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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를 찾아서

姓氏(성씨)의 意義(의의)

by 연송 김환수 2009. 1. 4.

1. 姓氏(성씨)의 意義

              (의의)

 辭典的(사전적) 意味(의미)로는 出生(출생)의 系統(계통)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름 앞에 붙이는 稱號(칭호)로서 한 血統(혈통)을 잇는 겨레붙이로 누구나 自身(자신)의 存在(존재)를 밝히는 이름이 있다.

 

 普通(보통) 韓國人(한국인)이 이름이라고 하면 姓(성)과 이름을 합쳐 稱(칭)하는데, 그 중 앞에 붙이는 姓(성)은 그 父系血統(부계혈통)의 徵表(징표)로서 우리 民族(민족)의 構成(구성) 部分(부분)인 氏族(씨족)대로의 共同體意識(공동체의식) 形成(형성)에 많은 役割(역할)을 해 왔다.

 

더욱이 宗敎的(종교적)으로 儒敎思想(유교사상)과 우리 固有(고유)의 祖上崇拜思想(조상숭배사상), 그리고 地政學的(지정학적) 韓半島(한반도)의 位置上(위치상) 많은 外侵(외침) 속에 形成(형성)된 愛國愛族思想(애국애족사상) 속에서 祖上(조상)의 얼을 느끼며 自身(자신)의 姓(성)에 대한 矜持(긍지)를 가져왔다.

 또한 姓氏(성씨)의 成長過程(성장과정)은 그 民族(민족)의 興亡盛衰(흥망성쇠)와 必然的(필연적)으로 聯關(연관)되어 있으므로 姓氏(성씨)의 理解(이해)는 그 民族(민족)의 歷史(역사) 理解(이해)에도 도움을 준다.

 

 現(현) 時代(시대)에 와서 姓氏(성씨)나 따지고 族譜(족보)를 硏究(연구)하는 것은 合理的(합리적)이지 못하고 버려야할 因習(인습)정도로 여길지 모른다. 하지만 무슨 存在(존재)이건 그 뿌리가 있게 마련이다.

 

 過去(과거)를 되돌아보고 뿌리를 아는 것이 未來(미래)를 開拓(개척)하는 것이라고 볼 때 이는 결코 前近代的(전근대적)인 것이 아니다.

 

 물론 派閥(파벌)의 根據(근거)가 되고 閉鎖的(폐쇄적)인 族閥主義(족벌주의)가 나타나며, 個人(개인)을 한 集團(집단)에 매어놓고 犧牲物(희생물)로 삼는 弊害(폐해)도 無視(무시) 할 순 없다.

 

 하지만 이는 위에서 說明(설명)한 民族史(민족사)로서의 姓氏(성씨)의 意味(의미)를 看過(간과)한 것으로 階級社會(계급사회)에 있던 産物(산물)로 요즘 같은 平等社會(평등사회)에선 意味(의미)가 없다고 볼 수 있다.

 

 姓氏(성씨) 不變(불변)의 原則(원칙)은 外國(외국)에서 輸入(수입)된 것도 아닌 우리 固有(고유)의 制度(제도)로서 姓氏(성씨)는 神聖(신성) 不可侵(불가침)한 自我成取(자아성취)의 道具(도구)이며 自身(자신)의 根源(근원)을 밝히는 道具(도구)로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2. 姓氏(성씨)의 由來(유래)

 

 姓氏(성씨)의 發生根源(발생근원)은 正確(정확)한 記錄(기록)이 없거니와 전해지는 資料(자료)도 많은 部分(부분) 燒失(소실)되어 詳細(상세)히는 알 수 없으나 대략 中國(중국) 姓氏(성씨) 制度(제도)의 影響(영향)으로 古朝鮮時代(고조선시대)부터 王族(왕족)이 使用(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部族(부족) 國家時代(국가시대)가 到來(도래)하면서 集團(집단)의 支配者(지배자)가 생겨나게 되고 다른 部族(부족)과 區別(구별) 하기 위하여 呼稱(호칭)의 形態(형태)로 姓(성)이 생겨나고 그 勢力(세력)이 점차 커짐에 따라 重要(중요)한 意味(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따라서 姓(성)은 初期(초기)에는 王室(왕실), 貴族(귀족)에 局限(국한)되어 使用(사용)되다가 國家(국가)에 功(공)을 세운 사람이나 歸化人(귀화인)에게 賜姓(사성)을 하면서 漸進的(점진적)으로 擴大(확대)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姓(성)은 血族關係(혈족관계)를 表示(표시)하기 위하여 制定(제정)된 것으로 이것이 언제부터 發生(발생) 하였는지는 仔細(자세)히 알 수 없으나, 이미 人類社會(인류사회)가 始作(시작)되는 原始時代(원시시대) 부터 이러한 觀念(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原始社會(원시사회)는 血緣(혈연)을 基礎(기초)로 하여 모여 사는 集團體(집단체)로 組織(조직)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처음에 母(모)만 確實(확실)히 알 수 있고 父(부)는 알수 없는것 이었다.  

 

 그러므로 처음에 母系血緣(모계혈연)을 中心(중심)으로 모여 사는 이른바 母系社會(모계사회)가 나타났다가 뒤에 父系社會(부계사회)로 轉換(전환)되었거니와, 母系社會(모계사회)건 父系社會(부계사회)건 原始社會(원시사회)는 祖上(조상)이 같은 사람들이 集團(집단)을 이루고 모여 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原始社會(원시사회)를 氏族社會(씨족사회)라고 하는 것이다.

 氏族社會(씨족사회)는 氏族(씨족) 全員(전원)이 힘을 합하여 狩獵(수렵), 漁撈(어로), 農耕(농경)에 從事(종사)하고 外寇(외구)의 侵入(침입)도 共同(공동)으로 防禦(방어)하였다.  

 

 그리고 氏族社會(씨족사회)는 그 集團(집단)을 統率(통솔)하기 위하여 氏族員(씨족원) 중에 가장 經驗(경험)이 많고 德食(덕식)이 있는 사람을 뽑아   氏族長(씨족장)으로 삼고, 큰일이 있을 때에는 氏族會議(씨족회의)를 열어서 決定(결정)하였는데, 이 氏族會議(씨족회의)는 자못 民主的(민주적)이어서 氏族員(씨족원)은 누구나 다 同等(동등)한 資格(자격)으로 參席(참석)하고  氏族(씨족) 全員(전원)의 贊成(찬성)으로 決定(결정)하였다.   

 

 氏族社會(씨족사회)도 時代(시대)가 흐르고 人口(인구)가 增加(증가)하고  代(대)가 멀어짐에 따라 自然(자연)히 같은 氏族(씨족) 중에도 血統(혈통)이 가까운 사람들끼리 모여 살게 되어 여러개의 氏族集團(씨족집단)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많은 氏族集團(씨족집단)이 나타나게 되자 自然(자연)히 가까이 있는 氏族(씨족)들끼리 서로 합하여 더 큰 社會(사회)를 組織(조직)하고, 生産物(생산물)을 交換(교환)하고 外敵(외적)을 防禦(방어) 하였는데, 이러한 社會(사회)를 우리는 部族社會(부족사회)라 한다.

 

 部族社會(부족사회)에서는 氏族長(씨족장)들이 모여서 部族長(부족장)을 選出(선출)하고 部族國家(부족국가)를 形成(형성)하였으며, 部族國家(부족국가)는 다시 部族(부족) 聯盟體(연맹체)를 組織(조직)하고 部族聯盟(부족연맹)의 王(왕)을 選出(선출)하여 國家生活(국가생활)을 영위하게 된 것은 오늘날 社會學(사회학), 歷史學(역사학)의 常識(상식)으로 되어 있다.   

 

 이와같이 人類社會(인류사회)는 血緣(혈연)에서 出發(출발)하고 血緣(혈연)을 中心(중심)으로 하여 發展(발전)하였기 때문에 原始時代(원시시대)부터 氏族(씨족)에 대한 觀念(관념)이 매우 强(강)하였다.  

 

 自己(자기) 祖上(조상)을 崇拜(숭배)하고 同族(동족)끼리 서로 사랑하고 氏族(씨족)의 名譽(명예)를 위하여 努力(노력)하였다.  

 그리고 각 氏族(씨족)은 다른 氏族(씨족)과 區別(구별)하기 위하여 各其(각기) 다른 名稱(명칭)이 있었을 것이며, 그 名稱(명칭)은 文字(문자)를 使用(사용)한 뒤에 姓(성)으로 表現(표현)하였다.

 

 東洋(동양)에 있어서 처음으로 姓(성)을 使用(사용)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漢字(한자)를 발명한 中國(중국)이었으며, 처음에는 그들이 居住(거주)하는 地名(지명)이나 山名(산명), 江名(강명)으로 姓(성)을 삼았다.

 

 神農氏(신농씨)의 어머니가 姜水(강수)에 있었으므로 姓(성)을 姜氏(강씨)라 하고, 皇帝(황제)의 어머니가 姬水(희수)에 살았으므로 성을 姬氏(희씨)라  하였으며, 舜(순)임금의 어머니가 姚虛(요허)에 있었으므로 姓(성)을 姚氏(요씨)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姓氏(성씨)란 이름자의 첫글자를 말하며 "홍길동" 이라고 할때 洪(홍)자를 말하며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surname(써네임-성, 별명)이라고 하여 "존 F 케네디"라고 할때 케네디를 말한다.

