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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김씨 세계

안산김씨 소개 책자

by 연송 김환수 2008. 4. 20.

성씨의 고향, 한국성씨보감, 한국족보대전,

한국인의 족보에 기록된 안산김씨 소개내용 발췌

 

 

 

 

 

  

 안산김씨 김처곤 영조 29년(1775년) 무과급제 선전관, 의금부 도사, 장원서 별제, 보성군수, 첨지중추부 역임

 

 

 

 

 

 

 

 

 

 

 

 

 

 

 

 

 

 

 

 

 

 

 

 

 

 

 

 

 

 

 

 

 

안산김씨 연원에 대하여 비교적 정리가 잘된 아래 사이트 자료를 갖고 왔습니다.
http://san114.tistory.com/1744 

안산 김씨(安山金氏)의 연원

 

안산(安山)은 경기도 시흥군(始興郡) 수암면(秀岩面)의 옛 지명으로, 고구려(高句麗) 때는 장구현(獐口縣)

이었다가 고려 초에 안산(安山)으로 개칭되었으며, 191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시흥에 병합되었다.

시조(始祖) 김긍필(金肯弼)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의 후손으로

(혹은 신라 태종 무열왕의 후손이라고도 함)으로 고려 현종 15년(1024년) 상서좌복야 상주국 안산현

개국후(尙書左僕射上柱國安山縣開國候)에 추봉되고 식읍(食邑) 1500호(戶)를 하사받아, 후손들이

안산(安山)에 정주(定住)하면서 관향(貫鄕)을 안산(安山)으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 1975년 고려 문종 때

사람인 경덕국사(景德國師)의 묘지석(墓誌石)이 발견되면서 기존에 알던 김긍필(金肯弼)이 김긍필(金兢弼)로

 바뀌었다고 한다.

계파(系派)로는 의천파(義川派)ㆍ강진파(康津派)ㆍ황해도맹감파(黃海道孟鑑派)ㆍ합천파(陜川派)ㆍ

안산파(安山派)ㆍ한산파(韓山派)ㆍ황해도맹균파(黃海道孟鈞派)ㆍ포천파(抱川派)ㆍ천안파(天安派)ㆍ

괴산파(槐山派)ㆍ청산파(靑山派)ㆍ장단파(長湍派)로 나뉘어졌다.


 ▲ 영조 52년(1776년) 발간된 ‘안산김씨족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김은부(金殷傅) 이후 상계를 정확히 상고할 수 없어 충익공(忠翊公) 위(渭)가 일세조로 표시된 족보.

시조(始祖) 김긍필(金肯弼)의 아들 은부(殷傅ㆍ?∼1017)는 수주(水州) 안산현(安山縣)에서 출생하였으며,

성종 때 견관승(甄官丞), 목종 때 어주사(御廚使)를 거쳐 현종 초에 공주절도사(公州節度使)가 되었다.

공주절도사(公州節度使)에 재임시인 현종 2년(1011년) 거란(契丹)의 침입으로 왕이 공주(公州)로 피난왔을 때

 지성으로 시종하였고, 왕이 나주까지 피난갔다가 다시 공주(公州)에 돌아오자 장녀로 하여금 어의(御衣)를

지어 바치게 하여 왕비가 되니 그가 바로 원성왕후(元成王后)이다.

뒤에 다시 두 딸을 왕비로 바치니 원혜왕후(元惠王后)와 원평왕후(元平王后)이다. 그해 형부시랑(刑部侍郞)

으로 거란 왕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거란에 다녀왔으며, 지중추사(知中樞事)ㆍ호부상서(戶部尙書)에

승진하고 중추사상호군(中樞使爽護軍)이 되었다. 죽은 뒤 국구(國舅)로서 추충수절창국공신 개부의동삼사

수사공 상주국 안산군개국후(推忠守節昌國功臣開府儀同三司守司空上柱國安山郡開國侯)에 추증되었다.


 ▲ 은부(殷傅) 이후 실전되었던 상계가 자세히 기록된 안산 김씨 족보.

