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의 능침에 묻힌 충절의 기백
장절공 신숭겸 장군 묘역 홍살문 (안쪽 사당)
신숭겸 묘역 안내도
장절공 신숭겸장군 사당 (춘천시 서면 방동리)
묘 입구
신숭겸 장군 묘
대구근교의 팔공산에서 견훤과 싸우다 후백제군이 그의 목을 쳐 머리를 가져갔다.
장례를 하면서 금으로 얼굴형상을 빚어 몸에 붙이고 뒷날의 도굴을 염려해 3개의 봉분을 만들었다.
묘 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
묘역 길옆 신숭겸 장군 동상
신숭겸유허비
전남 곡성군 목사동면. 전남기념물 제56호. 유허단 위의 비각과 비각안의 신숭겸유허비
세상 인심이 봄비에 흩어지는 벚꽃잎처럼 어지럽다. 위로는 한 나라의 국정을 요리한다는 집권당의 내분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아래로는 살아 생전에 집 한칸 마련 못해 일가족이 세상을 떠나는 참혹한 정경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운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비인간적인 일들의 연속이다. 언제부터 우리가 이처럼 '하루살이' 같은 삶을 살아왔는가 싶다. 집 한칸 마련 못해 살 수 없는 세상이라면 과학은 무엇이며 정치란 무엇인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한식과 청명을 전후해 이 강산 곳곳에는 선조의 묘역을 단장하는 모습이 적지 않게 눈에 띈다. 생각컨대 우리 주위에 헐벗고 어렵게 사는 이웃이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개인이든 문중이든 사회적 선행을 위해 한번쯤 반성의 기회를 가질 만도 하지 않겠는가.
또 충신열사를 도의정신의 근본으로 삼는 우리에게 있어 위아래 없이 진흙탕 속에서 싸우는 정치인의 추태는 누굴 위한 반면교사인지 되묻고 싶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세태를 볼수록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풍수지리설을 반추하게 된다. 타락한 '풍수'가 아닌 참다운 풍수지리를 우리 삶에 적절히 응용했다면 도시의 과밀인구도 해소됬을 터이고 권력의 분탕질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산 자나 죽은 자나 모두 조화와 균형 속에서 자연으로 돌아갈 때 거기 참다운 삶이 있기 때문이다.
야사는 늘 관찬사서에 도전한다. 또 속설은 이른바 正史가 은폐한 사실을 민중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이어줘 역사의식을 일깨워왔다.
지금부터 1천여 년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풍수지리설을 누구보다 신봉한 고려 태조 왕건은 자신이 묻힐 유택을 옥룡자 道詵에게 택하도록 했다.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옥룡자는 지금의 강원도 춘천땅 의암댐 근처에 이르렀다.
양쪽 산이 물을 막고 있는 형세가 뛰어나 여기를 지나면 뛰어난 길지가 있겠구나 싶었다. 과연 그곳에서 좀더 올라갔더니 비단같은 산(금산)이 우뚝 서있었다.
전후좌우를 둘러볼 때 명당이 있을 만했다. 그는 시험삼아 비둘기를 날려보냈다. 비둘기는 지금의 춘천시 서면 방동리의 한 산에 내려앉았다. 가히 임금이 묻힐 만한 땅(君王可葬之地)이었다.
'임자가 따로 있다'는 말이 있듯이 이 터에는 왕건이 아닌 平山申氏의 시조 申崇謙이 묻혔다. 태조가 그에게 준 것이다. 좋은 땅이라면 묻힌 신하의 유택까지 뺏은 뒷날 풍조에서 본다면 이들의 관계는 특별하다고 하겠다.
신숭겸의 본이름은 能山이다. 기록에 의하면 光海州人, 곧 춘천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태어난 곳은 전라도 곡성이라고 한다. 아마 그곳에서 태어나 춘천에서 자라지 않았는가 추측된다. 후삼국시대에 그는 태봉국의 궁예 밑에서 기장 벼슬을 했다.
서기 918년 그는 같은 騎將인 홍유. 배현경. 복지겸 등과 함께 왕건을 추대해 고려를 창건하여 개국원훈 대장군이 됐다. 태조 10년(927) 신라 경애왕의 구원요청으로 후백제 견훤과 싸우기 위해 왕과 함께 출전했다. 현재 대구근교의 팔공산에서 견훤과 싸우다 세가 불리해 고려군이 포위당했다.
