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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김씨 세계

안산김씨 상조 벼슬 소개

by 연송 김환수 2008. 10. 7.

 

안산김씨 계보연구 2-2권.hwp

용량관계상 2-1권은 사이버 참배 및 종훈(宗訓)  본문 후편에 있음

 

안산김씨 계보 연구

(安山金氏 系譜 硏究)

 

2009. 4. 5

 

 

안산김씨 블로그

http://blog.daum.net/yescheers

 

 고려시대에는 현종에게 딸을 셋이나 왕비로 보낸 김은부(金殷傅)가 있다. 고려사열전에 보면 김은부는 안산현 사람으로 여러 높은 벼슬을 지내고 안산군개국후(安山郡開國候)라는 작위를 받았다고 한다.

 

안산이 현에서 군으로 승격된 것은 그의 작위를 받은 것이라 한다. 그의 아버지도 안산현개국후라는 높은 작위를 하사받았는데, 그를 안산김씨의 문중 조상이라고 받들고 있다.

 

개국후란 그 지역을 처음 세운 제후, 즉 봉건주란 뜻이다. 나라에 유명한 인물에게 사후 시호를 내려주는 예로 충무공이니 문정공이니 하는 것을 임금이 하사해도 개국후란 큰 작위는 좀체로 내려주지 않는다.

안산을 처음 개국한 인물이 있어도 그 개국인만이 안산의 이름을 갖는 것은 아니다. 어느 사람 어느 성씨라도 같은 지명을 시호의 명칭으로, 또는 본관의 명칭으로 사용할 수는 있다.(김정현 향토사가)

 

김은부 가계도 

 

 

 

 

김은부 가계도.xls

 

 

시조 : 김긍필 兢弼 (肯弼)

 

안산김씨 시조 김긍필(金肯弼)은 1024년(고려 현종 15) 상서 좌복야

(尙書左僕射)·상주국(上柱國)·안산현 개국후(安山縣開國侯)에 추봉되어

식읍(食邑) 1500호(戶)를 하사(下賜)받았다.

 

가승에 전하는 기록은 김알지의 28세(27대손)경순왕, 넷째 아들 은열

(殷說), 은열의 아들 30세(29대손) 긍필(兢弼)이 안산김씨 시조 입니다. 

             (세=대 : 시조포함,  대손=세손 : 시조제외)

 

일부 문헌에는 태종무열왕의 17세 직계후손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무열왕 후손으로 보면 시조 긍필은 김알지의 32세(31대손) 입니다.

             (현재 태종무열왕 계보를 연구중에 있음)

  

그의 아들 은부가 고려 성종의 장인으로 호부상서, 상호군이며 딸 3명이 고려 현종의 태후 및 왕후가 되어 국구(왕의 장인)로서 추충수절창국공신·개부의동삼사 수사공 상주국에 이르러 안산군개국후에 봉해졌다.(식읍 1000호)

 

김은부의 외손인 덕종, 정종, 문종이 왕에 오르면서 4대 50여년동안 고려시대의 최고 문벌귀족이 되었으며. 김태후 집안(안산김씨)은 대대로 왕실과 혼인하도록 정해져 고려시대 문벌귀족(재상지종) 가문의 지위를 계속 누리게 되었다.

 
안산김씨 김은부의 부인은 인주(인천)이씨 이허겸의 딸로서 인주이씨가 귀족반열에 오르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자연은 이허겸 손자다.
 
김은부의 큰아들 충찬은 병부상서  작은아들 난원은 문종의 왕사를 거쳐 경덕국사가 되었으며, 대각국사 의천(문종의 아들)의 스승이 되었다.
 
손자 원황은 공부상서, 병부상서  증손 경용(식읍1000호)은 평장사, 문하시중, 경용의 아들 인규는 이부상서, 후손 위는 문하시중, 그 후손들인 원상은 대제학, 성경은진주목사 등  대대로 큰벼슬을 지냈으며,
 
김은부의 11대 후손 김정경이 이조판서와, 좌명공신으로 안산군(연성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안산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인구수 1만 4975명 (2000년).

 

          원성왕후는 원성태후, 원혜왕후는 원혜태후로 추존

          

         * 원성태후 : 덕종, 정종, 인평왕후(문종 왕비), 경숙공주

         * 원혜태후 : 문종, 평양공 왕기, 효사왕후(덕종 왕비)

         * 원평왕후 : 효경공주

 

 

 

○ 안산김씨 세계도

 

시조

2세

(1대손)

3세

(2대손)

4세

(3대손)

5세

(4대손)

6세

(5대손)

7세

(6대손)

8세

(7대손)

9세

(8대손)

김긍필

은부

충찬

원황

경용

인규

지우

충언

안산현

개국후

안산군

개국후

병부상서

공부상서

평장사

좌승선

예빈주부

위위승

동정

문하시중

안종사돈

세딸현종

중추원사

중추원사

판형부사

이부상서

선경부사인

이후 벼슬

실전 

판리부사

상서좌복야

호부상서

우산기상시

병부상서

문하시중

문하성지사

합문지후

 

낙랑군

식읍1500

상호군

식읍1000

지중추원사

 

낙랑공

식읍1000

참지정사

안서도호부 판관

 

충익공

 

 

 

 

 

 

 

 

 

10세

(9대손)

11세

(10대손)

12세

(11대손)

13세

(12대손)

14세

(13대손)

15세

(14대손)

16세

(15대손)

17세

(16대손)

18세

(17대손)

원상

성경

정경

(별장)

(상호군)

 

 

 

 

대제학

진주목사

좌명공신

(상호군)

을신(사직)

맹강(학생)

 

 

 

 

상호군

삼사우사

안산군

(연성군)

(별장)

(대제학)

 

 

 

 

정당문학

의정부사

이조전서

(부정)

 

 

 

 

판삼사사

자헌대부

숭정대부

중추원사

맹전

(사재정)

 

 

 

 

 

 

위정공

중추부사

맹종

(첨정)

 

 

 

 

 

 

 

좌참찬

맹균

(참봉)

 

 

 

 

 

 

 

판중추부사

맹일

(직장)

 

 

 

 

 

 

 

 

맹강

원회

수온

계남

 

 

 

 

승문원

교감

문과장원

수의부위

동지중추

부사

종2품

군관,주부

 

 

 

 

진주강씨

전적

문화유씨

3형제

장남

조헌문하학문

 

 

 

 

맹유

(첨중추)

홍문관교리

 

남원양씨

율곡,성혼강론

 

 

 

(대호군)

맹철

(판서)

부제학

 

 

조헌금산전투참가

 

 

 

 

맹혁

(참판)

4형제

넷째

 

 

이조정랑

한유행장

 

주경

(판서)

이용

(별장)

(판결사)

맹현

(첨지중추

부사)

전주이씨

 

 

청주한씨

 

 

 

 

 

 

 

 

 


 

안산김씨 김긍필의 14세손(13대손)에서 분파되었습니다.

                                                         (참고자료 안산김씨족보 1776년, 1989년)

        o 상호군파    휘 암      (의주,용천)   ** 휘(諱) :왕이나 제후 등이 생전에 쓰던 이름

        o 사직공파    휘 을신   (강진)         

        o 학생공파    휘 맹감   (강진,황주)  

        o 대제학공파 휘 지      (합천)         

        o 부정공파    휘 맹린   (포천1동)      

 

        o 사재정공파 휘 맹전   (안산)         

        o 첨정공파    휘 맹추   (한산)         

        o 참봉공파    휘 맹균   (황해)         

        o 직장공파    휘 맹일   (포천)          

        o 교감공파    휘 맹강   (천안)         

        o 첨중추공파 휘 맹유      ?             

        o 판서공파    휘 맹철   (괴산)          

        o 참판공파    휘 맹혁   (포천, 청산) 

        o 첨지중추부사공파   휘 맹현 (장단) 

 

 

11세

(10대손)

12세

(11대손)

13세

(12대손)

14

(13대손)

분 파 내 용 (집성촌)

성경

정경

別將

(상호군)

 의주파

의주파, 용천파

 

진주목사

삼사우사

의정부사

자헌대부

 

좌명공신

연성군

(안산군)

이조전서

숭정대부

위정공

上護軍

을신

(사직)

 강진파

강진파

맹감

(학생)

 강진파

황해도 황주파

別將

(대제학)

 합천파

괴산파,합천파,산청파,만경파

左參贊

맹린

(부정)

 포천,

 안산,

 천안파

포천파, 양주파

맹전

(사재정)

   〃

안산파

맹추

(첨정)

   〃

한산파

맹균

(참봉)

   〃

황해도파

맹일

(직장)

   〃

포천파

맹강

(교감)

   〃

옥천파(청산파), 천안파

맹유

(첨중추)

   〃

  ?