 時代別(시대별)로 姓氏(성씨) 現況(현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高句麗(고구려)

  三國史記(삼국사기), 三國遺事(삼국유사) 등에 의하면 建國(건국) 始祖(시조) 朱蒙(주몽)은 國號(국호)를 高句麗(고구려)라고 하였기에 高(고)씨라고 하였으며, 朱蒙(주몽)은 忠臣(충신)들에게 克(극)씨, 仲室(중실)씨, 小室(소실)씨를 賜姓(사성)하였다고 전해 내려온다.  

 

 또 琉璃王(유리왕)이 賜姓(사성)하였다는 위씨, 우씨 또는 大武神王(대무신왕)이 賜姓(사성)하였다는 낙, 부정, 대실씨 등은 傳說(전설)이라고 하더라도 大武神王(대무신왕) 때의 을두지, 송옥구를 비롯하여 이후 宰相級(재상급)만도 목도루, 고복장, 명림답부, 을파소, 고우루, 명림어수, 음우, 창조리, 乙支文德(을지문덕), 淵蓋蘇文(연개소문) 등등의 이름이 있으며, 또한 王妃(왕비)나 王母(왕모)의 姓(성)으로 禮(예), 松(송), 于(우), 淵(연), 周(주)씨 등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中國(중국) 漢書(한서)에 나타나 있는 人名(인명)의 記錄(기록)을 보면, 朱蒙(주몽)은 이름만 記錄(기록)되어 있으나, 長壽王(장수왕) 때에 長壽王(장수왕) 이름을 高璉(고연)으로 記錄(기록)하여 처음으로 高句麗(고구려) 王室(왕실)의 姓(성)을 高(고)씨로 記錄(기록)하였으며, 長壽王(장수왕)은 中國(중국)으로 보낸 使臣(사신)들에게 高翼(고익), 馬累(마루), 孫水仇(손수구), 童謄(동등) 등의 이름에도 모두 姓(성)을 使用(사용)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使用(사용)하는 姓氏(성씨) 중에서 高句麗(고구려)에 淵源(연원)을 두는 姓氏(성씨)는 극히 드물다.

 高(고)씨는 고주몽의 後孫(후손)이 江原道(강원도) 橫城地方(횡성지방)에 약간 散在(산재)한다고 전해지고 그 외의 高(고)씨는 모두 耽羅(탐라) 高氏系(고씨계)이다.

 

 오직 姜(강)씨가 高句麗(고구려)의 都元帥(도원수)를 지냈다는 姜以式(강이식)을 始祖(시조)로 하고 있다.  

 

 (2) 百濟(백제)

  百濟(백제)에서는 始祖(시조) 溫祚(온조)가 夫餘(부여)에서 나왔다 하여 姓(성)을 扶餘(부여)씨라고 하였으나 中國(중국)의 後漢書(후한서), 三國志(삼국지), 珍書(진서)에는 王命(왕명)이 記錄(기록) 되어있는데 모두 姓(성)을 쓰지 않고 이름만 記錄(기록)되어 있으며, 珍書(진서), 宋書(송서) 등의 記錄(기록)에는 近肖古王(근초고왕-13대)부터 威德王(위덕왕-27대)까지는 餘(여)씨로 表示(표시)하다가 武王(무왕-29대)부터 扶餘(부여)씨로 記錄(기록)하였다.

 

또한 溫祚(온조)를 따라 南下(남하)하여 百濟(백제) 建國(건국)에 功(공)을 세우고 십제공신이 되었다는 전섭과 馬黎(마여)를 元祖(원조)로 하는 慶州全氏(경주전씨)와 長興馬氏(장흥마씨-木川馬氏)가 있다.

 

 蓋婁王(개루왕) 때 人物(인물)인 도미를 先系(선계)로 하는 星州都氏(성주도씨)가 있으며, 百濟(백제)가 亡(망)하자 唐(당)나라로 亡命(망명)하여 唐(당) 高宗(고종)으로부터 새로 賜姓(사성)받고 熊津都督(웅진도독)이 되어 歸國(귀국)했다는 夫餘隆(부여융)을 始祖(시조)로 하는 夫餘徐氏(부여서씨)가 있다.  

 

 이 외에 一般的(일반적)으로 沙(사), 燕(연), 협(협), 國(국), 苗(묘), 木(목), 屹(흘), 王(왕), 眞(진), 解(해), 直(직), 張(장), 司馬(사마), 黑處(흑처)씨 등이 있다.

 이는 自然(자연) 發生的(발생적)이라기 보다는 王(왕)이 地方勢力(지방세력)을 糾合(규합)하여 中央集權化(중앙집권화)를 이루는 過程(과정) 중 回遊策(회유책)으로 賜姓(사성)이 利用(이용) 되었다고 생각된다.

 

 姓(성)이 文獻上(문헌상) 整備(정비)되고 出現(출현)한 것이 百濟(백제)의 中央集權(중앙집권)을 이루던 全盛期(전성기) 때임은 이를 證明(증명)한다.

 

 (3) 新羅(신라)  

 오늘날 우리가 使用(사용)하고 있는 姓(성)의 起源(기원)은 아무래도 新羅(신라)에서 淵源(연원)한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新羅(신라)의 朴赫居世(박혁거세)는 朴(박)씨, 慶州金氏(경주김씨)의 始祖(시조)인 金閼智(김알지)는 金(김)씨 등 3 姓(성)과 李(이), 鄭(정), 孫(손), 崔(최), 裵(배), 薛(설)의 6 村姓(촌성)에서 淵源(연원)을 찾는 것이 더 合理的(합리적) 일 것으로 보인다.

 

 新羅(신라)에서는 朴(박), 昔(석), 金(김) 3 姓(성)의 傳說(전설)이 전해 오며, 琉璃王(유리왕) 9년(서기 32년)에 六部(육부)의 村長(촌장)에게 각각 李(이), 鄭(정), 孫(손), 崔(최), 裵(배), 薛(설)씨의 姓(성)을 賜姓(사성)하였다고 한다.

 앞에서 言及(언급)했다시피 三國時代(삼국시대) 姓(성)은 王(왕)과 小數(소수)의 貴族階級(귀족계급)과 中國(중국)을 往來(왕래)한 使臣(사신)들이 使用(사용)하였는데, 新羅(신라)도 亦是(역시) 그러하였으니, 특히 김인문, 최치원, 장보고, 김지량, 박계업 등은 有名(유명)하다.  

 

 우리는 7世紀(세기) 初(초)까지만 해도 아직 姓氏(성씨)가 쓰이지 않았다는 事實(사실)을 알수 있으며, 姓氏(성씨)가 쓰이기 전에는 身分(신분)을 表示(표시)하는 役割(역할)을 했던 것은 그 사람의 出身地(출신지)이다.

 

 다만 王室(왕실)에서는 24대 眞興王(진흥왕) 때부터 金氏(김씨)를 使用(사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가령 '<양서>, <신라전>에는 新羅王(신라왕) 모태가 처음 使臣(사신)을 보내왔다.'고 나와 있는데, 모태란 23대 法興王(법흥왕)을 가리킨 것이다.

 

 그런데 <북제서>에는 法興王(법흥왕) 다음 임금인 眞興王(진흥왕)을 金眞興(김진흥), 眞平王(진평왕)을 金眞平(김진평)이라고 記錄(기록)하고 있다.

 新羅(신라) 王室(왕실)의 金氏(김씨)를 除外(제외)한 그 밖의 6 村姓(촌성)들은 그보다 훨씬 뒤인 中期(중기)에야 비로소 登場(등장)하게 된다.

 

 다만 駕洛國(가락국)의 始祖(시조)로 알려진 首露王(수로왕)의 12대손인 金庾信(김유신)은 除外(제외)된느 것인데, 金庾信(김유신)은 누이가 太宗武烈王(태종무열왕)의 妃(비)가 되면서부터 金庾信(김유신)이 처음으로 金氏(김씨)를 使用(사용)하게 된 것 같다는 說(설)도 있다.

 

 新羅時代(신라시대)의 姓氏(성씨)로는 3 姓(성)과 6 村姓(촌성) 외에 9世紀(세기) 初(초) 唐(당)나라에 갔다온 후 청해진 대사가 된 장보고가 처음 장씨로 登場(등장)하였고, 新羅(신라) 말에서 高麗(고려) 初(초)에 이르러서야 많은 새로운 姓(성)들의 登場(등장)을 보게 된다.

 

 (4) 伽倻(가야)

  始祖(시조)인 金首露王(김수로왕)은 6개의 金卵(금란)에서 第一(제일) 먼저 나왔다고 해서 王(왕)으로 推戴(추대)하고 金(김)씨로 하였다.

 

 (5) 高麗(고려)

  族譜(족보)의 發生時期(발생시기)와 맞물려 姓(성)으로써 사람의 血統(혈통)을 區分(구분)하는 일이 一般化(일반화)되었다.

 

 더구나 高麗(고려) 初期(초기) 文宗王(문종왕) 9년(1055) "姓(성)이 있는 자에게만 科擧試驗(과거시험)에 應試(응시)할 資格(자격)을 준다."하여 支配層(지배층)을 形成(형성)하는 要件(요건)으로 姓(성)의 役割(역할)도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 姓氏(성씨) 槪念(개념)이 確立(확립)된 것은 高麗(고려) 初(초), 中期(중기)로 보아야 한다.

