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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김 뿌리찾기/뿌리찾기

경덕국사 난원 (고려 문종조 안산김씨)

by 연송 김환수 2008. 3. 30.

 영통사 :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 스님이 출가해 천태종을 개창한

                 천년고찰의 사찰로서 불교계의 성지임

 

경덕국사 난원 : 고려 목종 2년(999) ~ 문종 20년(1066)

 

고려 시대의 왕사(王師). 본관은 안산(安山). 속성은 김(金), 속명은 난원(爛圓). 안산현(安山縣;현 안산시 장상동) 출신으로 아버지는 호부상서 김은부(殷傅), 형은 병부상서 충찬, 할아버지는 안산김씨 시조 상서좌복야 긍필이고 문종의 외숙부이며, 대각국사 의천의 스승이다.  

 

 

문종 12년(1058)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여 왕사가 되었고, 도승통(都僧統)을 역임하였다. 문종 19년 5월 문종의 아들인 후(煦;의천, 대각국사)를 스님이 되게 하였고 화엄교관(華嚴敎觀)을 가르쳤다.

 

구룡산(九龍山) 복흥사(福興寺) 주지를 지냈다. 죽은 후에 복흥사에 비를 세우고 시호로 경덕(景德)을 내리고 국사(國師)로 추존하였다. 그의 묘지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九龍山福興寺故 王師都僧統」贈諡景德國師墓誌幷序」

國師諱爛圓俗姓金氏其先安山」郡人也故尙書左僕射諱兢弼祖」
也故檢校太師上柱國諡安平公」諱殷傅父也故安孝國大夫人李」
氏妣也故中樞使兵部尙書忠賛」兄也故首座弘睡師也 師自削」
周羅脫身于豪戚間遭遇累朝歷」揚緇秩纔及順耳陟爲 王師智」
慧花果自然成就賛謂人中之師」子矣烏乎以咸雍二年丙午冬十」
月八日示化報年六十八僧夏五」十七▨▨震悼咸▨迦文定入涅」
槃卽以其月 詔護葬事權之于」五龍山南崗更取▨子冬十月竪」
碑塔▨九龍山福興寺軋隅尋奉」靈骸移安于玆地順也門弟等弗」
杇是圖乃爲墓誌」
  九龍山兮山之秀」  景德師兮師之尊」
  彼佛刹兮旣證果」  此靈本兮且安魂」
[출전 :『韓國金石全文』中世上篇 (1984)]
 

 

 

 

복흥사 경덕국사묘지명 (福興寺景德國師墓誌銘)

 

구룡산 복흥사(九龍山 福興寺)의 돌아가신 왕사 도승통(王師 都僧統)이며 시호 경덕국사(景德國師)의 묘지명 및 서문


국사의 이름은 난원(爛圓)이고, 속성은 김씨(金氏)이며, 선조는 안산군(安山郡) 사람이다.


돌아가신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긍필(兢弼)이 조부이고, 돌아가신 검교태사 상주국(檢校太師 上柱國)으로 시호가 안평공(安平公)인 은부(殷傅)가 아버지이며,돌아가신 안효국대부인 이씨(安孝國大夫人 李氏)가 어머니이다.


돌아가신 중추사 병부상서(中樞使 兵部尙書)인 충찬(忠贊)이 형이고, 돌아가신 수좌(首座) 홍주(弘疇)가 은사이다.


국사는 머리를 깎고 호척(豪戚) 사이에서 몸을 빼어낸 이후 여러 대에 걸쳐 계속 승계(僧階)를 높여나갔다. 예순에 이르러 왕사(王師)가 되었으니, 지혜의 꽃과 과실이 스스로 무르익어 사람 중의 스승이라는 찬상을 받았다.


아, 함옹(咸雍) 2년 병오년(문종 20, 1066) 10월 8일에 돌아가시니, 나이는 68세이고, 승랍은 57세이다. 매우 슬퍼하여, 모두 “석가모니가 열반에 드신 것과 같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곧 그 달에 조칙을 내려 장례일을 돌보게 하여 오룡산(五龍山) 남쪽 언덕에 임시로 모셔두었다가, 다시 임자년(壬子年? : 문종 26, 1072 ) 10월에 비와 탑을 구룡산 복흥사(九龍山 福興寺)의 서북쪽 모퉁이[乾隅]에 세우고, 영해(靈骸)를 받들어 이 곳으로 이장하여 모셔두었으니, 순리에 따른 것이다.


문하의 제자들이 위업이 영원하기를 바라며, 이에 묘지(墓誌)를 짓는다.

구룡산(九龍山), 산 중에 빼어나고 경덕국사(景德國師), 스승 중에 으뜸이시다. 저 사찰에서 이미 성불(成佛)의 진리를 깨우쳤으니

이 영혼의 터전에서 또 평안히 하리라.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  

 

 

* 영통사 및 대각국사 의천의 자세한 내용은 붙임자료를 참조하세요

 

복흥사 경덕국사묘지명.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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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흥사(福興寺,復興寺)

 

경기도 개풍군(현 개성시) 영북면 월고리 원통동(圓通洞)에 있었던 절.

복흥사(復興寺)라고도 한다. 창건연대 및 창건자는 미상이나 고려 초기에 창건

하였다.

 

경기도 개성시 영북면 월고리 원통동 (국사봉)

 

  

이 절에는 승려를 출가시키기 위해 나라에서 마련한 계단(戒壇)인 관단(官壇)이 있어서 원융국사(圓融國師)·혜덕왕사(慧德王師) 등을 배출한 유명한 사찰이다.

 

자세한 역사는 전하지 않으며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 이후에 폐허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폐사지에는 법당터의 주춧돌과 삼층석탑, 2기의 석재, 부도(浮屠), 귀부(龜趺) 등이 있다.

 

이 절은 신라말 고려초에 개성 부근에 세워진 절 중에서 유일하게 쌍탑가람(雙塔伽藍)의 형식을 보이고 있는 매우 희귀한 유지(遺址)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오학린(吳學麟)과 변계량(卞季良)의 시가 전하고 있는데, 이를 통하여 조선 초기에는 법당과 수각(水閣)이 있었고 매우 한적한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新增東國輿地勝覽

≪참고문헌≫ 松都의 古蹟(高裕燮, 悅話堂,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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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원융국사

 

유형문화재 제127호

고려시대

높이 186cm, 폭 96cm

소재지 :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54번지

지정일자 : 1979. 1. 25

 

  

고려 문종 8년(1054)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예부시랑 고총이 찬하고 유림랑 임호가 전과 서를 했다. 이수와 귀부를 갖추었지만 파손이 심한 편이고 비신도 파손, 마멸이 심해 판독이 안되는 부분이 많다. 글자는 구양순체의 해서로 『해동금석원』등의 문헌에 그 내용이 전한다.

 

이수는 좌우가 긴 팔작지붕형이며, 처마 끝선으로는 전각이 있고, 용마루까지 표현되어 있다. 귀부는 뒷면은 조각이 남았으나 앞쪽은 파손이 심한 편이다. 육각형의 귀갑문은 안에 王자를 넣어 정교한 표면처리를 하였다. 원융국사(964∼1053)는 고려초의 명승으로 자는 혜일, 속성은 김씨이다. 12세에 용흥사에서 승려가 되어 복흥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고려 성종 10년(991)에 승과에 급제하여 대덕이 되었다.

 

현종 초에 승통에 오르고 정종 7년(1041)에 왕사, 문종 때 국사가 되었다. 묘지사의 주지를 지내고 부석사에서 법사가 되었다. 문종 7년(1053)에 부석사에서 입적하자 왕이 시호를 원융국사라 하고 절 동쪽 언덕에 장사지냈다. 비가 있는 원융국사비각에는 해동화엄종조의상국사비가 함께 봉안되어 있는데 비신은 새로 조성한 것이고 비갓과 비좌는 원융국사비가 발견된 곳에 함께 있었다 한다. 비갓은 우진각형으로 정상중앙에 연화문을 돌린 보주가 있고 처마끝에는 귀꽃장식이 잘 남았다. 비좌는 둥근 중판연화문대를 돌린 원형좌로 연화문은 반원이 연속된 간단한 형식이다.

 

 

諡圓融國師碑銘(篆題)」

 

      ▨▨大夫尙書禮部侍郎知 制誥賜紫金魚袋臣高聽奉  ▨▨」

      儒林郎尙書都官郎中賜緋銀魚袋臣林顥奉  ▨▨」

歲在甲午璿柄指卯月臣使松漠迴▨▨▨▨▨▨▨▨▨▨國紫水書曰故圓融 國師世界津梁人天

  眼目今逝矣  無縫存盍圖于黃絹期於琬琰寫」

▨▨▨▨▨▨▨▨▨▨ 厥芳蕤若爲其文奏來臣趨  織珠簾前拜石葉爐下表讓云  聖朝筆推

振綺詞足潤金者不甚寡其掞好辭乞歸大手降  批」

尾勅曰命若無它李翺問道早近藥山之  鶴形孫綽餐風久親  支遁之鷹室以熟 師之爲人以是

故也不煩來章臣手舞謝己檢門人所授實錄」

國師應化之殊跡甚詳矣臣但摭紀大略而已夫毛羣之衆也必瑞其麟羽族之多也必聖其鳳若麟之出騈

頭萃於野藪鳳之降累翼盈于園梧則羊駒鷽鷃麟」

鳳矣烏謂其瑞且聖也所以異於毛羽者應於仁覽於德希代一來故也  國師當螺髻之慈隱犛蘇之敎

醨千百歲後閒生而持法使覺華萎而更榮」

海涸而重濬於幅員之曠圓首之叢爲瑞爲聖其不謂人之麟鳳乎 師諱决凝字慧日俗姓金氏其先溟州

人也大王父諱英吉善報所鍾華豪冠代鑄金璧」

繚垣時號甓金公猶漢時萬石君也王父諱善熙位升章保器璉宏洪名榮彰灼考諱光律歷金穀卿起忠開

直以磨 厥君興事樹功以澤當世以師于」

歲使常安城不返溟州負海邦也人多感孕其水桃蟠木曲龍浮萊精粹之華英靈之氣也不然何代生瑰偉

傑絶之人妣房氏江陵郡夫人內議令康明息女也」

織訓子提壺考家所止恒奉 歡喜世界主像手執炷檀心甘如薺洎娩 師之期私第啓道場有寓乾聖寺

漢僧來預講席瞥乘睡虵見着衲擎錫者」

此家誕産將臨何不開門其僧驚悟還寺是日寅初 國師生焉卽大宋乾德二年甲子七月二十日甲午也

年十二就龍興寺天兄之弟萼首座 廣宏」

佛殿之草于以鉏稻睦之衣于以染首座魂栩之際吹螺打鉢迎羅國决言禮謁畢諦視乃 吾師也遂象國

師而名之開寶八年於福興寺官壇受具」

國師綺年捨俗經誥硏精鑒勜於幽微恢遊於盤結一聞千解靑厚氷凉靈源湛而眹絶方流 我則暗記其

玉覺域迢而路多岐亂 我則靡亡其羊年二十」

八赴選 佛場捷獲選經大德授我大師 穆宗也授我首座聖考也授我僧統 靖宗也於 列聖蔚爲敬

田咸被珍遇 聖考顧 闕東妙」

智寺囂世非邈俗埃不飛黛嶂錦雲四望新晴展恠晝幽禽爽籟數聲靜夜彈商絃實軒皇訪道之勝槩也故

詔 師住之重熈十載 靖宗欲封爲」

王師遣中樞知奏事兵部侍郎王寵之先之 宣諭 上裁誥以三迁師執山而疊讓 宸請彌護不獲已而

就之其年六月幸城南 聖祖留眞之」

大精舍曰奉恩行摳衣之禮玆日雨絲繼灑霑服爲憂 國師以 聖上及卑素等勞於淹延於▨▨象堂把

鵲尾禱云若弟子將來奉 龍枝之靈會受」

炤臂之記摩卽今日見晴衆馥煙以纔飄群飛水以聿止得展盛禮矣 今上分身 珂齒嗣位璧庭 千萬

壽年協繡龜之算 泰平天子應文石之祥」

運洽熙寧 懇崇衆妙何况 救世菩薩 當來解脫相遇之秋故 命稷君以講蕝降德牧以嗛書 幸于

鴦宮拜爲 國師如知積奉」

智勝如來藥王覲 雷音正覺其 累朝優待如此 國師始言時引聖善之衣往外祖令公宅號暉不已母

夫人從志而行其所居火災發識者以爲」

佛長者以羊鹿權車引諸子出火宅相隣也又童齓之年夢遊龜山寺中路有人曰汝之懷中有二鑑子一者

日一者月也  師聞而開胷異光忽出遍炤山野」

師之字慧日蓋誌其祥也自崇善寺赴講內庭經由負兒山西德刹院院僧告 師云昨夜 慈氏佛云明日

吾友見過汝宜奉待今日憩此者唯 師耳」

師必三悉地人也到京輦寄宿昵親冬官侍郞姜彦第侍郞午夜立中庭聞 師諷經嚠嗟喨侍郞就房而聽

卽 師睡鼻聲也却到前處聞亦經韻如故」

師之窹寐常在華嚴三昵之所感也癸未歲靖宗迎 師於 文德殿祈甘講雜花憑彎几而五雲塡空掉綺

紋而一雨潤此槩擧爾縷不盡也」

國師虬睛紺閃象步安詳壞秀之儀蓮鎭翠峩於霽甸穆淸之韻仙竽靜皷於天風一切有爲皆是幻泡

  國師於幻泡中得眞如地一切有想皆是顚倒」

國師于顚倒中獲常樂城對者如近球序瓊林凛乎毛骨見者如味連山十翼洗然心神其或藻翰暫摛發河

陽之春樹珠囊兼究幹瓜末天津晚歲於桑梓之鄕」

造置一寺瑤構森靑冥諸金仄 寶容滿桂魄跏大葩中 上賜額曰華嚴安國寺十載謂門人曰泉石可以

濯昏蒙松蘿可以遺身世吾以此始亦以」

此終遂乞還舊山上以爲白雲非釘纜而留瑄玉豈隍池之畜乃 從其請尋以 嚀鸞動輅出餞以黯魂齊

斗積珍賮歸而寵賂命內史舍人任從」

一左街僧正得生衛送至山 國師賓 黃屋而瞻赫赫罷眞龍之遊出紅塵而摩蒼蒼爲逸鵠之擧屆浮石

寺媲 本師釋伽以靈鷲山爲七寶凈土常安」

住也是寺也義相師遊方西華傳炷智儼後還而所創也 像殿內唯造阿彌陁佛 像無補處亦不立影塔

弟子問之相師曰師智儼云一乘 阿彌陁無」

入涅槃以十方淨土爲體無生滅相故華嚴經入法界品云或見 阿彌陁觀世音菩薩灌頂授記者充諸法

界補處補闕也」

佛不涅槃無有闕時故補處不立影塔此一乘深旨也儼師以此傳相師相師傳法嗣曁于 國師 國師故

始末住此寺焉林公名嶽旣寢紫霞搖心周子草堂休嗟明月」

經五白癸巳告門徒曰形氣蛻歸於變嬗逍遙鄕在於無何吾必不得久淹世閒以前印寫大藏經一部藝藏

于安國寺遣門人綱幹者設一」

畢其夕不起卽四月十七日也是日二靑龍升天一從柴浦驛一從寺南門徒雨涕以聞 釦墀 皇上訣

 佩日▨▨▨▨▨▨▨▨▨▨▨▨」

賷 璽書贈諡曰 圓融賻贈異常兼 遣副僧錄惠英等監護葬事以五月四日窆于浮石寺東崗禮也于

時山林爲」

門掩扇嗚戱 薝蔔香滅法界以腥 菩提樹摧吾人何蔭 師報年九十僧臘七十八門人有首座曰廣證

三重大」

觀證海秀蘭作賢元昶大師曰觀玉看成海元聯胤等一千四百三十八人或得 師之髓或得 師之▨

皆」

强學吐璣蜚鳥行空叵量於涯際抃鼇冠石但速於輕欺謹爲銘曰」

走有一角 飛有九包 毳侶之萃 圓融其豪 覺珠以還 我守法海 魔陣皆北 我揚忍鎧 南列

▨▨ ▨▨▨▨ ▨▨▨▨ ▨▨▨▨▨」

南車于童蒙 一佛于季象 緊▨▨▨牀列兩朝函其丈 夢迎變國統 睡聲振潮音 啼母出▨▨

 ▨▨▨▨▨▨ ▨▨▨▨▨▨ ▨▨▨▨▨▨  翠䂥刋兮不朽」

▨▨室守碑院重大師洪首賢緊大師代宗」

 

〔출전:『韓國金石全文』中世上(1984)〕

 

 

시 원융국사 비명(諡圓融國師碑銘)(篆題)

 

▨▨대부(▨▨大夫) 상서(尙書) 예부(禮部)시랑(侍郞) 지제고(知制誥)이며 자금어대(紫金魚袋)

를 하사받은 신(臣) 고청(高聽)이 왕명(王命)을 받들어 짓고,

 

유림랑(儒林郞) 상서(尙書) 도관낭중(都官郞中)이고 비금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은 신(臣)

임호(林顥)는 왕명(王命)에 의하여 비문을 쓰다.

