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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방/태봉국 (궁예)

궁예, 패자(覇者)와 폭군의 갈림길에 서다

by 연송 김환수 2013. 10. 19.

잃어버린 또 하나의 역사, 궁예, 패자(覇者)와 폭군의 갈림길에 서다.

 

 

왕공(왕건)이 이미 의기를 들었다하니, 나라 사람으로 달려오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먼저 궁문에 이르러 북을 치고 떠들며 기다리며 역시 만여 명이나 되었다.

궁예는 이 소식을 듣고 어찌 할 바를 모르다가 미복으로 북문을 빠져 나가서 바위 골짜기로 도망하였다가 조금후에 부양(斧壤:지금의 평강) 백성에게 살해되었다."

- 고려사 절요 권 제 1 태조 신성태왕 -

 

난세의 군웅이 우후죽순처럼 난립하던 삼국말기. 그 혼란을 극복하고 일어선 궁예가 겨우 보리이삭을 훔쳐먹다가 부양 백성들에게 살해되었다는 치욕스러운 최후. 그러나 정작 그 민중들의 생각은 달랐다. 지금 철원에서 아직까지 내려오는 궁예를 기리는 제사인 태봉제가 있다는 것만 보아도, 민중들은 그를 폭군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설화는 궁예의 최후도 다르게 말하고 있었다.

 

철원군 태봉제

   

바로 궁예가 자살했다는 것이다. 궁예와 왕건의 최후 격전지인 보개산성. 그리고 궁예와 그의 부하들이 최후에 통곡했다는 명성산. 그리고 궁예는 결국 자살하거나, 혹은 그의 부하 도적놈 왕건일당들에게 살해되었다. 삼국사기에는 궁예의 두 얼굴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는 병사들과 동거동락을 같이한 성군의 모습. 또 하나는 참소를 믿어 마구 사람들을 죽인 폭군. 그리고 부인과 두 아들을 죽인 매정한 아버지의 모습까지. 성군과 폭군의 엇갈리는 모습. 같은 기록인데도 이렇게 상반된 두 기록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궁예는 고구려인의 후손이라는 말부터 시작하여, 헌안왕이나 경문왕의 서손이라 기록하고 있다. 어쨌든 신라 말기, 귀족들의 세력다툼의 희생양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결국 그렇게 서라벌을 떠나왔고, 또 그렇게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결국 진성여왕 치세. 그 기회가 온 것이다. 처음 죽주의 기훤에게 의탁했다가, 다시 북원의 반란군 양길에게 의탁한다. 양길은 궁예를 892년과 894년에 차례로 신라의 여러 지역을 공격할 것을 명한다. 그리고 선종은 건녕 원년(AD. 894)에 명주로 들어가 35백 명을 모집하여, 이를 14개 대오로 편성하였다.

 

그는 김대검, 모흔, 장귀평, 장일 등을 사상으로 삼고, 사졸과 고락을 같이하며, 주거나 빼앗는 일에 이르기까지도 공평무사하였다. 이에 따라 여러 사람들이 그를 마음 속으로 두려워하고 사랑하여 장군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저족, 생천, 부약, 금성, 철원 등의 성을 쳐부수니 군사의 성세가 대단하였으며, 패서에 있는 적들이 선종에게 와서 항복하는 자가 많았다. 선종은 내심 무리들이 많으니 나라를 창건하고 스스로 임금이라고 일컬을 만하다고 생각하여 내외의 관직을 설치하기 시작하였다.

 

본래의 병력은 기병 6백이었다. 그것이 불과 2년만에 3500여명으로 불어난 것이다. 이는 세상에 불만을 품은 민중들이었고, 그를 잘 이용한 것이 바로 궁예였다. 이런식으로 민심을 얻은 궁예는 드디어 양길의 세력에게서 독립, 독자적 세력을 계속 해서 만들어 간다. 이 때 궁예가 35백여명의 병력을 모집한 곳이 바로 명주. 다시 말해 고려 건국 이후 5년 후 까지 고려에 귀순하지 않은, 명주 호족 김순식의 땅이었다.

 

궁예는 이렇게 자신을 신봉하는 친위세력이 많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환선길의 모반사건, 이흔암의 반란 미수 사건 모두 궁예의 친위세력이 일으킨 반란이다. 또한 7월에 있었던 청주인의 반란을 비롯, 백제에 투항한 운주 등 10여개 군현 모두 왕건에 반하는 세력, 즉 궁예의 친위세력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궁예는 매우 현실적인 판단을 하는 뛰어난 정치가였다. 그래서 사방 곳곳에 자신의 친위 세력을 만들어 놓고, 있을지도 모르는 후세의 위협에 대비하였다.

 

어쨌든 궁예는 이로부터 나라의 기틀을 확립하고, 신라의 혈연중심 골품제를 업무위주로 고치며 여러 고구려 관련 호족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896. 드디어 송악 사찬 왕륭이 궁예에게 귀화했다. 송악 바닷길을 중심으로한 번화가였으며 궁예에게 귀화한 호족들 중에서도 가장 강성했던 호족이었다. 이런 왕륭의 항복은 궁예에게 아주 기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궁예의 파멸을 알리는 전조였다.

 

왕륭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두 강대한 세력이 부딪히면 결국엔 한쪽이 깨지기 마련이다. 그것이 어느쪽이 되리라고는 예상하기 힘들었다. 송악군이 궁예의 세력에 대항하여 이길 수 있을 가능성은 50%. 그는 그 50%의 가능성에 기댈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미 민심을 얻은 궁예를 어찌 상대한단 말인가?

 

하늘에 두 해는 있을 수 없는 법. 이 때 부터 송악 세력과 궁예 세력의 충돌은 이미 기정사실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궁예는 자신에게 투항해 온 강대한 세력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왕건에게 발어참성을 쌓게하고, 송악태수로 임명하였다. 이 때 왕건의 나이가 불과 20세인데 반해 "성주"라는 관직까지 제수한 것으로 보아 궁예가 얼마나 송악 세력을 환대했으며, 송악 세력이 얼마나 강성했는지 짐작 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아마 이 때. 왕륭이 궁예에게 투항 할 때 부터 그는 이미 역심을 품었을 것이다. 그리고 교묘하게 옥좌를 노렸고, 뛰어난 정치가였던 궁예가 이를 모를 리 만무했다. 어쨌든 궁예는 송악 세력을 등용, 왕건에게 승령, 임강의 두 고을을 치게 한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이듬해에는 송악에 도읍을 정했으며 898. 22세 밖에 되지 않았던 왕건에게 "정기대감"을 제수하였다.