 이 때에 이르러서야 法的(법적) 制度的(제도적) 與件(여건)이 뒷받침되고, 一般(일반)사람들에게 뿌리 意識(의식)이 擴散(확산)되었다.

 

 이러한 現象(현상)은 歷史的(역사적)으로 國家(국가) 構成員(구성원)의 힘이 家門(가문) 中心(중심)의 閥族勢力(벌족세력) 單一(단일)로 改編(개편)되고, 門閥(문벌)의 勢力構造(세력구조)가 强力(강력)한 國家(국가)를 形成(형성)하는 權力構造(권력구조)에 重要(중요)한 作用(작용)을 하게 되었음을 意味(의미)한다.

 

 新羅(신라) 末期(말기) 後三國(후삼국)의 大動亂(대동란)을 당하여 平民(평민)으로서 各地(각지)에서 일어난 尙州(상주)의 元宗(원종), 哀奴(애노), 竹州(죽주), 竹山(죽산)의 箕蓂(기명), 原州(북원)의 梁吉(량길-良吉), 태봉왕 궁예의 部將(부장)인 弘彦(홍언), 明貴(명귀), 後百濟王(후백제왕) 甄蓂(견명)의 部將(부장)인 官昕(관흔), 相貴(상귀), 尙達(상달), 熊奐(웅환), 高麗(고려) 太祖(태조)의 部將(부장)인 弘述(홍술), 白玉(백옥), 三熊山(삼웅산), 卜沙貴(복사귀) 등은 모두 姓(성)을 쓰지 아니하였다.

 

 記錄(기록)에 의하면 高麗(고려) 王建(왕건)은 高麗(고려) 開國功臣(개국공신)인 弘述(홍술)에게 洪(홍)씨를 白玉(백옥)에게 裵(배)씨를 三能(삼능)에게는 申(신)씨를 卜沙貴(복사귀)에게는 卜(복)씨를 賜姓(사성)하여, 각각 洪儒(홍유), 裵玄慶(배현경), 申崇謙(신숭겸), 卜知兼(복지겸)으로 改名(개명)하였다.

 

 재미있는 事實(사실)로는 忠州魚(충주어)씨의 始祖(시조) 魚重翼(어중익)은 원래 池(지)씨였는데 태어날 때부터 體貌(체모)가 奇異(기이)하고 겨드랑이 밑에 비늘 셋이 있어 高麗(고려) 太祖(태조)가 親(친)히 불러 보고 나서 魚(어)씨로 賜姓(사성)하였다고 한다.

 

 또한 東國與地勝覽(동국여지승람)에 보면 太祖(태조)가 高麗(고려)를 建國(건국)한 후 木川(목천) 사람들이 자주 反亂(반란)을 일으키자 太祖(태조)의 미움을 사서, 각기 牛(우), 馬(마), 象(상), 獐(장)씨 등의 짐승이름으로 賜姓(사성)하였는데, 후에 于(우), 尙(상), 豚(돈), 張(장)씨 등으로 變姓(변성)했다고 記錄(기록)되어 있다.

 

 이는 姓(성)이 생긴 原因(원인) 中(중) 하나인 임금이 怒(노)하여 神經質的(신경질적)으로 지어준 姓(성)의 境遇(경우)이다.

 

 이렇게 高麗時代(고려시대)는 科擧制度(과거제도)의 影響(영향)과 族譜(족보)의 生成(생성)으로 一般(일반) 庶民(서민)들에게도 姓(성)이 擴大(확대)되는 重要(중요)한 時代(시대)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어떻든 高麗(고려) 初期(초기)부터 姓(성)을 쓰는 사람이 많이 나타나 貴族(귀족), 官僚階級(관료계급)은 姓(성)을 쓰지 아니한 사람이  없게 되었으나 高麗(고려) 中期(중기) 文宗(문종) 9년(1055년)에 姓(성)을 붙이지 아니한 사람은  科擧(과거)에 應試(응시)할 資格(자격)을 주지 아니하는 法令(법령)을 내린 것을 보면, 文宗時代(문종시대)까지도 姓(성)을 쓰지 아니한 사람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文宗(문종) 9년의 이 法令(법령)은 실로 우리나라 姓(성)의 한 時期(시기)를 긋는 것으로서, 이때부터 姓(성)이 普遍化(보편화)되었으나, 奴婢(노비) 등 賤人階級(천인계급)에 이르러서는 朝鮮(조선) 初期(초기)까지도 姓(성)을 쓰지 아니하였다.

 

 (6) 朝鮮(조선)

  朝鮮時代(조선시대)는 賤民(천민)들까지도 姓(성)을 갖게 된 時期(시기)인데, 理由(이유)는 壬辰倭亂(임진왜란) 때 軍人(군인)을 徵發(징발)하기 위해 兵役義務(병역의무)가 施行(시행)되면서 戶籍法(호적법)에 따라 施行(시행)된 것으로 비로서 우리나라는 모든 國民(국민)이 바뀌지 않는 自身(자신)의 固有(고유)한 姓(성)을 갖게 되었다.

 

 世宗實錄(세종실록) 地理誌(지리지)에는 265가지 姓(성)이 記錄(기록)되어 있고, 朝鮮(조선) 英祖(영조)때 도곡 이의현이 지은 도곡총설에는 298가지 姓(성)이, 正祖(정조) 때 양엽기에는 486 姓(성)이, 英祖(영조) 46년에 編纂(편찬)되어 正祖(정조) 6년에 增補(증보)를 始作(시작)한 增補文獻備考(증보문헌비고)에는 朝鮮(조선) 初(초)에 무려 4,296 姓(성)이었던 것이 壬辰倭亂(임진왜란)과 丙子胡亂(병자호란)을 겪은 후에는 289 姓(성)으로 줄어들었으며, 다시 496 姓(성)으로 記錄(기록)되어 있다.

 

 이외에도 姓氏(성씨)에 관한 文獻(문헌)으로는 東國與地勝覽(동국여지승람)과 양성지의 해동성씨록, 조중운의 씨족원류, 정시술의 제성보 등이 있었다.

 

 (7) 近代(근대)

  1909년 民籍法(민적법)이 施行(시행)되면서 全(전) 國民(국민)이 姓(성)을 戶籍(호적)에 登錄(등록)하게 되었다.

 

 1930년 總督府(총독부) 調査(조사)에 따르면 250姓(성)으로 調査(조사)되었으나, 日帝植民統治下(일제식민통치하)에서 皇國臣民化政策(황국신민화정책)의 一環(일환)으로 姓(성)과 이름을 日本式(일본식)으로 고치도록 한 1939년의 創氏改名(창씨개명), 1945년 光復(광복)과 1946년 10월 23일 美軍政(미군정)이 公布(공포)한 朝鮮姓名復舊令(조선성명복구령)에 따라 우리나라 姓氏(성씨) 歷史(역사)의 가장 큰 受難期(수난기)였다.

 

 日帝(일제)가 1939년에 創氏改名(창씨개명)을 强壓的(강압적)으로 施行(시행)하다보니 각 집안의 舊戶籍(구호적)에 보면 알 수 있듯이 旣存(기존) 姓氏(성씨)에 줄을 긋고 그 옆에 日本式(일본식)으로 姓氏(성씨)를 만들어 써 넣었음을 볼 수 있는데, 大體的(대체적)으로 自己(자기)의 姓氏(성씨)에 집가(家)자만 붙여 만든 姓氏(성씨)가 많았으나 몇몇 집안은 완전히 日本式(일본식) 姓氏(성씨)로 바꾸어 申告(신고)한 경우도 많았다.

 

 그러니 創氏改名(창씨개명)을 하는 過程(과정)에서 있었던 有名(유명)한 逸話(일화)로는 國語學者(국어학자) 周時經(주시경) 先生(선생)은 '自己(자기)의 姓氏(성씨)도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것은 재자식과 같다.'라고 말씀하시고는 自身(자신)의 姓氏(성씨)를 犬子(견자)로 고쳐 申告(신고)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이후에도 國際化(국제화) 時代(시대)를 맞아 外國人(외국인)의 歸化(귀화) 등으로 새로운 姓氏(성씨)와 本官(본관)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現代(현대)에 와서는 1960년 國稅調査(국세조사)에서 258 姓(성), 最近(최근)의 調査(조사)인 1985년 人口(인구) 및 住宅(주택) 센서스에서는 274 姓(성)으로 調査(조사)되었다.

 

3. 各國(각국)의 姓氏(성씨) 制度(제도)

 結婚(결혼) 후 男便(남편)과 아내 중 누구의 姓(성)을 따르는가에 대해서는 民族(민족)마다 그 風習(풍습)이 다르다.

 

 日本(일본), 美國(미국), 英國(영국),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獨逸(독일), 스위스, 브라질 등은 結婚(결혼) 후 男便(남편)의 姓(성)을 따른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中國(중국)의 境遇(경우)는 平生(평생) 男便(남편)과 아내가 각각 自己(자기)의 姓(성)을 가지고 산다.

 또한, 러시아의 경우는 夫婦(부부)가 서로 議論(의논)해서 決定(결정)하므로, 各自(각자) 姓(성)을 그대로 가질 수도 있고, 議論(의논) 후 어느 쪽의 姓(성)을 따를 수도 있다.

 

 그리고, 臺灣(대만)에서는 아내의 姓(성) 위에 男便(남편)의 姓(성)을 덧붙이는 합관성으로, '남편성+자기성+이름'의 形態(형태)를 使用(사용)한다.

