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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대 말, 그리고 60년대 초, 가장 인기있는 팝 가수는 뭐니뭐니해도 락큰롤의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 일겁니다.그러나 이 제왕의 인기에 필적하는 여가수가 있었으니 바로 카니 프랜시스입니다. 여자 엘비스 프레슬리라고까지 했으니까요..
아마 30대 중반이후의 분들은 그 이름이 생소하실텐데요, 우리 오래된 가요중에 트윈 폴리오(송창식,윤형주)의 <웨딩케익>이란 노래 잘 아시지요? 바로 이 노래의 원곡을 부른 가수이고, 여름이면 라디오에 많이 흘러나왔던
<V-A-C-A-T-I-O-N> 기억나시죠?
이 노래로 유명한 가수하면 조금 이해가 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이제 슬슬 카니의 인생으로 한 번 들어가 볼까요?
카니는 "콘체타 로즈마리 프랑코네로"라는 이름으로1938년 뉴저지주 북동쪽에 있는 도시 뉴어크에서 출생했습니다. 이름에서 알수 있다시피 전형적인 이태리 혈통의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이 카니의 아버지가 정말 재미있는 사람인데요, 아버지에 대해서는 좀 있다가...
카니는 아주 어린 나이 즉 네살 때부터 음악적인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추억의 악기인 아코디언 연주를 잘해 지방의 TV 쇼에까지 출연하게 됩니다. 그때가 11살 때인데요, 뉴욕시티 텔레비젼의 STARTIME (당시 어린이들이 출연해서 노래하고 춤추는 음악 방송)에 출연을 하게되는데, 이 프로그램의 제작자였던 George Scheck가 프로그램에서 유일하게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노래부르는 카니를 유심히 지켜보다, 노래에 재능을 보이자 아코디언은 접고, 노래에만 집중하기를 권유하고요,
이후 매주 3년동안이나 출연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George Scheck는 데모 테입을 만들어 MGM에 보내기도 했는데, 결국 이 제작자는 훗날 카니의 메니저가 되어 카니와 휼륭한 파트너로 오랫동안 엄청난 레코드 판매고를 기록하기도 합니다. 한 인터뷰에서 이 양반이 글쎄 첫 눈에 카니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에 대해 치를 떨었다는 군요..하기야 로또를 눈앞에서 놓칠 뻔한 거지요...
그런데,카니의 아버지는 처음에 카니가 가수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답니다. 아버지는 카니가 아코디언을 열심히 연마해서 자기 자신의 아코디언 학교를 설립해서 남편이나 또는다른 남자 에게 얽매이지 않는, 당당하고 화려한 싱글로 살기를 바랬다는군요... 딸을 너무 사랑해서 일까요?
하여튼 그 덕에 카니는 맹연습을 하느라, 더 이상 쑤시고 아플 등짝도, 부러질 손톱도 없었다고
웃으면서 회상을 했답니다..(홍수가 나서 아코디언이 지하실에서 산산조각나서야 그 짐을 벗을수
있었데요.) 지금이니까 웃지...
이제 카니 아버지 이야기를 한 번 해볼까요? 아버지 이름은 George Franconero, 메니저 이름도
죠지인데, 죠지랑 인연이 깊은가 봅니다. 전형적인 이태리 혈통 가장으로, 지붕 건축일을 했다는데요, 이태리 가장들의 특징이 딸들을 과잉보호하는건가요? 하여튼 자료에 의하면 전형적인 이태리 혈통 가장으로 카니의 일생에 관해 사사건건 간섭을 했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아버지가 음악적인 귀는 천재적이라고 합니다.카니가 55년에 MGM레코드사와 계약, 데뷔한 이후,2년 동안 별다른 반응이 없자, 카니는 뉴욕대학의 의과대학 장학생으로 들어갈까, 아니면 노래를 계속할까 아님 그만둘까 고민하던 중에 그녀의 아버지가 1923년 히트곡이었던 <Who's sorry now>를 부르기를 강요합니다. 카니는 물론 유행에 뒤쳐진 노래라고 부르기를 꺼려했지만 결과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합니다. 그러니까 딸에게 맞는 노래가 뭔지 아는 놀라운 선견지명을 가지고 있었던 거죠.
