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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릉(원성왕릉) 둘러보기

by 연송 김환수 2013. 5. 25.

괘릉(掛陵) : 원성왕릉(元聖王陵)

 

 

 

원성왕릉(元聖王陵)은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있는 괘릉(掛陵)으로, 경주 시내에서 울산 방면으로 약 12km 떨어진 거리에 있다.

 

원래 이곳은 숭복사의 전신인 곡사(鵠寺)가 있었던 절터에 조성한 능으로《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라 신라 38대 원성왕(元聖王)의 능으로 추정하고 있다. {王之陵在吐含岳西洞鵠寺(今崇福寺)有崔致遠撰碑}

 

왕릉을 조성할 때 유해를 원래 이곳에 있던 연못의 수면 위에 걸어(관을 돌 위에 걸어 두었다가 여기에 흙을 쌓아 능을 만듬)안장하였다고 하여 괘릉(掛陵)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능의 형태는 원형의 봉토분으로, 아랫부분에는 호석(護石)을 두르고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새겨 장식했고 그 주위로 돌난간이 에워싸고 있다. 외형상 원형토분(圓形土墳)으로 규모는 지름 21.9m, 높이 7.7m이다.

 

봉분 아래에는 봉토(封土)를 보호하기 위한 호석(護石)이 설치되어 있다. 호석은 목조건축의 석조기단(石造基壇)과 같이 지대석(地臺石) 위에 높이 95㎝, 길이 120㎝ 크기의 판석(板石)으로 된 면석(面石)을 놓고 그 위에 갑석(甲石)을 올렸다.

 

봉분의 바로 앞에는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 사각형 석상(石床)이 놓여 있다. 봉분의 중심에서 남쪽으로 약 80m 떨어진 위치로부터 시작하여 동서로 약 25m 사이를 두고 북쪽으로부터 돌사자 두 쌍, 문인석(文人石) 한 쌍, 무인석(武人石) 한 쌍과 화표석(華表石) 한 쌍이 얼굴을 마주 대하고 차례로 늘어서 있으며 무인석은 서역인(西域人)의 얼굴 모습이어서 눈길을 끈다.

 

이 무덤은 당나라의 능묘제도를 본받았으나 둘레돌·십이지신상·난간·석물 등 모든 면에서 신라 능묘 중 가장 완비된 형식을 갖추고 있다.

 

조각 수법은 신라 왕릉 가운데서 가장 우수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괘릉 입구에 있는 석상과 석주들이 조각수법이 매우 우수한 것으로 평가되어 보물 제1427호로 지정되어 있다.

 

'괘릉' 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덤의 구덩이를 팔 때 물이 괴어 널[棺관]을 걸어[掛괘] 묻었다는 전설에 따른 것이다.

 

이 괘릉은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능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삼국사기』에서는 원성왕이 재위 14년에 죽으니 유해를 봉덕사(奉德寺) 남쪽에서 화장했다고 하였다.

 

『삼국유사』에는 원성왕릉이 토함산 동곡사(洞鵠寺)에 있으며, 동곡사는 당시의 숭복사(崇福寺)라 하고 최치원(崔致遠)이 비문을 쓴 비석이 있다고 하였다. 지금 괘릉에 비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인근에 숭복사 터가 있어 괘릉이 원성왕의 능이라는 견해를 뒷받침하고 있다.

 

 

 

 

 

 

 

 

 

 

 

 

 

 

 

 

원성왕릉에는 최초로 8각 기둥 모양의 화표석(華表石)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이것이 망두석의 시초였다.

 

화표석이 팔각으로 만들어진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팔정도(八正道)를 상징하는 것이며 동시에 능역(陵域)을 표시하는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흥덕왕 이후에는 화표석을 세울 능력마저 잃었기 때문에 세우지 못했다.

 

 

 

 

괘릉의 입구에 처음 나타나는 석조물은 바로 화표석이다. 화사석은 고려 왕건릉에서도 등장하는데 민간 묘에서도 받아들여 망주석으로 정착하게 된다. 신라 능묘에는 이곳 괘릉과 흥덕왕릉에만 남아있다.

 

 

원성왕릉 우측에 있는 석조물은 앞에서부터 화표석, 무인석, 문인석, 서쪽을 지키는 사자, 북쪽(왕릉)을 지키는 사자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

 

괘릉의 화사석은 윗부분에 볼록하게 조각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그 위에 다른 조각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화표석의 기원은 인도의 아소카왕 석주에서 찾을 수 있다. 그 후 중국 남조의 황제릉에 2개의 화표석을 세웠다

.

 

본래 화표석 위에는 동물이 배치되어 있었다. 화표석은 무덤의 경계 역할을 한다.

