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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예 방/하고 싶은 이야기

대마도 한국 땅 (이승만 대통령 선언)

by 연송 김환수 2011. 1. 8.

1949년 1월 7일 이승만 대통령 `대마도는 우리땅`이라고 선언

 

1949년 1월7일, 이승만 대통령이 내외신 기자들과 가진 회견에서 ‘대마도는 우리 땅’이라고 전격 선언했다.

 

2차대전 패전으로 구(舊)소련에 북방도서 4도를 빼앗겨 의기소침해 있던 일본인들에겐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다.

 

이대통령은 “배상요구는 어느 시기까지로 한정할 것인가”라는 한 기자의 질문에 답하던 중 이같이 폭탄선언을 했다.

 

이대통령은 “대마도는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에게 조공을 바쳐온 속지나 마찬가지였는데 350년 전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이 대마도를 무력강점한 뒤 일본 영토가 됐고, 이때 결사항전한 의병들의 전적비가 도처에 있다”며 배경을 설명했다.

 

10여일 뒤 31명의 우리 의원이 ‘대마도 반환촉구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해 일본을 더욱 압박했다.

 

대마도 요구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한 맞대응, 장차 있을 한일회담에서 유리한 협상 고지를 점령하려는 엄포용 성격이 강했지만 회견소식을 접한 일본의 요시다(吉田) 총리는 혼비백산 맥아더 사령관에게 달려가 하소연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세계적인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가 해방이 돼 1945년 9월 귀국을 서두르자 ‘대마도는 내 줄 수 있어도 우장춘은 내줄수 없다’며 귀국을 만류했다는 일본 정부였다.

 

대마도 최북단 와니우라 해안의 한국전망대에 오르면 부산이 보인다. 저녁에도 광안대교의 불빛까지 선명하게 보인다. 대마도에서는 우리 휴대폰을 쓸 수 있었다.

 

하지만 “휴대폰이 터지는 곳은 우리의 영토입니다”라는 광고 카피 때문인지, 아니면 대마도에서 우리 휴대폰이 터진다는 스펀지 방송 때문인지는 몰라도 지금은 일본측에서 방해전파를 쏘아 휴대폰을 차단시키고 있다.

 

 

 

대마도가 경상도 땅으로 표기되어 있는 조선 말기의 고지도 '소라동천(小羅洞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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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對馬島)는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에 조공을 바친 우리 땅이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이 그 땅을 무력 강점했지만 결사 항전한 (대마도) 의병들이 이를 격퇴했고 의병 전적비(戰蹟碑)가 대마도 도처에 있다. 1870년대에 대마도를 불법적으로 삼킨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돌려줘야 한다."

 

1949년 1월 7일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이 첫 연두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이날 이승만은 한일국교재개를 언급하면서 대마도 문제를 꺼냈다.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하라는 미국 요구에 맞서기 위한 지렛대로 대마도 카드를 뽑아든 것이다.

이 대통령의 발언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다. 그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한 지 사흘 뒤인 8월 18일 성명에서 '대마도는 우리 땅'이니 일본은 속히 반환하라고 했다. 일본이 항의하자 이승만은 외무부를 시켜 그해 9월 '대마도 속령(屬領)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이승만의 연두 기자회견 직후인 1949년 1월 18일 제헌의원 31명이 '대마도 반환촉구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얼마 후 있게 될 샌프란시스코 미일 강화회의에서 대마도 반환을 관철시킬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국내의 한 언론이 2005년 입수한 미국 국무부 외교문서에 따르면 1951년 4월 27일 한국 정부는 미 국무부에 보낸 문서에 다음과 같이 썼다.

"한국은 일본이 대마도에 대한 모든 권리, 호칭, 청구를 분명히 포기하고 그것을 한국에 돌려줄 것을 요청한다(In view of this fact the Republic ofj Korea request that Japan specifically renounce all right, title and claim to the Island of Tsushima and return it to the Republic of Korea)"고 밝혔다.

