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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지리
1. 안산 연혁
안산은 삼국 시대에 고구려가 장항구현(獐項口縣)을, 삼국통일 후 통일신라가 장구군(獐口郡)을 설치했던 곳이다. 그 위치는 고종 시대에 발간된 「안산군읍지」 등의 문헌에 장곡(獐谷)으로 기록된 곳으로, 지금의 장상동 노리울(노루혈;獐口穴) 밤석골에서 고깔봉에 이르는 큰골 부근으로 추정된다.
이곳에 있던 관아는 그후 안산군 치소(治所)에서 서쪽으로 30리 떨어진 안산군 와리면 능내리(현재의 안산시 목내동 능안)으로 옮겨졌다가, 1441년(세종 23)에 이곳이 소릉(昭陵;문종의 왕비이며 단종의 생모인 현덕왕후의 능)의 적지로 선정되자 안산군 군내면 서정리(수암동)로 옮겼다. 그후 조선 시대에 안산 관아가 위치했던 곳은 수암동 독수리마을로, 수암봉의 서남쪽 아랫자락이다.
그런데 우암 송시열의 문집인 「송자대전(宋子大全)」에 수록된 ‘안산현관사중수기(安山縣官舍重建記<권 141>)’를 보면, 17세기 후반에 수암동에서 다시 현재의 위치로 옮겼음을 알 수 있다.
사진 1-1 안산읍성 및 관아지. 안산시 수암동 산 26-4 일원에 있다. 경기도기념물 제127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거치면서 여러 건물이 무너지고 퇴락해 안산현감 이제두(李齊杜)가 선혜청 당상인 김좌명(金佐明)의 도움을 받아 옛 관아 동쪽에 1668년(현종 9) 가을부터 터를 닦기 시작하여, 1669년(현종 10) 3월 27일에 여러 건물을 준공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때는 이전 중심지에서 동쪽으로 이전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의 중심지였던 이곳은 현재는 기단석과 읍성 일부만이 남아 옛 자취를 보여 주고 있다. 당시 이제두를 안산군수가 아닌 안산현감으로 기술한 것은, 1663년(현종 4)에 생이(生伊)라는 사람이 고을의 전패(殿牌)를 훔치는 사건이 발생해, 그의 목을 베고 그의 태생지인 안산군을 현으로 강등시킴과 아울러 군수를 파직하였기 때문이다.
1895년 전국의 지방관제를 23부로 개정할 때 인천부 관할의 안산군이 되었다가, 1896년 8월에 23부제를 폐지하고 13도제로 지방행정구역을 개편함에 따라 다시 4등군으로서 경기도에 편입되었다. 1906년에는 전국의 월경지(越境地) 정리에 의해 안산군 남쪽과 수원부 북쪽 사이로 뻗어 있던 광주군의 성곶면·북방면·월곡면이 안산군으로 편입되었다.
1910년 일본은 강제로 국권을 침탈한 후 행정구역 개편을 추진하였는데, 1914년 대대적인 군면 폐합으로 안산군은 폐지되고 시흥군에 합속되었다. 이 때 면리의 폐합도 이루어졌다. 군내면·인화면·초산면이 수암면으로, 마유면·대월면·와리면이 군자면으로 폐합되어 시흥군에 합속되고, 월곡면·북방면·성곶면은 반월면이 되어 수원군 관할이 되었다.
안산에 관한 최초의 기록인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안산은 고구려의 장항구현(獐項口縣)이었다. 삼국통일 후에는 장구군(獐口郡)으로 바뀌어 한주(漢州)에 속하였고, 동시에 군태촌(郡太寸)을 새로 배치하였다가 940년(고려 태조 23)에 안산현(安山縣)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몇 차례 행정구역이 변경되었으며 1009~1031년 현종 초에 양광도(楊廣道) 남경수부 양주 소속의 수주군(水州郡) 안산현(安山縣)이 되었다가 1308년(충렬왕 34)에 덕종·정종·문종이 탄생한 명예로운 곳이라 하여 안산군(安山郡)으로 승격된 뒤 지사(知事)의 다스림을 받았다.
1413년(태종 13) 전면적인 지방통치 조직이 개편되었고, 1656년(효종 7)에 이곳 초지진(草芝鎭)을 강화도로 옮기면서 종래 안산의 초지진을 1초지, 강화를 2초지라고 부를 만큼 서해안의 주요 요새 역할을 하였다.
1793년(정조 17)에는 수원부(水原府)로 일시 이속되었다. 그후 1895년(고종 32) 인천부에 속한 오등군(五登郡)이었다가 1896년 경기도 사등군(四登郡)이 되었다.
이후 몇 차례의 변화를 겪다가 1914년 안산군·과천군·시흥군으로 통합되었다. 1976년 시흥군 군자면과 수암면, 화성군 반월면 일대를 포함하는 '반월신공업도시' 건설계획 발표 이후 반월출장소를 설치하였고, 1986년 1월 1일 안산시로 승격하였다. 1994년 12월에는 화성군 반월면 일부와 옹진군 대부면 전체를 편입하였다.
1995년 4월 시흥시 화정동 일부와 장상동·장하동·수암동이 편입되어 안산동이 신설되었다. 1996년 사동이 사1동과 사2동으로, 본오2동이 본오2동과 본오3동으로 각각 분리되었으며, 1998년 10월 공단동이 초지동으로 통합되었다. 2002년 11월 1일 단원구(檀園區)와 상록구(常綠區)가 신설되었다.
2004년 현재 단원구의 와동, 고잔동, 원곡본동, 원곡동, 초지동, 선부동, 대부출장소(대부동)와 상록구의 일동, 사동, 본오동, 부곡동, 월피동, 성포동, 반월동, 안산동 등 2구 23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 안산시의 연혁 *
고구려 - 장항구현(獐項口縣)
757년 - 장구군(獐口郡)
940년 - 안산현(安山縣)
1308년 – 안산군(安山郡)
1400년 – 좌명공신 김정경 연성군(蓮成君) 봉군 / 안산 별호 연성(蓮成)
※ 1400년 이전부터 안산의 별호는 연성(蓮成)
1463년(세조 9) - 안산 별호(別號) → 연성(蓮成) 기록 있음
1914년 3월 - 시흥군(始興郡)
1976년 12월 - 반월 신도시 건설 결정
1977년 1월 - 경기도 반월지원 사업소 설치
1979년 8월 - 경기도 반월지구 출장소 설치
1986년 1월 1월 - 안산시 승격(법률 제 3798호)
안산의 별호인 연성(蓮城)을 1463년(세조 9)에 연꽃인 전당홍(錢塘紅)의 씨와 뿌리를 중국에서 강희맹이 가져와 안산의 별서(別墅)에 심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연성(蓮城) 별호의 시작을 강희맹과 결부시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보다 63년이나 앞선 1400년(정종 2년) 김정경이 한성부윤에 있을 때 제 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고, 좌명공신에 책봉된 김정경이 연성군(蓮城君)에 봉군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봉군의 명칭은 주로 살고 있는 지역과 결부된다.
연성군 김정경의 연성(蓮城)은 그가 거성으로 삼아 거주했던 곳의 명칭이고, 고려시대 안산 지역의 중심이 되는 안산읍성의 원래 명칭을 연성(蓮城)으로 추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통훈대부(정3품) 사재감정 김맹전 지묘 (사재정공 휘 맹전 지묘) : 연성군 손자 * 묘소 : 안산시 선부동 석수골 숙인 경주이씨 묘소 : 광주(廣州) 현천리(玄川里) = 하남시 감북동(위정공 묘소 우측 안장) 숙인 선산김씨 묘소 사재정공 맹전 합장
연성군 묘(위정공 김정경), 정경부인 화혜택주 개성왕씨 묘, 위정각 (재실) * 택주 : 군(君)부인 호칭 연성군 김정경 묘 (하남시 감북동) 위정각 정문 추충문 (위정각 : 하남시 감북동 소재, 위정사 : 충북 괴산군 장연면 소재) 위정사 : 충북 괴산군 장연면 광진리 291 1994년 1월 7일 충청북도문화재자료 제12호로 지정되었다. 1667년(숙종 8) 김정경(金定卿)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하기 위하여 건립된 사당이다. 매년 음력 7월 15일과 10월 29일 2차례 향사한다. 김정경(金定卿) 세거지 안산시 수암동 253번지 일대로 추정된다. 이곳은 고려 시대 읍성과 조선 시대 안산군 관아가 있었던 곳이다. 안산군읍지」를 보면 “관사의 뒤에 토체형지가 있는데 이곳은 연성군(蓮城君) 김정경의 세거지이다.은행나무 3주 역시 그가 직접 심은 것이라고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곳에는 현재 수령이 6백 년 정도된 것으로 보이는 은행나무 3그루가 있는데, 가운데 있는 것은 불에 타서 몸통의 일부만 남아 있다. 집터가 있었다고 하는 관사의 뒤쪽에는 곳곳에 넓고 평탄한 대지가 형성되어 있는데 현재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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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지명 유래 제1절 수암, 군자, 반월 지역 (1) 고잔동 조선 시대에는 안산군 잉화면 고잔리(安山郡 仍火面 古棧里)라 했다가, 1914년 3월 1일 부령 제111호에 따라 시흥군 수암면 고잔리(始興郡 秀岩面 古棧里)로 개칭되었고, 이어 1986년 1월 1일 법률 제3798호에 의거 안산 시 고잔동(安山市 古棧洞)으로 되었다. 고잔동(유래는 ‘원고잔’ 참조)은 행정·교육·금융·경찰 등 안산시의 중심지이다. 남부지역(칠반·도리섬)은 농촌 마을이 현존해 있으며, 동부지역(태봉)은 아파트단지(주공 8단지), 북쪽지역(마산모퉁이·걸뚝·전나무고개)은 택지, 그 중앙지역(적금·마실·원고잔)은 안산시청을 비롯하여 안산경찰서·안산교육청 및 산업은행 등이 자리 잡고 있다. 폐동 전 고잔동의 자연취락은 ① 걸뚝(바라지), ② 고로리(古老里), ③ 고잔역(古棧驛), ④ 너머고잔, ⑤ 당골 [堂谷], ⑥ 도리섬, ⑦ 마산모퉁이, ⑧ 마실[梅實谷],` ⑨ 안터,` ⑩ 원고잔(元古棧),` ⑪ 적금(積金),` ⑫ 전나무 고개,` ⑬ 절골말, ⑭ 칠반(七班), ⑮ 태봉(胎封) 등이었다. 걸뚝(바라지) 일제 초기 이 마을과 동작리 사이에 둑[洑]을 막았다 하여 ‘걸뚝’이라 불렀는데, 이때 수문(水門)도 함께 설치해 바닷물이 나가면 바라지는 곳이므로 ‘바라지’라 부르기도 했다. 와동에서는 걸뚝, 고잔동에서는 ‘바라지’라 각각 칭하였다. 본래 네 집이 살고 있었으나 1978년에 폐동된 후 택지로 조성되어 1988년부터 새로운 민가가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이호성(李鎬星;1925. 4. 6), 와동 125-12. 고로리 고잔동에서 취락이 제일 먼저 형성된 곳이 고로리(古老里)이다. 전나무고개 남쪽에 자리잡은 마을로서 전주 이씨와 광주 안씨 등이 세거해 아홉 집이 살았으나 1977년에 폐동되었다. 현재는 주택지로 조성되어 유신연립 주택 등이 들어서 있다. -`이점돈(李點敦;1917. 4. 15), 와동 116. 고잔역 일제강점기인 1937년 수원-인천간 수인철도가 부설되고 이어 고잔역사(古棧驛舍)가 건립되었으나 곧 폐쇄 되었다. 그후 시흥군 신동면 잠실리(서울시 서초구 잠원동) 출신 이영섭(李英燮;제3대 국회의원)의 주선으로 고잔 간이역이 생기면서 역사 주변에 민가가 들어섰다. 이 마을에 호수가 늘기 시작한 것은 고잔역과 화랑 농장 사이(종합운동장 예정 부지)에 간척지 공사로 갯벌이 농경지로 변모되면서부터이다. 이 마을을 일명 ‘다리간’이라 칭하기도 하는데, 이는 배의 왕래를 위해 수인철도 부설 때 철교를 가설했기 때문이다. -`민병한(閔丙漢;1921. 10. 25), 와동 117-6. 너머고잔 원고잔 너머에 있는 마을이므로 ‘너머고잔’이라 불렀다. 이곳은 경주 설씨가 처음으로 살기 시작했고(전설 ‘매실골과 청년 지관’ 참조), 이어 남양 홍씨가 세거하면서 ‘홍촌(洪村)’이라 불리워질 만큼 홍씨가 번성하였다. 폐동 때(1977년)에는 일곱 집이 있었으며, 현재는 한양빌딩 등이 들어섰다. -`이호성(李鎬星;1925. 4. 6), 와동 125-12. 당골 태봉과 마실 사이에 있었던 마을로, 폐동(1979년) 전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반달형 산기슭에 당(堂)이 있었 으므로 ‘당골[堂谷]’이라 하였다. 이곳에는 청주 한씨 선대의 묘가 있었는데 풍수로 보아 호랑이혈[虎口穴]에 해당되어 청주 한씨가 이 마을에 당도하기만 하면 죽었다고 한다. 그후 안산신도시 개발에 따라 분묘 이장 공고를 했으나 결국에는 후손이 나타나지 않아 무연분묘로 처리되었다. 당골은 해주 최씨가 최초로 세거한 이래 파평 윤씨, 풍양 조씨, 밀양 박씨 등이 세거했고, 폐동 전에는 16호가 살다가 원주민들 대부분이 와동으로 이주했다. 옛 당골 마을은 현재 경안고등학교가 들어섰으며, 이곳은 교육가요 독립운동가였던 최승만(崔承萬; 1897~1984, 신동아 부장, 인하대 및 제주대학장 역임) 선생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조천복(趙天福;1936. 11. 24), 와동 125-3.
