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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근대현대 인물

온건 개화파 - 김홍집 총리대신

by 연송 김환수 2013. 2. 15.

 

김홍집(金弘集, 1842-1896)

갑오개혁을 시행한 정치가.

 

총리대신을 지내신 분으로 책임감있는 정치가 였지만 비참한 종말을 맞이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출생 : 1842년 조선 경상도 경주

사망 : 1896년 2월 11일

조선 : 한성부

사인 : 타살

국적 : 조선

별칭 : 아명(兒名)은 김굉집(金宏集)

자(字) : 경능(敬能)

아호(雅號) : 도원(道園)·이정학재(以政學齋)

시호는 : 충헌(忠獻)

학력 : 1868년 알성문과 급제

직업 : 한말의 문신, 총리대신

종교 : 유교(성리학)

배우자 : 홍씨

자녀 : 딸 김씨

부모 : 아버지 김영작(金永爵)

어머니 : 창녕 성씨(昌寧 成氏)

 

김홍집(金弘集, 1842년 ~ 1896년 2월 11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사상가, 정치가이다. 자(字)는 경능(敬能), 호는 도원(道園)·이정학재(以政學齋), 시호는 충헌(忠獻), 본관은 경주이다.

 

1880년 수신사 일행으로 일본을 방문한 뒤, 신문물을 견학하고 돌아와 개화, 개항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한편으로 위정척사파 계열 인사들도 중용하는 등의 정책을 펼쳤으나 급진 개화파로 몰렸고,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나자 우의정, 좌의정 등으로 전권대신(全權大臣)이 되어 한성조약(漢城條約)을 체결하였다. 그 뒤 1896년 관제 개정 이후 동학 농민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끌어들인 일본측의 지원으로 총리대신이 되었으며, 총리대신 재직 중 신분제 폐지, 단발령 등을 강행하는 한편, 함께 일본의 도움으로 개혁, 개방을 단행한 뒤에는 친일파로 몰려 아관파천 때 살해되었다.

 

원래 이름은 김홍집(金弘集)이었으나, 청나라 고종(高宗)의 휘가 ‘홍력’(弘歷)이었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해 김굉집(金宏集)으로 가운데 자(字)를 바꾸었다. 조선말기의 문신이자 독립운동가, 대한민국의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은 그의 사위였다.

 

출생과 가계

1842년 이조참판을 지내고 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김영작(金永爵)과 정부인 성씨(成氏)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의정부좌의정을 지낸 김명원의 후손으로,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의 친정아버지인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5대손이었다. 증조부 김효대는 공조판서를 지냈고, 종조부 김사목은 의정부좌의정을 지냈다. 어머니 성씨는 우계 성혼(牛溪成渾)의 후손이다.

 

1867년 정시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들어가 유생으로 수학하였다. 성균관 재생 시절 성적이 우수하여 바로 전시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

 

초기 활동

1868년(고종 5년) 정시문과에 급제한 뒤 1873년에는 권지승문원부정자를 거쳐 승문원부정자, 승문원박사를 겸직하고, 승정원가주서가 되었으나 아버지의 상으로 사퇴했다. 1870년 다시 어머니 창녕성씨의 상을 당하여 다시 3년상을 더 치뤘다.

 

1875년에는 부사과를 거쳐 흥양현감으로 나갔다가 1877년 사과(司果)를 역임했다. 1878년 이후 호조참의, 공조참의, 병조참의, 예조참의를 두루 지냈다. 그 뒤 광양 현감(光陽縣監)을 거쳐서 1880년 예조 참의로서 제2차 수신사로 임명되어 58명의 사절단을 이끌고 일본 제국을 다녀왔다. 귀국 이후, 서양 근대의 기술적 성과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일본의 문물제도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조사시찰단의 일본 파견을 상주하게 하였다.

 

일본 유람

1880년 여름 그는 윤웅렬(尹雄烈), 이용숙(李容肅), 지석영(池錫永) 등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김홍집 일행은 1880년 7월 일본 기선 〈치토세 호〉 편으로 부산항을 통해 도쿄에 도착했다. 도쿄 체재 1개월 동안 이들은 일본 정부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일본의 근대화된 모습을 두루 살폈다. 그런 한편 일본의 감언이설과 유혹에 빠져들어 친일파로 변신하게 되었다. 이들은 수신사 본래의 사명을 망각하고 일본 정부가 줄기차게 요구해온 바, 인천을 개항장으로 지정토록 하고, 일본 공사의 한성부 주재 등이 필요하다고 본국 정부에 품신하는 등 일본의 주구 노릇을 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일본의 철도와 위생상태, 증기 기관차와 자동차의 운용 등을 본 김홍집과 일행은 충격을 받았다.

 

김홍집은 귀국한 뒤 중국인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과 정관응(鄭觀應)의 《이언 (易言)》을 소개하여 개화 정책을 적극 추진케 한 공으로 예조 참판에 승진했으나, 개화를 반대하는 유학자들의 배척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책을 소개한 책임을 지고 사직했다. 개화파의 지지를 받았지만 유학자 중심의 척사위정파(斥邪衛正派)의 심한 반발을 받아 부득이 자리를 물러났다. 그러나 곧 고종과 명성황후의 신임으로 통리기무아문의 통상사당상(通商司堂上)으로 복직했다. 그는 조선책략과 이언을 소개하며 조선은 미국, 청국, 일본 등과 손을 잡고 세계발전의 대열에 참여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당시 유생들과 지역의 유림들은 그가 흉악한 모의를 꾸민다며 규탄하였다.