 

또한 900. 양길의 잔당인 광주, 충주, 청주의 삼주와 당성, 괴회 등의 군현을 공격할 것을 명했다. 이것 또한 궁예가 왕건의 능력을 높이 산 것이라기 보다는, 왕건의 세력의 너무 강대했기 때문에 어린 왕건에게 이런 일을 시켰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왕건의 세력을 견재하려는 의도도 숨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부터가 바로 궁예가 범한 실책이었다. 놀랍게도 왕건은 모두 이기고 개선했던 것이다. 엄청난 전공을 세운 송악의 세력이 이제 왕건에게 송악 태수와 정기대감의 관위를 내린 것 만으로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궁예는 아찬의 관위를 내려주었다.

 

송악에 도읍을 정하고, 왕건에게 발어참성을 쌓게하고, 또한 외직에 나서서 여러 군현을 토벌하게 하고, 정기대감의 관위를 제수한 것 모두 새로이 귀순한 송악세력을 환대하고 그들을 달래면서도, 자신이 그렇게 환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려고 했던 것일 것이다.

 

그러나 왕건을 아찬으로 임명하면서부터 궁예도 또한 스스로 위험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듬 해 왕을 칭하기는 했지만 송악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진 것이다. 더군다나 송악세력의 수장인 왕건의 공이 너무나도 컸다. 즉 이제는 송악 세력을 제거하고 싶어도 제거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그리고 그가 도읍으로 삼은 곳도 송악이었다. 다시 말해 사방이 다 왕건의 세력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제 궁예는 너무 커져버린 송악 토착 세력을 견제하려고 할 수 밖에 없었고, 또한 궁예가 왕건의 세력을 견제하려는 움직임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왕건의 세력이 너무나도 커지게 만들었다. 그것은 바로 903. 왕건이 나주를 정벌하고 그 곳 십여군현을 함락시켰고, 이에 궁예는 그를 다시 알찬으로 삼은 일이었다.

 

이것은 왕건 세력을 견재하려는 움직임을 하면서 왕건 세력의 압박이 가중되는 가운데, 결국 하나의 카드로 왕건에게 다시 공을 세울 기회를 준 것으로 보인다.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이었던 것이다.

 

더 이상 궁예는 송악 세력이 활개치는 송악에 있을 수 없었다. 왕건의 공은 너무나 컸고, 그의 관위는 알찬이나 되었다. 또한 그가 송악에 있는 동안 왕건의 세력에게서 계속해서 압박을 받았다. 이제 그는 또 다른 방안을 꺼내들었다. 다른 호족을 이용하여 왕건 세력을 견제하려 한 것이다.

 

이듬해 904. 궁예는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하였다. 그 이전 국호인 후고구려는 순전히 고구려의 후예들을 수용하기 위함이었고, 그 때 까지만 해도 궁예는 고구려의 후예들을 수용하며 적극 정국에 활용했다. 왕건의 세력도 그 중 일파였는데, 이제 왕건의 세력이 너무나 커졌으므로, 더 이상 고구려 출신 호족들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도 삼한의 왕이 되고싶은 꿈이 간절했기에, "대동방국"이라는 뜻의 "마진"이라 국호를 개칭했다.

 

또한 왕건 세력이 활개치는 송악을 떠나, 자신의 친위세력이 있었던 철원으로 되돌아가려는 공사를 시작했다. 또한 자신의 친위세력인 청주인을 적극 받아들이고 그들의 세력을 키워주었다. 이렇게 해서 등장한 인물이 바로 고려사에 "궁예에게 어진 신하를 참소했다"던 청주 호족 아지태였을 것이다.

 

이것은 궁예가 드디어 표면적으로 왕건 세력을 견제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고구려 출신 호족이었던 송악 토착 세력. 그 세력의 수장인 왕건은 이제 그가 위협을 느꼈다. 그 때까지 자신의 세력이 커가는 것만 보아왔지만, 또 궁예가 소극적인 방법으로 왕건 세력을 견제했지만 이제는 궁예가 대놓고 왕건 세력을 견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잘못하다간 왕건도 그 스스로 목이 날아갈 수 있는 엄청난 일의 발단이었다는 것을 스스로 알 수 있었다.

 

아마 송악세력 모두가 위협을 느끼고 궁예에게 압박을 가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때는 달랐다. 청주의 호족들이 급격히 성장하고, 또한 다른 호족들도 성장하면서 이제 송악 세력은 고립되어 버렸다. 궁예와 왕건의 첫 대결은 궁예의 압승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 왕건이 그렇게 우려하던 일이 발생했다. 궁예가 철원 천도를 실행에 옮긴 것이다. 그 다음 부터 왕건은 스스로 위협을 느끼고 자중했고, 더 이상 궁예 또한 왕건에게 아무런 일도 맡기지 않았다. 왕건은 자신의 본거지인 송악을 떠나 철원에서는 철저히 고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궁예가 승리를 자축하고 있던 그 성책 2(AD. 906). 갑자기 상황이 급변했다. 바로 서라벌 출신 호족들이 왕건을 옹호하고 나선것이다. 왕건이 고립된 건 신라 출신 호족과 청주 호족 등이 강성해진 것 덕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신라 출신의 호족이 왕건을 지지했고, 이제 상황이 급변했다. 결국 궁예는 다시 압박에 못이겨 왕건에게 명하여 사화진을 치도록 했다. 다시 공을 세울 기회를 준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관위를 올리는 일은 없었다. 이제는 송악에 도읍할 때와 상황이 다른 것이다. 왕건이 신라 출신 호족들이 그를 지지했을 때 그는 매우 고마웠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살았다는 생각이 들 바로 그 무렵에 다시 궁예가 신라 출신 호족들을 공격하고 나섰다. 궁예가 송악에 도읍할 때에는 궁예가 사방에 왕건의 세력과 그를 지지하는 세력만 있는, 즉 철저히 고립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철원은 달랐다. 철원 자체가 왕건이 아닌 궁예의 지지세력이면서, 또한 궁예가 등용한 청주인도 그를 신봉하는 친위세력이었다. 궁예는 더 이상 고립되있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카드를 꺼내들었다.

 

왕건과 궁예의 두번째 싸움도 궁예의 승리였다. 그것이 궁예가 신라 서라벌을 멸도라 부르며 신라 출신 호족들은 신라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제거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록에는 그가 매우 자만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지만, 사실은 왕건의 지지세력을 제거하려는 의도였다. 물론 이 때 까지도 민중들은 왕건의 편이 아니라 궁예의 편이었다.

