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거최설안산호 生居最設安山好
안산 행궁에서 하룻밤을 지낸 정조는 안산을 떠나며 '生居最說安山好(살아서 거주하는 곳 안산이 가장 좋다고들 하는데)'라는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남겼다.
正祖大王(정조대왕)의 御製詩(어제시) 地勢盤如萬朶蓮 (지세반여만타연)-지세는 만 송이 연꽃처럼 서려 있는데 尋常魚蟹不論錢 (심상어해부논전)-물고기와 게는 너무 흔해 돈으로 논하지 않고 生居最說安山好 (생거최설안산호)-살아서 거주하는 곳 안산이 가장 좋다고들 하는데 況復穰穰大有年 (황복양양대유년)-벼까지 잘 여물어 크게 풍년이 들었음에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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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안산읍성문화제
작년에 이어 두번째 열리는 문화제이다.
안산에서 개최되는 여러행사 가운데 안산의 옛 모습을 가장 잘 알 수 있고
안산시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문화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문에 보도된 바에 의하면 예산을 비롯한 안산시의 지원은
다른 축제나 문화제에 비해 턱없이 적은 것으로 보도되었다.
그러나 행사는 수암동 주민의 노력으로 잘 치루어졌다.
TV에서 항상 볼 수 있는 유명가수를 비싼 돈 주고 부르고
안산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알 수도 없는 행사
그리고 '학술심포지움'이라고하면서 학술과 관련도 없는 사람들이 나와
토론아닌 잡담을 하는 학술대회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진정 동네사람들의 축제였다.
물론 '옥'에도 '티'가 있듯이 여기에도 '티'는 있었다.
동시에 여러행사가 진행되었다.
제일 먼저 진행된 것은 안산의 鎭山인 취암(鷲巖 ; 일본의 영향으로 수암봉이라 개명되었다)을 관장하는 산신께 드리는 산신제였다.
현재 안산에서 산신제를 올리는 곳은 팔곡동, 화정동, 광덕산 등 여러 곳이 있다.
진행이 좀 미숙한 면도 있었지만 때마침 산을 오르는 등산객의 호응이 좋았다.
정조대왕 안산 행궁 행차시연은 1797년 음력 8월 16일 당시 정조의 어가행렬이
안산에 당도하던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원래 어가행렬은 적게는 1천여 명에서 많게는 5천명에 이르는 거대한 행렬이었다.
이러한 행렬이 안산을 지나갔고, 또한 이곳 안산 행궁(안산객사)에서 임금이 하룻밤 묵었다는 사실은 안산 역사에 전무후무한 일로, 2010년 안산객사를 복원하며 개최하는 안산읍성 문화예술제는 매우 뜻 깊은 일이라 할 수 있다.
실제 어가행렬보다는 초라하기 그지 없었지만 옛날 안산을 되짚어보기에 충분했다.
옛 안산의 사진을 모아 사진전을 열었다.
단원 김홍도와 그의 스승 표암 강세황이 예술세계를 펼쳤던 옛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옛 사진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감격적이었다.
그러나 단원 김홍도의 미술이 싹텄던 이곳의 구(區)명칭은 '단원구'가 아닌 '상록구'이다.
무엇인가 걸맞지 않은 모습에 마음이 씁쓸해진다.
정조가 하룻밤 묵고간 안산행궁. 최근에 복원되었다.
1797년 추석날 한양을 출발한 정조대왕은 평소 다니던 노량진․금천․화성으로 가는 길을 놔두고 양천(陽川)을 거쳐 김포의 장릉을 참배하고 하룻밤을 묵었다. 16일 아침 김포를 떠나 부평을 거쳐 안산에 이르렀을 때는 야심한 시각이었다.
안산 행궁에서 하룻밤을 지낸 정조는 안산을 떠나며
'生居最說安山好(살아서 거주하는 곳 안산이 가장 좋다고들 하는데)'라는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남겼다.
正祖大王의 御製 詩
地勢盤如萬朶蓮 (지세반여만타연)-지세는 만 송이 연꽃처럼 서려 있는데
尋常魚蟹不論錢 (심상어해부논전)-물고기와 게는 너무 흔해 돈으로 논하지 않고
生居最說安山好 (생거최설안산호)-살아서 거주하는 곳 안산이 가장 좋다고들 하는데
況復穰穰大有年 (황복양양대유년)-벼까지 잘 여물어 크게 풍년이 들었음에랴.
안산을 떠나 구포(鷗浦)를 거쳐 화성 현륭원(顯隆園)에 이르러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화성행궁에서 이틀을 묵은 정조는 평소대로 지지대고개를 넘어 시흥과 노량진을 거쳐 한양으로 돌아갔다.
이때 “안산 백성이 관가에서 빌린 곡식 중 가장 오래된 1년 조를 탕감하고, 금년에 빌려간 곡식에 대한
이자를 특별히 면제하라”는 특전을 내렸다.
그리고 어가행차가 지나간 고을의 수령에게 명하여 한 고을마다 3통씩 제목을 내걸고서 과거(科擧)를 보아 시권(詩券)을 거두어 올리게 하였다.