 

아쉽게도 같은 해 7월 9일 양유찬 주미 한국대사가 국무부에서 존 덜레스 미국대사를 만나 대마도 문제에 대한 한국의 입장을 전하자 덜레스는 "대마도는 일본이 오랫동안 통제하고 있고 이번 평화조약은 대마도의 현재 지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며 한국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후 우리 정부도 더 이상 대마도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대마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은 조선 초에도 강력하게 제기됐었다. 그것은 고려 때 대마도에 대한 인식이 여진족과 탐라(제주도) 중간쯤이었기 때문이다. 고려와 접경한 여진족은 고려 관직을 받는 것을 영예로 생각했고 이 전통은 청나라가 성립되던 조선 중기까지 이어졌다.

 

탐라도 상대적 독립을 누리다 고려에 복속됐다. 반면 대마도는 상대적 독립을 유지했지만 고려나 조선의 관직을 얻고 생필품을 얻기 위한 교역을 꾸준히 요청했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 대마도를 다루는 고려와 조선의 원칙이었던 것이다.

 

왜구의 침략이 계속되자 세종 원년(1419년) 상왕 태종은 대마도 정벌을 결심한다. 그때 밝힌 교유문(敎諭文)의 서두다.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대마도는 섬으로 본래 우리나라의 땅이다. 다만 궁벽하게 막혀 있고 또 좁고 누추하므로 왜놈들이 거류하게 두었더니 개같이 도적질하고 쥐같이 훔치는 버릇을 가지고 경인년부터 뛰놀기 시작했다."

 

태종의 교유문은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그리고 정벌이 끝난 후 대마도 도주에게 교유문에서 그는 다시 한번 대마도가 우리 땅이었음을 명확하게 밝힌다.

 

"대마도가 섬으로 경상도의 계림(鷄林-경주)에 예속되었던 바 본시 우리나라 땅이라는 것이 문적(文籍)에 실려 있어 확실하게 상고할 수 있다."

 

물론 대마도가 제주도나 거제도 같은 우리 땅은 아니다. 이승만 대통령도 대마도가 우리에 조공을 바치던 땅이라고만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태종 때 대마도가 일본 땅도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15세기 초 태종 이방원의 대마도 인식과 20세기 중반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인식은 일맥상통한다.

 

이후 조선은 대마도에 대해 소극적 태도로 일관했다. 그저 왜구의 근거지 역할만 해주지 않으면 좋다는 정도였다. 임진왜란이 대마도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양다리를 걸쳤던 대마도주는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일본화를 지향했고 임란 직후인 17세기 초 일본의 막번체제에 편입됐다. 조선 전기 때만 해도 조선의 신하임을 당당히 밝혔던 대마도 도주가 일본으로 넘어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지적대로 1870년대 완전히 일본화됐다. 지금 대마도는 일본이 실효 지배하고 있다. 그 근거는 우리가 독도를 실효 지배하는 것보다 훨씬 근거가 약하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것에 비하면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는 주장이 훨씬 설득력 있고 근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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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땅 우리魂 영토분쟁 현장을 가다

<15>대마도의 역사적 진실

 

《“통한다!” 대마도 최북단 와니우라 해안의 한국전망대에 오르면 부산이 손에 잡힐 듯 보인다.

 

해질녘이면 부산의 야경이 빛나고, 카메라 줌을 당기면 광안대교의 불빛까지 선명하게 찍힌다. 여기 저기 휴대폰을 꺼내들고 문자메시지를 받거나 통화하는 한국인 관광객들의 모습이 보인다.

 

취재팀도 휴대폰을 켜보니 액정화면에 안테나 5개가 기운차게 뻗어 올랐다. “휴대폰이 터지는 곳은 우리의 영토입니다”라는 모 통신사의 광고카피가 떠올랐다.》

 

 

●서울에서 열차와 배로 6시간 거리

 

대마도와 부산 간 거리는 49.5km인 반면 대마도와 일본 규슈(九州)는 147km나 떨어져 있다.

 

대마도 주민들은 1950년대 초반까지 저녁 때 배를 타고 부산에 가서 술도 마시고 영화도 보고 놀다가 이튿날 아침에 돌아왔던 것을 기억한다.

