상 이자의와 국왕의 숙부 계림공 熙가 권력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자의는 조카인 한산후를 헌종의 계승자로 밀었고, 계림공은 자신이 왕위를 차지하고자 하였다. 한산후는 선종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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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고려사..권10 헌종즉위년6월, 원년정월.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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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신궁주(이정의 딸, 이자의의 누이) 사이에 태어났으니 이자의에게 조카였고, 헌종의 배 다른 동생이었다. 이자의와 계림공의 대결은 결국 정변으로 번지는데..고려사..권 127 반역 1 이자의전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왕(헌종)이 幼弱하고 질병에 걸려 정사를 聽決하지 못하자 모후(사숙태후)가 國事를 專決하고 左右가 그 사이에서 依違하였다. 이자의가 貨財를 貪冒하고 無賴勇士를 모집해 騎射로써 일삼으며항상 말하기를,“ 주상이 병이있어 朝夕으로 보전하기 어려운데 外邸에서窺..하는자가 있으니 너희들은 마땅히 힘을 다해 한산후를 받들어 神器(보위)를 타인에게 돌아가도록 하지 말아라”라고 하고, 병사를 禁中에 모아 大事를 일으키고자 하였다.

 

때에 숙종이 계림공으로 明福宮에 있었는데 비밀리에 그것을 알고 평장사 邵台輔를 효유하여 말하기를,“ 국가 안위가 재상에 게 매어 있는데 지금 일이 급하니 공이 도모하라”라고 하였다. 소태보가 상장군 王國..로 하여금 병사를 이끌고 들어가 지키라고 하였다.

 

왕국모가 먼저 將士高義和로 하여금 이자의를 宣政門안에서 베도록 하고, 그 당여인 합문지후 張仲, 중추원당후관 崔忠伯등을 선정문 밖에서 주살하도록 하였다. 병사를 나누어 보내 이자의의 아들 注簿..綽과 흥왕사 大師智炤, (그밖에) 장군 崇列.澤春, 중랑장 郭希, 별장 成甫.成國, 교위 ..占, 대정 裴信등 17인을 잡아 모두 살해하였다.

 

평장사 ..子威, 少卿..義英, 司天少監黃忠現, 奉御黃榮, 少監徐晃, 시어사 王台紹, 祗候..資訓, 녹사 ..景泌.崔淵, 注簿全寵.王縝, 판관 ..滋令...彪, 司辰黃玩, 殿前承旨.. 正, 장군 ..甫.吳昌, 낭장 仇賢....., 별장 安鱗.珍奇, 산원 惟寵.崔幸...自成.侯善... 錢...玄孟.康希白.鄭貞佐등 50여 명을 南裔로 유배하고, 賊黨의 妻子를 籍沒하여 양계 州鎭의 노비로 삼았다.

 

내용을 정리하면 이자의가 먼저 용사를 모집해 금중에서 정변을 일으키려 하자, 명복궁에 있던 계림공이 소태보를 설득하고 소태보는 왕국모를 움직여 군대를 동원해 선정문 안과 밖에서 이자의와 그 당여를 살해하고 연루자들을 유배보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고려사..에 이 사건이‘이자의의 난’으로 기술되고 이자의가 반역전에 실리게 된 것인데 승자인 계림공(숙종)의 시각이 반영된 것이라 객관적이지 않다.

이자의는‘外邸’에서 왕위를 노리는 자가 있다고 항상 말했다고 하는데 여기서‘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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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계림궁은 계림공의 궁이고, 명복궁은 그 배우자인 명복궁주 ..氏의 궁이었다. 계림궁은..고려도경..에‘王府內城’즉 황성 서쪽에 있다고 되어 있다. 명복궁주 유씨에 대해서는..고려사..권 88 후비 1 숙종 明懿太后.. 氏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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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外宮’으로 계림궁 내지 명복궁에82) 거처한 계림공을 가리키니 계림공이 왕위를 노리는 반역을 꾀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자의는 병력을 동원해 大事를 도모하려 했다

는 애매한 혐의가 있을 뿐이고 실제로 병력을 움직여 공격을 한 것은 계림공 쪽이었다.

 

헌종 원년 7월에 이자의 일파가 제거되자 소태보는 權判..部事, 왕국모는 權判兵部事가 되었으며, 8월에 계림공 熙가 중서령이 되자 백관이 계림공의 저택으로 나아가 축하를 올렸다.83) 계림공이 명예직이지만 백관의 으뜸인 중서령이 되어 실권을 장악하고, 소태보가 권판이부사로 수상을, 왕국모가 권판병부사로 아상을 맡아 인사권과 군사권을 장악해 계림공을 뒷받침하니 어린 헌종은 권력을 상실하였다.

 

헌종이 원년 10월에 왕위에서 내려옴에 따라 계림공 즉 숙종이 왕위에 올랐으며, 헌종은 숙종 2년 윤2월에 1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84) 계림공이 먼저 병력을 동원했을 뿐만 아니라 이자의 일파를 제거한 데 그치지 않고 헌종을 물러나도록 해 왕위에 오른 점은 헌종 원년 7월의 사건이 이자의의 난이 아니라 계림공의 난(정변)이었음을 말해준다.

 

정변의 핵심현장이 宣政門의 안과 밖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선정문은 국왕이 신하와 함께 나날이 정사를 보는 편전인 宣政殿85)의 문이다. 선정전을 장악하면 국왕과 신하를 장악할 수 있었으니, 그래서 이자의의 병력이 선정문의 안과 밖에 배치되어 있었고 계림공의 병력이 그곳의 그들을 습격해 제거하고 국왕과 신하를 장악하였다.

 

왕국모에 의해서 유배된 자들 중에는 司天少監黃忠現, 司辰黃玩등 陰陽官인 日官이 더러 끼여 있는데, 이들은 이자의 측에 유리하고 계림공 측에 불리한 예언을 하였기 때문에 처벌받지 않았을까 싶다.

 

이자의가 계림공에 패배한 요인은 이자의 일파의 세력이 상대적으로 약했기 때문이었다. 이자연, 이정. 이안 등으로 이어지며 문종~선종 때를 지배했지만 선종 말기가 되면 이자연과 그 아들들은 출가한 韶顯(이자연의 아들)을 제외하고 대개 세상을 뜬 상태였다.

 

이자연이 문종 15년에 죽고, ....이 이자연보다 먼저 죽고, ....이 문종 31년에, ....는 순종 무렵에, ..顔이 선종 8년에 죽었으며, .......碩...顥는 중추원 재상도 되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죽었던 것으로 판단되었다. 게다가 친형으로 중추원부사를 지낸 ..資仁은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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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고려사..권10 헌종원년7월.8월

84).. 고려사..권10 헌종원년10월조

85) 김창현, 앞의 책, 제6장 제2절

86).. 고려사..권10 선종8년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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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8년 4월에 사망하였다.86) 이자의는 조부인 이자연은 물론 부친. 삼촌. 형이 사라진 상황이라 가족.친척 중에 기댈 곳은 사촌인 이자겸. 이자량(이자훈), 누이인 원신궁주, 사촌누이인 사숙태후 정도였으며, 게다가 이자겸은 순종의 왕비였던 여동생이 순종 사후 宮奴와 간통한 사건에 연좌되어 관직을 잃어 별 도움이 되지 못하였을 것이다.87)

 

인척도 유배명단에 낀 김의영 정도가 이자의 편에 섰을 뿐 대부분 간여하지 않았다. 헌종 치세에 이자연 계열에서는 중서문하성 재신은 아무도 없었으며, 중추원 재상도 이자의 밖에 없었다.

