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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예 방/전시,강암,해정 등

정이(程頤) - 사잠(四箴) / 우남 조승혁

by 연송 김환수 2020. 8. 4.

정이(程頤)의 四箴(사잠)은 4가지 경계하고 지켜야 할 근본을 말한다. 사물(四勿)이라고도 한다.

사잠(四箴)은 사물(思勿)을 경계하는 공자의 말에 대하여 정이(程頥)가 적은 글이다.

 

공자의 사물(思勿)은

非禮勿視(비례물시) 예가 아니면 보지 말며,

非禮勿聽(비례물청)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非禮勿言(비례물언)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非禮勿動(비례물동)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

 

북송(北宋)시대를 살았던 정이(程頤)는 본명이고 호는 이천, 자(字)는 정숙(正叔)이다.

 

정이(程頤)의 사잠(四箴) 중국 송(宋, A.D.1033-1107)나라 때 도학의 대표자인 정이(程頤)는 공자의 사물(四勿)에 기반을 두고 사잠(四箴)이라는 잠언(箴言)을 만들었다.

사물잠(四勿箴)은 시잠(視箴), 청잠(聽箴), 언잠(言箴), 동잠(動箴)이다. 箴(잠)은 경계 잠으로 경계(警戒)하다는 뜻이다.

 

시(示), 청(聽), 언(言), 동(動)의 작품을 하나로 합쳐서 해석해 보면 깊은 의미가 있다.

보일 시(示) / 들을 청(聽) / 말씀 언(言) / 움직일 동(動)

 

보일 시(示) / 들을 청(聽)

 

말씀 언(言) / 움직일 동(動)

 

聽(청)

友南 趙丞爀 (우남 조승혁)

程正叔 四箴 (정정숙 사잠)

韓國美協 招待作家 釜山書畫會 會員展 (한국미협 초대작가 부산서화회 회원전)

 


程正叔 四箴 (정정숙 사잠) : 본명 정이(程頤, 1033년~1107년)

 

시잠(視箴)

 

心兮本虛(심혜본허) : 마음이란 본시 비어 있으니

應物無迹(응물무적) : 외부 사물에 반응하면서도 흔적은 없다

操之有要(조지유요) : 마음이 그것을 바르게 잡아두는 것에 요령이 있고

視爲之則(시위지칙) : 보는 것이 그렇게 하는 법칙이 된다

蔽交於前(폐교어전) : 눈 앞이 이리저리 가리워지면

其中則遷(기중칙천) : 그 속 마음은 곧 옮아가게 된다

制之於外(제지어외) : 외부에 대하여 제어함으로써

以安其內(이안기내) : 그 내부를 안정시켜야 한다

克己復禮(극기복례) : 자신을 극복하고 예로 되돌아가게 한다면

久而誠矣(구이성의) : 오래도록 성실하게 될 것이다

 

청잠(聽箴)

 

人有秉彛(인유병이) : 인간에게는 꼭 지켜야 할 떳떳함이 있어니

本乎天性(본호천성) : 그것은 천성에 근본을 두는 것이다

知誘物化(지유물화) : 다만 사람의 지각이 사물의 변화에 유인되어

遂亡其正(수망기정) : 그 올바름을 잃게 되는 것이다

卓彼先覺(탁피선각) : 탁월하였던 저 선각자들은

知止有定(지지유정) : 지각을 선의 경지에 머물게 하여 안정시켰다

閑邪存誠(한사존성) : 사악해짐을 막고 성실한 마음을 존속시켜서

非禮勿聽(비례물청) : 예가 아닌 것은 듣지도 말라 하느니라

 

언잠(言箴)

 