 

태세(太歲)가 갑오(甲午)에 있는 해, 선병(璿柄)이 묘(卯)를 가리키는 달에,신(臣)이 송막(松

漠)에 사신으로 갔다가 廻(결락)國, 자수(紫水)로 서(書)하여 가로되, 고 원융국사(故圓融國

師)는 세계의 진량(津梁)이며 인천(人天)의 안목(眼目)이셨는데 지금 서거(逝去)하였다. 무봉

탑(無縫塔)에 뚜껑을 얹고, 황견유부(黃絹幼婦)인 명문(名文)을 지어 완염(琬琰)에 새기고자

하였다. 사(寫) (결락) 그 방유(芳蕤)한 비문을 짓도록 하라 하였다. 그리하여 신(臣)이 구슬

로 엮은 발 앞에 나아가 석엽(石葉)로하(爐下)에서 절하고 사양하여 고하기를, “성조(聖朝)

께서는 문장이 비단결 같고 동원하는 문사(文詞)도 풍부하여 마치 윤금(潤金)과 같이 절묘한

문장력(文章力)을 따를 사람이 없사오니, 바라옵건대 폐하(陛下)께서 친(親)히 절묘호사(絶妙

好辭)인 뛰어난 비문(碑文)을 지으시고, 신(臣)에게 내리신 명(命)을 거두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임호(林顥)가 주청(奏請)한 표문(表文) 말미(末尾)에 비서(批書)하고 칙명(勅命)하기

를,“경(卿)에게 부탁한 것은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고(李翶)가 약산(藥山)에게 도

(道)를 묻고 약산 스님을 학형(鶴形)과 같다고 칭송하였고, 손작(孫綽)은 지둔(支遁) 스님을

친견하고 그의 응실(鷹室)에 흠복(欽伏)하였으니, 스님의 사람됨을 자세히 알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이런 까닭에 신(臣)이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문인(門人)들이 제공(提供)한 행

적(行跡)의 실록을 살펴보니 국사께서 이 세상에 응화(應化)한 특수한 행적이 매우 자세히

적혀 있었다. 신(臣)은 다만 그 중에서 중요한 부분 대략(大略)만 따서 기록했을 뿐이다.

대저 모군(毛群)의 무리들 중에는 반드시 기린이 서수(瑞獸)이고, 많은 우족(羽族)들에는 봉

새가 성조(聖鳥)이다. 만약 기린이 나타나면 두 개의 뿔을 가진 짐승들은 야수(野藪)에로 모

이고, 봉황이 내려오면 여러 개의 날개를 가진 새들은원오(園梧)에 가득하니, 이는 곧 소·말·

산까치·종달새 등이다. 만약 기린과 봉새가 없으면 어찌 그들을 서수(瑞獸)와 성조(聖鳥)라

할 수 있겠는가? 그 까닭인 즉 보통의 모우(毛羽)와 다른 것은 인(仁)에 응(應)하고 덕(德)을

보이니, 오랜만에 한번씩 나타나기 때문이다. 국사의 출세시기(出世時期)는 나계(螺髻)의 자

비가 은몰(隱沒)하고 이소(犛蘇)의 가르침이 해이해진말세(末世)에 해당하는 지라, 국사와

같은 인물(人物)은 백년이나 천년이 지난 후라야 한번씩 드물게 출생(出生)하여 불법(佛法)

을 호지(護持)하며 시든 각화(覺花)를 다시 무성하게 하고, 고갈된 법해(法海)로 하여금 거

듭 폭원(幅員)의 광막(曠邈)에 체웠으니, 원수방족(圓首方足)들의 모임이 상서롭고 또한 성

스러우니 그를 사람 중의 인봉(麟鳳)이라 말하지 않겠는가!

 

스님의 휘는 결응(決凝)이요, 자는 혜일(慧日)이며 속성은 김씨(金氏)니, 그의 선조(先祖)는

명주(溟州) 사람이다. 대왕부(大王父)의 휘는 영길(英吉)이니 선행을 닦은 과보(果報)로 얻은

바이며, 화려한 호족(豪族)이요, 대대(代代)로 의관(衣冠)을 정제(正制)한 양반이었다. 금벽

(金壁)을 주조하여 사방으로 튼튼히 둘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금공(金公)이라 불렀으니 마

치 한(漢)나라 때 석분(石奮) 만석군(萬石君)과 같았다. 왕부(王父)의 휘는 선희(善熙)이니,

관직(官職)은 장보(章保)와 기연(器璉)·굉홍(宏洪) 등을 역임하여 그 명성이 사방(四方)에 떨

 

쳤다. 아버지의 휘는 광률(光律)이니 금곡경(金穀卿)을 역임하였다. 충직하여 항상 직간(直

諫)을 올려 임금으로 하여금 더욱 선정(善政)을 베풀도록 최선을 다하였으며, 새로운 일을

일으켜 공을 세워서 당세(當世)에 큰 혜택을 끼쳤으며, 송(宋)나라에 새해 인사로 보내는 세

사(歲使)를 인솔하고 갔다가 안성(安城)에 상주(常住)하고 돌아오지 아니하였으니, 그곳이

곧 명주(溟州)부해방(負海邦)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감잉(感孕)하되 그 빙도반목(氷桃磻木)과

곡용부래(曲龍浮萊)로 정수(精粹)의 꽃이며 영령(英靈)의 기백이라 하겠다. 만약 그러치 않

으면 어느 시대에 괴위(瑰偉)하고 걸절(傑絶)한 사람이 태어날 수 있겠는가!

 

어머니는 방씨(房氏)이니, 강릉군부인(江陵郡夫人)이며, 내의령(內議令)인 강명(康明)의 딸로

써 시집가기 전에 친정에서 베짜는 법, 예의범절 등 가정교육을 철저히 받았다. 고가(考家)

에 있을 때 훌륭한 아들을 낳기 위해 항상 남방 환희세상(歡喜世界)의 교주(敎主)이신 보승

여래불상(寶勝如來佛像)을 봉안하고 손에는 주단(炷檀)향로를 들었으니 마음은 상쾌하기가

마치 감제(甘薺)와 같았다. 스님을 분만할 때가 거의 다가와서 사택(私宅)에 도량(道場)을

개설하고 스님들을 청하여 경을 강하도록 하였다. 마침 한(漢)나라로부터 고려에 와서 건봉

사(乾聖寺)에 우거(寓居)하고 있던 스님도 강석(講席)에 참석하여 청법하다가 잠깐 조는 동

안 비몽사몽간에 누더기를 입고 육환장을 짚은 스님이 나타나서, “이 집에 장차 산기가 임

박하였는데 어찌 대문을 열어놓지 않았는가.”하므로, 스님이 깜짝 놀라 꿈을 깨어 절에 돌

아가 보니, 이날 인시 초(寅時 初)에 국사께서 탄생하였으니 대송(大宋) 건덕(乾德) 2년 갑

자(甲子) 7월 20일 갑오(甲午)였다. 12살 때 용흥사(龍興寺)에 나아가 천지화상(天只和尙)의

사제 악수좌(萼首座)인 광굉(廣宏)을 은사로 하여 불전(佛殿) 앞에서 무명초(無名草)인 머리

를 깎고, 논둑에서 농사일을 할 때 입었던 속복(俗服)을 먹물로 염색한 승복(僧服)으로 갈아

입고 스님이 되었다. 어느날 수좌(首座)가 혼허(魂栩) 중 꿈에 법라(法螺)를 불고 바라를 치

면서 설라국사(羅國師)인 결언(決言)을 맞이하여 예배하고 난 후 자세히 보니 바로 우리 원

융국사(圓融國師)였다. 드디어 국사를 상징하여 이름을 지었다.

 

개보(開寶) 8년 흥복사(興福寺) 관단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국사께서는 기년(綺年)의

나이에 세속을 떠나 스님이 되어 결고(經誥)를 연마하여 정통하므로써 유오하고 미묘한 뜻

을 감옹력(鑒翁力)하게 해석하며, 까다롭고 난삽(難澁)한 반결(盤結)을 회유하였다. 한가지를

들으면 천 가지를 알아서 푸른 지혜가 마치 두터운 얼음처럼 투철하였다. 영원(靈源)인 본

심(本心)자리는 담적하여 일체 반연의 조짐이 끊어지고서야 바야흐로 나에게로 흘러오면 곧

옥과 같이 맑은 작용을 암기(暗記)하며, 본각(本覺)의 그 자리는 멀고 고요하여 길이 여러

갈래로 나의 앞에 나타났으나 나는 그 양(羊)이 달아난 길을 잃지 아니하였다. 28세 때 승

과(僧科)를 보는 선불장(選佛場)에 나아가 선발되었는데, 대덕(大德)을 거쳐 대사(大師)의 법

계를 내린 분은 목종(穆宗) 임금이시고 수좌(首座)를 가증(加贈)한 이는 성고(聖考)이며 승통

(僧統)으로 추대한 이는 정종(靖宗) 임금이시니, 열성조(列聖朝)의 여러 임금께서 지극한 신

심(信心)으로 존경하였으므로 융숭한 대우(待遇)를 받았다. 성고(聖考)인 덕종(德宗)께서 궁

궐 동쪽에 있는 묘지사(妙智寺)를 국사에게 헌납하였다. 이 절은 시끄러운 세속(世俗)과는

멀지 아니하나 속진(俗塵)이 날아오지 않는 곳이며, 푸른 산 봉우리는 비단과 같은 고운 구

름으로 덮혀 있다. 사방을 바라보면 마치 오랜 장마가 개인 것과 같이 맑고 깨끗하여 아름

다운 새모양 등 괴이(恠異)한 그림을 펼쳐놓은 듯하였다. 산과 계곡에서 들려오는 온갖 소

리는 마치 고요한 밤에 튕기는 현악(絃樂)과 같으니, 실로 헌황씨(軒皇氏)가 광성자(廣成子)

에게 도(道)를 물었던 공동산(崆峒山)과 같은 승경(勝景)이었다. 그러므로 왕은 특별히 청하

여 스님을 이 절에 주석하도록 하였다.

 

중희(重熙) 십재(十載)에 정종(靖宗) 임금이 왕사(王師)로 책봉하고자 중추지주사(中樞知奏

事) 병부시랑(兵部侍郞)인 왕총지(王寵之)를 중사(中使)의 자격으로 임금이 재가한 고(誥)를

가지고 세 번이나 갔으나, 국사께서는 겸산(兼山)처럼 굳은 의지로 거듭 사양하였는데, 왕의

청이 더욱 확고하였으므로 부득이 취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해 6월에 개성(開城) 남쪽에

행차(幸次)하여 현종(顯宗)의 아버지인 안종(安宗)의 영정을 대정사(大精舍)에 봉안하였으니,

그 절이 바로 봉은사(奉恩寺)이다. 구의(摳衣)의 예를 행하였는데, 이 날 가랑비가 계속 내

려 옷을 적셨다. 우중(雨中)에 오는 국사를 근심하여 성상과 몇 조소(皁素) 등이 멀리까지

나가서 오랫동안 기다리다가 (결락) 상당(象堂)으로 맞이하고 작미로(鵲尾爐)를 들고 기도하

면서 발원하되, 저의 제자들이 앞으로 미륵부처님의 용화회상(龍華會上)을 만나 마치 약왕

보살이 일월정명덕(日月淨明德) 부처님 앞에서 소신연비(燒身燃臂)하고 마정수기(摩頂授記)

를 받음과 같이 되기를 빌었다. 오늘 청정한 대중을 보니 향기로운 연기는 멀리 퍼지고, 여

러 날 짐승과 수중(水中)의 어족(魚族)들까지도 마치 잠을 자듯 움직이지 않고 조용하였다.

 

지금의 임금님께서는 그 신분(身分)이 가치(珂齒)로써 벽정(璧庭)으로 말미암아 왕위에 올랐

으니 거북의 수명과 같이 성수만세(聖壽萬歲)하기를 빌었으며, 태평태자(泰平天子)가 문석

(文石)의 상서로움에 응합(應合)되어 국운이 번창하고 편안함을 이룩하였다. 더욱이 임금께

서 불교의 무상심심(無上甚深)한 묘법(妙法)을 깊이 숭상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구세보살(救

世普薩)과 당래(當來)에 해탈하실 미륵부처님과 만나는 때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직군(稷

君)에 명하여 법도(法度)를 강설케 하므로써 덕을 베풀었으며, 또한 왕이 겸허한 자세로 목

민(牧民)하였다. 임금께서 앙궁(鴦宮)에 행행(行幸)하여 절을 올리고 국사(國師)로 모셨으니,

마치 지적(知積)이 대통지승여래(大通智勝如來)를 받들고 약왕보살이 뇌음정각(雷音正覺)을

친견한 것과 같았다. 누조(累朝)에 걸쳐 여러 임금이 국사를 우대함이 대개 이와 같았다. 국

사께서 어려서 아직 말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고 겨우 형언(形言)하는 2, 3살 때, 성선(聖

善)의 옷자락을 잡아 당기면서 외조부(外祖父)의 집으로 가자고 울음을 그치지 아니하였다.

어머니가 하는 수 없이 아이의 뜻을 따라 문밖으로 나오자마자 그 가택(家宅)에 화재가 발

생하여 전소(全燒)되고 말았다. 이를 본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호(加護)라고 하였으니, 법화

경(法華經) 비유품(譬喩品)에 장자(長者)가 양록(羊鹿)인 권거(權車)로써 유혹하여 화염에 싸

인 자녀(子女)들을 화택(火宅)으로부터 구출한 것과 같은 예라고 하겠다.

 

 

또 동츤(童齓)의 어린 나이 어느 날 밤 꿈에 귀산사(龜山寺)로 가는 중로(中路)에 어떤 사람

이 말하기를, “너의 품 속에 두개의 거울이 있는데 하나는 해이고 다른 하나는 달이다.”라

고 했다. 국사가 이 말을 듣고 가슴을 헤치니 이상한 광명(光明)이 홀연히 흘러나와서 주변

산야(山野)를 비추었다. 국사의 자(字)가 혜일(慧日)인 것은 대개 그 상서(祥瑞)를 기록한 것

이다. 어느 날 숭복사(崇善寺)로부터 궁중에서 경을 강설하기 위해 내정(內庭)으로 가다가

부아산(負兒山) 서쪽에 있는 덕찰원(德刹院)에 들렀더니 그곳의 어떤 스님이 국사에게 고하

기를, “어제 밤 꿈에 자씨불(慈氏佛)이 이르시기를, ‘내일 나의 벗이 이곳을 지나갈 터이니,

너는 마땅히 지극한 마음으로 봉대(奉待)하라’고 하였는데, 오늘 여기에 투숙하는 이가 오직

스님뿐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스님은 필연코 미륵 삼실(三悉)의 경지와

같은 셈이다. 경연(京輦)에 이르러 일친(昵親)인 동관(冬官) 시랑(侍郞)과 강언제(姜彦第) 시

랑(侍郞)은 한밤중에 서서 국사의 독경하는 소리가 유양(瀏喨)하여 매우 우아함을 들었다.

시랑(侍郞)이 가까이 가서 들어보니, 곧 스님이 코를 고는 소리였다. 다시 전에 듣던 곳으로

돌아가 들었으나 역시 독경하는 소리와 같았다. 이에 미루어 본다면 국사는 자나깨나 항상

화엄삼매(華嚴三昧)중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계미세(癸未歲)에 정종(靖宗) 임금께서 국사를 문덕전(文德殿)으로 영접하여 단비가 내리도

록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면서 잡화경(雜花經)을 강설하였는데, 경(經)을 설하려고 책을 펴

자마자 오색 구름이 허공을 덮었고 기문(綺紋)이 하늘로 뻗치면서 소나기가 쏟아지기도 하

였다. 이상의 몇가지는 대충 열거한 것이고, 이와 같은 일이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다 열거

할 수 없다. 국사의 눈동자는 마치 용의 검푸른 눈동자와 같았고, 눈의 정기(精氣)는 번개불

과 같이 빛났으며, 걸음은 상섭(象步)와 같이 안상(安詳)하였다. 거룩하고 괴수(壞秀)한 모습

은 마치 연꽃이 푸른 산을 맑게 개인 들판을 진압하는 것과 같았고, 온후하고 청화(淸和)한

음성은 마치 선우(仙竽)가 고요히 천풍(天風)을 두들기는 것과 다르지 아니하였다.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은 하나도 환포(幻泡)와 같지 않음이 없다. 그러나 국사께서는 이러한 환포

(幻泡) 중에서 진여(眞如)의 경지를 터득하였다. 따라서 일체의 유상(有想)도 모두가 전도(顚

倒)이다. 그렇지만 국사는 이 전도된 중에서상락아정(常樂我淨)의 열반성(涅槃城)에 도달해

있었다.