 

이자상 계열에서는 중서문하성 재신인 ..預가 이자의 당이라는 이유로 파면되는 것으로 보아 이자의에 어느 정도 협조적이었다고 보인다. 하지만 파면에 그친 것으로 보아 적극적 으로 돕지는 않았다고 생각되고, ....는 협조하지 않았다.88)

 

또한 헌종이 즉위할 무렵은 대대적인 세대교체의 시기였던 점도 이자의 일파에게 불리 하였다. 이자연 및 그 아들들과 함께 정계를 이끌었던 원로들도 대개 사망하거나 은퇴한 상태여서 이자의 일파를 도와줄 원로나 실력자가 부족하였다.

 

재상 중에서는 ..子威가 이자의와 交結하여 專權用事하였기 때문에 유배당했다는 기록89)으로 보아 이자위 정도가 이자의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다.

헌종이 즉위할 무렵의 세대교체는 정치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떠오르는 주요 인물은 소태보와 왕국모였고 계림공이 그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소태보는 선종 3년 8월에 형부상서로서 서북면 병마사에 임명되었고, 선종 4년 정월에 이부상서에 임명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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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이자겸의 연좌는..고려사..권 127 이자겸전 참조. 출가한 韶顯은 생존해 있었지만 조카 이자의와 어떤 관계를 유지했는지 분명치 않다.

88).. 고려사..권 95 이자연전 첨부 이예전. 이예의 동생인 ....는 인주 이씨가 소외되는 숙종 때에도 출세를 거듭해 숙종 원년 直門下省에서 숙종 9년 평장사에까지 오르니..( 고려사..권 11 숙종 원년 6월,.. 고려사..권 12 숙종 9년 7월), 이자의 편에 서지 않았던 것 같다. 김윤곤은, 이자의의 아들인 智炤가 흥왕사의 승려인 점에 착안해 이자의의 한산후 추대계획이 흥왕사 승병의 동원을 전제로 해서 진행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이자겸의세력기반에대하여..,.. 대구사학..(제10집, 1976), pp. 9.13. 추만호는이자의측이 숙종측에 비해 일방적이라 할만큼 열세여서 난을 일으킬 여력이 없었으니 이른바 이자의의 모반은 숙종 측의 날조이며 이자의 난의 僧軍기반설도 성립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자겸의 군사기반 이해(상)..,.. 사향..(제2집, 1985), pp. 33.46. 남인국은 앞의 책 pp. 71.75에서, 헌종을 기준으로 한산후가 왕위계승권을 가졌다고 생각한 이자의가 선종을 기준으로 왕위계승권을 가졌다고 생각한 숙종과 대립하다가 거사하였는데, 부계친족 내지 ..側的親屬關係를 가진 어느 쪽도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김당택은 앞의 글 pp. 186.189에서, 이자의는 선종으로부터 헌종을 부탁받았는데, 선종 때부터 군사력을 장악한 계림공이 헌종의 즉위와 더불어 실권을 장악해 헌종을 제거하려 하자 헌종을 보호하려다가 제거당했다고 파악하였다.

89).. 고려사절요..권6 헌종원년7월. 이자위가 專權用事하였다는 기록은 승자인 숙종측에서 과장했을 가능성이 크다.

90).. 고려사..권10 선종3년8월, 선종4년 정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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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선종 4년 12월에 崔奭이 (평장사) 판상서이부사에 임명되었으며, 7년 2월에 ..洪이 평장사 판병부사에 임명되었는데, 유홍은 계림공의 장인이었다 91) 계림공 세력이 유홍, 소태보 등을 중심으로 선종 초반에서 중반으로 접어드는 무렵 이래 문반과 무반의 인사권은 물론 병권까지 장악해 가는 형국이었다.

 

선종은 8년 9월에 賞春亭에 행차해 계림공, 부여공, 평장사 ..洪, 좌복야 소태보, 병부상서 徐靖, 상장군 王國.., 직문하성 高景, 한림학사 孫冠등을 불러 술자리를 마련하고 조용히 邊事를 물었다.92) 여기에 나오는 인물 중에 ..洪이 계림공의 장인이라는 점, 계림공.소태보.왕국모가 이자의를 몰아내는 핵심이 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태보는 선종 9년 2월에 참지정사가 되었다.93)

 

선종은 9년 3월에 萬機를 근심한 나머지 자못 몸이 아픔을 깨닫고 문덕전으로 옮겨 內醫에게 養性方藥을 올리게 하고는 문득 시를 지었는데 약효가 있든 없든 浮生이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으니 선함을 닦아 정토에 올라 부처에게 예배하기를 원한다는 내용이었다.94)

 

선종은 자신의 병이 심각하다는 것을 9년 3월 이전에 이미 알고 상춘정 모임에 동생인 계림공과 부여공을 불러 변방의 일을 자문하면서 그들에게 아들인 헌종을 부탁한 것이 아닐까 한다.

선종 9년 4월에는 참지정사 소태보가 權判西北面兵馬事兼中軍兵馬使, 중추원사 徐靖이 西北面兵馬使兼中軍兵馬使, 정당문학 ..上琦가 權判東北面兵馬事兼行營兵馬使, 동지중추원사 ....가 東北面兵馬使兼行營兵馬使에 임명되었다.95)

 

소태보와 서정이 서북면의 군권을, 김상기와 임개가 동북면의 군권을 장악한 것인데, 소태보와 서정은 상춘정 모임에 참여한 인물이었다. 이들의 임명에는 계림공과 부여공의 의견이 반영되었고 이로써 계림공이 이들을 통해 군권을 장악하는 등 실권을 장악했다고 생각된다.

 

선종 10년 5월에는 소태보가 중서시랑평장사 判刑.兵部事에, 서정이 상서좌복야 참지정사에, 김상기가 이부상서 참지정사 修國史에, ..奭이 예부상서 참지정사에, ....가 중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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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고려사..권10 선종4년12월.7년2월,.. 고려사..권88 후비1 숙종明懿太后. 판이부사崔奭은이자연의 문생이라 이자의와 가까웠을 터인데 이부상서 소태보의 견제를 받아 문반인사에서 실권을 그리 많이 행사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92).. 고려사..권10 선종8년9월

93).. 고려사..권10 선종9년2월

94).. 고려사..권10 선종9년3월

95).. 고려사..권10 선종9년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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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사 형부상서에, ..預가 지중추원사 한림학사승지에 임명되었는데96) 이들은 이예를 제외하고 대개 계림공에 호의적인 인물들로 계림공의 입김이 작용하였다고 생각된다.

 

선종 8년 11월에 유홍이 세상을 뜬97) 후 판병부사는 공석이었거나 누군가 權職으로 띠었거나 하다가 10년 5월에 소태보가 차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판형부사까지 겸임하였다.

 

소태보가 실력자였음과 병권 및 무반 인사권을 계림공 세력이 계속 장악하였음이 드러나는데 계림공의 후원이 작용하였을 것이다.

 

결국 선종은 11년 윤4월 임진일에 병세가 악화되니, 갑오일에 재신, 추밀, 종실이 연영전 북문에 나아가 문안을 드렸지만 5월 임인일에 연영전 內寢에서 46세로 세상을 떴으며

그날 원자인 헌종이 遺命을 받들어 왕위에 올랐다.98)

 

헌종 즉위년 6월에 소태보와 ..子威는 문하시랑평장사에, ..奭은 상서좌복야에, ....는 참지정사에, 이자의는 지중추원사에, 崔思諏는 동지중추원사 좌산기상시에 임명되었다.