그러나 은부(殷傅) 이후 세계가 실전되어 상계를 정확히 상고할 수 없어 고려에서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낙랑군(樂浪君) 개국백(開國伯)에 봉해져 충익공(忠翊公)에 오른 위(渭)를 일세조로 삼고 안산(安山)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안산김씨대종사(安山金氏大宗史ㆍ1973년刊)’를 보면

시조 김긍필(金肯弼)로부터 14세손에 이르기까지 소목(昭穆)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안산김씨대종사(安山金氏大宗史)’에 의하면, 은부(殷傅)는 인천 이씨(仁川李氏)의 시조인 이허겸(李許謙)의

딸을 배위(配位)로 맞아 두 명의 아들을 두었다. 맏아들 충찬(忠贊ㆍ?∼1036)은 현종 16년(1025년) 전중시어사

(殿中侍御史)가 되고, 덕종 2년(1033년) 예빈경지중추원사(禮賓卿知中樞院事)를 거쳐서 이듬해 우산기상시

(右散騎常侍)가 되었다. 정종 1년(1035년)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옮겼다가 이듬해 지중추원사 병부상서로

죽었으며, 거란에 대하여는 화호책(和好策)을 썼다. 시호는 공정(恭靖).


 ▲ 김은부(金殷傅)의 작은 아들로 왕사가 된 경덕국사(景德國師)의 묘지석.


은부(殷傅)의 작은 아들 난원(爛圓)은 화엄종(華嚴宗) 승려로서 문종 12년(1058년)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여

왕사가 되었고, 도승통(都僧統)을 역임하였다. 문종 19년(1065년) 문종의 아들인 후(煦ㆍ대각국사 의천)를 중이

되게 하였고 화엄교관(華嚴敎觀)을 가르쳤다. 구룡산(九龍山) 복흥사(福興寺) 주지를 지내다 죽은 후에

복흥사에 비를 세우고 시호로 경덕(景德)을 내리고 국사(國師)로 추존하였다. 그의 묘지(墓誌)가 국립중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3세 충찬(忠贊)의 손자인 경용(景庸ㆍ1041~1125)은 아버지는 병부상서 원황(元晃)으로, 합문지후(閤門祗候)

를 거쳐 광주판관(廣州判官)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어사중승(御史中丞)을 거쳐 숙종 3년(1098년)

좌우유덕(左右諭德)ㆍ상서이부시랑 지어사대사(尙書吏部侍郎知御史臺事), 1101년 병부상서 동지추밀원사

(兵部尙書同知樞密院事), 1103년 지추밀원사, 1105년 판상서공부사(判尙書工部事)가 되고, 예종이 즉위하자

태자태사 수사공(太子太師守司空)ㆍ좌복야 참지정사(左僕射參知政事)ㆍ서경유수사(西京留守使)가 되었다.

1109년 평장사(平章事)로서 최홍사(崔弘嗣) 등과 함께 윤관(尹瓘)ㆍ오연총(吳延寵) 등의 여진정벌에 패한

책임을 들어 극론하고, 구성(九城) 환부를 강력히 주장하여 이를 실현하게 했다. 1110년 문하시랑 평장사

판형부사(門下侍郎平章事判刑部事), 1112년 문하시중으로 협모위사공신(協謀衛社功臣)의 호가 더해지고

이듬해에 수태부 판상서이부사(守太傅判尙書吏部事)로서 낙랑백(樂浪伯)에 봉해졌다. 여러 차례 벼슬길에서

물러나려 하므로 왕이 특별히 좌부승선(左副承宣) 안당영(安唐潁)을 보내 궤장(几杖)을 하사하고 얼마 후

허락했다. 예종 17년(1122년)에는 광국동덕익성공신(匡國同德翊聖功臣)에 낙랑공(樂浪公)이 되었으며,

예종으로부터 당시 최고의 국로(國老) 대접을 받았다. 

 
▲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김은부(金殷傅)ㆍ김경용(金景庸)ㆍ김인규(金仁揆).

