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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역은 르네상스 양식의 멋진 건물이었다.

by 연송 김환수 2021. 1. 14.

부산역은 1910년에 문을 열었는데 일본 도쿄 신역사보다는 4년이 앞선다.

 

부산역은 서울역처럼 르네상스 양식의 멋진 건물이었으나 대화재로 인하여 철거되었다.

철거된 부산역은 붉은 벽돌과 화강암 외벽으로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이며 일본 건축가 다쓰노 긴고(辰野金吾)가 설계를 했다.

 

현재 중구 중앙동4가 부산무역회관 근처에 세워졌던 옛 부산역사(驛舍)의 상층부는 호텔로 사용했었다.

이후 부산역은 임시역과 부산진역을 전전하다가 1969년 6월에 지금의 동구 초량동 현재의 위치에 새 자리를 잡았다.

 

1910년대 후반 부산정거장

 

1920년대 부산정거장

 

1929년 후반 부산정거장

 

부산정거장 컬러엽서

 

크고 아름답던 부산역이 1953년 11월 27~29일 역전 피난민촌에서 화재가 발생해 많은 사람들이 불타죽거나 집을 잃었으며 부산 중앙동에 있던 부산역, 부산공회당, 부산일보 본사, 부산방송국, 부산우체국 등 많은 근대 건축물들이 소실되었고, 부산역 옆에 있던 부산세관은 소실되지 않았다.

 

화재 진압 후 상황을 찍은 것이 있는데 폭격 맞은 것 처럼 처참하다.

화재당시 사진을 보면 부산공회당은 벽이 무너져 있고 부산역의 지붕이 내려앉았다.

 

부산역전 대화재가 지나간 후 국제시장 화재,용두산 화재가 발생해 조선문화재가 대거 소실되고 많은 이재민들이 증가하게 된다.

 

부산역전 대화재는 지금의 중구지역의 절반에 가까운 지역을 초토화시켜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이 화재로 르네상스 양식의 부산역사(釜山驛舍, 1910. 10 준공)와 부산우편국(釜山郵便局, 1910. 5 준공), 부산일보사 사옥, 부산방송국이 불타 도시의 중추 기능을 잿더미로 만들었고 그 영향이 전국에까지 파급되기에 이르렀었다.

 

부산역은 비잔틴풍이 가미된 르네상스 양식의 웅장한 건물로, 1908년 6월 공사를 시작해 1910년 10월 31일 준공했다.

 

철저한 서구식 건축기법에 따른 붉은 벽돌 건물이었고 외관장식은 벽돌 벽의 상반부에 화강암으로 세겹의 테두리를 둘렀다. 지붕은 슬레이트로 이어져 있으며 옥상에는 시계탑과 창문을 내단 각탑이 있었다

 

부산역과 그 주변에는 최신의 서양식 건물이 들어서고 간선도로와 전차가 부설됐으며 세관과 잔교 관광안내소 여관 등이 세워졌었다. 역사 옆으로 2층으로 증축된 철도호텔과 공회당, 산업장려관 등이 연이어 들어서 있었다.

 

저녁 8시 30분경 판자촌에서 발생한 불은 바람을 타고 판자촌 전체로 번졌고 이 사고로 부산역이 전소되었다.

이후 부산역은 1966년까지 가건물 역사를 사용하다가 같은 해 초량역을 흡수하여 부산역을 초량동으로 이전하고 본 건물을 철거해버렸다. 이후 부산역은  1969년 6월에 현재의 초량동으로 이전했다.

 

- 1953년 11월 27일 부산역전 대화재로 인해 역사 전소

- 1965년 11월 1일 초량역, 부산역, 부산진역 3역 부산진역으로 통합. 부산역 영업정지

- 1966년 4월 1일 역사 신축 착공

- 1969년 6월 10일 역사 신축 준공과 동시에 옛 초량역 자리로 이설하여 영업 재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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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역 == > 서울역

 

서울역은 루체른 역사와 외관은 유사하나 내부는 오히려 암스테르담 역과 비슷하다고 한다.

 

외관에 붉은 벽돌을 사용한 점이나, 건축물 안의 공간 구성, 당시 유럽에 일반적이었던 종착역식 역이 아닌 통과식으로 지어졌다는 점에서 암스테르담-도쿄-서울역은 유사성이 있다.

 

흔히 서울역을 설계한 건축가는 다츠노 긴고의 제자인 당시 도쿄대학 건축학과 교수 '쓰카모토 야스시(塚本靖)'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건축가는 미상이다.

 

쓰카모토 야스시 사후 유품으로 그의 이름이 적힌 서울역 설계입면도가 발견되었지만, 건축을 총괄한 건축가가 누군지는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쓰카모토 야스시가 설계에 참여한 것은 사실이다.

서울역은 예전 경성부의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경성의 관문이 될 중심역을 만들 필요성이 대두되었는데, 경부선·경원선·용산선이 만나는 용산역은 군사적 목적으로 건설된데다, 도심에서 떨어져 있어 신 역사 건설에는 부적합하였다.

 

따라서 도심과 가까운 기존의 남대문정거장을 경성역으로 개량하기로 하여 1922년 역사 건설이 시작되었다.

 

이후 1923년 1월 1일 경성역으로 역명을 바꾸고 본격적인 경성부의 관문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도쿄 역에 이은 동양 제2의 규모로 지어진 역사는 1925년 완공되었고, 이후 만주 방면의 국제 열차를 취급하는 등 한반도의 철도 교통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경성역은 1945년 광복이후 1947년에 현재의 역명인 서울역으로 개명하였고, 한국 전쟁을 거치며 대한민국의 최대 역으로 발돋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