人心之動(인심지동) : 사람의 마음의 움직임은

因言以宣(인언이선) : 말을 근거로 하여 밖으로 선포되나니

發禁躁妄(발금조망) : 말을 할 때 조급하거나 경망스러워지는 것을 막아서

內斯靜專(내사정전) : 속 마음은 고요하고 한결같게 된다

矧是樞機(신시추기) : 하물며 이것은 사람들의 중요한 계기를 만드는 것이니

興戎出好(흥융출호) :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고 우호로 나아가게도 한다

吉凶榮辱(길흉영욕) : 사람의 길흉과 영욕은

惟其所召(유기소소) : 오직 말이 불러들이는 것 들이다

傷易則誕(상이칙탄) : 말을 지나치게 쉽게 하면 불성실하게 되고

傷煩則支(상번칙지) : 지나치게 번거롭게 하면 지리멸렬하게 되고

已肆物忤(이사물오) : 자기 멋대로 말하면 사물과 어긋나게 되고

出悖來違(출패래위) : 도리에 어긋나는 말을 하면 위배된 보답이 오게 되니

非法不道(비법불도) : 법도에 어긋나는 것은 말하지 말고

欽哉訓辭(흠재훈사) : 공경하리로다, 이 교훈의 말들을

 

동잠(動箴)

 

哲人知幾(철인지기) : 명철한 사람은 일의 기미를 알아서

誠之於思(성지어사) : 그것을 생각함에 정성스럽게 하고

志士勵行(지사여행) : 뜻있는 선비는 행동에 힘써서

守之於爲(수지어위) : 올바른 도리를 지키는 일을 실천한다

順理則裕(순리칙유) : 올바른 이치를 따르면 여유가 있게 되나

從欲惟危(종욕유위) : 자기 욕망을 따르면 위태로워지는 것이다

造次克念(조차극념) : 다급한 순간이라도 이것을 잘 생각하여

戰競自持(전경자지) : 두려워 조심하면서 스스로를 지탱하라

習與性成(습여성성) : 습관이 본성을 따라 이룩되면

聖賢同歸(성현동귀) : 성현들의 경지에 같이 귀착하게 된다.


程正叔(정정숙) = 정이(程頤) = 정이천(程伊川)

 

정이(程頤, 1033년~1107년)는 중국 송나라 도학의 대표적인 학자의 한 사람이다.

형 명도(明道) 정호와 더불어 성리학과 양명학 원류의 한 사람이다.

 

자는 정숙(正叔). 형인 명도보다 1년 늦게 하남(河南, 현재의 허난 성에 속함)에서 출생하여 이천선생(伊川先生)으로 호칭되었다.

 

북송(北宋)시대를 살았던 정이천의 본명은 정이(程頤)이고, 자(字)는 정숙(正叔)이며 이천은 그의 호(號)이다. 정이천의 생애에 관련된 내용은 송나라 역사서인 『송사(宋史)』에 보인다. 잘 알려진 것과 같이 정이천은 정명도의 친동생으로 어려서는 주렴계에게 학문적 영향을 받게 된다.

 

주렴계가 남안(南安)에서 아전 노릇을 할 때 통판군사(通判軍事)인 아버지 정향(程珦, 1006~1090)이 주렴계의 비상한 기상과 용모를 보고 그와 사귀었고, 두 아들 명도와 이천을 그에게 보내어 공부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렴계가 도학(道學)의 비조(鼻祖)라고 알려진 까닭은 사실 정명도와 정이천 형제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이유가 크다. 당시 주렴계 나이가 30세, 정명도는 15세, 정이천은 14세였고 교류 기간이 1년도 채 안 되는 기간이었기 때문에 학문적 영향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두 형제에 관한 후대 기록들을 참고해 보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본다.

 

비록 정이천과 정명도의 사상은 송명도학(宋明道學)에서 리학(理學)과 심학(心學)이라는 두 가지 다른 성격의 학문을 형성하지만,07 주렴계로부터 시작하는 학문적 원류가 같음은 부인할 수 없다.

 

정이천은 18세 때에 임금에게 직접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송사』에 실린 “천자(天子)가 세속적인 논의들을 내쫓고 사사로움 없는 왕도(王道)정치에 마음 쏟기를 바랐다.”라는 상소 내용은 이천의 기개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태학(太學)에 들어가서는 학교의 선생이었던 호원(胡瑗)이 이천의 글을 보고 매우 놀라 직접 만나서 학식을 교류했다는 내용이 전해진다.