경용(景庸)의 아들 인규(仁揆ㆍ?~1142)는 과거에 급제하여 예종 12년(1117년) 급사중 추밀원좌승선 겸 태자

좌찬선(給事中樞密院左承宣兼太子左贊善)이 되었고, 1122년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가 되었다.

이해에 지주사(知奏事)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진사 나경순(羅景純) 등 31인의 급제자를 선발하였다.

인종 1년(1123년) 동지추밀원사, 1124년 검교사공 이부상서 지문하성사(檢校司空吏部尙書知門下省事),

1125년 참지정사가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이자겸(李資謙)이 패하자 이자겸의 아들 언(彦)이 사위였기

때문에 연좌되어 지춘주사(知春州事)로 좌천되었다. 그뒤 복직되어 1135년에 호부상서로서 예부낭중

왕창윤(王昌胤)과 금나라에 가서 희종(熙宗)의 등극을 축하하였고, 뒤에 수사공 좌복야 참지정사(守司空

左僕射參知政事)를 지냈다. 성품이 너그러우며 인물이 출중하여 송(宋)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고려도경

(高麗圖經)’에서 그를 칭찬하였다.

인규(仁揆)의 아들 지우(之祐ㆍ1108~1151)는 자는 기복(基福)으로 관후(寬厚)한 성품이었으며, 어려서부터

문학을 좋아했다. 음서(蔭敍)로서 양온령동정(良醞令同正)이 되었으며, 그뒤 대악서승(大樂署丞)ㆍ예빈주부

(禮賓注簿)ㆍ선경부사인(善慶府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1148년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안서도호부판관(安西都護府判官)으로 지방으로 나가 일을 잘 처리하였다. 청렴하고 강직하다는 칭송을

들었다.


 ▲ (上)경기도 하남시 감북동에 자리한 위정공(威靖公) 김정경(金正卿)의 묘. (下)위정공(威靖公)을 제향하는

충북 괴산군 장연면 광진리 위정사(威靖祠ㆍ충북문화재자료 제12호).

충익공(忠翊功) 위(渭)는 고려조에서 정난공신(靖難功臣)에 올랐으며, 그의 증손(曾孫) 정경(正卿ㆍ1345~1419)

은 진주목사(晋州牧使) 성경(星慶)의 아들이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 일찍이 고려 때에 벼슬하였으나,

새 왕조 창업에 찬성하고 이성계(李成桂)를 지지하였다. 조선 개국 후 삼군절도사(三軍節度使)를 거쳐

이조전서(吏曹典書)를 지냈는데, 인사관리를 잘하였다. 태조 5년(1396년)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가 되어

전라도와 충청도 각지의 성을 수축하고 군비를 점검하는 한편 병선(兵船)의 허실을 조사하였다.

정종 2년(1400년) 방간(芳幹)의 난이 일어나자 한성부윤(漢城府尹)으로서 방원(芳遠)에 협력하여 이를 진압,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책록되고, 연성군(蓮城君)에 봉해졌다. 이에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안산(安山)으로

하였다.

태종 6년(1406년) 공안부윤(恭安府尹)이 되었는데, 병을 핑계로 명나라의 사행(使行)을 회피하여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태종 8년(1408년) 좌군 도총제(左軍都摠制)가 되고, 1409년에는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역임하고,

1410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삼군 절도사(三軍節度使)를 거쳐 이조전서(吏曹典書)가 되었다.

용맹하고 매사에 적극적이었으나, 재물을 좋아하여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시호는 위정(威靖).


 ▲ (左)위정공(威靖公) 김정경(金正卿)의 셋째 부인으로 경기도 광주군 서부면 감북리에 자리한 화혜택주

(和惠宅主) 개성 왕씨의 묘. (右)위정공과 합장된 부인 평산 신씨와 교하 노씨의 묘비.

정경(正卿)은 아들 다섯 명이 모두 관직에 올랐는데, 그중 장남 지(沚)와 삼남 척(滌)은 별장(別將)을 지냈고,

차남 관(灌)은 상호군(上護軍ㆍ정3품 무관직)을 지냈으며, 넷째 개(漑)는 세종 4년(1422년) 음보(蔭補)로

벼슬에 등용되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올랐고, 막내 한(澣)은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를 역임하여

가문을 크게 중흥시켰다.


