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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김 內系外系

고려성원록 왕씨족보(안산김씨 김정경)

by 연송 김환수 2008. 4. 26.

 1798년 刊 '고려聖源錄' 女系 후손까지 모두 수록  지배계층 인맥 밝힐 자료

 

 



고려시대 왕족을 중심으로 한 지배계층의 인맥 분포를 통해 사회.정치상황을 입체적으로 파악하는 데 획기적으로 기여할 국보급 유물 '고려성원록(高麗聖源錄)'이 남한에서도 발굴됐다.

고려 왕족이었던 개성 왕씨 족보의 첫째권이기도 한 '고려성원록'은 지난해 북한 당국이 국보로 지정해 평양 중앙역사박물관에 전시 중이라고 발표해 화제가 됐던 책이다.

이 책에는 고려 태조 왕건의 증조부에서부터 조선 개국 직후의 후손까지 왕씨 가계가 여계(女系)까지 포함해 상세히 기록돼 있다.

이 책을 발굴한 김기덕(건국대 고려사.45)교수는 "지난해 북한에서 이 책이 화제가 된 것을 보고, 필사본이 아니기 때문에 국내에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여러 곳을 수소문하던 중 개성왕씨중앙종친회 관계자에게서 이 책을 찾아냈다"고 말했다.

金교수는 "1798년(조선 정조 22년)에 처음 펴낸 '고려성원록'이전의 개성 왕씨 족보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책이 현재로선 가장 오래되고 풍부한 고려 왕조에 대한 기록"이라고 주장했다.

총 63장 1백26쪽 목판본인 '고려성원록'(36×23㎝.한지)의 가장 큰 특징은 왕자를 중심으로 한남계(男系) 즉 본손(本孫)만 기록해 놓은 기존의 '고려사(高麗史)'와 달리 여계, 즉 외손(外孫)까지 모두 기록해 놓았다는 점이다.

배영대 기자 balan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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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성원록' 발견 의미]

왕실의 딸·며느리도 실려 고려 문벌 전체 파악 가능
北서 국보지정된 책과 동일 판본으로 추정
조선때 王氏 탄압 심해 18세기에야 편찬된 듯

 

성원록에 나타난 남평군 왕화의 사위 안산김씨 연성군(안산군) 김정경


▶ 『고려성원록』의 내용중 여성을 기록한 부분.

      기존의 『고려사』에는 여성에 대한 기록이 없다.

 

'성원록(聖源錄)'이란 왕실의 족보를 말한다.

고려 왕실의 가계도를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고려성원록(高麗聖源錄)'에는 남계(男系)뿐 아니라 여계(女系), 즉 딸쪽 후손인 외손(外孫)까지 모두 수록해 놓은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현존하는 '고려사'(1451년)의 '종실열전'에는 남계만 나오기 때문에 고려 귀족사회의 가장 큰 문벌인 왕실과 연결된 엘리트 인맥의 전체상을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문제는 이번에 발굴된 '고려성원록'이 북한에서 지난해 국보로 지정된 책과 동일한 판본인지다.

또 고려 왕실에 대한 자세한 기록인 '고려성원록'이 왜 조선 후기인 1798년(정조 22년)에 와서야 편찬되었는가 하는 점도 설명되어야 한다.

◇ '고려성원록'의 진위 여부

'고려성원록'을 발굴하고 고려 왕실의 가계도를 여계를 포함해 도표화시켜 논문을 발표한 김기덕 박사는 "남계만을 기록한 기존의 '고려사'와 비교했고, 여계 부분은 해당 성씨의 족보와 일일이 대조해 기록의 정확성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 논문은 최근 계간지 '역사와 현실' 제43호에 발표됐다.

김박사는 "기록 내용과 서지학적 검토를 통해 볼 때 이 책이 북한에서 지난해 국보로 지정한 1798년 판본과 동일하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그는 서문과 발문에 조선시대 정조대왕 이전까지의 기록만 나오고, 책의 가운데 접힌 부분인 판심(版心)과 표지문양, 그리고 서체를 그 증거로 제시했다.

고려사 전문가 박종기(국민대 사학과)교수는 "아직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이번에 발굴된 '고려성원록'을 일단 공론화해 많은 전문가들의 검토를 거칠 필요가 있다"면서 "이 책 이전의 자료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고려 왕족에 대한 가장 풍부한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의 진가가 확인된다면 고려사 연구에 획기적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 '고려성원록'은 왜 조선후기에 편찬되었나

이 문제는 고려시대에 관한 자료가 왜 절대 부족한가라는 문제와 직결된다.

김기덕 박사는 "왕족을 지낸 개성 왕씨가 현재 2만명밖에 없다는 점을 통해서 조선시대에 왕씨가 얼마나 혹독한 탄압을 받았는지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조선이 개국한 후 왕씨들이 탄압을 피해 외가의 성씨로 바꾸거나 한자의 획수를 첨가해 옥(玉), 전(田), 전(全), 김(金), 금(琴), 마(馬)씨 등으로 성을 바꿔 사용한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탄압은 조선 후기까지 계속되었다.

"조선 말 고종 때 외가의 성인 박(朴)씨를 칭한 왕가의 후손이 복성(復姓)을 건의했다가 죽임을 당한 일도 있다"는 박씨 후손의 증언을 김박사는 논문에서 밝히고 있다.

개성 왕씨에 대한 탄압은 지난해 북한에서 '고려성원록'을 국보로 지정하며 발표한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북한 조선중앙방송은 고려 태조 왕건의 후손이라고 밝힌 왕명찬이라는 노인이 '고려성원록'을 기증하면서 "조선시대 탄압 받은 왕씨 일족은 신분을 숨기고 살아왔으며, 왕족 중 한 사람이 족보를 갖고 깊은 산골에 숨어 보관해 왔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했다.

김박사는 바로 이런 탄압 때문에 고려에 대한 기록이 절대 부족하게 되었으며, '고려성원록'이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야 편찬되었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이 때의 '고려성원록'의 근거가 되는 자료가 무엇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김박사는 고려시대 당시에 기록된 왕실기록을 근거로 일부 보완해 편찬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성원록'에 나온 기록의 정확성은 개성 왕씨의 탄압과도 관련된다고 김박사는 말했다.

그러한 탄압과 감시의 상황에서 고려왕실과 혼인으로 연결되는 사대부 집안의 이름을 거짓으로 올릴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 나오는 여러 인물들을 당시 족보기록과 비교한 결과 그 정확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 '고려성원록'의 가치

'고려성원록'에 기록된 고려 귀족가문의 풍부한 인맥은 당시 시대상황을 살펴보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김박사는 "이 책이 고려후기에서 조선초에 걸치는 시기에 여계가 주로 기록되고, 그 이전은 그렇지 못하다는 아쉬움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도 고려말 조선초의 정치상황을 보다 입체적으로 파악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개성 왕씨 족보책은 1798년에 '고려성원록'이 처음 나온 이후 1991년까지 7차례에 걸쳐 간행되었다. 그때마다 '고려성원록'은 항상 맨 앞에 수록됐었다.

그러나 1차 자료인 1798년판 '고려성원록'이 발견되지 않아 족보 내용의 정확성을 보증할 길이 없었다.

더욱이 '고려성원록'이 어떤 의미를 갖는 책인지를 연구하는 전문가조차 부족했다.

관련 전문가들의 검토를 거쳐 이번에 발굴된 '고려성원록'이 바로 개성 왕씨 족보에 수록되어 왔던 '고려성원록'의 1798년판 원자료임이 입증된다면,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가려진 부분을 밝혀내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