大護軍

맹철

(판서)

 괴산파

 괴산파

맹혁

(참판)

 포천,

 청산파

 포천파, 청산파

주경

(판서)

이용

(별장)

判決事

맹현

(첨지중추부사)

 장단파

 장단파


 

 안산김씨 교감공파 세계표

 

세와 대 기준표

 

비조 김알지(대보공) <金閼智(大輔公)>

  시조 기준 ↓

본인기준 ↑

 

부(경순왕)<傅(敬順王)>

대代

대손代孫

세손世孫

대조代祖

 

은열(대안군)<殷說(大安君)>

시조

1세

시조

시조

 

시조(始祖) 긍필 (肯弼)

상서좌복야, 안산현개국후

 

2세

1대손

28대조

은부 (殷傅) 호부상서, 상호군, 안산군개국후

3세

2대손

27대조

충찬 (忠贊) 병부상서, 지중추원사

4세

3대손

26대조

원황 (元晄) 공부상서, 병부상서

5세

4대손

25대조

경용 (景庸) 문하시중, 낙랑공

6세

5대손

24대조

인규 (仁揆) 이부상서, 참지정사

7세

6대손

23대조

지우 (之祐) 합문지후, 안서도호부판관

8세

7대손

22대조

충언(忠彦) 위위 승동정

9세

8대손

21대조

위 (渭) (충익공 忠翊公) 문하시중, 낙랑군

10세

9대손

20대조

원상 (元祥) 대제학(大提學) 상호군, 판삼사사

11세

10대손

19대조

성경 (星慶) 진주목사(牧使),의정부사

12세

11대손

18대조

 

중시조

 

정경 (定卿) 원종공신, 연성군(蓮城君), 좌명공신

이조전서(판서), 숭록대부, 위정공(威靖公)

 

묘소 위치 : 경기도 하남시 감북동 157  안촌마을

 

13세

12대손

17대조

 

개 (漑) 좌참찬

 

한 (대호군)

澣 (大護軍)

개 (좌참찬)

漑 (左參贊)

척 (별장)

滌 (別將)

관 (상호군)

寬 (上護軍)

지 (별장)

沚 (別將)

다섯째

넷째

셋째

둘째

첫째

괴산파

포천,안산,천안파

합천파

강진파

의주파


 

      개(漑) 묘소 : 경기도 장단군 하서면 봉황암(鳳凰庵)

                         [현재 북한 지역으로 광복 전 행정구역]

                          예장(나라에서 장사), 추증 의정부좌의정

                          안산군(安山君) 봉작

 

14세

13대손

16대조

 

교감공파(청산파) 파조 (派祖)

맹강(孟綱) 승문원 교감

 

안산김씨 시조 긍필의 14세(13대손)에서 분파

암,을신,맹감,지,맹린,맹전,맹추,맹균,맹일,맹강,맹유,맹철,맹혁,맹현 선조의 벼슬(지역)이름으로 1520년 전후로 분파되었습니다.

 

15세

14대손

15대조

필(珌) 장원급제, 홍문관교리, 증부제학

16세

15대손

14대조

원회 (元會) 수의부위

17세

16대손

13대조

수온 (守溫) 동지중추부사 (종2품)

18세

17대손

12대조

계남(繼男) 군관, 주부

19세

18대손

11대조

종서 (從犀)

20세

19대손

10대조

하일 (夏一)

21세

20대손

9대조

형기 (亨基)

22세

21대손

8대조

명윤 (命尹)

23세

22대손

7대조

처욱 (處彧)

24세

23대손

6대조

항렬(行列) : 1776년 족보

응종 (應鍾)

25세

24대손

5대조

○원(源)

長男 대원-호원 (浩源)

26세

25대손

고조부

락(樂)○

낙삼(樂三) = 秉善(병선)

27세

26대손

증조부

○섭(燮)

도섭 (道燮),元燮, 泰燮

28세

27대손

조부

기(基)○

기홍(其洪), 其榮, 其炯

29세

28대손

아버지

○진(鎭)

광진 (廣鎭,光鎭)

30세

29대손

본인↑

제(濟)○

제동 (濟東), 星洙, 渙洙 (본인)

시조 ↓

31세

30대손

○채(采)

명쾌, 용채(鎔采)

32세

31대손

응(應)○

 

33세

32대손

증손

○재(在)

 

34세

33대손

현손

종(鐘)○, 의(義)○

 

35세

34대손

 

○순(淳), ○태(泰)

 

36세

35대손

 

상(相)○, 재(栽)○

 

37세

53세

36대손

52대손

 

 

37세(36대손) - ○환(煥), ○걸(杰)

38세(37대손) - 효(孝)○, 규(圭)○

39세(38대손) - ○현(鉉), ○용(鎔)

40세(39대손) - 영(永)○

41세(40대손) - ○식(植)

42세(41대손) - 희(熙)○

43세(42대손) - ○균(均)

44세(43대손) - 련(鍊)○

45세(44대손) - ○수(洙)

46세(45대손) - 동(東)○

47세(46대손) - ○형(炯)

48세(47대손) - 원(遠)○

49세(48대손) - ○호(鎬)

50세(49대손) - 하(河)○

51세(50대손) - ○주(柱)

52세(51대손) - 성(成)○

53세(52대손) - ○준(埈)

 


 

 

2세 김은부 (金殷傅) 945(고려 혜종 2년)∼1017(고려 현종 8년).

* 부인 인주이씨 이허겸 딸 (이허겸 아들 이한 -이자상 -이자연 - ---이자겸)

고려 초기의 문신. 수주(水州) 안산현(安山縣) 출신.

본관은 안산(安山). 성종 때 견관승(甄官丞), 목종 때 어주사(御廚使)를 거쳐 현종 초에 공주절도사(公州節度使)가 되었다.

1011년(현종 2)에 왕이 거란의 침입으로 남행(南幸)하자 극진히 영접했고, 왕이 나주까지 피란갔다가 다시 공주에 돌아오자 장녀로 하여금 어의(御衣)를 지어 바치게 하여 왕비가 되니 그가 바로 원성왕후(元成王后)이다. 뒤에 다시 두 딸을 왕비로 바치니 원혜왕후(元惠王后)와 원평왕후(元平王后)이다.

그해 형부시랑으로 거란왕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거란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내원성(來遠城)에서 거란의 사주를 받은 여진인에게 붙잡혔다가 수개월 만에 풀려났다.

1015년에 지중추사(知中樞事), 이듬해 호부상서가 되었다가 뒤이어 중추사상호군(中樞使上護軍)에 제수되었다.

죽은 뒤 국구(國舅)로서 추충수절창국공신 개부의동삼사 수사공 상주국 안산군개국후(推忠守節昌國功臣開府儀同三司守司空上柱國安山郡開國侯)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閔丙河>

 

 

한자 : 金殷傅

영어음역 : Gim Eunbu

이칭/별칭 : 안평공(安平公)

분야 : 역사/전통시대,성씨·인물/전통시대인물

유형 : 인물/전통인물

지역 : 경기도 안산시

시대 :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 여성구

유입검색어 : 김은부

성격 : 문신

출신지 : 경기도 안산시

성별 : 남

몰년 : 1017년

본관  : 안산

대표관직 : 중추사상호군

 

연도 내용 유형

1017 김은부 졸 인물

 

[정의]

고려 전기 안산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안산(安山). 아버지는 안산김씨의 시조 김긍필(金兢弼, 金肯弼), 어머니는 안산군대부인(安山郡大夫人), 처는 소성백(邵城伯) 이허겸(李許謙)의 딸이다. 자녀로 병부상서 김충찬(金忠贊), 경덕국사(景德國師), 원성왕후(元成王后), 원혜왕후(元惠王后), 원평왕후(元平王后) 등 2남 3녀를 두었다.

 

[활동사항]

김은부는 수주 안산현[현 경기도 안산시]에서 태어났으며, 천성이 부지런하며 검소했다. 성종 때 견관승(甄官丞), 목종 때 어주사(御廚使)를 거쳐 현종 초에 공주절도사(公州節度使)가 되었다. 1011년(현종 2) 1월에 거란군의 침입으로 피난길에 나선 왕이 공주에 들렀을 때, 예의를 갖추고 교외까지 나와 의복과 음식을 바치고 호종 관리들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다시 파산역(巴山驛)에서 아전들의 도망으로 곤경에 처해 있던 왕을 위해 반찬을 장만하는 등 왕을 극진히 모셨다.

 

거란군이 물러나고 왕이 개경으로 돌아오는 길에 공주에서 유숙하게 되었는데, 이때 맏딸에게 의복을 지어 바치게 하고 왕을 편안히 모시게 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인해 형부시랑으로 승진하였고, 세 딸이 모두 현종의 비가 되었다. 맏딸은 처음 연경원주(延慶院主)가 되었으며, 1018년(현종 9) 7월 정종을 낳은 뒤 궁주(宮主)가 되고 얼마 뒤에 정식으로 현종의 제3비인 원성왕후가 되었다. 뒤에 다시 두 딸 역시 왕비가 되었으니 각각 원혜왕후(元惠王后)와 원평왕후(元平王后)이다.

 

형부시랑으로 거란 성종(聖宗)의 생일 축하 사절로 파견되었으나 돌아오는 도중 내원성(來遠城)[압록강 검동도]에서 거란의 사주를 받은 여진에게 붙잡혀 억류되었다가 이듬해 10월 풀려나 고려로 돌아왔다. 1015년(현종 6) 지중추사(知中樞事)이 되었으며 1016년 호부상서가 되었다. 뒤이어 중추사상호군(中樞使上護軍)으로 재직하다가 1017년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김은부의 15세손 김처암(金處巖)이 지은 『안산세갈(安山世碣)』에는 김은부가 지은 「조천시(朝天詩)」가 수록되어 있다. 시에는 송의 황제가 베푼 잔치자리의 성대함과 황제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시에 부기하여 「송주사연명부시(宋主賜宴命賦詩)」를 짓게 된 동기와 79세작이라는 제작 시기가 명기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안평(安平)이다. 사후인 1022년(현종 13) 9월 왕후들의 부친이라 하여 추충수절창국공신(推忠守節昌國功臣)의 칭호, 개부의동삼사수사공(開府儀同三司守司空)의 관직, 상주국(上柱國)의 훈위, 안산군개국후(安山郡開國侯)의 작위, 식읍(食邑) 1천 호를 추증하였으며, 처에게도 안산군대부인(安山郡大夫人)을 추증하였다.