 

귀국과 정치 활동

외교, 개화파 활동

1882년 구미 열강의 통상 요구와 임오군란의 뒤처리 등 복잡한 문제에 부딪친 조선 정부에 다시 기용되었다. 전권대신 이유원(李裕元)의 부관으로서 일본과 제물포 조약을 맺는 데 앞장서는 등 여러 나라와 수호조약(한미(韓美)·한영(韓英)·한독(韓獨) 등) 등을 맺을 때 유효적절한 수완을 발휘하여 ‘비오는 날의 나막신’에 비유되곤 하였다.

 

한학에 능통했던 그는 1882년 구미(歐美) 열강의 통상요구에 따른 복잡한 국내문제와 임오군란(壬午軍亂)의 뒷처리 등으로 다시 기용되어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과의 수호조약 체결에 전권대신들의 부사(副使)로서 활약하였고, 윤치호를 통역으로 채용하여 번역과 내용해석을 전담했다. 제물포 조약 체결에는 이유원(李裕元)의 부관으로 참여하여 일본측의 요구를 일부만 받아들이는 것으로 타협하였다. 여러 조약의 체결을 잘 처리한 공으로 경기도 관찰사로 승진되었다.

 

이후 청나라에 파견되는 진주사(陳奏使)에 진주사 조영하(趙寧夏)와 함께 진주 부사로 톈진(天津)에 파견되어 흥선대원군의 석방을 교섭하고, 조선 정부의 흥선대원군 석방 운동을 중재하여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을 설득시키는데 성공했다. 이어 이홍장의 막료인 마건충(馬建忠), 주복(周馥)을 설득하여 무역협정인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의정, 조인했다.

 

1883년 규장각직제학을 거쳐 1884년 지춘추관사, 예조판서, 한성부 판윤, 독판교섭통상사무 등을 지내면서 대외교섭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항상 조선이 발전하려면 선진 외국과 제휴해야 한다는 개화 교류사상의 확고한 신념과 이상을 피력하였다. 그의 개화사상의 특징은, 개화는 필연적으로 실현시켜야 하지만, 급진적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며 점진적 방법만이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위정척사파와 지방의 성리학자들에 의해 맹목적인 반감을 사게 되었다. 한편으로 그는 흥선대원군과도 접촉하며 협력을 요청하였지만 대원군은 그의 협조 요청을 냉소적으로 대하였다.

 

1884년 예조 판서·한성부 판윤을 역임하였고,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우의정, 좌의정 등으로 전권대신이 되어 한성 조약을 체결한 뒤에 사임하였으며, 판중추부사로 한때 한직에 머물러 있었다. 한편 개항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노론 북학파와 소론 등을 중용하여 그는 개화파로 몰렸다. 그러나 개항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동시에 최익현의 문인인 박병철(朴炳哲) 등의 노론 위정척사계열 성리학자들을 중용하였다.

 

한성조약이 성사된 뒤 판중추부사로 밀려났다가 1887년 다시 의정부좌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위정척사파의 반발과, 지방 유림들의 매국노라는 규탄 여론으로 곧 사직했다. 이후 판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가 1889년에 행수원부유수로 좌천되었다.

 

제1차 김홍집 내각 조각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 일본 세력의 침투가 표면화되자 그 힘을 빌어 제1차 김홍집 내각을 조직, 총리대신이 되었다. 그해 동학 농민 혁명이 일어나자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일본군을 끌어들였고, 조선에의 침투를 바라던 일본군은 청일 전쟁을 일으키기 며칠 전인 음력 6월 21일(양력 7월 23일)에 경복궁을 습격하고 무기고를 탈취하는 등 김홍집 일파를 지원하였다. 한편 김홍집은 일본 조정과 친하다는 이유로 음력 6월 말부터 제1차 김홍집 내각을 조직하고 총리대신이 되어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총리대신으로 그는 악습을 폐지하고 과거제 폐지, 은본위제의 신식화폐제도 채택, 의정부와 궁내부의 관제 시행, 도량형제도의 채택 등의 개혁을 단행했다.

 

2차내각 조직과 개혁활동

청일 전쟁의 결과 일본이 득세하자 강력한 친일파가 입각한 제2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었으며, 이때 홍범 14조를 다시 발표하는 등 개혁을 재개하였다. 2차 내각에서 그는 1차 내각때부터 작성한 초안을 완성, 새로운 법령인 홍범 14조(洪範十四條)를 직접 수립하여 제정, 발표하며 새로운 국가의 체계를 수립하였다. 이어 신분제도의 철폐 여론을 주도하고, 단발령을 추진하고 양복을 도입하여 권장하였다.

 

그러나 재정난과 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 등과의 대립, 유길준 등의 소극적 협력 등으로 지원 세력이 없어 내각은 곧 와해되고 박정양 내각이 탄생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때, 총리대신으로서 정권을 도맡아 친일 내각을 조직하고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 圭介)의 지휘를 받으면서 조선 왕조를 강탈하는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의 업무를 시작했다.

