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고부 이씨(古阜李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고부 이씨(古阜李氏)의 연원

고부 이씨(古阜李氏)의 시조(始祖) 이경조(李敬祖)는 고려 문종(文宗) 때 최충(崔沖)이 설립한 사학(私學)의 효시인 구재학당(九齋學堂) 출신으로 문종 18년(1064년) 문과에 급제한 후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올랐다. 그는 문종 25년(1071년) 김제(金悌)와 함께 서장관(書狀官)으로 송(宋)나라에 다녀왔으며, 문종(文宗)에서 숙종조(肅宗朝)에 이르기까지 5대(代)를 섬긴 공으로 추충보정공신(推忠輔靖功臣)에 녹훈(錄勳)되어 여산군(礖山君ㆍ여산은 익산의 속면)에 봉해지고 벼슬이 검교첨의정승(檢校僉議政丞)에 이르렀다.

이에 후손들은 그의 전세거지(前世居地)인 고부(古阜)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며, 1928년 ‘무진보(戊辰譜)’를 작성할 때 고부의 옛 이름인 영주(瀛州)를 관향으로 삼아 영주 이씨(瀛州李氏)로 한 적이 있었으나 1968년 무신보에서는 다시 고부 이씨로 통일하였다.

▲ 전북 부안군 줄포면 난산리에 자리한 시조 여산군(礖山君) 이경조(李敬祖)의 제단(祭壇)과 전북 정읍시 소성면 주천리에 자리한 신도비.??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경조(敬祖)의 손자인 양빈(陽賓)이 고려 예종 2년(1106년) 서북병마사(西北兵馬使)로서 윤관(尹瓘)과 함께 여진족(女眞族)을 토벌하여 함주(咸州) 등 6성(城,)을 수복했으며, 그의 동생 양승(陽升)은 명종(明宗) 2년(1172년) 상장군(上將軍)으로서 연주(延州)에 침입한 거란병(契丹兵)을 격파하고 위주성(渭州城)에서 순절한 충신이다.


대장군(大將軍ㆍ무관의 종3품 벼슬) 의(儀)는 경조(敬祖)의 5세손이며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시경(時卿)의 아들로 고려 강종(康宗) 때 도병마사(都兵馬使)로 왕의 특사가 되어 금(金)나라의 위소왕(衛紹王)을 설복시켰으며, 그후 대장군(大將軍)에 이르렀다.

그밖에 담(湛)은 고려 충정왕(忠定王)의 잘못을 직간(直諫)하고 폐신(嬖臣) 주주(朱柱)와 배전(裵佺)을 축출하여 왕의 위신을 회복하는데 힘썼고 사관(史官)을 역임하였으며, 사헌규정(司憲糾正)을 거쳐 감찰대부(監察大夫)를 겸한 연종(衍宗)은 공민왕(恭愍王) 때 왕의 변발(?髮)ㆍ호복(胡服)을 직간(直諫)하여 왕의 위신을 바로 잡아주었으며 관직은 감찰대부(監察大夫)를 역임하였고, 광(鑛)은 고려 때 김진양(金震陽)과 함께 정도전(鄭道傳) 등을 탄핵하고 이성계(李成桂)의 건국을 반대하다 유배된 후 살해되었다.

조선조에서는 향즙(享楫)이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고, 집의(執義)를 역임한 백첨(伯瞻)은 세조(世祖)의 단종(端宗) 폐위를 반대하여 좌리공신(佐理功臣) 녹권(錄券)을 받지 않았다.
??
▲ 익재(益齋) 이희맹(李希孟)을 비롯해 김제민(金齊閔)ㆍ최안(崔安)ㆍ김지수(金地粹) 등을 기리고 있는 도계서원(道溪書院)과 정부인(貞夫人) 광양 서씨(光陽徐氏)와 함께 안장된 이희맹(李希孟)의 묘.

조선 초기의 문신인 희맹(希孟ㆍ1475~1516)은 자는 백순(白淳), 호는 익재(益齋)로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사림파의 한 사람이다. 성균관 학생으로 있을 때부터 문장과 인품으로 명망을 얻었으며, 성종 23년(1492년)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이듬해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에 임명되어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을 겸직하면서 양민들의 군역이 과중함을 논하고 그 시정을 건의하였다. 1494년 연산군이 즉위한 뒤 한직에 밀려나 조정을 떠났다가 중종반정 후 다시 등용되어 중종 3년(1508년) 사헌부 장령ㆍ사간원 사간으로 재직하면서 훈구파 대신과 공신들의 사치와 횡포를 비판하였다. 1510년 형조참의ㆍ좌부승지를 거쳐 관찰사로 나갔고, 1512년 도승지, 이듬해 성균관 대사성ㆍ이조참의 등을 지냈다. 중종11년(1516년) 도승지(都承旨)가 되어 변무사(辨誣使)로 명(明)나라에 가서 황제(皇帝) 무종(武宗)을 설복하여 외교 활동에도 능함을 보였으며, 그후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이르렀다. 시호(諡號)는 문안(文安).

▲ 고부 이씨(古阜李氏) 제주 입도조가 된 이세번(李世藩)의 묘.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정광필(鄭光弼)과 함께 조광조의 무죄를 상소하다가 체포되어 국문 끝에 제주(濟州)에 유배된 세번(世藩)은 풍랑 때문에 신도포구로 들어오면서 대정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학자였으므로 유배오면서 경서 등 많은 책을 가지고 와서 독서와 한학으로 울적한 마음을 달랬으며, 지방 자제들에게 학문과 예절을 가르치다 유배온 지 7년만인 중종 21년(1526년) 적소(謫所)에서 44세로 병사했다. 15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태학(太學) 유생으로 수학중이었지만 부친을 돌보기 위해 같이 따라왔던 아들 충현은 부친의 유언에 따라 고산리에 안장하니 지방민들이 줄을 이었다.

한편 그의 부인 월성 석씨는 남편이 유배된 뒤로는 잠을 잘 때 이불을 덮지 않았고, 추워도 속옷을 입지 않았으며, 사람을 시켜 안부를 묻게 하고 밤마다 사면되어 돌아오기를 기원하였다. 남편이 병사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적소로 내려왔으며, 남편을 애도하던 그녀는 결국 깊은 병을 얻어 죽고 말았다. 두 아들은 모친을 장사지내고 이곳에 정착함으로써 결국 세번(世藩)은 고부 이씨(古阜李氏) 제주 입도조가 된다.

인종대에 들어 세번(世藩)은 조광조(趙光祖)ㆍ김정(金淨) 등과 함께 복권되고 특히 사마시에 합격하여 태학 유생으로 수학중이던 아들 충현이 제주 교수로 천거되었고, 후손들은 대대로 대정향교(大靜鄕校)의 훈도(訓導)를 역임하였다. ‘이재수의 난’의 이재수(李在守ㆍ1877∼1901)도 세번(世藩)의 12대 후손이며, 김달삼이라는 이름으로 제주 4,3의 좌익계 거물로 활동했던 이승진도 그의 후손이다.

▲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으로 살신(殺身)으로 효행을 실천하여 만인의 우러름을 받은 석호(石湖) 이승간(李承幹)의 묘.

클릭하시면 큰 계보도를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