 

원년 정월에는 왕국모가 權尙書兵部事에 임명되었으며, 5월에는 ..奭이 판삼사사에, ..預가 정당문학 형부상서에, 이자의가 중추원사에, 孫冠이 지중추원사 한림학사승지에 임명되었다.99)

 

이중에 이자의도 끼어 있지만 그에게 협조한 인물은 이자위, 이예밖에 없었으니 역시 계림공의 입김이 작용하였다고 생각된다.

 

특히 왕국모가 아상에 해당하고 병권을 장악하는 권상서병부사에 임명된 점에 눈길이 가는데, 이는 소태보가 자신의 판상서병부사직을 왕국모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判尙書.. 部事내지 權判尙書..部事를 띠었음을 시사한다.100)

 

선종 3년 4월에 衛尉卿에 임명되고, 선종 8년(1091) 9월까지도 상장군으로 나타났던 왕국모101)가 갑자기 여러 단계를 건너뛰어 헌종 원년(1095) 정월에 권판병부사에 임명된 일은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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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고려사..권10 선종10년5월

97).. 고려사..권10 선종8년11월

98).. 고려사..권10 선종11년윤4월.5월, 헌종즉위년5월. 선종의潛邸부터측근으로서 선종때 승선이 된 청주 출신 郭尙은 잠저의 숙종이 불러 犀帶를 주어도 사양하였고, 선종이 위독해져 간병할 때 숙종이 병문안 왔는데 들여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고려사..권 97 곽상전. 계림공(숙종)은, 형 선종이 자신에게 왕위를 계승하도록 유언하기를 바라서 병문안 했을 터인데, 선종이 만나주지 않고 아들인 헌종에게 왕위계승을 유언하자 정변에 박차를 가했다고 생각된다.

99).. 고려사..권10 헌종즉위년6월, 원년정월.5월

100) 이 무렵, 선종 후반기에 평장사 판이부사를 역임한 崔奭이 나타나지 않는데, 그가 이자연의 문생이라는 점에서 계림공 측에 의해 실각당했을 가능성이 있다.

101).. 고려사..권10 선종3년4월.8년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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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모가 권상서병부사에 임명되자 왕실이 미약해 권력이 무장에게 돌아갔으니 政을 장차 어찌 할 것인가102) 하는 이야기가 나왔다는 데에서도 느껴지니 이미 계림공의 정변이 진행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103)

 

서열상으로는 당연히 이자위가 판병부사에 임명되어야 하는 데 그렇지 못했으니 이는 이자위가 이자의 편이어서 소외되어 벌어진 현상이라 보여진다.

 

계림공은 선종~헌종대에 걸쳐 유홍, 소태보, 왕국모 등을 내세워 인사권과 군사권을 장악해 보위에 오를 준비를 마쳤으며 그것을 이자의 일파가 저지하려 하자 무력을 동원해 제거하고 헌종을 몰아내 보위에 올랐다고 정리된다.

 

헌종 때 정변의 성격은 선종이 총애하는 동생 다섯을 가졌음에도 왕위를 孺子에게 전한 것이 난을 불렀다는 당시 사람들의 기롱104) 에서 엿볼 수 있다.

 

인주 이씨는 이정의 아들인 이자의, 이자의의 아들인 ..綽과 智炤등을 잃고, 지지세력을 대표하는 ..子威, 이호의 아들인 ..資訓(..資諒), 이정의 사위인 ..義英(김양감의 아들) 등이 유배당하고, 이예가 파면당한 데다가 숙종이 인주 이씨를 멀리하면서 타격을 받

았다.

 

고려사회는 정변이 일어나도 가문끼리 친인척이 서로 얽혀 다 처벌하기 어려웠고 숙종 자신도 이자연의 외손이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인주 이씨는 대부분 살아남아 어느 정도 세력을 유지하였으며, 숙종이 세상을 뜨고 그 아들 예종이 이자겸의 딸을 배우자로 맞아들이면서 다시 도약하게 된다.

 

Ⅶ. 맺음말

 

인주 이씨는 가야 계열 내지 신라 계열로 인주 지역으로 이주해 거처하고 지방세력인 호족으로 성장하였다. 경순왕 김부는 신라를 태조 왕건에게 바쳐 왕건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인주 이씨의 시조로 간주되는 이허겸은 김부의 외손녀와 결혼하였으니 이허겸 집안은 왕건의 후삼국 통일전쟁에 일정하게 기여하였다고 생각된다.

 

이허겸은 안산 김은부를 사위로 맞이하였는데 김은부의 딸 셋이 현종의 배우자가 되었다. 신라 계열에 속하는 현종은 피난시절에 김은부가 보여준 왕에 대한 충성심과 이허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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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고려사..권95 소태보전첨부왕국모전

103) 서성호는, 비교적 일찍부터 계림공의 세력이 형성되어 있었고 왕위 획득을 위한 준비도 주도면밀하였다고

보았다... 숙종대정국의추이와정치세력....역사와현실..(9, 1993), pp. 15.20

104).. 고려사절요..권6 헌종원년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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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계열이라는 점 때문에 김은부의 딸들 즉 이허겸의 외손들과 혼인을 하였다. 이허겸 외손녀들의 현종과의 혼인은 인주 이씨 가문을 흥성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현종~선종 때는 고려의 중흥기이자 전성기였는데 인주 이씨는 이 시기에 뚜렷한 모습을 드러내 정국을 주도하였다. 이허겸의 아들인 ..翰은 현종 무렵 중추 재상을 지냈고 아들 이자연과 이자상을 낳았다.

 

이자연은 과거에 장원급제해 현종, 덕종, 정종 때 비서직인 승선, 언론직인 대간, 인사직인 이부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더니 정종 때 중추원의 재상에 오르고, 문종 때 중서문하성에 들어가 참지정사, 평장사를 거쳐 최고직인 문하시중 판이부사에 올라 권력을 장악하였는데 윤리와 법제에 바탕한 원칙을 중시하였다.

 

이자연은 딸 셋을 문종의 배우자로 만들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자연의 아들중에 이정, 이의, 이안이 재상을 지내며 정국을 주도하였고, 아들 중에 이호의 딸이 순종의 배우자, 이석과 이정의 딸이 선종의 배우자가 되었으며, 이자상의 아들인 이예의 딸이 선종의 배우자가 되었다.

 

그 결과 가장 힘있는 문벌명문으로 성장한 인주 이씨는 중부 세력을 이끌면서 신라계 세력을 끌어들여 정치세력을 형성하였다.

선종이 아파 눕고 그 아들 헌종의 나이가 어리자 선종의 동생인 계림공(숙종)과 이자연의 손자인 이자의 사이에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헌종이 왕위에 올랐지만 숙부 계림공이 이미 소태보와 왕국모를 내세워 실권을 장악한 상태였다. 계림공은 왕국모가 거느린 군사력을 이용해 이자의 세력을 공격해 제거하고 헌종을 몰아내 왕위에 올랐다.