 

 한편, 世界(세계)에는 이름만 있고 姓(성)이 없는 나라도 있는데, 인도네시아 사람은 大統領(대통령)이건 一般國民(일반국민)이건 모두 이름만 가지고 있는데 다만 個人的(개인적)인 必要(필요)나 趣味(취미)로 이름 위에 이것저것 덧붙여 쓰고 있으며, 미얀마에서 역시 姓(성)은 없고 이름만 있어서 이름 위에 '우'나 '몽'자를 붙이는 경우가 많아서 미얀마에서는 '우'씨와 '몽'씨가 우리나라의 김씨나 이씨만큼 많은데, 실은 '우'자는 나이가 많거나 社會的(사회적) 地位(지위)가 높은 사람들에게 붙이는 敬稱(경칭)이며, '몽'자는 미혼의 젊은이에게 붙이는 敬稱(경칭)으로, 英語(영어)의 "미스터"에 該當(해당)한다.

 

 그리고, 日本(일본)은 姓氏(성씨)가 133,000여 개나 되어, 世界(세계)에서 第一(제일) 많은 姓氏(성씨)를 가진 나라로서, 姓氏(성씨)가 複數字(복수자)로 된 것이 普通(보통)이고, 單字(단자)로 되어있는 것도 있고, 세 자로 되어 있는 것도 많다.

 

4. 姓氏(성씨)을 가진 契機(계기)

 姓氏(성씨)는 本來(본래) 血統(혈통)의 關係(관계)를 나타내기 위한 一種(일종)의 符號(부호)였으나, 部族社會(부족사회), 혹은 部族國家(부족국가)로 形成(형성), 發展(발전)하면서 서로의 家統(가통)을 呼稱(호칭)하기 위한 方法(방법)으로 登場(등장)하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러한 姓氏(성씨)를 가지게 된 淵源(연원)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첫째 임금이 直接(직접) 賜姓(사성)한 것, 둘째 임금이 怒(노)해서 神經質的(신경질적)으로 지어준 姓(성), 셋째 임금으로부터 姓(성)을 下賜(하사)받았다가 도로 返納(반납)한 姓(성),

 

넷째 中國(중국) 皇帝(황제)로부터 받은 姓(성), 다섯째 本人(본인)이 스스로 지은 姓(성), 여섯째 諡號(시호)를 姓氏(성씨)로 삼은 姓(성), 일곱째 慶州金氏(경주김씨)가 他姓(타성)으로 갈라진 姓(성), 여덟째 出世(출세)해서 姓(성)을 가진 姓(성),

 

아홉째 歸化人(귀화인)에게 임금이 賜姓(사성)한 姓(성), 열째 集團的(집단적)으로 歸化(귀화)한 現況(현황) 등으로 區分(구분)할 수 있는데, 각각에 대한 解說(해설)은 다음과 같다.

 

 (1) 임금이 直接(직접) 賜姓(사성)한 境遇( 경우)

  임금이 한 家門(가문)에게 直接(직접) 姓(성)을 내린 경우이다.

 

  ①南陽田氏(남양전씨) : 南陽田氏(남양전씨)의 始祖(시조)는 전 주로, 原來(원래)는 왕 강으로 高麗(고려) 氏族(씨족) 순흥군 왕 승의 아들이다. 朝鮮(조선)이 들어서면서 王氏(왕씨) 抹殺政策(말살정책)에 따라 公州牧(공주목)의 官奴(관노)가 되어 일신역으로 流配(유배)되었다가 太祖(태조) 3년 4월에 禍(화)를 당했다. 그의 孫子(손자)가 이방원을 도와 두 차례의 王子(왕자)의 亂(난)때 功(공)을 세워, 王(왕)이 전 흥이라 賜姓(사성)하였다.

 

  ②安東權氏(안동권씨) : 安東權氏(안동권씨)의 始祖(시조)는 金幸(김행)으로, 原來(원래)는 新羅(신라) 王室(왕실)의 後孫(후손)이었으나, 55대 景哀王(경애왕)이 殺奚(살해)된 후, 後百濟(후백제)의 甄萱(견훤)을 討伐(토벌)하는데 功(공)을 세워 王(왕)으로부터 權氏(권씨)로 賜姓(사성)받았다.

 

  ③豊壤趙氏(풍양조씨) : 豊壤趙氏(풍양조씨)의 始祖(시조)는 趙孟(조맹)으로, 高麗(고려) 王建(왕건)이 創業(창업)할 때 王建(왕건)을 도와 功(공)을 세움으로써 王(왕)이 '孟(맹)'이라고 賜名(사명)하였다.

 

  ④安東孫氏(안동손씨) : 安東孫氏(안동손씨)의 始祖(시조)는 孫凝(손응)으로, 原來(원래) 姓(성)이 순씨였는데 高麗(고려) 8대 현종왕의 이름인 詢(순)과 音(음)이 같다고 해서 王(왕)이 '孫(손)'씨로 賜姓(사성)하였다.

 

  ⑤昌寧曺氏(창녕조씨) : 昌寧曺氏(창녕조씨)는 新羅(신라) 26대 眞平王(진평왕)때 아기의 겨드랑이에 曺(조)자 비슷한 무늬가 있어 王(왕)이 이를 神奇(신기)하게 생각하고 姓(성)을 曺(조), 이름을 鷄龍(계룡)이라고 지어 주었다.

 

  ⑥昌原具氏(창원구씨) : 昌原具氏(창원구씨)는 原來(원래) 仇氏(구씨)로 高麗(고려) 2대 惠宗王(혜종왕) 때 구성길은 찬성사를 지냈고 惠宗王(혜종왕)이 죽은 후 나라에 叛亂(반란)이 일어나 이를 評定(평정)한 功勞(공로)로, 3대 正宗王(정종왕)이 具氏(구씨)로 賜姓(사성)하였다.

 

  ⑦隋城崔氏(수성최씨) : 隋城崔氏(수성최씨)의 本姓(본성)은 金氏(김씨)였으나, 高麗(고려) 25대 충렬왕때 國家(국가)에 크게 功(공)을 세워 王(왕)으로부터 崔氏(최씨)로 賜姓(사성)받았다.

 

  ⑧忠州魚氏(충주어씨) : 忠州魚氏(충주어씨)는 高麗(고려) 初期(초기) 제천에 살고 있던 어충익은 元來(원래) 池氏(지씨)였는데 태어날 때부터 겨드랑이에 비늘이 세 개 있다고 해서 高麗(고려) 太祖(태조)가 친히 불러 이를 보고 '인갑이 있으니 이는 물고기라'하고 그에게 어씨로 賜姓(사성)하였다.

 

  ⑨江陵王氏(강릉왕씨) : 江陵王氏(강릉왕씨)는 新羅(신라) 慶州金氏(경주김씨) 김선희가 高麗(고려)의 創業(창업)에 王建(왕건)을 도와 후백제를 討伐(토벌)하고 建國(건국)에 至大(지대)한 功(공)을 세워 王氏(왕씨)로 賜姓(사성)하였다. 그의 14대 子孫(자손) 탄지대에 이르러 江陵王氏(강릉왕씨)를 復姓(복성)하였다.

 

  河陰奉氏(하음봉씨) : 河陰奉氏(하음봉씨)는 高麗(고려) 16대 睿宗王(예종왕) 1년에 江華(강화)에서 한 老婆(노파)가 우물가에서 石函(석함)을 發見(발견)하였는데, 그 函(함) 속에 아이가 있어, 王(왕)에게 바쳤는데 王(왕)이 張次(장차) 큰 人物(인물)이 될 것이라 하며 姓(성)을 奉(봉)으로, 이름을 우로 賜姓(사성) 名(명)하였다.

 

 이 외에도 高麗(고려) 때 開國功臣(개국공신)으로 太師(태사)를 지냈던 홍유는 原來(원래) 홍술이데, 朝鮮(조선)조 太祖王(태조왕)이 姓(성)을 洪氏(홍씨)로 이름을 유로 賜姓(사성)하였으며, 김일형은 新羅(신라) 47대 憲安王(헌안왕)의 後孫(후손)으로, 高麗(고려) 27대 忠肅王(충숙왕) 때 國家(국가)에 功(공)이 있어 王(왕)이 姓(성)을 李氏(이씨)로 이름을 종금이로 賜姓(사성)하였다.

 

 (2)임금이 怒(노)하여 神經質的(신경질적)으로 지어준 姓(성)

  高麗(고려) 太祖(태조) 王建(왕건)은 후삼국을 統一(통일)하여 高麗(고려)를 建國(건국)하였으나, 木川地方(목천지방)의 百濟(백제) 流民(유민)들이 자주 叛亂(반란)을 일으키자, 그 사람들에게 짐승의 이름인 豚(돈), 象(상), 牛(우), 障(장)으로 賜姓(사성)했다.

 

 이들이 나중에 다시 姓(성)을 回復(회복)하게 되었는데, '象(코끼리)은 尙(木川尙氏)'으로, '豚(돼지)은 頓(木川頓氏)'으로 '獐(노루)은 長'으로, '牛(소)는 禹'로 바뀌었다.

 

 (3) 임금으로부터 姓(성)을 下司(하사) 받았다가 다시

      復元(복원)된 경우

 

  ①高麗(고려) 때 先王(선왕)으로부터 王氏(왕씨)로 賜姓(사성)받은 江陵金氏(강릉김씨)는 그 후 짐지가 34대 恭讓王(공양왕) 2년에 賜姓(사성) 王氏(왕씨)를 다시 江陵金氏(강릉김씨)로 復元(복원) 半納(반납)하였다.