태조와 얼굴이 비슷한 그는 왕을 피신케하고 자신이 御車(어차)에 올라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 후백제군은 그의 목을 쳐 머리를 가져갔다. 이때 함께 죽은 장군에 金樂(김락)이 또한 있었다.
후백제군이 돌아가자 태조는 다시 돌아와 그의 시신을 찾아 친히 장사 지내주었다. 그 땅이 바로 현재의 묘소다. 가지런히 3基의 묘가 같이 있는 것이 그의 머리를 찾지 못한 태조가 금으로 얼굴형상을 빚어 몸에 붙이고 장례하면서 뒷날의 도굴을 염려해 3개의 봉분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어느 무덤에 그의 체백이 있는지 후손조차 모른다. 제향을 올릴 때는 다만 가운데 묘를 중심으로 삼는다고 묘역관리 소장을 맡고 있는 후손 신장식 씨는 말했다.
건국공신이자 생명의 은인인 신하에게 '조선8대 명당'의 하나로 꼽히는 자신의 유택지를 기꺼이 내준 점에서 왕건의 왕자다운 도량을 헤아릴 수 있고 또한 사지에서 하나뿐인 생명을 바친 신숭겸의 의리를 장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그의 시호가 壯節임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하겠다.
신숭겸의 후손 중 고려시대에 특별히 이름난 이들이 그리 많지 않다. 우리나라의 족보가 조선조 초기에 이르러 시작됬다는 점에서, 역사에 기록된 한에서는 고려시대의 유면인사는 제한될 수밖에 없고 대부분 조선시대에서 찾게 마련이다.
특히 평산신씨의 경우는 조선중기 이후와 현대에 이르러 그 명성이 자자하다.
예컨대 해공 신익희 선생(전 국회의장), 신현확 씨(전 국무총리), 신직수 씨(전 법무부장관. 중정부장) 등과 조선조의 신사임당. 신립장군(임진왜란 시), 상촌 신흠 등이 모두 평산신씨다.
풍수에서 말하는 지기는 얼마나 오래갈 수 있는가. 우주의 기를 논하는 마당에 지기를 따로 셈한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그럼에도 굳이 땅속의 기를 논할치라면 역학과 오행에 따라 그 한계를 산출할 수 있다고 한다.
워낙 복잡한 이론이라 상세한 것은 전문 지사에게 미루고 장절공 묘소의 경우만 따져보면 대략 2천5백 년 정도 기운이 보장돼 있다고 한다.
앞으로 1천5백 년 이상 동기감응의 위력(?)을 지닌 장절공 묘소의 풍수설을 들어보자.
"금화 오갑산에서 남쪽으로 3백리 달려온 간룡(중심산맥)이 화악산에 이르러 다시 몸을 돌려 1백여리 동쪽으로 뻗어와 兆次山(주산)에서 딱 멈췄다.
크게 보면 이 산맥은 동쪽에 북한강을, 서쪽에는 임진강을 끼고 왔다. 혈은 乾方에서 들어와 戌坐辰向으로 잡았다. 명당주위 물의 흐름은 동북방에서 흘러와서(甲得) 남족에서 막히듯 빠져나갔다(巽破).
형국은 나는 용이 여의주(案山)를 희롱하는 격(飛龍弄珠形)이다. 춘천시내에 있는 봉의산이 조산이 되니 그야말로 용과 봉황이 서로 즐기는 모습이다. 이런 형국은 곧 군왕가장지지다"
"아름답구나, 아름다워"라며 수강 류종근 선생은 몇 번 와서 관찰했음에도 탄성을 그치지 않는다.
그림(산수도)에서 볼 수 있듯이 경기도 가평군과 춘천시 경계에 있는 화악산은 1천4백68m의 높은 산으로 1백리를 뻗어와 방동리의 조차산에서 우뚝 멈췄다.
순창의 용마산(광산김씨 김극뉴의 묘가 있는 산)처럼 윤기가 나고 굵직한 조차산의 모습은 흔히 枝龍(가지산맥)에서 뻗어와 산을 이룬 것이 아니라 바로 본줄기가 통째로 내려와 앉은 것이다.