 

날이 가면 갈 수록 왕건의 지지세력은 하나 둘 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방금 전 까지 왕건을 옹호하던 세력들이 모두 다 목이 달아나 있던 것이다. 정작 그 일에 중심에 서 있던 왕건으로서는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

 

왕건을 옹호하던 세력은 거의 전멸했다. 신라 출신 호족들도 이 때에 이르러 모두 멸족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궁예는 무죄인데도 단지 신라 호족이라는 이유로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이 일은 조선시대 당쟁에서 있었던 일 처럼 진행되었을 것이다. 단순한 일을 꼬투리 잡아 국문하고, 자복하든 하지않든 곧 처형했을 것이다. 물론 이 때 처형당한 자들은 모두 왕건의 옹호세력이었다. 다시 왕건이 철저히 고립되었다.

 

그러나 다시 의문에 휩쌓인다. 왕건이 다시 나주로 간 것이다. 이는 어찌 설명해야 할까?

그는 성책 2(AD 906) 부터 왕건을 지지하던 세력을 죄를 물어 모두 제거하였다. 다시 살 길이 보였던 왕건이 다시 철저하게 고립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다시 그런 왕건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었다는 것은 궁예가 정말로 미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AD 909. 나주의 도적 능창이 봉기하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견훤이 진공한다. 아마 이 때 궁예는 왕건을 보내기 이전 자신의 친위세력의 장수들을 먼저 나주로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문제가 생긴다. "나주"는 철저히 왕건 세력의 땅이었던 것이고, 왕건 세력이 아니라 궁예 친위세력이라는 이유로 그들의 명령에 불복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고려사에는 "궁예가 나주의 일을 근심하다가"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 궁예는 일을 왕건에게 맡기지 않으려 한 것이다. 왕건의 세력이 커지면 곧 그것은 자신의 위험으로 닥칠 것이다. 또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궁예였다.

 

그 이전 궁예는 북벌을 감행하려는 계획을 꾸몄으나 나주의 일로 실패하였다. 그리고 나주는 왕건 세력의 땅이었다. 이는 왕건에게 둘도 없는 행운인 것이다. 2차 나주 전투의 기록에서 왕건이 얼마나 궁예에게서 위협을 느꼈는지는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알 수 있다.

 

태조가 말하기를 "삼가하여 게으르게 하지 말고 오직 힘을 다하여 두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주상이 방자하고 잔학하여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이고 참소하고 아첨하는 무리가 뜻을 얻게 되어 서로가 참소하고 있다. 이러므로 내직에 있는 사람들은 제 각기 스스로 보전하지 못할 것이니 밖에서 정벌에 종사하며 힘을 다하여 왕사에 힘써서 일신을 보전하는 것만 같지 못할 것이다."고 하니 제장이 이 말을 옳게 여겼다.

- 고려사 권 제 1 태조세가 -

 

이 기록은 겉으로 보면 별로 이상하지 않지만 잘 보면 매우 놀라운 기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왕건은 궁예의 부하이고, 궁예는 왕건의 주인이다. 그런데 왕건은 그런 주인에게;

 

"지금 주상이 방자하고 잔학하여"라는 말을 하였다. 이것은 왕건이 궁예에게 얼마나 위협을 느끼고 있었고, 왕건이 이미 역심을 품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나주로 함께 갔던 장수 김신 등은 모두 왕건의 지지세력이었던 것이다.

 

이 다음 기록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이고" 라는 말은 왕건의 지지세력들이 모두 죽어나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왕건이 두려움을 느꼈고, 또 이는 왕건에게는 위험한 일이었다. 따라서 "나를 옹호하던 자들이 다 죽었다"기 보다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죽이고.."라는 말로 각색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을 듣던 제장들도 모두 왕건의 옹호세력이었다. 이는 다시말해 "궁예가 자신의 옹호세력들을 제거하는데에" 있어서 "살아 남을 길은 오직 외직에 있는 길 뿐" 이라는 뜻이다.

 

또한 이 다음의 말인 "참소하고 아첨하는 무리"는 물론 궁예의 측근들을 의미한다. 또 그들이 "뜻을 얻게 되어 서로가 참소하고 있다"는 말은 궁예의 세력이 매우 강성해져서 왕건의 옹호 세력들을 하나 둘 씩 모두 제거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말이고, 왕건 또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을 잘 보면 왕건이 얼마나 두려움을 느꼈는 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궁예는 이 때도, 최후에 죽을 때도 그는 포악한 폭군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부하들을 믿지 못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커진 왕건의 세력을 견재하기 위해 왕건의 세력을 하나 둘 씩 제거한 것인데, 이는 고려의 관점에서 "참소"라 했던 것이다. 물론 "참소하는 무리" 즉 궁예의 측근들은 왕건 정변 후 가장 먼저 처형당했다는 소판 종간과 내군장군 은부, 그리고 어진 이(물론 왕건의 세력)를 많이 참소했다는 청주인 아지태가 이에 속할 것이다.

 

결국 그들은 궁예에게 충성을 바친 자들이며 너무나 강성해진 왕건의 세력을 궁예의 입장에서 걱정했던 자들이다. 따라서 종간과 은부는 왕건 정변 이후, 가장 먼저 처형당한 것이다. 왕건을 거의 죽음에까지 내몬 이들이었고, 왕건도 그들을 중오했을 것이다.

 

그리고 위의 대목은 왕건이 두려움을 느꼈다는 것 외에 또 다른 사실을 의미한다. 궁예가 소판 종간과 내군장군 은부 등 자신의 친위세력을 등용하여 왕건의 세력을 철저히 축출하고 고립시켰지만 결국 2차 나주 전투 이후에 왕건의 세력이 다시 강성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군주정치에서 그 임금을 농락하는 것은 가령 농담이라 해도 살아남기 힘든 일이다.

 

그런데 왕건은 그런 말을 하고도 처형은 커녕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즉 다시 왕건의 세력이 커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왕건에게 있어서 2차 나주 전투는 엄청난 행운이요, 궁예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위협이었다. 왕건과 궁예의 두번의 대결에서 궁예는 왕건의 세력을 모두 축출하면서 두 차례 모두 승리를 자축했다. 그러나 2차 나주 전투 이후 왕건의 세력이 다시 강성해졌다. 상황이 급변한 것이다. 이 때부터 왕건의 역전이 시작되었다.

 

재차 왕건의 세력은 강성해졌지만 더 이상 궁예에게 압박을 가할 수는 없었다. 이미 궁예의 친위 세력도 매우 커져서 두 세력은 팽팽한 접전을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2차 나주 전투 이후 궁예는 왕건에게 다시는 공을 세울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궁예는 다시 위험해 처한다. 그것은 바로 고구려 출신 호족들이 반기를 든 것이다. 이미 신라 출신 호족들이 왕건을 옹호하며 궁예에게 반기를 드니, 궁예는 그들을 모두 축출해 버렸다.