고잔역 서남쪽 논 가운데에 흡사 섬처럼 생긴 마을로, 현재는 안산시 고잔 1동 1통에 속해 있다. 이곳은 1910 년대 고잔동을 측량할 때 고잔동 중심에서 지리적으로 원거리에 있을 뿐 아니라, 비만 오면 질퍽해서 화성군 남양 지역을 측량할 때 실시한다고 도리시켰다 하여 ‘도리섬’이라 불렀다고 한다. 도리섬은 1963년에 경기도 수해지구 수재민 5가구가 첫 입주한 이래, 1965년 전북 섬진강 수몰지구 철거민 50 세대가 들어섰고, 이어 1968년까지 3년에 걸쳐 70세대가 입주해 대촌(大村)으로 변모하였다. -`이근식(李根植;1938. 4. 3), 고잔 1동 286-6. 마산모퉁이 월피동 마산모퉁이와 경계를 이루었던 마을로, 이곳 동쪽에 있던 산이 풍수로 보아 말의 형국이므로 마산 (馬山)이라 불렀다고 한다. 마산모퉁이 마을 앞은 예전에 고잔동 주민들이 안양·안산(현 시흥시 수암동)·서울 등지를 가자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교통의 요충지여서 주막(酒幕)과 장시(場市)가 번성하자 산(마산) 모퉁이 에 취락이 형성되었으나 조선 말엽 폐시(廢市)되면서 마을 또한 한촌으로 전락해 폐동 때(1977년)에는 겨우 5호에 불과하였다. 마산모퉁이는 신도시 개발 이후 현재는 초등학교 부지 및 도로로 편입되었다. -`유재일(柳在一;1933. 12. 16), 와동 96. 마실 현 안산시청 자리에 있었던 마을로, 폐동(1977년) 전 안산시 보건소 주변과 우남연립주택 앞에 각각 우물이 있었는데, 이 중 한 곳이 풍수로 보아 매화꽃이 떨어지는 형국[梅花落地形局]이므로 ‘마실[梅實谷]’이라 불렀다. 이들 우물은 일제 때부터 고잔동에서 물맛이 좋기로 평판이 났었는데, 일부에서는 용(龍)의 입(口) 에서 나오는 물 같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물맛이 특이했다. 또한 이곳은 길지(吉地;明堂)라 하여 예로부터 전국 각처의 내노라 하는 지사(地師;地官)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전설 ‘매실골과 설총 가문에 복수한 노비 아들’ 참조). 구전에 따르면 어느 지사가 이곳이 천하 명당이므로 장차 큰 대궐이 들어선다고 예언하였는데, 그후 신도시가 되면서 안산시청 부지로 되었다고 한다. 당골과 원고잔 사이에 위치해 있던 마실은 전주 이씨의 오랜 세거지로 모두 8호(전주 이씨 3, 덕수 이씨 1, 여흥 민씨 1, 문화 유씨 1, 기타 2)가 살았으나 안산신도시 건설로 안산시의 자연취락 중 최초로 폐동되어 원주민들 대부분이 와동으로 이주했다. -`민병수(閔丙壽;1913. 12. 20), 와동 121-12. -`이호성(李鎬星;1925. 4. 6), 와동 125-12. 안터 적금 동남쪽에 있던 마을로, 고잔동에서는 집터가 가장 좋았다고 한다. 이곳은 전주 이씨, 김해 김씨, 청주 한씨 등의 세거지로 9집이 살다가 1977년에 폐동된 후 택지로 조성되어 1989년부터 연립주택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윤용현(尹龍鉉;1924. 11. 8), 와동 109-5. 원고잔(홍촌말) 남양 홍씨 당홍파의 집성촌이라 일명 ‘홍촌말[洪村]’이라 칭했다. 현 안산경찰서 앞에 있던 이 마을은 고잔동 에서는 고로리와 함께 취락이 제일 먼저 형성된 데다가 곶(串) 안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원고잔(元古棧)’이라 불렀다. -`홍정표(洪定杓;1935. 4. 7), 와동 118-11. 적금 이 마을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아주 먼 옛날 이 마을에 어느 노파가 두 아들과 함께 살았다. 노파는 두 아들이 잘 되게 해 달라고 집 앞 고갯 마루에 모셔진 성황당에서 1년간 치성을 드렸다. 그러던 중 하루는 노파의 꿈에 노승이 나타나 어느 곳의 땅을 파 보라고 하였다. 노승이 일러준 대로 땅속을 파니 황금이 나왔다.” 그리하여 이 마을을 ‘적금(積金)’이라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후 수많은 사람들이 마을 북쪽에 있는 산(현 안산시 취수장)에 찾아와 금을 채굴하려고 파헤치기까지 했다 한다. 마산모퉁이 서쪽에 있던 적금은 문화 유씨 한 집이 살다가 1978년 폐동되자 와동으로 이주하였다. 옛 적금 마을은 택지로 변모되어 1988년부터 주택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호성(李鎬星;1925. 4. 6), 와동 125-15. 전나무고개 안터와 적금 사이에 있던 마을로, 이곳 고갯마루에 전나무가 있고 이 전나무 주위에 5집의 민가가 있었으나 1977년 신도시 개발로 폐동된 후 주택지로 조성되어 현재는 삼성연립주택이 들어서 있다. -`김순봉(金順奉;1922. 5. 7), 와동 175. 절골말 마실 서북쪽에 있었던 마을로 밀양 박씨 밀성군파의 집성촌이라 하여 일명 ‘박씨촌(朴氏村)’이라 칭하였다. 이 마을 동쪽 산(마을에서 ‘안산’이라 칭함) 기슭에 절(절 이름 없음)이 있었으므로 ‘절골말’이라 불렀는데, 절은 1977년 폐동과 함께 폐사되고 절터에는 주택이 들어섰다. 마을의 호수는 모두 11호(일양 박씨 10, 경주 최씨 1)로 폐동되자 원주민들 대부분이 와동으로 이주했다. -`박태보(朴泰輔;1917. 2. 26), 와동 117-8. 칠반 마을의 지세가 풍수로 보아 고양이 혈에 해당되므로 ‘괘이부리(고양이부리)’라 칭했다가, 1967년에 황해도 웅진·연백 등지의 난민들이 마을 앞에서 간척지공사를 실시하면서 ‘진흥촌(振興村)’으로 개칭하였다. 그후 이곳은 시흥군 수암면 고잔리 7반에 속해 ‘칠반(七班)’이라 불렀는데, 현재는 안산시 고잔 1동 2통에 속해 있다. 칠반은 너머고잔 동쪽에 있다. -`권오술(權五述;1923. 6. 15), 고잔 1동 286-1. 태봉 당골과 마실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이 마을 서북쪽 산 정상에 고려 때(ㆍ) 왕자의 태(胎)를 묻었다 하여 이 산을 태봉(胎封, 胎峯)이라 칭했고, 그후 산 아래 취락이 생기면서 산 명을 따서 ‘태봉’이라 불렀다. 파평 윤씨, 풍양 조씨 등 모두 11집이 살았으며, 1979년에 폐동되어 주공아파트가 들어섰다. -`윤용현(尹龍鉉;1924. 11. 8), 와동 109-5. (2) 부곡동 조선 시대에는 안산군 군내면 부곡리(安山郡 郡內面 釜谷里)와 신리(新里)였다가, 1914년 3월 1일 부령 제111호에 따라 시흥군 수암면 부곡리(始興郡 秀岩面 釜谷里)로 되었고, 이어 1986년 1월 1일 법률 제3798호 에 따라 안산시 부곡동(安山市 釜谷洞)으로 되었다. 부곡동(유래는 ‘개멸’ 참조)은 진주 유씨 누대의 세거지 인데 시랑골·신촌 등 남부지역은 폐동되어 택지 및 양궁경기장·제일스포츠 등이 들어섰고, 개멸·벌터 등 북부 지역은 자연취락이 현존하나 안산-신갈간 도로가 마을 중앙을 관통하고 있다. 부곡동의 폐동 전 자연마을은 ① 개멸[釜谷], ② 벌터, ③ 새마을, ④ 시랑골[侍郞谷], ⑤ 신촌(新村), ⑥ 옹기마을[店村], ⑦ 정재골[靜齋谷] 등이다.
옹기마을 동쪽으로, 마을 남쪽에 있는 산이 풍수로 보아 가마[釜]를 엎어높은 형국(伏釜形局)이므로 가마산 [伏釜山]이라 했고, 그후 취락이 형성되자 산 명을 취해 가마골이라 불렀는데, 후대에 내려오면서 ‘개멸 [元釜谷]’로 통칭되었다. 이 마을은 진주 유씨 누대의 세거지로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조선왕조 제14대 임금인 선조와 정빈(貞嬪) 홍씨(洪氏)의 소생인 정정옹주(貞正翁主;1595~1666년)가 동갑인 유적(柳Z;1595~ㆍ년)과 혼인하기로 약정되었으나 12세 때 시아버지 될 유시행(柳時行;1566~ㆍ년, 교리)이 별세하자 3년상을 치르었고, 14세 때 뜻밖에 선조가 돌아가자 다시 3년상을 치룬 후인 17세에 이르러 결혼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부군인 유적이 몸이 허약해 25세 때 죽자 청상이 되었다. 한편 유시행은 본래 선산인 충북 괴산군 몽촌에 예장을 치룰 계획이었으나 서울에서 3백 리 이상이나 되는 원거리인 데다가 왕가의 장지는 1백 리를 넘을 수 없다는 법도에 따라 이곳에 사패지를 하사받아 진주 유씨의 세장지가 되면서 후손들이 묘하에 모여 살기 시작했다. 조선 시대에는 안산군 군내면 부곡리라 불렀던 개멸은, 마을 북쪽지역은 나무가 많고 숲이 우거진 곳이라 하여 만수동(萬樹洞)이라 부르고, 동쪽지역은 골짜기 안에 위치한 마을이므로 안골 또는 유석(柳碩;1595~ 1655년, 관찰사)의 묘가 능같이 크다 하여 능안이라 칭하였다. 개멸이라고 하면 보통 능안을 지칭한다. 매년 음력 10월 1일과 3일 사이에 길일을 택해 마을 뒷산인 곤우봉(昆牛峯)에서 산신제를 지내는데, 이곳에는 유석(柳碩) 등의 묘가 있다. -`유해엽(柳海曄;1910. 8. 7), 부곡동 237. 벌터 이곳은 들이 넓어 밭을 가는 농부가 소를 크게 꾸짖는다는 뜻으로 질우지(叱牛地, 또는 耆老地)라 불렀는데, 일제 강점 초인 1910년대에 이르러 안양시 안양 3동 후두미에 살던 유원형(柳元馨)이 농작(農作)을 위해 세거 한 후, 개멸·시랑골 등 거주 주민들이 분가를 하면서 호수가 늘기 시작했다. 정재초등학교 북쪽에 위치한 벌터는 안산-신갈 인터체인지로 편입되었으며, 마을에서는 1986년 이전까지만 해도 해마다 음력 10월 1일~3일 사이에 길일을 택해 개멸 뒷산인 곤우봉에서 산신제를 지냈다. -`유해엽(柳海曄;1910. 8. 7), 부곡동 237. -`유진형(柳晋馨;1908. 11. 7), 부곡동 536-7. 새마을 벌터와 시흥시 장상동 동막골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6·25 직후 황해도 옹진·신천 등 난민들이 정착하면서부터 취락이 형성되었으며, 1970년대의 새마을사업으로 취락구조가 개선되었다. 마을에서는 1986년 이전까지만 해도 음력 10월 1일~3일 사이에 개멸 뒷산인 곤우봉에서 산신제를 지냈다. -`유대형(柳大馨;1934. 12. 6), 부곡동 534-9. 시랑골 조선왕조 제14대 임금인 선조의 사위이자 정정옹주의 부군인 유적의 묘가 부곡동 동쪽 산기슭(제일스포츠센터 앞)에 있는데, 유적이 생전에 이부시랑(吏部侍郞)의 관직을 역임했다 하여 ‘시랑골[侍郞谷]’이라 칭하고 있다. 시랑골은 신촌과 양궁경기장 사이에 있던 마을로 유시행(柳時行)의 후손인 진주 유씨의 세거지이다. 그후 경주 이씨, 평창 이씨, 초계 정씨 등이 세거해 38가구가 살다가 1982년 폐동되어, 원주민들은 부곡동·인천·안양·여주 등지로 분산·이주했고 현재는 택지로 조성되어 있다. -`유진형(柳晋馨;1908. 11. 7), 부곡동 536-7. 신촌 조선 시대에는 안산군 군내면 신동리(安山郡 郡內面 新洞里)라 했다가 조선 말엽에 이르러 신리(新里)로 개칭된 마을로, 시랑골과 제일스포츠센터 사이에 있다. 신촌(新村)은 개멸·시랑골 등지에 살던 유시행의 후손이 분가를 하면서 터를 잡고 살았으며, 그후 나주 나씨, 초계 정씨, 파평 윤씨 등이 세거하면서 취락이 이루어졌다. 폐동 전에는 모두 26호가 살았는데, 원주민들 대부분이 부곡동·인천을 비롯해 장상동 등지로 분산·이주했다. 안산 신도시 개발로 폐동되자 인근의 월피동·부곡동(시랑골·정재골 등) 이주민단지가 조성되어 1980년부터 민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곳에는 유시행(柳時行;교리), 정정옹주(貞正翁主;선조의 딸), 유적(柳Z;진안위), 유영(柳潁;응교) 등의 묘와 제일스포츠센터가 있다. -`유진형(柳晋馨;1908. 11. 7), 부곡동 536-7. 옹기마을 벌터와 개멸 사이에 있는 마을로, 한국전쟁 직후 시흥시 수암동 출신인 유일성 등이 이 마을 초입에서 옹기를 구웠으므로 ‘옹기마을[店村]’이라 칭하였다. 당시 옹기를 굽던 옹기장(甕器匠;도공)들은 대부분 천주교인들로, 이들은 1970년대에 이르러 도시화로 옹기가 사양길에 접어들자 이곳을 떠났고, 옹기를 굽던 가마터는 현대식 가옥들이 들어섰다. 1986년 이전에는 해마다 음력 10월 1일~3일 사이에 길일을 택해서 개멸 뒷산인 곤우봉에서 산신제를 지냈다. -`유해엽(柳海曄;1910. 8. 7), 부곡동 237. 정재골 벌터와 신촌 사이에 있던 마을로, 조선 숙종 때 형조판서를 지낸 유명현(柳命賢;1643~1703년)이 현 안산시 정수장 밑에 살았다는 연고로 그의 아호를 따서 ‘정재골[靜齋谷]’이라 했으며, 그후 그의 아들 유래(柳徠;1687~ ㆍ년, 안동판관)가 이곳에 사당을 지은 후(일제 강점 중엽에 폐사) 그의 후손(진주 유씨)들이 세거하면서 취락이 이루어졌다. 1971년에는 당시 안산국교장(사학규)의 요청으로 후손인 유진형이 교지(校地)로 3천5백여 평을 희사해 정재초등학교가 세워져 교육의 요람지가 되었다. 정재골은 폐동(1984년) 전에는 19호가 살았으나 원주민 대부분이 부곡동 이주단지(신촌)로 이주했다. -`유진형(柳晋馨;1908. 11. 7), 부곡동 536-7. (3) 성포동 조선 시대에는 안산군 군내면 성포리(聲浦里)와 점성리(占星里)였다가 1914년 3월 1일 부령 제111호에 따라 시흥군 수암면 성포리(聲浦里)로 개칭되었고, 이어 1986년 1월 1일 법률 제3798호에 의거 안산시 성포동 (聲浦洞)으로 되었다. 이곳은 어업의 전진기지로, 만선 귀향하는 어부들의 소리가 컸다 하여 성포동이라 칭했다. 성포동의 자연취락은 신도시개발 때 모두 폐동되어 옛 성포리(성머리·독주골)는 고층아파트(예술인 아파트·주공고층아파트) 지역으로 변모되었고, 옛 점성리(첫 지명은 첨성리로, 점섬·계향동·절골)는 택지로 조성되었다. 또 조선 시대의 성포리는 어부들의 삶의 터전으로 바닷 내음이 물신 풍기는 곳이라면, 첨성리는 실학자 성호 이익 선생이 80년간 은둔생활로 학문을 연마하던 조용한 마을이었다. 점성리는 광주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어 역사학자들 간에도 광주 첨성리와 안산 첨성리(점성리)를 서로 혼돈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부언 하면 학문을 연구하던 곳은 안산 첨성리(점성리)이고, 죽어 묻힌 곳은 광주 첨성리인데 신도시개발로 이들 지역이 성호 묘역 외에는 모두 택지로 조성되어 현재는 안산시 일동에 소속되어 있다. 폐동 전 성포동에는 ① 계향동(桂香洞), ② 독주골[獨水谷], ③ 성머리[聲頭], ④ 절골[寺谷], ⑤ 점섬[占星] 등의 자연취락이 있었다.