 

원성왕릉 좌측에 있는 석조물은 앞에서부터 화표석, 무인석, 문인석, 남쪽을 지키는 사자동쪽을 지키는 사자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

 

 

 

 

 

 

 

 

 

 

 

 

 

 

 

 

화표석 안쪽에는 이국적인 호인상이 서 있는데 몽둥이를 들고 평복을 입고 머리에는 터번을 두르고 있는데 지금까지는 중국에 와 있던 서역의 무역상으로 보아왔다. 그런데 80년 이후 권영필교수는 위그르인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정수일(무하마드 깐수) 교수는 신라,서역 교류사에서 아랍인이라고 주장하였으며, 경주박물관의 민병훈 학예관은 중앙아시아를 거점으로 하여 중국 장안에서 무역을 독점하던 소그드인(Soghd)이라고 주장하는 등 민족 이름까지 거명되고 있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처용에 대하여서도 울산 호족의 자제라는 설과 아랍 무역상인이라는 설이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아랍과 신라가 직거래로 무역을 하였으며 그때 교류한 물품의 목록이 나와 있어 무역선이 난파당하여 살아남은 아랍상인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어쨌든 이 호인상은 무역에 종사하던 사람이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호인상이 아랍인, 또는 서역인, 소그드인 등으로 불리는 것은 신라의 국제적 위상에 대한 연관성이 있으며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가 안록산의 난을 평정한 후에 궁궐에 서역인을 두고 신변을 지키게 하였으니 이때부터 무덤 속에 명기를 넣는 풍습이 등장하였다.

 

이는 명기가 바로 왕실을 지켜준다는 의미를 지녔다고 한다. 호인상의 허리춤에는 복주머니가 달려있는데 이는 서역인들이 왕실에 들어와 경제관료로 활동하였으니 바로 산낭(주산)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명기란 신명(神明)의 기(器)라는 뜻으로 중국에서는 고대부터 죽은 후의 세계에서 사용할 생활용구를 사자(死者)와 함께 분묘에 넣어 매장하는 풍습이 있었다.
무덤 속에 넣기 때문에 주로 흙을 구워 만들었는데, 죽은 자가 생전에 사용한 기구·인물·동물 등을 모조한 것들이다. 명기를 껴묻는 풍습은 한국에도 전래되어,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만들어 졌다.

 

 

 

 

 

무인상을 살펴 보면 양쪽 무인상 모두 오른편 옆구리 조금 뒷쪽에 조그만 주머니를 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을 생긴 모습 그대로 돈 주머니 또는 복 주머니라고 말했다.

 

문화재 해설사들의 일반적인 설명은

 

"이 석상 뒷모습의 중심부에 직경이 10정도인 주머니가 달려 있다. 이것은 우리 나라의 복주머니라고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원래 산낭(算囊)이라 불리는 것으로, 중국의 당나라 때 장안성에 살면서 주판과 같이 계산하는 기계를 이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괘릉 석인상의 주머니는 산낭인가?  반낭인가산대인가?

 
산낭(算囊)에 대해서
 
 
 이진락 시의원님의 글 발췌  본론 -신라고분 문화유산 해설에 대한 새로운 시도
() 원성왕릉 석상(일명 무인상)산낭(算囊)’에 대한 새로운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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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왕릉의 소위 종래 산랑으로 불리우는 주머니는 중국 한나라때부터 이용되었고 당나라때 많이 사용된 반낭(鞶囊 /신당서와 구당서에 나옴)’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닌가 생각한다.
 
중국 한나라때 관원들은 대개 허리춤의 반낭(鞶囊) 안에 도장(인장)을 넣고 거기에 달린 인끈은 밖에 드리우고 다녔는데, 관품의 차이에 따라 인끈의 색깔과 직조법을 달리했다.
 
한대의 관복제도는 후대 대대로 인습이 되어 조복의 중요한 형식으로서 명대 말기까지 이어졌다.
 
상기한 반낭(鞶囊)은 큰 띠에 다는 가죽주머니이며, 북위시대 이후에 수장식을 다르게 해서 품계를 나타냈다고 한다.
 
한대의 관복의 주요특징은 첫째, 신분에 따라 다른 관을 썼다고 한다. 예를들면 문관은 진현관을 무관은 할관을 쓰고 어사는 해치관을 쓰도록 규정했다고 한다.
둘째, 관의 양(횡적)의 수에 차등을 두었다. 셋째, (), 즉 인끈에도 차이가 있었다.
 