 

  ②또한 高麗(고려) 때 최충헌은 1219년 3월 高宗(고종)으로부터 王氏(왕씨)로 賜姓(사성)받았다가 9월에 다시 王氏(왕씨)를 返納(반납)하고 최씨로 復元(복원)되었다.

 

  ③朝鮮氏族通寶(조선씨족통보)에는 최익후가 江華崔氏(강화최씨)의 始祖(시조)로 되어있고, 최익후는 최충헌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慶州崔氏(경주최씨) 始祖(시조)로 최치원의 後孫(후손)으로 최익후를 말하고 있어 최치원, 최익후, 최충헌이 모두 慶州崔氏(경주최씨)가 아닌가 생각된다.

 

 (4) 中國(중국) 皇帝(황제)로부터 賜姓(사성)받은 경우

 

  ①夫餘徐氏(부여서씨) - 百濟(백제) 31대 의자왕의 太子(태자) 餘隆(여융)이 新羅(신라)에 敗戰(패전)하자 唐(당)나라로 갔는데 唐高宗(당고종)이 餘隆(여융)의 姓氏(성씨) 중 食(식)자를 떼어버리고 徐(서)자로 고쳐 賜姓(사성)하였다.

 

  ②恩津邱氏(은진구씨) - 恩津邱氏(은진구씨)의 元祖(원조)는 中國(중국)의 姜太公(강태공)이다. 中國(중국) 孔子(공자)의 이름이 丘(구)이므로 中國(중국) 皇帝(황제)가 구자(丘字) 대신 구자(邱字) 姓(성)을 使用(사용)하라고 命令(명령)하였다. 그래서 一部(일부) 後孫(후손)은 600년 후 丘氏(구씨)로 다시 復元(복원)시켜 使用(사용)해 왔다.

 

  ③仁川李氏(인천이씨) - 仁川李氏(인천이씨)는 駕洛國(가락국) 金首露王(김수로왕)의 둘째 아들 許謙(허겸)이 唐(당)나라에 가서 功(공)을 세우고 玄宗皇帝(현종황제)로부터 李氏(이씨)로 賜姓(사성)받아 還國(환국)하니 新羅王(신라왕)이 벼슬을 높이며 소성(지금의 인천)백에 봉하니 後孫(후손)들이 仁川李氏(인천이씨)라 하게 되었다.

 

  ④甘泉文氏(감천문씨) - 甘泉文氏(감천문씨)는 始祖(시조)는 문구로, 朝鮮(조선) 初期(초기)에 左議政(좌의정)을 지낸 김고벽이다. 中國(중국)에 들어가 文章(문장)으로 이름을 날려 皇帝(황제)가 감탄하여 文氏(문씨)로 賜姓(사성)하였으나 當代(당대)에 無子(무자)하여 경북 영주에 살고 있는 外孫(외손)이 奉祀(봉사)하고 있다고 한다.

 

  ⑤旌善文氏(정선문씨) - 旌善文氏(정선문씨)는 原來(원래) 전임간이었는데 中國(중국)에 들어가 文章(문장)으로 이름을 날려 皇帝(황제)가 文氏(문씨)로 賜姓(사성)하였다.

 

 (5) 本人(본인) 스스로 지은 姓(성)

 

  ①延安車氏(연안차씨)와 文化柳氏(문화류씨) - 新羅(신라) 40대 哀莊王(애장왕)때 차효전은 左相(좌상)으로 있다가 政變(정변)으로 인한 禍(화)를 피해 黃海道(황해도) 九月山(구월산)으로 들어가 姓(성)을 柳氏(류씨)로 이름을 환이라 하였다.

 

  ②開城乃氏(개성내씨) - 高麗(고려) 王族(왕족)의 한 家族(가족)이 全部(전부) 殺害(살해)당하자 生命(생명)을 保全(보전)하기 위하여 亡命(망명)하는 途中(도중), 임진강 나루터에서 檢問(검문)하는 捕卒(포졸)이 姓(성)이 뭐냐고 묻자 "네"하고 대답함으로써, 捕卒(포졸)이 乃氏(내씨)로 姓(성)을 記載(기재), 이것이 乃氏(내씨)가 된 것이다.

 

  ③包氏(포씨) - 中國(중국)에서 계출된 姓氏(성씨)로, 주나라 신백의 後孫(후손)으로 신포서의 後孫(후손)들이 이름인 포자를 姓(성)으로 삼은 것이 姓原(성원)이다.

 

  ④南陽諸葛氏(남양제갈씨) - 中始祖(중시조)인 諸葛(제갈) 충은 中國(중국) 위나라 사람으로, 後孫(후손) 제갈공순이 신라 42대 興德王(흥덕왕)때 우리나라에 왔다. 그리고 高麗(고려) 23대 高宗王(고종왕)때 兄(형)인 제갈홍과 아우인 제갈영이 出世(출세)하게 되면서 제갈홍은 제홍으로, 제갈영은 제영으로 각각 使用(사용)했다. 그러다가 舊韓末(구한말)에 姓氏還元運動(성씨환원운동)이 일어나자 一部(일부)가 諸葛氏(제갈씨)로 復元(복원)하였다 한다.

 

  ⑤醴泉權氏(예천권씨) - 始祖(시조)는 權暹(권섬)으로, 高麗(고려) 29대 忠穆王(충목왕)때 禮儀參議(예의참의)를 지냈다. 그의 本姓(본성)은 昕氏(흔씨)였으나, 忠穆王(충목왕)의 이름이 흔이어서 이를 피하여 外家(외가) 姓(성)을 따라 權氏(권씨)로 하였다.

 

  ⑥延安天氏(연안천씨) - 始祖(시조)는 알 수 없으나, 文獻(문헌) 記錄(기록)에 보면 연안 地方(지방)에 냇가에 버려진 아이가 있어 동네 사람들이 거두어 姓(성)을 알 수 없자 萬物之祖(만물지조)인 天(천)을 姓(성)으로 삼았다고 傳(전)한다.

 

  ⑦濟州肖氏(제주초씨) - 肖氏(초씨)는 원나라에서 歸化(귀화)한 姓氏(성씨)로 濟州島(제주도)에 定着(정착)·世居(세거)하며 本貫(본관)을 삼아 世系(세계)를 이어왔다고 한다. 한편 原來(원래) 趙(조)씨였으나 '走(주)'를 떼고 肖(초)씨로 改姓(개성)하였다고 傳(전)한다. 朝鮮(조선)조에 통정대부를 지낸 초성기가 있다.

 

  ⑧鳳氏(봉씨) - 朝鮮氏族通寶(조선씨족통보)에 의하면 鳳氏(봉씨)는 中國(중국) 평양(平陽, 지금의 浙江省)에서 계출되었는데, 明(명)나라 신종 때 유근득이 鳳氏(봉씨)로 改姓(개성)하였다고 한다.

 

  ⑨이외에도 요즘 歸化(귀화)하여 우리나라 女性(여성)들과 結婚(결혼)하여 姓(성)과 이름을 가진 獨逸李氏(독일이씨)의 始祖(시조)가 될 李參(이참-구명 이한우, 독일인, 제른하르트 크반트), 影島河氏(영도하씨)의 始祖(시조)가 될 河一(하일, 미국인, 로버트 할리), 인요한(미국인, 존), 九里申氏(구리신씨)의 始祖(시조)가 될 申宜孫(신의손, 러시아인, 발레리 사리체프)등이 있으며, 우리나라에 歸化(귀화)하는 外國人(외국인)들이 늘어나면서 異色的(이색적)인 姓氏(성씨)가 크게 늘어 나고 있는 趨勢(추세)인데, 統計廳(통계청)이 2003년 1월 28일 發表(발표)한 '人口住宅調査(인구주택조사)

 

姓氏(성씨) 및 本貫集計(본관집계)'에 따르면 서기 2000년 末(말) 現在(현재) 歸化(귀화) 居住者(거주자)들의 姓氏(성씨)는 총 442개 姓氏(성씨)인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 가운데 필리핀계가 145개 姓氏(성씨)로 가장 많았고, 日本系(일본계) 139개 姓氏(성씨), 中國系(중국계) 83개 姓氏(성씨) 등이 뒤를 이었다.

 

 필리핀계 歸化(귀화) 姓氏(성씨)는 '골라낙콘치타' '귈랑로즈' '글로리아알퀘아포 스' 등이 많았고, 日本系(일본계)는 古田(고전), 吉岡(길강), 吉省(길성) 등의 比重(비중)이 높았는데, 統計廳(통계청) 關係者(관계자)는 "歸化(귀화)한 外國人(외국인)은 婚姻(혼인)으로 인한 歸化(귀화)가 96.2%이며 이 가운데 女子(여자)가 87.3%를 차지하고 있다."고 說明(설명)했으며, 우리나라에서 居住(거주)하는 外國人(외국인) 가운데 勞動問題(노동문제) 때문에 歸化(귀화)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 밖에 '누그엔티수안'(베트남계) '남캉캉마'(태국계) '루비악달'( 방글라데시) 등 東南亞(동남아) 等地(등지)에서 歸化(귀화)한 사람들의 姓氏(성씨)도 총 75개 姓氏(성씨)에 달했다고 發表(발표)하였다.