사진 3-4 오늘날의 성포동 전경. 옛 성포리는 신도시 개발로 현대화된 고층아파트 지역으로 변모되었다. 계향동 큰 향나무가 있었다 하여 ‘계향동(桂香洞)’이라 불렀고, 점섬 산등성이 너머에 위치해 있으므로 ‘등너머’라 부르기도 하였다. 점섬 아랫말과 이동 사이에 있던 계향동은 경주 김씨 등 14집이 있었으나 1981년 폐동된 후 택지로 조성되었다. 폐동 전에는 도당산에서 매년 음력 7월 1일에 산신제를 지냈다. -`이필선(李弼善;1920. 11. 15), 일동 103-6. 독주골[독수골·독지골] 이 마을은 성머리에서는 아랫말이라 부를 만큼 성머리와 한 마을이었는데, 취락이 형성되기 전 노적봉 아래에 샘 우물이 하나 있어 물맛이 좋으므로 성머리 주민들이 식수로 이용했다고 한다. 그후 조선 말엽에 취락이 이루어지자 우물 하나 있던 곳이라 하여 ‘독수골[獨水谷]’이라 했다가 후대에 내려오면서 ‘독주골’로 불렸다 한다. 일설에는 이 마을의 첫 입주자인 여주 이씨 후손의 시호가 ‘독지(獨志)’였으므로 ‘독지골[獨志谷]’이라 칭했다고 하나 여주이씨 후손 중에는 독지란 시호를 가진 사람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폐동 때(1982년)의 마을 호수는 35호였으며, 현재는 연립주택지로 조성되어 있다. 이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월 15일경 노적봉 에서 도당제(都堂祭)를 지냈다. -`염희섭(廉喜燮;1935. 3. 20), 일동 112-6. 성머리 고잔동 태봉과 독주골 사이에 있던 마을이 성머리[聲頭]이다. 조선 시대에는 안산군 군내면 성곶포촌리 (聲串浦村里)라 했다가, 조선 말엽에 성포리(聲浦里)로 개칭되었다. 어업의 전진기지였던 이곳은 현 스타 프라자에서 서남쪽으로 약 300m, 남쪽으로 약 400m에 이르는 지역이 나루터(성머리 나루터라 칭함)였는데, 풍수로 보아 성포리 머리 부문에 해당되었다고 한다. 성머리 어민들은 한국전쟁 직후 사동(四洞) 구라에 포구가 설치되면서부터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아 선박의 출입이 끊기자 구라(사동)·배옷(본오동) 등지로 생업을 위해 떠났다. 그후 나루터는 농경지로 변모되어 농촌이 되었다. 여주 이씨, 영월 신씨, 파주 염씨의 세거지였던 이 마을은 76호가 있었다고 하는데, 1979년에 폐동된 후 예술인 아파트를 비롯하여 주공9단지·10단지로 변하였다. 폐동 전까지만 해도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월 15일경이면 노적봉 중턱에서 마을의 안정을 기원하는 도당제(都堂祭)를 지냈다. -`염희섭(廉喜燮;1935. 3. 20), 일동 112-6. -`황용득(黃龍得;1944. 1. 19), 성포동 354. 절골 점섬 아랫말과 화림선원 사이에 있던 마을이 절골[寺谷]이다. 이곳은 일제 초기에 군포시 산본동에 살던 청주 한씨 형제가 도당산 절 밑에 처음 세거하면서 취락이 이루어졌는데, 폐동 때(1981년)는 1집이 있었다. 신도시 개발로 택지로 조성되었으며, 도당산에서 해마다 음력 7월 1일에 산신제를 지냈다. -`이필선(李弼善;1920. 11. 15), 일동 103-6. ㆍ점섬(점성, 첨성) 이 마을은 조선왕조 성종 때 병조판서를 지낸 이계손(李繼孫;1423~1484년)의 묘를 현 성호(星湖) 묘역과 수인 산업도로 사이에 쓴 후 그의 셋째아들인 이지시(李之時;제천현감 역임)의 후손(여주 이씨)들이 묘하에 살면서 부터 취락이 이루어졌다. 그후 김해 김씨, 밀양 박씨 등이 세거해 이상의 3성을 ‘점섬의 삼대 성씨’라 불렀다. 이곳은 이계손의 8대손인 이익(李瀷;1681~1763년) 선생이 초야에 묻혀 일생을 학문에만 몰두해 「성호사설」· 「곽우록」 등 불후의 작품을 저술한 실학의 요람지이자 선각자의 땅이다. 이곳은 조선 시대에는 안산군 군내면 첨성리(安山郡 郡內面 瞻星里)라 했다가 조선 후기부터 점성리(占星里)로 개칭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성호 선생이 이곳에서 별을 관측하였다 하여 첨성(瞻星)이라 했다가 성호 선생 사후 (死後) 미신의 의미가 내포된 점성(占星)으로 불리우고 있다고 한다. 점성 마을은 성호 선생이 살던 동쪽지역을 탑이 있던 곳이라 하여 ‘탑골[塔洞]’, 남쪽지역은 ‘아랫말’, 서쪽지역 은 ‘건넌말’이라 불렀다. 폐동 때(1981년)에는 67호였다가 신도시개발로 택지로 조성되어 1986년부터 민가가 들어섰다. 폐동 전 마을 동남쪽에 있는 도당산(都堂山, 또는 사청)에서 매년 음력 7월 1일에 산신제를 지냈다. 이곳에는 이우량(李友諒;돈령교위), 이상신(李尙信;1564~1610년, 예조참판)의 묘가 있고, 이우인(李友仁;1535 ~1594년, 사재감첨정), 이우직(李友直; 1529~1590년, 개성유수), 이상홍(李尙弘;1559~ㆍ, 문과 급제) 등의 묘는 화장 또는 공주 등지로 이장되었다. -`이필선(李弼善;1920. 11. 15), 일동 103-6. (4) 양상동 조선 시대에는 안산군 군내면 양상리(楊上里)와 양하리(楊下里)였다가, 1914년 3월 1일 부령 제111호에 따라 시흥군 수암면 양상리(楊上里)로 개칭되었고, 이어 1986년 1월 1일 법률 제3798호에 따라 안산시 양상동 (楊上洞)으로 되었다. 양상동(유래는 ‘웃보대’ 참조)은 목내동과 함께 자연취락이 2개 마을(아랫보대·웃보대)에 지나지 않으며, 신도시개발 이후에도 변모되지 않은 오지이나 역사적인 유물과 유적이 많은 곳이다. 청동기 시대의 유물인 지석묘는 11기가 있었으나 대부분 파괴되었고, 월피동과 양상동 경계 관모봉 서쪽 능선에는 적석토광묘(積石土壙墓)와 주거지가 있고, 석곡역(石谷驛)은 시흥시 거모동에 있었다가 조선 말엽에 이전되었 으며, 최근에는 한양대 박물관에 의해 청주 한씨(淸州韓氏)의 지석(誌石)이 발굴되었다. ㆍ아랫버대 웃버대 아래에 위치한 마을로 시흥시 장하동 원뒤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조선 시대에는 안산군 군내면 양하리(楊下里)라 칭했다. 아랫버대[下楊垈] 마을은 웃버대에 살던 진주 강씨 후손 등이 이곳으로 분가를 하면서부터 취락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동쪽지역을 ‘웃말’, 서쪽지역을 ‘아랫말’이라 각각 부르고 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7월 1일이면 마을 중앙에 있는 대동우물(일명 오리물)에서 정제(井祭)를 지낸다. 이곳에는 정언벽(丁彦壁;1612~1652년, 홍문관 교리), 정시윤(丁時潤;1646~1713년, 영월부사) 등의 묘가 있다. -`김석구(金錫九;1925. 7. 8), 양상동 217. ㆍ웃버대 아랫버대 위에 있는 마을로, 조선 시대에는 안산군 군내면 양상리(楊上里)라 칭했다. 웃버대[上楊垈]는 마을 동남쪽에 조선 중엽에 예조참판을 지낸 강징(姜ㆍ;1466~1536년)의 묘가 풍수로 보아 꾀꼬리가 버드나뭇가지에 집을 짓고 사는 형국(鶯巢柳技形局)이므로, 마을 하천 둑에 버드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한다. 그후부터 이 마을을 일명 ‘버들촌’이라 칭하기도 했는데, 일제 말엽까지만 해도 버드나무가 많았으나 주민들이 집을 짓거나 혹은 땔감으로 사용하여 버들촌이란 이름은 점차 퇴색되고 있다. 이 마을은 해주 최씨가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이래 김해 김씨, 진주 강씨, 사천 목씨, 나주 정씨 등이 세거했 으나, 목씨·정씨·강씨가 크게 번성했으며, 현재는 40여 호가 촌락을 이루고 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7월 1일이면 주민들의 추렴으로 마을 중앙에 있는 큰우물과 마을 북쪽 끝에 있는 옹달물에서 정제(井祭)를 지내고 있다. 이곳에는 강징의 묘를 비롯하여 강희(姜僖;1492~1539년, 신창현감), 강의(姜儀;적성현감), 강억(姜億; 1498~1554년, 사옹원정), 강위(姜偉;해주목사), 강종윤(姜宗胤;1543~ㆍ년, 현감), 강면(姜t;1567~1618년, 병조 정랑), 그리고 열녀 나주 김씨(羅州金氏)의 묘가 있다. -`강승원(姜升元;1915. 7. 11), 양상동 58.
조선 시대에는 안산군 잉화면 와상리(安山郡 仍火面 瓦上里)와 와하리(瓦下里)였다가, 1914년 3월 1일 부령 제111호에 따라 시흥군 수암면 와리(始興郡 秀岩面 瓦里)로 개칭되었고, 이어 1986년 1월 1일 법률 제3798호에 따라 안산시 와동(安山市 瓦洞)으로 되었다. 와동은 기와[瓦]를 굽던 와골[瓦谷]에서 유래되었고, 와골은 그후 조선 중엽 수해로 광덕산 서쪽 낙맥이 무너 져내릴 때 매몰된 후 농경지로 되었다가 신도시가 조성되면서 와동 복지회관이 들어섰다. 와동은 신도시개발로 자연취락이 모두 폐동되어 대부분의 지역이 택지로 조성되었는데, 폐동 전 마을은 다음과 같다. ① 가자골[佳才谷], ② 뒷골[後谷], ③ 동작리(銅雀里, 洞長里), ④ 새말[新村], ⑤ 압실[前村], ⑥ 왜두둘기 [倭 ], ⑦ 큰고개[大峴] 등이었다. ㆍ가자골 마을의 지세가 아름다운 여자가 다리를 뻗고 앉아 있는 형국이므로 ‘가자골[佳才谷]’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곳은 인조반정(1623년) 후 압실에 살던 김류의 후손(순천 김씨)들이 분가를 하면서 처음으로 터를 잡고 살았으며, 그후 파평 윤씨 등이 세거해 모두 4호 남짓한 마을이었는데, 신도시개발로 1987년에 폐동해 원주민 들은 대부분 와동으로 이주했으며, 현재는 택지로 조성되어 있다. 왜두둘기와 동작리 사이에 위치해 있던 마을이다. -`김순봉(金順奉;1922. 5. 7), 와동 175. ㆍ뒷골 압실 뒤에 위치해 있으므로 ‘뒷골[後谷]’이라 칭했으며, 일명 ‘멀미’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 마을은 조선 말엽에 압실과 동작리에 살던 김해 김씨, 인동 장씨 등이 분가를 하면서부터 세거하기 시작했고, 폐동 전(1987년)에는 4집이 있었다가 1989년에 안산운전면허시험장이 들어섰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3일을 전후해 길일을 택해서 광덕산 중턱에서 산신제를 지냈다. -`김봉순(金鳳淳;1933. 11. 24), 와동 153. ㆍ동작리(동장리, 방죽말) 왜두둘기 북쪽에 있던 이 마을은 본래 가자골·새말을 통칭해 ‘동작리’라 불렀는데, 마을 유래에 대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마을 동북쪽에 있던 산(봉황산)이 풍수로 보아 공작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처음에는 ‘공작리 (孔雀里)’라 칭했다가 후대에 내려오면서 ‘동작리(銅雀里)’로 되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마을이 길게 생겼으므로 ‘동장리(洞長里)’라 불렀다는 것이다. 또 이 마을을 일컬어 일명 ‘방죽말[防築洞]’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조선 말엽에 이르러 마을 서쪽에 방죽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 방죽은 용동궁(龍洞宮) 소유로 내시(內侍)가 관리 해 마을에서는 내시땅이라 불렀으며, 신도시개발 후 1989년에 강서고등학교가 들어섰다. 조선 시대에는 안산군 잉화면 와상리(安山郡 仍火面 瓦上里)라 칭했던 동작리는 와상농기(瓦上農旗)의 발상지 이자 홍순칠(洪淳七;독립운동가)이 태어난 유서 깊은 고장이기도 하다. 동작리에 최초로 세거한 성씨는 남양 홍씨와 인동 장씨였고, 그후 전주 이씨 등이 세거했다. 남양 홍씨와 인동 장씨가 대성을 이루어 살다가 폐동 때(1987년)는 50여 호가 살았다. -`장성두(張聖斗;1918. 2. 2), 와동 474.
ㆍ새말 큰고개 남쪽에 있었던 마을이 새말[新村]이다. 동작리에 살던 사람들이 분가를 하면서 새로 터를 잡고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폐동 때(1987년)는 15호 남짓했고, 현재는 택지로 조성되어 있다. -`김순봉(金順奉;1922. 5. 7), 와동 175. ㆍ압실 조선 시대에는 안산군 잉화면 와하리(安山郡 仍火面 瓦下里)라 칭했던, 와동에서는 최초로 취락이 형성되었던 마을로서 광덕산(廣德山) 앞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압실(前村;또는 압술)’이라 불렀다. 순흥 안씨가 배판한 이래 여산 송씨, 김해 김씨, 순천 김씨 등이 세거했다. 압실은 본래 순흥 안씨 선대의 땅이었는데 인조반정 (1623년)으로 김류(1571~1648년, 영의정)가 일등공신이 되자 순천 김씨의 사패지(賜牌地)가 되었다고 한다. 31호가 살았던 압실은 마을 북쪽지역을 아랫말, 남쪽지역을 웃말, 아랫말 남쪽지역을 안터라 각각 불렀다. 1987년 신도시개발에 따라 폐동된 후 와동·고잔동 등지의 이주단지가 되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3일을 전후해 길일을 택해 광덕산 산신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이곳에는 김류를 비롯해 김여물(1548~1592년, 의주목사), 김경징(金慶徵;1589~1637년, 강도검찰사), 김진표(金震標;1614~ 1671년, 돈령부도정), 김노득(金魯得;여산군수) 등의 묘와 사세충렬문(四世忠烈門;문화재자료 제8호)이 있다. -`김순봉(金順奉;1922. 5. 7), 와동 175. -`김봉순(金鳳淳;1933. 11. 24), 와동 153. ㆍ왜두둘기 조선왕조 선조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마을에 침입한 왜인(倭人)을 주민들이 합세해 두둘겨 물리쳤다 하여 ‘왜두둘기(倭 ;또는 왜둘기)’란 지명이 붙여졌다고 한다. 임(林)씨가 배판한 이래 고성 이씨, 안산 김씨 등이 세거해 28호가 있었다가 1987년에 폐동되었고, 원주민들은 대부분 와동으로 이주했으며, 현재는 택지로 조성되어 있다. 왜두둘기는 온래 압실에 속했던 마을로 압실과 동작리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마을에서는 마을 뒷산 중턱에서 해마다 음력 10월에 길일을 택해서 산신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김순봉(金順奉;1922. 5. 7), 와동 175. ㆍ큰고개 동작리 동쪽에 위치해 있던 마을로, 가자골에서 이 마을로 가자면 큰 고개를 넘어야 했으므로 이곳을 ‘큰고개 [大峴]’라 불렀다. 큰고개는 파평 윤씨와 고성 김씨 등이 세거해 모두 7집이 있었으나 1987년에 폐동된 후 현재는 택지로 조성 되어 있다. -`장성두(張聖斗;1918. 2. 2), 와동 474. (6) 월피동 조선 시대에는 안산군 잉화면 월피리(安山郡 仍火面 月陂里)라 칭했다가, 1914년 3월 1일 부령 제111호에 따라 시흥군 수암면 월피리(始興郡 秀岩面 月陂里)로 개칭되었고, 이어 1986년 1월 1일 법률 제3798호에 따라 안산시 월피동(安山市 月陂洞)으로 되었다. 월피동(유래는 ‘다리피’ 참조)은 예로부터 농토가 비옥할 뿐 아니라 월피천과 안산천 등 하천이 있어 연년세세 풍년이 들어 부자가 많이 살던 곳이다. 신도시개발로 모든 마을이 폐동되어 서쪽지역(다리피)은 택지로, 동쪽 지역(부루지)은 아파트단지로 변모되었다. 폐동 전에는 ① 다리피[月入陂], ② 마산모퉁이, ③ 부루지(富樓地) 등의 자연취락이 있었다. ㆍ다리피 본래의 이름은 월입피(月入陂)로, 해뜨는 언덕받이에 위치해 있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1논줄(현 시흥시 논곡동 논줄) 2다리피’라 칭할 만큼 안산군 관내에서는 명성이 높았던 마을이었다. 이곳은 남평 문씨, 파주 염씨, 초계 정씨, 풍양 조씨, 경주 김씨 등의 오랜 세거지로 70여 호 남짓 되었는데 마을 동쪽지역은 너머말, 서남쪽지역은 새텃말, 북쪽지역은 웃말이라 불렀다. 1984년 폐동되자 주택지로 변모 되어 1986년부터 민가가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1일에 마을 동북쪽에 있는 도당산에서 당제를 지냈으며, 조선 시대에는 월입피 주막이 유명했다. 신도시개발 이전에는 지석묘가 6기나 있었다. 이 마을에는 광덕산 동록(東麓)에 있는 애기봉을 중심으로 왼편(동북)은 도당산, 오른편(서남)은 안산이 있다. 광덕산에서 마을 중앙인 고정부리에 이르는 지역은 용(龍)의 등이 되므로 이곳에는 집을 짓지 못하고 양편에만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정성헌(鄭星憲;1920. 5. 29), 부곡동 659-10. ㆍ마산모퉁이 다리피 서남쪽 산(마산) 모퉁이에 있던 마을이다. 이곳은 조선 말엽 안산시 이동에 살던 한모 씨가 마산(馬山) 에 있는 선대 묘를 관리하기 위해 정착하면서부터 취락이 이루어졌는데, 폐동 때(1985년)에는 3집이 있었다. 현재는 택지로 조성되어 1989년부터 민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한장명(韓章命;1917. 12. 12), 원곡동 756-5. ㆍ부루지(부로지) 다리피 동남쪽에 있던 마을로, 구전에 따르면 이 마을 남쪽에 있는 산은 산세가 안정감을 주어 흡사 노적을 쌓은 것처럼 생겼다 하여 노적봉(露積峯)이라 칭하였고, 뒷산(부원빌라 동쪽에 있음)은 말의 형상을 하고 있어 말미산이라 불렀다. 또 동북쪽에 있는 산(초계 정씨의 선산으로 1989년에 양궁경기장이 들어섰음)은 소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마을은 소와 말이 노적을 가득 싣고 끌고 가는 형상을 하고 있으므로, 이곳 주민들은 곡식을 풍족히 다락에 쌓아 놓고 아무 걱정 없이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며 생(生)을 영위하는 마을이라 하여 ‘부루지(富樓地)’ 라 칭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마을 서편에 월피천(月陂川)이 흘러 물이 풍부한 데다가 농경지 또한 비옥(肥沃)해 해마다 풍년이 들어 ‘부루지’라 했다고 한다. 부로지(富老地)란 명칭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부루지는 전주 이씨, 파평 윤씨 등이 세거해 60여 호 살았으나 1984년 폐동되어 원주민들 대부분이 부곡동으로 이주했다. 현재는 현대아파트, 부원빌라, 시온성교회 등이 들어서 있다. -`이명돈(李明敦;1908. 8. 2), 와동 263-2. (7) 목내동 조선 시대에는 안산군 와리면 이목리(安山郡 瓦里面 梨木里)와 능내리(陵內里)였다가, 1914년 3월 1일 부령 제111호에 따라 시흥군 군자면 목내리(始興郡 君子面 木內里)로 개칭되었고, 이어 1986년 1월 1일 법률 제3798 호에 따라 안산시 목내동(安山市 木內洞)으로 되었다. 목내동은 이목동(梨木洞;배나물)의 ‘목(木)’자와 능내리 (陵內里;능안)의 ‘내(內)’자를 따서 ‘목내동(木內洞)’이라 칭했다. 이곳은 일찍이 조선 초기 비운의 임금 단종의 생모(현덕왕후)의 묘를 능안에 쓴 후부터 널리 알려졌다. 신도시 개발로 ① 능안[陵內]과 ② 배나물[梨木] 등 2개의 자연취락이 폐동된 후 각종 공장들이 들어서서, 토박이들도 어디가 어딘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변모되었다. ㆍ능안 조선 시대에는 안산군 와리면 능내리(安山郡 瓦里面 陵內里)라 칭했으며, 배나물 북쪽에 있던 마을이다. 전주 이씨를 비롯하여 경주 최씨, 김해 김씨, 금녕 김씨 등이 세거해 80여 호가 살던 대촌(大村)이었다. 마을 북쪽지역은 웃말, 남쪽지역은 아랫말이라 각각 불리우다가 1979년 폐동되어 주민들은 대부분 원곡동으로 이주하였다. 현재는 반월공업단지로 조성되어 각종 공장들이 들어서 있다. ‘능안[陵內]’이란 마을 명칭은 조선왕조 문종의 비(妃)이자 단종의 생모(生母)인 안동 권씨(현덕왕후)의 묘를 아랫말과 성곡동 무들 사이(안산시 목내동 산 47)에 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능은 세조 때에 이르러 파괴 되었고, 중종(ㆍ) 때 양주 현릉(顯陵)으로 천장하였다. 이 능터[陵址]에는 광복 후 어느 인사가 묘를 썼다. 이곳에서 호상(虎象) 1쌍이 출토되어 현재 이화여대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한편 1981년 7월 조모가 이곳에서 출토된 난간석주(欄杆石柱)를 밀반출하려다 적발된 적이 있었고, 이듬해 9월 20일부터 10월 10일까지 경희대박물관에 의해 학술조사가 실시되었다. 능안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1일에 웃말 소재 도당산 정상에서 도당제를 지내 왔다. -`이순옥(李順玉;1909. 8. 21), 원곡동 794-6. ㆍ배나물 조선 시대에는 안산군 와리면 이목리(安山郡 瓦里面 梨木里)라 불렀다. 구전에 따르면 조선왕조 제6대 임금인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의 묘가 능안에 있었는데 이를 세조가 파괴해 왕후의 묘가 능안 아랫말과 웃말 사이에 있는 우물에까지 닿았다 하여 관우물[棺井]이라 칭했는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배나물[梨木]’로 되었다고 한다. 또 이곳에 돌배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어 배나무가 ‘배나물’로 되었다는 설도 있다. 관우물은 마을의 대동우물로 이 물을 마시면 얼굴이 희어지고 살결이 부드러워진다고 하여 부녀자들이 많이 마셨다고 한다. 능안 서쪽에 위치해 있던 배나물은 전주 이씨, 안동 김씨 등의 세거지로 남쪽지역은 큰말, 북쪽지역은 작은말이라 불렀다. 폐동 때(1979년)는 60여 호가 있었고, 현재는 반월공단지역으로 변모되었다. -`이경복(李慶福;1913. 9. 20), 원곡동 791-15.