반낭(鞶囊)에는 품계에 따라 옥, , , 오색비단으로 장식하여 신분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반낭(鞶囊)’은 때론 방낭(傍囊)’ 혹은 수낭(绶囊)’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괘릉(원성왕릉) 석상의 허리춤에 있는 반낭(鞶囊)과 거의 비슷한 형태는 중국 당태종릉인 소릉의 14번신상 중 하나에 나오기도 하고, 당고종과 측천무후가 안치된 건릉의 61번신상에도 목격할 수가 있다.
 
그리고 중국 당나라의 고분에서 발견된 많은 석상과 벽화에는 반낭(鞶囊)이 많이 나오는데 원성왕릉의 것처럼 허리춤에 바싹 붙어있는 원형의 모습과 경주 안강의 전 흥덕왕릉 석상에 있는 반낭(鞶囊)처럼 허리띠에서 조금 길게 인끈을 늘어뜨리고 형태는 반달형태 아니면 긴 타원형에 윗부분이 수평으로 잘린 모양의 것으로 나뉘어 지기도 한다.
 
그리고 당나라 고분벽화에는 반낭(鞶囊)’으로 보기에는 좀 어색하고 쉽게 말하면 긴 끈에 매달린 돈주머니 같은 주머니도 많이 보이는데, 중국의 사서를 찾아보면 5품이상의 문관들에게 산대(算袋:돈주머니 혹은 계산주머니)’를 지급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아마 이 산대(算袋)’가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산낭(算囊)’과 비슷한 의미가 아닌가 생각한다. ‘()’()’은 같은 의미 일것이다.
 
따라서 도장(인장)등을 넣는 반낭(鞶囊)’ 이나 돈이나 계산기구(혹여 주판)을 넣는 산대(算袋)’라고 부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중국의 역사고고학적 자료분석을 통해서 현대식 주판이 중국에서 사용된 증거로 가장 오래된 것은 북송시대 화가 장택단(1085-1145)이 그린 청명상하도에 나오는 산반(算盘))’이다. 물론 문헌상 주산에 대한 최최초의 기록은 3세기경에 쓰여진 数术记遗란 책에 나오는 珠算控带四时经纬三才이란 구절이다.
 
현대식 주판이 발명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500여년전인 중국 명나라때부터이고 그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주판이 만들어졌다.
 
최근에 중국에서 발표되는 많은 고고학논문에는 대부분 반낭(鞶囊)’이라고 기재되므로 우리도 원성왕릉의 석인상 허리춤에 주머니를 반낭(鞶囊)’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당나라 석조각에 반낭(鞶囊)’과 비슷하면서 직사각형 형태의 주머니는 거의 대부분 어부(魚符)’를 넣는 어대(魚袋)’로 부른다. 어대는 당나라때 5품이상의 관리들이 어부를 넣어차던 주머니인데, 송대에는 장식으로만 쓰여졌다고 한다.
 
어부는 징발.발병.주부장관 교체등의 신표로, 혹은 귀천을 구별하고 소명에 응할 때의 표로 내어주는 부신이다. 전한시대에는 부신을 정사각형 천에 직책이름 뒤에 부신이라고 쓴 것을 가지고 다녔다.

 

 

 

 

 

 

 

호인상의 안쪽에는 문인석이 서 있는데 앞에는 평복을 입고 뒤에는 양당개란 갑옷을 입고 칼을 지니고 있어 앞면은 문인 뒷면은 무인을 나타내고 있다.

 

즉 문무인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문무인상의 관에는 용감무상한 곤충으로 유명한 벌이 그려져 있다. 중국에서는 장군의 관직명 앞에 벌 봉()자를 섰다고 한다.

 

문무인석은 구렛나루가 더부룩하고 카이젤 수염을 한 모습인데 이로 미루어 용병으로 유명한 위구르인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문무인석 안쪽으로 좌우에 두기씩 모두 4기의 석사자가 머리의 방향을 동서남북을 향하고 서 있다.

 

일부에서는 성덕왕릉에는 석사자 안에 문무인석이 있다는 점을 들어 원래는 능 주위에 있었던 것을 옮겨놓았다는 주장이 있지만 봉분 주변에는 석사자를 배치할 만한 공간이 없어 원래 자리가 맞는 것으로 보인다.

 

사자 역시 그 기원은 인도였다. 중국 황제릉에서 이를 받아들였고 역시 신라도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성덕왕릉에 있던 삼각형 받침돌은 이곳에서는 사라지고 없다.

 

이는 호석을 쌓는 기술이 발전하였음을 의미한다. 또한 십이지신상도 부조로 조각하였으며 성덕왕릉에서는 모두가 정면상이지만 이곳에서는 동서남북 면의 상만이 정면 상이고 나머지 상은 모두 정면상을 바라보는 모습이다.