 

1024년 김은부의 아버지 김긍필에게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의 벼슬, 상주국의 훈위, 안산현개국후(安山縣開國侯)의 작위, 식읍 1,500호를 추증하였으며, 어머니에게도 안산군대부인을 추증하였다. 또 장인 이허겸에게 상서우복야의 벼슬, 상주국의 훈위, 소성현개국후(邵城縣開國侯)의 작위, 식읍 1,500호를 추증하였다. 1027년(현종 18) 9월 왕후가 살던 집이라 하여 김은부의 택호를 장경궁(長慶宮)이라 하였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안산김씨족보(安山金氏族譜)』

• 『안산세갈(安山世碣)』

• 내고장안산편찬위원회 편, 『내 고장 안산』(안산문화원, 1990)

• 박용운, 「고려전기 문반과 무반의 신분문제」(『한국사연구』21·22,

    한국사연구회, 1978)

• 이완재, 「안산지역의 역사적 고찰」(『한국학논집』16, 한양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89)

 

3세 김충찬(金忠贊) ?∼1036(정종 2).

고려시대의 문신. 본관은 안산(安山). 김은부(金殷傅)의 아들. 1025년(현종 16)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가 되고, 1033년(덕종 2)에 예빈경지중추원사(禮賓卿知中樞院事)를 거쳐서 이듬해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가 되었다.

1035년(정종 1)에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옮겼다가 이듬해 지중추원사 병부상서로 죽었다. 거란에 대하여는 화호책(和好策)을 썼다. 시호는 공정(恭靖)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黃雲龍〉

경덕국사(景德國師)

고려 목종 2년(999) ~ 문종 20년(1066)


고려 시대의 왕사(王師). 본관은 안산(安山). 속성은 김(金), 속명은 난원(爛圓). 안산현(安山縣;현 안산시 장상동) 출신으로 아버지는 호부상서 김은부(殷傅), 형은 병부상서 충찬, 할아버지는 안산김씨 시조 상서좌복야 긍필이고 문종의 외숙부이며, 대각국사 의천의 스승이다.


문종 12년(1058)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여 왕사가 되었고, 도승통(都僧統)을 역임하였다. 문종 19년 5월 문종의 아들인 후(煦;의천, 대각국사)를 스님이 되게 하였고 화엄교관(華嚴敎觀)을 가르쳤다.


구룡산(九龍山) 복흥사(福興寺) 주지를 지냈다. 죽은 후에 복흥사에 비를 세우고 시호로 경덕(景德)을 내리고 국사(國師)로 추존하였다. 그의 묘지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시대

고려

연대

1072년 (문종26년)

유형/재질

묘지명·묵서명 / 돌

문화재지정

비지정

크기

세로 37.5cm,  가로 75.5cm, 글자지름 2cm

출토지

미상

소재지

(한국)국립중앙박물관-서울특별시 용산구용산동6가 168-6

서체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미상 / 미상 / 미상


 

 

 

 판 독 문

九龍山福興寺故 王師都僧統」贈諡景德國師墓誌幷序」
國師諱爛圓俗姓金氏其先安山」郡人也故尙書左僕射諱兢弼祖」
也故檢校太師上柱國諡安平公」諱殷傅父也故安孝國大夫人李」
氏妣也故中樞使兵部尙書忠賛」兄也故首座弘睡師也 師自削」
周羅脫身于豪戚間遭遇累朝歷」揚緇秩纔及順耳陟爲 王師智」
慧花果自然成就賛謂人中之師」子矣烏乎以咸雍二年丙午冬十」
月八日示化報年六十八僧夏五」十七▨▨震悼咸▨迦文定入涅」
槃卽以其月 詔護葬事權之于」五龍山南崗更取▨子冬十月竪」
碑塔▨九龍山福興寺軋隅尋奉」靈骸移安于玆地順也門弟等弗」
杇是圖乃爲墓誌」
  九龍山兮山之秀」  景德師兮師之尊」
  彼佛刹兮旣證果」  此靈本兮且安魂」
[출전 :『韓國金石全文』中世上篇 (1984)]

 

 

 

 

복흥사 경덕국사묘지명 (福興寺景德國師墓誌銘)

 

 

구룡산 복흥사(九龍山 福興寺)의 돌아가신 왕사 도승통(王師 都僧統)이며 시호 경덕국사(景德國師)의 묘지명 및 서문


국사의 이름은 난원(爛圓)이고, 속성은 김씨(金氏)이며, 선조는 안산군(安山郡) 사람이다.


돌아가신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긍필(兢弼)이 조부이고, 돌아가신 검교태사 상주국(檢校太師 上柱國)으로 시호가 안평공(安平公)인 은부(殷傅)가 아버지이며,돌아가신 안효국대부인 이씨(安孝國大夫人 李氏)가 어머니이다.


돌아가신 중추사 병부상서(中樞使 兵部尙書)인 충찬(忠贊)이 형이고, 돌아가신 수좌(首座) 홍주(弘疇)가 은사이다.


국사는 머리를 깎고 호척(豪戚) 사이에서 몸을 빼어낸 이후 여러 대에 걸쳐 계속 승계(僧階)를 높여나갔다. 예순에 이르러 왕사(王師)가 되었으니, 지혜의 꽃과 과실이 스스로 무르익어 사람 중의 스승이라는 찬상을 받았다.


아, 함옹(咸雍) 2년 병오년(문종 20, 1066) 10월 8일에 돌아가시니, 나이는 68세이고, 승랍은 57세이다. 매우 슬퍼하여, 모두 “석가모니가 열반에 드신 것과 같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곧 그 달에 조칙을 내려 장례일을 돌보게 하여 오룡산(五龍山) 남쪽 언덕에 임시로 모셔두었다가, 다시 임자년(壬子年? : 문종 26, 1072 ) 10월에 비와 탑을 구룡산 복흥사(九龍山 福興寺)의 서북쪽 모퉁이[乾隅]에 세우고, 영해(靈骸)를 받들어 이 곳으로 이장하여 모셔두었으니, 순리에 따른 것이다.


문하의 제자들이 위업이 영원하기를 바라며, 이에 묘지(墓誌)를 짓는다.

구룡산(九龍山), 산 중에 빼어나고 경덕국사(景德國師), 스승 중에 으뜸이시다. 저 사찰에서 이미 성불(成佛)의 진리를 깨우쳤으니

이 영혼의 터전에서 또 평안히 하리라.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


 

 

4세 김원황(金元晃) ?∼1062(문종 16).

고려시대의 대신. 본관은 안산. 예종 때 문하시중을 역임한 경용(景庸)의 아버지이다. 1057년(문종 11)에 공부상서(工部尙書)가 되었으며, 1061년에 병부상서를 거쳐 중추원사(中樞院事)에 이르렀다.

이듬해 중추원사 병부상서(中樞院事兵部尙書)로 죽었다. 시호는 의경(毅敬)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黃雲龍〉

 

5세 김경용(金景庸) 1041(정종 7)∼1125(인종 3).

고려의 문신. 본관은 안산. 아버지는 병부상서 원황(元晃)이다.

합문지후(閤門祗候)를 거쳐 광주판관(廣州判官)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어사중승(御史中丞)을 거쳐 1098년(숙종 3) 좌우유덕(左右諭德)·상서이부시랑 지어사대사(尙書吏部侍郎知御史臺事), 1101년 병부상서 동지추밀원사(兵部尙書同知樞密院事), 1103년 지추밀원사, 1105년 판상서공부사(判尙書工部事)가 되고, 예종이 즉위하자 태자태사 수사공(太子太師守司空), 1106년(예종 1)에 좌복야 참지정사(左僕射參知政事), 1107년 서경유수사(西京留守使)가 되고, 1109년 평장사(平章事)로서 최홍사(崔弘嗣) 등과 함께 윤관(尹瓘)·오연총(吳延寵) 등의 여진정벌에 패한 책임을 들어 극론하고, 구성(九城) 환부를 강력히 주장하여 이를 실현하게 했다.

1110년 문하시랑평장사 판형부사(門下侍郎平章事判刑部事), 1112년 문하시중으로 협모위사공신(協謀衛社功臣)의 호가 더해지고 이듬해에 수태부 판상서이부사(守太傅判尙書吏部事)로서 낙랑백(樂浪伯)에 봉해졌다. 여러 차례 벼슬길에서 물러나려 하므로 왕이 특별히 좌부승선(左副承宣) 안당영(安唐潁)을 보내 궤장(几杖)을 하사하고 얼마 후 허락했다.