 

스님을 대하는 사람은 누구나 친근감을 느끼며, 법문을 듣기 위해 모여든 대중이 마치 아름

다운 구슬이 즐비하게 늘어서듯, 또한 보배 구슬이 주렁주렁 매달린 숲과 같은 진풍경이었

으니, 보는 이들로 하여금 모골(毛骨)이 송연할 정도로 엄숙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사를 친

견하는 사람은 누구나 도미(道味)와 취미(趣味)를 느껴서 연산(連山)한 십익(十翼)들이 모두

마음의 티끌을 말끔히 씻었다. 그 중에는 조한(藻翰)을 잡으면 하양(河陽)의 춘수(春樹)와

같은 문장(文章)이 나타나며, 중신(重臣)인 주낭(珠囊)들과 겸하여 조말(爪末)의 천진으로 돌

아왔다. 말년(末年)에 상재(桑梓)나무가 심어져 있는 고향에 절을 짓고, 옥돌로 얽은 것과

같은 푸른 삼림(森林)으로 둘러싸인 법당(法堂)벽에는 불·보살(佛·菩薩)을 그렸으며, 만월(滿

月)과 같이 거룩하신 불상이 연꽃으로 조각된 좌대 위에 엄연(儼然)하게 앉아 계셨다. 임금

께서 절 이름을 화엄안국사(華嚴安國寺)라고 하였다.

 

중희(重熙) 10년에 문인(門人)들에게 이르기를, “절 주변의 천석(泉石)은 가히 혼몽(昏蒙)한

번뇌를 씻을 만하고 칡넝쿨에 얽인 송나(松蘿)는 몸과 세상을 던져 버릴만한 곳이니, 나는

여기에서 시작하고 또한 여기에서 종신(終身)하리라.”하시고, 구산(舊山)인 부석사(浮石寺)로

돌아가게 허락을 빌었다. 임금께서 생각하기를, “백운(白雲)을 못으로 고정시키고 노끈으로

얽어매어 한 곳에 머물게 할 수 없거니와, 어찌 큰덩어리의 보배 구슬을 황지(隍池)에 방치

할 수 있으랴!” 하고 스님의 간청을 받아들인 후 홰란(噦鸞) 타고 멀리까지 나가서 석별의

아쉬움을 참으면서 전송하였다. 아울러 함(函)에 가득 채운 진신(珍賮)과 융성한 총뢰(寵賂)를

드리고, 내사사인(內史舍人) 임종일(任從一)과 좌가승정(左街僧正) 득생(得生)에게 명하여

호송하여 구산(舊山)까지 무사히 돌아가게 하였다. 국사는 왕의 황옥거(黃屋車) 뒤에 두고

혁혁(赫赫)히 떠나면서 진룡(眞龍)이 활동하던 것을 모두 그치고, 홍진(紅塵)을 나와 창창(蒼

蒼)히 늙은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면서, 마치 일곡(逸鵠)의 쾌거(快擧)와 같이 소요자재한 마

음으로 부석사에 이르렀다. 화엄정토(華嚴淨土)의 사상을 주창하여 본사(本師)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아미타불(阿彌陀佛)에 비대(媲對)하였으니 영취상(靈鷲山)으로써 칠보정토(七寶淨

土)를 삼아 항상 안주(安住)하시는 보신불(報身佛)로 여겼다.

 

이 절은 의상조사께서 중국인 서화(西華)에 유학하여 화엄(華嚴)의 법주(法炷)를 지엄(智儼)

으로부터 전해 받고 귀국하여 창건한 사찰이다. 본당(本堂)인 무량수전(無量壽殿)에는 오직

아미타불의 불상만 봉안하고 좌우보처(左右補處)도 없으며 또한 전전(殿前)에 영탑(影塔)도

없다. 제자가 그 이유를 물으니 의상(義相)스님이 대답하기를, “법사(法師)이신 지엄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일승(一乘)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열반에 들지 아니하고 시방정토(十方淨土)

로써 체(體)를 삼아 생멸상(生滅相)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

品)에 이르기를, ‘아미타부처님과 관세음보살로부터 관정(灌頂)과 수기(授記)를 받은 이가 법

계(法界)에 충만하여 그들이 모두 보처(補處)와 보궐(補闕)이 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열

반에 들지 않으신 까닭에 궐시(闕時)가 없으므로 좌우보처상을 모시지 않았으며 영탑(影塔)

을 세우지 아니한 것은 화엄(華嚴) 일승(一乘)의 깊은 종지(宗旨)를 나타낸 것이다.’라고 하

였다. 지엄 스님은 이 화엄 종취(華嚴 宗趣)를 의상에게 전해 주었다. 의상이 전수를 받은

후 원융국사에까지 전승(傳乘)되었다. 그러므로 국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절에 주석(住錫)

하게 되었던 것이다.

 

임공(林公)의 이름은 악(嶽)이니, 이미 자하(紫霞)를 역임하고, 마음은 주자(朱子)의 사상을

따랐고 가난한 초당(草堂)에 살면서도 안빈낙도(安貧樂道) 하였다. 국사는 명월(明月)이 이

미 오백(五白)을 지난 것과 같이 이미 연로(年老)하였다. 계사년(癸巳年)에 문도들에게 이르

기를, “형기(形氣)는 마침내 뱀이 허물을 벗듯 변선(變嬗)으로 돌아가는 것, 소요향(逍遙鄕)

인 열반처가 어느 곳에도 없다. 나도 반드시 앞으로 더 이상 세상에 오래 머물 수 없을 터

이니, 이미 이전에 인사(印寫)한 대장경 일부(一部)를 정중한 봉안의식을 거쳐 안국사(安國

寺)에 진장(鎭藏)토록 하라.”하고, 문인 강간(綱幹)을 보내어 “화엄법회를 한 번 개설(開設)

토록 하라.”는 유언을 남기고는 그 날 저녁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으니, 곧 4월 17일이었다.

이 날 두 마리의 청룡(靑龍)이 하늘로 올라갔는데, 한 마리는 시포역(柴浦驛)에서 다른 한

마리는 부석사 남쪽 계간(溪澗)으로부터 올라갔다. 문도들이 비가 오듯 눈물을 흘리면서 구

지(釦墀)에 부음(訃音)을 전달하였다. 황상(皇上)께서 결(訣) 패일(佩日) (결락) 옥새(玉璽)를

찍은 왕의 조서(詔書)를 가지고 시호를 원융(圓融)이라 올리고 특이한 물건들을 보내어 부의

(賻儀)하고 겸하여 부승록(副僧錄) 혜영(惠英) 등을 보내서 장례를 감호(監護)하도록 하였으

니, 5월 4일에 부석사 동쪽 산등에 장사를 지냈다. 국사께서 살아 있을 때는 산림(山林)으

로 문을 삼아사부대중(四部大衆)이 운집하였으나 열반하신 후에는 그 적막함이 마치 대문을

닫은 것과 같았다.

 

오호라! 담복화(薝蔔花)의 향기는 사라지고 온 법계(法界)에 비린내가 진동하며 보리수 나무

는 부러졌으니 우리들은 앞으로 누구의 음덕(蔭德)을 받을 것인가? 스님의 세수는 90세요,

승랍은 78세였다. 문인 중에 수좌(首座)위(位)에 있는 스님은 광증(廣證)이요, 삼중대사(三重

大師)는 구관(口觀)·증해(證海)·수난(秀蘭)·작현(作賢)·원창(元昶) 등이며 대사(大師)는 관옥

(觀玉)·간성(看成)·해원(海元)·연윤(聯胤) 등 1,438인이니, 그 중에 혹자는 국사의 골수(骨髓)

를 얻었고 혹자는 스님의 골(骨)을 이어받아 모두 강학(强學)이며 금언옥조(金言玉調)와 같

은 문장(文章)을 토출(吐出)하였다. 새가 하늘을 날으나 어찌 그 허공의 끝을 헤아릴 수 있

으랴! 양쪽 앞발로 땅을 치면서 기어가는 귀부(龜趺)와 용(龍)머리모양의 관석(冠石)이 내가

지은 이 비문에 대하여 보잘것 없는 작품이라고 여길 것이다. 삼가 명을 읊어 이르기를,

 

네발가진 짐승 중엔 일각(一角)이 제일(第一)

날아다니는 새들에겐 구포(九包)가 으뜸.

일의일발(一衣一鉢) 납자(衲子)들의 모임중에는

부석사(浮石寺)의 원융국사(圓融國師) 제일(第一)이시다.

유학하여 깨달은 후 귀국하셔서

해동불교(海東佛敎) 굳게 지켜 홍포(弘布)하시니

마군들은 손을 들고 항복하였고

우리 스님 인개(忍鎧)로써 천양(闡揚)했도다.

(결락)

(결락)

(결락)

(결락)

어리석은 중생들을 인도하시니

말세중(末世中)에 한 부처님 출세(出世)하셨네.

列 (결락) 牀

양조대(兩朝代)에 주청(奏請)하여 귀사(歸寺)하시다.

몽중(夢中)에서 수기(授記)받아 국사(國師)가 됐고

코곤소리 독경처럼 들리었으며

말못하는 어린시절 화재를 피해

(결락)

(결락)

(결락)

영원토록 썩지않게 돌에 새기다.

▨▨실 수비원(▨▨室 守碑院)에 중대사(重大師)인 홍수(洪首)·현긴(賢緊), 대사(大師)인 대종

(代宗).

 

〔출전:『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2】(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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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 혜덕왕사 진응탑비(金山寺 慧德王師眞應塔碑)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39]


 

고려 중기 법상종의 대표적인 고승인 혜덕왕사(慧德王師) 소현(韶顯 : 1038, 정종 4~1097, 숙종 2)의 생애를 기린 비로 보물 제 24호이다.

 

전면

후면

혜덕은 고려 중기의 승려로서, 정종 4년(1038)에 태어나 11세에 불교의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그 이듬해에 승려가 되었다. 1079년 금산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숙종이 불법(佛法)에 귀의하여 그를 법주(法主)로 삼자 왕에게 불교의 교리에 대한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59세에 입적하였으며, 왕은 그를 국사로 대우하여 시호를 ‘혜덕’, 탑이름을 ‘진응’이라 내리었다.비는 혜덕왕사가 돌아간 이듬해인 1111년(숙종 3)에 세웠다

현재 비의 머릿돌은 없어졌으며, 비문은 심하게 닳아 읽기가 매우 힘든 상태이다. 비의 받침돌에는 머리가 작고 몸통이 크게 표현된 거북을 조각하였고, 비문이 새겨진 몸돌은 받침돌에 비해 커보이는 듯하며, 주위에 덩굴무늬를 새겨 장식하였다.

 

 

 

 

비문은 고려 중기의 문신으로 문하시랑을 지낸 이오(李䫨, 1050~1110)가 지었고, 해서로 비문을 쓴 사람은 『대동금석서』에는 채유탄(蔡有誕)이라 하였으나 『해동금석원』과 『조선금석총람』등에서는 정모(鄭□), 『한국금석전문』에는 정황선(鄭晃先)이라 하고있다.(당대의 명필 정윤(鄭允) 설) 비 전면 끝에 이효전(李孝全)이라는 이름이 있어 새긴 이로 추정된다.

비문 글씨는 구양순의 글씨보다 더욱 활달하여 명쾌한 맛이 있다. 신라나 조선에 비하여 고려시대의 글씨가 훨씬 뛰어남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전체적으로 비신은 크며, 두부가 작은 귀부(龜趺)는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비신높이 2.77m, 너비 1.49m이다.

비문의 내용은 대표적인 문벌가문인 인주이씨(仁州李氏) 이자연(李子淵)의 아들로서 가계와 탄생 그리고 출가와 수행을 서술하고, 금산사에 광교원(廣敎院)을 설치하여 유식 전적을 간행한 사실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입적 후 재를 지낸 경비를 조정에서 지원한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음기에는 왕사의 문도를 열거하였는데 스승인 지광국사비와 같이 수교계업자(受敎繼業者)와 수직가계자(隨職加階者)와 모덕귀화자(慕德歸化者)와 사지전후몰세자(師之前後沒世者)의 네 부류로 구분하여 각각의 부류마다 승통, 수좌, 삼중대사, 중대사, 대사로 나누어 인명을 열거한 자가 110여 인이고 언급된 인명은 1천 8백 인에 이른다. 고려의 승려·문도를 성격에 따라 구분한 좋은 예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소현(韶顯) (1038-1096)

 

고려 전기의 스님, 유식학(唯識學)에 밝던 이. 이름은 이민(李民). 휘는 소현, 자는 범위

중서령(中書令) 이자연(李子淵)의 아들로 1038년(정종 4) 7월 3일 태어났다. 11세가 되던 해인 1048년(문종 2)에 해안사(海安寺)지광(智光) 해린(海麟)을 은사로 모시고 <금광명경>과 <성유식론>을 배웠다. 이듬해 복흥사(福興寺) 관단(官壇)에서 구족계를 받고, 1054년(문종 8) 해린이 현화사(玄化寺)의 주지가 되었다.

 

1061년(문종 15) 왕륜사(王輪寺)의 대선장(大選場)에서 승과에 합격하여 대덕이 되고, 또 중대사(重大師),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다. 문종은 그의 명성을 듣고 연덕궁(延德宮)에 불러 다섯째 왕자 정(靖; 승통 導生)을 그에게 출가시켜 사사케 했다. 1079년 김제 금산사에서 수좌(首座)가 되고, 1084년 다시 승통에 올라 왕명으로 현화사의 주지가 되었다. 그는 또 중외(中外) 법상계(法相系)의 여러 사찰에 정재(淨財)를 주어 매년 두 차례 법회를 개설하게 하고, 석가여래 및 현장(玄장), 규기(窺基)와 해동 육조상(六祖像)을 그려 그 사찰에 봉안했다.

 

금산사 남쪽에 광교원(廣敎院)을 세우고, 또 그 원의 중앙 금당에 노사나상 및 현장, 규기 두 분의 상을 그려 봉안케 하기도 했다. 1096년(숙종 1) 12월 18일 현화사의 봉천원(奉天院)에서 미륵 여래의 명호를 염송하면서 나이 59세, 법랍 48년으로 입적했다. 왕사로 추봉하고 시호를 혜덕(慧德)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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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독문>

 

贈諡慧德王師眞應之塔碑銘(題額)」


高麗國全州大瑜伽業金山寺普利了眞精進饒益融慧廣祐護世能化中觀 贈諡慧德 王師眞應之塔

碑銘幷序」

      三重大匡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守太保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