 

그런데 이제 궁예의 기반이 되었던 고구려 출신 호족들 마저 반기를 들었다면 궁예는 엄청난 위험해 처했을 것이다. 그들은 후고구려의 국호가 마진으로 바뀌면서부터 고구려 호족들에게 소흘히 한다는 인상을 받았을 것이고, 드디어 그런 역심을 가졌다가, 2차 나주 전투 이후엔 폭발했다. 이제 궁예가 의지할 세력이라곤 철원, 명주, 청주 등지 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궁예는 새로운 카드를 꺼내들었다. AD 911년 연호를 수덕만세, 국호를 태봉이라 고쳤다. 그러나 이 이후, 궁예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 되어 버렸다. 이것은 자신에게 반기를 든 고구려 출신 호족들을 적대시 하며 그들을 제거할 길을 도모한 것이다.

 

이 때 부터 태봉국은 드디어 재정일치적 성향을 띄며 궁예는 머리에 금책을 쓰고 스스로 미륵불이라 지칭했다. 또한 불경 20권을 저술하여 이를 강연, 드디어 고구려 출신 호족들에게 위협을 가했다.

 

그런데도 고구려 출신 호족들은 계속해서 왕건을 옹호했다. 그것은 중 중에서도 있었는데 바로 석총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결국 왕건의 옹호세력이었던 중 석총. 그는 결국 궁예에게 반기를 든 죄로 철퇴를 맞고 절명했다. 그는 왕건을 변호하려다가 죽은 셈이다.

 

그는 석총을 시작하여 이미 신라의 호족들을 모두 전멸시키며 끝이 났었던 "왕건세력 축출"을 재계하고, 이제는 그 칼끝을 고구려 출신 호족들에게 돌렸다. 물론 기록에는 "궁예가 참소를 믿어" 한 일이라 하였지만, 그는 물론 참소인 것도 알고 있었으며 왕건 세력을 축출하는 계획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세운 것이다.

 

왕건 지지세력 대학살은 911년에서 부터 913년 까지 계속되었다. 그런데도 왕건의 옹호세력을 늘어만 갔고, 궁예는 미륵불을 칭하며 계속해서 그들을 제거하였다. "관심법"도 왕건의 옹호세력을 효과적으로 제거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2년간 계속된 학살에도 그들은 계속 고개를 들었다.

 

1차 왕건 지지세력 대학살은 불과 1년 만에 모두 전멸당했지만 2차 왕건 지지세력 대학살은 계속 지속되었다. 궁예는 끝이 보이지 않자, 그는 중신들이 모두 죽을 것도 걱정했을 것이다. 그는 그래서 다른 방안을 세우지 않으면 되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세력의 중심인 왕건을 직접 제거하려 한 것이다. 외직에 있어 어떻게든 살아남을 길을 도모했던 왕건을 궁예는 913년 불러들이고 파진찬 시중으로 삼았다.

 

태조가 자주 변공을 세우니 벼슬을 더욱 올려 파진찬 겸시중으로 삼아 불러들이고 수군의 임무는 다 부장 김신 등에게 위임하되 정토의 일은 반드시 태조에게 품의하여서 이를 행하게 하였다. 이에 태조의 지위가 백관중에서 가장 높게 되었다. 그러나 본래의 뜻이 아니었고 또 참소를 두려워 하여 그 지위에 있기를 즐거워 하지 않았다. 매양 공문에 출입하여 국사를 평장함에 오로지 어진 이를 좋아하고 악한 이를 미워 하며 매양 사람이 참소를 당하는 것을 보면 곧 모두 해명하여서 구하여 주었다.

- 고려사 권 제 1 태조 세가 -

 

고려사에서는 "태조가 자주 변공을 세우니..."라고 하였지만 그 뒤 "참소를 두려워 하여 그 지위에 있기를 즐거워 하지 않았다" 라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궁예가 왕건을 제거하기 위해 그를 파진찬 시중으로 불러들인 것이지, 그가 절대로 변공이 높아서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왕건이 "어진 이를 좋아했다"는 것도 사실 자신의 지지세력과 당연히 가까이 한 것을 의미하고 "악한 이를 미워 하였다"는 것은 궁예의 세력을 중오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참소를 당하는 것을 보면 모두 해명하여서 구하여 주었다"라는 기사 또한 자신의 지지세력을 잃지 않으려 하는 자기 변호에 불과했지, 그가 결코 오지랖이 넓어서 한 일은 아니었다. 아래는 그 다음의 기사이다.

 

청주(淸州)인 아지태는 본래 아첨하고 간사하더니 궁예가 참소함을 좋아하는 것을 보고 고을 사람 입전 관서등을 참소하매 유사는 이를 추국하여 수년동안 판결하지 못한 채 있더니 태조가 곧 진위를 가려 내어 지태가 죄에 복하거늘 여러 사람들이 마음에 속 시원하게 여겼다. 이로 말미암아 원문장교 종실훈현 지계유아의 무리가 바람에 쓸리고 그림자 처럼 따르지 아니함이 없었다. 태조가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 하여 다시 외방일 맡기를 구하였다.

- 고려사 권 제 1 태조 세가 -

 

이미 아지태에 대해서는 위에서 몇번 거론한 적이 있었다. 아지태의 출신인 청주는 궁예가 믿고 의지하는 친위세력이었다. 물론 그가 "아첨하고 간사했다"는 말도 왕건 지지세력 대학살에 동참했다는 뜻이며 "궁예가 참소를 좋아했다"는 것도 왕건 지지세력 대학살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또 놀라운 내용이 이 기사에 있다. 바로 청주 호족 아지태가 동향인 입전과 관서를 참소한 것이다. 이것은 궁예가 믿고 의지하던 친위세력인 청주가 꼭 궁예를 지지하다가 갑자기 돌변, 왕건에게 기울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궁예는 다시 고립에 빠졌을 것이다. 이제 믿을 것이라고는 철원의 세력밖에 없었다. 따라서 청주 호족 아지태는 그런 궁예의 근심을 덜어주기 위해 청주의 왕건 지지세력의 중심이었던 입전과 관서를 잡아들였고 결국 자신의 지지세력을 잃기 싫었던 왕건의 변호로 인해 살았던 것이다.

 

궁예는 또 다시 위기에 빠졌다. 청주 호족 아지태를 처벌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이르른 것이다. 아지태도 자신이 참소를 하였다고 죄에 복하였다. 이것은 궁예가 왕건에게 변호를 하라고 한 적도 없었을 터, 이는 정치적 기습이었다. 입전과 관서의 판결을 받은 유사는 궁예와 왕건 두 어느 세력에도 가담하지 않은 사람이었거나 왕건의 세력이었을 것이다. 왕건은 그런 유사를 이용하여 자신이 먼저 변호, 입전과 관서를 살려주고 그 후 판결을 권한이 있는 유사를 이용, 아지태를 먼저 제거했을 것이다.