 

 

 

 

 

 

호인상의 안쪽에는 문인석이 서 있는데 앞에는 평복을 입고 뒤에는 양당개란 갑옷을 입고 칼을 지니고 있어 앞면은 문인 뒷면은 무인을 나타내고 있다. 즉 문무인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

 

문무인상의 관에는 용감무상한 곤충으로 유명한 벌이 그려져 있다. 중국에서는 장군의 관직명 앞에 벌 봉()자를 섰다고 한다. 문무인석은 구렛나루가 더부룩하고 카이젤 수염을 한 모습인데 이로 미루어 용병으로 유명한 위구르인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호석(護石)에는 십이지신상이 돋을 새김되어 있고 능 주위에는 돌난간이 에워싸고 있다.

 

 

안상이 조각되어 있는 혼이 머무는 자리라고 하는 혼유석

 

*** 안상이란 예전 건축물의 단청작업에 용, 봉황, , 신수, 화조등의 눈 모양을 그려 넣었고 석탑에도 안상을 조각 했습니다.

 

오른쪽에 비석을 세웠던 받침대만 있는 것은 경주김씨들이 착각하여 세웠던 문무왕릉 비석을 뽑아낸 자리입니다. (일제시대까지 괘릉은 문무왕릉으로 전해왔음)

 

 

 
경상도 지리지, 경상도 속찬 지리지, 세종장헌대왕실록 지리지 등의 서적들은 국가에서 펴낸 국가적인 사업이었는데 국가적인 사업에서 괘릉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은 당시에 몰랐다는 것을 의미하며 당시 경주 김씨들은 왕릉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후 1730년 왕릉을 세로 정하면서 『삼국사기』에와 『삼국유사』의 두 기록 가운데, 삼국사기의 기록에만 근거하고 삼국유사의 기록은 완전히 무시한 채, 왕릉이 매우 화려하며, 화장한 문무왕의 능이 물과 관련이 있다는 점만을 부각시켜 이곳을 문무왕릉으로 비정하고 비석까지 세웠다.
 
비록 문무왕릉이 동해에 있지만 최소한 허릉(虛陵)으로 만들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경주 김씨들은 이곳에서 문무왕에 대한 제사를 지냈고, 경주 김씨 이외에는 대왕암에서 제사를 지내는 촌극(寸劇)이 일어났던 것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조선왕조의 폐불 정책에 따라 삼국유사의 기록은 철저히 무시당했고 삼국유사의 기록에 있는 원성왕릉을 찾으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일제시대까지도 괘릉은 문무왕릉으로 전해져 오다가 1930년대에 입실소학교에서 말방리 절터로 소풍을 갔다가 탑 사이에서 비편을 수습하였다.
 
당시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에 보관되어있던 '조선금석총람'과 자세히 대조하면서 말방리 절터는 바로 숭복사터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또한 금석문에는 괘릉이 관한 이야기가 자세히 기록되어 잇어 괘릉이 원성왕릉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경주 김씨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버텨오다가 1968년 5월 신라삼산오악조사단에 의해 대왕암이 문무왕릉으로 밝혀졌고 이것이 한국일보에 대서특필됨으로서 경주 김씨들도 백기를 들고 괘릉에 세워졌던 문무왕릉비를 뽑아냈다. 이처럼 시대마다 문중의 이해관계에 따라 왕릉이 뒤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十四年, 冬十二月二十九日, 王薨. 諡曰<元聖>, 以遺命擧柩燒於<奉德寺>南
 
14년 겨울 12월 29일,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원성이라 하고, 유언에 따라 관을 봉덕사 남쪽에 옮겨 화장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원성왕전>
 
○陵在鵠寺 今崇福寺 有也崔致遠所立碑.
 
능은 곡사에 있는데 지금의 숭복사이며 최치원이 찬한 비석이 있다.  <삼국유사 왕력>
 
○王之陵在吐含岳西洞鵠寺(今崇福寺)有崔致遠撰碑
 
왕의 능은 토함산 서쪽 골짜기 곡사(지금의 숭복사)에 있는데 최치원의 지은 비가 있다.  <삼국유사 원성대왕조>
 

 

 

 

 

 

 

 

 

 

 

 

 

 

 

 

 

 

 

 

 

 

 

 

 

 

 

 

 

 

 

 

 

 

 

 

 

 

 

 

 

 

 

 

 

 

 

 

 

 

 

 

 

 

 

 

 

 

 

 

 

 

 

 

 

 

우리집 강아지도 놀러 다니는 것을 너무 좋아해서 입구까지 같이 갔습니다.ㅎ

 

 

 

 

 

 

 

 

 

 

 

 

 

 

 

 

 

 

 

 

 

 

 

 

 

 

 

 

 

 

 
원성왕(元聖王) 
?∼798(원성왕 14). 신라 제38대 왕.
 