      章事判尙書禮部翰林院事文德殿太僕射脩國史上柱國▨▨▨▨」

      學士▨▨▨ ▨▨」

      登仕郎尙書都官郎中賜緋魚袋(臣)鄭晃先 奉 敎撰」

(臣)聞釋氏出世立敎也爲化群機故其說有權實漸頓之殊半滿偏圓之別繇是五天高士諸夏名堕空緇

堕空堕有者寔繁宗性宗相者甚衆惟性與相泯合爲一而已▨▨道妙理者今贈諡慧德王師」

師諱韶顯字範圍俗姓李氏其先慶源郡人也曾高以降積累彌深乃子乃孫列鉉司而挺秀爲姊爲妹公

掛壺以聯芳王父諱翰光祿大夫同知樞密院事贈太子太傳尙書左僕射▨▨▨」

公孝以克家忠以許 國契先朝之際會叅顯列以仟翔衆協六符鶚立乎鈞衡之秩慶綿十葉翼飛乎閥閱

之聲功與世而莫京裕垂昆而不絶者焉顯考諱子淵守太史門下侍中贈中書侍郎文

和公以文章擢 御簾高第有籌略爲 聖域聞人力賛萬機首居四輔豈止伊尹作殷家右相天下取以保

安孔光拜漢室上公海內畏其威振而已哉外祖諱▨▨▨▨侍郎平章事候▨▨」

▨王室名(臣)守誠節以不踰歷夷險而一致出則秉旄杖鉞四方無擊析之入則論道經邦 萬乘有垂

蒙之暇其世家遠系信牒備文故略焉母金氏累贈鷄林國太夫人性禀柔嘉長成▨▨▨」

四德蔚爲公族之嬪繼念三歸求得法王之子果蒙應也乃有娠焉以太平紀曆十有七年歲在戊寅七月哉

生明誕師于 闕南佛嶺之私第師生而特異髫齔▨▨▨▨▨▨▨額廣眉長▨▨▨▨▨」

勁其骨黔其膚若應眞之相也年甫十一就海安寺麟公所落髮麟公卽故法泉寺國師諡智光諱海麟也先

是公應詔入內夜方一鼓夢見瑞鳥似鳳而紫▨▨▨紫▨▨▨▨玩深恐失之▨▨▨」

和公擕師而至請爲弟子麟公見師貌雄傑而衣紫謂曰昨夢瑞鳥之兆豈誣也哉初學金光明經唯識論夙

殖聞薫日新懸鮮故麟公意甚愛之迺云賢哲之才俟時▨▨▨▨桃李應韶▨▨陽▨」

發顯故以韶顯爲名焉明年受於福興寺官壇超世之戒珠自潔匪假磨礱生塵之心鏡本淸豈勞拂拭于

時麟公移住玄化寺師甞高棲絳帳親受金言則何異仲尼▨▨▨▨▨回善光▨▨▨▨▨▨」

哉淸寧七年赴王輪寺大選塲一捷爲大德咸雍五年加重大師洎乎六年夏五月文宗金輪啓統玉扆凝休

廣斯文而旣致化成向彼佛而兼修喜捨 聆師之才▨▨▨蔭眷六年」

延德宮第六 王子投師門而出家卽今俗離山法住寺住持導生僧統是也是年十月十四日 上幸師之

所隷玄化寺齋佛僧以慶之仍 賜磨衲袈裟蔭眷七年初住海安寺加授三重大」

師太康五年秋 上命有司於 內殿大張法席 請師充說主者爲大宋回使利涉大洋故也仍加普利二

字爾後累加一十六字爲法號者皆所以旌其德行也是年 詔住全州金山寺九年又」

加首座是歲 文宗昇遐 順宗嗣位未幾而王崩卽 宣宗承纂之元年也 上以端拱無爲坐見中興者

豈非師福利之功耶下枇署爲僧統其時 師年四十七也始師爲首座求▨▨」

僧統位由德進不其偉歟矧 國初已來凡爲法王者非有年德罕能居此職而師以壯年見 擢緇素榮之

又其年 王命師移住玄化寺仍於開國慈雲兩寺選塲有再爲都▨▨▨▨▨又赴內賜法」

會洎大藏道塲主張講席幷蒙 賜法服者其數非一師降眞戚里作主空門其儀也燦然可觀其志也確乎

不拔凡所爲事有異於人甞在燕居少選閒手無釋卷每於講會一▨次之不▨」

物以思恭或誨人而忘倦故得趍廊廡者盡是崐琮藍璧盡是殊珍持瓶盂者孔羽翠毛無非佳瑞大寂之學

徒累百僧俗智顓學之聽衆盈千豈可同日而語哉大安初師以手校唯識開發意四衆▨▨▨▨▨▨」

初失其本積有年矣旣得之尊尙者衆矣師曾於金山寺選勝于寺之南走六十許步地創設一院額號廣敎

仍筆刻雕經板置于院院之中別造金堂一所幷繪畵盧舍那及奬基二師像其」

堂自太康九年至師之末年搜訪慈恩所撰法華玄賛惟識述記等章䟽三十二部共計三百五十三卷考正

其本募工開板私紙墨印布流通以廣法施也謹案大宋高僧傳云奬▨存惟」

識開創之祖基迺守文述作之宗奘苟無基則何祖張其學乎是知凡將入於性相義門者捨慈悲之學則罔

臻其極矣頃自唐 文皇以新羅 王表請 宣送瑜伽論一百卷於是無應理圓實之學」

漸盛于玆土曁乎曉法師導之于前賢大統踵之於後燈燈傳世世嗣興然而去聖寥遠遺文訛舛者多矣

師甞疾于懷以其祖門章䟽大行於世使學者知本宗之有坦途惟師之力也可謂扶」

曉賢方軌齊鶩焉可勝道哉其光揚本敎也如此復於傳法之外雅好仁義之術博 覽經史至于詩篇筆札

靡不精究爲人歎詠者徃徃有焉故於首座告身云內檀師明訓領徒弟於蘭菊」

結詩社於江山其才兼外學也又如此師以爲欲資感果於未來莫若植因於現在上生懇願遠則追無着之

蹤內院脩行近則慕基公之躅迺評題逐月畵成慈氏尊像每歲取七月十四日開法筵」

集徒侶禮懺敀依及明設齋施䞋以罷席自太康元年乙卯至壽昌二年丙子   首尾凡二十有二稔而

止大康末癸亥宣宗聞其事特 賜諸般彩畵幷 御書一通其書曰▨當來不▨▨▨▨▨▨」

盛會謹隨喜吾師功德其於月日下 國銜稱弟子有以見師心奉法繼年修香火之緣 御手飛文隨喜 

賜丹靑之飾苟非願力甚深▨何▨宸襟信重之如是耶師居玄化寺時▨▨▨▨」

完補爲急務尋狀聞 上可其奏仍置繕理宮大安四年肇其役壽昌二年畢其功締葺宏模雖因舊址莊

嚴勝槩宛若新成師又於中外本宗諸寺施納淨財許設每年兩度法會以爲常式募得虎頭」

名手畵成釋迦如來及奘基二師海東六祖像都一各安于其寺欲令義學者覩像生敬自敬生信自信得

慧日以勸焉壽昌元年乙亥冬十月 聖考肅宗慶襲宗社心歸佛法▨▨▨▨」

召師爲法主講仁王經者祈天 祚業故也洎二年十二月十八日師於寺之奉天院深夜看經次有斯疾旣

以聞卽 遣御毉診視之未回續 差中使押送尙乘鞍馬施納其寺以▨▨▨▨▨▨▨」

內侍少卿池澤厚奉傳 聖旨今欲封師爲 王師師頓首言德簿行庸豈堪 聖奬夜將深嚼楊枝漱訖念

彌勒如來名號洎四弘願戒與門弟等囑累蕩蕩然無憂色中夜更嚼楊枝俄而遷化」

先一日白虹夜見識者以爲師終之䜟也山僮野老無不號咷走獸飛禽互相悽慘遙明以入寂聞 上乃 

震悼遣入 內奉御王嘏 吊慰之翌日命右街僧錄繼通攝司天監知太史局事文」

象等監護葬事二十七日 遣使尙書右僕射陳謂使副尙書左丞右諫議大夫金沅等賷持璽書封爲 王

師諡曰慧德塔號眞應幷 贈紫地繡袈裟洎諸衣對器玩茶香等物▨伸時▨▨▨▨」

未茶毗于寺之西南隅明年丁丑正月旬有一日丙申遷葬于寺之西北隅安其骨遵像法也嗚呼毗尼園內

始則現無生之生跋提河邊終則示不滅之滅其餘終也自初七洎二祥凡十齋所▨▨▨▨▨」

給其在 朝延也猶若是焉况其門人乎哉時有祐世僧統大覺國師實華嚴之宗匠也聞師之卒方盡哀而

致祭其文略云方期沒齒交臂弘眞今也卽亡吾誰與親其他宗之見重也皆是歎道人有華僧▨▨」

大師慧珎度海而來屬于師之講下珎之於師也欣然如舊相識居兩年矣無何先於師三旬而滅其滅也結

跏印手而坐化盖出於尋常焉其爲遠人依慕也又如是類其▨累朝凡所賜▨▨▨」

他等避繁故不書及諸貴臣盛族豪商大賈各盡其所可爲而致敬者無虛日矣俗壽五十九夏臘四十八奧

有門弟上首導生僧統而下凡一千餘人等狀先師行涕淚伏 闕而奏其書曰▨▨」

於珊兜知哀慕勒龜趺於寶界願永傳聞爰 命下臣俾揚遺烈臣表讓云臣本性孤陃加以老衰况無賈勇

於操觚曷副屬辭於寫琰願回▨中旨移授通人仍降 制曰以碑聯▨之▨▨▨▨▨」

之景行勿煩曲讓勉旃眞書旣 阻示於 都兪敢不顓於論譔文非無質然慙作者之求道可强名庶續高

僧之史摭其實而謹述銘云」

能仁出現爲大因緣度衆生界說諸敎詮或云權實或云偏圓起從西域漸被東壖(其一)祖祖闡揚師師提

唱談有談空曰性曰相苟泯二道有何偏尙其誰融通唯我宗匠(其二)萬行▨我生而▨▨▨▨▨」

鷲嶺譽藹 龍塀應 王臣護爲 帝子師聖墻疊仞覺樹添枝(其三)締構梵宮莊嚴佛氏日振法衣講宣

微旨請益如雲攝齋成市道豈遠而行之卽是(其四)欲圓妙果須種善業像像補處▨▨▨▨▨▨」

如水月福也河沙年踰二紀念玆靡它(其五)廣敎起院購書周徧多葉鏤文貫花增線法雨均沾慈風益扇

擬彼曉賢重生辰卞(其六)對賓命筆探景成詩垂露騰彩碧雲騁奇業之所感作▨▨▨▨▨▨」

▨所名滿證爲期(其七)白虹告祥雙林變色奄促化緣復歸淨域 大君澍恩微臣叙德刻以貞珉   

流美萬億(其八)」

校尉(臣) 李孝全   奉詔 撰

 天慶元年歲在辛卯孟夏月

 (陰記)

俗離寺主兼住金山寺僧統導生僧統窺▨僧統同壽首座冠僧釋稱普元右賢」

尙▨▨壽會元誕融三重大師覺彼仁股智圓道月禀宗詏雄洞明義誕重大師」

承覺▨▨▨▨國冲釋目充善▨倫詮善俊明祐承肈相眞鑑尙表忠▨釋宗秀」

賢▨▨甚賢識珠隣尙良辨闡祥思遠利雄善雄證林性▨法▨▨▨甚冀寶明」

德幾乎領融演深宗祐冠倫性端慧端性珉戒元▨妙洪▨承▨鑑同▨方德珎」

▨億景冲禪晤法延曇休靈坦性信▨約宣挺鑑賢德國▨▨▨▨申▨▨▨▨」

▨等一百六十人重大師惠奇志雄等一十四人受敎繼業者也」

兩街都僧錄大師光▨左街僧錄行雄重大師慧宗弘學明眞爲鏡受明▨舒大師」

釋知明胥▨百餘人隨職加階者也」

重大師禀賢夙相報正景生昌融祖忠大師導挺舊日▨宗▨▨▨雄等一千五」

百餘人慕德歸化者也」

僧統勝齡首座崇▨▨常▨▨▨▨三重大師僧統祐祥洪▨順眞道緣釋琳眞」

領證相聦領重大師梁▨▨▨▨▨▨▨▨▨▨▨師之前後沒世者也」

右件門徒開座職名雕錄施行」

承務郎尙書考珣賢員外郎賜緋金魚袋(臣)奉 詔謹書」

 天慶元年歲在辛卯孟夏月  日  立石」


〔출전:『韓國金石全文』中世上(1984)〕 


 

증시(贈諡) 혜덕왕사(慧德王師) 진응지탑비명(眞應之塔碑銘) (題額)


고려국(高麗國) 전주(全州) 대유가업(大瑜伽業) 금산사(金山寺) 보리료진(普利了眞) 정진요익(精進饒益) 융혜광우(融慧廣祐) 호세능화중관(護世能化中觀) 증시(贈諡)

혜덕왕사(慧德王師) 진응지탑비명(眞應之塔碑銘) 병서(幷序)

삼중대광(三重大匡)개부의동(開府儀同)삼사(三司)검교(檢校)태사(太師)수태보(守太保)문하시랑(門下侍郞)동중서문하(同中書門下)평장사(平章事) 판상서예부(判尙書禮部)한림원사(翰林院事)문덕전(文德殿)대학사(大學士) 수국사(修國史)상주국(上柱國) ▨▨▨▨학사(▨▨▨▨學士)인 이오(李䫨)가 조칙(詔勅)에 의하여 비문(碑文)을 지었고,

등사랑(登仕郞)상서도관낭중(尙書都官郎中)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은 신(臣) 정황선(鄭晃先)은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쓰다.


신(臣)이 듣건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여 불교를 창립한 것이 군기(羣機)를 교화하기 위한 것이므로, 그의 설법(說法) 중에는 권실(權實)과 점돈(漸頓)의 다름과 반만(半滿)과 편원(偏圓)의 차별이 있다. 이로 말미암아 오천축국(五天竺國)의 모든 고사(高士)제하(諸夏)이름 높은 스님들이공(空)에 집착하고, 유(有)에 떨어진 이가 매우 많으며, 또한 성종(性宗)에 국집하거나, 상종(相宗)으로 치우치는 자도 적지 아니하다. 그러나 성종과 상종이 민합(泯合)하여 오직 하나뿐인 지극한 도(道)이며, 미묘한 진리인 것이다. (결락) 우리 혜덕왕사(慧德王師)의 휘는 소현(韶顯)이요, 자(字)는 범위(範圍)이며, 속성은 이씨(李氏)요, 그의 선조(先祖)는 경원군(慶源郡) 사람이다. 증조(曾祖)와 고조(高祖) 이후로 선행을 적루(積累)함이 심히 많아서, 자자 손손(子子 孫孫)으로 내려 오면서 현사(鉉司)의 높은 관직에 서열(序列)되어 크게 빼어났으며, 자(姊)가 되고 매(妹)가 된 여식(女息)들은 괘호(掛壺)의 집안으로 시집가서 왕후(王后), 국태부인(國太夫人), 음부인(陰夫人), 숙부인(淑父人) 등 연방(聯芳)에 오르게 되었다. 왕부(王父)의 휘는 한(翰)이니 광록대부(光祿大夫)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증태자태부(贈太子太傅)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공(▨▨▨▨▨▨公)이니, 효도로써 힘을 다하고,충성으로써 생명을 바쳤다.선조의 제회(際會)에 계합하고, 현열(顯列)로써 회상(佪翔)함에 참여하였다. 상징적으로 육부(六符)를 도왔으며, 균형(鈞衡)의 질(秩)에 악립(鶚立)하였고, 가문의 경사(慶事)가 칠대(七代)의 후손에까지 면면히 이어져서벌열(閥閱)의 명성이 온 천하에 퍼졌으며, 공적은 세상에서 비길 데 없고,쌓은 적덕(積德)을 먼 후손에까지 드리워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였다.

현고(顯考)의 휘는 자연(子淵)이니, 수태사(守太師)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증중서시랑(贈中書侍郞)문화공(文和公)이니, 문장으로써 어렴(御簾)고제(高第)에 발탁되었다. 남다른 주략(籌略)이 있어, 독보적인 지모(智謀)로 많은 사람을 힘껏 돕는다는 소문이 자자하며,만기(萬機)를 돕는 사보(四輔) 중에 으뜸이었으니, 어찌 이윤(伊尹)이 은(殷)나라의 우상(右相)이 되어 천하를 태평성세로 이룩한 것에 그칠 뿐이며, 공광(孔光)이 한(漢)나라의 상공(上公)임명되니, 해내(海內)가 어찌 그의 위엄(威嚴)에만 두려워 함이겠는가? 외조부(外祖父)의 휘는 ▨▨ ▨▨시랑(▨▨侍郞) 평장사(平章事) (결락) 왕실의 명신(名臣)이며, 충절(忠節)을 지켜 변하지 아니하고,평탄함과 험난함을 겪어도 마음이 한결 같았다. 밖으로 나간 즉 장군으로서 모(旄)과 장(杖)과 부월(鈇鉞)을 잡아서 사방이 격탁(擊柝)의 근심이 없고, 궐내(闕內)로 들어오면 도(道)로 나라를 다스리는 경륜을 논하며,만승(萬乘)께서 수상(垂裳)할 한가로운 여가가 있었다. 그의 세가(世家)의 먼 계보(系譜)는 신첩(信牒)에 자세히 갖추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어머니는 김씨(金氏)니, 여러 차례에 걸쳐 계림국태부인(鷄林國太夫人)으로 추증(推贈)받았다. 성품은 선천적으로 온유하고 아름다움을 타고 났으며, 장성(長成)해서는 (결락) 부인(婦人)의 사덕(四德)을 갖추어 영광스럽게 공족(公族)의 부인이 되고, 마음은 삼보(三寶)에 귀의하여 법왕(法王)의 제자가 될 아들을 간구하였더니, 과연 부처님의 성응(感應)을 입어 임신하였다.태평기력(太平紀曆) 17년 세재무인(歲在戊寅) 7월 재생명(哉生明)에 궁궐 남쪽 불령(佛嶺)의 사제(私第)에서 탄생하였다. 스님은 날 때부터 특이하였고, 초츤(齠齔) (결락) 이마는 넓으며 눈썹은 길고, 코는 높고 곧으며, (결락) 골격은 건장하고 피부색은 검어서 마치 응진(應眞)의 상(相)과 같았다. 나이 겨우 11살 때 해안사(海安寺)의 해린(海麟)스님을 찾아가서 그를 은사로 하여 낙발득도(落髮得度)하였는데, 해린은 이미 입적(入寂)하신 법천사(法泉寺)의 국사(國師)이니, 시호는 지광(智光)이요, 휘는 해린이다. 이보다 앞서 인공(麟公)이 왕의 부름을 받아 궐내에 들어가서 어느날 밤 삼고(三鼓)의 꿈에 서조(瑞鳥)를 보니, 봉(鳳)과 비슷하나 자색(紫色)이며, (결락) 자(紫) (결락) 완심(玩深) 공실지(恐失之) (결락) 화공(和公)이 스님을 데리고 와서 제자로 삼아 달라고 간청하였는데 인공이 스님의 모습을 보니, 웅걸(雄傑)하고 자색(紫色) 옷을 입고 있었다. 인공이 이르기를, “어제 밤에 서조를 보는 꿈을 꾸었으니, 어찌 이것이 거짓이겠는가”라 하고 받아 들였다. 처음부터 『금광명경(金光明經)』과 유식론(唯識論)을 배웠는데, 숙세(夙世)로부터 많이 문훈(聞薰)하였으므로, 날마다 식견(識見)이 증승(增勝)하였다. 그리하여 인공이 마음으로 깊이 사랑하고 이르기를, “현철(賢哲)의 재질(才質)이 때를 기다려, 그 이름이 나타나는 것이 마치 도리(桃李)나무가 봄 빛을 받아 점점 자라는 것과 같으므로, 소현(韶顯)으로써 법명(法名)을 삼는다”라고 하였다. 다음해인 명년(明年)복흥사(福興寺)의 관단(官壇)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으니, 세간을 초월하는 계주(戒珠)가 스스로 청결(淸潔)하여 마롱(磨礱)을 빌리지 않았다. 출진(出塵)의 마음 거울이 본래로 청정한 것이어늘, 어찌 수고롭게 불식(拂拭)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 무렵 인공이 현화사(玄化寺)로 이주하여 높이강장(絳帳)에 앉아 후학을 지도하고 있었다. 왕사(王師)도 그곳으로 따라가서 금언(金言)을 수학하였으니, 어찌 중니(仲尼)의 문하(門下)에서 수학(受學)하는 안회(顔回)와 다를 것이며, 선광(善光) (결락) 재(哉)아!