 

생애 후반

친일 의혹법률과 제도를 바꾸고 일본의 변화된 관제와 복식을 조선에 도입하려 했다. 또한 양력의 사용과 우편 제도를 실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설에는 김홍집은 자신이 군국기무처의 총재를 겸임하면서 총재보좌 명목으로 일본 공사관 직원 4~5명을 끌어들여 이들에게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하는 등 친일매국행위에 앞장섰다는 주장도 있다.

 

몰락과 최후

이어서 들어선 박정양(朴定陽)내각이 열강에 접근하려는 정책을 쓰자, 일본은 이를 경계했고 그는 이 사이 일본측과 접촉하였다. 박정양 내각이 새로 세력을 뻗기 시작한 구미 열강에 친근하려는 정책으로 기울어지자 일본 제국은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죽인 후 제3차 김홍집 내각을 조직하였다.

 

김홍집 내각에서는 일본의 압력 외에도 단발령(斷髮令)의 강행 등 급격한 개혁을 실시하다가 성리학자들의 반발로 전국적인 의병 봉기와 집회를 야기하였고, 1896년(건양 1년) 러시아의 세력이 증대하여 드디어 아관파천이 일어나 김홍집 내각이 붕괴되고 친러파 내각이 조직되었다. 그와 동시에 김홍집은 많은 대신이 피살될 때 매국 친일당의 두목으로 몰려 광화문에서 군중에게 살해되었다. 저서로는 '이정학재일록 (以政學齋日錄)'이 있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54세였다.

 

*** 아관파천시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한 고종은 즉시 김홍집 ·유길준(兪吉濬) ·정병하(鄭秉夏) ·조희연(趙羲淵) ·장박(張博) 등의 5대신을 역적으로 규정하여 포살(捕殺) 명령을 내려 김홍집 ·정병하 ·어윤중(魚允中)은 군중에게 타살되고 유길준 ·조희연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살해된 시신은 광화문 밖에 효수되었고, 시신은

노륙되어 각도로 보내졌으며, 백성들은 수급에 돌을 던졌다 한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그의 시신을 씹는 자까지 있었다고 전한다. 그의 가족들에게도 연좌제가 적용되었는데, 이시영에게 시집간 딸 등 이미 출가한 딸들만이 연좌제를 피하였다. 한성부 사저에 있던 부인은 연좌되어 관비로 끌려갈 것을 예상하고 아들을 죽이고 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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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륙(孥戮) : 연좌제에 의하여 죄인의 아내나 아들을 함께 사형에 처하던 일. 온 가족을 죽이는 것. 남편 혹은 아비 죄 때문에 처자까지도 연좌(緣坐)되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말함.

*** 도륙(屠戮) : 사람이나 짐승을 함부로 참혹하게 마구 죽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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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

그는 개화파가 몰락하면서 역적으로 단죄되었고, 1910년 한일 합방 이후에는 친일파의 득세를 불러온 역적으로 단죄되어 재평가받지 못하였다. 1945년 해방 후 사위 이시영에 의해서 복권 여론이 조성되었고, 1960년대 가서야 개혁 노력에 대한 연구와 평가가 시작되었다.

 

묘지는 경기도 파주군 임진면에 안장되었으나 6·25 남침 뒤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대자리(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로 이장하였다.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영 홍문관사 세자사 내각총리대신 증시 충헌 김공 홍집 지 묘  배 정경부인 남양홍씨 부좌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 領 弘文館事 世子師 內閣總理大臣 贈諡 忠獻 金公 弘集 之 墓  配 貞敬夫人 南陽洪氏 祔左

 

    

우리나라 역사 속 국무총리의 변천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 총리제도는 헌법 상 총리직을 명기하기 시작한 것은 대한민국이 성립된 1948년부터이다. 하지만 이보다 앞서 조선시대 총리대신에서 총리의 기원을 살펴볼 수 있다.

 

총리대신은 조선 말기 최고위관직으로, 국정을 총괄하는 내각의 수반으로 정원 1인으로, ‘내각총리대신’, ‘의정대신’이라고도 불렀다.

1880년(고종 17) 12월 군국기무를 총괄하는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되자, 그 장으로 신설된 직으로 정식 직명은 ‘총리’였으며, 영의정이 겸임했다.

 

그 뒤 총리대신직은 일시 폐지되었다가, 1894년 6월 갑오개혁으로 관제가 대폭 개편될 때 영의정 직제가 폐지되고 다시 설치됐다.

 

칙임관인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로 보(補)했으며, 초대 총리대신에는 김홍집이 임명되었다.

 

총리대신은 백관을 총리하고 서정(庶政)과 방국(邦國)을 다스리는 최고정무기관인 의정부의 장으로, 각 아문으로부터 소관 업무를 수시로 보고 받았다.

뿐만 아니라 법률 및 칙령 제정, 인사문제 등 각 아문의 중요정무는 총리대신을 거친 뒤 국왕에게 주청되어 재가를 얻어 시행되었다.

 

1894년 12월 의정부가 내각으로 개칭되면서 ‘총리대신’은 ‘내각총리대신’으로 개편되었고, 내각의 권한은 대폭 강화됐다. 이전과 달리 ‘대군주 폐하를 보필하고 방국경리(邦國經理)하는 책임’을 내각총리대신만이 아니라, 각부 대신들이 함께 지도록 칙령 제38호 ‘내각관제’에 명문화되었다.