 

이자의 세력은 이자연과 그 아들들이 대개 사망하고 그로 인해 동조자들이 많지 않아 계림공 세력에 비해 확연히 열세를 면치 못했기 때문에 패배하였다. 인주 이씨는 이자의의 몰락과 숙종의 왕위 획득으로 타격을 받지만 예종 때 가서 세력을 회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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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Political Affairs of Koryeo and Inju Yi Family in the 11th Century

Kim, Chang-hyun

Yi Family moved to, settled down in Inju and grew up to be a powerful family. King Gyeongsun,

Kim Bu handed over Shilla to Taejo Wanggeon and he got married to Wanggeon's daughter. Yi

Heogyeom married a daughter of Kim Bu's daughter. This was considered that the family of Yi

Heogyeom had dedicated to the war for the unification of the Late Three States.

Yi Heogyeom made Kim Eunbu a son-in-law. King Hyunjong who belonged to Shilla group got

married to Eunbu's three daughters because Eunbu was loyalty to him and Heogyeom's ancestors were

from Shilla. This paved the honor to the family of Yi Heogyeom.

It was the golden age as well as the restoration period during successive reigns from King Hyeonjong

to King Seonjong, and Yi Family of Yinju led the political situation clearly. The son of Yi Heogyeom,

Yi Han worked for Jungchuwon, who had two sons, Yi Jayeon and Yi Jasang. Yi Jayeon got important

jobs under the reign of Hyeonjong, Deokjong and Jeongjong. He worked for Jungchuwon and

Jungseomunhaseong in the reign of Jeongjong and Munjong, making much account of the principles

with political power.

Yi Jayeon was very influential as he made his three daughters King Munjong's wives. Yi Jeong, Yi

Eui, Yi Ann of his sons led the political power at important positions. The daughter of Jayeon's son, Yi

Ho made a wife of King Sunjong. The daughters of Jayeon's sons, Yi Seok and Yi Jeong made wives of

King Seonjong. The daughter of Jasang's son, Yi Ye was the wife of King Seonjong. As the result Yi

Family from Inju became the most powerful and noblest family and it maintained political power, with

leading the group of the central districts and that of Shilla.

As King Seonjong was ill in bed and his son, Heonjong was too young, the struggle for power was

between Seonjong's little brother, Gyerimgong(Sukjong) and Yi Jaeui, the grandson of Yi Jayeon.

Though Heonjong ascended the throne, it was the situation that his uncle, Gyerimgong already held real

power. After Gyerimgong attacked and got rid of the power of Yi Jaeui with using military forces, he

ascended the throne by driving out Heonjong. The group of Yi Jaeui failed in the struggle because Yi

Jayeon and most of his sons had died and there were not so many followers.

 

Key-Words : Yi Jayeon, Yinju Yi Family, the group of the central districts, Shilla group, the golden age,

a noble family, Yi Jaeui, Gyerimgong

 

 

1. 인천시의 연혁

 

 

 - 인천시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문학산, 계양산 등에서 발견된 각종 석기류들로 보아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 이후부터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시내 학익동, 주안동, 문학동 등에 지석묘가

 

분포되어 있어 청동기 시대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에는 부족세력이 자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문헌상으로 삼국사기지리지(三國史記地理志),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등에 의하면

 

인천은 삼국시대 초기에는 백제에 속하여 미추홀(彌鄒忽)이었으며,

 

고구려시대(高句麗時代)에는 매소홀현(買小忽懸)이 설치되었다.

 

신라 진흥왕때 신라의 영토가 되었고 통일신라시대인 경덕왕 16년(757)에 소성현(邵城縣)으로 개칭되어

 

율진국의 영토가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소성현이 수주(樹州)에 속하였다가 숙종(1096∼1105)조에 모후 인예태후의 출생지라하여

 

경원군(慶源郡)으로 개칭 승격하여 인종조(1122∼1146)에 모후 출생지라 하여 인주(仁州)로 다시 승격되었으며,

 

공양왕 2년(1390)에 칠대어향(七代御鄕)이라하여 경원부(慶源付)로 승격 개칭되었다.

 

조선조 들어 태조1년(1392) 경원부가 인주(仁州)로 환원되었다가 태종 13년(1413)에 인천군(仁川郡)으로

 

다시 격하되었는데 세조 6년(1460)에 이르러 세종비 소현왕후의 외향이라 하여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로

 

승격되어 말기까지 이어졌다.

 

고종32년(1895) 지방관제의 개정에 따라 전국을 23부로 나누자 인천은 인천부로 개편되고 건양원년(1896)에

 

다시 경기도 인천부(仁川郡)가 되었으며, 1910년 주권을 상실하자 조선총독부 관제에 의한 부(府)가 되었고

 

부세확장에 따라 부평(富平)의 대부분을 포함하였다.

 

광복후 1949년 8월 15일 지방자치제가 실시됨에 따라 인천부는 시로 개칭되고 1981년 인천직할시로 승격하였으며,

 

1989년 1월 1일 인천광역시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같은해 3월 1일 강화군, 옹진군, 김포군 검단면을 통합하여

 

954㎢의 면적과 235만명의 인구를 가진 전국 제일의 광역시가 되었으며,

 

99년말 현재 인천의 면적은 958.24㎢이고 인구는 2,509,086명이다.

 

 

 

2. 지명 유래

 

 

 - 인천이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한 것은 조선 초기 태종 13년(1413)이다.

 

삼국시대 초기에는 인천을 미추홀(彌鄒忽)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지리지』에 "매소홀(買召忽)현을 일명 미추홀이라 한다"라고 되어있는데,

 

매소홀은 고구려시대의 인천의 이름이다.

 

고려사지리지』에 "인주(仁州)는 원래 고구려의 매소홀현이며 일명 미추홀이라 한다"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서 미추홀"미"나 매소홀의 "매"는 물(水)의 뜻이며 "홀"은 성(城)이나 골로 해석되고

 

"추"나 "소"는 모두 사잇소리 "ㅅ"으로 풀이하고 있다.

 

고구려 시대에 매소홀이라 불리던 인천이 신라의 경덕왕 16년(757)에 이르러 소성현(邵城縣)으로 바뀌었다.

 

경덕왕이 신라의 제도나 관직을 중국식으로 고치는 한편, 토박이 말로 되어 있는 땅이름을 모두 그 뜻에

 

해당하는 한자어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고려 숙종(1095∼1105)에 이르러 소성현은 경원군(慶源郡)으로 개칭, 승격되었는데

 

이는 인천이 숙종의 어머니 인예(仁睿) 순덕태후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그 뒤 인종(1122∼1146)때에는 인종의 어머니 순덕왕후(仁州李氏)의 고향이 됨으로 "인주(仁州)"로 개칭되었다.

 

고려말 공양왕 2년(1390)에 이르러 인천은 경원부로 개칭, 승격되었는데,

 

이는 인천이 7대 어향(七代御鄕)이었기 때문이다.