 

이천은 명도와는 형제, 주렴계와는 사제관계이면서 장횡거와는 친척 관계, 소강절과는 친구 관계였다. 이 중에서 이천과 사상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던 인물은 장횡거였다. 명도와 횡거는 1057년 같은 해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당시 명도의 나이 26세, 횡거의 나이 38세였다. 이천과 횡거의 교류는 명도와 횡거가 주고받은 편지를 이천이 보고 질문을 보내면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천은 횡거가 우주의 본체(本體)를 태허(太虛)인 기(氣)로 말하는 것과 다르게 리를 강조한다. 이러한 리와 기에 대한 견해 차이는 송대 유학사의 중요한 분기로서 후대 성리학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천은 형이 비교적 이른 나이에 관직에 나간 것과는 대조적으로 50세가 넘어서도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철종(哲宗, 재위 1085~1100) 초에 사마광(司馬光, 1019~1086)과 여공저(呂公著, 1018~1089)는 이천의 품행에 대해서 높이 칭송하며 관직에 등용할 것을 상소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천은 스스로 학문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철종의 임명을 애써 사양했다. 그는 정계에 진출하는 것 대신 한결같이 학문에 매진하였으며, 40세 때부터 제자를 두어 함께 모여 공부하는 강학(講學)을 시작하였다.

 

명도가 죽은 뒤에야 벼슬길에 나아가게 되는데, 숭정전설서(崇政殿說書)라는 관직에 발탁되었다. 당시 철종의 나이는 겨우 열 살 남짓이었는데, 이천은 그에게 경전을 설명해 주는 선생이 되었다. 이천이 평민에서 갑자기 황제에게 강의하는 관리가 된 일은 당시에는 놀랄 만한 사건이었다.

 

관직에 발탁된 후 이천은 곧장 임금에게 상소하여 환관이나 궁녀들과 만나는 시간을 피하고 현명한 사대부들과 시간을 갖고 유자(儒者)들을 선별하여 강연을 듣도록 간청하였다고 한다.

 

이천의 관직 생활은 말년에 이르러 평탄치 않았다. 이천이 37세 때 아버지 정향은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이 내놓은 신법(新法)을 반대하다가 파직되었는데, 이천 또한 신종(神宗, 재위 1067~1085)에게 신법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이를 지지하는 세력들로부터 오랫동안 고통받았다고 한다.

 

결국, 개혁적 정치인 신법을 추구하던 신당파들의 모함으로 서경(西京)에 국자감(國子監)을 관리하는 관직으로 쫓겨났다가 얼마 후 면직당하고 부주(涪州)로 유배되었다.

휘종(徽宗, 재위 1100~1125)이 즉위하자 유배지가 협주(峽州)로 옮겨졌고 관직을 회복하였지만, 다시 또 면직당했다. 관직에서 물러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107년, 그가 숨을 거둔 나이는 75세였다고 한다.

 

사잠(四箴)

송(宋)나라 때 정이(程頤)가 지은 시잠(視箴)•청잠(聽箴)•언잠(言箴)•동잠(動箴)을 말하느데, 공자의 사물(四勿)에 기반을 두고 사잠(四箴)이라는 잠언(箴言)을 만들었다.

※ 참고어 : 사물(四勿).

 

사물(四勿)

공자(孔子)가 안연(顔淵)에게 가르친, 예(禮)에 의해 경계해야 될 네 가지 조목. ≪논어(論語)≫ 안연(顔淵) 편에서 나온 것으로 공자가 극기복례(克己復禮)를 말하자 안연이 그 상세한 조목을 물었을 때,

 

공자가 ‘예가 아니면 보지 말며,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하여 이로써 사사로움을 이길 것을 밝혔다.

※ 참고어 : 사잠(四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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