안산에 대하여는 아래와 같은 제목으로 시험에 응하도록 하였다.
부(賦)는 어제 시(御製 詩) - “생거최설안산호(生居最說安山好) 황복양양대유년 (況復穰穰大有年)”
시(詩)는 “봉사남경취전당홍종지호왈연성(奉使南京取錢塘紅種之號曰蓮城)”
명(銘)은 “평근루(平近樓)”
이 과거시험에서 장원은 시(詩)부문에서 권중술(權中述), 부(賦)부문에서 안산군 동몽교관 (童蒙敎官)인 김집(金鏶) 명(銘)부문에서 전주 최씨 진사 최홍진(崔鴻晋)이
각각 부문별 1등을 차지했는데, 장원 3인 중 1등으로는 최홍진이 뽑혔다.
이 중 김집과 최홍진은 오랫동안 안산에서 세거한 안산 사람이었다.
특히 최홍진은 안산문단(安山文壇)을 여는데 지도자적 위치에 있던 최성대의 종손(從孫) 이며, 조선후기 안산을 문화운동의 중심지로 이끌었던 해암(海巖) 유경종(柳慶種)의 사위이다. 최홍진은 이날의 장원으로 1801년(순조 1) 4월 24일에 거행된 별시문과 (別試文科)에 직부(直赴)되어 병과(丙科)로 급제하였고, 벼슬은 승문원 정자(正字)를 지냈으며 안산에 은퇴하여 살았다.
국적도 없고 안산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도 없는 내용의 축제보다는
안산에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사실을 재현하는 읍성문화제가 지속적으로 열리기를
바란다.
정조대왕도 극찬하였던 1만 송이의 연꽃과 같은 안산의 지세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안산에서 우리의 상징인 연꽃을 볼 수 없고
안산의 정체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1만송이의 다른 꽃을 보아야만 한다.
아쉬운 마음은 나만의 생각일까?
출처 : http://blog.daum.net/maro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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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회 안산읍성문화예술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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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동은 지난 11월 14일 주민들에게 우리 지역 문화재의 의미와 가치를 알리기 위해 안산읍성 문화제를 개최하여 주민들로부터 좋은 호응을 얻었다. 장기간에 걸친 복원사업으로 주민들의 불만이 쌓여있던 경기도 지정 문화재『안산읍성 및 관아지터』에 대하여 문화제를 개최함으로써 『안산읍성 및 관아지터』가 우리 동내 발전을 저해하는 애물단지가 아닌 역사와 전통이 깃든 유서 깊은 문화유적이며 복원사업이 완료 되면 훌륭한 관광 상품으로써 지역발전에 이바지 할 수 있다는 점을 주민 스스로가 깨닫고 자긍심을 느낄 수 있는 의식전환의 계기가 되는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제1회 안산읍성 문화제 개최
역사와 전통이 깃든 유서 깊은 문화유적 홍보
서은영 2009-11-25 오후 4: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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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읍성문화제 2,000여 주민 '성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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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수암봉 주차장서 개최 문화적 자긍심 고취, 시민화합의 장으로
안산의 대표적인 문화재 가운데 하나인 상록구 수암동 옛 안산읍성의 문화적 가치를 다시 되새기고 이를 널리 알림 으로써 지역 주민은 물론 안산시민들에게 문화적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한 제1회 안산읍성문화제가 지난 14일 수암봉 공영 주차장에서 박주원 안산
시장, 심정구 안산시의회 의장, 박순자 한나라당 최고위원, 김영환 민주당 국회의원 및 시민 등 2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개최됐다.
안산읍성 문화제위원회가 주최하고 안산동 주민센터가 주관한 이번 문화제는 안산시와 안산문화원, 경기 문화재단 등의 협조로 진행됐으며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문화제에 참석한 시민들은 다채롭게 마련된 갖가지 프로그램을 즐기며 잊고 지냈던 안산읍성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기도 했다.
한 시민은 "매주 수암봉에 다니면서도 바로 이곳에 경기도 지정 문화재인 안산읍성 및 관아지 터가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며 "하산하던 도중 문화제가 열리는 것을 보고 소중한 안산의 문화재에 대해 알게 돼 기쁘 다"고 말했다.
이날 제1회 안산읍성 문화재는 공식행사와 함께 산신제가 모셔졌으며 옛 원님 행차를 재현한 행사와 원님 주관 과거시험을 재현한 백일장 및 사생대회, 안산읍성과 유적지 등의 모습을 담은 역사사진전 등이 함께 개최됐다.
또한 새끼꼬기, 한궁대회, 역사OX퀴즈 등 주민들이 함께 참여하는 민속놀이와 무공 김유연선생이 직접 써 주는 가훈짓기 행사, 안산읍성과 사직단터 등을 둘러보는 유적지 순례, 그리고 시민들이 자신의 가족들과의 행복한 순간을 카메라에 담은 '행복한 가족사진전 등이 열려 참가자들을 즐겁게 했다.