 

7대어향이란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는 7대동안 인천이 왕의 외향이거나

 

왕비의 고향에 해당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조선초기 태조원년(1392)에 인주로 환원되고 태종 13년(1413)에 이르러

 

모든 군이나 현에 '州'자로 바꾸는 바람에 인주가 물에 가깝다하여 '인천'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인천의 명칭은 한자풀이식의 '어진내(仁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인주이씨에서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高麗贈尙書左僕射上柱國邵城縣開國侯李公許謙神道碑銘幷序

 

余嘗謂爲人肇祖創可繼之業樹不拔之基孫麗不億歲垂百古.有若天保而神護者.是孰使之然哉.及乎閱世旣久歷數今古.人未有爲家國自致者.適見其升沈興衰之循環瞬目則.輒瞿然心語曰曷爲其然也嗟夫天長地久.人多如雨點.其來也無謂.其去也無憑.風烟之聚散而已.草樹之腐朽而已.乃若豊功偉烈爲國楨榦胙之土而命之氏封其灂而立其宗者.或不能千百之一二以千百一二之人.爲能保有閥閱.傳之屢百代計以鉅萬戶爲餘人所誦慕焉則其必有修之豊積之厚.不期然而然也.歲乙亥之秋仁川李氏大宗會長南浩翁以僉宗議袖譜牒世德等諸文獻而踵余熊津之靑儒堂謁其始祖顯刻之役閱歲餘文未克就不惟不遑所不敢爾.其請不但已.謹受而卒業按舊譜公諱許謙實爲邵城氏一世之祖焉.邵城氏遠昉於駕洛國首露王王立許氏黃玉爲后有子十人比其薨也.王哀戚甚且感后言賜二子以后姓.金之爲許是已.又按家錄有諱奇以首露王之裔.新羅景德王朝官至兵馬使大匡.唐玄宗天寶十四年乙未冬.有祿山亂.翌年二月奉使至蜀.帝嘉甚.贈之以五古一篇而.益致引重眷戀之意.丁酉復從帝還都.賜皇姓李氏封邵城伯.許復爲李而.或稱以李許複姓焉.厥後失系考諸文正公之氐所撰皇考文忠公公壽誌文稱邵城伯爲十三代祖文忠之於公爲玄孫則邵城間公九代也家錄以奇儉波貴浚系之公上而書以獨子則.於公五代也壬戌譜及邵城世德幷系以九代與上誌文所載代數不無契合而若其諱與事蹟則有不免杞宋之莫徵矣無寧舊譜不從諸說而斷以公爲一世者.豈亦闕疑謹重之道也歟噫武成經也鄒夫子止云取二三策而已.以是銘公則庶免爲杜撰之歸矣公生於羅季事麗朝.歷大官襲封邵城伯後贈尙書左僕射上柱國邵城縣開國侯食邑一千五百戶生卒年月及官階履歷不著.藏在仁川文鶴山下看雉島辛坐原.術者謂龜形配慶州金氏父工部侍郞.樂浪君殷說祖敬順王墓與公同窆.嗣後大昌.是州之縣而郡.郡而府.未始不由於仁川氏.雖尋常行過.知其爲名墓碩塚而指點焉矜式焉苾芬孝祀勿替引之.寧不休哉長子翰.中樞副使.累贈門下侍中諡文景二子訥大將軍三子瑱右僕射女適安山金殷傅知中樞戶部尙書中樞使贈上柱國安山郡開國侯長房孫子淵推誠佐世保社功臣門下侍中上柱國慶源郡開國公食邑三千戶配享文宗廟庭子祥尙書右僕射歷事三朝忠義堂堂子若孫幷登台鼎人有作詩賀之者曰庭下芝蘭三宰相門前桃李十公卿次房孫成幹上將軍檢校太子小保三房孫聰顯禮部尙書曾以下歷擧其著顯者而內外椒房.之親.及女壻若而人別爲之採入.古無例也.蓋有非常之人則宜乎史蹟之非常而文不容苟焉而已子淵八男頲守太傅進太師門下侍中慶源伯諡貞憲頔殿中少監碩兵部侍郞東北面兵馬使工部尙書顗門下侍郞平章事韶顯家出法名眞應諡惠德王師顥門下侍郞平章事守太傅贈慶源伯諡景德顓贈門下侍郞平章事守太傅顔門下侍郞平章事諡襄愼曰預歷事六朝翰林學士政堂文學進中書侍郞平章事諡文顯曰䫨號金剛居士文德殿太學士判尙書吏部事監修國史門下侍郞平章事諡文良卽子祥二男也曰資仁兵部侍郞右諫議大夫尙書左丞中樞院副使曰資義中樞院使宣宗朝奉使如宋有聲譽曰資玄號息菴又號希夷諡眞樂登第爲大樂署丞棄官入淸平山蔬食布衣樂道終身.退溪先生詩以序之亟稱其淸修苦節曰資德諡莊懿中書侍郞平章事曰資謙門下侍中中書令朝鮮國公曰資諒守司空中書侍郞平章事曰公壽字元老諡文忠天資宏厚兒時外祖崔文和公惟善撫其頂曰此兒當爲大器.及長力學登第推忠衛社同德功臣開府儀同三司門下侍中上柱國曰彦林工部尙書右僕射曰軾金紫光祿大夫尙書左僕射叅知政事判尙書戶部事曰之氐卽文正公政堂文學守司空左僕射判西京留守事有直節能文章嘗侍從.西都有詩膾炙人口至朝鮮世祖朝採入樂府曰之茂門下侍郞平章事曰光縉中書侍郞平章事諡貞懿曰仁老號雙明齋文章鳴世.明宗朝擢魁科以書狀官如宋謁考亭夫子得聞爲學之要所著有銀臺雙明破閑三集行于世曰藏用政堂文學中書侍郞平章事太子太傅門下侍中諡文眞文章絶倫一時大作多出其手元宗甲子從王如元時元要我援軍緊迫不已.公敏於專對.事竟得解元帝親賜宴至再曰作臣官門下侍中痛斥妖僧.被貶黜曰.榲號永慕齋中顯大夫典醫監與鄭圃隱李石灘李遁村諸賢相善性純孝有米櫃之感事聞國王遣按廉使竪雙碑以褒之曰元紘登第有詩聲政堂文學麗革以節流于仁川有喜晴及.新亭詩載在權陽村集其子爚監正太祖龍飛守罔僕義灌文科太宗朝京畿咸鏡兩道監司陞資憲吏曹判書曰賢佐大匡輔國崇祿大夫慶城府院君曰萬英仁川府院君曰文和號烏川斥佛崇儒左叅贊議政府事兼藝文館大提學贈領議政諡恭度有六男位幷卿宰曰若稽古坤殿曰元成太后曰元惠太后曰元平王妃卽金殷傅之三女而於公獅孫也曰仁睿太后曁仁敬仁節兩王妃子淵之女而間公三代也曰元信王后頲之女曰思肅太后碩之女曰長慶王妃顥之女曰貞信王妃預之女而其女爲敬和王妃者間公四五代也曰文敬太后延德王妃福昌王妃資謙之三女而間五代也曰恭讓世子嬪元紘之女而間十二代也至漢朝坡平尹璠女爲貞熹王后寔恭度之外孫而間十五代也東床之達而爲人始祖與中顯祖者則曰尹瓘籍坡平門下侍中判尙書鈴平縣開國伯諡文肅成幹之壻也曰金義元籍光山檢校太子太師戶部尙書兼三司使特進金紫光祿大夫諡忠貞碩之壻也曰南平文公元平章事諡貞敬顗之壻也曰江陵金仁存檢校太師門下侍中諡文成顥之壻也若夫源遠而派益分代久而孫愈繁則餘他科宦簪笏忠孝德學之蔚有聲望者多不能盡記嗚呼.詩不云乎維嶽降神生甫及申麗興之初公迺應運挺生巍勳嘉謨裕乎己而傳諸後.世臣林立而.食列鼎.賢媛輩出而.母萬民.儼乎爲宗廟之主祏.社稷之源府實東方有史之所未曾有也.猗亦盛矣曾於讎政時公墓近爲農郊.至光復後自政府區劃城市.陵谷之變.朝不慮夕.吁其滄桑之貿遷有如是矣迺者.諸苗裔同心協謀.旣認許當局而淨化塋域.又復醵出巨자無遠或忽無人或漏而.齋舍凉燠增制移建.旣落之.治豊珉以侈墓噫如今板蕩.滔滔是遺親忘本.此豈易究而易圖者哉將見仁川氏之興未艾而.向所稱孫麗不億傳之屢百代者.幸余言之靡錯也是宜銘銘曰