재위 785∼798. 성은 김(金), 이름은 경신(敬信, 敬愼, 敬則). 내물왕의 12세손으로 아버지 효양(孝讓)은 명덕대왕(明德大王), 할아버지 위문(魏文 또는 訓入)은 흥평대왕(興平大王), 증조할아버지 의관(義寬, 義官)은 신영대왕(神英大王), 고조할아버지 법선(法宣)은 현성대왕(玄聖大王)으로 추존되었다. 어머니는 계오부인(繼烏夫人 또는 知烏夫人) 박씨이며 소문태후(昭文太后)로 추봉되었고, 비(妃)는 숙정부인 김씨(淑貞夫人 金氏)로 각간 신술(神述)의 딸이다.
 
활동사항왕위에 오르기 전인 780년(혜공왕 16), 뒷날 선덕왕이 된 양상(良相)과 더불어 지정(志貞)의 난을 진압하였다. 이 때 혜공왕을 살해하고 양상이 왕위에 오르는데 기여하였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그는 양상과 밀착된 인물로서 경덕왕 이래 왕실의 전제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혜공왕 말기의 혼란을 평정한 공으로 780년(선덕왕 1)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그 뒤, 선덕왕이 자식이 없이 죽자 태종무열왕의 6세손인 김주원(金周元)과의 왕위다툼에서 승리하여 즉위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김주원과의 왕위계승다툼에 대한 설화를 전하고 있다. 당시 김주원은 김경신보다 왕위계승 서열이 높았다. 김경신은 복두(幞頭)를 벗고 소립(素笠)을 쓰고 12현금(絃琴)을 들고 천관사(天官寺) 우물로 들어가는 꿈을 꾸자, 여삼(餘三)의 해몽을 듣고 비밀리에 북천(北川)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마침 선덕왕이 죽자 비가 와서 알천(閼川)이 불어 김주원이 건너오지 못했으므로 신하들이 경신을 추대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뒷날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金憲昌)이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킨 것을 보더라도 양자 사이에 왕위계승다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785년(원성왕 1) 원성왕은 총관(摠管)을 도독(都督)으로 바꾸었으며, 788년에는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설치하였다. 독서삼품과는 유교경전에 능통한 사람을 3품으로 나누어 실력에 따라 관리로 등용한 것으로, 이러한 개혁은 국학(國學)을 설치한 지 이미 1세기가 지난 당시 신라사회에 있어서 무예를 중심으로 한 종래의 관리등용법의 개혁이 요청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원성왕대는 하대(下代) 권력구조의 특징을 이루는 왕실친족집단원에 의한 권력장악의 전형(典型)이 확립되기 시작하였다. 즉, 원성왕은 즉위와 동시에 왕자 인겸(仁謙)을 태자로 책봉하여 다음의 왕위계승권자로 확정하였다. 그러나 791년 1월 인겸태자가 죽자, 그 이듬해 8월에는 왕자 의영(義英)을 다시 태자로 책봉하였다.
 
다시 793년 2월 의영태자가 죽자, 왕손(인겸태자의 맏아들)인 준옹(俊邕 : 뒤의 소성왕)을 이듬해 1월 태자로 책봉하였다. 태자로 책봉된 준옹뿐만 아니라 그의 동생인 언승(彦昇 : 뒤의 헌덕왕)도 정치의 중심부에서 활약하였는데,
 
이처럼 왕과 태자를 정점으로 한 극히 좁은 범위의 근친왕족들이 상대등·병부령·재상 등의 요직을 독점하고자 하였다. 하대는 이들 근친왕족들에 의하여 왕위가 이어져 원성왕계로 특징지어진다.
 
786년에는 대사(大舍) 무오(武烏)가 병법 15권과 화령도(花鈴圖) 2권을 바쳤으며, 왕 자신도 <신공사뇌가 身空詞腦歌>를 지었다. 그것은 인생 궁원(窮遠)의 변화에 대한 이치를 담은 것이라 한다. 이 책들은 모두 전하지 않는다.
 
791년에 제공(悌恭)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제공은 785년에 시중(侍中)이 된 인물로 그가 일으킨 반란의 성격은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같은 해에 인겸태자가 죽으니 시호를 혜충(惠忠)이라 하였다. 그리고 제공의 반란이 진압되자 다시 혜충태자의 아들 준옹이 시중이 되었다. 원성왕은 불교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785년에 승관(僧官)을 두어 정법전(政法典)이라 하고, 795년에는 봉은사(奉恩寺 또는 報恩寺)를 창건하였으며, 망덕루(望德樓)를 세웠다.
 