1122년(예종 17)에는 광국동덕익성공신(匡國同德翊聖功臣)에 낙랑공(樂浪公)이 되었다. 예종으로부터 당시 최고의 국로(國老)대접을 받았다. 식읍 700호 (여지승람), 고려사 식읍 1,000호, 식실봉 300호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河炫綱〉

 

 

성명(姓名)

 김경용(金景庸)   

본관(本貫)

 안산(安山)

시대(時代)

 

자(字)

 

호(號)

   

이력(履歷)

김경용(金景庸)     

병부상서(兵部尙書) 원황(元晃)의 아들. 합문지후(閤門祗侯)·광주 판관(廣州判官)·어사중승(御史中丞) 등을 거쳐 1098년(숙종 3) 상서이부시·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를 지내고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판상서부사(判尙書部事) 등을 역임했다. 1105년 예종이 즉위하자 태자태사(太子太師)·수사공(守司空)·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을 지내고, 뒤에 협모위사치리공신(協謀衛社致理功臣)이 되고 수대보(守大保)·판상서리형부사(判尙書吏刑部事)로 수태사·악랑군개국후(樂浪郡開國候)에 봉해진 후 광국동덕익성공신(匡國同德翊聖功臣)이 되었다.

 

 

김경용(金景庸)

신증동국여지승람(조선 중종26년, 1531)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1권 > 경상도 慶尙道 [1] > 경주부 慶州府   

상성군(商城郡) : 본래는 서형산군(西兄山郡)이었다. 동안군(東安郡) : 본래는 생서랑군(生西郞郡)이었다.

인물 김경용(金景庸) : 용모가 걸출하면서도 잘생겨 고귀하고 깨끗한 풍채가 있었다. 각문지후(閣門祗侯)로 광주 판관(廣州判官)으로 나갔는데 정사하는 것이 까다롭지 않았다. 숙종ㆍ예종 두 대에 벼슬하여 병부ㆍ호부ㆍ공부의 상서(尙書)와 문하평장사를 역임하고, 문하시중 상주국에 승진하였으며, 협모위사치리공신 판상서이형부사 낙랑군 개국백(協謀衛社致理功臣判尙書吏刑部事樂浪郡開國伯)에 가자(加資)되고, 식읍 수백 호를 받았다.

 

6세 김인규 (金仁揆) ?~1142

문하시중 경용(景庸)의 아들. 문과에 급제하여, 1117년(예종 12) 좌승선 (左承宣)이 되었다. 1122년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지주사(知奏事)가 되고, 1124년 검교사공 ·이부상서 ·문하성지사(檢校司空吏部尙書門下省知事)를 지냈다.

사돈 이자겸(李資謙)이 실각한 뒤 좌천되기도 하였으나, 복직되어 수사공좌복야참지정사(守司空左僕射參知政事)에 이르렀다. 성품이 너그러우며 인물이 출중하여, 송(宋)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고려도경》에서 그를 칭찬하였다.

 

7세 김지우(金之祐) 1108(예종 3)∼1151(의종 5).

고려 중기의 문신. 자는 기복(基福).

조상은 신라 원성왕의 후손으로 대대로 고려 때에 고급관료를 지냈다. 아버지는 중서시랑(中書侍郎) 인규(仁揆)이며, 어머니는 좌복야참지정사(左僕射參知政事) 왕하(王嘏)의 딸이다.

관후(寬厚)한 성품이었으며 어려서부터 문학을 좋아했다. 음서(蔭敍)로서 양온령동정(良醞令同正)이 되었으며, 그뒤 대악서승(大樂署丞)·예빈주부(禮賓注簿)·선경부사인(善慶府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1148년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안서도호부판관(安西都護府判官)으로 지방으로 나가 일을 잘 처리하였다.

청렴하고 강직하다는 칭송을 들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韓國金石文追補(李蘭暎編, 亞細亞文化社, 1976)

韓國金石全文―中世 上―(許興植, 亞細亞文化社, 1984). 〈秦榮一〉

 

 

합문지후 김군(閤門祗候 金君) 묘지명

     시대 고려   연대 1152년(의종6년, 금(金) 제량(帝亮) 천덕(天德) 4년)

    유형/재질 묘지명·묵서명 / 돌  문화재지정비지정

 

   

閤門祗侯金君墓誌銘」

 

君諱之祐字福基其先新羅國」元聖大王之後大王生大匡金」

禮禮生三韓功臣三重大匡仁」允允生大子大保左僕射信雄」

雄生司徒內史侍郎平章事因」謂謂生兵部尙書中樞使元晃」

晃生中書令樂浪公景庸庸生」中書侍郎平章事判尙書工部」

事仁揆揆生之祐初功臣仁允」仕大祖統合三國有功隨大祖」

入京家焉金氏之族世世衣冠」顯達金姓自此始矣至今稱爲」

貴姓母開州郡夫人左僕射叅」知政事王嘏之女也君爲人寬」

厚有節少好文學以祖蔭入仕」爲良醞令同正初受寫經院判」

官遷大樂署丞遷禮賓注簿至」善慶府舍人天德三年戊辰二」

月日超拜閤門祗侯出安西都」護府判官爲郡淸直臨事善決」

三年以▨聞辛未年七月二十」六日因病卒于京城享年四十」

四歲娶金氏女王大妃延壽宮」主之兄也追封戶部尙書金」

之女也生子二人長衛尉丞同」正忠彦一男最幼女三人長適」

禮賓主夫黃文富餘並幼壬申」年十月十九日葬于松林縣白古」

浦銘曰天難測命靡常世素貴」壽不長銘於石永以藏」

〔출전 : 『韓國金石全文』 中世上(1984)〕

 

 

합문지후 김군(閤門祗候 金君) 묘지명

군의 이름은 지우(之祐)이고, 자는 복기(福基)로, 선조는 신라국(新羅國) 원성대왕(元聖大王)의 후손이다. 대왕은 대광(大匡) 김예(金禮)를 낳고, 예는 삼한공신 삼중대광(三韓功臣 三重大匡) 인윤(仁允)을 낳고, 윤은 대자대보 좌복야(大子大保 左僕射) 신웅(信雄)을 낳고, 웅은 사도 내사시랑평장사(司徒 內史侍郞平章事) 인위(因謂)를 낳고, 위는 병부상서 중추사(兵部尙書 中樞使) 원황(元晃)을 낳고, 황은 중서령(中書令) 낙랑공(樂浪公) 경용(景庸)을 낳고, 용은 중서시랑평장사 판상서공부사(中書侍郞平章事 判尙書工部事) 인규(仁揆)를 낳고, 규가 지우(之祐)를 낳았다.

처음 공신 인윤이 대조(大祖, 太祖)를 섬겨 삼국을 통합하는 데 공로가 있었으므로 대조를 따라 서울로 올라 와 가문을 일구었다. 김씨 집안이 대대로 벼슬하여 현달하였으니, 김씨 성이 이로부터 비롯하였으며, 지금에 이르러서도 귀성(貴姓)으로 불리운다. 어머니는 개주군부인(開州郡夫人)으로 좌복야 참지정사(左僕射 叅知政事) 왕하(王嘏)의 딸이다.

군은 사람됨이 관대하고 너그럽고 지조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글공부하기를 좋아하였는데, 조음(祖蔭)으로 벼슬하여 양온령동정(良醞令同正)이 되었다. 처음 사경원판관(寫經院判官)이 되었다가 대악서승(大樂署丞)에 오르고, 예빈주부(禮賓注簿)로 바뀌었다가 선경부사인(善慶府舍人)에 이르렀다. 천덕(天德) 3년 무진년 2월에 합문지후(閤門祗候)에 특별히 임명되면서 안서도호부판관(安西都護府判官)으로 나갔다. 군(郡)을 청렴하고 정직하게 다스리고 일을 잘 처리하였으므로, 3년이 되자 잘 다스린다는 평판이 있었다. 신미년(의종 5, 1151) 7월 26일에 병으로 서울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44세이다.

김씨 집안의 여인을 아내로 맞았는데, 왕대비(王大妃) 연수궁주(延壽宮主)의 언니이며, 호부상서(戶部尙書)에 추봉된 김선(金瑄)의 딸이다. 아들 둘을 낳으니, 큰아들은 위위승동정(衛尉丞同正) 충언(忠彦)이고, 다음 아들은 가장 어리다. 딸은 세 명이 있는데, 큰딸은 예빈주부(禮賓主夫) 황문부(黃文富)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임신년(의종 6, 1152) 10월 19일에 송림현 백고포(松林縣 白古浦)에 장례지냈다.

명(銘)하여 이른다.

하늘의 뜻은 헤아리기 어려워 사람의 목숨도 항상 같을 수는 없네.

대대로 본래 귀한 가문이지만 수명이 길지 못하였네.

돌에 명(銘)을 새겼으니 영원토록 간직되리라.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

인종(仁宗)의 후비

왕후ㆍ부인의

시호와 성씨

왕후ㆍ부인의

본관과 가계

자 녀

비  고

폐비 리씨

廢妃 李氏

仁州. 부 : 조선국공

朝鮮國公 리자겸李資謙

(세째 딸)

 

연덕궁주延德宮主로 

불림.

폐비 리씨

廢妃 李氏

仁州. 부 : 조선국공

朝鮮國公 리자겸李資謙

(네째 딸)

 

리자겸이 인종을 독살

하려 하자 이를 막음.

공예(왕)태후 임씨

恭睿(王)太后 任氏

부 : 중서령中書令

임원후任元厚

외가 : 문하시중門下

侍中 이위李瑋

의종毅宗ㆍ명종明宗ㆍ신종神宗ㆍ대령후大寧侯 경暻ㆍ원경국사元敬國師 충희冲曦ㆍ승경궁주承慶宮主ㆍ덕령궁주德寧宮主ㆍ창락궁주昌樂宮主ㆍ영화궁주永和宮主

평장사平章事 김인규

金仁揆의 아들 지효之孝

와 결혼했다가 인종과

재혼함. 의종 때 전호

殿號을 후덕厚德, 부호

府號를 선경善慶이라 함.