  

5. 本貫(본관)의 意義(의의)와 起源(기원)

 本貫(본관)은 原來(원래) 本(본), 貫鄕(관향), 貫籍(관적), 氏貫(씨관), 族本(족본), 鄕貫(향관) 등 여러 가지로 불리 우고 있으나 本貫(본관), 本(본), 貫鄕(관향)이란 使用(사용)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부름이다.

 

 原來(원래) 本貫(본관)은 옛날 身分社會(신분사회)의 遺物(유물)로서 그 起源(기원)은 상당히 오래된다.

 아직 姓(성)이 一般化(일반화)되지 않았던 時代(시대)에는 그 人物(인물)의 出身地(출신지)로써 身分(신분)을 表示(표시)했다.

 이러한 出身地(출신지)가 姓(성)과 結合(결합)하여 同族(동족)을 區別(구별)하는 表示(표시)로써 오늘날과 같은 本貫(본관)으로 굳어지기는 大體(대체)로 新羅末期(신라말기)부터 高麗(고려) 初(초)에서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原來(원래) 같은 姓氏(성씨)라 하더라도 각 姓(성) 안에는 여러 親族共同體(친족공동체)가 있었으며, 이들은 大槪(대개) 各各(각각) 同族(동족)의 中央貴族(중앙귀족)과 紐帶(유대)를 맺고 있었다.

 新羅末期(신라말기) 骨品制度(골품제도)가 무너지면서 그러한 紐帶關係(유대관계)가 끊어짐에 따라 地方(지방)의 親族共同體(친족공동체)들이 각기 分立(분립)하여 자기네의 直系(직계) 先祖(선조)를 始祖(시조)로 내세워 本貫(본관)을 달리하는 現象(현상)이 胎動(태동)된 것이며 事實上(사실상) 이와 같은 形象(형상)이 姓氏(성씨)의 分化(분화)를 뜻하게 되는 것이다.

 

 高麗(고려) 初(초)에 이르러 姓(성)이 多角的(다각적)으로 分布(분포)되는 過程(과정)에서 姓(성)만으로는 同族(동족)을 區別(구별)할 수 없으므로 祖上(조상)의 出身地(출신지), 또는 居住地(거주지)를 姓(성) 앞에 붙여서 使用(사용)하여 同族(동족)의 表示(표시)를 한 것이며, 派系(파계)가 달라도 本貫(본관)이 같으면 同族(동족)이라 했으며, 本貫(본관)이 다른 고을이면 비록 姓(성)이 같다 하더라도 祖上(조상)이 다르기 때문에 同族(동족)이라 하지 않았다.

 

 즉 本貫(본관)의 뜻을 整理(정리)하여보면,

 

  ①本貫(본관)이란 始祖(시조)의 出生地(출생지), 또는 定着(정착)하여 代代(대대)로 脈(맥)을 이어 온 고장을 가리키며,

 

  ②姓(성)을 使用(사용)하기 前(전)에는 그 사람의 出身地(출신지)가 身分(신분)의 表示(표시)로써 姓(성)의 口實(구실)을 하였으며,

 

  ③新羅末期(신라말기), 高麗初期(고려초기)에 이르러서는 血流系

統(혈류계통)을 전혀 달리하는 同姓(동성)이 많이 생김으로써 동서의 異族(이족)임을 區別(구별)하기 위하여 同族(동족)의 表示(표시)로써 널리 使用(사용)하였다.

 

 또한 반드시 始祖(시조)의 發祥地(발상지)가 아니더라도 封君(봉군)이나 賜貫(사관)에 의하여 本貫(본관)을 定(정)하기도 하였으며, 後孫(후손) 중에 어느 一派(일파)가 他地方(타지방)에 分居(분거)하여 오래 居住(거주)하게 되면 그 子孫(자손)들이 獨立(독립)하여 그 地方(지방)을 本貫(본관)으로 삼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를 가리켜 分貫(분관) 또는 分籍(분적)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本貫(본관)이란 時代(시대)의 흐름에 따라 姓氏(성씨)가 漸次的(점차적)으로 擴大(확대)되면서 같은 姓氏(성씨)라 하더라도 系統(계통)이 달라, 그 根本(근본)을 明確(명확)하게 區分(구분)하기가 어려웠으므로 同族與否(동족여부)를 가리기 위해 必然的(필연적)으로 登場(등장)하게 된 것이 本貫(본관)이라 할 수 있다.

 

 本貫(본관)이란 本(본), 貫鄕(관향), 또는 貫(관)이라고도 한다고도 하였는데, 원래 관(貫)은 錢(돈)을 말하는 것으로 돈을 한 줄에 꿰어 묶어 가지고 다니는 것과 같이, 親族(친족)이란 서로 關聯性(관련성)을 갖고 있다는 뜻이며, 여기에 더 나아가 本籍(본적)이란 뜻으로 使用(사용)되었다.

 

 이는 始祖(시조)나 中始祖(중시조)의 出身地(출신지) 혹은 定着世居地(정착세거지)를 根據(근거)로 呼稱(호칭)하는 것이 大部分(대부분)이고, 封君(봉군), 즉 高麗(고려) 때 종1품, 朝鮮(조선) 때 2품 以上(이상)의 功勞者(공로자)에게 주는 爵位稱號(작위칭호)를 따라 定(정)하는 경우, 그리고 姓氏(성씨)와 같이 임금이 功臣(공신)이나 歸化人(귀화인)들에게 特別(특별)히 下賜(하사)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賜貫(사관)이라고 한다.

 

 高麗(고려) 開國功臣(개국공신) 申崇兼(신숭겸)은 現在(현재)의 全羅道(전라도) 谷城(곡성)사람이었지만, 高麗(고려) 太祖(태조)와 함께 平山(평산)으로 놀러가 그곳이 좋았으므로 平山(평산)을 本貫(본관)으로 下賜(하사) 받았으며, 河東(하동) 쌍계사 碑文(비문)에 眞鑒禪師(진감선사)의 本貫(본관)이 皇龍寺(황룡사)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禪師(선사)가 黃龍寺(황룡사) 出身(출신)이라는 것을 말하는 듯 하다.

 

 따라서 姓氏(성씨)만이 같다고 해서 全部(전부) 같은 血族(혈족)이 아니며, 本貫(본관)까지 같아야 같은 血族(혈족)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姓氏(성씨)와 本貫(본관)과의 關係(관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同族同本(동족동본)의 同姓(동성)인데, 近親婚(근친혼)의 不合理性(불합리성)과 倫理的(윤리적) 價値觀(가치관) 때문에 婚姻(혼인)을 절대 禁止(금지)하고 있으며 最近(최근)들어 많은 社會的(사회적) 問題(문제)가 提起(제기)되자 漸次(점차) 改善(개선)되어 가고 있다.

 

 둘째, 異族同本(이족동본)의 同姓(동성)관계인데, 이는 姓(성)과 本(본)이 같지만, 根源(근원)은 전혀 달라 事實上(사실상) 血統問題(혈통문제)가 전혀 없는 것이다. 例(예)를 들면 南陽洪氏(남양홍씨)는 唐洪(당홍 : 당나라로부터 온 홍은열을 시조로 함)과 土洪(토홍 : 홍선행을 시조로 함)으로 區分(구분)되어, 전혀 共通點(공통점)이 없이 系統(계통)을 달리하고 있다.

 

 셋째, 同族異本(동족이본)의 同姓(동성)인데, 이는 始祖(시조)도 다르고 本(본)이 다른 경우이다. 例(예)를 들면 江陵金氏(강릉김씨)와 廣州金氏(광주김씨)는 始祖(시조)와 本(본)이 다르지만 같은 金閼智(김알지) 系統(계통)이며, 古阜崔氏(고부최씨)와 慶州崔氏(경주최씨)도 마찬가지로 始祖(시조)와 本(본)을 달리하지 만 같은 崔致遠(최치원) 系統(계통)이다.

 

 넷째, 異族異本(이족이본)의 동성(同姓) 관계인데, 이는 대성(大姓)에서 주로 볼 수 있으며, 한 例(예)로 金海金氏(김해김씨)와 慶州金氏(경주김씨) 등과 같이 같은 姓(성)을 쓰면서도 祖上(조상)이 달라 아무런 系統關係(계통관계)가 없는 것이다.

 

 다섯째, 同族同本(동족동본)의 異姓(이성)인데, 이는 祖上(조상)과 本(본)을 같이 하면서도 姓氏(성씨)만을 다르게 使用(사용)하는 것이다. 例(예)로 金海金氏(김해김씨)와 金海許氏(김해허씨)의 경우인데, 같은 金首露王(김수로왕)의 後孫(후손)으로서 姓(성)만 달리하므로 婚姻(혼인)이 禁止(금지)되어 있고, 또 文化柳氏(문화유씨)와 延安車氏(연안차씨)의 경우와 같이 역시 始祖(시조)는 같고 姓(성)만 달리 쓰고 있는 것이다.

 

 여섯째, 異族同本(이족동본)의 이성(異姓)인데, 이런 경우는 許多(허다)하다. 예를 들어 경주이씨(慶州李氏)와 경주김씨(慶州金氏), 경주손씨(慶州孫氏), 그리고 安東姜氏(안동강씨)와 安東權氏(안동권씨), 安東金氏(안동김씨) 등의 경우이다.