 

중요한 정무는 국왕이 주재하고 내각총리대신과 각부 대신들로 구성된 내각회의에서 결정됐다. 그러다가 1896년 9월 칙령으로 새 의정부관제가 반포되면서 내각 명칭이 의정부로 환원되고 내각총리대신도 의정대신으로 개칭되었다. 그 뒤 다시 내각총리대신 직명이 사용된 것은 1907년 6월 의정부를 다시 내각으로 개칭할 때였는데 이후 내각총리대신 제도는 1910년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될 때까지 존속했다.

 

 

 

 

저서 : 이정학재일록 (以政學齋日錄)

 

가족 관계

증조부 : 김효대(金孝大)

할아버지 : 김사식(金思植)

아버지 : 김영작(金永爵, 1802년 - 1868년)

어머니 : 창녕성씨(? - 1870년)

형 : 김항집(金恒集, 요절)

형 : 김승집(金升集)

동생 : 김증집

부인 : 홍씨

아들 : 김경희 (金敬熙)

딸 : 경주김씨

사위 : 이시영(李始榮, 1868년 - 1953년)

외할아버지 : 성재순(成載淳)

장인 : 홍재선(洪在善)

 

사상과 신념

그는 항상 조선이 발전하려면 선진 외국과 제휴해야 한다는 개화 교류사상의 확고한 신념과 이상을 피력하였다. 그의 개화사상의 특징은, 개화는 필연적으로 실현시켜야 하지만, 급진적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며 점진적 방법만이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평가

김홍집은 행실이 그가 주장한 바와 엇갈리는 바가 많아서 ‘친일파 애국자’로 표현되곤 한다. 일본 세력을 이용하여 조선을 개혁하려 했던 정치가라는 평가와 함께 일본에 이용당한 친일파라는 평가가 공존한다. 또한 그가 죽기에 앞서 “일국의 총리로 동족 손에 죽는 것은 천명”이라는 말을 남겼기 때문에 책임감 있는 정치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또한 구한말의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3차의 내각을 이끌며 개항과 사회 안정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외세의 도전을 자력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을 실천하기도 전에, 정국의 혼란으로 군중에게 살해되는 비극을 감수해야 했다는 시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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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앞에 절명시를 쓰노라>, 출판 - 김영사, 지은이 - 이이화

 

1896년 한겨울인 2월 11일, 설날을 앞두고 장안은 온통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다. 친러파들이 고종을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고 새로이 친러 정권을 수립한 것이다. 이범진, 이완용의 무리가 러시아공사관에서 고종을 싸고돌며 새로운 내각을 탄생시켰다. 묵은 내각, 곧 개화정권이라고도 불리고 친일내각으로도 불리는 김홍집내각은 붕괴되었다. 이 날 새벽, 정동에 있는 러시아공사관으로 자리를 옮긴 고종은 묵은 내각의 대신들을 체포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한편 총리대신 김홍집은 정병하, 유길준 등과 함께 허겁지겁 경복궁 앞으로 달려갔다. 벌써 친러 정권의 관리들은 경복궁 앞에 경관들을 배치해놓고 보부상 수천 명을 동원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으며 광화문 앞에 있는 일본 수비대에는 일본 군인들이 총검을 날카롭게 세우고 서 있었다.

 

"나는 명색의 조선의 총리대신이다. 내가 조선인을 위해 죽는 것은 떳떳한 천명이거니와 다른 나라 사람에 의해 구출된다는 것은 짐승만 같지 못하리라."

 

이에 살기등등한 보부상패들은 그를 교자에서 끌어내렸다. 그리고 발로 차고 주먹으로 쳐서 말릴 새도 없이 순식간에 김홍집을 죽였다. 한 나라의 총리대신이 떠돌이 보부상들에게 맞아죽은 것이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벼슬아치의 우두머리가 난도들에게 맞나죽은 것은 이것이 처음일 것이다.(189-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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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2월11일 총리대신 김홍집이 성난 군중들에게 목숨을 잃었다.

 

김홍집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아관파천)는 소식에 서둘러 경복궁으로 향했다. 친일내각이 일거에 무너지고 친러파가 득세하는 하루아침에 정국이 변한 때이다.

 

김홍집이 살고자 하면 살 길은 없지 않았다. 일본은 정세가 급변하자 그를 보호하려 하였으나, "나는 총리대신이다. 조선인에게 죽는 것은 떳떳한 하늘의 천명이지만 다른 나라 사람에게 구출된다는 것은 짐승과 같다"고 일갈하고, 경복궁으로 입궐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성난 군중들을 만났다.

 

그는 일본의 지원으로 세 차례 내각을 조직한 친일파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일본을 이용해 개화를 하려는 인사였기 때문에 ‘친일파’에 방점을 찍는 것보다는 ‘개화파’로 평가하는 게 타당하다는 분석도 만만찮다. 다만 을미왜변(명성황후 암살 사건)으로 친일이라는 카테고리가 붙는 내각이 민심을 얻기 어려운 정치적 지형이었던 데다, 고종의 이중적 정치행보로 책임을 덮어썼다고 볼 여지도 없지 않다.

 

당시 아관파천을 급히 진행하면서, 갑오개혁을 주도하던 김홍집을 역적으로 규정해 버린 일은 스트레스 해소 대상이 필요했던 대중 앞에 그를 던져준 것이나 다름없는 결과를 낳았다.