선평왕후 김씨

宣平王后 金氏

부 : 병부상서兵部尙書

김선金璿

 

의종이 왕태비王太妃로

높여 연수궁주

延壽宮主로 함.

※ [ ]안의 시호는 고리 역대 임금들이 더해준 이름이다.


 

 

 

8세 김충언 (忠彦) ?

  子 金渭,   1151년이후(의종5년) 위위승동정(衛尉丞同正)

   이후벼슬 기록실전 

   고려 황제 의전담당 부서 위위시 소속 관직

       위위경(卿:종3품) 1명,

       위위소경(小卿:종4품) 1명,

       위위승(丞:종6품) 2명,

       위위주부(注簿:종7품) 2명,

       서사(書史) 6명

        

 9세 김위 (金渭) ?

려의 문신. 본관은 안산.

麗朝 壁上三韓三中大匡 金紫光祿大夫

推忠守義 奮勇忘軀 靖亂功臣 上柱國 開府儀同三司 守太師 門下侍中

上將軍 判吏部事 樂浪郡 開國伯 贈謚 忠翊公 夫人 忠原郡夫人 安氏

 

 

려조 벽상삼한삼중대광 금자광녹대부

추충수의분용망구 정난공신 상주국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문하시중

상장군 판리부사 낙랑군 개국백 증 충시익공 부인 충원군부인 안씨

 

 

 

 

10세 김원상 (金元祥) ? ~ 1339(충숙왕 복위 8)

 

고려말의 문신. 충렬왕(재위1274~1308년)때 문과에 급제하여 주부·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지내고 비서윤(祕書尹)·지감찰사사(知監察司事)·지신사(知申事) 등을 거쳐 좌승지가 되었으나 왕을 황음(荒淫)하게 한 죄로 파직되었다.  그러나 다시 지신사·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1309년(충선왕 1) 검교평리(檢校評理)가 되었다가 회주목사(懷州牧使)로 좌천되었다.

1320년(충숙왕 7) 삼사사(三司使)·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오르고, 1322년 심왕 고(瀋王暠)의 왕위 찬탈 음모를 도운 죄로 해도(海島)에 유배되었으나 원제(元帝)의 명으로 곧 풀려난 뒤 판삼사사에 이르러 죽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朴天圭〉

족보기록 벼슬

* 삼중대광 광정대부( 삼중대광 금자광록대부 三中大匡 金紫光祿大夫),

   판삼사사, 진현관 대제학사, 상호군, 증시 문광공

* 충숙왕 7년 정당문학, 판삼사  (판삼사사 :고려시대, 삼사(三司)의 으뜸

벼슬. 품계종일품으로 재신(宰臣)이 겸하다. ≒ 판사사.

 

김원상 사위 창원부원대군 왕우 (공양왕 동생)

 

 

신종 (고려 제20대왕)

 ↓

 ↓

6대손 정원부원군 균 鈞      김원상 = 여흥민씨(황려군부인 민씨)   鈞 弟 학성부원군 향

 ↓                                          ↓                                             ↓

7대손 공양왕 요 瑤    = 瑤 弟 정양(정원)부원군                       子 왕화 (공양왕4촌)

                              창원부원대군 우 瑀 = 김원상 딸                

                                                                                            ↓

                                                                            안산(연성)군 김정경 = 왕화 딸

 

 

11세 김성경 (金星慶)

통훈대부 진주목사, 증 자헌대부 삼사우사 의정부사 연성군

 

12세 김정경 (金定卿)

 1345(충목왕 1)∼1419(세종 1).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안산(安山). 시호는 위정, 아버지는 진주목사 성경(星慶)이다.

일찍이 고려 때에 벼슬하였으나, 새 왕조 창업에 찬성하고 이성계(李成桂)를 지지하였다. 조선 개국 후 삼군절도사를 거쳐 이조전서(판서)를 지냈는데, 인사관리를 잘하였다.

1396년(태조 5)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가 되어 전라도와 충청도 각지의 성을 수축하고 군비를 점검하는 한편 병선(兵船)의 허실을 조사하였다.

1400년 방간(芳幹)의 난이 일어나자 한성부윤(현서울시장)으로서 방원(芳遠)에 협력하여 이를 진압, 좌명공신 4등에 책록되고, 연성군(蓮城君)에 봉해졌다.

그뒤 공안부윤(恭安府尹)이 되었는데, 병을 핑계로 명나라의 사행을 회피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404년(태종 4)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 1408년 개성부유후(開城府留後)를 역임하고, 1410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용맹하고 매사에 적극적이었다. 시호는 위정(威靖)이다.

참고문헌 太祖實錄, 太宗實錄, 國朝人物考. 〈崔完基〉

  

                             위정각 (경기도 하남시 감북면)

 

 김정경(1345∼1419)은 조선 초기 문신으로 고려말에 벼슬을 하였으나 새 왕조 창업을 지지하고 태조와 태종을 섬겼다.

삼군절도사를 거쳐 이조전서를 역임했고, 1400년 방간의 난이 일어나자 방원을 도와 좌명공신 4등에 책록되고 연성군에 봉해졌다.

 

 위정사는 숙종 8년(1667)에 세운 이 사당은 앞면3칸·옆면 1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음력 7월 15일과 10월 29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 음력 7월 15일 위정사 기제 (국불천위 제사)

    음력 10월 29일은 하남시 감북동 위정각 양력 4월 5일 향사로 변경 

 

공은 부인을 세 번 맞이하였으니, 판서 신익지, 신양군 노영, 남평군 왕화의

딸이다. 5남 1녀를 낳았다.

별장 지는 신씨 소출이요, 상호군 관, 별장 척은 노씨 소출이요,

판중추 평호공 개와 안성위 한과 서령 안철산 처는 왕씨 소출이다.

 

  소생 5남 1녀 {사위 안철산}  

 

지 (별장)

沚 (別將)

관 (상호군)

寬 (上護軍)

척 (별장)

滌 (別將)

개 (좌참찬)

漑 (左參贊)

한 (대호군)

澣 (大護軍)

 

 

첫째

 

 

 

둘째

 

셋째

 

넷째

 

다섯째

 

의주파

 

강진파

 

합천파

 

포천, 안산,

 

 

 

천안파

 

 

괴산파


    *** 滌(척) : 씻을 척, 물 이름 조 ***

 

위 정 사

 

종목 : 문화재자료 제12호 (충북)

수량 : 1동

지정일 : 1994.01.07

소재지 : 충북 괴산군 장연면 광진리 291

소유자 : 안산김씨종중

관리자 : 김재천

연락처 : 충청북도 괴산군 문화체육과 043-830-3444

 

위정공 김정경(연성군=안산군)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13세 김개 (金慨)

 

1405(태종 5)∼1484(성종 15).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안산(安山). 자는 선택(宣澤). 아버지는 연성군(蓮城君) 정경(定卿)이다. 1422년(세종 4) 음직(蔭職)으로 남부녹사(南部錄事)에 제수되었다.

이후 세자우시직(世子右侍直)·전농시주부(典農寺主簿)·대호군 겸 판통례문사(大護軍兼判通禮門事)·상서원소윤(尙瑞院少尹) 등을 역임하였다. 1455년(세조 1) 첨지중추부사로 원종이등공신(原從二等功臣)에 책록되면서 동지중추부사에 승진하였다.

1457년 중추부사가 되고 다음해 사은사 김세민(金世敏)의 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59년 열무(閱武) 때에 보인 무재(武才)로 가정대부(嘉靖大夫)가 되었다. 1461년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오르면서 행상호군(行上護軍), 이어 행첨지중추부사·지중추원사 등을 역임하였다.

1465년 원각사제조(圓覺寺提調)로서 원각사의 조성을 지휘하였다. 1467년 행의정부 좌참찬(行議政府左參贊)에 임명되었다.

1468년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승진되었으나, 남이(南怡)의 옥사에 연루된 사위 조경치(曺敬治)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1470년(성종 1) 서용되었고, 이후 행상호군·의묘조성제조(懿廟造成提調)·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를 역임하였다. 또 공혜왕후(恭惠王后)의 산릉도감(山陵都監)과 선공감(繕工監)의 제조를 겸하였다. 성품이 민첩하고 해서(楷書)에 능하였으며, 영선(營繕)에 공이 있었다. 시호는 평호(平胡)이다.

≪참고문헌≫ 世祖實錄 , 成宗實錄, 訥齋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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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金漑, 1405년 ∼ 1484년)는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 외척이다. 본관은 안산(安山)으로 자는 선택(宣澤), 시호는 평호(平胡)이다. 1465년(세조 11년) 원각사제조(圓覺寺提調)로서 원각사의 조성을 주관하으며 숭록대부 판중추원사에 이르렀고 사후 증직으로 의정부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안산군(安山君)에 봉작되었다. 양녕대군의 셋째 아들 서산군의 부인 양천군부인 김씨의 친정아버지이다.

