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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리학(사주학)/풍수이야기

‘죽은 세종’이 절을 살리다. - 신륵사

by 연송 김환수 2013. 6. 15.

 

죽은 세종이 절을 살리다.

 

신륵사

 

데스크승인 2012.12.06 10:07:59

탁효정 |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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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되면 내 탓, 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속담이 있다. 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 속에는 조상님이 내 DNA를 시원찮게 물려주셨다는 푸념도 섞여있지만, 그보다는 죽은 조상이 복을 제대로 안내려줘 내 팔자가 안 풀렸다는 원망이 더 크게 깔려 있다.

 

조상에 대한 불만이 많은 사람들 중 상당수는 선대의 영험을 제대로 받기 위해 묘 자리를 옮겨야 한다고 믿는다. 요즘 시대에도 이런 믿음 때문에 이장(移葬)이 빈번히 이루어지는 형편인데, 풍수지리설이 종교 그 이상의 종교로 군림하던 조선시대에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세종의 영릉(英陵) 이장이다.

 

세종이 죽고 난 직후부터 조선 왕실에는 흉흉한 일들이 끊이질 않았다. 그런데 연달아 터진 흉사에 한가지 공통점이 있었으니, 왕의 큰아들이란 큰아들은 모두 요절했다는 것이다.

 

세종의 큰아들 문종은 재위 2년만에 세상을 떠나고, 문종의 큰아들 단종은 삼촌에게 살해당하고, 세조의 큰아들인 의경세자는 자다가 갑자기 급살을 맞아서 죽었다. 또한 예종 또한 재위 1년만에 죽고, 예종의 큰아들 인성대군도 태어난 지 3년만에 요절했다.

 

불교적인 관점에서 본다면야, 태종이 이복형제들을 죽이고 세조가 조카를 죽인 업보를 후손들이 고스란히 받은 것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이를 막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을 만큼 절박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세종 사후 장자들의 잇단 요절

 

세조가 아버지 능 여주로 이장

 

명당 덕분에 능침사도 보전돼

 

게다가 세종의 능지(陵地)는 이미 세종이 살아있을 때부터 풍수지리적으로 불길하다는 말이 나온 터였다. 소헌왕후가 1446(세종 28)에 세상을 떠나자 세종은 자신이 묻힐 자리로 태종의 능(헌릉) 바로 옆자리를 택했다.

 

신하들이 수맥이 흐르는 흉지라고 만류하자, 세종은 "아무리 좋은 땅이라도 부모 곁에 장사하는 것만 못하다", 왕비의 능 바로 곁에 자신의 수릉(壽陵, 죽기 전에 미리 만들어 두는 무덤)을 마련했다.

 

이후 장자들의 죽음행렬이 계속되자, 세조는 왕실에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를 걷어내기 위해 세종의 능을 옮기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여주 봉미산 자락에서 조선 최고의 명당을 찾아냈다.

 

영릉은 명당의 교과서라 불릴 정도로 완벽에 가까운 명당으로 꼽힌다. 어떤 풍수가들은 이곳을 일컬어 산세가 봉황이 알을 품듯 능을 감싸고 있는 형상[飛鳳抱卵形]이라 하고, 어떤 풍수가는 모란 꽃봉오리로 둘러싸인 형상[牡丹半開形]이라 일컬으며, 어떤 이는 용이 돌아서 영릉을 쳐다보는 형상[回龍顧祖形]이라고 말한다.

 

수식어야 어찌 되었든, 영릉 주변의 산봉우리들이 왕릉을 폭 끌어안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서 풍수지리의 문외한조차도 명당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곳이다.

 

묘 자리를 잘 쓴 덕분인지, 어쨌든 조선왕조는 세조 이후에도 400년이나 더 지속되었다.

 

정희왕후는 영릉에서 약 10리 정도 떨어진 신륵사를 영릉의 능침사로 삼고 절 이름을 보은사(報恩寺)라고 고쳐지었다. 남한강이 굽이굽이 돌아흐르는 길목, 하얀 백사장과 푸른 물결, 드넓은 평야가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지는 곳에 신륵사가 위치해 있다. 이런 명당 중의 명당에 위치한 절이 조선시대에 폐사되지 않고 잔존할 수 있었다는 것은, 사실 기적과도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대부분의 명산대찰이 깊은 산골짜기에 남아있는 것은 옛날 사람들이 산에만 절을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평지에 보기 좋게 자리 잡은 절들이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유생들에 의해 폐사되었기 때문이다.