 

이후 오랫동안 부산∼대마도 간 뱃길이 끊겼으나, 1999년 정기여객선이 운행되면서 대한해협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특히 올해 서울∼부산 간 고속철도(KTX)가 개통되면서 대마도는 서울에서 반나절이면 갈 수 있는 섬이 됐다.

 

취재팀도 서울에서 오전 6시에 KTX를 타고 부산에 내려가 오전 10시반에 여객선으로 갈아탄 뒤 정오쯤 대마도 최북단 히다카스 항에 닿을 수 있었다.

 

●한국의 자연과 역사가 숨쉬는 섬

 

대마도에는 산고양이, 말, 고려꿩 등 일본열도에서는 볼 수 없는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고 이 섬의 웬만한 사찰에는 신라불이나 고려불이나 조선의 범종이 모셔져 있다. 쓰라린 민족사의 현장도 도처에 있다.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신라 왕자 미사흔을 탈출시키고 처형당한 박제상의 순국비, 조선 숙종 때 조난당해 목숨을 잃은 조선역관사(譯官使) 108명을 기리는 역관사비, “왜놈들이 주는 음식은 먹을 수 없다”고 버틴 면암 최익현의 순국비, 정략결혼으로 대마도주(島主) 가문으로 출가한 덕혜옹주(고종황제의 딸)의 결혼기념비 등등.  

 이즈하라의 슈센지에 있는 항일의병장 면암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최익현 순국비

 

●본디 경상도 계림에 속한 우리 땅

 

“대마도라는 섬은 본시 경상도 계림에 속해 있는 우리나라 땅이다. 이것은 문서에도 기록돼 있는 명백한 사실이다.

 

다만 땅이 몹시 좁은 데다 바다 한 가운데 있어 내왕이 불편한 관계로 백성들이 들어가 살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자기들 나라에서 쫓겨나 오갈 데 없는 일본 사람들이 몰려 들어와 그들의 소굴이 되었다.”

 

세종실록의 기록이다. 또 16세기에 조선 조정이 펴낸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에도 “대마도는 옛날에 우리 계림에 속해 있었는데 언제 왜인들의 소굴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쓰여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비롯해 조선시대에 간행된 지도는 거의 빠짐없이 대마도를 우리나라 영토에 포함시켰다.

 

18세기 중반에 제작된 해동지도는 ‘(우리 영토는)백두산이 머리가 되고 태백산맥은 척추가 되며, 영남의 대마(對馬)와 호남의 탐라(耽羅)를 양발로 삼는다’고 명기했다. 심지어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가 만든 팔도총도라는 지도도 대마도를 조선 영토로 표기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팔도총도’ ‘동국조선총도’ 등 조선시대에 제작된 대부분의 지도는 대마도를

우리 영토로 표시하고 있다.

 

 

●조선의 고을로 인정해 달라는 상소

 

대마도가 속주(屬州)라는 의식은 고려 때부터 있었다. 고려 중엽 대마도주에게 구당관(勾當官)과 만호(萬戶)라는 관직을 내린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본격적인 속주화 작업은 조선 세종 때 이뤄졌다. 1419년 이종무 장군이 병선 227척에 1만7000명의 대군을 끌고 대마도를 정벌한 것이다.

 

1436년 대마도의 식량사정이 어려워지자 도주인 소우 사다모리는 대마도를 아예 조선의 한 고을로 편입시켜 달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에 조선은 대마도를 경상도에 예속시키코 도주를 태수로 봉했다. 그래서 18세기 초 조선통신사를 따라 일본을 방문한 신유한의 ‘해유록(海游錄)’은 당당하게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 섬은 조선의 한 고을에 지나지 않는다. 태수가 조선 왕실로부터 도장을 받았고 조정의 녹을 먹으며 크고 작은 일에 명을 청해 받으니 우리나라에 대해 번신(藩臣)의 의리가 있다.”

 

●일본의 대마도 편입은 19세기 후반

 

19세기 후반 일본 메이지 정부는 대마도를 일본에 편입시켰다. 1868년 대마번(藩)이 메이지 정부에 올린 봉답서를 보면 대마번이 조선의 번속국이었다는 사실을 더욱 확실히 알 수 있다.