즉,아버지 덕분에 무명에서 스타가 된 것이지요. 좀 극성스러워서 그렇지 그래도 이런 아버지, 든든한 응원군 천군만마 아니겠습니까?...
오늘은 여기까지하고요..
2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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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니 프랜시스 두번째 이야기
칼럼니스트 : 김지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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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카니의 아버지 활약상까지 살펴보았지요? 그럼 카니 프랜시스가 성공을 할 수 있었던 그 외의 요인을 한 번 살펴볼까요?
카니의 조기 성공 요인은 크게 두 가지로 이야기 드릴 수가 있는 데요, 첫 번 째 성공의 요인은 바로 전국적인 음악방송 American Bandstand의 진행자인 딕 클락(Dick Clark) 덕분입니다.
딕 클락은 그 당시 최고의 인기 DJ이자 TV진행자 였습니다. 그 때 당시에 "딕 클락이 노래를 틀면 무조건 히트한다!"라는 정설이 있을 정도이니까 팝계에 얼마나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는지 알만한 대목이지요? 실제로 이러한 영향력 때문에 팝계 최초의 뇌물 사건인 "페이욜라(돈을 받고 그 가수의 레코드를을 틀어주는 식)" 사건에 연루되어 청문회에 서기까지 합니다. 아무튼 1958년 1월 카니의 아버지가 골라준 <Who's sorry now>가 딕 클락에 의해 방송될때 "여기 단번에 정상을 차지할 새로운 소녀 가수를 소개합니다!" 라고 얘기했으니 딕 클락의 영향력으로 보아 히트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성공의 요인 두 번째는 바로 카니의 수많은 초기 락큰롤 히트곡을 작곡,작사한 닐 세데카(<오 캐롤> ,<you mean everything to me>로 유명한 싱어송라이터)하워드 그린필드 작곡팀 콤비 덕분입니다. 이 팀의 노래로 수 많은 탑 텐 히트곡을 기록하고, 엄청난 레코드 판매고를 기록해, 카니 프랜시스는 세계적인 가수가 됩니다. 카니는 이러한 장점을 "작곡팀과 가수간의 환상적인 결혼"이라고 까지 표현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도 딕 클락의 영향력이 없었다면 다 불가능했던 것이겠지요? 역시 뭐가 되려면 인복도 타고 나야 되나 봅니다.
이번엔 "콘체타 로즈마리 프랑코네로"가 어떻게 "카니 프랜시스"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는지 한 번 알아 볼까요? 카니가 어린 시절에 "STARTIME"이란 TV프로그램에 출연했다는 것 기억하시지요? 그 프로그램의 진행자가 Arthur Godfrey란 사람이었는데, "프랑코네로"가 발음하기 너무 힘든 나머지, 카니에게 "프랜시스"라는 아이리쉬 이름이 어떠냐고 제안을 합니다. 카니는 물론 "우리 아버지가 그 사실을 알면 나를 죽이려고 할 것"이라고 당연히 극구 반대를 했지요. 소녀의 간절한 소망때문에 도저히 "프랑코네로"가 발음이 안되었지만, 겨우 겨우 대충 발음을 했다고 합니다. 근데 아마 카니의 아버지가 프랜시스라는 이름이 되게 마음에 들었나 보지요? 그 이후로 이 이름을 사용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는 잘 한 일이지요?
그리고, 카니도 사실 <Who's sorry now>가 딕 클락의 “어메리컨밴드스탠드”에 소개되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기전 마음 고생을 많이 한 시절도 있었습니다. 당시, 메니지인 George Shenk가 카니의 데모 테입을 여러 메이저 레코드 회사에 보냈지만,거의 모든 회사에 거절을 당합니다. 그러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MGM 레코드사에서 승낙을 하게 되는데, 그 이유가 카니가 내 놓으려고 한 첫 싱글의 제목이 <Freddy>였는데, MGM레코드사 사장의 아들 이름이 "Freddy"였답니다. 그래서 사장이 이 싱글을 아들의 생일선물로 주려했다는 군요. 그러나 그런 히트 예감에도 불구하고, 첫 싱글은 큰 반응을 얻지 못하고, 58년 히트곡이 나올 때까지 2년 간을 마음 졸이며 살았답니다. 그러나 고맙게도 MGM은 2년을 기다려 주었고, 그에 보답을 하듯, 보라는 듯이 히트곡을 내게 됩니다. 하여튼 인복 하나는 타고 났나봅니다....2년씩이나 기다려 주는 레코드사를 만났으니 말이지요..