 

김홍집의 행보에 일점의 오류나 과오도 없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매천야록’의 저자 황현은 “나랏일에 마음을 다 했다”고 김홍집을 평가했다.

 

김홍집 내각이 더 지속됐다면 일본에 허망히 나라를 잃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탄식하기도 했다. 역사가 이덕일은 급진개화파 김옥균이나 온건개화파 김홍집 등을 일본을 역할모델로 삼아 부국강병을 도모하려던 애국적 친일파로, 을사오적류를 매국적 친일파로 분류하기도 했다.

 

김옥균·김홍집을 모두 제거한 고종에게 남은 것은 매국적 친일파뿐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홍집을 사실상 죽이라(죽이고 스트레스를 풀자)고 김홍집을 군중에 내준 고종이나, 흥분 상황에서 김홍집에 필요 이상의 짐을 지워 난도질해 책임을 물은 군중의 행동을 생각해 보게 된다.

 

 

김홍집을 때려죽이고 나중에 그래도 그 놈이 명관이었다는 식으로 탄식하며 되돌아보고 문제를 고치며 살기에는, 한국이 어울려 살아갈 국제사회는 비정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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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대신 김홍집은 의연했다. “먼저 전하를 뵙고 말씀을 드린 후 어심을 돌리지 못하면 일사보국(一死報國)하는 수 밖에 없다,”면서 길을 나서는 총리대신을 일본 측이 가로막고 피신을 권하자, 그는 우리 역사를 통틀어 보기 힘든 감동적인 호령을 한다. “나는 조선의 총리대신이다. 조선인에게 죽는 것은 떳떳한 하늘의 천명이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구출된다는 것은 짐승과도 같도다.” 그리고 그는 그를 죽이라는 어명에 살기를 띤 백성들 앞으로 나아간다. 백성들 가운데 상당수는 고종 임금이 그 뒤로도 즐겨 어용 용역으로 써먹는 보부상들이었다. “어명이다. 김홍집을 죽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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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집은 1894~1896년의 역사적 격변기에 총리대신 직을 네 차례 맡아서 국정을 총괄하였던 조선 말엽 정상급 개혁관료였다. 그런 그가 1896년 아관파천 이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임금과 백성의 그에 대한 반감이 크게 작용하였다. 위기의 시기에 국정 개혁을 통해 나라를 중흥시키려 하였던 관료가 임금과 백성의 반감을 산 이유는 그와 일본과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이 일어나고, 김홍집 내각은 붕괴하게 된다. 그리고 김홍집은 정식재판도 없이 경관들에 의해 처단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그 과정에서 김홍집은 일본으로 도망가자는 주변의 만류에도 ‘일사보국’을 외치며 자신의 정책에 대한 책임을 진다.

 

“(조선인) 경관들이 김 총리를 경무청의 문 앞으로 끌어냈는데 인민들이 모여들어서 입추의 여지가 없음을 보자 칼을 뽑아 들고 인민들을 쫓아버린 다음 김 총리를 차서 쓰러뜨리자마자 경관 수명이 일제히 난도질하여 가슴과 등을 내리쳤다. 시체의 다리 부분을 거친 새끼줄로 묶어 종로로 끌고 와 시신을 드러내놓게 하고는 거기에다 ‘대역무도 김홍집’이라 크게 쓴 장지를 붙였다. 그러자 길에 가득 차 있던 보부상들이 시체를 향해 큰 돌을 던지기도 하고 발로도 짓이겨 시체에 온전한 곳이 한 군데도 없도록 만들었다(국사편찬위원회, 『주한일본공사관기록』 9, 1993).”

 

경관(警官)

경찰 관한 임무 수행하는 공무원 통틀어 이르는 .

같은 말 : 경찰관(‘경찰 공무원’을 일상적으로 이르는 말).

[유의어] 경찰관, 순경.

경관(京官)

[역사] 같은 말 : 경관직(조선 시대에, 서울에 있던 여러 관아의 벼슬을 통틀어 이르던 말).

경관(京官)

[역사] 조선 시대, 서울에 있던 여러 관아의 벼슬을 통틀어 이르던 말. 강화부(江華府), 수원부(水原府) 등의 관직과 각 능(陵), 묘(廟)의 관직은 지방에 있어도 이에 포함된다.

 

 

경관직 [京官職] : 조선 관직

 

조선시대 중앙에 있던 관직을 통틀어 일컫던 말.

 

경직(京職), 경관(京官)이라고도 했다. 관직은 크게 둘로 나누어 중앙과 지방의 벼슬에 따라 경관직과 외관직(外官職)으로 구분했다.

 

경관직은 서울에 있는 문·무(또는 東班·西班)의 각 아문, 즉 문관은 종친부·의정부·의금부·육조·승정원·사헌부·사간원·홍문관·한성부 등으로부터 귀후서(歸厚署)·4학에 이르기까지, 무관은 중추부·오위도총부·오위에서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에 이르기까지 여러 관아의 관직이 이에 포함된다.

 

이밖에도 광주부·강화부·개성부·수원부·춘천부와 경기전(慶基殿 : 全州)·조경묘(肇慶廟 : 全州)·선원전(璿源殿 : 永興)·화령전(華寧殿 : 水原)·장녕전(長寧殿 : 江華)·만녕전(萬寧殿 : 江華) 및 각 능(陵)·묘(廟)·원(園)·전(殿)의 관직은 지방에 있어도 경관직이라 불렀다.