仁川之李出自首露.孰配至尊黃玉許后后感王衷.二子從許.阿飱諱奇.奉使天寶奔命于蜀.祿山可討.錫之皇姓.帝衷是誘.杞宋莫徵.發歎宣父公生麗興寔天啓佑封之邵城錫之民戶公爲一世昭昭舊譜.子姓內外高步雲路貂蟬滿堂孰非公輔.賢媛鍾毓十數國母.猗公厚蔭.以庇以燾.有菀佳城遵彼鹹鹵.百世在前萬代在後.長發其祥受天之祜.我書于石其辭不誣

歲舍丙子流火節         月城 李鍾洛 撰

 

해설

고려증상서좌복야상주국소성현개국후이공허겸신도비명병서

 

 

 나는 일찍이 말하기를 「한 씨족의 始祖가 되어 이어갈 수 있는 偉業을 創造하고 확고한 터전을 수립하여 불억(不億:많은 수효를 말함)의 後孫으로 悠久한 歲月에 걸쳐 하늘과 신의 保護를 받은 것과 같기에는 그 누가 시켜서 그러한 것인가」라고 했다. 급기야는 많은 世故를 겪으면서 古今의 사람들을 가늠해 보니 거의가 家庭이나 國家를 위하여 자기의 할 수 있는 힘을 다하는 자가 없음으로서 덧없는 興亡盛衰가 瞬息間의 循環反覆을 보게 되었다. 나는 두려운 듯이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어찌하여 그렇게 되었나?」

  아! 天地는 유구하다 빗방울처럼 많은 사람들은 意義없이 왔다가 根據없이 가게되니 風烟과 같이 모였다 흩어지고 草樹와 같이 썪어 없어질 뿐이다. 그러한 와중에서 풍성하고도 偉大한 勳業으로서 國家의 틀이 되어 임금이 土地와 성씨를 내려주며 爵을 封하고 宗을 세울 정도인 사람은 아마도 千,百명 가운데서 하나 둘도 채 못될 것이다. 천 백분의 一, 二 밖에 안되는 소수만의 사람으로서 훌륭한 門閥을 保有하여 누백대에 전해지고 몇萬戶로 헤아려서 餘他사람들의 欽慕대상이 되기에는 반드시 豊富한 修養과 累積된 德望의 土臺에서 그렇게 되길 바라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된 것이다.

  乙亥年 가을에 仁川李氏大宗會長南浩氏가 僉宗의 決議에 따라 譜牒과 邵域世德등  모든 文獻을 가지고 公州의 靑儒堂으로 나를 찾아와 始祖의 신도비문을 要請했다. 一年이 지나 도록 글이 이뤄지지 못했으니 겨를을 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不敢했기 때문이었는데 끊임없는 要請에 삼가 붓을 들게 되었다. 舊譜를 살피건대 公의 諱는 許謙이니 실로 인천이씨의 一世祖가 된다. 인천이씨는 駕洛國 首露王에서 비롯되었는데 王이 許氏 諱 黃玉으로 王后를 삼아 十兄弟의 아들을 두었더니 돌아감에 미처 王은 심히 哀悼하고 또한 后의 말씀에 感動하여 두 아들에게 모성을 따르게   하니 金氏로서 許氏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또한 家錄을 살피건대 諱 奇는 首露王의 後孫으로서 新羅 景德王 때 벼슬은 兵馬使大匡에 이르렀고 唐나라 玄宗 天寶十四年乙未年 겨울에 安祿山의 난리가 일어나자 이듬해 二月에 使臣의 명을 받들고 巴蜀에 이르니 唐帝는 勞苦를 가상히 여겨 五言古詩一篇을 기증하여 引重과 眷戀의  뜻을 전하고 다음해 丁酉年에 唐帝를 따라 還都하자 皇帝의 姓 李氏를 내려주고 邵城伯을 封하니 許氏에서 다시 李氏가 되었으며 혹은 李 許 複姓으로 일컬어 지기도 했으나 그후 失系하였다. 文正公 諱 之氐께서 撰述한 아버지 文忠公 公壽의 誌文을 참고로 한다면 邵城伯 諱 奇를 十三代祖라 稱하였으니 文忠公은 公에게 玄孫이 되며 邵城伯은 공에게 九代祖가 된다. 家錄에는 奇, 儉, 波, 貴, 浚으로서 公以上의 계대를 대고 五代 모두가 獨子로 되었으며 그대로라면 邵城伯은 公에게 五代祖가 된다. 壬戌譜 및 邵城世德에는 모두 邵城伯과의 九代로 記錄되었으니 위 誌文의 所載와 代數는 一致가 되나 諱字나 事實에 대하여는 기송(杞宋 : 문헌의 증거가 없는 것을 말함)을 證據할 수 없으니 차라리 舊譜에선 다른 記錄과 달리 공을 一世로 斷定한 것이며 역시 의문되는 것을 제쳐놓고 愼重을 기하는 道理인가 보다.

  아! 무성(武成 : 書經의 篇名)은 聖經임에도 孟子께선 그 중에서 「몇몇 부분만을 取擇한다 라고」말씀하셨으니 이러한 의미에서 공의 신도비명을 가늠한다면 거의 두찬(杜撰 : 典據가 확실치 못한 저술)이라는 結果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공은 新羅末에 誕生하여 高麗朝에서 벼슬을 하여 大官을 지내고 邵城伯에 襲封되고 상서좌복야 상주국 소성현 개국후의 벼슬에 贈職되고 食邑 一千五百戶를 下賜받았다. 生年月日과 官階履歷은 記錄이 없고 墓는 仁川 文鶴山 아래 看雉島 辛坐의 자리에 있으니 風水家에선 거북의 形이라고 말한다. 配는 慶州金氏니 아버지는 工部侍郞 樂浪君 殷說이요 할아버지는 敬順王이며 墓는 公과 合窆이다.

그후 後孫들이 크게 繁昌하여 본 고을이 縣에서 郡. 郡에서 府로 昇格되기까지에는 모두가 仁川李氏와의 關係가 없지 않으며 비록 보통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이 墓가 名墓임을 알 게 되어 지점(指點 : 손가락으로 가리킴)과 긍식(矜式 : 공경하여 표본으로 삼음)을 가하고 祭祀가 지금까지 이어지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長子 翰은 中樞副使로 여러번 門下侍中에 증직되고 諡文景이요. 二子 訥은 大將軍이요. 三子 瑱은 右僕射요. 女는 安山 金殷傅에게 出嫁하니 知中樞 戶部尙書 中樞使로 문하시중 상주국 安山郡 開國侯에 증직되었다. 長房孫 子淵은 推誠佐世保社功臣 門下侍中 상주국 慶源府 開國公이며 食邑 三千戶를 下賜하고 文宗廟庭에 配享되었다. 다음 子祥은 尙書右僕射로 歷事三朝하여 忠義가 堂堂하고 아들 손자 모두가 宰相의 자리에 오르니 어느 사람은 詩를 지어 祝賀하기를 「뜰아래 芝蘭은 세 宰相이요. 문앞에 桃李는 열 公卿이라」하였다.  (芝蘭과 桃李는 子孫 또는 兄弟를 가리킴) 二房孫 成幹은 上將軍 檢校太子小保요. 三房孫 聰顯은 禮部尙書이다.