 

실록을 비롯한 조선시대 사료에는 유생들이 능침사에서 술을 먹고 행패를 부렸다거나 불을 질렀다는 이야기들이 종종 나타나는데, 이때마다 왕실에서는 그 유생을 잡아다 엄중한 처벌을 내렸다. 죄명은 바로 왕실모독죄였다.

 

만일 신륵사가 세종의 능침사가 아니었다면 진즉에 폐사되어 양반가의 별장이 되었거나 향교나 서원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의 명운을 연장해준 영릉의 능침사로 지정된 덕분에 신륵사의 명운 또한 함께 연장될 수 있었다.

 

이 모든 게 세종대왕 묘 자리를 잘 쓴 덕택이었으니, 영릉의 음덕을 가장 크게 입은 이는 바로 신륵사 부처님이 아닐까 싶다.

 

[불교신문 2871/ 1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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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륵사 (神勒寺)

유형 : 유적

시대 : 고대/삼국

성격 : , 사찰

소재지 :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천송리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천송리 봉미산(鳳尾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절이름을 신륵이라고 한 데는 미륵(彌勒) 또는 왕사 나옹(懶翁)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전설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리고 고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 나타난 용마가 걷잡을 수 없이 사나웠으므로 사람들이 잡을 수 없었는데, 이 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神力)으로 제압하였다고 하여 절이름을 신륵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또한 이 절은 고려 때부터 벽절甓寺이라고도 불렸다. 이는 경내의 동대(東臺) 위에 다층전탑이 있는데, 이 탑 전체를 벽돌로 쌓아 올린 데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절이 대찰을 이루게 된 것은 나옹이 이곳에서 갖가지 이적을 보이면서 입적(入寂)하였기 때문이다. 나옹이 입적할 때 오색 구름이 산마루를 덮고, 구름도 없는 하늘에서 비가 내렸으며, 수많은 사리가 나왔고, ()이 호상(護喪초상 치르는 모든 일을 주장하여 보살피는 것)을 했던 일들이 그것이다. 3개월 뒤인 1376(우왕 2) 815일에 절의 북쪽 언덕에 정골사리(頂骨舍利)를 봉안한 부도를 세우는 한편 대대적인 중창이 함께 이루어졌다.

 

이때 대전(大殿조당(祖堂승당(僧堂선당(禪堂종루(鐘樓동익당(東翼堂서익당(西翼堂남행랑(南行廊향적당(香積堂) 등의 많은 건물이 신축되거나 중수되었다. 그리고 나옹의 진영(眞影)을 모시는 선각진당(禪覺眞堂)도 건립되었다.

 

, 1382년에는 2층으로 된 대장각(大藏閣)이 건립되면서 간행한 대장경 1부를 봉안하였다. 대장경 불사(佛事)를 발원한 것은 이색(李穡)의 아버지인 이곡(李穀)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이색이 그 뜻을 계승하여 나옹의 제자들과 함께 간행하였다. 신륵사의 승려 무급(無及)과 수봉(琇峯)이 중심이 되고 그 제자들이 전국으로 흩어져 시주를 모았는데, 200여 명이 이 불사에 참여하였다.

 

이 중에는 각운(覺雲신조(神照자초(自超) 등의 고승들과 최영(崔瑩조민수(曺敏修최무선(崔茂宣) 등의 이름이 나타나고 있다. 1381년에 각주(覺珠)가 금자(金字)로 제목을 쓰고 각봉(覺峯)은 황복(黃複)을 만들었으며, 12월에 성공(性空)이 함을 만든 뒤 1382년 정월에 화엄종 소속 사찰인 영통사(靈通寺)에서 교열한 다음 4월에 배에 실어 신륵사에 봉안하였다.

 

또한, 대장각 안에는 대장경과 함께 권희(權僖)가 조성한 비로자나불상(毘盧遮那佛像)과 홍의룡(洪義龍)이 죽은 딸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조성한 보현보살상(普賢菩薩像), 그리고 강부인(姜夫人)이 시주를 얻어 조성한 문수보살상(文殊菩薩像)을 봉안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배불정책으로 이 절 또한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광주의 대모산(大母山)에 있던 영릉(英陵 : 세종의 능)이 여주로 이장된 1469(예종 1)부터 왕실에서 신륵사를 영릉의 원찰(願刹)로 삼을 것을 결정하였고, 1472(성종 3) 2월에 대규모 중창불사가 시작되어 8개월 만에 200여 칸의 건물을 보수 또는 신축하였다. 그 이듬해 대왕대비는 신륵사를 보은사(報恩寺)라고 개칭하였다.