 

고려 현종의 장인이며 원성왕후, 원혜왕후, 원평왕후의 친정아버지인 안산군개국후 김은부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연성군(蓮城君) 김정경(金定卿)이다. 그의 딸 양천군부인 김씨는 조선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의 셋째 아들 서산군과 가례를 올렸다.

 

여러 관직을 거쳐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455년(세조 1) 첨지중추부사로 원종공신(原從功臣) 이등관(二等管)에 책록되었으며 이후 동지중추부사, 1457년 중추원부사 등을 지냈다. 1459년 가정대부(嘉靖大夫)로 승진하고, 1461년 자헌대부(資憲大夫) 행상호군(行上護軍), 행첨지중추부사ㆍ지중추원사 등을 거쳐 1465년 원각사제조(圓覺寺提調)로서 원각사의 조성을 지휘하였다.

 

1467년 행의정부좌참찬(行議政府左參贊)을 거쳐 1468년 숭록대부(崇祿大夫)가 되었다. 이후 1470년(성종 1) 행상호군ㆍ의묘조성제조(懿廟造成提調)ㆍ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렀으며 안산군에 봉군되었다.

 

사후 증 의정부좌의정에 추증되었고, 평호(平胡)의 시호가 내려졌다.

 

묘는 경기도 장단군 하서면 봉황암(鳳凰庵)[현재 북한 지역으로 광복 전 행정구역] 에 있다. 예장(나라에서장사), 배(부인) : 파평윤씨, 진천송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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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172권, 15년(1484 갑진 / 명 성화(成化) 20년) 11월 25일(무신) 4번째기사
판중추부사 김개의 졸기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개(金漑)가 졸(卒)하였다. 철조(輟朝)15579)

·조제(弔祭)·예장(禮葬)하기를 예(例)와 같이 하였다. 김개의 자(字)는 선택(宣澤)이며 본관이 안산(安山)인데 연성군(蓮城君)김정경(金定卿)의 아들이다.

 

영락(永樂) 임인년에 음직(蔭職)으로 처음에 남부 녹사(南部錄事)에 제수되어 전농시 주부(典農寺主簿)를 거쳐서 여러 번 올라 대호군(大護軍) 겸 판통례문사(兼判通禮門事)와 상서원 소윤(尙瑞院少尹)이 되었다. 경태(景泰)) 계유년에 뛰어올라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임명되고 을해년에 가선 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올랐으며, 천순(天順)) 기묘년)에 세조(世祖)가 동교(東郊)에서 열무(閱武)) 하면서 김개를 장(將)으로 삼았는데, 세조가 진(陣)을 설치한 형세를 바라보고 그 남다름에 크게 감탄하여 특별히 가정 대부(嘉靖大夫)에 올렸다.

 

신사년에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오르고 또 정헌 대부(正憲大夫)에 올랐으며, 성화(成化)) 을유년에는 숭정 대부(崇政大夫)에 오르고 정해년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에 제수되었다.

 

무자년에 숭록 대부(崇祿大夫)에 가해지고 계사년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제수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80세이다. 평호(平胡)라고 시호(諡號)하니, 다스림에 사고가 없은 것을 평(平)이라 하고, 오래 수(壽)한 것을 호(胡)라 한다. 김개는 용모가 아름답고 해서(楷書)를 잘 썼으며, 성품이 정교(精巧)하고 민첩하여 국가에 영선(營繕))이 있으면 감독하여 관장한 것이 많았다.

 

성종 184권, 16년(1485 을사 / 명 성화(成化) 21년) 10월 15일(임진) 6번째기사
지중추부사 김한(兄김개)의 졸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김한(金澣)이 졸(卒)하니, 철조(輟朝)하고 부의(賻儀)를 내려 주고 조제(弔祭)하기를 예(例)와 같이 하였다. 김한안산인(安山人)이며, 연성군(蓮城君) 김정경(金定卿)의 아들이다. 공정 대왕(恭靖大王)의 딸인 고성 군주(高城君主)에게 장가들었는데,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자헌 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러 졸(卒)하니, 향년이 77세이다. 시호는 호평(胡平)인데, 오래도록 장수(長壽)한 것이 호(胡)이고, 다스려 재앙이 없는 것이 평(平)이다.

 


 

14세 김맹강 (金孟鋼)

 

성종(成宗) 14년 (계묘, 1483년), 춘당대시(春塘臺試)

병과19(丙科19) 

자(字) 극유(克柔), 본관(本貫)안산(安山)

자(子)김위(金瑋), 金珌 부(父) 김개(金漑)

조부(祖父)김정경(金定卿)

증조부(曾祖父)김성경(金星慶) 외조부(外祖父)윤구(尹救)

처부(妻父)강희안(姜希顔)

전력(前歷)충의랑(忠義郞)

관직(官職)교감(校勘)

 

15세

(14대손)

16세

(15대손)

17세

(16대손)

18세

(17대손)

19세

(18대손)

20세

(19대손)

김필

김원회

김수온

김계남

김종서

김하일

문과장원

수의부위

동지중추부사종2품

군관,주부

진사

진사

전적

문화유씨

조헌문하학문

순흥안씨

밀양박씨

홍문관교리

 

3형제장남

율곡,성혼강론

 

 

부제학

 

남원양씨

조헌 금산전투참가

 

 

4형제넷째

 

 

이조정랑한유행장

 

 

완산(전주)이씨

 

 

청주한씨

 

 


 

  

15세 김필 (金珌 : 별시 문과장원 급제) 

 

전(前) 부사(府使) 김필(金珌) 통정대부 홍문관 부제학

 

장원 급제후 전적(성균관 정6품)되었다가 기묘사화로 유배되는 스승 김식(부제학, 대사성, 영의정 추증)을 전송하다가 처벌을 받게 되자 벼슬을 그만두었고 후에 홍문관의 교리(정5품)에 제수되었으나 불취(不就 : 나서지 않음)하고 독서에만 전념하였습니다.

 

정승 벼슬도 가능하셨던 할아버지인데 우리 집안으로 볼 때는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관운은 하늘이 내리는가...

홍문관 부제학(통정대부 : 정3품 당상관), 지제교 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에 추증되었다.

 

가족사항

부(父) : 김맹강(金孟鋼)

조부(祖父) : 김개(金漑)

증조부(曾祖父) : 김정경(金定卿)

외조부(外祖父) : 강희안(姜希顔)

처부(妻父) : 오원군 이보정(五原君 李寶貞)

형(兄) : 김위(金瑋)

 

 

 

15세 김필 홍문관 부제학 교지

 

전 부사 김필 통정대부 홍문관 부제학, 지제교 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자  건륭 11년 9월 일 (영조 22년, 1746년 9월)

 

교지(敎旨)란 조선시대 임금이 4품이상의 벼슬아치를 임명할 때에 내려주던 임명장으로 관고, 관교, 왕지라고도 한다. 본 교지는 김필(金必)에게 통정대부의 지위를 주고 홍문관 부제학과 지제교 겸 경연 참찬관 및 춘추관 수찬관을 추증한다는 내용의 교지이다.(건륭 11년 9월 일)

 

 

교지

숙인 이씨 증 숙부인 자  건륭 11년 9월 일 (영조 22년,1746년 9월)

증 통정대부 홍문관 부제학 김필의 부인 전주이씨에게 내린 교지

 

숙   인 : 조선시대 정3품 당하관(堂下官) 및 종3품 문·무관의 외명부(外命婦).

숙부인 : 조선(朝鮮) 때 당상관(堂上官) 정3품(正三品) 문무관(文武官)의 아내

           에게 주던 봉작(封爵)

 

숙부인 이씨 : 父(부) 오원군 이보정 (정종대왕 증손자)

 

김필公의 장인되시는 전주이씨 오원군에 대한 내용입니다.

 

정종대왕에 10째 아들이신 덕천군에 자손으로

덕천군에 장자 신종군 신종군에 5자 오원군입니다.

 

오원군께서는 두 아드님과 두따님을 두시었는데

장자는 진강령이시고 차자는 금마령이십니다.

 

장녀는 박씨집안으로 출가하셨고 차녀는 안신김씨 집안으로

출가 하셨습니다.

 

 

즉 오원군에 사위는 교감 맹강님에 4째 아드님이신 부제학 김필공이십니다.