1백리를 뻗어오면서 양편에서 흘러내린 물만도 99개나 된다. 이들이 모두 장군봉앞의 거북산(龜砂)과 뱀산(巳砂)에서 1차적으로 물의 흐름을 감추고 다시 나아가 장군봉과 코끼리봉에서 또 한번 흐름이 막힌다.
또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온 북한강은 의암댐 앞에서 멈춘다. 댐이 없는 옛날에도 흐름이 막혔는데 지금은 댐으로 인해 더욱 흐르는 속도가 느리다.
비룡의 여의주에 해당하는 안산은 청룡에서 뻗어갔고 백호 또한 여러 겹이다. 장군봉. 봉의산. 대룡산으로 이어지는 조산들의 길이가 또한 1백리인데다 한결같이 동남쪽으로 흘러가는 방향을 지녔음에도 흘러내린 가지들은 묘소를 향해 절하는 모습이다.
산의 웅장함이나 물의 기세가 균형을 이루어 포옹하는 듯하고 산의 모양들이 모두들 귀하고 안정된 형세를 갖춰 조화를 이룬다. 특히 이곳의 조안을 두고 수강은 "우리나라에서 최고"라고 평했다.
옥에도 티가 있듯이 이 형국에도 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청룡이 낮게 끊어진 것은 묘 자체가 세월 속에 한때 잊혀질 수 있는 가능성을 뜻한다. 지난 1천년의 역사에 그런 일이 없을 수는 없는 법이 아닐까 싶다.
정혈을 갖춘 대명당은 대부분 자신을 감추는데 인색하지 않다. 장절공 묘소도 장군봉 앞의 화천으로 빠지는 국도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물론 양기(마을)가 아닌 음택과 양택의 경우에는 그것이 곧 미덕이다. 그러나 그 자신의 위치에서는 상대편(前方)을 환히 내다볼 수 있다.
전하는 속설에는 혈의 위치를 지금보다 앞쪽에 쓰려고 했지만, 그런 경우 뒷날 물속에 잠길 우려가 있다고 해서 현재의 자리에 썼다고 한다. 1천년전에 미리 의암댐의 건설까지 내다본 선인들의 예지가 무심코 넘길 수만은 없다.
장절공 묘역은 후손에 의해 재단장됐고 강원도 지방문화재 21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춘천사람들뿐 아니라 서울사람도 넓은 이곳의 공간을 휴식처로 즐겨 찾고 있다.
자연을 이용(?)하면서도 자연과의 조화를 통해 인간이 살 수 있는 기를 보존해온 옛사람의 슬기를 이곳에서 다시 느끼고 배울 수 있다.
본 간산기는 [新. 한국風水] (崔濚周著 동학사에서 펴냄)에서 발췌해온 글입니다.
최영주선생은 경향신문. 중앙일보등에서 기자 및 편집위원으로 재직하였고 수강 류종근 선생으로부터 풍수학을 수업하였습니다.
저서로는 수강 선생과 함께 쓴 한국 풍수의 원리 1. 2권 등이 있습니다.
최영주 선생께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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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기념물 제1호(대구) 신숭겸장군유적(申崇謙將軍遺蹟)
고려의 개국공신인 신숭겸을 기리는 유적이다. (순절한 곳)
신숭겸(?∼927)은 평산 신씨의 시조로서, 918년 배현경, 홍유, 복지겸 등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의 건국에 이바지한 인물이다. 고려 태조 10년(927) 대구 공산에서 후백제 견훤의 군대와 싸우다가 태조가 적군에게 포위되어 위급해지자, 태조의 옷을 입고 변장하여 맞서다가 전사하였다.
태조는 그의 죽음을 애통히 여겨 그의 시신을 거두어 광해주(지금의 춘천)에 묻고 순절단, 지묘사, 미리사를 세워 명복을 빌었다.
조선 선조 40년(1607)에 경상도관찰사 유영순이 지묘사의 자리에 표충사를 지어 신숭겸을 모셨으며, 후에 이 서원에 사액을 내려 관리하였다. 고종 8년(1871)에 서원철폐령으로 표충사가 없어지자, 후손들이 표충재를 새로 지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이 곳은 고려(高麗) 태사(太師) 개국공신(開國功臣) 장절공(壯節公) 신숭겸 장군이 순절(殉節)한 곳이다.
신숭겸 장군은 태봉(泰封)의 기장(騎將)으로 있으면서 배현경(裵玄慶) 등과 포악(暴惡)한 궁예(弓裔)를 내몰고 왕건(王建)을 받들어 고려를 개국하였다.