 

물론 왕건이 먼저 손을 써서 아지태를 제거했다고 해도, 궁예는 뭐라고 할 명분이 부족했다. 게다가 자신이 참소를 했다고 죄에 복한 마당에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는 청주가 더 이상 궁예의 지지세력이 아닌, 왕건의 지지세력으로 급변했음을 의미한다.

 

궁예는 왜 왕건의 지지세력을 입전과 관서의 판결에 이용했을 것일까? 자신의 지지세력을 이용하여 확실히 제거하면 될 일을 왕건의 지지세력에게 맡겨 자신의 총신 마져 제거 당하게 만들었다. 이유야 어쨌든 간에 궁예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해 버린 것이다.

 

이 일 이후, 왕건과 궁예 모두 위험을 느꼈을 것이다. 왕건을 제거하려고 불러들인 것인데, 오히려 왕건이 먼저 손을 써서 궁예의 지지세력을 제거한 것이다. 궁예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주 호족 아지태는 이후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때 제거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2차 왕건 지지세력 대학살은 위기에 처한다.

 

궁예가 당황한 것을 틈타 결국 왕건은 외직에 나서기를 성공했던 것이다. 왕건도 더 이상 그 곳에 있으면 살아남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궁예는 이 일로 한쪽 팔을 잃은 셈이었다. 그러나 왕건 지지세력 대학살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는 중요 지지세력을 상실했음에도 불구, "관심법"을 이용하여 왕건의 지지세력을 계속해서 축출해 나갔다.

 

그러나 궁예는 이미 철저히 고립무원의 상태였다. 자신이 믿고 의지하던 청주도 이미 일부를 제회하고는 왕건 지지세력으로 바뀌었고, 그가 일어난 기반인 고구려 출신 호족들도 이미 그의 편이 아니었다. 궁예 지지세력으로 바꾸어 살아남았던 신라 출신 호족들 비롯해이제 철원에 까지 왕건의 지지세력으로 들끓었다. 게다가 그와 잠자리를 같이하던 부인 강씨 마져도 왕건의 지지세력이었다.

 

강씨가 왜 왕건의 지지세력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이는 궁에가 확실히 고립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부인 강씨가 왕건 지지세력의 중심으로 우뚝서자 결국엔 궁예는 다시 직접 왕건을 제거하려 한다. 이는 그 이전 날 왕건이 자신의 지지세력들과 여러가지 논의를 한 다음 날이었고, 아마 이는 궁예가 미리 심어놓은 세작들에 의해 궁예의 귀에 알려졌을 것이다. 이에 궁예는 이를 꼬투리 잡아 왕건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다시 왕건을 불리들인다. 이것이 AD 914년의 일이었다.

 

하루는 급히 태조를 부르므로 관내에 들어가 보니 궁예가 바야흐로 주살한 사람들에게서 몰수한 금은보기와 상장의 기구를 검점하고 있다가 눈을 부릅뜨고 태조를 노려 보며 말하기를 "경은 어제 밤 여러 사람을 모아 놓고 반역을 모의함은 무엇 때문이냐"고 하니 태조는 안색이 자약하여 태연하게 웃으며 말하기를 "어찌 그런 일이 있었겠습니까"고 하였다.

 

궁예가 말하기를 "경은 나를 속이지 말라. 나는 관심법으로써 아는 터이니 내가 장차 입정하여 관심하고 그 일을 다 말하리라"고 하며 이에 눈을 감고 뒷짐을 지고는 얼마 동안 하늘을 우러러 보고 있었다. 그 때에 장진 최응이 곁에 있다가 일부러 붓을 떨어뜨리며 뜰에 내려와서 이것을 주어 태조의 곁을 지나면서 귓속말로 말하기를

 

"불복하면 위태롭습니다."고 하므로 태조가 이에 깨닫고 말하기를 "신이 진실로 반역을 꾀하였사오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하나이다."라고 하니 궁예가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경은 가히 정직하다 하겠다"고 하면서 금은으로 장식한 안장과 고삐를 장하고 말하기를 "경은 다시는 나를 속이지 말라"고 하였다.

- 고려사 권 제 1 태조 세가 -

 

이 계획은 언뜻 보면 완벽했다. "나는 관심법을 가지고 있다"라고 했을 경우 왕건을 딜레마에 빠질 것이다. 관심법을 가졌으니 죄를 자복하여 "송구하옵니다!"라는 말이 나와도 목이 달아날 것이고, 끝까지 죄를 자복하지 않아도 왕을 농락한 죄로 참수를 당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기록은 매우 의문에 빠진다.

 

도대체 왕건이 자복했는데도 궁예가 왕건을 죽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만약 이 때 왕건이 죽었다면 궁예는 지금 쯤 삼한을 통일한 인물로 기억 될 지 모른다. 그러나 놀랍게도 궁예는 이 때 왕건을 죽이지 못했다. 그리고 최응이 "불복하면 위태롭다." 라는 말을 하여, 왕건이 자복, 궁예가 살려 주었다는 말도 안되는 기사가 있다.

 

아마 왕건이 수일간 철저히 국문을 당했을 것이고, 그 동안 최응이 왕건의 지지세력을 이용하여 궁예에게 압박을 가했을 것이다. 아무리 전제 군주라고 해도 모든 중신이 나서서 압박을 가하는데, 어찌 할 것인가? 아마 왕건 지지세력이었던 최응이 왕건을 살리기 위해 정치적 기습전을 택했고, 궁예가 어쩔 수 없이 뒤를 물러났을 것이다. 또한 이는 왕건의 명예를 손상시킬 우려가 있으므로, 후세에 각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어쨌든 궁예는 두차례나 직접 왕건을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첫번째 일은 일단 왕건을 불러들인 뒤에 생각하자는 것으로 왕건을 파진찬 시중으로 삼았을 것이다. 그러나 딱히 왕건을 제거할 계획이 없었떤 까닭에 오히려 그가 공격을 받아 중요 지지세력을 상실했다. 그러나 두번째는 달랐다. 이미 확실한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는데도 결국엔 최응의 계략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 최응의 계략이 무엇이었는 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후에 "붓을 떨어트리고 "불복하면 위태롭다"라 하니, 왕건이 자복하였으므로 궁예가 살려주었다"라는 말로 각색될 만큼 왕건의 명예를 손상시킬 말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다시 왕건 제거에 실패한 궁예는 최후의 발악이라도 해 보기 시작했다. 이미 그가 믿고 의지하던 곳은 모두 왕건의 지지세력으로 돌변했고, 그가 왕건 지지세력 대학살을 자행했어도 그들은 끈질기게 계속해서 고개를 들었다. 결국 왕건을 직접 제거하려는 두차례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이제 궁예는 절망에 빠진다.