김필공께서 조광조 김식 사화에 연루되시어 간신히 참화를 면하셨으나

많은 고초를 겪으셨는데 그때 처남이신 진강령께서도 곤욕을 치르시고 장인이신

오원군께서도 곤욕을 치르셨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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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세거지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연곡리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길명리
강원도 평강군 유진면 적전리
강원도 평강군 고암면 북평리
경상남도 합천군 묘산면 광산리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덕연리
충청남도 아산시 탕정면 동산리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 일원
충청북도 괴산군 장연면 광진리
평안남도 용강군 신녕면 수일리
평안북도 의주군 고령삭면 서고동
평안북도 용천군 양광면 용덕동
평안북도 의주군 수진면 일원

 

태종무열왕 계보도

 

김알지 - - - 16세 태종무열왕 - 17세 문왕 - 18세 대충 - 19세 사인 - 20세 유정 - 21세 내흥

22세 경징 - 23세 영 - 24세 종유 - 25세 궁일 - 26세 은의- 27세 女 壻 李翰(全州李氏)

(25세부터 다시 시작) 25세 숭일 - 26세 강의 - 27세 경영 - 28세 욱성 -

29세 승흥 - 30세 헌 - 31세 지주 - 32세 긍필(兢弼) 안산김씨 시조


 

실전기록 찾기 도표

 

경주김씨

30세

경주김씨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36세

37세

38세

39세

40세

41세

三性

淵源譜

 

헌 (獻)

三性

淵源譜

 

지주(支柱)

(日旦)

(陟)

직휘

(直輝)

용도

(用度)

충림

(忠霖)

(渥)

순손,우손

(舜孫,禹孫)

女이지언

 

 

 

 

 

 

원황

(元晃)

경용

(景庸)

인규

(仁揆)

헌 (獻)

(벼슬사도)

효종

慶州金氏

지주(支柱)

경순왕

(日旦)

은열

(陟)

정구

직휘

(直輝)

계삼

용도

(用度)

한공

충림

(忠霖)

(渥)

순손,우손

(舜孫,禹孫)

섬한

(暹漢)

 

 

경용

(景庸)

인규

(仁揆)

경주김씨 장군공후

계보도

1세

2세

3세

4세

5세

6세

7세

8세

9세

효종

경순왕

(太子 鎰)

순웅

(順雄)

인위

(因謂)

원정

지열

(之說)

순부

(舜符)

영유

(英裕)

의공

(義公)

광준

(光俊)

남미

(南美)

인천이씨

시조

2세

3세

4세

5세

6세

7세

8세

9세

10세

이허기 10세손

허겸

허겸

자연

자겸

지언

-

-

-

 

(사위)

김은부

妻家

경주김

父 인규

인규 子

지효

안산김씨 김지우

묘지명 (1152년)

시조

2세

3세

4세

5세

6세

7세

8세

9세

10세

원성왕

김예

(金禮)

인윤

(仁允)

신웅

(信雄)

인위

(因謂)

원황

(元晃)

경용

(景庸)

인규 (仁揆)

지효(절손)

지우(之祐)

 

 

 

안산김씨 경덕국사

묘지명 (1072년)

시조

2세

3세

4세

5세

6세

7세

8세

9세

10세

 

 

긍필

(兢弼)

은부

(殷傅)

충찬

(忠贊)

 

 

 

 

 

 

 

안산김씨 족보

(1989년)

시조

2세

3세

4세

5세

6세

7세

8세

9세

10세

경순왕

은열

(殷說)

긍필

(兢弼)

은부

(殷傅)

충찬

(忠贊)

원황

(元晃)

경용

(景庸)

인규

(仁揆)

지효(절손)

지우(之祐)

충언

(忠彦)

김위

(金渭)

원상

(元祥)


 

  28대    29대    30대    31대    32대    33대   34대   35대   36대   37대                  

 경순왕  은열     일      순웅    인위    경용   인규   지우   경주김씨 김지우 묘지명

 경순왕  은열    태화     정구    계삼    한공   경용   인규                      경주김씨 

태종무열왕 - 문주- - - 내흥 - - - -

  욱성    승홍     헌       지주      -         -       -     원황   경용   인규   삼성연원보

                       30대    31대   1세     2세    3세     4세     5세     6세                   

 원성왕 - - -   경순왕   은열   긍필    은부   충찬   원황    경용   인규   안산김씨 


경덕국사(景德國師) 난원(충찬 동생)의 묘지명 (연대 1072년, 문종20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사의 이름은 난원(爛圓)이고, 속성은 김씨(金氏)이며, 선조는 안산군(安山郡)

사람이다. (1066년, 문종20년 돌아가시다)


돌아가신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긍필(兢弼)이 조부이고, 돌아가신 검교태사

상주국 (檢校太師 上柱國)으로 시호가 안평공(安平公)인 은부(殷傅)가 아버지이며, 돌아가신 안효국대부인 이씨(安孝國大夫人 李氏)가 어머니이다.


돌아가신 중추사 병부상서(中樞使 兵部尙書)인 충찬(忠贊)이 형이고, 돌아가신

수좌(首座) 홍주(弘疇)가 은사이다.



김지우(金之祐 : 1108~1151) 묘지명 (연대 1152년, 의종6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선조는 신라국(新羅國) 원성대왕(元聖大王)의 후손이다.

대왕은 대광(大匡) 김예(金禮)를 낳고,

예는 삼한공신 삼중대광(三韓功臣 三重大匡) 인윤(仁允)을 낳고,

윤은 대자대보 좌복야(大子大保 左僕射) 신웅(信雄)을 낳고,

웅은 사도 내사시랑평장사(司徒 內史侍郞平章事) 인위(因謂)를 낳고,

위는 병부상서 중추사(兵部尙書 中樞使) 원황(元晃)을 낳고,

황은 중서령(中書令) 낙랑공(樂浪公) 경용(景庸)을 낳고,

용은 중서시랑평장사 판상서공부사(中書侍郞平章事 判尙書工部事) 인규(仁揆)를 낳고, 규가 지우(之祐)를 낳았다

큰아들은 위위승 동정(衛尉丞同正) 충언(忠彦)이고,

다음 아들은 가장 어리다. 딸은 세 명이 있는데,

큰딸은 예빈주부(禮賓主夫) 황문부(黃文富)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임신년(의종 6, 1152) 10월 19일에 송림현 백고포(松林縣 白古浦)에 장례 지냈다.


왕후 본관 및 가계

왕후ㆍ부인의

시호와 성씨

왕후ㆍ부인의

본관과 가계

자   녀

비    고

원성[용의공혜영목량덕신절순성자성광선]태후 김씨

元城[容懿恭惠英穆良德信節順聖慈聖廣宣]太后 金氏

안산安山. 부 : 시중

侍中 김은부金殷傳

 

덕종德宗ㆍ정종靖宗ㆍ인평왕후仁平王后ㆍ경숙공주景肅公主

덕종이 왕태후로 높임.

 

 

원혜[평경]태후 김씨

元惠[平敬]太后 金氏

안산安山. 부 : 시중

侍中 김은부金殷傳

문종文宗ㆍ평양공平壤公 기基ㆍ효사왕후孝思王后

처음 안복궁주安福宮主라 부르다가 연덕궁주延德宮主로 고침. 문종 때 태후로 높임.

원평왕후 김씨

元平王后 金氏

 

 

안산安山. 부 : 시중

侍中 김은부金殷傳

 

 

 

 

 

 

 

 

원순숙비 김씨

元順淑妃 金氏

부 : 평장사平章事

김인위 金因渭

경성왕후敬成王后

 

처음 경흥원주景興院主로 불림


 


해설

김지우 묘지명(1152년)의 붉은 글은 후손들이 원황(系子)의 계보가 아닌 친부 상계 조상을 기록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원성대왕이후 계대기록이 지금까지 밝혀진 기록보다  많이 누락되었기 때문입니다. 

 

김지우 묘지명 계보
원성왕, 김예(金禮), 인윤(仁允), 신웅(信雄), 인위(因謂), 원황(元晃), 경용(景庸),

인규(仁揆)

신라김씨(경주김씨) 계보 및 장군공파 계보
시조 김알지 - - - - 十九世 원성왕(元聖王), 예영(禮英), 균정(均貞), 신무왕(神武王), 문성왕(文聖王), 안(安),민공(敏恭), 실홍(實虹), 효종(孝宗), 二十八世 경순왕(敬順王), 二十九世 은열(殷說) - 태화(泰華) - 순웅(順雄) 경주김씨 장군공파 원조(1世), 因渭(인위), 元鼎(원정), 지예, 순부 - 이후계대는 생략하겠습니다

4세 원황

5세 경용

6세 인규

7세 지우

8세 충언


남당유고를 참고하겠습니다.

22page

 

? - 억렴 [경순왕의 큰 아버지] -

                    신성[태조의 5비인 신성왕후?] - 안종대왕

? - - 태기 - 긍필 - 은부

                            [김은부는 ? -1017. 현종의 장인]

                      ② 태부 [925년생]

                      ③ 태교 [928년생]

 

? - 유렴 - 태기(경진 920) - 긍필(무신 946) - 은부(?-1017) -

                                충찬(?1036) - 약운(계묘 1003) (원황)[임인 1002

                                ∼1062] - 준국(계해 1023) -

                                경용(10411125) - 인규(?~1142)


 

시조

1

시조

계대

 

시조(始祖) 긍필 (肯弼,兢)

상서좌복야, 안산현개국후

2

1대손

은부 (殷傅) 호부상서, 상호군, 안산군개국후

3

2대손

충찬 (忠贊) 병부상서, 지중추원사

4

3대손

系子

원황 (元晄) 공부상서, 병부상서


※ 남당 박창화 선생의 안산계 계보가 맞다면 충찬이후 절손으로

   원황이 계대를 이었다고(系子) 볼수 있겠다.

 

    참고로 남당선생은 재야 사학자로 1962년에 세상을 떠나신  분으로

   우리 집안과 아무런 연고도 없고 고려사 현종의 내용을 필사하면서 

   현종의 국부(장인 김은부)인 안산계 계보를 허위로 작성할 이유는

    없습니다.

 

    남당 선생이본 궁내성 왕실도서관(서릉부)에 근무할 당시에 

    안산계 자료를 필사하신 것이 확실하다면 신뢰도는 아주 높은 

    입니다. 




 

 

 

 

 

 

 

 

 

 

 

 

 

 

 

 

○ 과거급제자

 

김맹강(金孟鋼) :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안산으로 개의 아들이다. 자는 극유로 강희안의 사위이다. 성종(世宗) 14년(1483) 춘당대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교감에 이르렀다. 안산시 원곡동에 묘가 있었으나 안산 신도시 건설로 인하여 충청도로 이장되었다.