58년 이후로 카니는 정말로 인기 절정의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62년까지 탑 텐 히트곡을 쉬지 않고 기록하는데요, 노래 제목을 한 번 살펴볼까요? <Stupid Cupid>, <Lipstick on Your Collar>, <Everybody's Somebody's Fool>, <My Heart Has a Mind of Its Own>, < Don't Break the Heart That Loves You> 기타 등등.. 그리고, " Where The Boys Are"를 필두로 네 편의 영화에도 출연을 합니다. TV 프로그램에서는 가장 비싼 출연로를 받는 섭외 순위 영순위로 정말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1961년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만약 누군가 나에게 3일간의 휴식기간을 가지라고 말한다면, 나는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쉬고 싶다. 근데 지금 하고 싶은 일이 뭔지 모르겠다?" 라고 했답니다. 한마디로 정말 피곤하다는 거죠...
이 시기의 카니의 노래들은 대부분 10대 취향의 사랑타령으로 일관한 락큰롤 넘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좀 보수적인 성향의 비평가들과 음악애호가들은 카니를 탐탁하게 여길리가 없지요. 락큰롤 음악은 그저 한 때의 곧 사라질 유행쯤으로, 경박한 음악이라고 생각들을 하고 있었지요. 하기야 그 위대한 엘비스도, 비틀즈도 이런 취급을 받았으니.... 그러나, 카니는 또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여러 나라의 언어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능력... 그 능력 때문에 비평가들의 반응은 비 호감에서 호감 무드로 전환을 하게됩니다. 카니의 이태리어 앨범과 유대어 앨범을 듣고, 그리고 카네기홀이나 코카카바나, 올림피아 극장과 같은 전 세계를 아우르는 대형 무대(지금의 시각으로 볼 때 말하자면 월드
뮤지션이라 표현할 수 있음.)에서 다양한 언어로 표현하는 카니의 가창력을 직접 눈으로 보고
말이지요. 카니는 또한 조지 거쉰의 고전이나 스윙 음악도 거뜬히 소화를 해냈습니다. 노래에 있어서는 이제 달인의 경지에 이른 것이지요...
카니의 언어 능력을 입증해 주는 얘기가 하나 있습니다. Gabe Temesvari라는 평론가가 말하길 “카니가 다른 나라 언어로 노래 할때 , 당신이 그 언어를 전혀 모른다 하더라도, 그 깊이와 의미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카니의 감정이입 능력은 뛰어나다."라고 했답니다. 하루는 이 평론가의 딸이 일본인 친구를 데리고와서 일본어판 <Where the boys are>를 들려줬는데, 일본인 친구가 하는 말이 미국 가수의 발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발음이 훌륭하다라고 했답니다. 너무 재능이 많은거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오늘은 카니 프랜시스의 한참 전성기때의 얘기를 많이 했는데요, 다음 편에는 또 무슨 얘길 드릴까 이제부터 저는 고민을 해야겠습니다. 카니 프랜시스의 마지막 3편을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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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니 프랜시스의 잘 나가던 시절 얘기를 좀 더해야 되겠군요. 카니의 외국어 구사 능력을 지난번에 얘기 해 드렸는데, 그 능력으로, 그녀의 히트곡과 수 많은 스텐다드 넘버를 외국어로 불렀는데, 이러이러한 노래가 있습니다. "Die Liebe ist ein seltsames Spiel", "Paradiso," "Schöner fremder Mann," "Sueno de Amor," "Donde Hay Chicos," "Jamais," "Danke Schoen" 기타 등등... 그리고, 그녀의 이태리 혈통이 어디 가겠습니까? 이태리 애창곡집도 물론 발표했습니다. 이러니 당연히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을 테고, 그 때문에 미국에서는 100위권에 1969년을 마지막으로 명함을 내밀고 말았지만, 그 이후로도 세계 어느 곳에서 매년 카니의 노래는 차트에 오르고 있었습니다. 아~ 식을 줄 모르는 국제적인 인기....