 ▲ 위정공(威靖公) 김정경(金正卿)의 넷째 아들 평호공(平胡公) 김개(金漑)의 이름이 음각된

흥천사(興天寺) 종.


 ▲ 위정공(威靖公) 김정경(金正卿)의 막내아들로 괴산파(槐山派) 파조인 안성위(安城尉) 김한(金澣)의 묘.


그외 승문원 교감(承文院校勘)을 지낸 맹강(孟綱)의 아들 필(珌)은 당대의 성리학자 김식(金湜)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중종 14년(1519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적(典籍)이 되었으나,

김식(金湜)이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유배될 때 전송하여 처벌을 받은 후 정신이상을 가장하고

공사(公事)에서 물러났다.


 ▲ 충남 아산군 배방면 휴대리에 자리한 승문원 교감(承文院校勘) 김맹강(金孟綱)의 묘.


 ▲ 김맹강(金孟綱)의 아들 전적(典籍) 김필(金珌)의 묘.

정조 19년(1795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처암(處巖)은 진사(進士) 양직(養直)의 아들로 태어나

여러 벼슬을 거쳐 지평(持平)으로 추관(推官)되어 죄인을 엄징하지 않은 죄로 순천(順天)에 유배(流配)

되었다가 풀려나와 순조(純祖) 때 집의(執義)를 지냈다.

명국(明國ㆍ1600∼?)은 일명 명국(鳴國)ㆍ명국(命國)으로 자는 천여(天汝), 호는 연담(蓮潭)ㆍ

취옹(醉翁)이며, 1636년과 1643년 두 차례에 걸쳐 통신사의 수행 화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명성을 크게

떨쳤다. 1647년 창경궁 중수공사 때 화원 6명과 화승 66명을 데리고 책임 화원으로 일했으며,

1651년에는 한시각(韓時覺) 등과 함께 현종명성후 가례도감 의궤반차도(顯宗明聖后嘉禮都監儀軌班次圖)

제작에 참여하였다.

성격이 호방하고 해학에 능했으며 그의 집 앞에는 그의 그림을 얻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

기도했다고 전해지는데, 술을 좋아하여 몹시 취해야만 그림을 그리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화가 중 가장 거칠고 분방한 필법을 구사했던 인물로 유명하며, 사후에 ‘신필(神筆)’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대표작으로 ‘설중귀려도(雪中歸驢圖)’, ‘기려인물도(騎驢人物圖)’, ‘달마도(達磨圖)’ 등이

있다. 

 
▲ 연담(蓮潭) 김명국(金明國)의 달마도(達磨圖)와 설중귀려도(雪中歸驢圖).


그밖의 인물로는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지낸 휘(暉)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취길(就吉),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취의(就義) 등이 유명했고, 성옥(聲玉)은 대사간(大司諫ㆍ정3품)을 역임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형(炯), 공조참의(工曹參議) 상빈(尙彬)과 함께 가문의 전통을 이었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경념(敬念)이 옥성(玉城)ㆍ흥명(興明)ㆍ선화(善化) 등 여러 학교를 설립하여 젊은

청년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3·1운동에 참가한 후 독립신보(獨立新報)를 발간하고 해방후에는 반탁(反託)

운동에 참가했으며, ‘대한독립사(大韓獨立史)’를 편찬하는 등 훌륭한 업적을 남겨 가문을 더욱 빛냈다.

 

서 적 명

한글판 우리집의 족보 나의 조상은 누구인가 김씨

(언양 선산 울산 영광 서흥 함창 도강 광주 개성 안산 고령 수원 영산 고성 용궁)

 

 

저 자 : 뿌리찾기운동본부, 출판사 : 민중서원, 출판년도 : 1998 초판

 

 

  

신라김씨의 분관 과 상계 미상의 성씨.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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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김씨 상위계보.x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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