 

“조선에 대해 번신(藩臣)의 예를 갖추어 수 백 년 간 굴욕을 받았으니 분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지금의 서계부터 조선이 주조해 준 도서 대신에 일본 조정이 만들어주는 새로운 도장을 사용하여…”

 

이와 관련, 전북대 하우봉(河宇鳳) 교수(사학)는 “일본과 청(淸) 양쪽에 조공을 바친 오키나와의 류큐(琉球)왕국처럼 조선후기의 대마도도 조선과 일본 양쪽에 예속된 ‘양속(兩屬)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승만의 “대마도는 우리 땅” 선언

 

정부수립 직후인 1949년 1월8일 이승만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일본에 대마도 반환을 요구해 현해탄에 거센 파도를 불러일으킨 것도 그런 배경 때문이었다. 이에 당황한 일본의 요시다 내각은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맥아더 장군에게 이 대통령의 요구를 막아달라고 손을 내밀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이후 공식 문서나 외교채널을 통해 대마도 반환을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각국의 외교사절을 만날 때마다 대마도 영유권을 주장했다. 그와 함께 이 대통령은 바다에도 ‘이승만 라인’이라는 어업구역을 설정해 이를 침범하는 일본 어선을 붙잡도록 했다.

 

재일조선인 거류민단 대마도본부 이신연(李新演) 단장은 “이 대통령의 선언이 나왔을 때 대마도에 살던 일본 주민들은 ‘한국이 독립을 해서 미국의 힘을 업고 대마도를 차지하려고 한다, 이제 곧 일본사람들은 쫓겨나게 생겼다’며 크게 불안해했다”고 회고했다.

 

  대마역사민속자료관 입구에 있는 고려문(高麗門). 대마도 번주가 살던 ‘사지키바라’ 성의 제3문으로서 조선과의 선린외교를 위한 영빈문으로 사용됐다. 왼쪽은 조선시대 후기 한일간 조선통신사의 친선교류에 공로가 컸던 일본의 유학자 아메노모리호슈(雨森芳洲)가 주창한 외교원칙 ‘성신지교린’(誠信之交隣)을 기리는 비.-대마도=특별취재팀이즈하라의 슈센지에 있는 항일의병장 면암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최익현 순국비김정호의 대동여지도. ‘팔도총도’ ‘동국조선총도’ 등 조선시대에 제작된 대부분의 지도는 대마도를 우리 영토로 표시하고 있다.

 

●독도문제보다도 입증할 자료 많다

 

일본이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제시하는 증거보다는 대마도가 한국 땅임을 입증할 수 있는 사료가 훨씬 풍부하다. 또한 독도에 대한 일본인의 역사적 인식보다도 대마도에 대한 한국인의 역사적 인식이 훨씬 깊다.

 

하 교수는 “섬을 비워놓는 ‘공도(空島)정책’ 탓에 조선이 대마도를 영토적으로 복속시킬 기회를 놓쳤다”며 “그러나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근거보다 한국의 대마도영유권 주장근거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다는 차원에서 이 대통령의 선언이 나왔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대마도=특별취재팀

[동아일보] 2004-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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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우리나라 고지도에선 우리땅?

[오마이뉴스 정윤섭 기자]

 

▲ 16세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팔도총도에 나오는 대마도

일본 시마네현의 '다케시마의 날' 조례안이 끝내 가결됨에 따라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이 영토분쟁으로까지 치닫고 있다.

 

작금의 상황에서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한다면 대마도는 한국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과연 억지일까?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는 일본 시마네현의 조례안 가결로 촉발된 한·일간의 영유권 논쟁은 새삼 우리의 지난 역사속에 가려져 있던 대마도에 대한 귀속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난 14일 열린우리당 김원웅 의원의 주장으로 더욱 이슈화되고 있는 대마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의 문제는 독도에 대응한 단순한 감정논리만은 아니라는 면에서 이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접근과 주장을 필요로 하고 있다.