이런 인기 때문에 카니 프랜시스는 거의 미국의 모든 인기 TV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몇 안되는 가수 였습니다. 페리 코모, 앤디 윌리암스, 마이크 더글라스, 잭 베니, 에드 설리번 쇼 등등 특히 같은 이태리계인 페리 코모는 카니의 <MAMA>를 너무나 좋아해서 여러 번 초대해 그 노래를 부르게 했고, 에드 설리번은 카니의 광적인 팬 수준이라 여러 번 그녀를 초대해, 스텐더드 넘버를 듣기 좋아했다고 그럽니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또 몇 편의 영화에 출연을 합니다. <Follow The Boys>, <Looking For Love >, <When The Boys Meet The Girls >에 출연하며 영화 사운드 트랙도 취입을 합니다. 사실 카니는 자신의 연기를 너무 부끄러워했지만, 그녀의 팬들은 약간은 어색한 연기조차, 좋아했습니다. 몇 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영화의 흐름을 알아서 일까요? 이상하게도 영화 음악가들은 영화 주제곡을 만들고 가사를 붙일 때, 카니의 목소리를 염두에 두고 만들었고, 주제곡 초연(처음 공연)가수로 카니 프랜시스를 많이 지목했답니다. 그런데, 녹음만 해 놓고 정작 발표할 때에는 다른 가수의 목소리로 발표되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영화 주제곡도 많이 있다고 그럽니다. <Somewhere My Love> <Strangers In The Night> <Angel In The Morning> <When Will The Apples Fall>이 바로 그런 노래들입니다. 물론 이런 경우는 카니 에게는 조금 억울한 경우이겠지요?
그리고, 카니는 지미 스튜워트 주연의 영화 <The Flight Of The Phoenix>의 주제곡 SENZA FINE을 부르는 등, 영화 주제곡을 부르기도 하고, 영화에 노래 부르는 장면이 있어서 여배우가 노래를 잘 못 부르는 배우면, 노래 대역 연기도 단골이었습니다.
1964년 비틀즈가 미국에 상륙한 이후, 영국 가수들의 침공이 시작 되었을 때, 미국 가수들, 특히 락큰롤 가수들에게는 잔인한 세월이 시작되고 있을 무렵, 락큰롤 넘버로 큰 인기를 얻었던 카니 프랜시스는 이미 그녀의 빅 밴드를 결성해서, 스텐다드 넘버들을 공연하기 시작했고, 이미 그녀의 락큰롤 탑 텐 히트곡 행진은 마감을 했지만, 여전히 미국 최고 연예인으로 대접을 받고 있었습니다. 바카라크와 데이빗 듀오 (The Look Of Love, I Say A Little Prayer ) 레스 리드(It's Not Unusual, The Last Waltz, Les Bicyclettes De Belsize, Three Good Reasons), 제임스 라스트, 베르트 켐페르트, 핸리 맨시니 등의 스텐다드 넘버뿐 아니라 하와이언 송 까지 소화하며, 60년대를 통해 수많은 앨범을 내면서 말이지요...