 

그 뒤 이 절은 사대부들이 풍류를 즐기는 장소로 전락했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병화로 폐허가 되었다. 1671(현종 12)에는 계헌(戒軒)이 중건하였고, 1700(숙종 26)에는 위학(偉學)과 그의 제자 우안(宇眼천심(天心) 등이 삼존상을 중수했으며, 이어서 1702년에도 중수하였다. 1726(영조 2)에는 영순(英淳) 등이 동대에 있는 전탑을 중수했는데, 당시에 세웠던 비가 지금도 남아 있다.

 

1796(정조 20) 영돈녕 김이소(金履素)와 예조판서 민종현(閔鍾顯) 등이 중수를 시작하여 이듬해 범중각(泛中閣식당을 지었으며, 가자첩(嘉資帖) 50여 장을 하사받았다. 1858(철종 9)에는 순원왕후(純元王后)가 내탕전(內帑錢)을 희사하여 불전(佛殿선료(禪寮종루 등을 중수하였고, 1929년에는 주지 성인(性仁)이 명부전(冥府殿)을 중수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금당(金堂)인 극락보전(極樂寶殿)을 중심으로 하여 조사당(祖師堂명부전·심검당(尋劍堂적묵당(寂默堂봉향각(奉香閣칠성각(七星閣종각(鐘閣구룡루(九龍樓)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극락보전은 정면 3,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다포집으로 1797(정조 21)에 시작하여 1800년에 완공된 건물이다.

 

내부에는 목조아미타삼존불을 봉안하였고, 1900년에 그린 후불탱화·신중탱화·감로탱화와 1908년에 조성한 지장탱화가 있으며, 1773(영조 49)에 주조한 범종(梵鐘)이 있다. 그리고 극락보전 정문 위에는 千秋萬歲(천추만세)’라고 쓴 현판이 있는데, 나옹의 친필이라고 구전되고 있다. 이 현판은 입체감을 나타내고 있어 보는 위치에 따라 글씨가 달라 보이는 특이함이 있다.

 

보물 제180호로 지정된 조사당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중앙에 나옹, 좌우에 지공(指空)과 무학(無學)의 영정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정면 3칸의 맞배집인 명부전 내부에는 목조지장삼존(木造地藏三尊)을 비롯하여 시왕상(十王像)과 판관(判官) 등 총 29구의 상이 봉안되어 있다.

 

적묵당은 선원(禪院) 구실을 한 건물이고, 심검당은 강원(講院) 구실을 하는 정면 6칸의 자형 건물로 선각당(禪覺堂)이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심검당 바로 옆에는 극락보전의 분수승(焚修僧)이 거처하는 3칸의 봉향각이 있고, 봉향각 뒤쪽에는 칠성탱화와 산신탱화·독성탱화가 봉안된 칠성각이 있다.

 

이 밖에도 신륵사에는 보물 제225호로 지정된 대리석재의 다층석탑, 국내에서 유일하게 완성된 형태로 남아 있는 전탑인 보물 제226호의 다층전탑(多層塼塔), 고려 말기의 대표적 부도양식을 띤 보물 제228호의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 비천(飛天)과 용이 새겨져 그 형태가 매우 아름다운 보물 제231호의 석등, 1379년 나옹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보물 제229호의 보제존자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 이색과 나옹의 제자들이 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대장각을 세운 연유를 기록한 보물 제230호의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가 있다.

 

이 밖에도 절의 동쪽 강변 바위 위에는 삼층석탑이 있고, 경내의 서쪽 언덕에는 부도 2기가 있다. 삼층석탑은 나옹을 화장한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탑이고, 부도는 원래 조사당 뒤쪽에 있던 것을 196611월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나 누구의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들 부도 중 둥근 탑신을 가진 부도는 근세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8각 탑신을 가진 부도는 고려시대의 부도형식에서 퇴화된 여말선초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이전할 때 사리함이 발견되어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또한, 나옹의 화장지에 세워진 삼층석탑 옆에는 강월헌(江月軒)이라는 6각의 정자가 있다. 그 전에 지어진 것은 1972년의 홍수로 떠내려가고, 그 뒤 삼층석탑보다 조금 아래쪽인 지금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 누각의 이름인 강월헌은 나옹의 당호인데, 그를 추념하여 이곳에 누각을 세운 것이다. 또한 구룡루는 1689(숙종 15)1749(영조 25), 1860(철종 11)에 각각 중수된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