조선 시대에는 안산군 대월면 선부리(安山郡 大月面 仙府里)와 달산리(達山里)였다가, 1914년 3월 1일 부령 제111호에 따라 시흥군 군자면 선부리(始興郡 君子面 仙府里)로 개칭되었고, 이어 1986년 1월 1일 법률 제3798호에 따라 안산시 선부동(安山市 仙府洞)이 되었다. 선부동은 선녀골에서 유래되었다(전설 ‘선부리의 유래’ 참조). 선부동은 조선 시대에는 안산군 관내에서 최초로 장시(산대장)가 섰을 만큼 북적대던 곳이었다. 특히 안산의 관적성씨 중 안산 김씨 후손 중에 김맹전(金孟銓;사재감정 역임)의 묘를 석수골에 쓴 후 그의 후손들이 세거 하면서 안산에 안산 성씨의 뿌리를 내렸다 한다. 또한 이곳은 안산의 인맥 중 가장 번성했던 파평 윤씨 소정공파 후손들의 주세거지이기도 하다. 선부동은 대쟁이·태을마을·우산이 등 북부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폐동되었는데, 폐동 전 선부동의 자연 취락은 다음과 같다. ① 거미울[居美谷], ② 관모산(冠帽山), ③ 달미[達山], ④ 대쟁이[大壯], ⑤ 모골[池谷], ⑥ 비누지 [斌裕地], ⑦ 새젓골, ⑧ 석수골[石手洞], ⑨ 소바위너머, ⑩ 쑥께, ⑪ 우산이[隅山], ⑫ 장터, ⑬ 정지막골 [正芝村], ⑭ 태을(太乙)마을 등이다.
모골 북쪽으로, 남양 홍씨를 비롯하여 동복 오씨, 전주 이씨, 풍양 조씨 등 9가구가 살았으나 1985년에 폐동되어 원주민 대부분이 원곡동으로 이주하였다. 마을이 있던 지역은 시화지구 이주민단지로 조성되었다. 이곳은 물이 풍부할 뿐 아니라 농토 또한 비옥해 살기 좋은 곳이라 하여 ‘거미울[居美谷]’이라 칭했다고 한다. -`이규석(李揆奭;1909. 2. 21), 선부동 주공APT 427-305. ㆍ관모산 관산초등학교 뒷산이 관모산인데, 관모(冠帽;관리가 쓰는 제모)처럼 생겼다 하여 관모산(冠帽山)이라 불렀다. 이 산 서쪽 기슭에 마을이 형성되자 산 이름을 취해 마을 이름을 ‘관모산(冠帽山)’이라 칭했다. 이 마을에는 원주 이씨를 비롯하여 피씨, 진주 강씨 등이 세거해 24가구가 살았는데, 1983년 폐동된 후 원주민 대부분이 원곡동으로 이주하였다. 현재는 선부동 6단지 아파트단지(주공아파트 4~5단지 주변)로 변모되었다. 관모산은 마을 중앙에 있던 대동우물을 중심으로 북쪽지역(현 주공아파트 5단지 지역)은 아랫말, 남쪽지역 (현 주공아파트 4단지 지역)은 웃말이라 불렀는데, 폐동 전만 해도 해마다 음력 7월 7일에 대동우물에서 정제 (井祭)를 지냈다. -`김영환(金永煥;1928. 10. 15), 원곡동 749-4. ㆍ달미 비누지 동쪽으로, 조선 시대에는 안산군 대월면 달산리(安山郡 大月面 達山里)라 칭했다. 이곳은 교통의 요충지 로 동쪽은 시흥시 화정동, 서쪽은 시흥시 거모동, 남쪽은 와동, 북쪽은 시흥시 능곡동 등을 왕래하는 사통팔달 (四通八達)된 곳에 위치한 마을이므로 ‘달미[達山]’라 불렀다. 달미는 피씨를 비롯해 나주 나씨, 진주 강씨, 순흥 안씨, 교하 노씨 등이 세거해 마을 동쪽지역은 건넌말, 남쪽 지역은 아랫말, 북쪽지역은 웃골이라 각각 칭했다. 이곳에는 모두 32호가 살다가 1985년 폐동되어 원주민 대부분이 선부동·원곡동으로 분산·이주했으며, 마을이 있었던 지역은 택지로 조성되어 1988년부터 민가가 들어 서기 시작했다. -`노수룡(盧洙龍;1916. 12. 15), 원곡동 783-6. ㆍ대쟁이 대쟁이[大壯]는 예전 군자 주민들이 서울·인천·안양 등지로 가자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교통의 요충지였으므로 왕래하는 행려자가 많아 주막이 번성하였다. 새젓골과 태을 마을 사이에 있는 대쟁이는 마을의 지세가 풍수로 보아 대장(大壯) 형국이었다. 이곳에서는 남평 문씨 등이 오랫동안 살아왔다. -`구본창(具本昌;1935. 11. 1), 선부동 157-1. ㆍ모골 관모산 북쪽에 있었으며 함양 박씨의 오랜 세거지였다. 구전에 따르면 조선 시대에 어느 부자가 이 마을에 살았 는데 그 집 앞에는 큰 연못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해 부자가 패가(敗家)하자 연못이 논으로 변해 버렸다. 그리 하여 그 연못을 못배미라 불렀고, 마을 이름 또한 연못 이름을 따서 ‘모골[池谷]’이라 하였다. 이 마을 동남쪽지역은 안산모래이, 남쪽지역을 샛터, 서쪽지역을 모골이라 각각 칭했는데, 선부동에서는 예부터 모골·석수골·거미울·정지막골을 북촌(北村), 관모산을 남촌(南村)이라 하였다. 모골은 예부터 마을 전체의 호수가 10호를 넘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다. 어쩌다 외지에서 한 가구가 이주해 오면, 다른 한 가구가 마을을 떠나곤 해 폐동 때(1985년)도 9호에 지나지 않았다. 현재는 이곳은 선부동 이주 단지로 조성되었다. -`민찬기(閔讚基;1921. 9. 17), 고잔 2동 532. ㆍ비누지 정지막골 동쪽에 있었던 마을이다. 조선 시대에는 이곳에 배가 들어왔다 하여 ‘배다리’라 불렀다고 한다. 또 이 마을은 풍수로 보아 선비가 태어날 땅이라 하여 빈유지(斌裕地)라 칭했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빈유지’가 ‘비누지’로 바뀌었다. 비누지는 안산 김씨, 진주 강씨, 파평 윤씨 등이 세거했으며, 남쪽지역은 저너머라 불렀다. 폐동(1985년) 전에는 16호가 살았으나 원주민 대부분이 원곡동으로 이주하였다. 마을이 있었던 지역은 현재 주택지로 변모 되었다. -`윤승모(尹承模;1934. 9. 7), 선부동 525. ㆍ새젓골 대쟁이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 시대에 새우젓을 실은 배가 이곳에 닿았다 하여 ‘새젓골’이라 불렀다. 마을의 형성은 1960년대에 대쟁이 출신 남평 문씨가 처음 세거하면서부터이다. 현재는 창원 황씨 한 집이 있다. -`윤왕렬(尹旺烈;1939. 1. 5), 선부동 224. ㆍ석수골 거미울 동쪽 마을로 안산 김씨(또는 연성 김씨)의 세거지이다. 석수골[石手谷]은 조선왕조 태종 때 좌명공신 (佐命功臣)으로 연성군(蓮城君)에 봉해진 김정경(金定卿;1345~1419년)의 손자인 김맹전(金孟銓;사재감정을 역임)의 묘를 쓸 때, 묘 앞에 설치할 빗돌[碑石]을 배에 싣고 와 이곳에서 직접 석수장이들이 돌을 깎아 석물 (石物)을 세웠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후 그의 후손(안산 김씨)이 묘하에 살면서부터 촌락이 이루어졌다. 폐동 때(1985년)에는 12호가 있었는데, 이들 원주민 대부분은 원곡동으로 이주했으며, 그후 석수골은 택지로 조성되어 1988년부터 민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현재 김맹전 묘 서쪽은 초등학교 부지로 조성되었다. 석수골에는 김맹전의 묘를 비롯해 김건수(金乾壽;부사과 역임), 홍처윤(洪處尹;황해도 관찰사) 등의 묘가 있다. -`김영(金楹;1921. 11. 27), 원곡동 793-18. ㆍ소바위너머 일제 때 시흥시 거모동·군자동·죽률동·정왕동 주민들이 군자염전에서 생산된 소금을 소길마에 싣고 군자 구준물과 대쟁이 사이 마루턱에 있는 바위에다 짐을 내려놓고 쉬어 갔다 하여 ‘소바위너머’라 칭하였다. 광복 후 한집이 있었으나 한국전쟁 직후 폐동되었다. -`윤왕렬(尹旺烈;1939. 1. 5), 선부동 224. ㆍ쑥께 달미와 화정동 사이에 위치한 마을로, 조선 말엽에 최참봉(崔參奉)이란 사람이 처음 살았다고 한다. 최참봉이 살던 집은 일제 중엽에 시흥시 수암동-거모동 간 도로확장공사 때 헐렸으며 현재의 민가(5가구)는 일제 말엽에 생긴 것이다. 이곳은 바닷물이 들어왔을 때 쑥 들어간 갯고랑 가장자리에 있는 취락이란 의미로 ‘쑥께’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노수룡(盧洙龍;1916. 12. 15), 원곡동 783-6. ㆍ우산이 안산신도시 개발 이전 군자면 관내에서는 제일 높은 지대에 자리잡은 마을이었다. 이곳은 동쪽에는 오봉산, 남쪽에는 안산 등으로 둘러싸여 있어 흡사 우산같이 둥근 지형 안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우산(于山)’이라 했다는 설과, 산 모퉁이에 있는 마을이므로 ‘우산(隅山)’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우산이는 제주 고씨를 비롯하여 남평 문씨, 경주 김씨, 전주 이씨, 파평 윤씨 등이 세거해 왔는데, 예전에는 대쟁이를 아랫말, 우산이를 웃말이라 부를 만큼 대쟁이와 한 마을로 통칭되었다. 대쟁이 동북쪽에 위치한 우산이는 윤강, 윤상형(尹尙衡;1680`~ㆍ년, 문화현령) 등의 묘가 있다. -`윤왕렬(尹旺烈;1939. 1. 5), 선부동 224. ㆍ장터 조선 시대 안산군 관내에서 최초로 장시가 형성된 곳으로, 주로 해산물과 농산물의 거래가 많았고, 장날(5일, 10일)이면 씨름이 유명했다고 한다. 구전에 따르면 장터 서쪽에 있는 산은 전쟁이 나면 적을 물리치는 형국이고 동쪽에 있는 산은 패잔병을 쫓아가는 형국인 데다가, 장시가 바닷가에 위치해 주민들이 거세어 번성하지 못하고 일제 초에 폐장되었다고 한다. 장터는 장시(山垈場이라 칭함)와 함께 생긴 마을로, 1985년 폐동되어 현재는 안산전철역과 연계되는 도로로 바뀌었다. 석수골 서쪽으로 시흥시 거모동과 경계를 이루었던 마을이다. -`김영(金楹;1921. 11. 27), 원곡동 793-18. ㆍ정지막골[점막골] 비누지와 거미울 사이로, 현재 선부동 은행나무 주변에 있었던 마을이다. 구전에 따르면 조선 말엽 마을 중앙에서 오지그릇을 구워 처음에는 ‘점막골[店幕谷]’이라 칭했다가, 그후 민가가 생기면서 취락이 형성되자 ‘정지막골[正芝村]’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정지막골은 함양 박씨의 오랜 세거지로 10여 호 있었으나 1985년 폐동되어 원주민 대부분이 원곡동으로 이주하였다. 현재는 연립주택이 들어서 있다. 이곳엔 일제 말엽에 와동 출신 장성두(張聖斗;1918년생) 씨에 의해 흑연광(명칭;시흥흑연광업소)이 발견되어 인천 출신 이영태 씨가 첫 채광을 실시했다. -`민찬기(閔讚基;1921. 9. 17), 고잔 2동 532. ㆍ태을마을 대쟁이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태을산(太乙山)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태을마을’이라 칭했으며, 창원 황씨가 처음 세거했다. 현재 대한조경공사와 민가 2집이 있다. -`구본창(具本昌;1935. 11. 1), 선부동 157-1. (9) 성곡동 조선 시대에는 안산군 와리면 성두리(安山郡 瓦理面 城頭里)와 무곡리(茂谷里)였다가, 1914년 3월 1일 부령 제111호에 따라 시흥군 군자면 성곡리(始興郡 君子面 城谷里)로 개칭되었고, 이어 1986년 1월 1일 법률 제3798호에 따라 안산시 성곡동(安山市 城谷洞)이 되었다. 성곡동은 성두리(잿머리)의 ‘성(城)’자와 무곡리(무들)의 ‘곡(谷)’자를 취한 것이다. 성두리는 잿머리[城頭]라 하여 골우물·벌말·안말·도란말을 총칭하는데, 이는 도란말에 있는 성황당을 신성시해 주변에 성(城)을 쌓고 마을 주민들이 대대로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안산에 전래되던 동제 대부분은 폐동과 함께 사라졌지만 이곳 동제(성황제)는 폐동 후에도 매년 음력 10월 1일이면 전국 각처로 흩어졌던 주민들이 이곳에 모여 제를 지낸다. 1989년 11월 1일에도 안산문화원(원장 정봉진) 주최로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잿머리 외의 지역은 무들(茂谷里;장가물·장자골·느티나무재 포함)로 이들 모든 마을은 신도시 건설 때 폐동된 후 현재는 공장들이 들어서 있다. 폐동 전 성곡동의 자연취락은 다음과 같다. ① 골우물[古井], ② 느티나무재[槐峴], ③ 도란말[廻村], ④ 무들[茂谷·無坪], ⑤ 벌말[坪村], ⑥ 안말[安村·內村], ⑦ 장가물, ⑧ 장자골 등이다. ㆍ골우물 안말과 목내동 배나물 사이에 위치해 있는 마을이 골우물[古井]이다. 이곳 북쪽에 있는 골짜기에 이(齒)가 시릴 정도로 찬 우물을 중심으로 촌락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밀양 박씨, 전주 이씨 등의 세거지였던 골우물에는 모두 18호가 있었으나 1986년에 폐동된 후 반월공업단지로 조성되어 현재는 유창양행·서울화학·극동봉제·삼양통상·(주)진도·광성피혁 등이 들어서 있다. 이곳에는 안탄대의 묘(기념물 제83호)를 비롯해 이잠(李潛;풍해군), 이영번(李永蕃;통덕랑) 등의 묘가 있다. -`김형덕(金炯德;1916. 3. 4), 선부동 99블록 9-8. ㆍ느티나무재 무들과 능길 사이 고갯마루에 느티나무가 있어 ‘느티나무재[槐峴]’라 칭했다. 이곳에는 밀양 박씨, 파평 윤씨 등 5호 가량 있었으나 1986년에 폐동되자 반월공업단지 서편 중심도로로 편입되었다. -`허의강(許義康;1940. 10. 9), 원곡동 791-4. ㆍ도란말 해안가에 위치했던 마을로, 바닷물이 들어오면 이곳에 이르러 급히 돌아가므로 ‘도란말[廻村]’이라 불렀다고 한다. 해봉산 동남쪽에 있던 도란말은 금녕 김씨, 남양 홍씨 등의 세거지로 폐동 때(1986년)에는 20여 호가 있었으나, 신도시개발로 반월공업단지로 조성되어 강남화섬·한국농약·한독약품·태양연마·한일향료 등이 들어서 있다. 이곳에는 홍명원(洪命元;1573~1623년, 경기도관찰사)·홍소저(洪小姐;효녀)·홍우악(洪禹岳;하양현감) 등의 묘가 있다. -`김왕산(金旺山;1910. 10. 3), 선부동 99의 4-1. ㆍ무들(무곡) 조선 시대에는 안산군 와리면 무곡리(安山郡 瓦里面 茂谷里)라 불렀던 마을이다. 이곳에는 제주 고씨를 비롯하여 금녕 김씨, 파평 윤씨, 양천 허씨 등이 세거했는데, 파평 윤씨가 대성이었고 호수는 35호 가량 되었다. 이곳은 들이 없는 마을이라 하여 ‘무들[無坪]’이라 칭했는데, 마을의 남쪽지역을 큰무들, 북쪽지역을 작은무들, 그리고 동쪽지역은 목내동 능안 너머에 있으므로 능너머라 불렀다. 무들 출신 중에는 일제하 암울했던 시기에 적선가로 유명했던 윤종대(尹鍾大)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2천석지기의 부호로서 마을 주민들 중 가족이 사망한 유가족에게는 쌀 3말과 탁주 5통, 출산한 산모에게는 쌀 1말과 미역 3잎, 추석 때는 전 주민에게 가족 수가 많으면 쌀 3되, 적으면 2되, 설날이면 가가호호에 쌀 1말씩을 나누어 주었다. 또 부모 묘소에 매일 성묘해 손과 무릎이 닿은 곳에 풀이 안 날 만큼 효자였다. 광복 후 그가 사망하자 전국의 걸인들이 장례를 치러 줄 만큼 구휼에 힘써 모든이에게 귀감이 되었다. 이 마을에는 안산 전래의 토속신앙인 성황당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벌말·골우물·도란말·안말 등 잿머리 주민들이 해마다 음력 10월 1일 ‘잿머리성황제[城頭里城隍祭]를 지냈다. 조선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낸 윤지완(尹趾完)이 “그까짓 성황이 뭐 용하냐.”고 했다가 성황님(ㆍ)의 노여움을 사 일각(一脚) 정승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벌말 동쪽에 있던 무들은 신도시개발로 1985년에 폐동된 후 반월공업단지로 조성되었다. 현재 큰무들에는 대한모방, 작은무들에는 아남정밀, 능너머에는 아성유리·(주)영신 등이 들어서 있다. -`윤동만(尹東萬;1932. 10. 15), 원곡동 794-6. -`허의강(許義康;1940. 10. 9), 원곡동 791-4.
