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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치 많았겠죠? 근데 미라엔 거의 없어요

by 연송 김환수 2009. 12. 12.

[Why] 조선시대 충치 많았겠죠? 근데 미라엔 거의 없어요

 

                                                                    박국희 기자 freshman@chosun.com

                                                                    입력 : 2009.12.12 03:05 / 수정 : 2009.12.12 14:07

박국희가 만난 '미라 전문' 신동훈 서울의대 교수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의대 연구실 구석 한쪽에 흙 묻은 운동화 5켤레가 쌓여 있다. 그 주변을 한문 고서(古書)와 '신경해부학' '우리몸 해부그림' '사람 해부 아틀라스' 같은 의학 서적들이 둘러싸고 있다.

신동훈(申東勳·43) 서울의대 해부학과 교수에게 "이게 다 뭐냐"고 물었다. 그는 "귀동냥이라도 하려면 아무리 종잇장 지식이라고 해도 읽어둬야 한다"고 했다. 운동화는 발굴 현장에 나갈 때 신는 것들이라고 했다.

해부학과 교수가 발굴 현장을 돌아다닌다? 그는 10년째 미라(mummy)만을 전문적으로 연구해오는 국내 몇 안되는 '미라 전문 부검의'다. 미라는 썩지 않고 건조된 인간이나 동물의 사체를 말한다.

“‘미라의 저주’때문인가?”해부학과 교수에서‘미라 전문’교수가 된 지난
    10년간 그에겐 버릇 아닌 버릇이 생겼다. 일이 꼬이고 안 풀리면 혹시
     라도 그간 연구 대상이 되고 싶지 않던 미라가 노여움을 부리고 있는 건
     아닌지 자문해 보는 것이다.
     ☞ 동영상 chosun.com /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400년 전 소년 '단웅이'와의 만남

 

2001년 11월 중순 경기도 양주 해평 윤씨 문중 선산에서 10세 이하의 남자로 추정되는 미라가 발견됐다. 의정부~양주 간 도로확장 공사를 위해 분묘 이장(移葬)을 하던 중이었다.

당시 미라 발굴에 참여했던 단국대 박물관 측은 "미라와 함께 17세기 아동복 5벌, 성인 의복 3벌을 완벽한 형태로 발굴했다"고 했다. 국내에서 어린이 미라가 발견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가로 117㎝, 세로 30㎝ 크기의 목관에 안치된 미라는 신장이 102㎝에 불과했다. 곧게 탄 가르마와 등까지 내려오는 땋은 머리는 물론 치아와 손발톱, 성기까지 수백 년 전 묻힌 시신으로 믿기 힘들만큼 보존 상태가 양호했다.

'단웅이'라고 이름 붙여진 소년 미라가 신동훈의 인생에 들어왔다. 서울대 의예과 85학번인 그는 당시 서울대에서 수련의 과정을 마치고 단국대 의대에서 조교수를 하고 있었다.

신 교수는 "박물관 측에서 '워낙 보존 상태가 좋으니 연구해 볼 것이 있으면 해보라'며 소년 미라를 내게 가져왔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단국대 해부학 교실의 유일한 남자 교수였다.

2001년 미라가 대한민국에 뚝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신 교수는 "복식연구가들은 60년대부터 미라의 옷을 연구해 온 걸로 안다"며 "2000년대 초반까지 고고학계에 보고된 미라 케이스만도 전국 100여건은 될 것"이라고 했다.

"대한민국도 어느 정도 먹고살만 하니까 미라 연구가 시작된 거예요. 세계적으로 봐도 못 사는 나라가 미라 연구하는 경우는 거의 없거든요. 만날 옷만 보다가 이제 미라 몸 자체를 보기 시작한 겁니다."

신 교수는 '단웅이'를 처음 보는 순간 혼자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방사선과, 생물학과, 법의학과, 기생충학, 역사학, 복식사 연구자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을 모았다. 대부분 미라를 처음 대면하는 경우였다.

―미라를 보는 순간 기분이 어땠습니까?

"처음 미라를 본 건데, 보니까 뭐 쇼킹하더라고요."

―해부학 교수로 있으면서 만날 보는 게 시신일 텐데도 그렇던가요?

"죽은 사람을 보는데 훈련이 돼 있던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건, 등까지 머리를 따고 있는 조선시대 사람이 눈앞에 누워 있는데 쇼킹하죠. 옷을 풀 때도 보면 이게 정말 300년 세월의 간격이 있다는 게 느껴져요. 요즘에는 도저히 볼 수 없는 패션 스타일인 거예요."

―조선시대 시신에선 어떤 냄새가 납니까?

