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안산에는 조선 후기에 만 권의 서책을 지닌 집이 2곳이나 있었다. 하나는 청문당이라 불리고, 다른 하나는 경성당이라 불렸다. 두 집 사이의 거리는 500m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당시 만 권의 서책을 지닌 곳이 전국에 4곳뿐이었다는데, 그 가운데 2곳이나, 그것도 서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조건은 안산에서 실학이 발전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공부하는 사람에게 책은 양식이나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실제로 이곳에서 4k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조선 실학의 큰 별인 성호 이익 선생이 살았다.
아마 성호 이익 선생은 청문당과 경성당에서 서책을 빌려다 보며 자신의 사상을 가다듬지 않았을까? 실제로 순암 안정복은 이곳에서 서책을 빌릴 수 없겠냐는 내용의 정중한 서찰을 보내기도 하였다.
청문당은 텃밭을 오가며 늘상 지나다니는 곳이기도 하고, 안산시에서 새로 단장을 하면서 사람이 살지 않는 죽은 집으로 만들어 놓아 영 마음이 가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은 경성당이나 한번 갈까 하는 맘으로 텃밭에 갔다가 발걸음을 그리로 옮겼다.
이곳을 지나다닌 지 5년도 넘었건만 가는 건 오늘이 처음이다. 아무래도 그곳으로 갈 일이 없다 보니 자연스레 그냥 지나치게 되었다. 오늘 이렇게 막상 찾아가려고 하니 웬지 설렌다.
굴다리를 지나니 오른쪽으로 축사가 자리하고 있다. 순간 갑자기 뭐가 있기나 한 것인가 의심이 일어났지만 그냥 묵묵히 발걸음을 옮겨 오르막길을 올랐다. 그러자, 눈 앞으로 오래된 집 한 채가 보인다.
▲ 나무에 가려 있는 경성당 조용하고 평화로운 오후의 한때.
가까이 다가가니 반듯하게 잘 지어진 한옥이 우렁차게 서 있다. 비록 집 앞쪽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 때문에 옛 풍광은 잃었지만, 그 풍채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었다.
더 반가운 것은 청문당과 달리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어 깔끔하게 관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들리는 이야기에 따르면 집을 구경하고 싶으면 주인에게 청하면 가능하다고 하니 이런 호사가 어디 있을까.
▲ 멋진 누마루가 돋보이는 사랑채 가까이 다가가니 멋스러운 전통 한옥이 자리하고 있다. 더운 여름날 저 누마루에 앉아 문을 열고 바람을 맞으며 낮잠을 즐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난 양반하곤 거리가 멀다. 공부하는 방에서 낮잠 잘 생각이나 하다니... 누마루 앞쪽으로 연못이 있을 만한데 보이지 않아 아쉬웠다.
누마루에 걸린 주련柱聯을 보니 내용이 재밌다. 3개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山高華帽峰下居簪纓之族村深覆釜谷中有鐘鼎之家(높은 산 화모봉 아래 빗살처럼 모여 사는 한 가문, 이들이 사는 깊은 골 부곡에는 집들이 솥발처럼 들어섰구나)
宣廟賜牌之局寸土勿輿於他人(선조께서 내려주신 땅, 한 줌이라도 남에게 넘기지 말라)
星祖定礎之基十世相傳于後裔(성조께서 터를 잡으신 곳이니 후세까지 보전하라)
▲ 경성당 앞마당 연못이 있을 만한 자리이나 그냥 정원처럼 꾸며 놓았다. 저 멀리 고속도로만 아니면 정말 천하의 명당이 아닐까. 청문당보다 오히려 위치가 더 좋은 듯하다. 주련에 나오는 화모봉은 사진 왼쪽에 서 있다.
툇마루 위쪽을 보니 현판이 걸려 있다. 하나는 이 집을 지으면서 기록한 경성당기竟成堂記, 하나는 경성당이란 이름을 쓴 것이다.
경성당이란 현판에는 동농이란 호가 적혀 있다. 찾아보니 그 호는 김가진金嘉鎭이란 사람의 호라고 한다.
그는 1846년에 태어나 1922년 상해에서 죽었는데, 안동 김씨 집안의 사람으로 일제강점기인 1910년 남작 작위를 수여받았다가 반납하고, 이후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했다고 한다.
그분이 쓴 글씨니 시간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게다. 그래도 그 필체가 정말 멋지다.
▲ 경성당 현판 동농 김가진의 글씨. 웬지 굳은 절개가 느껴지는 듯하다.
▲ 경성당기 이 집을 짓게 된 내력을 밝힌 내용.
내친 김에 이 집의 유래를 알아보니 柳重序(1779~1846)라는 사람이 둘째아들인 방(1823~1887)의 살림을 내주면서 지어준 집이라고 한다.
김가진과는 그 둘째아들과 친분이 있었을지 모르겠다. 역사 공부하는 분들이 어렵겠지만 둘의 관계를 캐서 알려주면 좋겠다.
아무튼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미루어 따지면 200년 가까이 된 집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시멘트 건물은 몇 십 년이라도 서 있으면 대단한 거지만, 나무로 지은 한옥은 어떻게 그리 오랜 세월을 버티고 서 있는지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김가진이란 인물과 연결이 될 정도면 조선 말기까지도 이 집안의 세력이 대단했나 보다.
▲ 연자방아에 새긴 글씨 집 앞마당에는 만수동천이라고 새긴 연자방아를 불 수 있다. 그 크기로 보아, 만약 이 동네에서 썼던 것이라면 이 일대에서 농사를 엄청난 규모로 지었다고 할 수 있다.
▲ 우거진 숲 정말 만수동이란 이름에 걸맞게 아직도 나무들이 엄청 우거져 있다. 이 집을 지나 안쪽으로 쭉 걸어 들어가도 멋진 숲을 만날 수 있다.
경성당을 보면서 계속 드는 생각은 역시 집에는 사람이 살아야 한다는 거다. 사람이 살면서 자꾸 쓸고 닦고 손길을 줘야 제대로 집다운 집으로 서 있을 수 있다.
지척에 있는 청문당과 경성당을 계속 비교하게 된다.
다 쓰러져가는 집이었어도 예전에 청문당에 사람이 살았을 때가 더 좋았다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집은 사람이 살아야 한다. 박물관이나 문화재를 가면 늘 드는 생각이, 그런 곳들은 아무 생명력 없이 죽어 있다는 점이다.
보존을 위한 보존이 아니라 지금 사람들과 함께 살아 숨쉬며 공존하는 방안을 마련할 수는 없는 것인가?
개발 논리에 밀려 사라지거나 그 생명력을 잃어버리는 문화재를 볼 때마다 안타까움이 드는 건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 경성당 사랑채의 기단 기단으로 쌓은 돌들의 질서정연함. 잘 지은 집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집을 찾은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채 누마루 바로 옆에 있는 그 좋다는 옻나무 우물이다.
정말 소문대로 여러 효능이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만수동의 울창한 숲이 내뱉는 맑은 물이 예전부터 끊임없이 퐁퐁 샘솟고 있다. 물맛은 사 마시는 생수는 여기에 비할 수 없다.
▲ 옻나무 우물 우물 옆에 선 옻나무는 수령이 500년 가까이 되었다고 한다.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으니 자유롭게 오가며 물을 떠 갈 수 있다. 여기서 물 한 병 떠서 그대로 산으로 오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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