사진 3-11 오늘날의 잿머리성황당. 1990년 12월에 준공해 현재까지 성황제를 지내고 있는 곳이다. ㆍ벌말 무들과 안말 사이 허허벌판에 있던 마을이다. 벌말[坪村]은 조선 중엽에 금녕 김씨 충의공파 후손들이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이래 전주 이씨 등이 세거해 온 11호 남짓한 마을(그 중 9집이 금녕 김씨)이었는데, 신도시개발에 따라 1986년에 폐동된 후 반월공업단지로 조성되었다. 현재는 동아견직·삼천리열처리·대흥화학·남강제약·삼양금속 등이 들어서 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1일이면 해봉산 정상에서 성황제를 지낸다. -`김형덕(金炯德;1916. 3. 4), 선부동 99블록 9-8. ㆍ안말 이 마을 유래에 대해서는 3가지 설이 있다. 그 첫째는 순흥 안씨가 처음 세거해 ‘안말[安村]’이라 칭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오목한 골짜기에 자리잡아 ‘안말[內村]’이라 칭했다는 것이며, 셋째는 오목한 골짜기에 순흥 안씨가 처음으로 살아 ‘안말[內村·安村]’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골우물 서북쪽에 위치해 있었던 안말은 남북으로 길게 생긴 마을로, 남쪽지역은 웃말, 북쪽지역은 아랫말이라 불렀다. 순흥 안씨 이래 밀양 박씨, 파평 윤씨, 제주 고씨, 대구 배씨 등이 세거해 31호가 살았으나 1986년에 폐동되었다. 그후 반월공업단지로 조성되어 유진화학·상진개발·대성합성화학·대화페인트·서해공업 등이 들어서 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1일에 해봉산 정상에서 성황제를 지낸다. -`박용석(朴容奭;1916. 11. 25), 선부동 994-10. ㆍ장가물 무들 동남쪽에 위치해 있던 마을로 물이 많은 곳이라 하여 ‘장가물’이라 불렀다. 이 마을은 일제 때 풍천 임씨가 처음으로 살았고, 그후 제주 고씨의 한 집이 있었으나 1985년에 폐동되어 반월공업단지로 조성되었다. 현재는 한국카본·신성기업 등이 들어서 있다. -`허의강(許義康;1940. 10. 9), 원곡동 791-4. ㆍ장자골 큰무들 동북쪽으로, 조선 말엽에 파평 윤씨가 부자로 살았다 하여 ‘장자골’이라 불렀다. 그후(일제 초기) 폐동되어 농경지로 변모되었다가 신도시개발에 따라 반월공업단지로 조성되어, 현재는 로케트 카본이 들어서 있다. -`허의강(許義康;1940. 10. 9), 원곡동 791-4. (10) 신길동 조선 시대에는 안산군 와리면 신각리(安山郡 瓦里面 新角里)와 적길리(赤吉里)라 칭했다가, 1914년 3월 1일 제111호에 따라 시흥군 군자면 신길리(始興郡 君子面 新吉里)로 개칭되었고, 이어 1986년 1월 1일 법률 제3798호에 따라 안산시 신길동(安山市 新吉洞)이 되었다. 신길동은 신각리(新角里;현 샛뿔마을)의 ‘신(新)’자와 적길리(赤吉里;현 능길마을)의 ‘길(吉)’자를 취한 것으로 안산시의 법정동 중 자연취락이 가장 많은 곳이다. 이곳은 별당·성안·풍전 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취락이 그대로 남아 있다. 신도시개발로 폐동 후에는 공장들이 세워졌고, 시화지구사업 때는 수많은 유적지가 폐허화되었다. 예컨대 조선 시대 임금께 진상하는 조기를 저장하던 ‘사옹원 분원’과, 조선 초기에 설치된 ‘무응고리 봉화대’ 등은 불도저에 밀려 그 흔적조차 없어졌다. 신길동의 전통마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능길, ② 당쟁이[堂井], ③ 만해, ④ 문화촌(文化村), ⑤ 배나루[船津], ⑥ 별당(別堂), ⑦ 살막재, ⑧ 샛뿔[新角, 新覺], ⑨ 성안[城內], ⑩ 신촌(新村), ⑪ 원곡역(元谷驛), ⑫ 장자골[長子谷], ⑬ 작은뱅골[船谷], ⑭ 잿마당, ⑮ 큰뱅골[船谷], ㆍ 터진목, ㆍ 풍전(豊田), ㆍ 한티, ㆍ 횟밭머리 등이다. ㆍ능길 조선 초기에 이 마을 서남쪽 봉화재산 정상에 봉화대(烽火臺;무응고리 봉수라 칭함)를 설치했다 하여 적길리(赤吉里)라 칭했다가, 그후 단종의 생모인 현덕왕후의 묘를 목내동 능안에 쓴 후부터는 능(陵) 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이란 뜻의 ‘능길’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만해 북쪽에 있는 능길은 곡부 공씨가 처음으로 터를 잡은 이래 경주 김씨, 순흥 안씨, 김해 김씨, 진주 강씨 등이 세거해 현재는 경주 김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마을 서쪽지역은 바라지, 북쪽지역은 골안, 마을 중앙은 큰말이라 부른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3일이면 골안 뒷산 도당터에서 도당제를 지낸다. -`김수옥(金洙玉;1925. 4. 14), 신길동 450. ㆍ당쟁이 본래 성안에 속했던 마을로, 성안 서쪽에 위치해 있었다. 이 마을은 일제 초기에 시흥시 군자동 산뒤(山北)에 살던 신현보(申鉉輔) 씨가 분가해 처음으로 살 때 집 하나에 우물(옹달샘) 하나가 있었다 하여 ‘당쟁이[堂井]’라 칭했다. 폐동 때(1985년)는 2집(신동석·김한민)이 있었다. -`신동석(申東錫;1922. 6. 11), 선부동 994-12. ㆍ만해 본래 능길에 속했던 지역으로 능길 남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광복 후 최승구(崔承九)가 처음으로 살았으며, 한국전쟁 직후 황해도 옹진·연백 등지의 난민들이 정착하면서 취락이 이루어졌다. 마을 유래에 대해서는 2가지 설이 전해 오고 있다. 첫째는 조선 시대에 바닷물이 들어오면 이곳의 지대가 얕아 물이 가득 찼다 하여 ‘만해(滿海)’라 칭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마을 남쪽에 조선 시대 임금에게 진상할 조기를 저장하는 사옹원 분원이 있어 만인(萬人)이 들끓었는데 그후 서해안 간척지공사로 바닷물이 끊기자 농경지로 변모되어 ‘만인해들’이라 했으며, 이것이 후대로 내려오면서 ‘만해(萬海)’로 불려졌다는 것이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초에 길일을 택해서 마을 남쪽 끝에 있는 봉황재산 정상에서 당제를 지내고 있다. 이곳에는 윤지상(尹趾祥;통덕랑)의 묘가 있다. -`안진호(安ㆍ護;1936. 5. 23), 신길동 388. ㆍ문화촌 이 마을은 화성군 우정면 출신 김모가 큰뱅골에 있다가 광복 직후부터 살기 시작했고, 이어 1971년 서울 개봉동 하천변에 살던 주민들이 수해로 인해 4집이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호수가 늘기 시작해 현재는 모두 11집이 되었다. 신도시개발 전 군자면 관내에서 제일 빈촌이었던 이곳은, 1970년대 초에 이르러 마을의 분위기를 일신시키자는 주민들 의견에 따라 ‘문화촌(文化村)’으로 명명되었다. -`이향로(李享魯;1930. 7. 25), 신길동 741. ㆍ배나루 일제 때 순흥 안씨가 배판한 이래 광복 후 호수가 늘어 현재 4집이 살고 있다. 예전에 바닷물이 들어왔을 때 마을 서북쪽 산 모퉁이에 배가 정박했다 하여 ‘배나루[船津]’라 불리고 있다. 터진목 서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강명현(姜明賢;1915. 2. 8), 신길동 440. ㆍ별당 안산역(安山驛) 서남쪽에 있었던 마을로, 풍전과 함께 해주 정씨(海州鄭氏)가 처음으로 세거했다. 별당의 유래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풍전에 살던 주민(주로 해주 정씨)들이 별도로 집을 짓고 살아 ‘별당(別堂)’이라 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조선 중엽 어느 해인가 여러 해 동안 가뭄이 극심하자 임금이 안산 당상배미(현 선부동 산대장터 부근)에 이르러 갈증이 나자 물을 마시고 이곳에 당도해 보니 다른 지역의 농작물들은 가뭄 때문에 시들시들했으나 이곳의 농작물들은 한결같이 싱싱하였다. 이를 본 임금은 하도 이상하여 “별땅이구나.”하였다. 그때부터 이곳을 ‘별땅’이라 했는데, 이것이 후대로 내려오면서 ‘별당(別堂)’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광복 직후까지만 해도 해주 정씨 7가구가 살아오다가 1950년대 초부터 타성이 세거하기 시작했다. 안산신도시 건설로 1979년 폐동되자 일성신약·조선무약·서울식품 등의 공장이 들어섰다. -`정명근(鄭命根;1932. 5. 10), 원곡동 758-9.