"보통 시신과 다르게 단순하게 썩은 냄새는 아니고…. 썩은 냄새 약간에다가 창고에 오래 처박아둔 옷 냄새도 약간, 곰팡이 냄새도 나고 아무튼 형언하기 어려운 냄새가 나요. 맡아 보면 잊어버리지 않는 특이한 냄새예요."

―무슨 연구를 했나요?

"엑스레이(X-ray)를 찍어보고 컴퓨터 단층(CT) 촬영을 해봤어요. 등 뒤에 작은 구멍이 있었는데 그 사이로 폐와 간 조직을 조금 떼어내 보기도 했고요. 피부검사, 조직검사, 유전자 검사 등을 했지요."

―결과는 어땠습니까?

"미라를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 얼마나 잘 보존되어 있는지 보는 것만도 급급한 상황에서 뭘 했겠어요? 결론은 '아, 생각보다 미라 보존 상태가 좋구나' 이거였어요. 상상한 것보다도 내부 장기가 많이 남아 있었고 생물학적인 연구 대상이 될 수 있겠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치아와 골격 상태를 봤을 때 소년 미라는 5.5세 정도의 나이였던 것으로 추정됐다. DNA 검사를 통해 '단웅이'는 해평 윤씨 가문 사람이었던 점도 밝혀졌다. B형 바이러스성 간염을 앓았다는 것도 확인됐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과 당시 토양의 꽃가루 분석 등을 통해 미라는 300~350년 전 5월의 어느 따뜻한 봄날 사망한 것으로 드러났다.

신 교수를 미라 연구로 빠져들게
    했던 소년 미라‘단웅이’.
성리학(性理學)의 나라

유럽에서는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직후 미라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1833년에 최초의 이집트 미라 부검이 실시됐다. 이집트 미라는 사람이 죽었을 때 내부 장기를 다 빼내고 썩지 않게 만든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되는 미라의 가장 큰 특징은 보존 상태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뛰어나다는 점이다. 이는 대부분의 미라가 16~17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라 비교적 오래되지 않았다는 점에도 기인한다.

그 이유는 조선시대만의 독특한 장묘문화에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미라가 발견되는 이유는 뭘까? 조선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르면 사람이 죽은 뒤 시신이 들어 있는 나무관을 묻기 전 석회 가루를 관 둘레에 뿌려야 했다.

높게는 1m에 이르기까지 뿌렸던 횟가루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빗물과 결합해 시멘트 공사를 한 것처럼 나무 관을 둘러쌌다. 우연히 만들어진 진공 상태에서 시신은 썩지 않고 미라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무덤 양식을 회곽묘(灰槨墓)라고 한다.

―횟가루를 왜 뿌려야 했던 겁니까?

"(주자가례 책을 보여주며) 주자가 그렇게 하라고 시켰으니까요. 성리학이 지배했던 당시 사상에서 보면 안 따라야 할 이유가 없었겠지요. 무덤을 파보면 주자가례를 보면서 그대로 그렸는지, 장례 행렬 때 썼던 깃발 문양 같은 게 책하고 똑같이 나와요. 관 둘레를 석회로 두를 때 나무뿌리도 들어오기 어렵고, 벌레나 도둑의 침범도 막을 수 있다고 본 것 같아요."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주자는 나무뿌리와 벌레가 침투하는 것을 막고 시신이 썩을 때까지 잘 보존시켜 준다고 말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시신이 아예 썩지 않게 만들어 버린 것이었어요. 동양 정서상 시신이 썩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면 회곽묘를 만들 사람은 없었을 겁니다."

―그럼 미라는 조선시대에서만 발견됩니까?

"우리나라는 땅이 좋아 일반 무덤에서는 다 잘 썩어요. 딱 한 시대 조선시대 회곽묘에서만 미라가 발견되는 거예요. 앞으로도 아마 그럴 겁니다. 그때 무더기로 회곽묘를 썼기 때문에 무더기로 미라가 된 거죠. "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미라가 얼마나 될까요?

"수백 수천구는 넘을 겁니다. 지금 나가서 산 하나만 밀어봐도 온통 묘지투성이예요. 다만 보고가 안 될 뿐이죠."

―왜 그런가요?

"이장 단계에서 발견이 돼도 다들 쉬쉬하면서 숨기기 때문이에요. 시신이 썩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후손한테 안 좋다는 이야기 아니겠어요? 실제로 미라가 나오는 무덤을 보면 관 아래 대부분 물이 차 있기 마련입니다. 풍수상으로만 봐도 길지(吉地)는 아니라고들 생각하는 거겠죠."

소년 미라 '단웅이'가 발견된 이듬해 2002년 10월 충남 태안군에서 또다시 완벽한 상태의 미라가 발견됐다. 의령 남씨 후손들이 선산의 분묘를 옮기는 과정에서였다. 옻칠을 한 15㎝ 두께의 관 속 시신은 신장이 190㎝에 달했다.