장군은 그 뒤에 대장군(大將軍)이 되어 태조(太祖) 10년(927) 태조와 신라(新羅)를 도와 후백제(後百濟)를 공격할 때 대구(大邱) 공산(公山) 싸움에서 후백제군에 포위(包圍)되어 태조가 위기(危機)에 빠지자 태조를 숨기고 자신의 태조를 가장(假裝)하여 대신(代身) 전사(戰死)하였다.
태조는 장군의 죽음을 애통(哀痛)히 여겨 그의 시신(屍身)을 거두어 광해주(光海州)(지금의 춘천(春川))에 예장(禮葬)하고 그곳에 순절단(殉節壇)과 지묘사(智妙寺), 미리사(美理寺)를 세워 그의 영정(影幀)을 모시고 명복(冥福)을 빌게하고 일품전지(一品田地) 삼백무(三百畝)를 하사(下賜)하여 이를 수호(守護)하게 하였다.
조선(朝鮮) 선조(宣祖) 40년(1607)에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유영순(柳永詢)이 폐사(廢寺)된 지묘사(智妙寺) 자리에 표충사(表忠祠)를 지어 공(公)을 모시도록 하였으며 그후 조정(朝廷)에서는 현종(顯宗) 13년(1672)에 이 서원(書院)에 사액(賜額)을 내리어 관리토록 하였다.
고종(高宗) 8년(1871)에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표충사가 훼철(毁撤)된 뒤부터는 후손들이 재사(齋舍)를 신축(新築)하여 지켜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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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양서원 전경
소재지 :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 덕산리 16-1 금계마을
덕양서원(德陽書院)은 전남 곡성군 목사동면 구룡리에 위치하고 있는
고려의 개국 공신 신숭겸을 배향한 사당이다. 선조 22년(1589년)에 창
건하였으나 정유재란 때 모든 건물이 불타고 선조 36년(1603)에 신실이
중수되었으며 현종 6년(1665)이전의 서원 규모로 모두 중건되었다.
이후 1695년에 덕양이라는 사액을 받아 선현배양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
당하여 오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철폐되었
다가 1934년 지방유림의 공의로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건물은 강당, 동재인 연서재와 신실인 덕양사, 서재인 신덕재, 전사청, 그
리고 외삼문, 내삼문 등이 있다. 유적유물로는 덕양서원 건사사적비와 강
당과 연서재의 내부현판 19개가 있으며 출생지인 용산재와 함께 도지방
기념물 제56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숭겸 생가 외부 사진
신숭겸 생가 비각 사진
신숭겸 장군은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시조이며 호는 장절공(壯絶公)으로써 고려시대 개국 공신임- 원명은 능산(能山). 신라시대에는 이곳 욕내군(전남 곡성현 목사동면 구룡리-현 용산제)에서 출생하였다는데 태어나면서부터 몸이장대하고 천성이 용맹스러웠으며 활쏘는 재주와 무예가 뛰어나 장사다운 자질을 갖추었다.
태봉(泰封)의 기장(騎將)으로 있을때인 서기 918년6월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복지겸 (卜智謙)등과 의논하여 궁예(弓裔)를 몰아내고 태조 왕건을 받들어 고려를 개국한 개국공신이다.
태조10년 (서기 927년)가을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태조는 신라를 돕기위해 대구 팔공산 전투에 참가하였다가 수가 많은 후백제군에게 호위를 당해 위험한 상황에 이르럿으며 이때 태조와 비슷한 용모를 갖춘 신숭겸 장군이 태조를 대신해 싸우다가 장열히 전사하였다.
위기를 모면한 태조는 한참뒤에 머리없는 공의 시신을 찾아내어 통곡하였고 없어진 머리를 만들어 태조가 직접 제례를 치루고 광해주 비방동)현 춘천시 비방동)에 예장한 후 전사한 그 자리에 순절단(殉節壇)을 모시고 대구지방에 절을 지어 공의명복을 빌게 하였다. 이곳 묘소에 공의 머리를 금으로 만들어 예장하면서 봉분 셋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를두고 후세에 전해지기를 부인을 함께 합장하였다고도 하나 어느봉분인지 확인할 수 없어 제향은 중앙의 봉분앞에서 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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