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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방/역사 조선시대

벽장에서 걸어나온 조선시대 관문서들

by 연송 김환수 2008. 4. 26.

 

대전광역시와 대전광역시교육청이 후원하고 예사랑회가 주관하는 <조선의 관문서전>이 9월 26일부터 대전 한밭도서관 1층 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다.

<조선의 관문서전>에는 예사랑회 회원들이 수집한 과거 답안지인 과지, 국왕이 신하에게 내리는 명령인 칙명, 호주가 가족 상황을 적어 지방 수령에게 신고하던 서류인 호구단자 등 총 50점이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다.

민끼리 주고받는 사적인 문서와는 달리 관문서는 딱딱한 성격을 띠기 마련이다. 그러나 <임실화민 하인명의 소지에 대한 관청 판결>이나 별감 박필리를 처벌하라는 관이 내린 <첩>등은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어 무척 흥미롭다.

제24회 한밭문화제의  일환으로 열리고 있는 이번 전시회는 10월 3일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 남조봉의 답안지 임청류이부지(왼쪽), 조희백의 과거 시험 답안지(오른쪽).
ⓒ 안병기
과지(科紙)는 과거답안지의 준말이다.

조선시대에는 관료가 되려면 과거를 거쳐야 했다. 과거에는 문과,  잡과가 있다.  잡과는 역관,  의관 등 기술관료를 뽑는 시험이다. 잡과는 일반적으로 중인들만 응시하는 것이어서 문과나 무과에 비해 격이 낮았다.

문과와 무과 중에서는 문과가 훨씬 중요했다. 그래서 과거라 하면 주로 문과를 가리켰다. 문과는 다시 소과와 대과로 분류됐다. 생원과 진사를 선발하는 시험인 소과를 거쳐  생원이나 진사가 된 뒤 당시  최고학부였던  성균관에 진학한 뒤 치르는 시험이 대과다.

과거는 3년에 한 번씩 치르는 식년시가 원칙이었으나 경사가 있을 때 치르는 증광시, 별시, 왕이 성균관에 갔을 때 왕앞에서 치르는 알성시 등이 있었다.

▲ 숙부인 남씨를 의법전거하여 정부인에 올린다는 칙명(1905, 왼쪽), 임병기를 통정대부로 승차시킨다는 칙명(1902, 오른쪽).
ⓒ 안병기
칙명은 왕의 명령이다. 처음에는 왕지(王旨)라 했으나 한말에는 칙명이라고도 하였다. 숙부인은 조선시대 정3품 당하관 및 종3품 문무관의 처에게   처에게 내리는 작호이다. 칙명은 숙인 이씨를  정. 종 2품 문무관의 처에 해당하는 정부인으로 승차시켰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통훈대부는 문관 정3품의 하계이다. 칙명은 통훈대부인 임병기를 정3품의 상계인 통정대부로 승차시킨다는 내용이다.

▲ 의금부도사 교지(1891, 왼쪽), 향반들이 관청에 약장을 지명하는 소에 대한 관허문서(경오년, 오른쪽).
ⓒ 안병기
교지(敎旨)는 임금이 4품 이상의 관원에게 내리는 명령이다.

조선 시대에 향약 단체의 우두머리인 약장을 지명하는 향유사약장품목(鄕有司約長稟目)에 대해서 관청이 허가해주는  문서이다.

▲ 호구단자 보은(1888년, 왼쪽), 연안인 이용 임실화민 하인명의 소지에 대한 관청 판결(오른쪽).
ⓒ 안병기
호구단자는 조선시대 때 호주가 가족 상황을 적어 지방 수령에게 신고하던 서류이다. 소지(所志)는 백성들이 관에 올린 진정서나 청원서를 말한다. 소지류는 당사자나 나 가문의 이해관계가 달려 있기 때문에 오래도록 보관되는 문서이다. 따라서 지금 남아 있는 고문서 가운데  토지문기 다음으로 많은 양이 남아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 전기의 것은 연호를 써서 소지를 올려 연대를 쉽게 알 수 있지만, 조선 중기 이후의 소지는 간지(干支)만을 썼기 때문에 소지를 올린 사람이 유명인이거나 어떤 가문의 문서 안에 포함되어 있는 소지를 제외하면 연대를 알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보은 이용규의 호구단자는 상당히 의미있는 자료인 셈이다.

화민이란 왕의 교화를 받는 백성이란 뜻이다.

▲ 관하 첩(1784년).
ⓒ 안병기
첩이란 관청의 책임자가 관속에게 내리는 문서를 말하며  별감은 조선 시대에, 유향소에 속한 직책으로 고을의 좌수에 버금가던 자리다.  별감 박필리를 엄벌하라는 첩이다.

조선시대 과거시험 답안지 공개

연합뉴스 | 기사입력 2007.01.23 18:45

(익산=연합뉴스) 홍인철 기자 = 조선 정조때로 추정되는 과거시험의 과문(답안지)이 공개됐다.

23일 전북 익산에 사는 김인기(69.고서화 수집가)씨는 "20여년전 서울서 구입한 수집품을 정리하다 조선시대 과거시험 답안지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조선 정조말기 전남 보성출신의 선인복(宣仁馥)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답안지는 가로 96Cm, 세로 132Cm의 크기로 시제는 '나에게 묻거늘, 소요부(邵堯夫:중국의 유교학자)도 벼슬길에 나갈 수 있는가?'로 돼있다.

선인복은 이 같은 시제에 "할 일이 있는 이 세상에 한가로움을 즐기는 것보다 정사(政事)에 협력해 밝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 낫다"라는 요지의 답을 했다.

이 답안지 중앙에는 당시 시험관들이 황토에 염료를 섞어 '삼중(三中)'이라고 표기(종합평가)했고 군데군데 황토색으로 채점한 흔적이 남아있으며 응시자(선인복)의 이름은 채점관들이 알지 못하도록 좌측 하단에 봉인돼 있다.

당시는 합격자를 상(上), 중(中), 하(下), 이상(二上), 이중(二中), 이하(二下), 삼상(三上), 삼중(三中), 삼하(三下) 등 9등급으로 나눈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 평가에 따르면 선인복은 '삼중'을 받아 문과시험에 합격한 것으로 보인다.  

이 답안지를 감정한 원광대 나종우(원광대 박물관장)교수는 "여러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야 하겠지만 진품으로 판단된다"면서 "과거시험이 끝난 후 답안지를 제출해야 하는데 원본이 유출돼 남아있는 것은 사료적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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