 

왕건은 이미 아버지 왕륭이 궁예에게 투항하면서 부터 자신이 왕이 될 역심을 품었을 것이다. 궁예도 이미 이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를 적절이 견재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제 상황은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다.

 

그와 잠자리를 같이하는 부인 강씨도, 그리고 그의 두 자식 즉 청광과 신광도 모두 그의 편이 아니었다. 어떻게 삼모자가 왕건의 지지 세력으로 들어섰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그들이 왕건 지지세력으로 들어섰음은 확실한 사실이었다.

 

따라서 그의 부인 강씨는 궁예의 편을 들어 왕건 제거에 도움은 주기는 커녕 이제 왕건 지지세력 대학살을 멈추라는 듯한 말을 입 밖에 꺼냇다. 궁예로서도 매우 괴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만약 그가 왕건 지지세력 축출을 멈추게 된다면 그는 얼마가지 않고 무너질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옥좌를 노리는 사람이 바로 왕건이었다. 그가 왕건 지지세력을 축출한 이유는 그가 옥좌라도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을 멈춘다면 바로 태봉 정권이 전복될 것이다.

 

즉 부인 강씨가 그에게 이제 그런 일을 그만 두라는 말을 한 것은, 이제 그 "옥좌를 포기하라"는 말과 같았다. 이것은 강력한 왕건의 지지세력이 아닌 이상, 또 왕건을 추종하지 않는 이상 그런 말을 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부인 마져도 왕건 지지세력이 된 이상 살려 둘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그의 부인 강씨가 왕건의 지지세력인 이상, 왕건의 지지세력을 제거하기란 아주 힘든 일일 것이다.

 

결국 그는 세상에 오명을 남기는 길을 택한다. 그로서도 매우 어려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전설에는 부인 강씨가 구미호였기 때문에 왕건의 사주를 받아 죽였다는 말과, 왕건과 정을 통했기 때문에 부인 강씨를 죽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는 다시말해 부인 강씨가 확실한 왕건의 지지세력이었던 것이다.

 

AD 915. 부인 강씨는 물론, 청광과 신광까지 제거해 버린다. 아버지 영조와 정치적 노선이 달랐기 때문에 결국엔 고립되어 뒤주에 가두어져 죽은 사도세자 처럼. 청광과 신광 또한 궁예와 정치적 노선이 달랐다. 그들은 궁예의 편이 아니었고, 결국엔 세상에 오명을 남긴체로 그들을 잔인하게 죽여버린 것이다.

 

▲ 915년(신덕왕 4년) 궁예의 부인 강씨가 “왕이 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말하자 화가 난 궁예가 무쇠방망이를 불에 달구어 강씨를 쳐 죽이고 두 아들까지도 죽였다는 이야기를 담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궁예는 유모의 손가락에 찔려 한쪽 눈이 멀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궁예는 정말로 미치고 말았다. 그 결과 그가 믿고 의지하던 철원지방 마져도 왕건의 지지세력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 뒤로 그가 의심이 많고 곧잘 갑자기 성을 내므로, 여러 보좌관과 장수 관리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죄없이 죽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부양과 철원 사람들이 그 해독을 참을 수가 없었다.

 

- 삼국사기 권 제 50 열전 제 10 궁예전 -

 

"그가 그 뒤로 의심이 많고 곧 잘 갑자기 성을 냈다"라는 대목은 그가 가족들을 죽인 후 얼마나 괴로웠고 죄책감에 시달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여러 보좌관과 장수, 관리가 죽었다는 말은 결국 그들 마져도 왕건 지지세력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궁예가 부인 강씨와 두 아들을 살해한 이유는 왕건의 지지세력이었기에, 그들이 살아 있는 한 모두가 왕건의 지지세력으로 변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부인 강씨와 두 아들을 살해했지만 오히려 그것은 철원 전체를 왕건의 지지세력으로 바꾸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다시말해 전혀 필요 없는 행동이었다는 뜻이다.

 

물론 그가 미쳤기 때문에 부인 강씨와 두 아들을 살해한 것은 아니었다. 철저히 정치적 의도가 개입된 행위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역사에 오명을 남기고 결국엔 자신의 지지세력을 모두 잃어 버리는 결과를 만든 것이다.

 

이후 왕건은 자신이 구충금탑에 서 있었다는 꿈을 꾸었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이는 자신의 지지세력을 늘리기 위한 수작이었다.

 

이는 물론 부인 강씨가 제거되기 이전이었지만 그 때만 해도 조정에는 일부 궁예의 친위세력을 제외하면 모두 왕건의 지지세력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압력을 가면 아무리 수많은 왕건의 지지세력을 몰살시켜버린 궁예라 할지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구충금탑에 관련한 꿈으로 인해 왕건의 지지세력을 늘어만 갔다. 결국 궁예는 최후의 선택을 한다.

 

상인 왕창근이란 자가 당나라에서 와서 철원 저자에 살았다. 정명 4년 무인(918)에 그가 저자 거리에서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생김새가 매우 크고 모발이 모두 희었으며, 옛날 의관을 입고 왼 손에는 자기 사발을 들었으며, 오른 손에는 오래된 거울을 들고 있었다.

 

그가 창근에게 말하기를 "내 거울을 사겠는가?" 하므로, 창근이 곧 쌀을 주고 그것과 바꾸었다. 그 사람이 쌀을 거리에 있는 거지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난 후에는 간 곳이 없었다. 창근이 그 거울을 벽에 걸어 두었는데, 해가 거울에 비치자 가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그것을 읽어 보니 옛 시와 같은 것으로서, 내용이 대략 다음과 같았다.

 

"상제가 아들을 진마에 내려 보내니 먼저 닭을 잡고,

뒤에는 오리를 잡을 것이며,

()년 중에는 두 마리 용이 나타나는데,

한 마리는 푸른 나무에 몸을 감추고,

한 마리는 검은 쇠 동쪽에 몸을 나타낸다."

 

- 삼국사기 권 제 50 열전 제 10 궁예전 -

 

바로 위의 기사 즉. "고경"에 관한 한 일이었는데, 그 일도 사실 궁예가 꾸민 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왕창근이라는 상인도 궁예에게 포섭된 인물이었을 터이고, 그가 우연히 발견했다고 하여 조정에 바쳤을 것이다. 그리고 그 조정에 바치는 동안 여러 중신들이 모두 이 글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는 고경을 위조해 만든 뒤 송함흥 등에게 이를 해석하게 하였다. 고경의 시문 해석에 나선 송함흥, 백탁 ,허원 모두 왕건의 지지세력이었다. 궁예가 알면서도 그들과 함께 왕건을 제거하려고 일부러 그들에게 맡겼는지, 아니면 그들이 왕건의 지지세력이란 것을 모르고 맡겼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리고 그는 왕건이 곧 궁예를 몰락시킨다는 내용의 글로서 해석되기만을 기다렸다. 만약 그런 내용으로 해석이 되어 궁예에게 알려졌으면 왕건은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확실한 왕건의 지지세력들을 모두 제거한 다음, 삼한 통일의 꿈을 꾸었을 것이다. 그리고 궁예도 그것을 노리고 고경의 일을 꾸몄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세상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 송악 세력과 결판을 보았어야 되었을까. 결국 송함흥 등은 거짓으로 해석하여 궁예에게 바쳤다. 그러면 사실 궁예는 어떻게 해야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해석을 맡긴 자들이 그렇게 해석하였는데 어찌해야 할까?