청령(淸寧) 7년 왕륜사(王輪寺)의 대선장(大選場)에 나아가, 일첩(一捷)에 대덕법계(大德法階)에 합격하였다.함태(咸泰) 5년에 중대사(重大師)의 법계가 첨가되었고, 6년 5월에 이르러 문종이 금륜왕(金輪王)과 같이 나라를 통어(統御)하고, 옥의(玉扆)으로부터 저절로 상서(祥瑞)가 응집(凝集)하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문풍(文風)이 널리 퍼져 이미 화성(化成)을 이루었고, 저 성불(成佛)의 단계를 향하여 대희대사(大喜大捨)의 6도만행을 겸수하였다. 문종 임금께서 왕사의 뛰어난 법재(法才)를 듣고,흠모하는 마음으로 마납가사(磨衲袈裟)와 음척(蔭脊)을 선사하였다. 또 그 해 연덕궁비(延德宮妃) 이씨(李氏) 소생인 문종의 여섯째 왕자 훈(塤)을 왕사의 문하에 보내어 출가하여 시봉토록 하였으니, 지금의 속리산 법주사(法住寺) 주지인 도생(導生) 승통(僧統)이 바로 그 분이시다. 이 해 10월 14일에는 문종 임금이 왕사가 소속되어 있는 현화사(玄化寺)에 행행(幸行)하여 불승(佛僧)에 공양하며 경축하고는 마납가사와 음척을 하사하였다. 7년 초부터 해안사(海安寺)에 주석(住錫)하였는데, 10년에는 삼중대사(三重大師)의 법계를 가수(加授)하였다. 태강(太康) 5년 가을 문종 임금이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내전(內殿)에서 크게 법석(法席)을 베풀고, 왕사를 초청하여 설법주(說法主)로 모신 것은 대송(大宋)에서 왔다가 돌아가는 사신(使臣) 일행이 무사히 바다를 건너가도록 기원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리하여 보리(普利)라는 이자(二字)의 법칭(法稱)을 첨가하였다. 그 후 십육자(十六字)의 법호(法號)를 누가(累加)한 것은 모두 그의 덕행을 현창한 것이다. 다시 그 해에 전주 금산사로 왕명에 따라 이주하였다. 9년에 이르러 수좌(首座)의 직계(職階)를 더하였는데, 이 해에 문종이 승하(昇遐)하고,순종(順宗)이 즉위하였으나,4개월만에 순종도 승하하고,선종(宣宗)보위(寶位)를 승계한 원년(元年)이다.

임금이 단정히 두 손을 마주잡고 앉아 무위태평(無爲太平)을 이루었으며, 편안히 앉아 중흥(中興)을 이룩한 것이 어찌 왕사가 끼친 복리(福利)의 공(功)이 아니겠는가?비서(批署)를 내려 승통(僧統)으로 추대하였는데, 그 때 왕사의 나이는 47세였다. 비로소 수좌가 되고 (결락) 이어 승통이 되었는데, 지위(地位)란 덕으로 말미암아 진계(進階)되는 것이니 위대하다고 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국초(國初) 이래로 무릇 법왕(法王)이 된 이는연덕(年德)이 있지 않으면 능히 이 직위에 오른 이가 드물었으나, 스님은 장년(壯年)에 이미 치소중(緇素中)에서 발탁되어 영광을 차지하였다.그 해에 왕명으로 스님을 현화사에 이주케 하였고, 개국(開國)자운(慈雲) 양사(兩寺)의 선장(選場)에서 다시 도승통(都僧統)이 되었다. (결락) 또 내사법회(內賜法會)에 나아갔으며, 대장도량(大藏道場)에서 강석(講席)을 주관하고 아울러 법복(法服)을 하사받았으니, 그 수가 한 둘이 아니었다. 왕사께서는 척리(戚里)의 가문에 태어나서공문(空門)을 주관하는 지도자가 되었으니, 그 위의(威儀)가 찬연하여 우뚝해 보이며, 그 의지는 확고하여 누구도 감히 움직일 수 없다.

무릇 하는 바의 일은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특이함이 있었다. 항상 고요한 곳에서 연거(燕居)하되, 잠깐 사이에도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이 없고, 항상 강회(講會)마다 질서가 정연하여 조리(條理)를 잃지 아니하였다. (결락) 물건을 얻기 위해 비굴하지 아니하며, 혹은 후학을 가르치되 피곤함을 잊었다. 낭무(廊廡)에 나아가서 얻은 것이 모두 곤종(崐琮)남벽(藍璧)이니, 다 특수한 보배이다. 왕사를 모시며 병우(甁盂)를 시봉하는 자로는공작(孔雀)의 깃과 푸른 털을 가진 봉황(鳳凰)까지도 가서(佳瑞)로운 시자(侍者) 아닌 것이 없었다.대적(大寂)의 회상에 학도(學徒)가 수백명이며, 지의(智顗)의 문하(門下)에 청중(聽衆)이 천명을 넘었으나, 어찌 동일의 선상에 놓고 같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대안(大安) 초에 스님께서 직접 유식론(唯識論) 등을 교정하여 깊은 뜻을 개발하고, (결락) 사권(四卷)을 지었다. (결락) 그 초본을 유실한지 이미 오래되었다가 다시 얻었으므로 이를 존상(尊尙)하는 이들이 매우 많았다.

스님은 일찍이 금산사의 남쪽 60보쯤 되는 지점에 승지(勝地)를 골라 광교원(廣敎院)을 창설하고, 유식종에 관한 경론(經論)을 각조(刻雕)하여 광교원에 진장(鎭藏)하였다. 그리고 원중(院中)에 일금당(一金堂)을 따로 두어 노사나불(盧舍那佛)과 현장(玄奘)과 규기(窺基) 두 스님의 상(像)을 (결락) 봉안하였다.태강(太康) 9년으로부터 스님의 말년에 이르기까지 자은대사(慈恩大師)가 지은 법화현찬(法華玄贊)유식술기(唯識述記) 등 장소(章䟽)를 찾아서 32부(部) 공계(共計) 353권을 그 본(本)을 고정(考正)하고 각공(刻工)을 모집하여 판각(板刻)하고는 개인적으로 지묵(紙墨)을 갖추어 인경(印經)하여 유통함으로써 널리 법포시(法布施)를 행하였다. 자세히 상고해 보니, 대송고승전(大宋高僧傳)에 현장은 유식론을 개창한 시조이며, 규기는 이에 유식론문(唯識論文)을 보수(保守)하여 술작(述作)한 종조(宗祖)라고 하였다. 현장이 만약 규기가 없었다면 어찌 그의 학(學)을 조술(祖述)하여 확장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라. 만약 성상(性相)의 의문(義門)으로 들어가고자 할진대, 자비(慈悲)의 학(學)을 버리고는 그 진극(盡極)한 경지에 이르러 갈 수 없다. 과거 당(唐)나라 태종(太宗) 문황제(文皇帝)신라왕의 요청으로 유가론(瑜伽論) 100권을 보내옴으로부터 그때까지 응리원실(應理圓實)의 교학(敎學)이 없었으나, 이때부터 점점 이 땅에 왕성하였다. 그리하여 원효법사가 앞에서 인도하였고,태현대통(太賢大統)이 뒤를 따랐으며, 등(燈)과 등이 등불을 이어서 세대와 세대를 이어 중흥하였다.

그러나 부처님과의 상거(相去)가 더욱 멀어진 말세에 있어서유문(遺文)에 그릇되고 어긋남이 많았으므로스님께서는 일찍부터 이를 바로 잡으려고 마음에 품고 있었다. 그리하여 법상종조사(法相宗祖師)의 초소(草䟽)를 크게 세상에 유행토록 하여 학자들로 하여금 본종(本宗)의 탄도(坦途)가 있음을 알게 한 것은 오로지 스님의 공력(功力)이었으니, 가히 원효와 태현(太賢)을 부호(扶護)하고 바야흐로 함께 달리도록 하였으니, 어찌 이를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그 본교(本敎)를 더욱 빛나게 선양한 것은 이와 같았고 전법(傳法)하는 일 밖에도 인의(仁義)의 학술(學術)을 아호(雅好)하였으며, 경사(經史)를 박람(博覽)하고, 시편(詩篇)과 필찰(筆札)에 이르기까지 정미롭게 연구하지 아니함이 없어서, 사람들로부터 탄영(歎詠)을 받은 적이 자주 자주 있었다. 그러므로 수좌(首座) 승계(僧階)를 받을 때의 고신(告身)에 이르되내단사(內檀師)인 명훈(明訓)이 도제(徒弟)를 난국(蘭菊)에서 거느리고, (결락) 시사(詩社)를 강산(江山)에서 맺었으니, 그의 재주가 외학(外學)을 겸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이와 같은 스님을 도와서 미래에 감과(感果)코자 할진댄, 그 인(因)을 현재에 심는 것만 같지 못하니, 도솔천 내원정토(內院淨土)에 상생(上生)하기를 발원(發願)함에는,멀리로는 무착(無着)의 자취를 추모하여 내원수행(內院脩行)을 하고, 가까이로는 규기(窺基)의 행적을 흠모하여마음에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자씨(慈氏)의 탱화를 그려서 봉안하고 해마다 7월 14일에 법연(法筵)을 열어 도려(徒侶)를 모아 예참(禮懺)하며 귀의(歸依)하고, 또한 크게 재(齋)를 베풀어 시친(施䞋)하고 법석(法席)을 파하였는데, 태강(太康) 원년 을묘(乙卯)로부터 수창(壽昌) 2년 병자(丙子)에 이르기까지 수미(首尾)의 기간이 무릇 22년만에 끝났다. 태강말(太康末) 계해년(癸亥年)에 선종(宣宗)이 그 미륵불의 탱화불사를 듣고, 특히 여러 가지 채화(彩畵)와 아울러 어서(御書) 일통(一通)을 하사하였는데, 그 어서에 이르기를, “당래불(當來不) (결락) 성회(盛會)하여 삼가 우리 스님의 공덕을 수희(隨喜)하라” 하였다. 그달 그날에 왕이 국함(國銜)을 내려 제자(弟子)로 일컫대 왕사의 마음을 보고 불법(佛法)을 받들면서 계속 여러해 동안 향화(香火)의 인연을 닦았으며, 어수(御手)로 쓴 친서(親書)를 보내어 수희(隨喜)하는 마음으로 단청(丹靑)할 장식물을 하사하였으니, 진실로 원력(願力)이 심히 깊은 이가 아니면 어찌 능히 신금(宸襟)의 신중(信重)이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스님께서 현화사에 거주할 때, (결락) 완전히 보수하는 것이 급무(急務)라고 생각하여 곧 상계(狀啓)를 갖추어 왕에게 주문(奏聞)하였더니, 임금께서 주청한 것을 가하다고 인가하시고,선리궁(繕理宮)을 설치하였다.대안(大安) 4년 기사(己巳)에 역사(役事)를 시작하여 수창(壽昌) 2년 병자(丙子)에 준공하였는데, 그 규모가 굉장히 웅대하였다. 비록 구지(舊址)에 복원하였으나, 장엄한 승개(勝槩)가 완전히 새로 건축한 것과 같았다. 그리고 또 중외(中外)의 각지에 산재해 있는 본종(本宗)의 모든 사찰에 정재(淨財)를 시납(施納)케 하여, 매년 양회(兩會)에 걸쳐 법회(法會)를 여는 것을 연례화(年例化)하였다. 호두명수(虎頭名手)인 뛰어난 화가(畵家)를 모집하여 석가여래(釋迦如來)의 탱화와 장기이사(獎基二師)해동육조(海東六祖) 등의 영정을 일당(一㡧)에 모두 그려서 각각 그 절에 봉안하였다. 의학자(義學者)들로 하여금 성상(聖像)을 보고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며, 공경함으로부터 신심(信心)을 내고, 신심이 견고함으로부터 지혜를 발하게 되는 것이라고, 날마다 상생정토(上生淨土)를 발원하도록 권장하였다. 수창원년(壽昌元年) 을해(乙亥) 10월에 성고(聖考)인 숙종께서 경사스럽게 종사(宗社)를 계습하였으며, 마음으로 깊이 불법(佛法)에 귀의하여 (결락) 왕명으로 스님을 청해 법주(法主)로 모시고, 잉왕경(仁王經)을 강설한 것은 천조(天祚)의 성업(聖業)을 기도하기 위함이었다.

수창 2년 12월 18일에 이르러 왕사께서 금산사 봉천원(奉天院)에서 심야에 경을 보다가 미질(微疾)이 있게 되었다. 이를 숙종 임금께 알렸더니 곧 어의(御醫)를 보내어 진찰하였으나 회복되지 아니하였다. 이어 중사(中使)를 보내어 친서(親書)와 함께 왕사가 전용으로 타도록 상승국(尙乘局)의 마차를 그 절에 헌납하였다. 이(以) (결락) 내시소경(內侍少卿) 지택후(池澤厚)가 성지(聖旨)를 받들어 전하고, “스님을 봉(封)하여 왕사로 추대코자 합니다”라고 고하였다. 스님이 돈수(頓首)하고 이르되, “덕이 박하고 수행도 용렬하니 어찌 성장(聖獎)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라 하였다. 밤이 장차 깊어져 가는데 스님은 양지(楊枝)를 씹어 양치질한 다음, 미륵여래(彌勒如來)의 명호를 염(念)하고 사홍원계(四弘願戒)에 이르러 발원하여 마치고, 문제자(門弟子)들과 더불어 간곡히 부촉하되, 탕탕연(蕩蕩然)하여 얼굴에 조금도 근심하는 빛이 없었다. 중야(中夜)에 이르러 다시 양지를 씹은 다음, 조용히 입적하였다. 열반에 들기 하루전에 흰 무지개가 밤에 나타났으므로 식자(識者)들은 스님께서 임종하실 예고를 보인 것이라고 하였다.

산동(山僮)과 야로(野老)들이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으며, 새와 짐승들도 서로 처참하였다. 이른 새벽에 입적하시니, 왕이 부음(訃音)을 듣고 크게 진도(震悼)하시고 입내봉어(入內奉御)인 왕하(王嘏)를 파견하여 조문(弔問)과 위로를 표하고, 다음날 우가승록(右街僧錄) 계통(繼通)사천감(司天監)이며 지태사국사(知太史局事)문상(文象) 등을 보내서 장사(葬事)를 감호(監護)토록 하였다. 27일에는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진위사(陳謂使)와 부상서(副尙書) 좌승(左丞)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인 김통(金統) 등을 보내어 새서(璽書)를 지참하고 가서 왕사로 진봉(進封)하고, 시호를 혜덕(慧德), 탑호를 진응(眞應)이라 하고, 아울러 자색(紫色) 바탕에 수를 놓은 가사(袈裟)와 여러 가지의 옷과 대기완(對器玩) 다향(茶香) 등 물류를 증사(贈賜)하였다. 신시(申時) (결락) 말에 절 서남쪽에서 다비(茶毗)하였다가, 다음 해 정월(正月) 11일 병신(丙申)에 절의 서북쪽으로 천장(遷葬)하여 유골을 안치하였는데, 이는 상법(像法)을 준수한 것이다. 오호라! 비니원내(毗尼園內)에서 비롯하였으니, 곧 출생할 것이 없는 데서 생(生)을 나타냈고, 발제하변(跋提河邊)에서 임종하였으니, 이는 곧 입멸(入滅)할 것이 없는 데서 입멸을 보인 것으로, 일생(一生)의 모든 일이 다 끝난 것이다.