 

대마도는 거리상으로 우리나라와 훨씬 가까운 한국과 일본의 중간지점에서 가교역할을 하고 있다. 때문에 임진왜란을 비롯해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교두보로 대마도를 이용 해왔음을 지난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최근 등장하고 있는 대마도 영유권 주장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이미 많은 기록을 통해 알려진 바 있으나 지금까지는 상대적으로 이에 대한 관심이 적어 묻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대마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한 단순 대응논리로 받아들여 질 수도 있으나 역사 속에 등장하는 대마도에 대한 기록은 그것이 단순한 억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한다.

 

이러한 역사적 사료의 근거 중에서도 우리나라 고지도에 등장하는 대마도는 그 실체를 더욱 명확하게 해준다. 따라서 우리나라 고지도에 나타나는 대마도의 모습을 통해 대마도에 대한 영유권의 실체를 좀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아울러 역사적 근거를 만들어 이 문제를 좀더 현실화 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해동필도봉화산악' 지도
우리나라의 고지도를 보면 조선초에 발행된 고지도에서부터 한말에 이르기까지 거의 빠지지 않고 대마도가 우리나라의 지도에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우리나라의 고지도에 등장하는 대마도는 대마도에 대한 우리의 영토의식을 충분히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최근의 상황에서 고지도에 대마도가 나오니까 무조건 우리나라 영토라고 주장한다는 것도 올바른 해석의 태도는 아니지만 그동안 대마도는 당연히 일본땅이라는 우리의 의식에서 벗어나 대마도에 대한 새로운 영토관념을 가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독도가 한국땅임을 증명하는 여러 고지도가 나와 있다. 이에 비해 대마도가 우리나라 영역에 포함되어 있는 고지도는 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같은 고지도 속의 예를 찾아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1530년에 제작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餘地勝覽)>은 우리나라 전도 인본(印本)으로 간행된 조선전도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 첫머리 '팔도총도(八道總圖)'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기록되어 있어 당시 독도에 대한 인식이 확실했음을 보여주는 지도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고지도의 맨 오른편 끝에는 대마도가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다. 우리나라 지도에 일본의 한 섬을 굳이 표시할 리가 없듯이 당시 대마도를 우리나라 영역으로 인식하고 지도를 그렸음을 알 수 있다.

 

 

 

▲ 17세기 김수홍이 간행한 '조선팔도고금총람도'
이와 함께 1673년(현종 14) 김수홍이 목각본으로 간행한 '조선팔도고금총람도'에도 대마도가 등장한다. 이 지도 또한 울릉도의 윗 부분에 우산도라는 지명으로 독도를 기록하고 있어 독도에 대한 영유권과 함께 대마도에 대한 영유권이 명확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는 정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지도집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여지도(與地圖)'로 불리는 지도집이다. 이 지도집의 '아국총도'는 1789년(정조13)에서 1793년(정조 17)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제1첩에 세계지도인 '천하도지도(天下都地圖)'를 비롯하여 '아국총도'와 동아시아지도, 연행로도, 일본, 유구, 관방지도가 실려 있다.

 

'아국총도'는 400여 개에 달하는 섬들이 그려져 있어서 당시 바다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도서해안의 섬을 살펴볼 수 있는 지도이기도 하다. 이 지도에도 강원도 지역에 울릉도와 우산도(독도)가 그려져 있으며, 대마도 또한 중요한 비중으로 그려져 있다.

 

이 외에도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지도에 '해동팔도봉화산악지도(海東八道烽火山岳地圖)'가 있다. 현재 고려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는 작자미상의'해동팔도봉화산악지도(海東八道烽火山岳地圖)'는 산맥과 하천, 섬들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는 지도이다. 이 지도의 바다쪽은 바다의 물결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내어 독특한 느낌을 갖게 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바다에 대한 느낌이 더욱 실감이 나게 그려져 있으며 이 지도에도 대마도가 크게 그려져 있다.