 

송함흥, 백탑 , 허원 세 사람은 왕건의 지지세력이었기에 왕건을 살리기 위하여 거짓으로 해석하여 바쳤다. 궁예는 절망에 빠졌다. 최후의 선택으로 고경의 일을 꾸몄지만 이게 확실히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결국 그는 왕건 지지세력 대학살을 재계하려고 했지만 이제 그를 지지하는 세력은 얼마 없었다. 결국 이 일로 가장 두려움을 느낀 것은 바로 왕건이었을 것이다. 궁예는 무려 세차례나 왕건 제거를 하려다 실패하였다. 그리고 그는 궁예의 옥좌를 찬탈하겠다는 야심이 있었고, 그는 기록에 처럼 충성스러운 신하도 아니었다.

 

오히려 궁예를 견재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가려 했으며 때가 되면 정변을 일으켜 왕이 되려 하였다.

 

왕건은 누군가 자신에게 정변을 일으키라 권유할 것을 은근히 바랬고, 복지겸, 홍유, 배현경, 신숭겸 네 사람은 왕건의 지지 세력으로서, 그들도 자신들이 제거당할 것을 두려워 했다. 그리고 고경에 관한한 일로, 충분히 궁예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 궁예도 그들이 왕건의 세력에 속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고경의 일이 성공하여 왕건을 제거했을 때, 그들도 확실히 제거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먼저 손을 쓴 복지겸 등이 왕건에게 정변을 권유한 것이다.

 

왕건이 정변 권유를 거부한 것은 후세에 자신이 궁예에게 충심을 바쳤다는 것을 보이려 한 것일 것이다. 그래서 계획적으로 거부하다가 결국 마지못해 한다는 듯이 그 일에 동참했을 것이다.

 

왕건이 처음부터 역심을 품지 않았다면 정변 권유를 끝까지 거부했을 것이다. 아니, 처음부터 궁예가 폭군의 오명을 쓰는 일도 없었을 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역심이 있었다. 결국 AD 9186. 고경 사건이 일단락 된 직후에 반란을 일으킨다. 그리고 궁예는 그 소식을 듣고는 철원의 도성에서 도망쳤다. 그 뒤의 행보는 두가지로 엇갈린다.

 

한가지는 기록에서는 그가 미복의 차림으로 도망하다가 부양에 이르고 부양에서 보리삭을 캐어먹다가 주민들에 의해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자체는 말이 되지 않는다. 궁예가 겨우 도성에서 얼마 떨어지지도 않은 곳에 가 있어다는 것도 그렇고, 그가 홀로 도망쳤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그는 철저히 고립무원에 빠졌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기록에 나오는 "참소하는 무리" (고려에 입장에서) 즉 왕건 지지세력 대학살에 동참했고 왕건을 제거하여 궁예의 옥좌를 보전하려 노력한 세력이 아직은 남아 있었다.

 

소판 종간과 내군장군 은부가 그들이다. 그리고 왕건 즉위 5일 만에 반란을 일으킨 환선길과 전선을 내팽겨치고 반란을 일으키려다 미리 발각, 실패한 이흔암 등이 있었다. 그리고 청주에서도 아직까지 그를 반기는 무리가 있었으며 명주 호족 김순식은 충신이었다.

 

궁예는 반란이란 말에 도망쳤다. 물론 그의 병사들도 꾀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기록은 믿을 수 없다.

 

궁예와 그의 친위세력들은 왕건의 추격을 피해 철원에서 조금 떨어진 보개산에 까지 이르렀다. 그 곳에서 성을 쌓고 수일간 항전하였다. 아마 궁예가 죽기 전에 이미 왕건은 고려 개국을 선포했을 것이다. 그리고 환선길과 이흔암은 아직 살아있는 궁예와 연계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궁예는 보개산성에서 최후의 항전을 하였다. 그 동안 환선길과 이흔암이 반란을 일으키려다 실패하고, 모두 얼마가지 않아 처형당했다. 그리고 그의 진정한 충신이었던 소판 종간과 내군장군 은부가 모두 처형당하고, 결국 궁예가 수일간 항전하다가 드디어 보개산성이 무너졌다.

 

궁예는 다시 무리를 거느리고 철원과 포천의 경계에 있는 산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 곳 바위에서 축성을 지휘하며 다시 최후의 항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고, 성을 쌓는다고 해도 과연 적을 맞을 수 있을 지도 의문이었다. 이런 신세에 매우 한탄하던 궁예와 그의 친위 세력은 산이 떠나갈 정도로 망국을 슬퍼하며 울었다.

 

그리고 그의 최후는 이 산 다시말해 명성산(울음산)에서 결정된다. 그는 부하에게 피살되었다는 말과 자살했다는 말이 설화에 있다. 그런 것으로 보아 궁예의 뜻에 따라 그의 부하들이 궁예를 죽이고 왕건에게 항복했을 것이다.

 

그리고 궁예의 후손까지도 존재했다는 것으로 볼 때, 그가 부하에게 피살된 것은 아마 그의 의도였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친위세력을 살리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28. 재위로는 18년간 패자(覇者)와 폭군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와는 반대되는 성군의 기질까지 타고난 인물이었다. 후삼국 시대. 여러가지 군웅이 난립하던 시대를 이기고 왕이 되었다는 사실만 가지고 볼 때 그는 폭군은 아니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철원에서 행해지는 태봉제와 그가 자살했다는 설화로 미루어 짐작해 볼 때 그의 부하들은 그를 버렸어도 민중들은 그의 최후까지 그를 버리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과연 그가 폭군이였다면 이런 융성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을까?

 

궁예는 우리 역사에서 또 하나의 잃어버린 역사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반항하던 호족들을 제거하여 강력한 전제정권을 꿈 꾸었던 궁예. 혈연 중심의 신라 골품제에서 업무 위주로 관제로 개편한 것 모두 그가 한 일이었다. 그는 민심을 교묘히 이용할 줄도 알고 있떤, 뛰어난 정치가였다. 그런 그가 기록에서 갑자기 폭군으로 돌변하니,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결국 투항할 때 부터 역심을 품고 있던 부하 왕건에게 정변을 당하고 말았다. 사실 그가 한 모든 행위는 왕건을 견재하기 위함이었고, 결국엔 그것이 실패한 것이었다.