만해 서남쪽으로 주식회사 장천(長川) 반월공단 서쪽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는 일제강점기 때 시흥군에서 신길리의 공동묘지를 조성했다가 광복 직후 서울 출신 최승구(崔承九)가 처음으로 입주했고, 이어 그의 처남인 송(宋)모가 최씨 집 옆에 살다가 1970년대 방죽 건설로 폐동되었다. 현재 살막재와 만해 사이에 민가 한 채 있다. ‘살막재’란 조선 시대 임금에게 진상할 조기를 어부살(살막재에서 서쪽으로 약 3~4km 지점)에서 잡아 이곳 빙고(氷庫)에 저장했던 곳이란 뜻으로, 마을에서는 보통 ‘핑고[氷庫]구뎅이’라 부르는데, 본래의 이름은 사옹원 분원(司饔院 分院)이다. -`강명현(姜明賢;1915. 2. 8), 신길동 440. ㆍ샛뿔 능길과 시흥시 거모동 도일 사이에 위치한 마을로, 조선 시대에는 안산군 와리면 신각리(安山郡 瓦里面 新角里)라 칭했다. 이 마을은 풍수로 보아 소의 뿔처럼 생겼다 하여 ‘샛뿔(新角)’이라 불렀는데, 일제 때 정길섭(丁吉燮;정봉진 전 안산문화원장 조부) 씨가 이곳에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설립하면서 새 학문을 익혀 깨달아야 잘 살 수 있다는 의미로 깨달을 ‘각(覺)’자를 써서 ‘샛뿔[新覺]’로 개명했다고 한다. 샛뿔은 조선 시대에는 염밭[鹽田]으로 유명했으며, 신도시개발 전 군자면 관내에서는 자연취락 중 호수가 가장 많았다. 이 마을에 처음 배판한 성씨는 회덕 송씨로 알려져 있으며, 그후 나주 정씨, 황씨, 김해 김씨 등이 세거했는데, 현재는 김해 김씨와 나주 정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마을에서는 19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이곳 뒷산 정상에서 해마다 음력 7월이면 길일을 택해 산신제를 지냈다. -`정규창(丁奎昌;1915. 4. 9), 신길동 582. ㆍ성안 목내산성(木內山城) 안에 위치한 마을이라고 ‘성안[城內]’이라 칭했다. 이 마을은 안동 권씨가 처음 자리를 잡았으며, 폐동 때(1979년)는 20여 호 남짓 살았다. 본래 풍전에 속했던 마을로, 현재 한국전력 변전소 등이 들어섰다. -`정규명(丁奎明;1918. 3. 25), 신길동 778. ㆍ신촌 이 마을은 일제 중엽에 큰뱅골에 살던 주민들이 분가해 새로 이룩한 마을이라 하여 ‘신촌(新村)’이라 불렀으며, 이어 한국전쟁 직후 난민들이 세거해 4집이 있었다가 1970년대 초에 원곡역과 시흥시 거모동 도일 사이의 도로확장에 따라 폐동되었다. 신촌은 원곡역과 문화촌 사이에 있었다. -`이향로(李享魯;1930. 7. 25), 신길동 741. ㆍ원곡역 원곡역(元谷驛) 주변에 자리잡은 마을로, 1937년 경동철도주식회사(京東鐵道株式會社)에 의해 수인선(水仁線)이 부설될 때 원곡역사(元谷驛舍)를 현 안산역 자리에 건립하려다가 그곳이 고개밑이라 경사졌으므로 현재의 위치인 신길동 지역에 건립했다고 한다. 이곳은 본래 오음방죽[五音防築]이 있어 지대가 얕으므로 작은뱅골 뒷산의 흙을 손수레에 실어다 매립해 역사를 건립했고, 마을 또한 원곡역이 영업을 개시하면서 함께 번성하기 시작했다. -`정규명(丁奎明;1918. 3. 25), 신길동 778. ㆍ작은뱅골 큰뱅골과 원곡역 사이에 자리잡은 마을로, 큰뱅골에 살던 전의 이씨 후손들이 분가하면서부터 촌락이 형성되었다. 작은뱅골[船谷]에는 이경희(李慶禧;양주목사)·이명회(李明會;예조참판)·이충가(李忠可;군자감부정)·이언항(李言恒;부사과)·이정제(李廷濟;교위) 등의 묘가 있다. -`이향로(李享魯;1930. 7. 25), 신길동 741. ㆍ장자골 능길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현재 한 채가 남아 있다. 예전에 부자가 살았다 하여 장자골[長子谷]이라 칭하고 있다. 마을 앞의 큰 우물은 뱃사람들이 마셨던 우물이라고 한다. -`김수옥(金洙玉;1925. 4. 14), 신길동 450. ㆍ잿마당 능길과 샛뿔 사이 고갯마루에 있는 마을로 현재 한 집이 남아 있다. 이곳은 예전에 능길·샛뿔 주민들이 정월 대보름이면 달맞이를 하던 곳으로, ‘재(잿)’란 고개를 말하며, ‘마당’은 주민들이 달맞이를 하던 곳이란 뜻이 내포되어 있다. -`강명현(姜明賢;1915. 2. 8), 신길동 440. ㆍ큰뱅골 작은뱅골 북쪽에 자리잡은 마을로, 조선 시대에 바닷물이 큰뱅골[船谷]까지 이르러 배가 닿았다 하여 배 ‘선(船)’자를 따서 배골[船谷]이라 칭했는데, 후대로 내려오면서부터 ‘뱅골’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전의이씨족보」에는 이골[梨谷]로 기록되어 있다. 이 마을은 조선왕조 명종 때(1562년) 문과에 급제한 후 양주목사를 역임한 이경희(李慶禧)가 관직에서 물러난 후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아 촌락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후 해주 최씨와 전주 이씨 등이 대대로 살아왔는데, 현재는 전의 이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큰뱅골은 마을 북쪽지역은 웃말, 동남쪽지역을 건넌말, 서쪽지역을 아랫말이라 각각 불리고 있다. 마을에서는 큰뱅골과 작은뱅골 사이에 있는 도당재에서 매년 산신제를 지내왔는데, 어느 해인가 산신제를 지낸 달에 마을에서 소를 잃자 그 다음해부터 산신제를 지내지 않았다고 한다. 큰뱅골은 작은뱅골 북쪽에 있다. -`이해로(李海魯;1916. 2. 5), 신길동 743. ㆍ터진목 일제강점기 때 조근호 씨가 능길과 터진목 사이를 막았는데, 이곳이 사질토여서 큰비가 내리면 둑이 자주 터지므로 ‘터진목’이라 칭했다 한다. 광복 전에는 솥점으로 유명했을 뿐만 아니라 낚시터에 강태공들이 붐벼 임시 신길간이역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터진목은 능길 서쪽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정규창(丁奎昌;1915. 4. 9), 신길동 582. ㆍ풍전 해주 정씨(海州鄭氏)가 배판했던 마을이다. 해주 정씨 후손 중에 정구(鄭構)란 사람이 용인에서 살다가 종사랑(從仕郞)을 역임하고 이곳에 세거하면서부터 취락이 이루어졌다고 전한다. 본래의 마을 이름은 단풍나무가 많아 풍전(楓田)이라 불렀는데, 일제 때 일인들이 풍년 ‘풍(豊)’자로 잘못 기록하면서부터 ‘풍전(豊田)’으로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해주정씨족보」에도 이곳을 풍전(楓田)으로 기록하고 있다. 1955년에 건립된 국민학교의 교명도 풍곡국민학교(원곡초등학교의 전신)라 했으며, 해주 정씨 후손 중에 학자로 이름이 높았던 정범석(鄭範錫) 씨의 아호도 풍재(楓齋)였던 것으로 보아 풍전(楓田)이 본래의 지명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일제 때는 시흥군의 갱생(更生) 마을로 지정되기도 했던 이 풍전은 동쪽지역을 건넌말, 서쪽지역을 큰말이라 각각 불렀다. 안산신도시 건설로 1979년 폐동되어 현재는 안산유통센터가 자리잡고 있다. -`정명근(鄭命根;1932. 5. 10), 원곡동 758-9. ㆍ한티 터진목 서남쪽에 있던 마을로, 서울 출신 박○○(본관 밀양) 씨가 능길에 살다가 한국전쟁 직후 이곳에 전장(田莊)이 있어 생활 터전을 위해 집을 짓고 살았다. 안산신도시 건설 때 폐동된 후 집터는 밭으로 변하였다. 취락이 형성되기 이전에는 이곳을 한티골짜기라 불렀다. -`강명현(姜明賢;1915. 2. 8), 신길동 440. ㆍ횟밭머리 샛뿔과 시흥시 거모동 도일 사이에 위치한 마을로, 일제 초에 샛뿔 등 인근의 주민들(회덕 송씨, 나주 정씨, 김해 김씨 등)이 분가하면서 살기 시작했다. 이곳은 본래 밭이었으며 백회(白灰)가 많아 횟밭[灰田]이라 불렀는데, 밭 위에 민가가 들어서자 ‘횟밭머리’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마을에서는 19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해마다 음력 7월에 길일을 택해 샛뿔 뒷산에서 산신제를 지냈다. -`이향로(李享魯;1930. 7. 25), 신길동 741. (11) 원곡동 조선 시대에는 안산군 와리면 원상리(安山郡 瓦里面 元上里)와 모곡리(茅谷里)라 칭했다가, 1914년 3월 1일 부령 제111호에 따라 시흥군 군자면 원곡리(始興郡 君子面 元谷里)로 개칭되었고, 이어 1986년 1월 1일 법률 제3798호에 의거 안산시 원곡동(安山市 元谷洞)으로 되었다. 원곡동은 원상리(양지마을)의 ‘원(元)’자와 모곡리(땟골)의 ‘곡(谷)’자를 취한 것이며, 신도시개발 후 취락이 폐동되자 원주민을 위한 이주단지가 조성되어 원주민이 가장 많이 살고 있다. 원곡동 내에 있는 땟골은 예로부터 피난곳이라 하여 전란 때만 되면 화를 면한다는 속설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몰렸으며, 양지마을은 분묘가 많았던 곳이었으나 현재는 안산시에서 가장 번화한 곳으로 변모되었다. 또한 백성말은 처음에는 집 한 채가 있었으나 장차 백 가지 성이 살 곳이라 했는데, 이름 그대로 주택이 밀집되어 있다. 폐동 전 원곡동에는 ① 땟골[茅谷], ② 동산골[東山谷], ③ 백성말[百姓洞], ④ 신흥동(新興洞), ⑤ 양지마을[陽谷], ⑥ 오지미[奧地山] 등의 취락이 있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7월 1일이면 마을 중앙에 있던 대동우물(식수뿐 아니라 이질·설사 등에 특효)에서 정제(井祭)를 지냈다. -`오문택(吳文鐸;1913. 10. 1), 원곡동 791-8. -`오형택(吳亨鐸;1920. 10. 1), 원곡동 790-9. -`오형록(吳亨祿;1936. 11. 21), 원곡동 793-20. ㆍ동산골 조선왕조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낸 동산(東山) 윤지완(尹趾完;1635~1718년)의 사당(祠堂)이 있었으므로 그의 아호를 따 ‘동산골[東山谷]’이라 불렀다. 윤지완의 묘는 본래 시흥시 산현동 안장바위에 있었는데, 그곳에 묘를 쓴 후 서해안의 조기가 잡히지 않자 어부들이 상소해 개성 천마산으로 천장했다. 그후 그의 후손인 파평 윤씨 문중에서 묘소가 원거리에 있으므로 가까운 곳에 사당을 짓고 위패라도 모셔야겠다는 의견에 따라 이곳에 사당을 지었다고 한다. 일제 때에 이르러 사당이 노후해지자 1987년에 시흥시 산현동 깨꼴에 있는 윤지완의 조부 윤민헌(尹民獻) 묘 앞에 사당을 신축했다. 안산시 근로청소년회관 동쪽 산 아래에 위치해 있는 동산골은, 동산의 사당을 지은 후 사당 관리인이 사당 부근에 관리사를 짓고 세거하면서부터 취락이 이루어졌다. 마을에서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마을 뒷산에서 남양 홍씨가 주선해 산신제를 지냈다. -`윤기열(尹己烈;1929. 7. 11), 시흥시 산현동 369. ㆍ백성말 이곳은 풍수로 보아 백 가지 성(姓)이 살 곳이라 하여 ‘백성말[百姓洞]’이라 칭했다고 한다. 이 마을은 일제 때 군자동 사무소 초입에 태양호(太陽口昊) 씨가 살았으며, 그후 그의 아들 태응균(太應均;반월조경 대표) 씨가 살다가 1979년에 폐동된 후 현재는 주택지로 변모되었다. -`박종엽(朴鍾燁;1931. 3. 2), 원곡동 761. ㆍ신흥동 1937년 수인선 개통 후 원시동 범직이 출신 강 모씨가 안산전철역과 수인선 원곡역 사이에 초가를 짓고 산 후 인근의 주민들이 세거하면서 취락이 이루어졌다. 신흥동(新興洞)은 1986년 안산전철역 건설 때 폐동되었다. -`박종엽(朴鍾燁;1931. 3. 2), 원곡동 761. ㆍ양지마을 안산시에서 가장 번화한 곳으로 백성말 동쪽에 있던 마을이다. 조선 시대에는 안산군 와리면 원상리(安山郡 瓦里面 元上里)라 칭했던 마을이다. 본래의 양지마을은 동쪽으로는 중소기업연수원 앞 사거리, 서쪽으로는 원곡 1동 사무소, 남쪽으로는 기간산업도로, 북쪽으로는 라성호텔에 이르는 제 지역을 말하는데, 남향받이 양지바른 곳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양지마을[陽谷·陽地]’이라 불렀다. 양지마을은 한양 조씨가 배판한 이래 밀양 박씨, 파평 윤씨, 밀양 손씨, 금녕 김씨, 순흥 안씨 등이 세거해 모두 48집이 있었는데 그 중 밀양 박씨가 전 호수의 3분의 1인 16호나 되었다. 동·서로 늘어져 있던 이곳은 동쪽지역인 연수원 입구 지역을 아랫말, 원곡 1동 사무소가 있는 서쪽지역을 웃말이라고 불렀다. 양지마을은 명당지라 하여 분묘가 많았다. 이를테면 원곡고교와 현충탑 남쪽에 이르는 지역은 시흥군 당시 원곡리 공동묘지였으며, 라성호텔과 남쪽도로 사이에는 파평 윤씨 선대의 묘, 연수원 입구 서쪽 산 능선에는 한양 조씨 선대의 묘, 반월회관 주변에는 밀양 박씨 선대의 묘가 각각 있었다. 그러나 신도시개발에 따라 모두 이장 또는 화장되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8월 15일을 전후 길일을 택해 웃말과 아랫말 사이에 있는 대동우물에서 정제(井祭)를 지냈다. -`박종엽(朴鍾燁;1931. 3. 2), 원곡동 761. ㆍ오지미 양지마을 동북쪽으로 현 안산시 종합운동장 예정지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본래 두 집이 살아 두집매라 불렀고, 원곡동에서는 가장 오지에 위치한 취락이라 하여 ‘오지미[奧地山]’라 칭했다고 한다. 이곳은 일제 때 일인들이 염밭[鹽田]을 만들려 하였으나 광복으로 중단되었다. 그후 한국전쟁 직후에 부평 화랑농장에 살던 용사(勇士)들을 집단 이주시키면서 취락이 이루어졌다. 이들 용사들은 대부분 다른 곳으로 이주해 현재는 빈집만 남아 있다. 일명 ‘화랑농장’이라 칭하기도 하는데, 일부는 초지동에 속한다. -`박종엽(朴鍾燁;1931. 3. 2), 원곡동 761. (12) 원시동 조선 시대의 안산군 와리면 원하리(安山郡 瓦里面 元下里)와 시우동(時雨洞)이 1914년 3월 1일 부령 제111호에 의거 시흥군 군자면 원시리(始興郡 君子面 元時里)로 개칭되었고, 이어 1986년 1월 1일 법률 제3798호에 따라 안산시 원시동(安山市 元時洞)이 되었다. 원시동은 원하리(元下里;범직이)의 ‘원(元)’자와 시우동(時雨洞;시꿀)의 ‘시(時)’자를 취한 것으로, 예전 군자면 관내에서는 부촌(富村)이었다. 또한 이곳은 기독교가 첫 전래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근의 목내동·성곡동과 함께 예전의 집들은 한 채 없이 모두 헐려, 현재는 반월공업공단의 중심지로 변모되었다. 폐동 전 원시동의 자연취락은 ① 범직이[凡直], ② 시꿀[時雨], ③ 옻나무골[漆谷·楓谷], ④ 은행나무뿌리, ⑤ 진말 등이었다. ㆍ범직이 조선 시대에는 안산군 와리면 원하리(安山郡 瓦里面 元下里)라 칭했으며, 초지동 하나골 서쪽에 위치해 있던 마을이다. 풍수로 보아 마을 뒤에 있는 안산(安山)이 범[虎]이 동쪽을 곧게 내려다보는 형상이라 하여 ‘범직[凡直]’이라 했다 하는데, 범(凡)자를 쓰는 것은 소리나는 데로 음을 빌려 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김해 김씨 참판공파 가전(家傳)에 따르면, 조선 현종 때 김해 김씨 금녕군의 12세손인 김무승(金武承;1608~1673년)이 훈련원 도정(都正)을 역임하고 이곳에 낙향한 후 생전에 후손에게 이르기를 “거짓없이 바르게 살라.”고 하여 ‘범직[凡直]ㆍ이라 했다는 것이다. 범직이는 김해 김씨 이래 하동 정씨, 언양 김씨, 진주 강씨 등이 세거해 폐동(1978년) 전에는 78호가 있었으며, ‘김씨촌’이라 부를 만큼 김해 김씨가 대성을 이루었다. 현재는 반월공업단지로 조성되어 보성물산·대양금속·(주)동선·극동제련·대한약품 등이 들어서 있다. 광복 이전까지만 해도 이 마을에서는 해마다 봄에 길일을 택해서 마을 어귀에 있던 향나무 앞에서 나무제를 지냈다. -`김영서(金榮瑞;1931. 7. 25), 시흥시 거모동 1159-8. ㆍ시꿀 이곳은 예로부터 모낼 때만 되면 비가 와 연년세세 풍년이 든다고 하여 ‘시꿀[時雨洞]’이라 부른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안산군 와리면 시우리(安山郡 瓦里面 時雨里)라 칭했던 이 마을은 남양 홍씨, 밀양 박씨, 청주 한씨, 진주 하씨 등이 세거해 왔으며 폐동(1978년) 전에는 65호의 큰마을이었다. 