 

 

▲ 18세기 초 공재 윤두서가 그린 동국여지도에는 대마도가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와 함께 현재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는 '동국여지도'도 또한 당시 대마도에 대한 인식을 명확하게 해준다. 공재 윤두서(1688~1715)는 '자화상(국보 240호)'을 그린 화가로 '동국여지도'는 조선 후기의 선비화가였던 공재 윤두서가 숙종 36년(1710)에 그린 조선의 지도이다. 공재는 '일본여도'도 그려 그의 일본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이곳 '동국여지도'에는 대마도가 실제보다도 아주 크게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체적으로 우리나라 지도에 등장하는 대마도의 크기가 실제보다 크게 그려지고 있으나 '동국여지도'에도 과장되리 만큼 크게 그려진 것을 알 수 있다.

 

'동국여지도'를 보면 강줄기와 산맥의 표시를 정확하고 섬세하게 표현하였고, 주변도서를 자세히 그렸으며 섬과 육지의 연결수로까지 표시하고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보다 약 150년 정도 앞서 제작된 것으로 매우 섬세하고 사실적인 그림으로 평가받고 있다.

 

1750년대 영조의 명에 의해 '해동지도(海東地圖)'로 불리는 방대한 지도첩이 제작되었다.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는 8첩으로 되어 있는 해동지도가 소장되어 있는데 330여 장의 전국 8도의 군현지도집이라고 할 수 있다.

 

'해동지도'는 각 군현의 연혁, 산천, 고적, 인구, 토산 등의 이름이 적혀 있어 지리지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 도서해안의 섬들도 자세히 그려져 있다. 이 지도를 보면 제주도와 대마도를 좌우에 나란히 그리고 있어 대마도에 대한 인식과 비중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이같은 고지도 속의 대마도는 이외에도 1557년(명종12)경에 제작된 '조선방역지도'(국보제248호), 영조36년(1765)에 제작된 '여지도서(與地圖書)', 순조 22년(1822)에 편찬된 '경상도읍지'를 비롯해, 근세로 이어지는 한말에 와서도 1846년 김대건 신부가 제작한 '조선전도'에는 한반도의 영토 범위를 간도 뿐만 아니라 대마도, 독도까지로 표시하고 있다.

 

대마도 정벌과 대마도의 독립성

 

 

 

▲ 19세기 전반에 제작된 '조선전도'
우리 역사에서 대마도가 가장 크게 등장하고 있는 것이 세종대의 대마도 정벌이다. 그러나 대마도 정벌 관련 기록은 다른 시대에도 있었다.

 

1389년(공양왕 1) 2월에 박위가 병선 100척을 이끌고 대마도를 공격하여 왜선 300척을 불사르고 노사태를 진멸하여 고려의 민간인 포로 남녀 100여 명을 찾아왔으며, 또한 1396년(태조 5) 12월 문하우정승 김사형이 오도병마처치사가 되어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이후 1419년(세종 1) 6월에 다시 대대적인 대마도 정벌이 시행되었다.

 

조선 초기 우리나라의 대일정책은 남쪽 변경의 평화를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었다고 할 수 있어 왜구를 평화적 통교자로 전환하는 일이 시급했다. 이를 위해 조선 정부는 외교적 교섭, 군사적 대응과 회유책을 병행했으나 그럼에도 왜구의 침략이 근절되지 않자 세종 원년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 정벌을 단행한 것이다.

 

<세종실록> 원년 7월17일 기록에는 대마도 정벌 후 도주에게 보낸 교유문에서 “대마도는 경상도의 계림에 예속되었던 바 본시 우리나라 땅이라는 것이 문적에 실려 있어 확실하게 상고할 수 있다. 다만 그 땅이 매우 작고 바다 가운데 있어 왕래함이 막혀 백성들이 살지 않았을 뿐이다. 이에 왜놈으로서 그 나라에서 쫓겨나 갈 곳 없는 자들이 몰려와 모여 살며 소굴을 이루었다”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을 살펴보면 대마도가 옛날 우리나라 땅이었다는 대마고토의식(對馬故土意識)을 엿볼 수 있으며, 대마도가 일본 본주(本州)와는 다르다고 하는 의식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대마도에 대한 여러 역사적 근거자료나 상황을 놓고 볼 때 대마도는 일본과 우리나라로부터 아주 독립적인 위치에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나종우 교수가 쓴 <중세 대일교섭사>에서는 대마도는 고려에 대하여 독자적으로 진봉선 무역을 하였고 무로마치 막부시대에도 일본으로부터 독립적 위치에 있었으며, 막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조선과의 무역도 독자적이었으며, 막부의 사신 호행(護行)도 하지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세종 26년(1444) 일기도 초무관 강권선은 대마도에 대해 '일본 국왕의 명령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라고 하여 일본 본주와 다른 지역으로 파악하기도 하였다.