처음으로 안산읍성 문화제가 개최돼 가슴 뿌듯하다는 안산동 한 주민은 "안산은 문화와 예술의 도시임에도 안산동은 외곽에 위치한 도,농 복합지역이어서 문화적으로 소외된 측면이 있었다"며 그러나 "안산 대표 문화재인 안산읍성과 관아지 터를 알리는 뜻 깊은 이번 문화재가 개최되게 돼 누구보다 이 지역 주민들이 좋아한다"고 말했다.
행사를 주최한 안산읍성문화제위원회 김남용 위원은 "안산읍성을 비롯한 안산동의 수많은 문화유적에 대한 가치를 널리 알리고 그 의미를 찾아보자는 취지로 축제를 마련하게 됐다"며 "이같은 문화제를 통해 주민들이 자긍심을 느끼고, 또 이 문화제가 75만 안산시민 모두가 하나 되는 화합의 장으로 자리 잡기를 진심으로 바란 다"고 말했다.
제1회 안산읍성 문화제 개최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경기도의회 김제연 의원은 "문화제가 개최되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신 관계기관과 축제를 준비하고 또 짜임새 있게 진행하신 관계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며 "앞으로 안산읍성 문화제가 더욱 알차고 내실 있게 진행돼 안산의 대표적 문화유적을 기리는 시민 축제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안산읍성 및 관아지는 조선시대는 안산군의 진산(鎭山)인 수암봉에서 서쪽으로 길게 뻗는 100미터 이내의 능선을 이용하여 평지를 감싸도록 고려후기 이후에 축성된 전형적인 평산성(平山城)으로 수암동 산 26-4번지 일원에 위치해 있다.
성이 축조된 시기에는 해안으로 침입하던 왜구에 대비하여 이곳에 읍성을 축조하고, 바로 뒤편의 수리산이 천험의 산세를 가지고 있어 따로 산성을 축조하지 않아도 피난이 가능했다고 여겨지는 성으로 우리나라 조선 시대 읍성 성립이전의 발생한 읍성으로서 매우 귀중한 문화재적 자료로 평가 된다.
전체의 둘레는 772.2m로 북벽 219.4m, 동벽 180.6m, 남벽 197.5, 서벽 174.7m의 성이며 축조방법은 성벽의 내외면을 쌓아 올리는 공법을 사용했다. 배후에 해발 3백 95m인 수암봉을 의지하고 있어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새이다.
사진2 : 안산읍성문화제에서는 옛 원님행차를 비롯한 민속놀이 등이 마련돼 참석한 시민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사진3 : 김창일 안산읍성문화제 위원장이 이번 축제 개최 및 안산동 발전에 많은 노력을 한 김제연 도의원에게 감사패를 전달하고 있다.
사진4 : 이번 축제에 참석한 주민들이 한마음으로 축제를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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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祖大王(정조대왕)의 御製詩(어제시)
'生居最說安山好 (생거최설안산호)'
地 勢 盤 如 萬 朶 蓮 (지세반여만타연)
소반 같은 땅 모양은 일만송이 연꽃과 같고
尋 常 魚 蟹 不 論 錢 (심상어해부논전)
물고기와 게는 너무 흔해 돈으로 논하지 않고
生 居 最 說 安 山 好 (생거최설안산호)
살아서 거주하는 곳 안산이 가장 좋다고들 하는데
況 復 穰 穰 大 有 年 (황복양양대유년)
벼까지 잘 여물어 크게 풍년이 들었음에랴
이 시는 조선 제22대 임금인 正祖大王(정조대왕)이 안산에 와서 하룻밤
묵으며 지은 御製詩(어제시)입니다.
서기1797년(정조21년)8월 16일, 정조대왕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인
현릉원 행행길에 안산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노량진에서 시흥을 거쳐 화성에 이르는 평소의 행차길을 버리고 양천을
거쳐 부평행궁에서 잠시 쉬고 날이 저문 무렵에 안산에 도달하여 안산관아
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는데
그 이튿날 화성행궁으로 떠나기 전 서울에서 안산까지 임금의 수레가 거쳐 온 10개 邑(읍)의 선비들에게 임금이 親臨(친림)하는 과거시험을 베풀었는
데, 이 때 정조대왕이 직접 시제를 내렸습니다.
이는 조선시대 안산군읍지 '丁巳(정사) 幸行詩士(행행시사) 御題(어제)'
편에 나오는 것으로 거기에서는 안산의 지형을 부채를 반 쯤 펼친 것과 같아 한쪽면은 산에 의탁하고 다른 세 모퉁이는 바다로 둘러 쌓였으며 邑治(읍치)는 동쪽 높은 산 아래 있고 面(면)과 里(리)는 서쪽 연해변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동쪽의 면에는 밭이 많고 논이 적으며, 서쪽의 면에는 논이 많고 기장과 피, 벼 등이 각기 알맞게 자라고 또한 산에서 나물을 캐고 물에서 고기를 잡는 즐거움과 물고기, 소금, 땔나무, 물의 좋음이 있으므로 위와 같은 어제시를
내렸다고 합니다.
안산이 살기 좋은 곳임을 말해 주는 역사적 기록입니다.
안산의 지명이 安山인 것은 지형이 매우 안정적이고 일만송이 연꽃이
서로 어깨를 대고 피어 있는 지세이기 때문에 아주 편안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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