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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김 뿌리찾기/뿌리찾기

안산 향토사 (안산김씨 권력의 중심에 서다)

by 연송 김환수 2008. 1. 27.

안산 김씨, 권력의 중심에 서다
[안산 역사이야기] <6> 고려, 안산, 그리고 안산 김씨(安山金氏)

 

    때는 서기 1010년.
한반도 북방의 만주 벌판에 희뿌연 먼지가 끝없이 날리고 있다. 거란의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쳐들어 온 것이다. 소위 ‘강조의 정변’이라 불리는 고려 조정의 사건을 구실로 거란이 고려를 침략해 온 것이다.

 

  물론, 거란의 최종 목적은 고려 정벌이 아니다. 거란은 중국 본토의 송(宋)나라를 치기 전에 먼저 후방을 안정시키고 송과 고려의 연합을 사전 차단할 목적으로 고려를 치는 것이다.

여기에 맞서 고려는 강조가 나서 흥화진에서 잘 싸웠으나 결국 패배하고 만다.

 

그 후 개경이 함락되자 당시 국왕이었던 현종(1009∼1031)은 어쩔 수 없이 전라도 나주로 피난을 떠나게 되고, 몽진 도중 공주에 잠시 머무르게 된다. 현종은 고달프고 힘든 피난(避難)의  노정(路程)에서 당시 공주절도사(公州節度使)였던 김은부(金殷傅)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게 된다.

김은부(金殷傅).

전란의 와중에 국운과 가문의 이 놀랍고도 극적인 반전을 일구어낸 그는 과연 누구인가?

조선 초기 1530년에 발행된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안산군조에 보면 안산을 본군(本郡)으로 삼는 성씨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 하나인 안산 김씨가  바로 김은부의 집안이다.
안산 김씨의 시조는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은열(金殷說)의 후손인 김긍필(金肯弼)로 알려져 있다.

 

김긍필이 1024년(현종 15년) 식읍(食邑)을 하사받고 그의 후손들이 안산에 세거(世居)하면서 안산을 관향(貫鄕)으로 삼게 된 것이다. 안산 김씨가 고려 초기 문벌의 반열에 오른 것은 김긍필의 아들, 바로 김은부(金殷傅) 때이다.


나주로 피난길에 오른 현종을 바로 이 김은부가 지극 정성으로 대접하여 임금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심지어는 그의 큰 딸에게 어의(御衣)까지 지어 바치게 한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나중에 그 딸이 왕비(王妃)가 되니, 그녀가 바로 원성왕후이다. 그녀는 훗날 덕종(제9대)과 정종(제10대)을 낳게 된다. 또한 그의 두 딸들 역시 현종의 비(妃가) 되어 원혜왕후, 원평왕후가 된다. 그리고 원혜왕후는 문종(제11대)을 낳게 된다.

 

 

뿐만아니라 그의 큰 아들인 김충찬(金忠贊) 역시 현종 때 전중시어사(殿中侍御使, 어사대의 정6품 벼슬)가 되고, 덕종 때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중추원의 종2품 벼슬), 정종 1년(1035년)에는 병부상서(兵部尙書, 오늘날의 국방부장관)를 지내는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둘째 아들 김난원(金欄圓)은 출가(出家)하여 문종 때 개경의 영통사에 있었으며 화엄종 도승통(都僧統)이 되었다. 훗날 문종은 왕명으로 넷째 왕자 후(煦, 대각국사 의천)를 출가시켜 승려가 되게 하는데, 김난원이 바로 그 왕자의 스승이 되어 화엄교관을 가르친다. 그리하여 후에 김난원은 ‘경덕국사(景德國師)’라는 시호를 받게 된다


이렇게 하여 김은부는 국구(國舅, 왕의 장인)가 되고 외손자들이 왕이 되니 가히 당대 최고의 집안이라 할 수 있겠다. 이로써 안산 김씨는 고려 현종에서 문종대에 이르는 장장 4대 50여 년의 세월을 권력의 중심부에 있게 된다.
안산 김씨 가문의 흥성을 통해 우리는 이곳 안산이라는 공간과 고려 초라는 시대가 씨줄과 날줄로 만나는 역사의 궤적을 그려볼 수 있는 것이다

 
 
신대광 (안산향토사연구소 연구위원)  최종편집 : 2008-01-25 11:3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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