 

문관 경관직 741직, 무관 경관직 3,324직으로, 총관직수 5,605직의 약 73%(4,065직)를 차지했다.

 

경관직에는 동반 경관직 중 녹관이 646직, 무록관이 95직이 있었으며, 서반 경관직에는 정직이 319직, 서반 체아직이 3,005직 있었다.→ 외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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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자' 친일파 거물 김홍집

 

이름 앞에 ‘애국자’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니는 친일파가 한 사람 있다. 무려 3차례에 걸쳐 내각을 꾸렸던 김홍집이 그 주인공이다.

 

김홍집(金弘集, 1842~1896)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정치가로 1868년(고종 5년) 정시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섰다.

 

광양현감을 거쳐 1880년 예조 참의로 있던 제2차 수신사로 임명돼 58명의 사절단을 이끌고 일본을 다녀왔다. 1개월 동안 도쿄에 머물면서 그는 일본의 근대화된 모습을 두루 살피고 돌아와서는 인천 개항장 지정, 일본 공사의 한성부 주재 등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는 일본정부가 줄기차게 요구해온 사항들이었는데, 일본의 선진문물을 보고서 그는 불과 한 달 만에 ‘친일’로 기울어 있었다.

 

중국의 외교관 겸 작가 황준헌(黃遵憲)이 쓴 <조선책략>을 통해 개화정책을 추진한 공로로 예조 참판(현 차관)으로 승진한 김홍집은 수구파들의 반발로 한 때 사직했으나 그 뒤 구미 열강의 통상 요구와 임오군란의 사후 처리 등을 위해 재기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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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집 내각의 총리대신을 지낸 김홍집

 

 

그는 전권대신 이유원의 부관으로서 일본과 ‘제물포조약’을 맺는 데 앞장서는 등 구미 각국과의 수호조약 체결 때 능력을 발휘해 ‘비오는 날의 나막신’에 비유되곤 했다. 그 공로로 경기도 관찰사로 승진한 그는 1884년 예조판서·한성부 판윤(현 서울시장)을 역임하였고,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우의정, 좌의정 등으로 전권대신이 되어 한성조약을 체결한 뒤에 사임하였다.

 

그가 총리에 올라 내각을 구성한 것은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난 후였다. 기회 있을 때마다 조선 침투를 엿보던 일본군은 청일전쟁 직전인 그해 음력 6월 21일(양력 7월 23일) 경복궁을 습격해 궁궐을 장악하였다. 이로써 친일세력이 급부상하자 그는 7월에 제1차 김홍집 내각을 조직하고 총리대신에 올라 이른바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이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제2차 김홍집 내각을 구성하자 ‘홍범14조’를 발표하는 등 개혁을 재개하였다. 제3차 김홍집 내각은 1895년 ‘을미사변’ 후에 구성됐는데, 이 때 일본의 압력으로 단발령 등 급격한 개혁을 실시하다가 민중들의 거센 반발에 부닥쳤다. 결국 이듬해 친러 세력의 주도로 아관파천이 단행되면서 그의 내각은 붕괴되었고, 그에게도 체포령이 내려졌다.

 

하루아침에 친러파 세상이 돼버리자 ‘친일파 역적’으로 지목된 그는 신변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그는 사인교를 타고 고종이 머물고 있던 정동 러시아공사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일본군이 그의 사인교를 가로막으며 소리를 질렀다.

 

“대감! 지금 군중들이 대감을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같이 얼른 이곳을 피하셔야 합니다.”

 

그러자 김홍집은 비통한 표정을 짓더니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일국의 총리로서 동족의 손에 죽는 것은 천명이오. 구차하게 남의 나라 군인의 도움으로 살아남고 싶은 생각은 없소!”

 

그가 탄 사인교는 군중들의 몽둥이가 기다리는 광화문 쪽으로 향했고, 그는 결국 길바닥에서 맞아죽었다. 그의 시체는 새끼줄에 묶여 개 끌리듯 종로로 끌려가서 발길질과 팔매질에 온갖 수모를 겪었다.

 

김홍집의 삶을 두고 논란이 있다. 개화된 일본의 힘을 빌어 조선을 개혁하려 했다는 평가와 함께 일본의 음모에 놀아난 어리석은 정치가라는 비판이 그것이다. 다만 그가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은 것으로 봐 그의 ‘친일’은 소인배의 기회주의적인 행태라기보다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롯한 정치적 소신이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 나름으로는 ‘애국’ 차원에서 친일을 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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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02.12 김홍집, 비참한 종말

 

매국노? 애국자? 총리대신 김홍집(1842~1896)

매일신문, 2011-09-06

 

청일전쟁, 갑오경장, 동학농민봉기, 명성황후 시해, 아관파천(俄館播遷) 등 굵직굵직한 사건이 연이어 터진 1894~96년 격변기. 열강의 세력 각축 속에서 500년 왕조의 운명이 쌓아놓은 계란같이 위태롭기 그지없던 그때. 일본을 등에 업고 네 차례에 걸쳐 총리대신을 맡았던 위기관리자 김홍집. 그는 300만 엔의 일본 차관과 40여 명의 일본인 고문관을 끌어들여 나라를 독립부강한 근대국가로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침략자의 돈과 인력을 빌려 추진한 갑오·을미개혁은 일본군의 군홧발 밑에 포장도로를 까는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했다.