 

 이처럼 本貫(본관)과 姓(성)이 同一(동일)하다고 하여 곧 그가 같은 血緣的(혈연적)인 種族(종족)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인데, 이는 異族間(이족간)의 同性同本(동성동본)이 있고 이와 反對(반대)로 同族異本(동족이본)이나 異族同本(이족동본)도 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는 같은 本(본)을 中心(중심)으로 이루어진 同族部落(동족부락-아직도 농촌에서는 집성촌의 형태로 같은 씨족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다.)이 있었는데, 이들은 門閥(문벌)을 所重(소중)히 여기고 自治的(자치적)으로 相互(상호) 協同(협동)하여 집안 일을 解決(해결)해 나가는 特異(특이)한 社會組織(사회조직)의 한 形態(형태)를 이루어 왔다.

 

 姓氏(성씨)에 나타난 本貫(본관)의 數(수)를 살펴보면, 東國萬姓譜(동국만성보)에 金氏(김씨)가 120개 本(본), 李氏(이씨)가 116개 本(본), 朴氏(박씨)가 51개 本(본), 崔氏(최씨)가 43개 本(본), 鄭氏(정씨)가 35개 本(본)으로 나타나 있다.

 

 統計廳(통계청)이 2003년 1월 28일 發表(발표)한 '人口住宅調査(인구주택조사) 姓氏(성씨) 및 本貫集計(본관집계)'에 따르면 서기 2000년 末(말) 現在(현재) 國內(국내) 本貫(본관) 4,179개 姓氏(성씨) 가운데 1985년 이후 새롭게 追加(추가)된 本貫(본관)은 漢陽姜氏(한양강씨), 장지김(金)씨, 태백김(金)씨, 덕산박(朴)씨, 제천백(白)씨, 한밭서(徐)씨, 대전여(呂)씨 등 15개 姓氏(성씨)인 것으로 調査(조사)되었으며,

 

 本貫別(본관별) 人口數(인구수)는 金海金氏(김해김씨)에 이어 密陽朴氏(밀양박씨 - 3,031,000명), 全州李氏(전주이씨 - 261만명), 慶州金氏(경주김씨 - 1,737,000명), 慶州李氏(경주이씨 - 1,425,000명) 등으로 姓氏別(성씨별)로 國內(국내) 居住者(거주자) 다섯명 가운데 한명은 '金氏(김씨)'인 것으로 나타났으며,

 

本貫別(본관별) 姓氏(성씨)는 全體(전체) 286개 姓氏(성씨) 가운데 慶州(경주)에 本貫(본관)을 둔 姓氏(성씨)가 總(총) 87개 姓氏(성씨)로 最多(최다)를 記錄(기록)하였고, 그 다음은 晋州(진주 - 80개), 全州(전주 - 75개), 密陽(밀양 - 67개),  淸州(청주 - 66개) 등의 順(순)이었다.

 

 서기 2000년 末(말) 現在(현재) 우리나라 人口(인구) 중 上位(상위) 10대 姓氏(성씨)가 차지하는 比重(비중)은 全體(전체) 人口(인구)의 64.1%에 달했는데, 이는 1985년 調査(조사) 때보다 0.4%포인트 줄어든 수치로서,

 

이 가운데 金氏(김씨) 姓(성)을 지닌 사람이 21.6%로 가장 많았고, 李氏(이씨) 14.8%, 朴氏(박씨) 8.5%, 崔氏(최씨) 4.7%, 鄭氏(정씨) 4.4% 등의 順(순)인 것으로 調査(조사)되었으며,

 

上位(상위) 20대 姓氏(성씨) 가운데 吳氏(오씨)는 1985년 13위에서 2000년 11위로, 安氏(안)는 18위에서 17위로 順位(순위)가 各各(각각) 오르는 반면 韓氏(한씨)는 11 위에서 12위로, 申氏(신씨)는 12위에서 13위로, 宋氏(송씨)는 17위에서 1 8위로 각각 順位(순위)가 낮아졌다고 發表(발표)하였다.

 

 이와같이 數(수) 많은 本貫(본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分派(분파)를 止揚(지양)하고 한 民族(민족)의 핏줄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同族同本意識(동족동본의식)으로 오천 년 歷史(역사)를 이끌어 온 原動力(원동력)이 되었다.

 

6. 姓氏(성씨) 이야기

  (1) 科擧合格(과거합격) 名文家(명문가)

  오늘날 名文家門(명문가문)이라는 것은 事實上(사실상) 意味(의미)가 없다.

 

 名門大學(명문대학)이나 考試合格(고시합격)으로 家門(가문)을 빛내는 役割(역할)은 그 意味(의미)가 많이 縮小(축소)되었다.

 하지만 過去(과거)에는 나라에서 施行(시행)하는 科擧制度(과거제도)에 얼마나 合格(합격)하였는가가 그 家門(가문)을 빛내는 큰 役割(역할)을 하였다.

 

 그렇다면 朝鮮時代(조선시대) 科擧制度(과거제도) 속에서 어떤 姓氏(성씨)가 가장 많이 合格(합격)했을까?

 生進科(생진과)에 가장 많이 合格(합격)한 家門(가문)은 2,719명을 排出(배출)한 全州李氏(전주이씨)이다.

 

 이어 10위까지는 坡平尹氏(파평윤씨) 934명, 安東權氏(안동권씨) 909명, 南陽洪氏(남양홍씨) 833명, 淸州韓氏(청주한씨) 768명, 密陽朴氏(밀양박씨) 755명, 安東金氏(안동김씨) 716명, 延安李氏(연안이씨) 614명, 靑松沈氏(청송심씨) 567명, 平山申氏(평산신씨) 516명 順(순)이다.

 

 또한, 11위부터 30위까지는 慶州金氏(경주김씨), 韓山李氏(한산이씨), 慶州李氏(경주이씨), 晋州姜氏(진주강씨), 東萊래鄭氏(동래정씨), 金海金氏(김해김씨), 礪興閔氏(여흥민씨), 全義李氏(전의이씨), 廣州金氏(광주김씨), 大邱徐氏(대구서씨), 豊壤趙氏(풍양조씨), 文化柳氏(문화유씨), 宜寧南氏(의령남씨), 廣州李氏(광주이씨), 星州李氏(성주이씨), 全州崔氏(전주최씨), 順興安氏(순흥안씨), 昌寧成氏(창녕성씨), 豊川林氏(풍천임씨), 海州吳氏(해주오씨) 順(순)이다.

 

 이를 分析(분석)해 보면 合格者(합격자) 上位(상위) 50개 家門(가문)의 合格者(합격자)가 全體合格者(전체합격자)의 56%를 차지했으며, 1명만 排出(배출)한 家門(가문)도 319개나 된다.

 

 生進科(생진과)는 朝鮮時代(조선시대) 科擧(과거) 1次試驗(차시험)으로 科目(과목)에 따라 生員科(생원과)와 進士科(진사과)로 나눴는데, 生進科(생진과)에 合格(합격)하면 成均館(성균관)의 入學資格(입학자격)을 받았다.

 

 그러나 生進科(생진과)의 경우 太宗(태종) 때 99명을 뽑던 것이 黨爭(당쟁)이 甚(심)했던 肅宗(숙종) 때는 5,401명, 勢道政治(세도정치)의 餘波(여파)가 있던 高宗(고종) 때는 7,027명을 뽑는 等(등) 時代狀況(시대상황)의 影響(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또 朝鮮中期(조선중기) 士禍(사화)가 거듭되면서 一部(일부) 門中(문중)은 現職(현직)을 忌避(기피)해 科擧合格(과거합격)은 곧 선비라는 等式(등식)이 成立(성립)하지 않는 点(점)도 있다.

 

 이렇듯 어느 家門(가문)에서 文科(문과) 及第者(급제자)를 몇 명이나 냈고,벼슬은 어느 家門(가문)이 많이 했는지 族譜(족보)를 보면 알 수 있다.

 

 옛날에는 道德(도덕), 文章(문장), 忠節(충절), 벼슬 順(순)이었으나 오늘날은 國家(국가) 危機(위기)를 求(구)한 忠節(충절)을 第一(제일)로 꼽는다.

 

몇 가지 재미있는 記錄(기록)을 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全州李氏(전주이씨), 安東權氏(안동권씨), 淸州韓氏(청주한씨) 等(등)이 특히 文科(문과) 及第者(급제자)가 많은 家門(가문)으로 그 숫자를 살펴보면 全州李氏(전주이씨) 873명, 安東權氏(안동권씨) 359명, 坡平尹氏(파평윤씨) 331명, 南陽洪氏(남양홍씨) 329명, 安東金氏(안동김씨) 315명, 淸州韓氏(청주한씨) 287명 等(등)의 숫자로 나타나고 있다.

 

 또 王孫(왕손)인 全州李氏(전주이씨)를 비롯하여 光山金氏(광산김씨), 延安李氏(연안이씨)는 朝鮮時代(조선시대) 때 學問(학문)과 人格(인격)을 아울러 갖춘 '벼슬의 꽃'이라고 일컬어지는 弘文館(홍문관) 大提學(대제학)을 7명씩 가장 많이 排出(배출)하였다.

 

 大提學(대제학)을 3代(대)로 내리 이어서 排出(배출)한 家門(가문)은 光山金氏(광산김씨), 達城徐氏(달성서씨), 延安李氏(연안이씨), 全州李氏(전주이씨) 등 4 家門(가문)이다.

