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김씨 * 허 씨 * 인천이씨는 동본동근
김수로 왕 영정
허왕후영정
김해김씨(金海金氏)와 허씨(許氏)와 인천이씨(仁川李氏)는 가락국 시조대왕을 시조로 하는 동일혈족이다. 즉 허씨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모계 (母系)의 성(姓)을 쫒고 있다는데서 타씨족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특색을 지니고 있다.시조 허왕후(許王后 ) 께서는 왕자(王子) 열분을 낳으셨는데 시조대왕께서 태자는 왕통을 잇게하고 두 왕자는 이국에 출가하시어 늘 외로워하시는 시조왕비를 위로하는 뜻으로 모후(母后)의 성을 계승케 하였다.
(1) 陽川許氏 (양천허씨)
① 허씨의 유래
가락국 태조 7년(서기 48년) 에 16歲인 허 황옥을 비로 맞이 하여 슬하에 10남 2녀를 두었는데 장자 거등은 가락국의 왕위를 잇게 하고 황후 의 청에 따라서 2남과 3남에게 각각 허씨성을 주어 황후의 성을 잇게 하니 곧 차자 거칠부는 명월성의 성주가 되었고, 삼자는 명이다.
그 후에 후손들은 가락국이 폐망하자 각지로 흩어져 살기 시작했는데 문헌상에는 59개 본관이 나타나고 있으되 세인들은 대략 30여개의 본관이 확인되고 있다고 전하고 있으나, 이것은 단지 집성촌에 불과하고 본관으로서는 오직 양천, 김해, 태인, 그리고 하양 뿐이라는 양천허씨대종회의 의견이다.
거주지에 따라서 양천, 태인, 김해, 하양이 주류를 이루고, 경주, 광산, 김제, 김천, 남원, 대전, 밀양, 서산, 수원, 안동, 양구, 양주, 양평, 영천, 의성, 전주, 제주, 진주, 창녕, 청주, 한양, 해주, 시산, 남양, 대구, 함창 등 30개로 이들은 전국 약 7만여 가구에 30만명정도가 있다고 조사되고 있다.
② 시조와 본향 허선문 영정 양천은 경기도에 있던 지역명칭으로 고구려시대에는 재차파의현, 신라 경덕왕때에는 공암현으로 불리다가 1310년에 양천현으로 개칭되어 1914년에 경기도 김포군으로 흡수되었다. 시조는 가락국 태조왕과 황후의 30세손으로 알려진 허선문이다. 그는 공암촌에서 살면서 농사에 힘써 많은 양곡을 비축하였는데 고려 태조왕건이 견훤을 정벌할 때에 군량미가 부족하여 사기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군량을 공급해 주었다.
이에 태조는 그 공으로 선문에게 공암을 식읍으로 하사하였는데 이때부터 본관을 양천으로 정하였다. 주요 대표 인물로는 선문의 손자 원은 내사사인, 지제고, 태자사 등을 지냈고, 증손 정은 예부상서를 거쳐 태자태보를, 후손 공은 수국사 겸 첨의중찬에 올랐다. 조선조에는 우의정 종, 좌의정 침, 좌의정 욱이 있고 숙종때의 우의정 목, 영의정 적은 상평통보를 주조하였다. 동지중추부사를 지내고 동인의 영수를 거친 초당 엽이 있고 그의 자녀 균과 난설헌이 있다. 또한, 선조의 명의 호성삼등공신이자 동의보감의 저자 준 등이 있다. 남한에만 대략 4만가구 20만명이 있고 주로 경기도와 평안북도를 중심으로 세게지가 형성되었다.
(2) 金海許氏 (김해허씨)
① 시조 및 본향 시조 허염은 가락국 허화후의 35세손으로 고려때 삼중대광을 지내고 가락군에 봉해 졌다. 이후로 후손들은 김해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면서 가락군 인전파, 호은공 기파, 중승공 린판, 전적공 인부파. 증성군 구년파, 판서공 언룡파, 상서공 상파등 쿠게 7개파로 분파되어 있다.고려충렬왕때 지공거를 지낸 유전이 가락군에 봉해지고 첨의찬성사에 이어 재상이 되었으며, 옹은 전리판서를 지냈고,조선조에는 동지중추부사 백기, 목사 수겸등이 있으며, 한말의병장 위는 3백명의 의병으로 통감부를 격파하려다 실패하여 서대문감옥에서 옥사하였고, 이외 독립운동가로 겸, 빈, 병률, 형 등이 있다.
