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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대진 동헌(多大鎭 東軒) - 수호각(睡虎閣)

by 연송 김환수 2021. 8. 14.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될 당시 다대포 객사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가 2020년 7월 29일 부산시 문화재 위원회 심의에서 다대진 동헌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894년에 편찬된 다대진지의 경우 객사는 회원관(懷遠館)이고, 진헌은 수호각(睡虎閣)으로 기록되어 있다.

동헌(東軒)은 조선시대 지방관서에서 첨사가 정무를 보던 건물로 아사(衙舍)·군아(郡衙)·현아(縣衙)·시사청(視事廳) 등으로 부르기도 하였고 다대진성 내에 있던 관아건물 중에서 유일한 건축유구(建築遺構)로 지금은 몰운대 내의 부산광역시 사하구 몰운대1길 73(다대동 산144)에 옮겨져 있다.

 


원래는 관아 일곽의 하단 구역에 위치했던 동헌 건물로 수호각(睡虎閣)이라 불렀다.

다대진이 혁파된 후 공가(公家)로 방치되던 것을 다대포실용학교의 교사(校舍)로 사용되다가 다시 다대초등학교 교사로 전용되었고 1970년 다대초등학교 운동장 정지공사 때 지금 위치로 이전 복원되었는데 이때 학교 관계자들이 건물을 객사로 기록하였다.

 

부산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3호(1972. 6. 26)로 지정될 당시 다대포 객사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가 2020년 7월 부산시 문화재 위원회 심의에서 다대진 동헌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2020.07.29)

 


다대진 동헌은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좌측 첫째 칸과 우측 첫째 칸은 온돌방으로, 가운데 세 칸은 우물마루를 칸 대청으로 꾸몄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대포 객사에서 다대진 동헌으로 명칭은 바뀌었지만, 1972년에 객사로 지정되어 현재까지 객사를 나타내는 회원관(懷遠館) 현판이 붙어 있다.

 

2020년 다대진 동헌으로 명칭을 변경하였기에 이제는 회원관 현판을 내리고, 동헌을 나타내는 수호각(睡虎閣)현판으로 교체하기 위하여 새로운 현판(편액)을 제작하고 있다.

 

다대포 객사 회원관(懷遠館) 현판의 뜻은 "멀리 있는 님을 그리다". 즉, 임금을 향한 충성심을 나타낸다.

 

참고로 조선 시대 북경(北京)으로 가는 사신 일행이 머물던 요동성(遼東城) 안정문(安定門) 밖에 위치한 숙소이름이 회원관(懷遠館)이다.

회원관 숙소의 명칭은 ‘회덕원래(懷德遠來, 덕을 그리워하여 멀리서 온다)’에서 유래하였다.

회원관의 건립 경위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고 1570년(선조 3)에 대대적인 중수가 있었던 기록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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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운대, 낙조분수 - 부산 다대포 (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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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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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자료는 2005년 다대포 객사의 당위성을 주장한 기고문입니다.

15년이 지난 2020년에 다대진 동헌으로 객사의 명칭이 바뀌게 되었는데요.

참고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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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기고] 다대포 객사의 당위성 / 양맹준 (문화재감정관)

기사입력 2005.09.22. 오후 12:12 최종수정 2005.09.22. 오후 12:12

최근 부산을 가꾸는 모임과 다대문화연구회 등이 다대포객사를 첨사청 또는 동헌이라고 주장하는 데 대해 몇가지 사실을 밝혀두고자 한다.

 

조선시대의 객사는 정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익사를 두고 앞으로 중문과 외문을 두며 규모가 큰 경우에는 외문에 이어 옆으로 행랑채인 무랑(廡廊)으로 구성된다.

 

정당은 전패를 안치하고 초하루와 보름에 국왕께 망배를 드리는 곳이고 익사는 공무로 찾아온 사람들의 숙소로 이용되었다.

 

그래서 정당은 바닥에 돌 또는 전돌을 깔거나 마루로 만들었고 익사는 온돌로 되어있다.

 

이에 대해 동헌은 감사나 병사,수사와 목민관인 수령의 집무소로 지방관의 생활처소인 서헌(西軒-內衙)에 대칭되어 이르는 말이다.

 

동래부의 경우 동헌인 충신당이 10칸인데 비하여 객사인 봉래관은 39칸이었고 초량왜관은 동헌격인 성신당이 10칸인데 비해 초량객사는 33칸이었다.

 

부산포진도 진헌(鎭軒)인 검소루가 8칸인데 객사인 공진관은 익사를 합쳐 36칸이나 되었다.

 

이처럼 국왕공간의 객사가 관리의 집무공간인 아헌보다 규모가 컸던 것이다.

 

1894년에 편찬된 다대진지의 경우 객사는 회원관(懷遠館)이고 진헌은 수호각(睡虎閣)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그 크기는 밝혀져 있지 않다.

 

시대별로나 신분별로 영조척에 다소 차이가 있으나 조선시대에 약6㎡가 1칸임을 감안할 때 논란의 건물은 적어도 십수칸 이상의 규모이다.

 

동래부의 동헌이 10칸이고 부산포진의 진헌이 8칸인데 비하여 성곽의 크기로나 직책상 상대적으로 더 작을 수밖에 없는 다대포진에서 문제의 건물은 진헌이 될 수가 없고 구조면이나 기능적으로 객사 외의 다른 건물일 수도 없다.

 

또 현재의 건물이 전체적으로 마루를 짠 흔적은 있으나 동헌과 같이 중앙3칸은 마루이고 양측1~2칸은 온돌구조가 아닌 점도 객사임을 입증하고 있다.

 

객사는 가장 큰 건물이고 활용공간이 독립적으로 넓은 까닭에 관아기능이 없어지면서 학교로 바뀐 경우가 많았다.

 

다대포객사는 다대초등학교의 모체가 되었으며 동래부객사는 내성초등학교,동래감리서객사는 봉래초등학교,부산포객사는 성남초등학교의 전신이 되었던 것이다.

 

청(廳)이란 용어는 조선시대부터 중앙관제에 일부 쓰였으며 지방에서는 모임이 되는 장소라는 뜻으로 향청, 작청, 질청, 군관청, 장관청 등으로 통용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여러 관직명에 청을 붙이기 시작하여 이사관청, 관리관청, 부산부청 등으로 관공서의 일반명사처럼 되었다.

 

첨사청이라는 명칭은 부산시청을 부산시장청이라는 것이라 부르는 것과 같아서 공식적인 명칭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첨사의 집무소는 진헌 또는 영헌(營軒)으로 엄밀한 의미에서는 동헌이라 할 수 없다.

 

다대포객사는 부산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될 당시에 인근사람들이 부르는 명칭을 그대로 따라 다대첨사청으로 지정되었던 것이었다.

 

이 명칭이 합당치 못하다고 1978년 부산시 문화재위원회에서 심의를 하여 다대포객사로 바르게 고친 것이다.

 

이 건물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지을 때에 상량문을 지은 역사학자인 고 정중환 박사는 다대첨사청이란 명칭을 그대로 쓸 수가 없어 다대진영청이라 하여 다대포진영의 관아건물로 표기하였으며, 1980년 중수 시에도 고 정중환 선생이 상량문을 지었는데 아예 객사의 옛 현판 명칭을 그대로 써 '회원관중수기문'이라 적시하였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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