 

 光山金氏(광산김씨) 門中(문중)은 鄕校(향교) 文廟(문묘)에서 祭祀(제사)를 지내는 18賢(현) 가운데 김장생, 김집 父子(부자)를 排出(배출)하였으며, 殷津宋氏(은진송씨)도 송시열, 송준길을 낸 家門(가문)이다.

 

 淸白吏(청백리)를 많이 排出(배출)한 門中(문중) 順序(순서)는 全州李氏(전주이씨)가 8명으로 가장 많고, 延安李氏(연안이씨)가 7명, 南陽洪氏(남양홍씨), 安東金氏(안동김씨), 陽川許氏(양천허씨), 晋州姜氏(진주강씨), 全義李氏(전의이씨), 坡平尹氏(파평윤씨) 等(등) 6 門中(문중)이다.

 

 그리고 3代(대) 連續(연속)으로 大提學(대제학)을 排出(배출)한 집안은 4 개 家門(가문) 뿐이니 이는 延安李氏(연안이씨)의 월사집, 達城徐氏(달성서씨)의 약봉집, 全州李氏(전주이씨)의 백강집, 光山金氏(광산김씨)의 사계집이다.

 

 이 大提學(대제학)은 그 家門(가문)이 文臣(문신) 집안이냐, 아니면 武臣(무신) 집안이냐를 가리는 基準(기준)이 되는 職責(직책)으로 大提學(대제학)이 한 명이라도 排出(배출)된 家門(가문)은 文臣(문신) 집안으로 分類(분류)하게 되는데, 大提學(대제학)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博士(박사)라 할 수 있다.

 

7. 法律問題(법률문제) - 동성동본(同姓同本)

    禁婚制度(금혼제도)

 民法(민법) 809조 1항에 보면 同姓同本(동성동본)인 血族(혈족) 사이에는 婚姻(혼인)하지 못한다고 明示(명시)되어 있는데, 가까운 親族(친족) 사이에 婚姻(혼인)을 禁止(금지)하는 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은 아니다.

 

 世界(세계) 各國(각국)은 優生學(우생학)적인 理由(이유)나 倫理的(윤리적)인 理由(이유)에서 一定範圍(일정범위)의 近親(근친)사이에 婚姻(혼인)을 禁止(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民法(민법)에서 定(정)하고 있는 禁婚範圍(금혼범위)는 寸數(촌수)를 莫論(막론)하고 同姓(동성)이고 - 중국도 동성(同姓)간의 婚姻(혼인)은 禁止(금지)하고 있다.

 

 - 本貫(본관)이 같은 父系血族(부계혈족) 사이로서 지나치게 廣範圍(광범위)하다.

 

現在(현재) 이 制度(제도)를 廢止(폐지)하고 一定範圍(일정범위)의 近親間(근친간)의 婚姻(혼인)을 禁止(금지)하는 方向(방향)으로 轉換(전환)하는 改正案(개정안)이 上程(상정)되어 國會(국회)의 通過(통과)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그 동안 同姓婚(동성혼)을 한 男女(남녀)는 - 약 20만 쌍으로 推定(추정)된다. - 그들의 婚姻(혼인) 申告(신고)는 勿論(물론) 子女(자녀)의 出生申告(출생신고)도 不可能(불가능)하여 적잖은 社會的(사회적) 問題(문제)가 되어왔다.

 

 (1) 同姓同本不婚(동성동본불혼)의 由來(유래)

  이 原則(원칙)의 發生地(발생지)는 中國(중국)이라고 보는 것이 妥當(타당)한데, 周(주)나라 때 始作(시작)하여 漢(한)나라 때 確立(확립)되었다고 보는 것이 定說(정설)이며,

 

우리나라는 朝鮮時代(조선시대) 以前(이전)까지는 오히려 同姓婚(동성혼)과 近親婚(근친혼)이 盛行(성행)하였는데, 그 후 朝鮮(조선)이 開國(개국)하면서 明(명)나라로부터 이 制度(제도)를 輸入(수입)하여 朝鮮後期(조선후기)나 가서 一般(일반) 百姓(백성)에까지 擴大(확대) 定着(정착)되었다.

 

 同姓同本不婚(동성동본불혼)은 身分社會(신분사회)에서 確實(확실)한 血統(혈통)을 維持(유지)하기 위해서 어쩌면 當然(당연)한 歸結(귀결)인지도 모른다.  

 

 (2) 論爭史(논쟁사)

  臣民法(신민법)의 立法科程(입법과정)에서도 이 制度(제도)는 많은 論難(논란)이 있었다.

 

 政府案(정부안)과 國會(국회) 法司委(법사위) 修正案(수정안)의 立場(입장)이 서로 反對(반대)되는 樣相(양상)을 띰으로써 본 制度(제도)에 관한 贊反兩論(찬반양론)은 伯仲勢(백중세)를 이루었다.

 

 우선 이 同姓同本不婚(동성동본불혼) 制度(제도)를 贊成(찬성)하는 理由(이유)는 첫째, 우리 固有(고유)의 美風良俗(미풍양속)이고, 둘째, 優生學的(우생학적) 견지에서도 同姓婚(동성혼)은 해로우며, 셋째, 萬一(만일) 同姓婚(동성혼)을 許容(허용)할 경우에는 家族制度(가족제도)의 破壞(파괴)와 社會秩序(사회질서)의 混亂(혼란)을 가져온다는 것으로 要約(요약)된다.

 

한편 이를 反對(반대)하는 立場(입장)은 이 制度(제도)는 우리 固有(고유)의 傳統(전통)이나 文化(문화)가 아니고 朝鮮(조선)이 事大主義(사대주의) 政策(정책)의 結果(결과) 中國(중국)에서 輸入(수입)한 것에 不過(불과)하고 外國(외국)에서는 그 由來(유래)를 發見(발견)할 수도 없으며,

 

 또한 婚姻(혼인)의 自由(자유)를 否定(부정)하여 憲法(헌법)에 保障(보장)된 個人(개인)의 幸福(행복) 追求權(추구권)을 侵害(침해)하는 違憲的(위헌적)인 制度(제도)임을 强調(강조)하였다.

 結局(결국) 李承晩大統領(이승만대통령)의 同姓不婚(동성불혼)의 贊成論(찬성론)과 더불어 政府案(정부안)이 可決(가결)되어 同姓同本不婚制度(동성동본불혼제도)는 從來(종래)의 美風良俗(미풍양속)을 지킨다는 명목하에 世界(세계) 由來(유래)없는 制度(제도)가 된 것이다.

 

이 制度(제도)는 그 후 수 차례 廢止論者(폐지론자)들 - 여성계 - 에 의해 改正(개정) 論議(논의)가 있었으나 세 차례의 限時法(한시법)을 制定(제정)하는 線(선)에서 旣存(기존) 儒林(유림)이나 保守的(보수적) 法學者(법학자)들과 妥協(타협)을 보았다.

 

 세 차례에 걸친 限時法(한시법)인 『婚姻(혼인)에 관한 特別法(특별법)』을 통해 事實婚關契(사실혼관계)에 있는 夫婦(부부) 總(총) 17,020건을 救濟(구제)하였다.

 

 現在(현재) 大大的(대대적)인 家族法(가족법)의 改正(개정) 論議(논의)에 따라 國會(국회)에 同姓同本不婚制度(동성동본불혼제도)의 改正案(개정안)이 上程(상정)되어 있어 그 通過(통과)를 기다리고 있다.

 

 (3) 內容(내용)

  同姓同本(동성동본)의 婚姻(혼인)을 禁止(금지)하는 것은 '同性同本(동성동본)인 血族(혈족)'간이다 라는 意識(의식) 때문이다.

 姓(성)은 自己(자기)가 屬(속)한 父系血統(부계혈통)의 標識(표지)를 말하고, 本(본)은 自己(자기) 始祖(시조)의 發祥地(발상지)를 말한다.

 

그러나 外形上(외형상) 同姓同本(동성동본)이라 하더라도 始祖(시조)가 다르면 이 婚姻(혼인)은 禁止(금지)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같은 金海金氏(김해김씨)라도 한 사람은 신라 敬順王(경순왕)의 後孫(후손)이고, 또 한 사람은 駕洛國(가락국) 金首露王(김수로왕)의 後孫(후손)의 婚姻(혼인)이라면 婚姻(혼인)할 수 있다.

 

 비슷한 事例(사례)로서 江陵崔氏(강릉최씨) 최문한의 後孫(후손)과 최립지의 後孫(후손), 또 南陽洪氏(남양홍씨) 중 당홍과 토홍 간에는 同姓同本(동성동본)이지만 始祖(시조)를 달리하므로 婚姻(혼인) 할 수 있다.

 

 - 그러나 婚姻申告時(혼인신고시)에는 誤解(오해)받을 憂慮(우려)가 있으므로 이런 境遇(경우)에는 婚姻申告書(혼인신고서)에 "始祖(시조)를 달리한다." 는 趣旨(취지)를 記載(기재)해야 할 것이다.

 

 이와 反對(반대)로 祖上(조상)과 本(본)은 같으면서도 姓氏(성씨)만 다르게 使用(사용)하는 것은 婚姻(혼인)할 수 없다.

 그 例(예)로 金海金氏(김해김씨)와 金海許氏(김해허씨)씨의 경우인데, 같은 金首露王(김수로왕)의 後孫(후손)으로서 姓(성)만 달리하므로 婚姻(혼인)이 禁止(금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