남한에 대략 40,00여가구에 20만명의 후손이 강원도 횡성, 홍천, 경남 의령, 합천, 대구 달서구, 경북 포항, 경기도 용원일원에서 집성을 이루며 살고 있다.
(3) 泰仁許氏 (태인허씨)
① 시조 및 본향 태인은 전북 정읍군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태산현과 인의현의 합명이다. 태산현은 백제의 대시산현을 신라 경덕왕이 태산으로 개칭되었으며, 인의현은 백제의 빈굴, 빈성이 신라시대에는 무성으로, 고려조에 와서 인의라 개칭되었으나 1411년에 합현되었다고 전한다.
시조 허사문은 가락국 태조왕의 비 허황후의 30세손으로, 고려 태조 왕건의 딸과 혼인하여 부마가 되었고, 시산군에 봉해졌다. 대표인물로는 후손 풍해도 관찰사 기천현령을 지낸 포가 있고, 병부시랑의 엄, 이부시랑을 지낸 벽, 중서문하평장사 경이 있으며 그의 아들 6형제 곧 사문은 낙안군수, 4자 사행은 감찰부 감찰, 6자 사제는 사평을 지냈다.
1985년 현재 남한에 약 8천명의 후손이 있고, 집성촌은 주로 전북과 전남에 많이 있다.
(4) 河陽許氏 (하양허씨)
① 시조 및 본향 하양은 지금의 경북 경산시 북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고려초에 하주가 불리던 곳을 현종9년에 하양으로 바뀌었다가 조선 영조 18년에 화성현으로 개칭되고 고종32년에 하양군으로 바뀌었다. 그후 1914년에 경산군에 편입되면서 하양면이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고려때 호부낭장을 역임한 허강안을 시조로 하며, 가락국 허황후의 33세손이다. 말년에 호장을 역임하고 하주에 정착함에 본관을 하주라 하더니 지명이 개칭됨에 따라 지금은 하양을 본관으로 삼고 있다.
대표인물로는 강안의 손자 작린이 고려조에 검교대장군을 지냈고, 신은 호부주사, 개성부윤 귀룡, 그의 야들 주는 고려때 지양주사를 거쳐 조선조에는 한성부윤과 경기도간찰사를 지냈으며, 주의 동생 조는 공양왕때 문과에 급제하고 조선 세종때 우의정을 지냈고, 예문관대제학의 성, 형조판서와 세종실록을 편찬한 후, 중추원부사 척, 경주부윤을 역임한 계 등이 있다.
남한에 대략 5,000천여호에 20,000여명의 후손이 경산시, 전북 고창, 전북 진안, 경남 합천 등지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5) 仁川李氏 (인천이씨)
① 시조 및 본향 (득성의 유래) 가락국 태조왕과 허황후의 비의 후손으호서 신라 35대왕인 경덕왕조에 이르러 이찬 허기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안록산의 난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예로써 당 현종을 따라 촉나라로 가서 많은 어려움과 위험을 함께 하면서 황제 호위에 힘을 썼다. 다음해에 난이 평정되자 황제를 따라 환도를 하니 황제가 가상히 여겨 황제의 성인 이씨를 하사하였다. 4년만에 황제의 서신을 받들러 귀국을 하니 경덕왕이 공을 칭찬하며 소성백에 봉하였다.
