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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정보방/불사사의,기타

눈부실 정도로 웅장하고 하얗게 반짝거리니 …파주 용암사 마애이불입상

by 연송 김환수 2013. 6. 15.

눈부실 정도로 웅장하고 하얗게 반짝거리니

 

<17> 파주 용암사 마애이불입상

 

데스크승인 2013.06.11 14:02:25

이장희 | 일러스트레이터 www.tthat.com

 

 

둥근 갓을 쓴 원립불상은 남상(男像)이라 전해 내려오고 연꽃을 들고 있는데 꽃은 잘 보이지 않는다.

 

갓이나 천개(天蓋)를 씌우는 의미는 눈이나 비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려시대불상에 많이 보여 진다. 두 석상은 얼굴 형태만 다르고 전체적인 기법은 같다.

 

양 어깨를 모두 덮는 법의를 입고 있으며, 허리에 묶은 띠 매듭이 무척 선명하고 인상적이다. 온몸 여기저기 패인 자국들은 625한국전쟁 때의 탄알 흔적이라고 한다. 아픈 상흔의 역사까지 품고 있는 석상이다. 높이는 17.4미터에 이르며 보물 제93호로 지정되어 있다.

 

오늘날에도 아이를 바라는 많은 부부들이 불공을 드리러 온다고 하는 두 입불석상은 묘하게도 세상을 떠난 많은 이들의 안식처인 서울시립공원묘지 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저 아이러니할 따름이다.

 

그 우거진 숲은

내게 말을 하고 있다

 

조금 더 내려놓으라고

조금 더 편안한 마음으로

세상에 기대라고

 

 

사각의 갓을 쓴 방립불상은 여상(女像)이라 전해지고 합장을 하고 있다.

 

대웅보전을 비롯한 작은 절집이 두서너 채 뿐인 소담한 용암사 경내를 지나 숲 사이로 반듯하게 놓인 돌계단으로 접어든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를 때마다 나무 사이로 희끗희끗 보이는 화강암의 하얀 빛깔이 초록 나뭇잎 사이에서 유난히 찰랑인다.

 

파주 용미리의 마애이불입상(磨崖二佛立像)을 보러 가는 길, 6살 딸아이와 처음으로 함께 떠나는 스케치여행이다. 아이는 유부초밥 도시락을 언제쯤 먹을 수 있을까가 가장 큰 관심사인지도 모르지만, 직접 준비물을 챙겨 어깨에 멘 작은 소풍가방에는 도시락 뿐 아니라 스케치북과 색연필을 넣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드디어 계단이 끝나는 부분. 아이가 올려다 본 거대한 입불석상은 더욱 웅장하고 하얗게 반짝거리는 것만 같다. 마치 초여름의 이른 무더위에 눈이 부실 정도로!

 

용암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정확히 나와 있지 않다. 하지만, 마애불이 만들어진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어 대략 고려 때로 짐작하고 있는데 사연인즉 이렇다.

 

고려 제13대 왕인 선종(재위: 10831094)은 자식이 없자 세 번째 부인으로 원신궁주를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아이가 들어서지 않았고, 궁주의 근심도 날로 커져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에 두 도승이 찾아와 말하길, “우리는 장지산 남쪽 기슭 바위틈에 사는 사람들이오. 지금 배가 몹시 고프니 먹을 것을 좀 주시오.” 라는 짧은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꿈을 깬 궁주는 이 기이한 이야기를 왕에게 아뢰었고, 왕은 신하들을 시켜 장지산을 살펴보게 하였다.

 

그 곳에는 사람을 닮은 커다란 바위 두 개가 있었으니, 왕은 즉시 바위에는 두 도승을 새기고, 옆에는 절을 짓게 하였다. 그리고 불공을 드리자 그 해 바로 왕자 한산후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창건설화도 재미있고, 토속적인 느낌이 물씬 묻어나는 석상의 푸근함도 마음에 든다.

 

산 언저리에서 아이가 그토록 기다려 하던 점심 도시락을 먹고 산사의 스케치를 담아 본다. 석탑을 그리는 아이에게 몇 층짜리 석탑인지를 물으니 이내 기단부터 상륜부 장식까지 열심히 세고 있다.

 

나는 최대한 쉽게 석탑이란 어떤 것이고, 몸돌에서 층수를 구분하는 법을 알려준다.

 

여섯 살에게 너무 이른 건 아닐까. 내심 편안하게 시작하려던 스케치여행을 따분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걱정도 앞선다. 하지만, 그림 속에서 탑신부의 옥개석을 두드러지게 표현해 내는 걸 보며 제대로 이해 한 듯싶어 다행스러운 마음이 든다.