 

일제의 농간에 휘둘렸던 그는 누란지위(累卵之危)에서 나라를 구하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황후가 비명에 간 이후 친일내각에 의해 궁 안에 갇혀 공포의 나날을 보내던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1896년 2월 아관파천 직후 그는 거리에서 무참히 참살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날의 비극을 고무라 일본 공사는 이렇게 기록했다. “(조선인) 경관들이 김 총리를 경무청의 문 앞으로 끌어냈는데 인민들이 모여들어서 입추의 여지가 없음을 보자 칼을 뽑아 들고 인민들을 쫓아버린 다음 김 총리를 차서 쓰러뜨리자마자 경관 수명이 일제히 난도질하여 가슴과 등을 내리쳤다. 시체의 다리 부분을 거친 새끼줄로 묶어 종로로 끌고 와 시신을 드러내놓게 하고는 거기에다 ‘대역무도 김홍집’이라 크게 쓴 장지를 붙였다. 그러자 길에 가득 차 있던 보부상들이 시체를 향해 큰 돌을 던지기도 하고 발로도 짓이겨 시체에 온전한 곳이 한 군데도 없도록 만들었다(국사편찬위원회, 『주한일본공사관기록』 9, 1993).”

 

그가 이끈 내각은 일제에 막대한 이권을 넘겨주었고, 일본군이 동학농민군을 ‘토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제공했으며, 황후 시해의 흉모를 방관하고 그 원흉들을 감싸는 친일행위를 자행했다. 그렇기에 그는 “일본 공사에게 굴종하는 줏대 없는 소인배”란 박영효의 손가락질을 면할 길이 없다. 그러나 “나는 먼저 폐하께 알현해서 폐하가 마음을 돌리실 것을 촉구하고 성사되지 않으면 일사보국(一死報國)하는 길밖에 없다”며 죽음을 달게 받은 그의 진충보국(盡忠報國)의 자세는 반일 민족주의 역사가 황현도 높이 평가하게 만든다.

 

“김홍집은 화왜(和倭)를 주장하다가 청의(淸議)에 득죄하였으나 나랏일에 마음을 다했고 그 재간과 지략은 속류배가 따를 바 아니었다(『매천야록』).” 나라를 다시 일으키겠다는 갸륵한 동기로 개혁을 이끌다 실패에 책임을 지고 죽음을 택한 그의 삶은 오늘 우리 위정자들의 신들메를 고쳐 매게 한다. /중앙일보

 

*** 신들메 : 들메끈(벗겨지지 않도록 신을 발에다 동여매는 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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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이덕일 선생의 글을 보면 김홍집의 당시 입장을 잘 표현하고 있다.

 

출처 : 근대를 말하다
저자 : 이덕일 지음
출판사 : 역사의아침

 

고종의 아관파천은 한 나라의 임금이 자국에 와 있는 외국의 공관으로 도망간 세계사적으로 아주 희귀한 사건이다. 고종이 아관(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이유에 대해서 여러 설들이 있지만 당시 매천 황현이 말한, 고종이 헌정에 속박되기 싫어서 도주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가장 정확하다고 본다.

당시 김홍집 내각이 갑오개혁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갑오개혁의 목표는 조선, 즉 대한제국을 근대국가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가장 먼저 헌법을 개정해야 했다. 그래서 당시 갑오개혁을 추진하던 사람들은 입헌군주제를 실시하려 했고, 국왕도 헌법상의 존재로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고종은 갑오개혁이 진행되면 헌법의 규정에 의해서만 권력을 행사하게 되니까 자기 자신의 전제왕권이 약화된다는 생각에 러시아공사관으로 도망간 것이다.

고종이 아관으로 도망가서 첫 번째로 한 일은 정무관, 요즘말로 경찰 간부들을 불러서 김홍집이나 어윤중 같은 갑오개혁파들은 모두 역적이니 죽이라고 명을 내린 것이다.

이때 어윤중은 도망갔지만 김홍집은 일국의 대신이 어찌 도망을 가느냐며 맞아죽게 된다. 김홍집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억울한 일인 셈이다. 김홍집은 당시 조선이 살 길은 근대국가로 만드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배후에서 일본이 작용을 했다는 점에서 성공여부는 조금 더 생각해볼 여지가 있지만, 당시 조선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입헌군주제의 헌법을 만들고 조선을 근대국가로 만드는 것이었다.

고종의 아관파천을 바라볼 때 단순히 민비가 시해 당했다는 사실과 일본의 압박 이런 것만 이야기하는데, 이런 작은 부분을 벗어나서 당시 조선, 대한제국이 과연 어느 길로 갔어야 되는가라는 거시적인 관점을 놓고 볼 때 고종의 아관파천은 조선이 근대국가로 넘어가는 좌절시킨, 아주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고종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왕권도 유지하면서 제국도 유지할 수 있는 입헌군주제로의 선택이 있었음에도, 당시 자신이 처한 객관적인 상황을 전혀 무시한 채 결국 제국 자체를 빼앗겼다는 사실이다. 현재 고종에 대한 동정론들이 상당히 커지고 있는데 그건 그 당시 고종의 잘못된 선택으로 백성들이 겪은 수많은 고초들을 망각한 일이다.