서북쪽지역은 웃말, 동북쪽지역은 서런말, 동쪽지역은 우덕골, 동남쪽지역은 사탯말, 서남쪽지역은 논말, 북쪽지역은 양지촌이라 칭했다. 시꿀은 신도시개발 전 군자면 관내에서는 기독교가 최초로 전래된 곳으로 유명하다. 광무 10년(1906년) 하진태·홍창억 씨 등 주민들이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융희 3년(1909년) 4월 15일에 예배당 6칸을 지었다. 그후 1968년 마을의 중앙지인 407번지에 예배당 33평을 신축해 예배를 보다가, 1978년 9월 신도시개발에 따라 원곡동에 60평의 예배당을 기공한데 이어 이듬해 원시리교회에서 성광교회로 개칭하였다. 범직이 동쪽에 위치해 있던 시꿀은 1978년 반월공업공단으로 조성되어 서울정공·화일볼트·우창공업·태광제약·동원금속·한일철강·신신제약 등의 공장과 안산상공회의소·반월공업공단 등이 들어섰다. -`박배근(朴培根;1934. 7. 22), 원곡동 760-14. ㆍ옻나무골[풍곡] 시꿀 북쪽에 있었던 마을로 옻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어 ‘옻나무골[漆谷]’이라 부르다가 조선 말엽부터 ‘풍곡(楓谷)’으로 바꿔 불렀다. 이곳은 용인 이씨 참의공파 30세인 이숭호(李崇岵;1723~1789년, 형조판서)와 그의 아들 이재학(李在學;1745~1806년, 형조판서)의 묘가 있었는데 갑신정변(1884년) 후 그의 후손(용인 이씨)들이 묘하에 살면서부터 호수가 늘어 폐동(1978년) 전에는 20여 호가 되었다. 마을 동쪽지역은 웃말, 서쪽지역은 아랫말이라 칭했다. 신도시개발로 반월공업단지로 조성되어 광신판지·한국푸로그·경인가스·경인도금·제일도금·원평산업 등이 들어서 있다. -`이진업(李鎭ㆍ;1936. 12. 6), 원곡동 777-2. ㆍ은행나무뿌리 범직이와 시꿀 사이 산 모퉁이에 은행나무가 있었으므로 ‘은행나무뿌리’라 불렀다. 이곳에는 하상필(河相必) 씨가 살다가 1963년에 집이 헐리자 폐동되었다. 그후 신도시개발로 반월공업단지로 변모되어 삼천리기공·동아공업·중원전기공업 등이 들어서 있다. -`박배근(朴培根;1934. 7. 22), 원곡동 760-14. ㆍ진말 마을의 지세가 동·서로 길게 생긴 마을이라 하여 긴말이라 칭했다가 후대로 내려오면서 ‘진말’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 마을은 범직이에 살던 김무승(金武承)의 후손인 김해 김씨가 분가를 하면서 이곳에 자리를 잡고 살아 취락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구전에 따르면 마을 동쪽에 있는 산 부리가 진말을 향해 있어 남자가 난봉을 피우고 있는 형국이라 마을의 호수가 늘지는 않는다고 한다. 폐동 때(1978년)에는 모두 4집이 있었다. 범직이 남쪽에 있던 진말은 동쪽지역을 아랫말, 서북쪽지역을 웃말, 중앙을 가운뎃말이라 불렀는데, 마을에서는 해마다 봄이면 길일을 택해서 마을 출입 장승박이에 있던 향나무 앞에서 나무제를 지냈다. 현재는 반월공업단지로 조성되어 선진산업·국제섬유·동남펄프공업·협진산업·동양직물·조선인터내셔날 등이 들어서 있다. -`김영문(金榮文;1929. 1. 2), 원곡동 754-13. (13) 초지동 조선 시대에는 안산군 와리면 초지리(安山郡 瓦里面 草芝里)였다가, 1914년 3월 1일 부령 제111호에 따라 시흥군 군자면 초지리(始興郡 君子面 草芝里)로 개칭되었고, 이어 1986년 1월 1일 법률 제3798호에 따라 안산시 초지동(安山市 草芝洞)이 되었다. 초지동은 삼국 시대 이후부터 조선 왕조에 걸쳐 남양만을 제압하는 서해안의 요충지로 초지양영(草芝梁營)이 있었는데 효종 7년(1656년)에 이를 강화도로 옮겨 이곳을 1초지, 강화도의 것을 2초지라 하였다. 이곳은 일찍이 어업이 번성했던 곳이나 신촌·옛집터·작은백중·큰백중·작은주정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마을이 폐동되어 공장이 들어섰다. 폐동 전 초지동의 자연취락은 ① 가나골, ② 갯머리, ③ 더덕구지, ④ 둔배미, ⑤ 신촌(新村), ⑥ 옛집터, ⑦ 원초지(元草芝), ⑧ 작은백중, ⑨ 작은별망(別望), ⑩ 작은주정(舟井), ⑪ 큰별망(別望), ⑫ 큰백중, ⑬ 큰주정(舟井), ⑭ 한학골[閑鶴谷], ⑮ 화랑농장(花郞農場) 등이다. ㆍ가나골 갯머리 위(동북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일명 웃말이라 칭하기도 하였다.작은 골짜기 안에 자리잡은 이곳은 신도시개발 이전 초지동 주민들이 군자면 사무소, 도일시장 등을 가자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가나골은 우계 이씨, 여흥 민씨 등이 세거해 20여 호 살았으나 1979년에 폐동된 후 반월공업단지로 조성되었다. -`심종환(沈鍾渙;1929. 12. 30), 선부동 981-3. ㆍ갯머리 큰별망 북쪽에 있었던 취락으로 조선 시대에는 이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하여 ‘갯머리(또는 개머리)’라 불렀다. 어촌(漁村)이었던 이곳은 만선을 기원하는 장승놀이가 행해질 만큼 어업이 번성했었다. 갯머리는 우계 이씨, 여흥 민씨, 청송 심씨, 강릉 김씨 등이 세거했으며, 폐동 때(1979년)에는 12호가 살았으나 신도시개발에 따라 반월공업단지로 조성되어 광일염직·우성염직 등이 들어섰다. -`민풍식(閔豊植;1916. 7. 19), 원곡동 759-16. ㆍ더덕구지 옛 이름은 더덕고지라고 한다. 더덕은 초롱꽃과의 다년생 만초로 식용과 더불어 한방에서 거담이나 건위 등에 약재로 쓰이는 식물이다. 곶(串)은 바닷가에 뾰죽하게 내민 땅이니, 즉 더덕이 많이 자생하는 곶이므로 더덕고지라 했다가 후대로 내려오면서 ‘더덕구지’로 되었다 한다. 갯머리 동쪽에 위치해 있던 더덕구지는 홍해 최씨를 비롯해 우계 이씨, 남양 홍씨, 여흥 민씨 등이 세거해 모두 4집이 있었으나 1979년에 폐동된 후 반월공업단지로 조성되어 오일섬유·세화섬유·(주)대농 등이 들어서 있다. -`민풍식(閔豊植;1916. 7. 19), 원곡동 759-16. ㆍ둔배미 큰백중 동북쪽에 위치해 있던 마을로 조선 시대에는 안산군 와리면 원당리(安山郡 瓦里面 元堂里)라 칭했다. 이곳은 군사의 요새지여서 고려 때부터 둔전(屯田;군량 또는 관아의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국가가 지급한 토지)과 둔전병(屯田兵;군사상 중요지이거나 또는 군대들이 오래 머무는 곳에서 농사를 짓는 병졸)이 있었으므로 ‘둔배미’라 불렀다고 한다. 또 초지동에서 취락이 제일 먼저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원당(元堂)’이라 부르기도 하였고, 또한 포구가 제일 먼저 생긴 곳이라 하여 ‘원포(元浦)’ 또는 ‘원당포(元堂浦)’라 칭하기도 하였다. 둔배미는 밀양 박씨, 연일 정씨, 천안 전씨 등이 대대로 살아온 마을로, 서쪽지역을 양지쪽, 동쪽지역을 응달쪽이라 하였다. 폐동 때(1977년)에는 80여 호의 대촌(大村)이었다. 신도시개발로 반월공업단지로 조성되어 한때는 고려개발이 들어섰으나 현재는 택지로 조성되어 있다. 1989년 9월 9일 제6회 경기도 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주민들(주로 어민)이 만선 취향을 기원하며 놀던 ‘안산둔배미놀이’를 재현하여 영예의 종합우수상을 수상하였다. -`전룡안(田龍安;1904. 8. 15), 원곡동 777-1. ㆍ신촌 신촌(新村)은 둔배미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본래 둔배미에 속한 지역이었으나 한국전쟁 직후 황해도 난민들이 정착하면서 새로 취락을 형성해 현재 4집이 살고 있다. -`민찬기(閔讚基;1921. 9. 17), 고잔 2동 532. ㆍ옛집터 큰백중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이곳은 조선 말엽에 폐동되었다가 1950년에 이르러 옛 집터 자리에 민가 2집이 신축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오관선(吳寬善;1931. 4. 24), 초지동 305. ㆍ원초지 작은별망 북쪽에 위치한 바닷가로 조선 시대에는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진(鎭)을 설치했었는데, 이를 사곶영(沙串營) 또는 초지양영(草芝梁營)이라 불렀다. 이곳 초지진은 효종 7년(1656년)에 강화도로 이속되었다. 원초지(元草芝)는 남·북으로 길게 늘어져 있는 마을로 남쪽지역은 아랫말, 북쪽지역은 웃말이라 불렀다. 여흥 민씨가 배판한 이래 우계 이씨 등 23호가 살다가 1979년 폐동되어 반월공업단지로 조성된 후 동일제봉·유신염직·신진나염 등이 들어섰다. -`이명근(李命根;1912. 12. 17), 원곡동 772-6. ㆍ작은백중 가나골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큰백중에 살던 주민들이 분가하면서 새로 건설한 마을이라고 한다. -`민풍식(閔豊植;1916. 7. 19), 원곡동 759-16. ㆍ작은별망 큰별망 아래(동남쪽)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작은별망(別望)’이라 불렀다. 이곳은 1950년대에 이르러 둔배미에 둑(제방)을 막으면서 염밭[鹽田]으로 전환하기 시작하자 둔배미에서 어업활동을 하던 어민들이 정착하면서 점차 번성하기 시작했다. 폐동 때(1979년)에는 15호 남짓 살았으나 신도시개발에 따라 반월공업단지로 조성되어 신성섬유·임영모방 등이 들어섰다. -`민찬기(閔讚基;1921. 9. 17), 고잔 2동 532. ㆍ작은주정 큰주정(舟井) 동쪽에 위치한 5호 남짓한 작은 마을로, 한국전쟁 직후 황해도 등지의 난민들이 정착하면서부터 취락이 이루어졌다. -`오관선(吳寬善;1931. 4. 24), 초지동 305. ㆍ큰별망 큰별망(別望)은 경기도 지정기념물 제73호인 ‘별망성(別望城)’ 주변에 있던 마을이다. 이곳에 김씨란 어부가 살다가 1970년대 초에 내무부의 집단 마을화 시책에 따라 김씨가 작은 별망으로 이주할 때 폐동되었다. 김씨가 살던 집터는 신도시개발 때 해안순환도로로 편입되었다. 별망성은 남양만에 걸쳐 해안으로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해 해안을 따라 두 작은 구릉 사이에 돌로 쌓은 해안산성을 말한다. 이곳 별망산(別望山)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삼국 시대 때 어느 어부의 아내가 바다로 고기잡이 나간 남편을 기다리기 위해 이곳 산봉우리에 올라가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으나 풍랑을 만난 남편은 불귀의 객이 되었다. 그러자 여인 또한 이곳에서 먼 바다를 바라보며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후부터 이 산을 별망산(別望山)이라 불렀고 마을 이름 또한 산 명을 따서 ‘별망’ 또는 ‘별망뿌리’라 불렀다고 한다. 신도시개발에 따라 현재 열병합발전소가 들어섰다. -`심종환(沈鍾渙;1929. 12. 30), 선부동 981-3.
구전에 따르면 작은백중 소재 방농장(사슴목장) 뒤에 1백 명의 중이 있었을 만큼 큰 절이었다고 한다. 또 처음 마을이 이루어졌을 때 마을의 인구가 1백명[百衆]이므로 ‘백중’이라 불렀다고 한다. 작은백중 동쪽에 있는 5호 남짓한 작은 취락으로, 안산 신도시계획에 따라 장차 폐동될 것으로 알려졌다. -`민풍식(閔豊植;1916. 7. 19), 원곡동 795-16. ㆍ큰주정 큰주정(舟井)은 한국전쟁 후 대림산업에 의해 약 50정보의 염전을 설치해 1년 남짓 소금을 생산하다가 농림부에 의해 농지로 개간되었는데, 1954년에 황해도·평안도 등지의 난민 20여 호가 들어서면서부터 취락이 형성되었다. 그후 작은주정 등지로 주민들이 이주하자 호수가 차차 줄어 폐동 때(1977년)에는 7호에 불과하였다. 주정(舟井)이란 마을 명칭은 마을 초입에 샘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민가가 있기 전 뱃사람들이 식수로 이용했다 하여 ‘주정(舟井)’이라 불렀다고 한다. 신도시개발로 경보주식회사·경성방직 등이 들어섰다. -`오관선(吳寬善;1931. 4. 24), 초지동 305. ㆍ한학골 삼태기처럼 오목한 곳에 자리잡은 마을로 흡사 학이 한가하게 놀고 있는 형국이라고 하여 한학골[閑鶴谷]이라 하였다. 갯머리 서쪽에 위치해 있던 이 마을은 여(呂)씨가 배판한 이래 여흥 민씨, 강릉 김씨 등이 세거해 온 8호 남짓한 작은 마을이었다. 신도시개발에 따라 1979년에 폐동된 후 반월공업단지로 조성되어 한국지퍼·한독섬유·일신방직 등이 들어섰다. -`민병수(閔丙壽;1913. 12. 20), 와동 121-12. ㆍ화랑농장 본래는 둔배미에 속한 마을로 화랑저수지 남쪽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한국전쟁 직후 부평 화랑농장(花郞農場)에 살던 상이용사들을 이주시키면서 취락이 형성되었다. 현재 집은 있으나 사람은 살지 않으며, 일부는 원곡동에 속한다. 이 마을 북쪽은 한때 안산시 쓰레기매립장이었다. -`오관선(吳寬善;1931. 4. 24), 초지동 305. (14) 일동 조선 시대에는 광주군 성곶면 일리(廣州郡 聲串面 一里)라 했다가 1906년 9월 24일 칙령 제49호에 따라 안산군 성곶면 일리(安山君 聲串面 一里)로 되었으며, 1914년 3월 1일 부령 제111호에 의거 수원군 반월면 일리(水原郡 半月面 一里)로 개칭되었고, 그후 1949년 8월 15일 대통령령 제161호에 따라 화성군 반월면 일리(華城郡 半月面 一里)가 되었다. 이어 1986년 1월 1일 법률 제3798호에 의거 안산시 일동(安山市 一洞)이 되었다. 일동은 조선 시대에는 광주군 성곶면으로 안산군 군내면과 경계를 이루었던 곳이다. 일동은 웃말·응단말·기와집말 등을 통칭해 ‘구렁골[九龍谷]’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는 이곳이 명당지지(明堂之地)로 좌청룡(左靑龍)이 완연한 곳이기 때문이다. 구렁골은 본래 단성 이씨의 세거지이나 조선 말엽에 김수근(金洙根;1798~1854년, 이조판서), 김병학(金炳學;1821~1879년, 영의정), 김병국(金炳國;1825~1904년, 영의정), 김정규(金貞圭;1866~1895년, 이조참판), 김용진(金容鎭;1878~1968년, 화가) 등 안동 김씨 세도에 밀려 안동 김씨의 세장지로 되었다가 신도시개발 때(1979년) 이들의 묘는 화장되었고, 신도비와 묘역에서 출토된 18명의 남·여 복식은 온양민속박물관에 의해 수습되었다. 이들 유물을 가지고 동 박물관에서는 개관 11주년 기념으로 1989년 10월 25일부터 11월 26일까지 ‘안동김씨분묘출토복식전’을 열었다. 특히 근세 한국화 화가로 유명했던 김용진(金容鎭)의 구룡산인(九龍山人)이란 아호는 이곳 지명에서 취한 것이라고 한다. 신도시개발로 모든 마을이 폐동되어 옛 정취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변모되었는데 폐동 전 일동의 자연취락은 ① 기와집말[瓦村], ② 석삼말[石三村], ③ 아랫말[船村], ④ 안골[內谷], ⑤ 응단말, ⑥ 주막거리(酒幕巨里) 등이다. ㆍ기와집말 이 마을은 조선왕조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병국(金炳國;1825~1905)의 재실이 있었다고 하여 ‘기와집말[瓦村]’이라 불렀으며, 구렁골에서는 제일 위에 위치해 있다 하여 ‘웃말’이라 칭하기도 했다. 재실은 이곳 뒷산 기슭 평지에 있던 안동 김씨 가묘(家廟)를 배경으로 ‘입구(口)’자 모양으로 정남향을 하고 있었으나, 신도시개발계획에 따라 1979년 김병국·김수근 등 안동 김씨의 분묘는 화장되었고, 묘비와 재실에 사용된 건축물 등은 현재 온양민속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진택(李鎭澤;1926. 6. 17), 일동 272의 5-1. ㆍ석삼말 석삼말[石三村]은 호동초등학교와 수인산업도로 사이에 있던 마을로, 이곳에 큰 돌이 하나 있었는데, 멀리서 보면 흡사 3개의 바위가 나란히 있는 형상이었다고 한다. 폐동 때(1977년)는 모두 7집이 있었는데 4집은 일동에, 3집은 이동에 속했다. 현재는 도로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이진택(李鎭澤;1926. 6. 17), 일동 272의 5-1. -`염희섭(廉喜燮;1935. 3. 20), 일동 112-6.