 

나는 아이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며 앞서 그리다 멈춘 마애불 너머의 숲을 채워나간다. 그걸 보던 아이가 말한다.

 

아빠, 제가 숲을 쉽게 그리는 법을 가르쳐 드릴게요.”

 

아마 내가 숲을 그리는 모습이 힘들어 보였는가 보다. 아이는 자신만만하게 초록색 색연필을 꺼내더니 거침없이 둥글둥글 선들을 감아 올려 자신의 스케치북을 채워 나간다.

 

어려울 것 하나 없어 보인다. 태초부터 자리를 정하고 서 있는 듯 한 마애불의 미소처럼 부드럽다. 이내 스케치북 안의 숲은 작은 손 안에서 보글보글 부풀어 올라 생명을 얻는다.

 

그 우거진 숲은 내게 말을 하고 있다. 조금 더 내려놓으라고, 조금 더 편안한 마음으로 세상에 기대라고.

 

[불교신문2919/20136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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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 보물 제93

명 칭 :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坡州 龍尾里 磨崖二佛立像)

분 류 유물 / 불교조각/ 석조/ 불상

수량/면적 : 2

지정(등록): 1963.01.21

소 재 지 : 경기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산8,9

시 대 : 고려시대

소유자(소유단체) : 국유

관리자(관리단체) : 파주시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에 대한 설명입니다.거대한 천연 암벽에 2구의 불상을 우람하게 새겼는데, 머리 위에는 돌갓을 얹어 토속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까닭에 신체 비율이 맞지 않아 굉장히 거대한 느낌이 든다. 이런 점에서 불성(佛性)보다는 세속적인 특징이 잘 나타나는 지방화된 불상이다. 왼쪽의 둥근 갓을 쓴 원립불(圓笠佛)은 목이 원통형이고 두손은 가슴앞에서 연꽃을 쥐고 있다. 오른쪽의 4각형 갓을 쓴 방립불(方笠佛)은 합장한 손모양이 다를 뿐 신체조각은 왼쪽 불상과 같다.

 

지방민의 구전에 의하면, 둥근 갓의 불상은 남상(男像), 모난 갓의 불상은 여상(女像)이라 한다. 고려 선종이 자식이 없어 원신궁주(元信宮主)까지 맞이했지만, 여전히 왕자가 없었다. 이것을 못내 걱정하던 궁주가 어느날 꿈을 꾸었는데, 두 도승(道僧)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長芝山)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 틈에 사는 사람들이다. 매우 시장하니 먹을 것을 달라고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꿈을 깬 궁주가 하도 이상하여 왕께 아뢰었더니 왕은 곧 사람을 장지산에 보내어 알아 오게 하였는데, 장지산 아래에 큰 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다고 보고하였다. 왕은 즉시 이 바위에다 두 도승을 새기게 하여 절을 짓고 불공을 드렸는데, 그 해에 왕자인 한산후(漢山候)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 불상들은 고려시대의 조각으로 우수한 편은 아니지만, 탄생설화가 있는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고려시대 지방화된 불상양식을 연구하는 귀중한 예로 높이 평가된다.

 

거대한 천연암벽에 2(二軀)의 불상을 우람하게 새긴 이 마애불상(磨崖佛像)들은 머리 위에 돌갓을 얹어놓은 토속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고려시대(高麗時代) 석불입상이다. 전체적으로 괴량감(塊量感)이 느껴지는 이 불상들은 불성(佛性)의 특징보다는 토속적인 특징을 얼굴에 나타내고 있는 지방화된 불상이다.

 

왼쪽의 둥근 갓을 쓴 원립불(圓笠佛)은 자연적인 미소가 깃든 네모진 얼굴과 삼도(三道)가 없는 원통형(圓筒形)의 목, 당당한 어깨를 나타내고 있으며 두손은 가슴앞에서 연화(蓮華)를 쥐고 있다.

 

양어깨에 걸친 통견의(痛肩衣)는 양쪽으로 단계적인 세로무늬를 간결하게 나타내고 있으며 가운데는 V자 모양을 선각(線刻)하고 있는데 아래 끝쪽은 의외로 부드러우며, 가슴에 보이는 띠매듭는 장식적인 효과를 주고 있다.

오른쪽의 네모난 갓을 쓴 방립불(方笠佛)은 합장을 하고 있는 수인(手印)만 다를 뿐 세부의 조각수법은 오른쪽의 원립불(圓笠佛)과 거의 같다.

 

이 불상들은 고려시대 불교조각으로는 별로 우수한 편은 아니나, 고려 선종(宣宗)과 원신궁주(元信宮主)의 왕자인 한산후(漢山侯)의 탄생과 관계된 설화가 있고, 옆의 명문까지 새겨져 있어 고려시대의 지방화된 불상양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예로 높이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