 

이같은 흐름 속에서 대마도는 임진왜란과 한말의 국력쇠잔, 일제의 병탐에 의해 1869년 판적봉환을 이즈하라(嚴原藩)로 하고, 에이지 정부는 1877년 중앙집권의 폐번치현(廢藩置縣)에 의거, 일본의 나가사키현(長崎縣)에 강제 편입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마도에 대한 문제는 1949년 1월 8일 이승만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에서 대마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일본에게 대마도의 반환을 요구하여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도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건국직후인 1948년 8월에 대마도 반환 요구를 한 후 일본측에서 물의가 일자 9월에 다시 대마도 속령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였고, 이후에도 거듭 대마도 반환 요구를 하였으나 일본측의 항의와 당시 미국의 맥아더 사령부에 의해 거부되고 만다.

 

또한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선언'서 대마도 영유권을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학자들에게 '대마도 연구' 집대성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여 대마도는 일본땅이라는 논리적 근거를 마련했다.

 

우리의 지난 역사 속에서 대마도는 일본땅이라는 단순개념화가 성립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이러한 단순개념을 여러 근거와 연구를 통해 좀더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해 볼 때라 여겨진다.

 

 

참고자료

- 김화홍, 「대마도도 한국땅」, <知와 사랑>

- 한영우, 안휘준, 배우성, 「우리 옛지도와 그 아름다움」, <효형출판>

- 이병선, 「임나국과 대마도」, <아세아문화사>

/정윤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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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되찾기 http://www.mongkang.com/2262

 

잊혀져간 역사적 숨결의 뒤안길 / 역사의 향기와 삶의 재조명 및 역사의식 고취

 

부산에서 49.5km, 반면 규슈(九州) 후쿠오카는 147km 떨어진 이곳 대마도는 본디 우리 땅이었다. 이 섬의 웬만한 사찰에는 신라불이나 고려불이나 조선의 범종이 모셔져 있다.

 

그리고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신라 왕자 미사흔을 탈출시키고 처형당한 박제상의 순국비, 조선 숙종 때 조난당해 목숨을 잃은 조선역관사(譯官使) 108명을 기리는 역관사비, “왜놈들이 주는 음식은 먹을 수 없다”고 버틴 면암 최익현의 순국비, 정략결혼으로 대마도주(島主) 가문으로 출가한 덕혜옹주(고종황제의 딸)의 결혼기념비 등등 역사의 현장도 도처에 있다.

 

올해 서울∼부산 간 고속철도(KTX)가 개통되면서 대마도는 서울에서 반나절이면 갈 수 있는 섬이 됐다. 서울에서 오전 6시에 KTX를 타고 부산에 내려가 오전 10시반에 여객선으로 갈아탄 뒤 정오쯤 대마도 최북단 히다카스 항에 닿을 수 있다.

 

“대마도라는 섬은 본시 경상도 계림에 속해 있는 우리나라 땅이다. 이것은 문서에도 기록돼 있는 명백한 사실이다. 다만 땅이 몹시 좁은 데다 바다 한 가운데 있어 내왕이 불편한 관계로 백성들이 들어가 살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자기들 나라에서 쫓겨나 오갈 데 없는 일본 사람들이 몰려 들어와 그들의 소굴이 되었다.” 세종실록의 기록이다.