이후 후손들은 이씨와 허씨로 복성을 사용하다가 태조왕 30세손에 이르러 형 허선문은 양천허씨를 잇고, 아우 허사문은 왕건의 딸과 혼인하여 즙과 도를 낳았는데, 열 즙은 역시 태인허씨를, 아우 도는 인천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도는 고려에서 상서좌복야 상주국 소성백으로 1500가구를 다스렸는데 소성은 인천의 옛이름이다. 이로써 인천이씨는 태인허씨와 분관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으니, 시조 문은 이름을 허겸으로 바꾸어 세계를 이루니, 이때가 서기 1024년이다.고려중엽에 왕실과 척연을 이루며 크게 세력을 떨쳤는데, 곧 이자연이다. 그의 세딸이 문종의 비로 간택이 되고, 이후 문하시중에 올랐다. 인천이씨 시조 이허겸 묘
자연의 아들 호 역시 딸이 순종의 비가 되었고 그의 아들 자겸의 딸 또한 현종의 비가 되메 그 세력의 절정에 달하더니 현종의 아들 인종에게도 딸을 비로 간택되게 하고, 급기야는 난을 일으켰다가 세아들과 함께 귀향을 가게 되는데 이로서 그 권세는 종지부를 찍었다. 대표인물로는 고려조에 이정, 이예, 이오, 이자양, 이자덕 등이 평장사에 오르고, 이공수와 이장용은 문하시중을 역임하였다. 이세흥과 이극명은 대제학을, 이백선은 좌찬성, 이원굉은 문하평리를 지냈으며, 고려의 대표적 문인 이인로도 인천이씨를 대표하고 있다. 조선조에는 이조참판 이관, 예조판서 이거와 이문화, 호조판서 이효인, 형조판서 이효지, 좌승지 이승안, 대사간 이성동, 구한말 개화의 선구자로 이원모 등이 있다.
현재 대략 10만의 후손이 충북 영동, 경북 달성, 전남 장흥, 경남 의령, 경남 함안 등지에서 세거를 이루고 있다.
옛날옛적에 인천은 죽은어머니가 산아들보다... | |||
1636년, 청나라의 군대가 조선을 침략했다. 인조 임금은 왕비와 왕자들을 강화도로 먼저 피난 보낸 후, 자신은 남한산성을 근거지로 하여 청나라와 대치했다. 그러나 얼마 후 강화도가 청나라에 함락되고 곧이어 인조 임금도 청나라에게 항복을 하고 말았다. 어머니와 동생 그리고 아들이 청나라로 잡혀간 것이다. 강해수는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밤잠을 설치는 날이 많아졌다. 그런데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돈 많은 사람들은 잡혀 온 외국인들을 노예로 사 갔다. 이 소식을 들은 강해수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강해수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가족들을 데려오기 위해 집안의 논과 밭을 팔아서 잎담배를 샀다. 당시 만주의 노예 시장에서는 조선의 잎담배값이 비싸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을 데려올 돈으로 잎담배를 사 가지고 가면 세 사람을 데려올 수가 있었던 것이다. 타고 육지로 나가서 보름 이상을 걸어야만 간신히 도달할 수 있었다. 고생고생 끝에 심양에 도착한 강해수는 그만 실망을 하고 말았다. 자기와 같은 처지의 조선인들이 너나할 것 없이 잎담배를 사 가지고 와 그곳의 잎담배 값이 폭락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잎담배를 팔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강해수가 잎담배를 팔아서 손에 쥔 것은 겨우 두사람 몫의 돈이었다.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의 모습이 번갈아 나타났다. 거기서 강해수는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을 들었다. 가족들이 납치 당하여 청나라로 오는 도중에 나이 드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더욱 가슴 아팠던 것은 청나라 상인들이 어머니의 위패를 만들어 놓고 한 사람 몫의 돈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 사람들이 조상의 위패를 몹시 중요시한다는 것을 청나라 상인들이 알고, 그 위패를 이용하여 돈을 벌려는 속셈이었다. 되는 순간이었다. 담배를 붙여 물고 한참을 생각한 강해수는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어머니의 위패와 동생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자식은 머나먼 이국 땅에 홀로 두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물론 그에게도 피를 나눈 자식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존재였다. 그러나 당시 선비가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나라에 대한 충(忠)과 부모에 대한 효(孝)였다. 그리고 그 어머니의 자식, 곧 그의 동생을 택했다. 자기가 낳은 친자식을 추운 바람이 몰아치는 만주 벌판에 홀로 남겨 두고 돌아와야 하는 가슴 아픈 선택을 한 것이다. 훗날, 이러한 강해수의 지극한 효성이 나라에 알려졌고 그의 집에는 홍살문이 내려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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