초재(初齋)인 7일로부터 소상(小祥)과 대상(大祥)인 이상(二祥)에 이르는 무릇 십재(十齋)에 이르기까지의 소요되는 경비 (결락) 를 공급함이 조정(朝廷)에 있었다. 국가에도 오히려 이와 같았거든, 하물며 문인(門人)이야 더 말할 수 있겠는가? 당시의 우세승통(祐世僧統) 대각국사는 실로 화엄종장(華嚴宗匠)이었지만, 스님의 입적을 듣고 바야흐로 극진히 애도하여 그 제문(祭文)을 지었는데, 생략하여 말한다면 “바야흐로 몰치(沒齒)를 기약하여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여 진교(眞敎)를 홍포(弘布)하여 왔는데, 이제 스님께서 사망하였으니, 내 누구와 함께 친할 것인가”라 하였다. 타종(他宗)에서도 왕사를 존중하였음이 모두 이와 같았다.중화(中華)의 도인(道人) 성총(省聰)과 혜진(慧珎) 양대사(兩大師)가 있어 바다를 건너 고려에 와서 왕사의 강하(講下)에서 수학하였다. 혜진이 처음 스님을 보고 흔연히 오래전부터 서로 알고 있는 구면(舊面)과 같다면서 2년 쯤 주석하다가 갑자기 병이 생겨나서 스님보다 20일 앞서 입멸하였다. 입멸할 때 가부좌(跏趺坐)를 맺고 선정인(禪定印)을 수인(手印)하고는 단정히 앉아 입적하였으니, 대개 이것은 비상(非常)함이 아니어서 멀리 있는 사람들까지도 의지하고 흠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종류가 심히 많았다. 여러 조정(朝廷)에 걸쳐 무릇 하사받은 (결락) 타등(他等)은 번거로움을 피하는 까닭으로 기록하지 아니한다. 그리고 모든 귀신(貴臣)과 성족(盛族), 호상(豪商)과 대고(大賈) 등은 각기 정성을 다하며, 공경하는 마음이 없는 날이 없었다. 속수(俗壽)는 59요, 하납(夏臘)은 48세였다. 이에 상수(上首) 제자인 도생승통(導生僧統)이 있고, 그 이하에 무릇 일천여인(一千餘人)이 함께 뜻을 모아 선사(先師)의 행장(行狀)을 갖추어 눈물을 흘리면서 궐하(闕下)에 엎드려 임금께 주달(奏達)하였다. 그 올린 글에 이르기를, “(결락) 산두사다천(珊兜史多天)에서 공연히 미륵(彌勒)을 애모(哀慕)하는 것이옵니다만 귀부(龜趺)를 보계(寶界)에 새겨 미래에 영원토록 널리 전문(傳聞)케 하기 원하옵니다”라 하였다. 이에 따라 하신(下臣)에게 명하여 왕사의 유열(遺烈)을 천양하도록 비문을 지으라 하시므로, 신(臣)이 사양을 표하여 이르되, “신은 본성(本性)이 고루할 뿐 아니라, 노쇠(老衰)를 더하였으며, 하물며 조고(操觚)를 잡을 용기조차 없음이온 어찌 속사(屬辭)를 사염(寫琰)에 부합할 수 있겠나이까? 원하옵건대 중지(中旨)를 회수(回收)하여 다른 통인(通人)에게 당부하소서”라고 간절히 사양하였다. 다시 제지(制旨)를 내려 이르시기를 “이비련(以碑聯) (결락) 지(之) (결락) 왕사의 비문을 지어 경행(景行)을 선양토록 하되, 더 이상 번거롭게 사양하지 말고, 직서(直書)에 힘쓰라” 하였고, 이미 도유(都兪)에 지시하였으므로 감히 비문을 짓는 일에 전력하지 않을 수 없다.

문장(文章)에 질(質)이 없지 아니하나, 그러나 작자(作者)의 요구에는 부끄러움이 없지 않다. 도(道)라는 말도 억지로 붙인 이름이니, 고승(高僧)의 사전(史傳)이 후대에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행적(行跡)의 사실만을 주워 모아 삼가 명(銘)을 서술하여 이른다.


능인(能仁)이 출현함은 중생(衆生)을 위함인 것

일대사(一大事) 인연으로 사파(娑婆)에 출현했네.

십이류(十二類) 중생(衆生)들을 모두 다 제도코자

팔만(八萬)과 사천법문(四千法門) 갖가지 연설하다.

때로는 방편법문(方便法門) 유시(有時)엔 진실교리(眞實敎理)

어느땐 편설(偏說)하고 혹시(或時)엔 원설(圓說)하다

서역(西域) 발상(發祥)여 사오년(四五年) 교화(敎化)하고

이 법(法)이 동점(東漸)하여 근역(槿域)에 두루하다.

서천(西天)의 이십팔조(二十八祖) 동토(東土)엔 육대조사(六代祖師)

조조(祖祖)가 천양(闡揚)하고 사사(師師)가 제창(提唱)하다

유(有)와 공(空) 주창하여 저마다 국집하고

성(性)과 상(相) 상치(相値)하여 성상(性相)이 적대(敵對)하나

성상(性相)을 초월하면 이도(二道)가 따로 없어

이 어찌 편견(偏見)으로 저마다 옳다 하랴!

이러한 차별견(差別見)을 그 누가 융통(融通)할까?

금산사(金山寺) 왕사(王師)만이 이 일을 감당했네.

만행(萬行)을 (결락) (결락) (결락)

숙세(宿世)에 훈습(薰習)하여 생지(生知)의 천재(天才)일새

(결락) (결락) (결락) 취령(鷲嶺)

그 칭송(稱頌) 두루하여 용병(龍塀)에 가득했네!

도덕이 숭고하여 왕신(王臣)이 외호(外護)하고

덕망이 고매하여 임금의 스승되다.

그 경지(境地) 높고 높아엿볼길 전혀 없고

보리수(菩提樹)잘 길러서 가지에 가지로다.

비보(裨補)를 하기 위해 옛터에 절을 짓고

불씨(佛氏)를 장엄하여 유식종(唯識宗) 도량(道場)되었네!

날마다 법의(法衣) 입고 법좌(法座)에 높이 앉아

오묘(奧妙)한 그 진리(眞理)를 사자후(獅子吼) 진동하다.

법문(法門)을 들으려는 사부중(四部衆) 운집(雲集)하고

옷깃을 여미운 이장터를 이루었네!

도(道) 어찌 멀다 하랴. 평상심(平常心) 그것이며

실천(實踐)만 한다면 이 또한 도(道)인 것을 ④

구경(究竟)의 원묘과(圓妙果)를 이루려 할진대는

반드시 인행(因行)에서 선업(善業)을 닦을지다.

삼라(森羅)의 만상(萬像)들이 모두가 보처(補處)인데

(결락) (결락) (결락) (결락)

지혜(智慧)가 교결(皎潔)함은 청담(淸潭)의 달과 같고

복덕(福德)이 구족(具足)함은 항하사(恒河沙) 모래같네.

해마다 유식참법(唯識懺法) 이기(二紀)를 계속하여

도솔천(兜率天) 상생(上生)코자 그 일념(一念)밖에 없네. ⑤

법상종(法相宗) 홍포(弘布)코자 광교원(廣敎院) 열어놓고

곳곳에 다니면서 장소(章疏)를 구(求)하여서

제본(諸本)과 교정하여 목판(木板)에 새겼으니

흩어진 꽃송이를 노끈에 꿴 것 같네!

이 법문(法門) 인경(印經)하여 골고루 법시(法施)하니

자비(慈悲)한 진리(眞理) 바람 천하(天下)에 두루 불다

원효(元曉)와 태현대통(太賢大統) 이 나라 불교(佛敎) 위해

진한(辰韓)과 변한(卞韓) 땅에 재현(再現)이 아닐런지.

문장(文章)이 도도하여 운자(韻字)만 떨어지면

정경(情景)을 감상하여 구구(句句)가 성시(成詩)일새

은총(恩寵)을 드리우니 찬란한 그 광채(光彩)여!

벽운시(碧雲詩) 좋다지만 비할 바 전혀 없네

동작(動作)의 느낀 바로 토운(吐韻)이 주옥(珠玉)일새.

작(作)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소명(所名)

수행을 쌓고 쌓아 만증(滿證)을 기약(期約)하다. ⑦

열반전(涅槃前) 흰 무지개 입적(入寂)을 예고했고,

쌍림(雙林)의 사라나무 흰 빛이 나타나다

양지(楊枝)로 양치하고 미륵(彌勒)을 부른 다음

도솔천(兜率天) 정역(淨域)으로 소요(逍遙)히 상생(上生)하다

임금께서 스님에게 보은(報恩)을 위해서

고루(孤陋)한 미신(微臣)에게찬비(撰碑)를 명(命)하시어

사부중(四部衆) 정성모아 정민(貞珉)에 각자(刻字)하여

위대(偉大)한 그 홍덕(洪德)을 억만세(億萬歲) 전하리다.

교위(校尉) 신(臣) 이효전(李孝全)이 왕명(王命)을 받들어 비문을 새기다

천경(天慶) 원년(元年) 세재신묘(歲在辛卯) 맹하월(孟夏月)

【陰記】

속리사주(俗離寺主)에 금산사(金山寺) 지주(住持)를 겸임한 승통(僧統) 도생(導生)

      승통(僧統)  규(窺)

      승통(僧統) 동수(同壽)

      수좌(首座) 관승(冠僧)

            석칭(釋稱)

            보원(普元)

            우현(右賢)

            상▨(尙▨)

            ▨수(▨壽)

            회원(會元)

            탄융(誕融)

  삼중대사(三重大師) 각피(覺彼)

            인고(仁股)

            지원(智圓)

            도월(道月)

            품종(禀宗)

            공웅(雄)

            동명(洞明)

            의탄(義誕)

    중대사(重大師) 승각(承覺)

            ▨▨

            ▨▨

            국충(國冲)

            석목(釋目)

            충선(充善)

            ▨륜(▨倫)

            전선(詮善)

            준명(俊明)

            우승(祐承)

            조상(肇相)

            진감(眞鑑)

            상표(尙表)

            충▨(忠▨)

            석종(釋宗)

            수현(秀賢)

            ▨▨

            심현(甚賢)

            식주(識珠)

            인상(隣尙)

            양변(良辯)

            천상(闡祥)

            사원(思遠)

            이웅(利雄)

            선웅(善雄)

            증림(證林)

            성▨(性▨)

            법▨(法▨)

            ▨▨

            심기(甚冀)

            보명(寶明)

            덕기(德幾)

            호령(乎領)

            융연(融演)

            심종(深宗)

            우관(祐冠)

            윤성(倫性)

            단혜(端慧)

            단성(端性)

            민계(珉戒)

            원▨(元▨)

            묘홍(妙洪)

            ▨승(▨承)

            ▨감(▨鑑)

            동▨(同▨)

            방덕(方德)

            진▨(珎▨)

            억경(億景)

            충선(冲禪)

            오법(晤法)

            연담(延曇)

            휴령(休靈)

            탄성(坦性)

            신▨(信▨)

            약선(約宣)

            정감(挺鑑)

            현덕(賢德)

            국▨(國▨)

            ▨▨

            ▨신(▨申)

            ▨▨

            ▨▨ 등(等) 160명(名)과

     중대사(重大師) 혜기(惠奇)

             지웅(志雄) 등 14명은 혜덕왕사에게 가르침을 받아 학업(學業)을 계승한 스님들

양가도승록(兩街都僧錄) 대사(大師) 광▨(光▨)

  좌가승록(左街僧錄) 대사(大師) 행웅(行雄)

          중대사(重大師) 혜종(慧宗)

                  홍학(弘學)

                  명진(明眞)

                  위경(爲鏡)

                  수명(受明)

                  ▨서(▨舒)

            대사(大師) 석지(釋知)

                  명서(明胥) 등 100여명은 직책(職責)에 따라 법계를 첨가(添加)받은 스님들

          중대사(重大師) 품현(禀賢)

                 숙상(夙相)

                 보정(報正)

                 경생(景生)

                 창융(昌融)

                 조충(祖忠)

           대사(大師) 도정(導挺)

                 구일(舊日)

                 ▨종(▨宗)

                 ▨▨

                 ▨웅(▨雄) 등 1,500여명은 혜덕왕사의 덕을 흠모하여 귀화(歸化)한 스님들

            승통(僧統) 승령(勝齡)

            수좌(首座) 숭▨(崇▨)

                  ▨상(▨常)

                  ▨▨

                  ▨▨

삼중대사(三重大師) 승통(僧統) 우상(祐祥)

                 홍▨(洪▨)

                 순진(順眞)

                 도연(道緣)

                 석림(釋琳)

                 진령(眞領)

                 증상(證相)

                 총령(聰領)

         중대사(重大師) 양▨(梁▨)

                 ▨▨

                 ▨▨

                 ▨▨

                 ▨▨

                 ▨▨ 등은 혜덕왕사를 전후(前後)하여 입적(入寂)한 친한 도반(道伴) 스님들

이상(以上)은 왕사문도(王師門徒)들의 개좌직명(開座職名)이니, 조록(雕錄)하여 시행(施行)하는 바이다.

승무랑(承務郞)·상서고(尙書考)·순현(珣賢)·원외랑(員外郞)이며 금어대(金魚袋)를 하사받은 신(臣) 정황선(鄭晃先)이 왕명을 받들어 음기를 쓰다.

천경(天慶) 원년(元年) 세재신묘(歲在辛卯) 맹하월(孟夏月) 일(日)에 비석(碑石)을 세우다.


〔출전:『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3】(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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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반야사 원경왕사비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伽倻面) 치인리(緇仁里) 해인사(海印寺) 경내에 있는 고려시대의 비.

 

지정번호 : 보물 제128호

지정연도 : 1963년 1월 21일

소재지 :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 해인사

시대 : 고려시대

크기 : 높이 2.3m, 너비 1.2m

분류 : 석비

  

 

 

 

 

반야사 원경왕사비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28호로 지정되었다. 원래 가야면 야천리(倻川里) 탑동(塔洞)마을 반야사 터에 있던 것을 1968년 현재의 해인사로 옮기고 비각을 세워 보호하였다. 합천군 가야면 가야산(伽倻山:1,430m) 남서쪽에 있는 해인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로 신라 애장왕(哀莊王:재위 800∼809) 때 세워졌다.

 

해인사에 있는 원경왕사비는 고려시대인 1125년(인종 3)에 건립하였다. 비의 높이는 2.3m, 너비는 1.2m이고, 재료는 화강석이다. 비문은 자경(字徑) 1.8cm의 해서(楷書)이며, 김부식(金富軾)의 형인 김부일(金富佾)이 비문을 지었고, 이원부(李元符)가 글씨를 썼다. 비는 귀부(龜趺), 신석(身石), 개석(蓋石)으로 이루어졌으며 모두 평박(平薄)한 것이 특색이다.

 

비문에 따르면 원경왕사의 속성은 신씨(申氏), 이름은 낙진(樂眞)이고 시호는 원경(元景)이다. 경덕국사(景德國師)와 대각국사(大覺國師)에게 사사하였으며 고려 숙종(肅宗:재위 1095∼1105) 때 승통(僧統)이 되었고, 예종(睿宗:재위 1105∼1122) 때 왕사(王師)가 된 후 귀법사(歸法寺)에 머물다 입적하였다. 이 비는 귀부의 문양과 옥개형으로 변한 개석 등의 조각 수법에서 고려 중기의 특징이 나타나 있다.

 

* 사사 (師事) : 스승으로 섬김. 또는 스승으로 삼고 가르침을 받음

 

 

陜川般若寺元景王師碑

贈諡元景王師碑銘(題額)

 