뭐니 뭐니 해도 카니 프랜시스의 매력은 너무나 빼어난 미모입니다. 사진을 보셔서 아시겠지만, 아마 그 때 각종 TV 프로그램에서 앞 다투어서, 섭외를 했던 큰 이유도 바로 이 빼어난 미모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쭉 쭉 빵 빵 그 자체였던 거지요. 많은 가수들이 무대에 서기 위해서는 튀는 분장과, 튀는 의상(그때 당시 여가수들은 군복 패션이 유행이었다는 군요)을 연출하기 위해 레이저 빔이나, 특수 조명, 스모그 등 엄청난 노력을 기울어야 했지만, 카니 프랜시스는 정말 그 자체로 아름다웠습니다. 그녀가 입는 의상, 화장, 아름다운 머릿결, 카니는 그 자체가 그림이었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했나요? 카니의 재능과 인기를 시샘이라도 했을까요, 1974년 11월 공연차 들른 뉴욕의 웨스트 베리 호텔에서 성 폭행을 당하게 됩니다. (범인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글쎄요? 카니의 상심은 그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이 컸겠지요? 하지만 카니는 힘든 회복기간에도 호텔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300만 달러의 승소 판결을 받아냅니다. 그 때 까지만 해도 미국의 대부분 호텔은 지금처럼 각종 보안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져있지 않았다고 합니다만, 카니의 사건 이후로 전 미국의 호텔은 CCTV나 안전 키 등의 보안 시설을 갖추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카니는 이 사건 이후 연예계를 떠납니다. 사건의 충격이 얼마나 컸으면 그녀의 그 아름다운 목소리 조차 잃어 버리는 병에 시달리고, 그 와중에 오빠가 살해되는 비극도 겪었고, 그로 인한 우울증으로 수 년간 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시련의 세월 속에도 앨범을 발표하며 재기의 발판을 만들었고, 무엇보다 감동적인 일은 그 끔직한 사건을 겪었던 웨스트 베리 호텔에서 1981년에 컴백 무대를 마련합니다. 역시 큰 인물은 남들과 다른 결연한 의지를 갖고 있는가 봅니다.
그리고 한참 인기 있을때도 했었던 유니세프를 포함한 각종 자선 활동도 사고 이후에도, 지금까지도 하고 있는 인간미 넘치는 여인이기도 합니다.
초기의 락큰롤, 컨트리 그리고 칸쵸네, 라틴 넘버를 포함한 세계 각국의 민요, 각종 스텐다드 넘버 등, 장르와 언어와 국적을 초월해 인기를 얻었던 월드 뮤지션이자, 엔터테이너.... 할머니가 된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카니 프랜시스... 그녀를 한국에서 한 번 볼 수 있기를 희망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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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nie Francis
x-text/html; charset=iso-8859-1" style="width: 70px; height: 25px;" volume="0" x-x-allowscriptaccess="never" autostart="false"> ... Kiss Of Fire
Wedding Cake / Connie Francis
Don't be troubled 'bout me cause I'm tired From workin' 'round the house When day is done Don't think you failed me cause you can't afford That dishwasher to make my life more fun You know, the measure of a man is Much more than just the money he can make And every woman knows a lot of joy and tears Come with the wedding cake
The wedding cake is not all icing And love and tender whispers in the dark One slice is concern for all your dreams prayed They won't come true and break your heart Another slice is feedin' kids and wipin' noses Cryin' when the doorbell rings and there are roses Every woman knows a lot of give and take Comes with the wedding cake
It's facin' shadows of the future Prayin' they will fall away as we walk toward them Searchin' for the sun And it's long and anxious hours with the wolf at the door Hugs and kisses when, at last, we see the dawn So when the hands of time trace tellin' lines upon our face And lace our hair with strands of gray We laugh and say for all who will partake It all comes with the wedding cake
Yes, for all who will partake It all comes with the wedding cake Yes, for all who will partake It all comes with the wedding cake (fade)
제가 하루 일을 마치고도 집안 일을 하느라고 피곤해 하더라도 민망해 하지 마세요.
제게 맛있는 음식을 사주지 못해서 저를 기쁘게 해주지 못했다고 쑥스러워하지도 마세요.
당신도 알다시피, 남자를 평가할 때 어떻게 그 남자가 얼마나 가졌는가 하는 것만 보고서
그 남자를 판단할 수 있겠어요? 여자들은 모든 기쁨과 슬픔이 웨딩케익과 함께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웨딩케익 전체가 다 달콤한 설탕으로 덮힌 것만도 아니랍니다. 우리가 전혀 생각지 못했던
속에서도 사랑과 부드러운 속삭임을 찾을 수 있답니다. 케익 한 조각은 당신의 모든 꿈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런 꿈들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도 있답니다만, 또 한편
으론 아이들을 키우고 뛰어노는 아이들을 뒤치닥거리를 해주면서 행복을 찾을 수도 있는
거랍니다. 여자들은 웨딩케잌과 함께 주고받는 기쁨이 시작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답니다.
밝은 날을 꿈꾸며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닥쳐올 불행한 날들이 사라지기를 바라곤 하지요.