이 미라는 조선 중기 숙종 때 삼도수군 통제사를 지낸 남오성(南五星) 장군의 시신이었다. 수염은 물론 눈동자까지 남아 있을 정도로 장군의 시신은 생생했다. 하지만 후손들의 요구로 미라는 발굴 7시간여 만에 화장됐다.

신 교수는 "미라가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연락을 취해보면 후손들이 이미 화장을 해버렸거나 다시 묻어 버린 경우가 많다"고 했다. 연구자 입장에서는 좋은 기회를 날려 버린 셈이지만 후손의 뜻을 거스를 명분은 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본인의 손을 거쳐간 미라는 몇 개나 됩니까?

"몇 '개'라고 말하면 안 되고 몇 '분'을 모셨다고 해야지요. 미라들도 어쨌든 시신이고 후손들도 있는데요."

―그럼 몇 '구'의 미라를 조사했습니까?

"지금까지 10여구 정도예요. 그 중 5구를 부검해봤습니다."

―10년 동안 10여건이라고 하면 굉장히 적은 숫자인 것 같습니다. 후손들이 원망스럽지는 않나요?

"우리 입장에서는 연구의 기회를 주는 분들이 고마운 거지, 왜 화장을 하느냐고 따질 권리는 없습니다. 본인 5대조 10대조 조상이 미라가 돼 나왔는데 남한테 조사를 시키겠습니까? 어느 날 언론에서 자기 할아버지가 홀딱 옷을 벗고 나올 판인데요?"

지난 6월 신 교수가 언론 앞에서 공개조사했던 '하동 할머니'의 경우에는 후손들이 10일 동안 조사할 시간을 주었던 사례였다. 경남 하동군 진양 정씨 묘역에서 발견된 이 미라는 아이를 낳다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됐다.

우리 미라 연구의 수준은 과거 '돌팔이' 수준에서 동네 병원 원장쯤으로 향상됐다. 신 교수는 "일주일 정도면 기본조사가 끝난다"며 "이장 시기를 늘려주는 후손들의 배려가 지금으로서는 미라 연구에 결정적"이라고 했다.

―부검을 한 미라는 어떻게 처리합니까?

"그대로 다 보관합니다. 지금은 연구 결과를 축적해 가는 단계이니까요."

―그럼 지금 이 건물 안에도 미라가 있습니까?

"완전한 상태의 미라는 3구 정도 있고요, 서양에서는 뼈에 피부 조각이라도 붙어 있으면 크게 봐서 미라라고 보니까 그런 경우까지 다 합치면 10여구 정도 됩니다."

졸지에 400년 전 미라를 보러 가게 됐다.

포클레인으로 회곽을 깨고 관뚜껑을 열면 많게는 70벌까지 옷으로 동여싼 시신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외관만 보고도 미라가 있을지 없을지 판단 가능하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충치가 있었을까?

신 교수는 대학원생을 시켜 '강릉 할아버지' 미라를 꺼내도록 했다. 강릉에서 발견된 미라라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 이 미라의 경우 부검을 했기 때문에 기자의 접촉으로 인한 내부 조직의 오염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

신 교수는 '수염 할아버지'를 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을 바꿨다. 이 미라는 아직 부검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서울대에 보관 중인 것 가운데 '수염 할아버지'가 그나마 '가장 살아 있는 사람 같지 않은 미라'라는 점이 참작됐다.

생생한 케이스는 거의 '금방 돌아가신 수준'이라 처음 보는 사람들은 충격을 받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학원생이 끙끙거리며 냉동 보관소에서 미라를 꺼냈다. 내부 장기가 그대로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바싹 말라도 미라의 무게는 상당하다.

미라를 싸고 있던 비닐이 벗겨졌다. 400년의 시공간을 뛰어넘어 이름 모를 조선시대 노인과 대면하는 순간이었다. 이목구비는 거의 문드러져 알아보기 힘들었다. 수술용 장갑을 끼고 손을 맞잡아 보니 나무토막처럼 딱딱했다.

짙은 회색 빛깔의 이 미라는 신 교수의 스승이 90년대 초반 한 후손들로부터 기증받아 보관해온 것이라고 했다. 길게 기른 턱수염과 구레나룻의 머리털들이 익숙한 모습으로 구불거렸다. 한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왜 미라 연구를 합니까?

"이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가진 고민입니다. 쉽게 말해서 과거 살던 사람들의 질병이라든지 건강 상태에 대해 의학적인 자료를 가지고 당시 모습을 그려보는 게 최종 목표이지요."

그는 이 부분에서 기자의 말을 가로막더니 "근데 그게 지금에 와서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거지요?"라고 자문했다.