처음에는 화엄종(華嚴宗) 승려인 묘정(妙正)을 편애하여 내전(內殿)에 맞아들여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그 뒤, 묘정은 왕의 신임을 잃은 듯하다. 사신을 따라 중국에 갔을 때 자라한테서 얻은 구슬을 당나라 황제에게 빼앗기고 난 뒤부터, 묘정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잃게 되었다는 설화가 이를 알려준다.
 
왕의 치적으로 790년 벽골제(碧骨堤)의 증축과 발해와의 통교를 들 수 있다. 또한 그는 상당한 독자외교를 펴고 있었다. 이는 795년에 당나라의 사신이 하서국(河西國) 사람 둘을 데리고 와 신라의 호국룡(護國龍)을 물고기로 변하게 하여 잡아가려는 것을 막았다는 설화에서 알 수 있다.
 
798년 12월 29일에 죽으니, 유명(遺命)으로 봉덕사(奉德寺) 남쪽 토함악(吐含岳) 서쪽동굴에 화장하였고, 능을 추복(追福)하기 위한 숭복사(崇福寺)가 세워졌다. 아들은 태자로 책봉되었던 인겸과 의영과 예영(禮英)이 있었고, 두 딸로 대룡부인(大龍夫人)·소룡부인(小龍夫人)이 있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당서(唐書)』
『朝鮮金石總覽 상(朝鮮金石總覽 上)』
「신라원성왕계(元聖王系)의 왕위계승」(오성, 『전해종박사화갑기념논총』, 1979)
「신라하대의 왕위계승과 정치과정」(이기동, 『신라골품제사회와 화랑도』, 한국연구원,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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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신라문화원의 괘릉 자료를 살펴보자 http://www.silla.or.kr/
 
 
괘릉 (掛陵)
 
경주에서 울산 가는 국도를 따라 가다가 불국사로 가는 갈림길을 지나 조금더 가면 국도변의 왼쪽 낮은 구릉에 괘릉이 위치하고 있다.
 
괘릉이란 뜻은 능을 걸다라는 의미인데 이곳에 왕릉이 조성되기 이전에 작은 연못이 있어서 그 곳을 메우고 능을 마련했는데 능 내부인 현실에 물이 고이기 때문에 바닥에 관을 놓지 못하고 허공에 걸어 놓았다 하는데서 유래되었다.
 
괘릉의 외형은 원형 봉토분이고 높이는 6m 지름은 23m이다. 봉분 아래에는 봉토를 보호하기 위한 호석이 설치되어 있다. 호석은 목조 건축의 석조 기단과 같이 지대석 위에 높이 95cm, 길이 120cm 크기의 판석으로 된 면석을 놓고 그 위에 갑석을 올렸다.
 
각 면석 사이에는 봉분 내부로 뿌리가 길게 뻗어 면석과 봉토가 붕괴되지 않도록 지탱해 주는 탱석을 배치하였는데, 탱석의 전면은 면석보다 약간 앞으로 내밀어져 있다.
 
탱석에는 두 칸 건너 하나씩 무복을 입고 무기를 잡고 있는 12지신상을 조각하였으며 조각 수법은 신라 12지신상 가운데 우수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왕릉의 둘레에는 부채꼴의 판석을 깐 회랑이 왕릉을 두르고 있으며 회랑 둘레에는 높이가 1.7m되는 25개의 석주를 세우고 돌난간을 설치하였다.
 
현재 돌기둥은 모두 남아 있으나 돌기둥 사이사이에 끼웠던 난간 살대는 거의 망실되고 없어서 새로이 마련 설치해 놓고 있다. 봉분의 바로 앞에는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 사각형의 석상인 혼유석이 위치해 있고 봉분의 중심에서 남쪽으로 약 80m떨어진 위치로부터 시작하여 동서로 약 25m를 사이에 두고 북쪽으로부터 돌사자 2쌍, 冠劍石人 1쌍, 西域人 모습의 石人 1쌍, 華表石 1쌍이 마주 대하고 차례로 도열해 있다.
 
이 석조물들의 조각 수법은 매우당당하고 치밀하여 이와 같은 유형의 신라 조각품 가운데는 가장 우수한 것으로 손꼽히고 있으며, 특히 힘이 넘치는 모습의 호인상은 서역인의 얼굴을 하고 있는 관계로 아라비아 계통의 상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견해도 있다.
 