 

그가 처음부터 송악과 결판을 보았으면 어떠했을까? 비록 힘들기는 했지만 그가 폭군의 오명을 쓰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두 아들과 부인을 잔인하게 살해하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범한 실책은 또 하나 있다. 그가 만약 후고구려라는 국호를 유지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사실 그가 파멸한 것은 고구려 출신 호족들이 그에게 반기를 들어서이며 그것은 그가 마진으로 국호를 바꿀 때 부터 원한을 가진 자들이었을 것이다.

 

다시말해 마진이라고 국호를 개칭한 것은 그들에게 자신들에게 대접을 소흘히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고, 그들은 일단 1차 왕건 지지세력 대학살을 보고는 죽음이 두려워 감히 나서지 않았다. 그러다가 2차 나주 전투 이후, 왕건 세력이 다시 강성해지기 시작하자 드디어 폭발한 것이다.

 

그가 만약 자신의 기반이었던 고구려 호족 출신들의 대접을 소흘히 하지 않았다면, 청주와 철원이 그가 망국의 길로 들어설 때 까지 그의 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왕건을 계속해서 견재하면서 왕건은 옥좌를 꿈도 꾸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범해 버렸다. 모든 호족들을 적대시하니, 그 호족들이 그의 적으로 바뀌고, 그는 고립되었고 곧 파멸했다.

 

궁예는 출생시부터 권력투쟁은 그의 운명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신라 진골귀족의 후예였다. 그러나 신라의 권력투쟁에 희생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가 나라를 창건한 다음, 그는 일국의 통치자가 되었지만 그의 인생에서 권력투쟁은 늘 붙어다녔다.

 

왕건 세력과 충돌. 그리고 왕건 세력을 끊임없이 견재하던 궁예. 삼국사기에 기록된 그의 모든 행동은 왕건 세력과의 충돌과 관련있는 행동들이었다. 결국 그는 수차례의 실수를 범했다. 자신의 가족들을 죽인 것이 그의 결정적 실수였다. 결국 그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그는 강력한 왕권을 꿈꾸며 호족들이 왕권을 위협할 존재란 것을 금방 알아첼 수 있었던 현실적인 판단력과 뛰어난 정치력이 있었다. 민심을 교묘히 이용할 줄 알았으며 그리고 그래서 일어 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파멸하고 그의 평가는 후세의 몫으로 남겨졌다.

 

그러나 그의 모습이 기록된 삼국사기, 고려사 , 고려사 절요 모두 고려측의 일방적인 기록이었다. 그런 일방적 기록에서 궁예의 본모습을 찾기란 힘들다. 어쨌든 궁예는 난세를 타파하고 일어난, 다시말해 범상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기록들 속에서 한이 서려 있었다.

 

궁예. 강력한 왕국을 꿈꾸며 삼한을 통일하려 했던 패자(覇者)로 보아야 할것인가? 자신의 부인과 자식들까지 죽여버린 폭군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지금도 궁예를 폭군으로 보기 보다는 왕건 세력의 충돌로 인해 파멸한, 비운의 왕으로 재조명 되고 있을 것이다.

 

출처 : http://kin.naver.com/open100/detail.nhn?d1id=111001&dirId=11&docId=479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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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를 보면 왕건(王建)의 역성혁명( 혹은 무력정변 )은 무혈로써 성공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철원, 포천 지방의 전설들을 보면 궁예(弓裔)는 최후까지 왕건의 반란군과 대전했다고 하여 사서의 기록들을 의심케 하고 있다.

 

철원이 태봉의 수도였을 때 궁예가 왕좌를 빼앗기고 왕건에게 쫓기던 궁예가 이 강가에 와서 모든 돌에 구멍이 뚫려 있음을 보고는 좀이 먹은 것으로 여겨 '나의 운명이 다했구나'라고 한탄했기 때문에 한탄강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는 전설이 있다.

 

산정호수 북쪽에 명성산이 있는데, 그 산 이름은 고려 건국 때 왕건에게 쫓긴 궁예의 말년을 슬퍼하여 산새들이 울었다 하여 붙여진 것이라 한다.

 

궁예가 왕건과 항전했다는 철원의 보개산성, 성동리성, 싸우다 달아났다는 패주골, 군사들이 한탄을 하며 쫓겨났다는 군탄리, 궁예가 피신했다는 명성산의 개적동굴이 있다.

 

신라 마의 태자가 망국의 한을 품고 목놓아 울었고, 왕건에게 패한 궁예(혹은 그의 부하들)가 피를 토해 울며 산기슭에서 터뜨린 통곡이 산천을 울렸다는 전설 때문에 명성산은 울음산으로 불린다.

 

경기 포천군 이동면과 가평군 북면에 걸쳐 우뚝솟은 국망봉의 국망(國望)이란 산이름도 왕건의 정변으로 왕좌에서 쫓겨나 도망치던 궁예가 이 산에 올라 자신의 도읍지 철원땅을 바라보며 한숨과 장탄식을 연발했다는 전설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궁예와 그의 부대가 왕건군과 격전을 벌였던 야전골(野戰)이나 궁예가 은신했던 궁예왕굴, 끝내 항복하면서 항서를 전했다는 항서받골(혹은 태봉 초기,왕건이 항복했다고도 한다.)이라는 지명들도 전한다.

 

파주골 지명의 유래는 궁예가 명성산에서 왕건에게 패한 후 도망친 곳이 '패주(敗走)'로 불리다가 시대가 지나 지금은 파주골로 불리고 있다.

 

이동면 장암 3리의 여우고개는 궁예의 군사가 왕건 군사에게 패하여 명성산에 피난하고 있을 때 왕건군사들이 궁예군사를 여우처럼 엿보았다고 해서 부르게 되었다.

 

이동면 도평 3리의 도마치(道馬峙)는 궁예가 왕건과의 명성산 전투에서 패하여 도망할 때 이곳을 경유하게 되었는데, 산길이 너무 험난하여 이곳에서 말을 내려 끌며갔다고 하여 도마치라 부르게 되었다.

 

궁예가 지금의 산정호수 좌우로 적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망원대를 올리고 봉화를 올렸다는 '망봉(望峰)'이 있다.

 

궁예왕이 왕건의 군사에게 쫒기어 은신하던 곳으로서 2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자연동굴로 명성산 상봉에 위치한 '궁예왕굴'이 있다.

 

종합해보면 궁예는 왕건의 무력정변으로 인해 부하들과 궁궐을 탈출해 명성산에 웅거해 왕건의 군대와 싸우다 패하고 궁예는 도망치다 평강에서 백성들에게 시해 당했다는 결과가 나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