바로 우리 눈앞에 닥쳐오는 어려운 일들 때문에 걱정할 때도 많겠지만 서로를 안아주고 입
맞춤을 해주는 가운데서 우리는 새벽을 볼 수 있게되지요. 그렇게 세월이 흘러 우리 얼굴에
주름이 생겨가고 머리카락도 하얗게 변해가겠지요. 그때 웃으면서 살아온 날들을 이야기하
도록 해요.
우리의 모든 것은 웨딩케익과 함께 시작되었다고요.
그래요 우리가 같이한 모든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도록 해요. 웨딩케잌과 함께 시작된
우리의 모든 일들을요
번악곡 : 웨딩케익/트윈폴리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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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c-a-t-i-o-n
- Connie Francis -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외쳐대는 V-A-C-A-T-I-O-N 대목이 귀에 익은 노래죠.
간단히 짐 챙겨 차 트렁크에 때려넣고 훌쩍 동해나 서해 등지로 떠나고픈
충동 일게 하는 코니 프랜시스의 Vacation입니다.
vacation은 직장인들의 '휴가', 학생들의 '방학'을 뜻하는 말입니다.
카니 프랜시스는 60년대의 팝 디바였지요. 요새도 광고음악에서 카니의 노래가
자주 쓰이다 보니 이름은 잘 몰라도 음악은 다 아실 거예요.
목소리가 청아하고 노래가 아주 경쾌해서 그 시절에 좋아했던 분들 많지요.
요즘에는 여름마다 DJ D.O.C의 '해변으로 가요'란 곡이 자주 들리지만,
6-70년대에는 카니 프랜시스의 "Vacation"으로 여름이 시작되었겠지요.
목소리만 들어서는 얼굴이 갸름하고 다소 마른듯한 서양미인이 떠올라 저도 그렇게 상상했지요.
사진을 자세히 본 것은 근년에 인터넷을 통해서인데, 생각보다는 오동통한 옛날 미인 스타일이더군요.
카니 프랜시스는 나이는 할머니지만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을 하고 있지요.
특히 영국의 올드팬들이 아주 좋아하지요.
몇 년 전에는 영국, 홍콩 등지에서 공연도 했고, 과거의 노래들을 다시 음반에 담기도 했지요.
하지만 예전의 목소리와는 아무래도 달라서 LP로 들을 때와는 분위기가 못 하더군요.
여름에 가장 시원한 음악이 카니 프랜시스의 올디즈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V-A-C-A-T-I-O-N in the summer sun
Put away the books, we're out of school The weather's warm but we'll play it cool We're on vacation, havin' lots of fun
V-A-C-A-T-I-O-N in the summer sun
We're gonna grab a bite at the pizza stand Write love letters in the sand We're on vacation and the world is ours
V-A-C-A-T-I-O-N under summer stars
Yeah, we'll hop in a jalopy to a drive-in movie and never look at the show We're gonna hug and kiss just like this and I can't wait to go, go, go
We're gonna mashed potato to a jukebox tune Park your car 'neath an August moon We're on vacation till the start of the fall
V-A-C-A-T-I-O-N, we're gonna have a ball, go |
V-A-C-A-T-I-O-N 여름 태양 아래 방학이 왔어요.
책들을 멀리 치워버리고 우리는 학교에서 나왔어요 따뜻한 날이지만 우리 시원하게 놀거에요. 즐겁게 놀수 있는 방학에 되었네요.
V-A-C-A-T-I-O-N 여름 태양 아래 방학이 왔어요.
피자 가게에서 피자를 조금 먹고 모래사장위에 연애 편지를 쓸거에요. 우린 방학을 맞이해서 세상이 우리 것이 되었네요.
V-A-C-A-T-I-O-N 여름 별빛들 아래 방학이 왔어요.
자동차를 타고 드라이브 인 영화를 보러갈거에요. 상영중인 영화는 절대 보지 않고 우린 이렇게 껴안고 입맞춤을 할거에요. 기다릴수가 없네요.어서 출발해요.
전축 선율에 맟추어 신나게 춤을 출거에요. 8월 달아래 차를 주차하세요. 가을이 시작될 때까지 우린 방학인거에요.
V-A-C-A-T-I-O-N 우리에게 기회가 온거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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