 

김곤(金琨) :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안산으로 맹수의 아들이다. 연산군 2년(1496) 별시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부정을 역임하였다.

 

김필(金珌) :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안산으로 교감 맹강의 아들이다. 자는 자수, 호는 모기재로 김식의 문인이다. 중종(中宗) 14년(1519)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전적이 되었다.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처벌받았으며, 이후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안산시 원곡동에 묘소가 있었으나 신도시 건설로 인하여 충청도로 이장되었다.

 

김옹(金壅) :

중종 35(154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산으로 자는 사화이며 세무의 아들이다. 선조 9년(157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현감을 지냈다.

 

김취의(金就義) :

명종 3년(154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산으로 자는 의중이며 엽의 아들이다. 선조 18년(158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형조정랑을 지냈다.

 

김항(金沆) :

인조 24년(164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산이며 자는 태초로 광적의 아들이다. 숙종(肅宗) 5년(1679)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예에 이르렀다.

 

김양심(金養心) :

영조 1년(1725)~정조 1년(177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산이며 상성의 아들이다. 자는 경이, 호는 과욕재이다. 영조 24년(174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전적·장령·헌납을 역임하였고 사간원 대사간, 감사관, 첨지중추부사, 우승지에 이르렀다.

 

김화종(金和鍾) :

영조 17년(174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산이며 처항의 아들이다. 정조 11년(1787) 춘당대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언을 지냈다.

 

김처암(金處岩) :

영조 31년(175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산이며 자는 중려로 양직의 아들이다. 조부는 상성, 증조부는 석보, 외조부는 신의립이다. 정조 1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지평과 집의를 지냈다.

 

김수종(金秀鍾) :

영조 50년(177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산이며 자는 성민으로 처순의 아들이다. 조부는 양원, 증조부는 상익, 외조부는 곽시제이다. 정조 24년(1800)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지평에 이르렀다. 

 

김위(金瑋)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산이며 교감 맹강의 아들이다, 조부는 김개, 증조부는 김정경, 외조부는 강희안이며 연산군7년(1501) 식년시 병과로 급제하여 승의랑(承議郞), 장흥고령(長興庫令), 정랑(正郞)을 지냈다.   

 

김석보(金錫保) :

현종 5년(1664)~영조 17년(1741)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안산이며 자는 여극으로 성대의 아들이다. 숙종 19년(1693)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훈련원판관·오위장을 역임하였고, 전라우수사·경상좌병사·제주목사에 이르렀다.

 

나각순(서울시사편찬위원회 집필위원)

 

등 급

등 위

이 름

생 년

본관-성씨

甲科

1위

김필(金珌)

 

안산(安山) - 김(金)

甲科

2위

김처암(金處巖)

1755 을해

안산(安山) - 김(金)

乙科

2위

김화종(金和鍾)

1741 신유

안산(安山) - 김(金)

乙科

7위

김항(金沆)

1646 병술

안산(安山) - 김(金)

丙科

15위

김수종(金秀鍾)

1774 갑오

안산(安山) - 김(金)

丙科

15위

김취의(金就義)

1548 무신

안산(安山) - 김(金)

丙科

16위

김옹(金雍)

1540 경자

안산(安山) - 김(金)

丙科

16위

김위(金瑋)

 

안산(安山) - 김(金)

丙科

19위

김맹강(金孟鋼)

 

안산(安山) - 김(金)

丙科

23위

김곤(金琨)

 

안산(安山) - 김(金)

丙科

3위

김양심(金養心)

1725 을사

안동(安東) - 김(金)


  **** 김양심 선조가 안동김씨로 엠파스에 등재 (수정요청)****

김필(金珌) : 문과(文科) 중종14년(1519)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취의(金就義, 1548 戊申生) : 문과(文科) 선조18년(1585) 식년시 병과(丙科)

김수종(金秀鍾, 1774 甲午生) : 문과(文科) 정조24년(1800) 별시 병과(丙科)

김위(金瑋, ) : 문과(文科) 연산군7년(1501) 식년시 병과(丙科)

김옹(金雍, 1540 庚子生) : 문과(文科) 선조9년(1576) 식년시 병과(丙科)

김맹강(金孟鋼, 1540 庚子生) : 문과(文科) 성종14년(1483) 춘당대시 병과(丙科)

김화종(金和鍾, 1741 辛酉生) : 문과(文科) 정조11년(1787) 정시 을과(乙科)

김처암(金處巖, 1755 乙亥生) : 문과(文科) 정조19년(1795) 식년시 갑과(甲科)

김곤(金琨, 1755 乙亥生) : 문과(文科) 연산군2년(1496) 식년시 병과(丙科)

김항(金沆, 1646 丙戌生) : 문과(文科) 숙종5년(1679) 식년시 을과(乙科)

김양심(金養心, 1725     )  : 문과(文科)  정조24년(1748) 정시 병과(丙科)

  등 모두 68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문과 11명, 무과 18명, 사마시 35명, 역과 3명, 음양과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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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김(安山金)

성   명(姓 名)

자 (字)

호 (號)

 세

김개(金漑)

선택(宣澤)

 

 

김곤(金琨)

월석(越石)

 

 

김광원(金光遠)

     

김광호(金光灝)

     

김덕제(金德제)

     

김만령(金만령)

영년(영년)

   

김맹강(金孟鋼)

극유(克柔)

 

 

김면(金沔)

차융(次融)

   

김명국(金明國)

천여(天汝)

연담(蓮潭)

 

김몽룡(金몽룡)

운서(운서)

   

김상채(金尙彩)

경숙(敬叔)

창암(蒼巖)

 

김수종(金秀鍾)

 

 

 

김수해(金秀海)

     

김옹(金雍)

사화(士和)

 

 

김위(金瑋)

 

 

 

김윤(金鈗)

극보(克輔)

   

김재욱(金在郁)

 

백은(白隱)

 

김정경(金定卿)

 

 

 

김정오(金定五)

여일(汝一)

노포(老圃)

 

김종삼(金宗三)

 

 

 

김처암(金處巖)

중려(仲礪)

 

 

김취의(金就義)

의중(宜仲)

 

 

김필(金珌)

자수(子修)

모기재(慕箕齋)

 

김한(金澣)

     

김항(金沆)

태초(太初)

 

 

김홍륙(金鴻陸)

우칙(羽則)

   

김화종(金和鍾)

 

 

 

김회(金晦)

일장(日章)

   

김희(金曦)

명원(明遠)

   

원성태후(元成太后)

 

 

 

원평왕후(元平王后)

 

 

 

원혜태후(元惠太后)

 

 

 

 

 

안산김씨의 연원

http://blog.paran.com/rootsfind/25196962 

 

집성촌

분 포 지 명

세대수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연곡리

72

110

경기도 포천군 일동면 길명리

21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 장산리

18

 

강원도 평강군 유진면 적전리

32

70

강원도 평강군 고삽면 북평리

26

충북 옥천군 청산면 일원

17

 

충남 아산군 탕정면 동산리

20

 

전남 강진군 도암면 덕년리

 

90

경남 합천군 묘산면 광산리

 

40

평북 의주군 고령삭면 서고동, 수진면 일원

 

130

평북 용천군 양광면 용덕동 일원

 

110


 

 돈이 없어도 할수 있는것

              호소를 하였답니다. "저는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는
              일이 없으니 이 무슨 이유입니까?" "그것은 네가 남에게 베풀지 않았기
              때문이니라 "저는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빈 털털이입니다.
              남에게 줄 것이 있어야 주지 뭘 준단
              말입니까?" "그렇지 않느니라. 아무리 재산이 없더라도 줄 수 있는
              일곱 가지는 누구나 다 있는 것이다."
         
        
          
            첫째는 화안시(和顔施) 
          얼굴에 화색을 띠고 부드럽고 
          정다운 얼굴로 남을 대하는 것이요 
            둘째는 언시(言施) 
          말로써 얼마든지 베풀 수 있으니 
          사랑의 말, 칭찬의 말, 위로의 말, 
          격려의 말, 양보의 말, 
          부드러운 말 등이다. 
          
           
          
            
              셋째는 심시(心施) 
            마음의 문을 열고 
            따뜻한 마음을 주는 것이다. 
              넷째는 안시(眼施) 
            호의를 담은 눈으로 사람을 
            보는 것처럼 눈으로 베푸는 것이요. 
            
             
            
              
                다섯째는 신시(身施) 
              몸으로 때우는 것으로 남의 짐을 
              들어준다거나 일을 돕는 것이요. 
                여섯째는 좌시(座施) 
              때와 장소에 맞게 자리를 내주어 
              양보하는 것이고, 
              
               
              
                
                  일곱째는 찰시(察施) 
                굳이 묻지 않고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알아서 도와주는 것이다. 
                네가 이 일곱 가지를 행하여 
                "습관이 붙으면 너에게 행운이 따르리라." 
                라고 하셨답니다.
                불가에서 말하는 보시가 
                이토록 아름답고도 좋을줄이야~ 
                저도 몰랐습니다~  
                성경에서든~ 
                불경에서든~ 
                금언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 님들도 가진게 없다고
                불평 마시고 베풀고 보살피며
                한세상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김은부 가계도.x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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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산김씨 계보연구 2-2권.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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