曾孫이하부터는 가장 顯達한 분만을 列擧하고 內外 遠近孫에서 王妃의 至親 및 女壻 몇몇 분을 별도로 採入하니 古例에 없다. 그러나 非常한 사람은 史蹟이 非常함으로 文字가 簡略할 뿐 만은 없다.

  子淵의 八男에 頲은 守太傅進太師侍中慶源伯諡貞憲이며 頔은 殿中少監이요. 碩은 兵部侍郞東北面兵馬使工部尙書요 顗는 문하시랑평장사요 韶顯은 집을 떠나 佛門에 들어가니 法名은 眞應이요 諡는 惠德王師이다. 顥는 문하시랑평장사 수태부 경원백이며 諡는 景德이다. 顓은 贈門下侍郞平章事 守太傅요 顔은 문하시랑평장사이며 諡는 襄愼이다. 預는 歷事六朝하여 翰林學士 政堂文學 進中書侍郞平章事이며 諡는 文顯이다. 오는 號 金剛居士이며 文德殿太學士 判尙書吏部事 監修國史 문하시랑평장사요 諡는 文良이니 곧 子祥의 二男이다. 資仁은 兵部侍郞 右諫議大夫 尙書左丞 中樞院副使요 資義는 중추원사이며 宣宗朝때 宋나라에 使臣으로 가서 남다른 名聲과 칭찬이 있었다. 資玄은 號 息菴 또는 希夷諡眞樂이니 科擧에 及第하여 大樂署丞이 되었다가 벼슬을 버리고 淸平山에 들어가서 菜食과 布衣로 道를 즐거워 하면서 平生을 마치니 退溪先生은 詩에다 序文을 곁드려 그의 淸修苦節을 特別히 稱述했다. 資德은 중서시랑평장사이며 諡는 莊懿이다. 資謙은 門下侍中 中書令 朝鮮國公이요 資諒은 守司空 중서시랑평장사요 公壽의 字는 元老요 諡는 文忠이며 天稟이 宏厚하니 아이 때 外祖 崔文和公 惟善은 그의 이마를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이 아이는 마땅히 큰 그릇이 될 것이라」하더니 成長하자 學問에 힘쓰고 大科에 及第하여 推忠衛社 同德功臣 開府儀同三司 문하시중 상주국이요 彦林은 공부상서 우복야요 軾은 金紫光祿大夫 상서좌복야 叅知政事 判尙書戶部事요 之氐는 즉 文正公이니 정당문학수사공 좌복야 判西京留守事이며 直節이 있고 文章에 能하여 일찍이 임금을 모시고 서도(西都 : 平壤)에 갔다가 詩를 지어 한 세상에 알려졌더니 조선 世祖朝에 이르러 樂府에 採入되었다.

  之茂는 문하시랑평장사요 光縉은 중서시랑평장사요 諡는 貞懿이다. 仁老는 號 雙明齋이니 文章으로 세상에 울렸고 明宗朝에 壯元及第하여 書狀官의 職責으로서 宋나라에 갔다가 朱子를 뵙고 學問의 要領을 배우니 著述에는 銀臺, 雙明, 破閒등 세 文集이 刊行되어 퍼졌다.

藏用은 정당문학 중서시랑평장사 태자태부 문하시중이요 諡는 文眞이니 文章이 普通에 뛰어나서 한 時代의 큰 著作 그 수중에서 많이 나왔다. 元宗 甲子年에 王을 따라 元나라에 가니 이때 元나라에선 高麗에게 救援兵을 要請했다. 끊임없는 긴박한 상황에도 公는 전대(專對 : 외국에 사신으로 가서 황제와 독단적으로 응답함)에 敏捷하므로 事態는 마침내 풀렸고 元帝는 친히 두차례의 宴會를 베풀었다. 作臣은 문하시중이니 妖僧을 痛斥하다가 貶黜을 당했다. 榲은 號 永慕齋요 벼슬은 중현대부 典醫監이니 鄭圃隱 李石灘 李遁村 諸賢과 더불어 서로 親善하고 性稟이 純孝하여 쌀궤의 感應이 있으니 사실이 알려지자 國王은 按廉使를 보내어 두 碑石을 세워 표창했다. 元紘은 科擧에 及第하고 詩를 잘 지었으며 정당문학을 歷任했다. 고려가 滅亡하자 忠節로서 仁川에 流配되어 유명한 喜晴 및 新亭이라는 題目의 詩를 지으니 權陽村의 文集에 실려 있다. 그의 두 아들에 爚은 監正이니 李太祖가 革命을 하자 臣僕이 아니되겠다는 義理를 지켰으며 灌은 문과에 급제하여 太宗朝에 京畿, 咸鏡 兩道 監司를 역임하고 資憲 吏曹判書에 승진되었다. 賢佐는 대광보국 숭록대부 慶城府院君이요 曰萬英은 仁川君이고 文和는 號 烏川이니 斥佛崇儒하고 左參贊 議政府事兼藝文館大提學을 歷任했으며 領議政에 贈職되고 諡는 恭度이며 六男을 낳으니 모두가 卿宰相의 자리에 올랐다.

  歷代의 王妃를 열거한다면 元成太后, 元惠太后, 元平王妃는 곧 金殷傅의 세 따님이며 公에게 外孫이 된다.  仁睿太后 및 仁敬, 仁節 두 왕비는 子淵의 따님이며 공에게 四世가 된다.

元信王后는 頲의 따님이요 思肅太后는 碩의 따님이요 長慶王妃는 顥의 따님이요 貞信王妃는 預의 따님이며 그의 따님이 敬和王妃가 되었으니 공에게 五六世가 된다. 文敬太后,  延德王妃, 福昌王妃는 資謙의 세 따님이며 공에게 六世가 되고 恭讓世子嬪은 元紘의 따님이며 공에게 十三世가 된다. 朝鮮朝에 이르러 坡平 尹璠의 따님이 貞熹王后가 되었으니 恭度公의 外孫이며 공에게 十六世가 된다. 동상(東床 : 사위의 별칭)으로서 顯達하여 始祖 또는 中顯祖가 된 분을 열거한다면 坡平 尹瓘은 문하시중 판상서 鈴平縣 開國伯이요 諡는 文肅이니 成幹의 사위요 光山 金義元은 檢校太子太師 戶部尙書兼三司使 特進 金紫光祿大夫이며 諡는 忠貞이니 碩의 사위요 南平 文公元은 평장사요 諡는 貞敬이니 顗의 사위요 江凌 金仁存은 검교태사 문하시중이요 諡는 文成이니 顥의 사위이다. 그밖에 세대가 멀어지고 分派子孫이 더욱 번창함에 따라 科擧, 仕宦, 忠孝, 德學으로서 훌륭한 名望이 있는 분들도 다 기록지 못한다.

  아! 詩經에 이르지 않았던가. 「山嶽이 神을 내려 甫와 申을(甫 : 甫侯. 申 : 申伯. 周宣王의 賢臣.)  낳았다」라고 하였다. 고려가 興旺하던 초기에 공이 運에 맞게 빼어나서 偉大한 勳業과 훌륭한 計劃을 자신에 여유있게 간직하고 후손에게 전수하여 숲의 나무처럼 늘어선  세신(世臣 : 대대로 한 王을 섬긴 공로가 있는 신하)은 경제상의 國祿을 받게 되고 연달아 나온 賢淑한 女人은 萬民의 國母가 되어 어엿이 宗廟의 神主가 되고 社稷의 本府가 되었으니 실로 東方의 역사에서 없었던 일이라 하겠다. 아! 거룩하도다.