"미라 조사를 하다 보면 옛날 사람들의 질병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과 다른 경우가 많았어요. 박 기자 생각에는 지금 하고 조선시대 하고 어느 쪽이 더 충치가 많았을 거라고 봐요?"

―칫솔도, 치약도 없는 조선시대 쪽이 아닐까요?

"충치라는 건 전 세계 무역을 통해서 설탕이 퍼져나가는 시기와 맥을 같이해요. 조선시대 치아를 보면 충치가 거의 없어요. 일반 상식하고는 다른 이야기지요."

―또 다른 예는요?

"미라에 남아 있는 인분 등에서 기생충 검사를 해보면 회충, 편충은 많이 나오는데 촌충은 별로 없어요. 촌충은 날고기를 먹어야 생기는데, 그 당시 고기를 잡으면 국 끓여 먹기 바빴던 모양이에요. 고기를 구워 먹는 게 우리 생각만큼 그렇게 오래된 풍습은 아니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 정조가 독살됐는지의 여부도 정조의 미라를 조사해보면 나온다는 겁니다."

―그래서요?

"이런 옛 사람들의 질병 단서들을 10년, 20년 쌓아가는 겁니다. 그게 나중에 가서 우리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는 개개인이 판단할 문제죠. 있으나 없으나 달라질 것 없다고 생각하면 의미가 없는 거고…."

 

 

쥐를 잡아 뇌 구조를 연구하고 학생들에게는 인체 해부를 강의하던 해부학 교수는 현재 서울대학교 고병리(古病理) 연구실을 맡아 아예 미라 연구를 본업으로 삼고 있다. 연구실에 대학원생은 남학생만 2명이다.

신 교수는 "DNA 뽑는 것에서부터 발굴 현장 나가 땅 파는 것까지 모두 해야 하다 보니 발굴 한 번 갔다 오면 여학생들은 대개 일을 하기 꺼린다"고 했다.

"제 윗대에 미라 연구에 대한 전통이 없다는 것 때문에 심리적으로 초조한 건 사실이에요. 따로 돈이 되는 학문도 아니기 때문에 개인적인 호기심도 없었다면 버티기 힘들었을 겁니다."

―어떤 호기심입니까?

"자연과학에서 대중의 관심을 끄는 건 미라하고 공룡뿐이에요. 미라 연구는 스토리가 있습니다. 과학 수사를 표방하는 미국 드라마하고 비슷해요. 400년 전 시신을 검사한다는 것 자체가 학문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건데, 그게 또 왜 죽었는지에 대한 부분도 나오고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밝혀낼 수 있잖아요."

―미라를 연구하는 다른 전공의 전문가들도 그럴까요?

"미라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한번 시작하면 대개 손을 놓지 못해요. 그들도 재미를 느끼니까요. 조선시대 시신이라는 게 지금 환자와는 패턴이 다릅니다. 치료가 없기 때문에 병(病)이 갈 때까지 가는 거예요. 기생충도 감염이 한번 됐다 하면 알이 새까맣게 나옵니다. 연구자 입장에서는 요즘 세상에서 쉽게 볼 수 없는 희귀한 사례들이지요."

―미라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흥미 위주를 벗어나지 못하지요?

"제일 큰 고민입니다. 미라 연구하는 저희들을 무슨 '오타쿠(마니아)' 부대인 것처럼 보시는 분들이 계세요. 의과대학 안에서 정상적인 연구 분야로 자리 잡아야 하는데요. 언론 보도도 보면 몇 년째 '400년 전 사람인데 안 썩었다, 신기한데 얼굴 한번 봐라' 이걸로 끝인 것 같아 아쉽습니다."

―수백년 전 죽은 사람과 함께 있다 보면 특별한 감정이 생기지 않습니까?

"의대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감정을 배제하도록 훈련받아옵니다. 미라를 무서워하면 연구가 되겠어요?"

―'미라의 저주'는 실제 있습니까?

"1991년 이탈리아 북부 알프스에서 발견된 5000년 전 미라(외치)는 발견자, 사진기자, 연구자 모두 7명이 나중에 죽었습니다. 저하고 같이 작업하는 복식 연구자 중에서는 반드시 미라에 절을 하고 일을 시작하시는 분도 있어요. 우리나라 미라 되신 분들은 마음이 고우셔서 그런지 액땜도 가볍게 하고 넘어가시는 것 같습니다."

400년 전 시신과 대면해 온갖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는 사람은 기자뿐이었다. 신 교수와 대학원생 모두 그런 기자를 재미있다는 듯 바라볼 뿐이었다. '수염 할아버지'를 냉동고에 넣어두고 차가운 밤공기를 마셨다. 타임머신을 타고 400년 뒤로 돌아온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