통일 신라 왕릉의 대표격인 이 괘릉의 능묘 제도는 당나라와의 문물 교류를 통해 당의 능묘 제도를 받아들여 이루어진 것이다.
 
12지상, 석사자 등을 배치하는 것은 성덕왕릉의 예와 같이 신라인의 창안이며 각종 석조물에서 보여주는 뛰어난 조각 수법은 당시 신라인의 고도로 발달한 예술적 경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것이다.
 
능묘에 배치된 12지상은 따로 조각하여 배치하였던 성덕왕릉의 형식을 탱석에 직접 조각하는 형식으로 한층 더 발전시킨 것이다.
 
이 괘릉의 주인에 대해서는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능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삼국사기에서는 원성왕이 재위 14년만에 죽으니 유해를 봉덕사 남쪽에서 화장하였다 하였으나 『삼국유사(편찬 연대 통설 : 1281충렬왕 7∼1283년 충렬왕 9)』에는 원성왕릉이 토함산 서쪽 鵠寺에 있으며 鵠寺는 당시에 崇福寺라 하였다.
 
또 숭복사에는 최치원이 쓴 四山碑銘중의 하나인 대숭복사비가 남아있다고 했다. 지금 괘릉에는 비석이 보이지 않으나 인근에 숭복사 터가 있어 괘릉이 원성왕의 능이라는 견해를 뒷받침하고 있다.
 
Ⅰ. 傳元聖王陵의 諸問題
 
괘릉이 역사서에 처음 기록된 것은 1669년에 간행한 [동경잡기]가 최초이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괘릉은 누구의 능인지 모른다고 하고 있다. 그런데 근세인 구한말 어느 때인가부터 신라 제31대 문무왕릉이라고 전해지기 시작하였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동경잡기』에 나오는 수장이라는 기록에 근거하여 추정한 것 같다.
 
문무왕릉은 조선후기부터 외동읍의 괘릉을 문무왕릉이라고 칭하여 전승되어 왔다. 그후 1712년경 경주부윤 권이진은 인접한 곳에 숭복사가 있음에 비추어 괘릉이 원성왕일 것이라고 추정한 바 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06년에는 일본인 今西龍이, 1916년에는 大坂金太郞이 괘릉을 찾았는데 이미 그곳에는 문무왕릉이라는 팻말이 있었다고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일 합방 이전부터 문무왕릉으로 알려진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조선의 풍수』를 쓴 村山智順과 『조선의 미술사』를 쓴 關野貞이 이를 받아들여 자신들의 저서에 괘릉을 문무왕릉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今西龍은 1906년에 이미 원성왕릉일 것이라는 추론을 내린바 있다. 즉 당시 今西龍은 1939년에는 확인된 숭복사지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던 관계로 해서 신라의 곡사, 고려의 숭복사가 괘릉 부근에 있다고 한다면 괘릉은 원성왕릉일 것이라고 추정을 한 것이다.
 
이러한 괘릉의 문무왕릉 설은 해방 후에도 계속되어 오다가 1970년대 이후에야 원성왕릉으로 주인이 바뀐 것이다.
 
그 이전 1967년도 5월 17일에 감은사지 동쪽 해중 200m에 있는 대왕암이 문무왕릉이라는 사실이 삼산오악 조사단에 의해 밝혀진 바 있다.
 
중국 북경 대학에서 민족 사학을 연구 하다가 귀국한 정인보 선생이 1950년 납북되기 이전에 남긴 원고 중에 掛陵考라는 단편 논문이 있다.
 
이 글은 위당 선생께서 납북된 이후인 1955년에 “담원국학산고” 라는 책 속에, 또 1972년 한국학 연구 총서라는 책에 소개됨으로써 일반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위당선생은 괘릉이 문무왕릉이 아니고 원성왕릉이라는 것을 각종 문헌기록을 통해 고증하였다.
 
이후 1965년 신라삼산오악학술조사단(新羅三山五嶽學術調査團)에 의해 원성왕릉설이 강력히 뒷받침되었고 1972년에는 변영섭에 의해, 1973년에는 강우방씨에 의해 정설로 굳어졌다.
 
일본에서도 1966년에 大坂金太郞에 의해 원성왕릉으로 추정 되었다. 그에 의하면 『동경잡기』 이후인 조선 영조 때에 경주 국당리 출신인 권종락씨가 남긴 갈산집과 경주 율리 출신인 손윤구씨가 남긴 성재집을 일별해 보면 괘릉이라는 한시를 찿을 수 있는데 당시만 해도 문무왕릉과 괘릉은 별개의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석사자의 위치 석인상의 주인공 등에 대한 논의가 끊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먼저 석사자의 배치 문제부터 거론해 보면 다음과 같다.
 