  일찍기 倭政때에 山所의 附近이 農土로 造成되었고 光復後 政府計劃으로 都市가 됨에 능곡지변(陵谷之變 : 산소 보존의 위태로움)이 朝夕에 박두하게 되었으니 아! 덧없는 滄桑의 變遷 이와 같구려

  이제 그의 후손들이 同心協謀하여 當局의 認許를 받아 墓域을 淨化하고 또다시 巨金을 醵出하는데 먼 始祖라서 소홀함이 없고 많은 자손들 누락된 사람이 없게 하며 재실의 몸채와 행랑채 모든 부속건물을 增築移建하고 落成式을 하자 큰 碑石으로 墓를 華麗하게 장식하니 아! 이제와 같은 混亂한 세상 물흐르듯 걷잡을 수 없음에 어버이를 버리고 先祖를 忘却하게 되었구나! 이처럼 거룩하고도 훌륭한 일 어찌 쉽사리 圖謀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仁川氏 장래의 運興을 볼 수 있으며 위에서 열거한 수없이 많은 후손으로 屢百代에 전해 진다는 나의 말이 착오가 아니었음을 새삼스레 다행으로 여겨진다. 이로서 銘에 가름하니 銘에 이르되

  인천이씨는 首露王에서 나왔어라.  그 누가 임금의 배우자였나? 휘 黃玉이신 허씨 왕후로세. 왕후께선 王의 마음 감동시키니, 두 아들 母姓따라 허씨 되었군. 阿飱벼슬을 한 諱 奇는 당나라 天寶년에 사신으로 갔었네 命令에 따라 巴蜀 安祿山을 토벌키 위해서였지.

皇姓의 李氏을 사성하니 황제의 마음 역시 勸誘되었나봐. 杞守의 문헌증거 없으나 선보(宣甫: 당나라 때 孔子를 추존한 칭호)께서 마냥 죄하 셨네. 공이 탄생하자 고려가 흥왕하였으니 이 모두 하늘이 도와주신거야. 邵城縣에 봉하고 食邑의 民戶를 하사하였지. 공이 一世祖가 된 사실 舊譜에 환하게 나타났도다. 內外 후손들 환로에 높이 뛰니 堂에 꽉찬 초선(貂蟬 : 담비의 꼬리와 매미의 날개. 高官의 冠의 장식) 그 누가 공보(公輔 : 三公四輔.  즉 임금을 보필하는 大官)의 적임 아니런가.  빼어난 賢媛 十數名의 국모로다. 아! 공의 음덕이 감쌋기 때문이겠지. 樹木 우거진 가성(佳城 : 분묘의 이칭) 저 해변가에 위치하였네. 기왕의 百世와 미래의 萬代에 무궁한 發祥으로 하늘이 주신 복 받으리로다. 내가 쓴 碑文 그내용 거짓 아니로세.

歲丙子 流火節          月城  李鍾洛 撰

 

 참고: 김해김씨(金海金氏)의 시조인 가락국 수로왕(首露王)의 후예로 전하며, 수로왕의 장자(長子) 계통은 김해김씨(金海金氏)이고, 차자(次子)는 어머니 허태후(許太后)의 성을 이어받아 허씨가 되었는데, 인천이씨(仁川李氏)는 허씨에서 갈리었다.
   후에 인천 이씨, 허씨, 김해 김씨는 같은 혈족이라 종친회명을 '가락중앙종친회'로 하였다.

 

 

  

 시조공묘비                                                 시조공 신도비

 

 

옛날옛적에 인천은
죽은어머니가 산 아들보다...
1636년, 청나라의 군대가 조선을 침략했다. 인조 임금은 왕비와 왕자들을 강화도로 먼저 피난 보낸 후, 자신은 남한산성을 근거지로 하여 청나라와 대치했다. 그러나 얼마 후 강화도가 청나라에 함락되고 곧이어 인조 임금도 청나라에게 항복을 하고 말았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청나라로 끌려갔고 강화도의 선비 강해수의 가족 세 명도 그 속에 있었다. 강해수의 어머니와 동생 그리고 아들이 청나라로 잡혀간 것이다. 강해수는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밤잠을 설치는 날이 많아졌다. 그런데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당시 청나라에서는 외국에서 납치해 온 외국인들을 팔고 사는 노예 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곳의 돈 많은 사람들은 잡혀 온 외국인들을 노예로 사 갔다. 이 소식을 들은 강해수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그렇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의 어머니와 동생, 그리고 내 자식까지 모두 데려오고 말겠다.”

노예 시장이 열리는 날이 강화도에도 알려졌고 끌려간 사람들의 가족들은 이 경매에 참여하기에 이르렀다. 강해수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가족들을 데려오기 위해 집안의 논과 밭을 팔아서 잎담배를 샀다. 당시 만주의 노예 시장에서는 조선의 잎담배값이 비싸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을 데려올 돈으로 잎담배를 사 가지고 가면 세 사람을 데려올 수가 있었던 것이다.

강해수는 부푼 마음으로 만주 땅의 심양을 향해 길을 나섰다. 강화도에서 만주의 심양까지 가려면 배를 타고 육지로 나가서 보름 이상을 걸어야만 간신히 도달할 수 있었다. 고생고생 끝에 심양에 도착한 강해수는 그만 실망을 하고 말았다. 자기와 같은 처지의 조선인들이 너나할 것 없이 잎담배를 사 가지고 와 그곳의 잎담배 값이 폭락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잎담배를 팔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강해수가 잎담배를 팔아서 손에 쥔 것은 겨우 두사람 몫의 돈이었다.


강해수는 하늘을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가 바라보는 하늘에는 나이 많은 어머니와 동생,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의 모습이 번갈아 나타났다.

“이 돈으로 누굴 데려간단 말인가?”

그의 고민은 점점 커져갔다. 그러나 강해수는 마음을 가다듬고 가족들이 나오는 시장을 찾아갔다. 거기서 강해수는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을 들었다. 가족들이 납치 당하여 청나라로 오는 도중에 나이 드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더욱 가슴 아팠던 것은 청나라 상인들이 어머니의 위패를 만들어 놓고 한 사람 몫의 돈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 사람들이 조상의 위패를 몹시 중요시한다는 것을 청나라 상인들이 알고, 그 위패를 이용하여 돈을 벌려는 속셈이었다.

강해수는 커다란 고민에 빠졌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위패와 그의 동생과 자식 등 셋 중에 둘을 선택해야 되는 순간이었다. 담배를 붙여 물고 한참을 생각한 강해수는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어머니의 위패와 동생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자식은 머나먼 이국 땅에 홀로 두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물론 그에게도 피를 나눈 자식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존재였다. 그러나 당시 선비가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나라에 대한 충(忠)과 부모에 대한 효(孝)였다.

강화도의 선비 강해수는 비록 죽은 어머니이지만 부모에 대한 효를 다하고자 어머니의 위패를 택했다. 그리고 그 어머니의 자식, 곧 그의 동생을 택했다. 자기가 낳은 친자식을 추운 바람이 몰아치는 만주 벌판에 홀로 남겨 두고 돌아와야 하는 가슴 아픈 선택을 한 것이다. 훗날, 이러한 강해수의 지극한 효성이 나라에 알려졌고 그의 집에는 홍살문이 내려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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