 

또 16세기에 조선 조정이 펴낸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에도 “대마도는 옛날에 우리 계림에 속해 있었는데 언제 왜인들의 소굴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쓰여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비롯해 조선시대에 간행된 지도는 거의 빠짐없이 대마도를 우리나라 영토에 포함시켰다.

 

18세기 중반에 제작된 해동지도는 ‘(우리 영토는)백두산이 머리가 되고 태백산맥은 척추가 되며, 영남의 대마(對馬)와 호남의 탐라(耽羅)를 양발로 삼는다’고 명기했다. 심지어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가 만든 팔도총도라는 지도도 대마도를 조선 영토로 표기했다.

 

대마도가 속주(屬州)라는 의식은 고려 때부터 있었다. 고려 중엽 대마도주에게 구당관(勾當官)과 만호(萬戶)라는 관직을 내린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본격적인 속주화 작업은 조선 세종 때 이뤄졌다. 1419년 이종무 장군이 병선 227척에 1만7000명의 대군을 끌고 대마도를 정벌한 것이다.

 

1436년 대마도의 식량사정이 어려워지자 도주인 소우 사다모리는 대마도를 아예 조선의 한 고을로 편입시켜 달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에 조선은 대마도를 경상도에 예속시키코 도주를 태수로 봉했다. 그래서 18세기 초 조선통신사를 따라 일본을 방문한 신유한의 ‘해유록(海游錄)’은 당당하게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 섬은 조선의 한 고을에 지나지 않는다. 태수가 조선 왕실로부터 도장을 받았고 조정의 녹을 먹으며 크고 작은 일에 명을 청해 받으니 우리나라에 대해 번신(藩臣)의 의리가 있다.

 

19세기 후반 일본 메이지 정부는 대마도를 일본에 편입시켰다. 1868년 대마번(藩)이 메이지 정부에 올린 봉답서를 보면 대마번이 조선의 번속국이었다는 사실을 더욱 확실히 알 수 있다.

 

“조선에 대해 번신(藩臣)의 예를 갖추어 수 백 년 간 굴욕을 받았으니 분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지금의 서계부터 조선이 주조해 준 도서 대신에 일본 조정이 만들어주는 새로운 도장을 사용하여…”

 

이와 관련, 전북대 하우봉(河宇鳳) 교수(사학)는 “일본과 청(淸) 양쪽에 조공을 바친 오키나와의 류큐(琉球)왕국처럼 조선후기의 대마도도 조선과 일본 양쪽에 예속된 ‘양속(兩屬)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정부수립 직후인 1949년 1월8일 이승만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일본에 대마도 반환을 요구해 현해탄에 거센 파도를 불러일으킨 것도 그런 배경 때문이었다. 이에 당황한 일본의 요시다 내각은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맥아더 장군에게 이 대통령의 요구를 막아달라고 손을 내밀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이후 공식 문서나 외교채널을 통해 대마도 반환을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각국의 외교사절을 만날 때마다 대마도 영유권을 주장했다. 그와 함께 이 대통령은 바다에도 ‘이승만 라인’이라는 어업구역을 설정해 이를 침범하는 일본 어선을 붙잡도록 했다.

 

재일조선인 거류민단 대마도본부 이신연(李新演) 단장은 “이 대통령의 선언이 나왔을 때 대마도에 살던 일본 주민들은 ‘한국이 독립을 해서 미국의 힘을 업고 대마도를 차지하려고 한다, 이제 곧 일본사람들은 쫓겨나게 생겼다’며 크게 불안해했다”고 회고했다.

 

일본이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제시하는 증거보다는 대마도가 한국 땅임을 입증할 수 있는 사료가 훨씬 풍부하다. 또한 독도에 대한 일본인의 역사적 인식보다도 대마도에 대한 한국인의 역사적 인식이 훨씬 깊다.

 

우리는 섬을 비워놓는 ‘공도(空島)정책’ 탓에 조선이 대마도를 영토적으로 복속시킬 기회를 놓쳤다. 그러나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근거보다 한국의 대마도영유권 주장근거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다.

 

"대마도는 일본 땅,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말은 옳지않다. 독도도, 대마도도 모두 우리 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