1975년에 발표된 변영섭의 논고에 의하면 능 전방 80m에 있는 석사자의 위치는 신라 제42대 흥덕왕릉의 배치와 같이 능의 네 모서리에 배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며, 또 현재와 같이 능 전방에 놓인 시기는 흥덕왕릉이 조영된 이후일 것이라는 추정을 하고 있다.
 
그 이유로는 능에 조각된 12지신상과 석사자, 석인상, 화표석 등 모두가 괘릉의 것을 그대로 모방하였는데 석사자의 배치만 달리했을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라고 그 근거를 설명하고 있다.
 
다음으로 석인상의 주인공에 대해서 살펴보면 많은 이설이 제기되어 있고 현재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경우이다. 먼저 능 입구에 들어서면 神道임을 알리는 화표석이 서 있고 다음에는 서역인의 모습을 한 석인상이 머리부분에는 중앙아시아식 터번을 착용하고, 오른팔을 위로 하여 주먹을 움켜잡고 있으며 1m가량의 몽둥이를 왼손으로 잡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키가 2.4m나 되는 이 거대한 석인은 深目高鼻한 서역인으로서 무사의 복장인 갑옷을 입지 않고 아무런 장식이 없는 부드러운 느낌의 옷을 입고 있다.
 
이 주인공에 대해서는 페르시아인·아라비아인·이란인·오만인 등 추측이 난무하고 있으며 주인공의 성격에 대해서도 무인상, 객사상, 병사상 등 각기 다른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서역인상의 뒷모습 가운데는 직경 10cm정도의 복주머니를 차고 있는 것이 획인되고 있다.
 
즉 이것은 신라 땅에서 서역인이 복주머니를 차고 있다는 사실은 조각상의 예술성 부여에 의미를 두기보다는 서역인의 신라 내왕이나 정착에 바탕을 둔 두 문화가 융합된 결과라 하는데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 서 있는 석인상은 지금까지 문인석 또는 신라인으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의 견해는 기존의 주장을 부정하고 있다. 문인석은 관검 석인으로 신라인은 위구르인으로 대치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석인상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전면은 문복을 착용하고 있는데 옷 속에 칼을 양손으로 움켜잡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옷자락 끝에는 칼이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고 뒷면에는 문복이 아닌 갑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 확인되고 있는데 이것이 앞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아울러 제도상의 문무을 살펴보면 중국에서는 북송부터 우리나라는 고려 때부터 문무관이 구별되고 있다. 이로 미루어 신라 시대는 문무의 구별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신라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종래의 생각을 뒤바꾼 것은 고려대 권영필 교수이다. 그는 1992년에 발표한 논고에서 이 석인상을 일러 전체 윤곽은 사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짙은 눈썹을 강조한 나머지 조각적으로 표현하여 이마와 눈자위를 턱이지게 하였으며 오뚝한 코와 꽉다문 입 사이에 팔자형의 수염을 얹고 있다. 또 양 귀밑에서부터 턱 전체를 가지런히 빗겨진 턱수염이 상당한 볼륨으로 덮고 있다.
 
가늘고 긴 눈은 한국적이라 다소 친근감을 주고 있지만 악센트를 주고 있는 터럭들은 이례적이라 하겠다. 터럭들이 이란계와 같은 곱슬곱슬한 것이 아니라 직선형이다. 이러한 면들은 위구르인들의 인상과 직결되는 요소들이다. 용강동 석실 고분 출토의 문관상이 이에 해당된다 하겠다.
 
그러면 왜 신라왕의 능묘에 신라인 신하들을 조각하지 않고 외국인의 모습을 조각하여 배치하였는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신라는 당의 능묘 제도를 숙지하고 있어서 능묘 앞에 문무인석과 객사를 도열시킬 제도적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신라와 당과의 관계가 대등관계에 처해 있지 못했던 점을 감안한다면 이와 같은 제도에 대한 욕구는 당연히 唐制의 縮小 또는 自肅의 形態로 표현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생각되어 진다 라고 그 원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왕릉의 완비된 모습은 왕의 계승 관계가 부자 상속 또는 형제 상속 등 가장 안정적인 정치 상황일 경우에 한하여 많이 나타나고 있다. 또 한가지 부언하여 둘 것도 1926년에 일본사람들이 백주에 공공연하게 도굴하는 것을 당시 경주군청 주사 김한이 보고 제지하였다고 하며 유물의 도굴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한다. 또 이곳의 난간 석주 1개가 괘릉 뒷마을에 있는 수봉정 정원에 놓여 있으며 3개 부분으로 파손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