高麗國大華嚴業第四代王師歸法法水兩寺住持悟空通慧僧統 詔諡元景大和尙碑銘幷序

      翰林學士樞密院知奏事中大夫秘書監知制誥(臣)金富佾奉 宣撰

      儒林郎尙書都官員外郎 賜緋魚袋(臣)李元符奉 宣書幷篆額

上卽政之三年 元景王師門人首座覺純等告于 朝曰 先師旣葬累年矣灋立碑以爲☐☐☐☐☐☐

☐☐☐惟爾 ☐師☐☐ 我☐☐睿☐代能以花嚴大敎補益國家者多矣予其敢忘耶迺」

詔(臣)富佾曰汝可爲之銘臣適得執筆玉堂奉 明令謹昧死 上言臣聞 佛灋之興海東☐☐☐☐☐

☐☐其時胡僧阿道以一大事因緣爲首唱於是☐有所☐☐☐有所趍嚮☐爾☐☐☐☐☐繼而」

起有若勝光曇育智明圓乘之輩皆能奉 佛之遺訓爲人之導師然其所謂☐者不過四☐☐☐因緣之☐

☐巳是以☐雷之音未及大☐天其或者重☐☐☐爲之☐☐☐☐☐☐皇應時而作☐☐☐☐☐論」

始行于時及世之云季道亦漸衰一時學者或奔小徑或趣異塗法☐敢☐☐☐☐☐☐☐☐☐☐大☐☐☐

☐☐歸後生爲迷雲之所☐☐於是明正道以☐☐說唱圓一☐覺☐疑其高第弟子☐☐☐☐法師」

者或從而和之或贊而成之致一代之聖敎諸祖之微言復興於☐☐☐☐☐☐☐☐☐☐☐☐☐☐☐☐☐

☐☐師申其姓樂眞其名子正其字其先世爲南☐☐利川郡之右族 師生數月其母☐☐☐☐☐」

門前有異僧來見之謂曰是子有淑質出家必當爲法器善護☐☐☐☐☐☐☐☐☐☐☐☐☐☐☐☐☐☐

☐志依歸☐☐☐統均粲祝髮☐☐☐☐☐又依 景德國師學焉淸寧二丙申歲就☐☐☐☐☐☐」

戒咸雍四戊申歲赴大選場受大德自是不離 景德之門☐☐☐☐☐☐☐☐☐☐☐☐☐☐☐☐☐☐門

人曰☐☐在吾道弗墜矣丙☐歲 景德門遷化 大覺傳繼法師 景德門人☐☐☐☐☐☐☐」

講下 大覺素和 師之爲人引爲上☐☐☐☐之紀綱門庭☐☐☐☐☐☐☐☐☐☐☐☐☐☐☐☐☐☐

☐☐☐☐☐無所屈☐ 大覺與之言未甞不欣然聽納 師亦喜遇知已思☐☐☐☐☐☐☐☐☐」

覺甞勞之曰非子之至誠奉法何能如是 肅王在藩酉時☐☐☐☐☐☐☐☐☐☐☐☐☐☐☐☐☐☐道

場一百日請  師爲講主道俗聽衆☐有數百人由是聲名益振曾是 大☐☐☐☐☐☐☐☐☐」

不明久矣吾欲西遊於宋求得其法從我者唯子歟 師曰☐學☐☐☐☐☐☐☐☐☐☐☐☐☐☐☐☐☐

☐☐☐☐☐有奏請而竟不得報☐排☐憤志不可奪☐不☐☐☐☐☐☐☐☐☐☐☐☐☐☐☐☐」

商船浮海 上聞之驚歎命 師及大師慧宣道隣等追之自仲☐☐☐☐☐☐☐☐☐☐☐☐☐☐☐☐☐

☐☐ 大覺孟秋☐一日從 大覺朝京師 皇帝待之甚厚☐☐☐☐☐☐☐☐☐☐☐☐☐☐☐」

師隨後請益多所啓發杭州惠因院晉水法師一見如舊每以溫顔☐☐☐☐☐☐☐☐☐☐☐☐☐☐☐☐

☐☐楊公傑聞之曰子正所學深遠可以爲人師☐☐述士☐☐☐☐☐☐☐☐☐☐☐☐☐☐☐☐」

比再授誥勑後當爲王者師丙寅歲仲夏二十九日自大宋還☐ 大☐☐☐☐☐☐☐☐☐☐☐☐☐☐☐

☐☐☐袈裟戊辰歲仲春 師請歸所住☐☐去 大覺☐☐☐☐☐☐☐☐☐☐☐☐☐☐☐☐☐」

一柄爲餽贐曰昔晉水法師以爐拂傳我我以傳之於子宜勉之發揚吾道☐☐☐☐☐☐☐☐☐☐☐☐☐

☐☐☐☐白雲深光☐吾道知☐在莫忘扶顚護法心壬申☐☐☐☐☐☐☐☐☐☐☐☐☐☐☐☐」

師講大經奉嚴冥福又贈以詩偈曰佛祖乘文緣底事只應傳授化群盲近☐☐☐☐☐☐☐☐☐☐☐☐☐

☐☐☐☐ 肅王卽政制加首座賜☐衲☐眷癸未歲☐☐☐☐☐☐☐☐☐☐☐☐☐☐☐☐☐☐」

衣 御手親授焉甲申季夏制加僧統 睿王之在東宮也遊心空於華嚴敎☐☐☐☐☐☐☐☐☐☐☐☐

☐☐雖造次酬酢之間未甞不☐☐揚弘護爲☐☐☐☐☐☐☐☐☐☐☐☐☐☐☐☐☐☐☐☐☐」

法匠凡國朝有水旱災變必請 師爲邀福之事 師自來常讀大經於性起☐☐☐☐☐☐☐☐☐☐☐☐

☐☐☐其應多不虗故恩禮之數☐於他等☐☐所得☐☐☐☐☐☐☐☐☐☐☐☐☐☐☐☐☐☐」

經律論三藏計五千四百五十卷常自講讀以勸後學之業辛巳歲興王寺敎☐☐☐☐☐☐☐☐☐☐☐☐

☐☐☐覺上言近古已來諸宗☐跡多失其本請行購☐☐☐☐☐☐☐☐☐☐☐☐☐☐☐☐☐☐」

引 師等義學名僧相與校正乃命工鏤板使旣逸之典再行於世 師多有力焉☐ ☐☐☐☐☐☐☐☐☐

☐☐事記等雜文奉 聖旨賜☐釋苑詞☐☐☐☐☐☐☐ ☐☐☐☐☐☐☐☐☐☐☐☐☐☐☐」

門人首座覺純等重加詳定以類相從編爲二百五十卷至是歲告畢焉戊子歲移住☐☐☐☐☐☐☐☐☐

☐☐☐奉先曰曇華曰佛國曰安嚴☐☐☐☐☐☐☐☐☐☐☐☐☐☐☐☐☐☐☐☐☐☐☐☐」

每言迦葉甞踏泥況吾儕豈敢自安乎是以所至人樂爲用甲午歲季春 駕幸奉恩寺拜☐☐☐☐☐☐☐

 上欲有是命以師懇讓而☐☐☐☐☐☐☐☐☐☐☐☐☐☐☐☐☐☐☐☐☐☐☐☐☐☐」

又加法號曰悟空通慧 師之法号初受慈應究理自後累加曰演奥曰正觀曰圓應曰法印今又加四字皆

所以旌悳行也識者曰楊☐客尤☐☐☐☐☐☐☐☐☐☐☐☐☐☐☐☐☐☐☐☐☐☐☐☐☐☐」

上以歸法寺爲 師燕息之所以法水寺爲 師香火之所及示疾 命御毉往爲之 師曰老病人之常態

無煩理也三月三日☐☐☐☐☐☐☐☐☐☐☐☐☐☐☐☐☐☐☐☐☐☐☐☐☐☐☐☐☐☐」

雙舃不踐私門之閾六根不著欲界之塵此吾之所自許而諸子之所共知也 國家過錄庸僧辱☐☐禮所

恨德簿才☐☐以☐☐今者☐☐☐☐☐☐☐☐☐☐☐☐☐☐☐☐☐☐☐☐☐☐☐☐☐☐☐」

訖須臾入滅俗壽七十法夏六十二 上聞之震悼遣侍臣致祭慰贈甚厚追諡曰元景 命☐☐監護葬事

是月六日茶毗于歸法寺西☐☐道☐☐☐☐☐☐☐☐☐☐☐☐☐☐☐☐☐☐☐☐☐☐☐」

院越庚子歲十月遷神于陜川管內冶爐縣般若寺安坐丁寺之東南崗依本敎也 師少時☐☐☐雲☐☐

☐☐☐☐☐☐☐☐☐☐☐☐☐☐☐☐☐☐☐☐☐☐☐☐☐☐☐☐☐☐☐☐☐☐☐☐☐☐☐」

是門人相謂曰梵言般若唐言智慧其義一也豈非 吾師之靈安坐于此寺☐應☐☐☐☐☐☐☐☐☐☐

☐☐☐☐☐☐☐☐☐☐☐☐☐☐☐☐☐☐☐☐☐☐☐☐☐☐☐☐☐☐☐☐☐☐☐☐☐☐☐」

春以風樹之憂寓居僧舍與其徒游聞其所謂法其大旨與夫繫辭無思也于此☐☐☐☐☐☐☐☐☐☐☐

☐☐☐☐☐☐☐☐☐☐☐☐☐☐☐☐☐☐☐☐☐☐☐☐☐☐☐☐☐☐☐☐☐☐☐☐☐☐☐」

持在於名迹而已況今朝廷肅正法度脩明省刑罰簿征徭使兵事消頌☐☐☐☐☐☐☐☐☐☐☐☐☐☐

☐☐☐☐☐☐☐☐☐☐☐☐☐☐☐☐☐☐☐☐☐☐☐☐☐☐☐☐☐☐☐☐☐☐☐☐☐☐☐」

時有今古 法無中邊 南山杜順 東國義天 地與世隔 ☐☐☐☐ ☐☐☐☐ ☐☐☐☐ ☐☐

☐☐ ☐☐☐☐ ☐☐☐☐ ☐☐☐☐ ☐☐☐☐ ☐☐☐☐☐ ☐☐☐☐ ☐☐☐☐」

昔焉西上 視險如夷 今也東返 扶敎于衰 贊揚大☐ ☐☐☐☐ ☐☐☐☐ ☐☐☐☐ ☐☐

☐☐ ☐☐☐☐ ☐☐☐☐ ☐☐☐☐ ☐☐☐☐ ☐☐☐☐ ☐☐☐☐ ☐☐☐☐」

  (陰記)

伽耶山般若寺  元景王師碑銘陰記如左

 首座 覺純 三重大師 廉幹曇晝 重大師玄則僧傑淸允仁昶景猷俊機性

  融理淵善齡」

  玄覺慧釋慧伯資潭慧赫涉☐☐曇慧曇景元羽淸觀處謙慧琰濟觀晋林慧軾

  慧稠覺雄孝雄證觀」

  選英資哲慧均暢☐延說智圓慧與慧玩德嚴學嚴曇一曇兆超彥慧揚賢規等

  親承敎訓者也」

 三重大師 安彦☐☐一太☐☐☐深宏釋妙悅彥稱俊明幸紹鶚領仁釋珎性珎

  善允資敎請雄廣桑」

  梃雄成幸處順智蒙晐賢☐慧鑒幸琰戒憧戒安領麟釋資宗式神素冠規等師

  揚法化者也」

 重大師正宣覺猷學屳法☐☐巳☐訓悟宣順緣恭俊惠實德高明悟道平賢觀諝

  珎德容明略法雄雲儼」

  緣僧濕性麟英鑒領載釋置惠☐惠初南弁明信志昇惠長起如尙厸正根等

  奉待甁巾者也」

  重大師矛良順先得先潔昇崇弁弥侔徒暹慧嚴惠金理承景孫得文惠文惠善

  碩厸成幹緣信義賢」

  蘭芳利崇順珎遆英弘一弘妙弘法甫厸梃機法彥法聦法俊貞觀言炤淸

  演先景惠諝曇顯進沖

  智平英妙守如韓☐☐☐幸先桑闡惠直英冲戒等智淸韓亮若緣靈一覺周惠

  崇善精漸仁梵承淸濬」

  旦明學孜繼建而朗智光承瑩知德林大智淵智超持演淵和淑溫朗融玄甫等

  補翼事務者也

右件門徒職名開科彫錄施行

         時自天慶八年戊戌至今十一戊申歲仲冬立

         大匠金  允刻

      儒林郎尙書都官員外郎 賜緋魚袋臣李     元符  奉

      宣書

 

〔출전:『韓國金石全文』中世上(1984)〕

 

 

증시 원경왕사 비명(贈諡元景王師碑銘) (題額)

 

고려국(高麗國) 대화엄업(大華嚴業) 제사대(第四代) 왕사(王師) 귀법(歸法) 법수(法水) 양사주

지(兩寺住持) 오공통혜승통(悟空通慧僧統) 조시원(詔諡元)

 

경대화상(景大和尙) 비명(碑銘) 병서(幷序)

 

한림학사(翰林學士) 추밀원(樞密院) 지주사(知奏事) 중대부(中大夫) 비서감(秘書監) 지제고

(知制誥)인 신(臣) 김부일(金富佾)이 왕명(王命)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유림랑(儒林郞) 상서도관(尙書都官) 원외랑(員外郞)이며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은 신(臣)

이원부(李元符)는 조선(詔宣)에 의하여 비문과 전액(篆額)을 쓰다.

 

인종(仁宗) 임금께서 즉위(卽位)하신지 3년만에 원경왕사(元景王師)의 문인(門人)인 수좌(首

座) 각순(覺純) 등이 조정에 고(告)하여 이르기를, “왕사(王師)께서 입적(入寂)하여 장례를

지낸지도 이미 여러 해가 되었나이다. 이젠 마땅히 비(碑)를 세워 왕사의 위대하신 업적(業

跡)이 인멸되지 않도록 배려(配慮)하여 주십시오”라고 주청(奏請)하였다. 이위(以爲) (결락)

유이(惟爾). “왕사가 (결락) 예종대(睿宗代)에 능히 화엄대교(花嚴大敎)로써 국가를 보익(補

益)케 함이 많았으니,내 어찌 감히 그 은혜를 잊을 수 있겠는가”라 하시고, 이에 신(臣) 부

일(富佾)에게 명(命)하여 이르시기를, “경(卿)이 왕사의 비명(碑銘)을 지으라”고 하였다. 신

(臣)이 마침 한림원(翰林院) 학사승지(學士承旨)가 되어 일하던 중 마침 옥당(玉堂)에서 집필

(執筆)할 기회를 얻었으므로, “명명(明命)을 받들어 삼가 몽매하여 사죄(死罪)를 범(犯)하였

나이다” 하고 상언(上言)하되 신(臣)이 듣자오니, 불천(佛)이 해동(海東)에 전래된 것은 (결

락) 그 때 호승(胡僧) 아도(阿道)스님이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써 수창(首唱)을 삼았다.

이 때 (결락) 유소(有所) (결락) 추향(趍嚮)하는 바가 있었다. (결락) 이(爾) (결락) 계속하여

일어났다. 승광(勝光)·담육(曇育)·지명(智明)·원승(圓乘)과 같은 쟁쟁한 스님들이 있어, 모두

부처님의 유훈(遺訓)을 받들어 사람을 인도하는 스승이 되었다.

 

그러나 그 이른 바 법(法)이란 사제(四諦)와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을 벗어나지 아니하였

다. 그러므로써 (결락) 뇌지음(雷之音) 미급대(未及大) (결락) 천(天) 기혹자중(其或者重) (결

락) 위지(爲之) (결락) 황(皇), 때에 응(應)하여 지었다. (결락) 론(論), 그 때에 비로소 행해

졌는데 세상이 말세(末世)에 이르렀고, 불교의 도리(道理)도 또한 점점 쇠퇴하였다. 일시(一

時)에 도(道)를 배우는 사람들이 혹자(或者)는 소승(小乘)의 길로 달아나기도 하고, 혹자는

이단(異端)의 길로 나아가므로, 법(法) (결락) 감(敢) (결락) 대(大) (결락) 귀(歸). 후생(後生)

들이 미운(迷雲)의 덮인 바가 되었다. 이 때 정도(正道)를 밝힘으로써 (결락) 설(說). 창원일

(唱圓一) (결락) 각(覺) (결락) 의(疑). 그의 고제제자(高第弟子) (결락) 법사(法師)된 이들이

혹은 그를 따라 화답(和答)하며, 어떤 이는 도와 뜻을 성취하여 일대(一代)의 성교(聖敎)와

제조(諸祖)의 미언(微言)을 다시 부흥케 하였다. (결락) 사(師).

 

속성은 신씨(申氏)이고, 이름은 낙진(樂眞)이며, 자(字)는 자정(子正)이다. 그의 선세(先世)는

남(南) (결락) 이천군(利川郡)의 우족(右族)이었다. 스님께서 탄생한지 몇 달만에 그의 어머

니가 (결락) 문전(門前)에 어떤 이상한 스님이 이르러 와서 이르기를, “이 아들은 숙질(淑

質)을 받아 태어났으므로, 출가(出家)하여 스님이 되면 반드시 훌륭한 법기(法器)가 될 것이

니, 잘 보호하여 키우라”고 하였다. (결락) 지의귀(志依歸) (결락) 승통(僧統) 균찬(均粲)에

의하여 삭발하고 스님이 되었다. (결락)

 

또 경덕국사(景德國師)에게서 수학하였다. 청령(淸寧) 2년 병신세(丙申歲)에 (결락) 사(寺)에

나아가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함옹(咸雍) 4년 무신세(戊申歲)에는 대선장(大選場)에 합

격하여 대덕(大德) 법계(法階)를 받았다. 이로부터 경덕(景德)의 문하(門下)를 떠나지 아니하

고 수학하였다. (결락) 어느날 문인(門人)들에게 이르기를, “항상 우리의 불도(佛道)를 수호

하여 추락됨이 없도록 하라”고 당부하였다. 병오세(丙午歲)에 경덕국사가 입적하고, 대각국

사가 경덕국사의 법통(法統)을 계승하였다. 왕사는 경덕문인(景德門人)으로 (결락) 강하(講

下)에서 수학하였다. 대각국사는 일찍부터 원경(元景)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었다. 인위상

(引爲上) (결락) 지기강(之紀綱). 문정(門庭) (결락) 무소굴(無所屈) (결락) 대각국사가 원경

과 더불어 이야기할 때에는 흔연(欣然)히 그의 의견(意見)을 청납(聽納)하지 않음이 없었다.

왕사도 또한 지기(知己)를 만났다고 기꺼워하였다. 사(思) (결락) 대각국사가 일찍 위로하여

말하기를, “그대의 지극한 정성으로 불법(佛法)을 받드는 신심(信心)이 아니었더라면 어찌

능히 이와 같이 되었겠는가”라 하였다.

 

숙왕(肅王)이 번저(藩邸)에 있을 때, (결락) 도량(道場)을 개설하고, 왕사를 청하여 강주(講

主)로 모셨는데, 도속(道俗)의 청중이 무려 수백명에 달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명성(名聲)이

더욱 널리 떨쳤다. 증시(曾是) 대각(大覺) (결락) “밝지 않음이 이미 오래되었다. 내가 송

(宋)나라에 가서 유학(遊學)하여 그 법(法)을 얻고자 하니, 나를 따라갈 자 오직 자네뿐이

라”고 했다. 이때 왕사가 이르기를 (결락) 학(學) (결락) 여러 차례에 걸쳐 문종(文宗)에게

유학할 것을 주청(奏請)하였으나, 마침내 공식 허가(許可)를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국사의

구법(求法) 의지(意志)는 견고할 뿐아니라 ‘심분분(心憤憤) 구비비(口悱悱)’하여 그의 뜻을

꺾을 수 없었으며, 또한 그의 원력(願力)은 점점 더욱 굳어져 (결락) 마침내 상선(商船)을

얻어 타고 미복(微服)으로 바다를 건너게 되었다. 문종이 이 소식을 듣고 경탄(驚歎)하여 원

경왕사(元景王師)에게 명(命)하되, 왕사(王師)와 대사(大師)인 혜선(慧宣)과 도린(道隣) 등을

추종(追從)토록 하였다.