고종은 왕 노릇을 1~2년 한 사람도 아니고 44년을 한 인물이었다. 심지어 고종과 일본의 메이지 천황은 동갑이다. 왕 즉위 시기도 비슷한데 한 명은 대한제국을 점령했고, 한 명은 빼앗겼다라고 한다면 이건 무한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고종의 정치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고종이 대단히 훌륭한 군주였다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거야말로 어불성설이다. 왕조국가에서 임금이 훌륭한데 나라가 망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치란 혼자 할 수 없고 누군가와 손잡을 수밖에 없는데, 당시 고종이 선택할 수 있는 정치세력으로는 농민들이 들고 일어난 동학 세력이 있었다. 인조반정 이래 온갖 적패 속에서 착취당하던 이들이었기에 그들과 손잡고 정치쇄신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종은 손을 잡기는커녕 오히려 동학농민혁명을 좌절시키기 위해 청나라 군사를 불러들였다. 심지어 당시 전봉준과 전주화약을 맺고 동학농민군이 더 이상 북상을 안 하고 전주에 머물러 있던 상황인데, 자국의 국민을 배신하고 외세인 청나라군을 끌어들여 진압하려다가 청진조약에 의해 일본군까지 들어오는 바람에 결국 망국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이렇게 농민세력과의 연결은 무산되면서 차선책은 개화파밖에 없었다. 김옥균 중심의 급진개화파, 김홍집 중심의 온건개화파였는데 급진개화파는 갑신정변 때 모두 죽여 버렸고, 온건개화파마저 아관파천 때 다 죽이고 나니 개화파 자체를 고종이 다 죽인 거나 마찬가지다.

그러고 나니 남는 것은 이완용 같은 인물밖에 없어서 결국 제국을 빼앗기게 된 것이다.

이렇게 선택의 순간마다 가장 최악의 선택을 한 인물이 고종인데 이 인물을 훌륭하다고 말하는 건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판단이 거의 제로인 상태의 이야기라고 볼 수밖에 없다.

 

※ 아관파천 [俄館播遷]

 

명성황후가 살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가 1896년(건양 1) 2월 11일부터 약 1년간 왕궁을 버리고 러시아 공관에 옮겨 거처한 사건. 노관(露館)파천이라고도 한다. 을미사변 이후 일본세력의 배경으로 조직된 제3차 김홍집(金弘集)내각은 일세일원연호(一世一元年號) ·태양력 사용, 군제개혁, 단발령의 실시 등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명성황후의 살해와 단발령의 실시는 친일내각과 그 배후세력인 일본에 대한 국민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자극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났다.

 

이범진(李範晉) ·이완용(李完用) 등의 친러파 세력은 친위대(親衛隊)가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지방으로 분산될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세력만회와 신변에 불안을 느끼고 있던 고종의 희망에 따라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협의, 파천계획을 진행하였다. 이들은 미리 인천에 와 있던 러시아 수병(水兵) 150명과 포(砲) 1문을 서울로 이동하고 2월 11일 새벽 국왕과 왕세자를 극비밀리에 정동(貞洞)에 있던 러시아 공관으로 옮겼다.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한 고종은 즉시 김홍집 ·유길준(兪吉濬) ·정병하(鄭秉夏) ·조희연(趙羲淵) ·장박(張博) 등의 5대신을 역적으로 규정하여 포살(捕殺) 명령을 내려 김홍집 ·정병하 ·어윤중(魚允中)은 군중에게 타살되고 유길준 ·조희연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로써 친일내각은 몰락하고 박정양(朴定陽:首相 ·內相) ·이완용(外相 ·學相 ·農相) ·이윤용(李允用:軍相) ·윤용선(尹容善:度支相) ·이범진(法相 ·警務使) 등의 친러파 정부가 구성되었는데, 중심인물은 이범진이었다.

 

신정부는 의병항쟁을 불문에 부치고, 죄수들을 석방하는 등 민심수습에 힘쓰고, 일본세력으로 개혁하였던 제도를 구제(舊制)로 환원하였다. 일시에 지지기반을 상실한 일본측은 독립국가의 체면을 내세워 국왕의 조속한 환궁을 요청하였으나 고종은 ‘불안 ·공포의 궁전보다는 노국공관의 일실(一室)이 안정하니 당분간 환궁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이를 계기로 조선왕조의 보호국을 자처하게 된 러시아는 조선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압록강 연안과 울릉도의 삼림채벌권을 비롯하여 경원(慶源) ·종성(鐘城)의 채광권, 경원전신선(京元電信線)을 시베리아 전선에 연결하는 권리, 인천 월미도 저탄소(炭所) 설치권 등 경제적 이권을 차지했다.

 

이에 구미열강(歐美列强)도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여 경인(京仁) 및 경의선(京義線) 철도부설권 등 중요이권이 값싼 조건으로 외국에 넘어갔다. 아관파천 1년 간은 내정에 있어서도 러시아의 강한 영향력 밑에 놓이게 되어 정부 각부에 러시아인 고문과 사관(士官)이 초빙되고, 러시아 무기가 구입되어 중앙 군제도 러시아식으로 개편되었으며 재정도 러시아인 재정고문에 의해 농단되었다. 1897년 2월 25일, 고종은 러시아의 영향에서 벗어나라는 내외의 압력에 따라 러시아 공관을 떠나 경운궁(慶運宮:덕수궁)으로 환궁하고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고 왕을 황제라 칭하여 중외에 독립제국임을 선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