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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김 제향,행사

2015년 옥병서원 춘향

by 연송 김환수 2015. 5. 6.

병서(玉屛書院)

 

향토유적 제26호

소 재 지 :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 산210

 

인조27년(1649)에 사림의 건의에 따라 창건되어 사암(思庵) 박순(朴淳)선생을 제향하였고 숙종 24년(1698) 신완(申琓)의 건의로 조정의 지휘를 받아 이의건(李義健) 선생과 김수항(金壽恒) 선생을 배향하고 숙종39년(1713) 이이명(李 命)의 건의로 ‘옥병(玉屛)’이라고 사액된 

서원이다.        

 * 사액서원 : 조선시대 국왕으로부터 편액(), 서적, 토지, 노비 등을 하사 받아 그 권위를 인정받은 서원


 * 참고로 사암(思庵) 박순(朴淳)선생도 알고보면 우리 안산김씨 상호군 휘 암(의주파)의 따님

   후손(손자) 사위에 해당하시는 분으로 안산김씨 족보에 등재되어 있는 분이다.



그후 150여년을 지나 고종원년서원훼철령에 따라 훼철되자 서원은 없어졌으나 박순, 이의건, 김수항선생의 유업과 덕행을 잊을수 없어 포천유림들의 발의로 서원구지에 설단하고 매년이월망일에 제향만을 거행하여 오다가 1926년에 김성대선생, 이화보선생 윤봉양선생을 단에 추가배향하였다.* 김성대 선생 알아보기 동음사 (직장공 후손 촌로공파)

 

1978년에 이명우(李命雨)를 회장으로 한 포천군의 유림들이 1978년 춘향시서원복원추진위원회(옥병서원복원추진회)를 결성하고 당국에 건의하여 1980년 국비와 도비의 보조로 기공하여 3차 공사를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건물은 본당과 동재 서재 삼문 담장을 갖추었는데 본당 숭현각(崇賢閣)은 맞배지붕에 방풍판를 달았다. 숭현각의 규모는 정면7.70m, 측면4.70m이다.

 

서원 앞에는 1909년에 건립된 옥개와 비좌를 갖춘 신도비가 있는데, 비문은 송시열이 지은 것이다.

신도비의 규모는 높이 186cm, 폭 64cm, 두께 33cm이다.

 

≪참고문헌≫ 太學志
≪참고문헌≫ 典故大方
≪참고문헌≫ 京畿道史(京畿道, 1982)

 

 

 

 

서원 터는 사암 박순 선생이 정계에서 은퇴하고 낙향하여 배견와(拜鵑窩)라는 집을 짓고 살던 곳입니다.

 

조선 중기의 학자로 영의정을 지낸 사암(思庵) 박순[朴淳, 중종 18년(1523)~선조 22년(1589)] 선생은 영평의 산수를 사랑하여 노년에 이곳으로 낙향하여 훈학으로 여생을 마쳤습니다.

 

공이 죽은 뒤 1649년(인조 27년) 포천유림에 의해 공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배견와 자리에 사우(祠宇)를 지었습니다.


선생의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庵), 본관은 충주이며, 서경덕의 문인으로 선조 5년(1572)부터 영의정에 14년동안 재직했고, 성리학에 대한 연구가 깊었으며, 시·문·서에 모두 뛰어났습니다.


박순 선생은 1553년(명종 80) 친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대사성, 대사간,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에 올랐으며 선조가 <송균절조수월정신(松筠節條水月精神)>이라고 극찬한 청렴하고도 강직한 관리였습니다. 저서로는 「사암집」이 있습니다.

적자의 후손이 없자  당시의 예대로 양자를 들이지 않고 외동딸이 시집(군수 이희간에게 출가)간 포천을 낙향할 곳으로 삼아 돌아가시기 4년 전에 은퇴하여 포천에서 은거하다 세상을 마쳤기에 그곳에 묘소가 있고 유적지가 있으며 서원이 세워져 있다.

 

                 사암 박순과 부인 고씨의 묘소

 

1909년 5월에 외십대손 이승회가 전액 하고 외십일대손 이최수가 글을 써 신도비를 세웠으며 이후 외손마저 혈맥이 끊긴 탓인지 덩실한 묘소나 우뚝 솟은 신도비, 넉넉한 모습의 ‘옥병서원’ 건물이 있어도 어딘지 쓸쓸함이 느껴졌는데 포천의 유림들이 해마다 서원에 제향을 올리고 충주박씨 종친회에서도 묘소에 시제를 지낸다고 하니 외롭지는 않다고 봅니다. * 전액 : 전자 篆字)로 쓴 비갈(碑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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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1일 옥병서원 춘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