 

자중하(自仲夏) (결락) 대각(大覺). 7월(七月) ▨일일(▨一日) 대각국사(大覺國師)를 따라 송

(宋)의 경사(京師)에 이르러 철종황제(哲宗皇帝)를 배알하였는데 황제의 대우(待遇)가 매우

융숭하였다. (결락) 왕사가 국사의 뒤를 따라 화엄종(華嚴宗)의 유성법사(有誠法師)를 만나

교리(敎理)를 청해 듣고 계발(啓發)된 바가 많았다. 항주(杭州) 혜인원(惠因院)의 진수법사

(晉水法師)는 처음 만난 초면이었지만, 오래전부터 친한 구면처럼 느껴져서 항상 온안(溫顔)

으로 친절히 대해주었다. (결락) 원외랑(員外郞)인 양걸(楊傑)이 소문을 듣고 이르기를, “자

정(子正)의 학문이 박식다문(博識多聞)하여 참으로 사람들의 스승이 될 만한 스님이다”라고

칭송하였다. (결락) 술사(述士) (결락) 근자(近者)에 다시 법계(法階)를 첨가(添加)하는 고래

(誥勑)을 받았으니, 앞으로 멀지않아 마땅히 왕사가 될 것이라고 했다.

 

병인년(丙寅年) 5월 29일 대송(大宋)으로부터 귀국하였다. 대(大) (결락) 가사(袈裟) 등을 하

사 받았다. 무진년(戊辰年) 2월 왕사께서 본래 주석(住錫)하던 곳으로 돌아갈 것을 간청하였

다. (결락) 거(去) 대각국사(大覺國師)께서 (결락) 향로(香爐)와 불자(拂子) 일병(一柄)을 전

하고 궤신(餽贐)인 송별연(送別筵)을 베풀면서 이르기를, “옛날 입송구법(入宋求法)할 때 진

수법사(晉水法師)께서 향로와 불자를 나에게 전해 주었고, 이제 나는 이것을 자네에게 전수

(傳授)하니, 자네는 마땅히 힘써 정진(精進)하여 나의 도(道)를 발양(發揚)하라”고 당부하였

다. (결락) 백운(白雲)이 심광(深光)한 곳에 (결락) 나의 도(道)가 있는 줄 알 것이고, 불교를

부전(扶顚)하고 정법(正法)을 옹호하는 마음을 잊지 말라고 하였다.

 

임신년(壬申年) (결락) 왕사께서 화엄대경(華嚴大經)을 강설하여 엄부(嚴父)를 받드는 명복

(冥福)을 빌었다. 또 시게(詩偈)로써 증증해 이르기를, “불조(佛祖)의 삼승교문(三乘敎文)은

사(事)를 반연하는 것이니, 다만 마땅히 불법(佛法)을 전해주어 군맹(群盲)을 교화하라. 근

(近) (결락)” 숙왕(肅王)이 즉위하여 국정(國政)을 보면서, 수좌(首座)의 법계(法階)를 첨가

(添加)하고 마납(磨衲)과 음척(蔭脊)을 하사하였다. 계미세(癸未歲)에는 (결락) 의(衣)를 어수

(御手)로 친히 내려 주셨고, 갑신년(甲申年) 6월에는 승통(僧統)의 법계를 제가(制加)하였다.

예왕(睿王)이 동궁(東宮)에 있을 때, 마음을 화엄교(華嚴敎)에 두어 (결락) 비록 조차(造次)

와 수초(酬酢)하는 순간에도 일찍이 교법(敎法)을 선양하며 홍호(弘護)하지 않은 적이 없었

다. (결락) 법장(法匠). 무릇 국가적으로 수해(水害)와 한해(旱害) 등 천재지변(天災之變)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왕사를 청하여 국리민복(國利民福)을 비는 법요행사(法要行事)를 열었는

데, 왕사께서 스스로 와서 항상 화엄경(華嚴經)을 독송하였다. 어성기(於性起) (결락) 호국기

도를 한 데 대한 감응(感應)이 많아서 헛되지 않은 까닭에 왕이 내린 은례(恩禮)의 수도 매

우 많았다. (결락) 소득(所得) (결락) 경(經)·율(律)·론(論) 등 삼장(三藏)이 모두 5,450권이나

되는데, 이를 항상 스스로 강독(講讀)하고 또한 후학들에게 수업(受業)하라고 권장하였다.

신사세(辛巳歲)에 대각국사가 흥왕사(興王寺)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두고 속장경(續藏經)을

판각할 때 교정을 맡아 보았다. (결락) 대각국사가 왕에게 상언(上言)하되, “근고(近古) 이래

로 제종(諸宗)의 장소(章䟽)가 다분히 그 책이 일실(逸失)되었사오니, 청하옵건대 그 책들을

구입하여 (결락) 케 하여 주시옵소서”라 했다. 원경왕사 등 의학(義學)에 속하는 명승(名僧)

을 한 자리에 모아 서로 더불어 교정(校正)하고 각공(刻工)에 명하여 판각(板刻)함으로써 이

미 일실(逸失)된 경전이 다시 세상에 유행(流行)케 되었으니, 이는 오로지 왕사의 힘이 크게

작용한 것이라 하겠다. (결락) 사기등잡문(事記等雜文). 성지(聖旨)를 받들어 사(賜) (결락)

석원사림(釋苑詞林) (결락) 원종문류(圓宗文類)는 문인(門人)으로 수좌(首座)인 각순(覺純) 등

이 거듭 상정(詳定)을 더하여 부류별로 나누어 엮어 250권으로 하고 금년(今年 :

1101~1108 사이)에 끝을 맺었다.

 

무자세(戊子歲)에 이르러 이주(移住) (결락) 왈봉선(曰奉先) 왈담화(曰曇華) 왈불국(曰佛國)

왈안엄(曰安嚴) (결락) 왕사께서 항상 이르시기를, “가섭존자(迦葉尊者)도 일찍이 기원정사

를 창건할 때 몸소 진흙을 밟아 이겼으니, 하물며나와 같은 무리가 어찌 감히 스스로 편안

히 지낼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그러므로 가는 곳마다 남을 위해 사용되기를 좋아하였던

것이다. 갑오년(甲午年) 3월 예종(睿宗)이 봉은사(奉恩寺)에 행행(幸行)하여 배(拜) (결락) 임

금께서 왕사로 모시고자 하였으나, 스님은 간절히 사양하였다. 이(而) (결락) 그리하여 또

‘오공통혜(悟空通慧)’란 법호(法號)를 첨가(添加)하였다. 왕사의 법호가 최초에는 ‘자응구리

(慈應究理)’라고 받았는데, 그 후로부터 연오(演奧)·정관(正觀)·원응(圓應)·법인(法印) 등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첨가를 받았다. 그리고 이제 또 오공통혜(悟空通慧)라는 사자(四字)를 가

한 것은 모두 왕사의 덕행(悳行)을 나타낸 것이다. 식자(識者)들은 왈양(曰楊) (결락) 객우

(客尤) (결락) 예종(睿宗)께서 귀법사(歸法寺)로써 스님의 연식(燕息)할 장소로 삼고, 법수사

(法水寺)로써 왕사가 향화(香火)를 받들면서 기도하는 처소로 삼게 하였다.

병을 앓게 되어 왕이 어의(御醫)를 보내어 치료케 하였으나, 스님은 이르기를, “노인(老人)

의 병은 인간의 자연적인 상태이므로 번거롭게 다스릴 것이 없다”면서 수치(受治)를 거부하

였다. 3월 3일 (결락) 쌍석(雙舃)은 사가(私家)의 문턱을 밟지 아니하고, 육근(六根)은 욕계

(欲界)의 티끌에 얽매이지 않으니, 이것은 내 스스로 다짐한 바이지만, 자네들도 공지(共知)

할 사항이다. 국가에서 용렬하고 덕(德)이 없는 나를 왕사로 하여 과록(過錄)하면, 임금님의

체면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한(恨)스러운 바는 덕은 박하고 재주는 얕아서 (결락) 이(以)

(결락) 금자(今者) (결락) 임종의 유훈(遺訓)을 마치시고 곧 입멸(入滅)하였으니, 속수(俗壽)

는 70이요, 법하(法夏)는 62세였다. 임금께서 부음(訃音)을 들으시고 크게 진도(震悼)하여

시신(侍臣)을 보내 제문(祭文)을 지어 위로하고 많은 부의금과 장례물(葬禮物)을 보냈으며,

시호(諡號)를 원경(元景)이라 추증하였다. 그리고 (결락) 에게 명하여 장사(葬事)를 감호(監

護)케 하였다. 이달 6일 귀법사(歸法寺) 서쪽 산기슭에서 다비(茶毗)하였다. (결락) 도(道)

(결락) 원(院). 경자년(庚子年) 10월에 이르러 신좌(神座)를 합천관내(陜川管內) 야로현(冶爐

縣) 반야사(般若寺)로 옮겨 절의 동남쪽 산등성이에 안치하였으니, 이는 왕의 근본 교지(敎

旨)에 의한 것이다.

 

스님께서 젊었을 때, (결락) 운(雲) (결락) 이때 문인(門人)들이 이르기를, 범어(梵語)의 반야

(般若)는 당(唐)나라 말로는 지혜(智慧)로써 그 뜻이 하나이니, 어찌 우리 스님의 영가(靈駕)

를 이 절에 봉안(奉安)함이 아니겠는가? (결락) 응(應) (결락) 왕사는 효심(孝心)도 남달리

지극하였다. 어느해 봄에 풍수(風樹)의 근심으로써 어버이를 승사(僧舍)에 우거(寓居)케 하

였다. 그의 도제(徒弟)들이 이 소식을 듣고 이른 바 법이란 그 대지(大旨)가 유교의 계사(繫

辭)의 정신과 더불어 다름이 없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결락) 특(特). 명적(名迹)에 있을 뿐이어든, 하물며 지금 조정(朝廷)에서는 법도(法

度)를 숙정(肅正)히 하며, 명덕(明德)을 닦고 형벌(刑罰)을 감생(減省)하며, 옥살이 대신 부역

(負役)을 시키며 죄인을 구속하는 반면 세금을 부과하거나 군대에 보내어 복무케 하며, 병

란(兵亂)이 소멸(消滅)케 하는 등 인정을 베풀어 성은(聖恩)에 대한 칭송이 자자함은 오로지

왕사의 법력(法力)에 따른 것이다. (결락) 삼가 왕사의 홍렬(鴻烈)을 찬송(讚頌)으로 명(銘)

하여 이른다.

 

 

시간은 쉬지 않아 금고(今古)에 간단(間斷)없고

 

법이란 본래부터 안팎이 없는 걸세

 

중국의 제이조(第二祖)는 남산(南山)의 두순(杜順)이요

 

동국(東國)의 천태시조(天台始祖) 선봉(僊鳳)의 대각국사(大覺國師) ①

 

양국(兩國)의 두 스님은 시공(時空)이 격(隔)했건만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②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③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④

지난날 구법(求法)위해 서송(西宋)에 있을 적에

험난(險難)한 심사방도(尋師訪道) 제사(諸師)를 친견하고

오늘에 돌아와서 동국(東國)에 전법(傳法)하여

쇠퇴한 현사혜명(懸絲慧命) 튼튼히 부교(扶敎)했다. ⑤

화엄(華嚴)의 법계관(法界觀)을 더 높이 찬양(讚揚)하며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⑥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⑦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⑧

【陰記】

가야산(伽耶山) 반야사(般若寺) 원경왕사(元景王師)의 비명(碑銘) 음기는 아래와 같다.

 

수좌(首座)      각순(覺純)

삼중대사(三重大師)  염간(廉幹)

           담주(曇晝)

중대사(重大師)    현칙(玄則)

           승걸(僧傑)

           청윤(淸允)

           인창(仁昶)

           경유(景猷)

           준기(俊機)

           성융(性融)

           이연(理淵)

           선령(善齡)

           현각(玄覺)

           ▨혜(▨慧)

           석혜(釋慧)

           백자(伯資)

           담혜(潭慧)

           혁섭(赫涉)

           ▨▨(▨▨)

           담혜(曇慧)

           담경(曇景)

           원우(元羽)

           청관(淸觀)

           처겸(處謙)

           혜염(慧琰)

           제관(濟觀)

           진림(晋林)

           혜식(慧軾)

           혜조(慧稠)

           각웅(覺雄)

           효웅(孝雄)

           증관(證觀)

           선영(選英)

           자철(資哲)

           혜균(慧均)

           창▨(暢▨)

           연설(延說)

           지원(智圓)

           혜여(慧與)

           혜완(慧玩)

           덕엄(德嚴)

           학엄(學嚴)

           담일(曇一)

           담조(曇兆)

           초언(超彦)

           혜양(慧揚)

           현규(賢規) 등 스님은 원경왕사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임.

삼중대사(三重大師)  안언(安彦)

           ▨▨(▨▨)

           일태(一太)

           ▨▨(▨▨)

           ▨심(▨深)

           굉석(宏釋)

           묘열(妙悅)

           언칭(彦稱)

           준명(俊明)

           행소(幸紹)

           악령(鶚領)

           인석(仁釋)

           진성(珎性)

           진선(珎善)

           윤자(允資)

           교청(敎請)

           웅광(雄廣)

           상정(桑梃)

           웅성(雄成)

           행처(幸處)

           순지(順智)

           몽해(蒙晐)

           현▨(賢▨)

           혜감(慧鑒)

           행염(幸琰)

           계동(戒憧)

           계안(戒安)

           영린(領麟)

           석자(釋資)

           종식(宗式)

           신소(神素)

           관규(冠規) 등 스님은 원경왕사의 가풍(家風)을 선양(宣揚)한 제자들임.

중대사(重大師)   정선(正宣)

          각유(覺猷)

          학선(學屳)

          법▨(法▨)

          ▨사(▨巳)

          ▨훈(▨訓)

          오선(悟宣)

          순연(順緣)

          공준(恭俊) 

          혜실(惠實)

          덕고(德高)

          명오(明悟)

          도평(道平)

          현관(賢觀)

          서진(諝珎)

          덕용(德容)

          명략(明略)

          법웅(法雄)

          운엄(雲儼)

          연개(緣)

          승습(僧濕)

          성린(性麟)

          영감(英鑒)

          영재(領載)

          석치(釋置)

          혜▨(惠▨)

          혜초(惠初)

          남변(南弁)

          명신(明信)

          지승(志昇)

          혜장(惠長)

          기여(起如)

          상린(尙厸) 

          정근(正根) 등 스님은 항상 원경왕사를 따라 다니면서 동주(同住)

하거나 시봉(侍奉)하던 제자들임.

중대사(重大師)   모량(矛良)

          순선(順先)

          득선(得先)

          결승(潔昇)

          숭변(崇弁)

          미모(弥侔)

          도섬(徒暹)

          혜엄(慧嚴)

          혜금(慧金)

          이승(理承)

          경손(景孫)

          득문(得文)

          혜문(惠文)

          혜선(惠善)

          석린(碩厸) 

          성간(成幹)

          연신(緣信)

          의현(義賢)

          난방(蘭芳)

          이개(利)

          숭기(崇)

          순진(順珎)

          체영(遆英)

          홍일(弘一)

          홍묘(弘妙)

          홍법(弘法)

          보린(甫厸) 

          정기(梃機)

          법언(法彦)

          법총(法聰)

          법준(法俊)

          정관(貞觀)

          언소(言炤)

          청연(淸演)

          선경(先景)

          혜서(惠諝)

          담현(曇顯)

          진충(進沖)

          지평(智平)

          영묘(英妙)

          수여(守如)

          한▨(韓▨)

          ▨▨(▨▨)

          행선(幸先)

          상천(桑闡)

          혜직(惠直)

          영충(英冲)

          계등(戒等)

          지청(智淸)

          한량(韓亮)

          약연(若緣)

          영일(靈一)

          각주(覺周)

          혜숭(惠崇)

          선정(善精)

          점인(漸仁)

          범승(梵承)

          청준(淸濬)

          단명(旦明)

          학자(學孜)

          계건(繼建)

          이랑(而朗)

          지광(智光)

          승영(承瑩)

          지덕(知德)

          임대(林大)

          지연(智淵)

          지초(智超)

          지연(持演)

          연화(淵和)

          숙온(淑溫)

          낭융(朗融)

          현보(玄甫) 등 스님은 원경왕사의 회상(會上)에서 총림 운영에 따른 사

무(事務)와 외호(外護)등을 보았던 제자들임.

 

이상의 건(件)은 문도(門徒)의 직명(職名)과 개과(開科)이니 그 명단(名單)을 새겨 후세에 전

한다.

 

천경(天慶) 8년 무술(戊戌)에 시작하여 지금 11년만인 무신년(戊申年) 11월에 세우다.

대장(大匠) 김윤(金允)이 비문을 새기고

 

유림랑(儒林郞) 상서도관(尙書都官) 원외랑(員外郞)이며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은 신(臣)

이원부(李元符)가 왕명을 받들어 음기를 쓰다.

 

〔출전:『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3】(1996)〕

 

 

 

복흥사 경덕국사묘지명.hwp
2.07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