일동(구렁골)에서 가장 아래에 있던 마을로, 조선 시대에는 배가 이 마을까지 들어왔다 하여 ‘선촌(船村)’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37년 수인선 부설 때 이곳에 역사(驛舍;일리역)를 지었다가 안산-금정 전철공사 때 폐사(廢舍)하였다. 아랫말은 어촌(漁村)이라 대성은 없었으며, 호수는 40여 호로 1979년 폐동된 후 택지로 조성되어 1986년부터 민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현재는 이곳을 ‘매화동’이라 칭한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7월에 길일을 택하여 성태산 당집에서 당제(堂祭)를 지냈다. -`나호석(羅浩錫;1931. 8. 14), 일동 88-11. ㆍ안골 웃말 동쪽 삼태기처럼 오목한 곳에 있다 하여 안골[內谷]이라 하였다. 단성 이씨 누대의 세거지였던 이곳은 조선 말엽 안동 김씨 세도에 밀려 김수근(金洙根;1798~1854년, 이조판서), 김병국(金炳國;1825~1905년, 영의정) 등의 묘를 이 마을과 웃말 사이에 썼다. 그러나 신도시개발 때 이들의 묘는 화장되었고, 묘비 등은 현재 온양민속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20여 호 남짓하던 안골은 1989년에 폐동된 후 현재는 안산전문대학이 들어서 있다. 이 마을에서는 뒷산(성태산) 절터에서 해마다 음력 7월에 길일을 택해서 산신제를 지냈다. -`이창문(李昌汶;1915. 12. 1), 일동 87-7. ㆍ응단말 웃말과 아랫말 사이에 산(안산)이 있어 해가 늦게 뜨는 마을이라 하여 ‘응단말’이라 칭했다. 함안 이씨 누대의 세거지였던 응단말은 15집이 있었으나 1978년에 폐동된 후 주택지로 조성되어 1986년부터 민가가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폐동 전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7월 1일에 응단말 뒤에 있는 안산 기슭에서 서낭제를 지냈다. -`이창문(李昌汶;1915. 12. 1), 일동 87-7. ㆍ주막거리 이익 선생 묘역 남쪽에 있었던 마을로, 이곳은 조선 시대 때 인천-수원을 왕래하는 행려자가 많아 주막(酒幕)이 번성했다고 한다. 주막거리에는 경주 최씨를 비롯해 여주 이씨, 경주 김씨 등 16호가 살고 있었으나 1981년에 폐동되어 주민들 대부분이 일동으로 이주했다. 현재는 택지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는 성호 이익(李瀷;1681~1763년, 실학자) 선생의 묘(경기도기념물 제40호)가 있는데, 그의 8대조인 이계손(李繼孫;1423~1484년, 병조판서)의 묘는 폐동 후 양평으로 이장되었다. -`김영현(金榮賢;1931. 12. 25), 일동 108-1. (15) 이동 조선 시대에는 광주군 성곶면 이리(廣州郡 聲串面 二里)라 했다가, 1906년 9월 24일 칙령 제49호에 따라 안산군 성곶면 이리(安山郡 聲串面 二里)로 되었으며, 1914년 3월 1일 부령 제111호에 의거 수원군 반월면 이리(水原郡 半月面 二里)로 개칭되었고, 1949년 8월 15일 대통령령 제161호에 따라 화성군 반월면 이리(華城郡 半月面 二里)가 되었다. 그후 1986년 1월 1일 법률 제3798호에 의거 안산시 이동(安山市 二洞)이 되었다. 이동은 일동과 삼리(현 사동에 속한 마을이나 조선 시대에는 법정리였다) 사이에 위치해 있어 ‘이동(二洞)’이라 칭했다. 성포동·일동·사동 등 주변 지역은 신도시개발로 인해 옛 자연취락이 폐동되었으나 이동의 대부분 취락은 그대로 남아 있으며, 붉은섬 등의 낚시터에는 낚시꾼들이 끊이질 않는다. 신도시개발 전의 자연취락은 ① 고잔(古棧), ② 독안, ③ 바라지, ④ 붉은섬, ⑤ 양지편(陽地便), ⑥ 역전(驛前), ⑦ 음택이[陰澤], ⑧ 조구나리, ⑨ 조미[造梅] 등이다. ㆍ고잔 청주 한씨, 전주 이씨 등이 대대로 살아온 마을로, 음택이와 조구나리 사이에 위치해 있다. 바닷가 연안으로 곶(串) 안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고잔(古棧)’이라 칭하였다. 한국전쟁 직후 구라(사동)에 포구가 생기면서 바닷물이 끊겼으며, 그후 농경지로 변모되었다. -`이승목(李承穆;1932. 10. 11), 이동 500. ㆍ독안 고잔 서북쪽으로, 독처럼 오목하게 생긴 곳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이곳은 풍수로 보아 좌청룡에 속하는데, 예전에는 마을 서남쪽에 있는 산 능선을 따라 소나무가 울창해 마을의 풍취가 아름다웠다고 한다. -`한강(1935. 8. 19), 이동 424. ㆍ바라지 본래는 붉은섬에 속했던 마을로, 붉은섬 동쪽에 있다. 이곳은 바닷물이 들어오면 수문이 닫히고 바닷물이 나가면 바라지므로 ‘바라지’라 칭하였다. 한국전쟁 직후 구라(사동)에 포구가 생기자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한강(1935. 8. 19), 이동 424. ㆍ붉은섬 조구나리 서남쪽 마을로, 취락이 형성되기는 1962년 이은구(김포 출신)·최구완(황해도 출신)·원충희(당진 출신) 등이 입주하면서부터이다. 마을 전체가 안산시 이동 505번지 일대에 속하는데, 풀이 자생할 수 없을 만큼 토질이 붉을 뿐만 아니라, 허허벌판 한가운데에 있는 마을 뒷산이 흡사 섬 같아 보여 ‘붉은섬’이라 불렀다 한다. 이 마을 앞에는 유명한 붉은섬 낚시터가 있다. -`공영배(孔英培;1937. 11. 6), 이동 505./``이은구(李殷求;1922. 1. 21), 이동 505. ㆍ양지편 음택이 동북쪽으로, 본래는 고잔에 속했던 마을이라고 한다. 남향받이에 자리잡은 마을이므로 ‘양지편(陽地便)’이라 부르고 있다. -`이승준(李承俊;1929. 11. 26), 일동 123-5. ㆍ역전 1937년 수인철도 부설과 함께 일리역사(一里驛舍)가 건립되자 역사 앞에 민가가 생기면서 취락이 이루어졌다. 신도시개발 전에는 역전(驛前)에 방앗간·대장간 등 3집이 있었으나 1980년 폐동되어 원주민들은 일동으로 이주했고 민가가 있던 지역은 도로로 편입되었다. 조미 동남쪽에 있던 마을이다. -`한강(1935. 8. 19), 이동 424. ㆍ음택이 음택이[陰澤]는 삼태기처럼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청주 한씨, 전주 이씨 등의 세거지로 고잔 동남쪽에 있다. -`이민선(李民善;1919. 6. 2), 이동 472. ㆍ조구나리 성포동 성머리나루와 함께 어업의 전진기지였으나 한국전쟁 직후 구라(사동)에 포구가 생기면서 농촌으로 변모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광주유수가 이 지역의 조세(租稅)를 싣고 인천-한강을 경유하여 관가에 바쳤다 하여 조공(租貢)나루라 했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조구나리’로 변음되었다. 조구나리는 청주 한씨, 전주 이씨 등이 세거해 온 마을로, 1980년 취락구조로 개선된 취락이라 하여 일명 ‘취락마을’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안산시 가족계획시범마을로서 고잔과 안산-금정 전철선 사이에 있다. -`한강(1935. 8. 19), 이동 424. ㆍ조미 조미[造梅]는 양지편 동남쪽에 있던 마을이나 신도시개발에 따라 1985년 폐동된 후 한대역(漢大驛)이 생겼다. 이곳은 성포동의 성머리, 독주골과 이동의 조구나리, 양지편 주민들이 수인선 일리역을 가자면 반드시 거치는 교통의 요충지여서 주막이 번성했다. -`한강(1935. 8. 19), 이동 424. (16) 사동 조선 시대에는 광주군 성곶면 삼리(廣州郡 聲串面 三里)와 사리(四里)였다가, 1906년 9월 24일 칙령 제98호에 따라 안산군 성곶면 삼리(安山郡 聲串面 三里)와 사리(四里)로 되었으며, 1914년 3월 1일 부령 제111호에 의거 수원군 반월면 사리(水原郡 半月面 四里)로 개칭되었고, 그후 1949년 8월 15일 대통령령 제161호에 따라 화성군 반월면 사리(華城郡 半月面 四里)가 되었다. 이어 1986년 1월 1일 법률 제3798호에 의거 안산시 사동(安山市 四洞)이 되었다. 사동은 신도시개발 전에는 화성군 양감면 면장보다 사리(현 사동) 이장을 한다고 할 만큼 화성군 관내에서는 이(里) 면적이 제일 컸다고 한다. 사동은 조선 시대에는 남양과 안산 지방에서 ‘주다리[珠橋里]’라 칭했고, 사동의 집성 성씨인 양주 최씨를 ‘주다리 최씨’라고 불렀다. 사동은 구라와 승지골[承旨谷] 외에는 대부분의 지역이 주택단지·아파트단지·학교(대학교)부지로 조성되었다. 특히 샘골은 옛 반월면의 기독교 전래지이자 최용신이 농촌계몽을 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폐동 전 사동의 자연취락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① 가래재, ② 감자골[ㆍ竹谷], ③ 구라, ④ 긴곶[長華], ⑤ 느진구지[晩花串], ⑥ 뒷골[後谷], ⑦ 막고지[莫串], ⑧ 분대(粉垈), ⑨ 산우물[山井], ⑩ 삼리(三里), ⑪ 삼밭[麻田], ⑫ 샘골[泉谷], ⑬ 석호(石湖), ⑭ 승지골[承旨谷], ⑮ 초당(草堂), ㆍ 항가울[杭湖] 등이다. ㆍ가래재 감자골 서남쪽에 있던 마을로 가래나무가 많았던 곳이다. 본오동 출신 양주영(염전업) 씨가 일제강점기 말엽에 처음 세거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폐동 때(1979년)는 3집이 있었으나 신도시개발로 주택지로 변모되었다. -`최용식(崔用植;1924. 9. 15), 사동 1167-17. ㆍ감자골 집집마다 감나무가 있고 대나무가 많아 감대골이라고 불렀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감대골[ㆍ竹洞]이 감자골로 변음되었다. 이곳의 세거 성씨인 양주 최씨 구족보에 보면 조상들의 묘를 시죽동(ㆍ竹洞)에 썼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 나온다. 분대에 처음 세거한 최혼의 후손(양주 최씨)이 이룩한 마을로 1979년 폐동 때 22호가 있었으나 현재는 고층아파트단지로 조성되었다. 최혼 선생을 비롯한 6대 13기 묘역은 안산시 향토유적 제10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최안묵(崔安默;1935. 7. 19), 사동 1157-8. ㆍ구라 사리(현 사동) 횟집으로 유명한 마을이다. 광복 이전만 해도 칡덩굴과 잡목 등이 우거진 곳이었으나 방조제 축조 후 인부들의 사택을 위한 민가가 신축되면서 취락이 이루어졌다. 그후 사회부(현 보건복지부)에 의해 난민 정착을 위한 50세대의 민가를 지으면서 호수가 늘기 시작하였고, 신도시개발로 횟집이 들어서자 더욱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이곳의 포구는 9·28수복 후 방조제 축조로 인해 성포동 성머리포구가 이곳으로 옮겨지고 성머리 어민 일부가 이곳에서 어업활동을 계속하자 점차 어업의 전진기지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구라(救羅)는 수문(水門)을 경계로 동쪽지역은 사동 234번지, 서쪽지역은 사동 242번지이다. 이곳은 예로부터 구리가 많이 매장되어 있어 ‘구라’라 했다는 설과, 이곳 바위에서 굴이 많이 나므로 “남양원님 굴 마시듯 한다.”는 속담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설, 신라 말 풍수지리학자인 ‘도선’이 이곳을 지나다가 지금의 성포동 예술인아파트 부근 산에서 사리 쪽을 보고 “천 명의 거지가 모여 살 자리구나.” 하여 ‘구라(救羅)’라 했다는 설 등이 전해지고 있다. -`이홍순(李弘淳;1921. 9. 12), 사동 704-105.
항가울과 감자골 사이 곶(바다로 뾰죽하게 내민 땅)이 길게 생긴 곳에 자리잡은 마을이므로 ‘긴곳[長華]’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곳은 조선왕조 연산군 때 분대에 낙향한 최혼의 후손(양주 최씨)들이 분가를 하면서 처음으로 자리를 잡아 취락이 이루어진 마을로, 폐동 때(1988년)에는 27호가 있었다. 신도시계획에 다라 현재는 주택지로 변모되었다. 폐동 전만 해도 마을에서는 삼밭 뒷산(고리봉)에서 해마다 음력 10월 16일에 산신제를 지냈다. -`최용권(崔用權;1926. 9. 10), 본오동 336블록 6-5. ㆍ느진구지 샘골 서쪽으로, 현 영신장 남쪽에 위치해 있던 마을이다. 이곳은 바다가 뾰죽나온 곶[串]으로, 지대가 높을 뿐 아니라 골(谷)이 좁아 배가 늦게 들어오므로 ‘느진구지[晩花串]’라 불렀는데, 일제 때는 양주 최씨의 묘막이 있었다. 폐동 때(1979년) 13호가 있었으나 신도시개발로 택지로 조성되어 있다. -`최종관(崔鍾寬;1939. 3. 25), 사동 1151-5. ㆍ뒷골 조선 중엽 연산군 때 분대에 낙향한 최혼(崔渾)의 셋째아들의 후손(양주 최씨)들이 분가하면서 세거한 마을이다. 그후 임(任)씨, 수성 최씨, 김해 김씨, 안동 김씨, 밀양 박씨, 수원 백씨, 평산 신씨, 신안 주씨 등 12성씨가 살았다. 사동에서 제일 높은 지대에 속했던 이 마을은 삼리 뒤에 위치해 있는 취락이라 하여 ‘뒷골[後谷]’이라 불렀다고 한다. 폐동 때(1979년) 20여 호 남짓한 마을이었는데 신도시개발로 택지로 조성되었다. 폐동 전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16일에 삼밭 뒷산 고리봉에서 산신제를 지냈다. -`최남규(崔南圭;1915. 11. 5), 고잔 2동 주공APT 7-201. ㆍ막고지 본오동 경계에 자리잡았던 마을로 북쪽에는 산우물, 남쪽에는 샘골이 있었다. 이곳은 바다에 돌출된 땅 끝에 있는 마을이므로 ‘막고지[莫串]’라 불렀다. 전주 이씨와 풍양 조씨 등의 오랜 세거지였던 막고지는 마을 남쪽에 포구가 있었으나 광복 직후 서해안 방조제 설치로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자 선박의 출입이 끊겼다. 폐동 때(1987년)에는 22호가 있었으며, 신도시개발에 따라 택지로 조성된 후 1989년부터 민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영우(李榮雨;1931. 3. 1), 이동 280블록 3-5. ㆍ분대 조선왕조 연산군 때 최혼(崔渾)이 통덕랑에 재임 중 사화(士禍)로 이곳에 낙향해 초가를 짓고 살아 취락이 이루어졌다. 그후 그의 후손(양주 최씨)이 긴곳·삼밭·초당·감자골 등지로 분가하면서 일가를 이루었다. 삼밭과 항가울 사이에 있던 분대(粉垈)는 폐동 때(1979년) 19집이 있었으나 신도시개발에 따라 주택지로 변모되었다. 마을에서는 삼밭 뒤에 있는 고리봉에서 해마다 음력 10월 16일에 산신제를 지냈다. -`최만규(崔晩圭;1919. 10. 29), 사동 1154-6. -`최동규(崔東圭;1916. 12. 6), 사동 1151-5. ㆍ산우물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로 흡사 우물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여 ‘산우물(山井)’이라 불렀다. 막고지 북쪽에 위치해 있던 이곳은 광산 김씨, 전주 이씨, 풍양 조씨, 김해 김씨, 의령 남씨 등의 세거지였으나 전주 이씨가 대성을 이루었다. 일제 때는 서당(書堂)이 있었을 만큼 교육열이 높은 곳이었다. 특히 신도시건설 때 마을 주민들은 “장차 폐동되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산우물의 정취는 간직하자.”며 마을의 유지나 마을의 모습 등을 필름에 담아 앨범집을 만들었다고 한다. 폐동 때(1987년) 20여 호 남짓 했던 산우물은 신도시개발에 따라 주택지로 변모되어 1989년부터 민가가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이곳에는 충신 최정걸(崔挺傑)의 묘가 안산시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이영우(李榮雨;1931. 3. 1), 이동 280블록 3-5. ㆍ삼리 뒷골 북쪽으로, 현 석호초등학교 주변에 있었던 마을이다. 조선 시대에는 안산군 성곶면 삼리라 칭했던 이곳은 밀양 박씨가 배판한 이래 양주 최씨, 김해 김씨 등이 세거했다. 마을 북쪽지역은 아랫말, 남쪽지역은 웃말, 동쪽지역은 한우물이라 불렀다. 이리(二里)와 4리(四里) 사이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삼리(三里)’라 칭했으며, 폐동 때(1979년)의 마을 호수는 22호였다. 현재는 택지로 조성되어 1988년부터 민가가 들어섰다. -`박상규(朴商奎;1936. 11. 10), 사동 1167. ㆍ삼밭 조선 시대 김참(섬유 따위를 가공하여 피륙을 짤 때까지의 모든 일)의 명산지라 하여 ‘삼밭[麻田]’이라 칭했다고 한다. 분대와 석호 사이에 위치해 있던 이곳은 조선왕조 연산군 때 최혼(崔渾;통덕랑 역임)이 분대에 낙향해 살다가 그의 넷째아들인 최홍개(崔弘漑;증좌승지)가 분가하면서 자리를 잡고 살아 취락이 형성되었다. 그후 홍개의 후손인 양주 최씨가 대대로 살아오다가 신도시개발로 1979년 폐동된 후 15호 남짓하던 원주민들 대부분이 석호(대학동)로 이주하였다. 현재는 한양대학교 기숙사가 들어서 있다. 폐동 전만 해도 마을에서는 이곳 뒷산[高理峯 또는 高樓峯] 정상에서 해마다 음력 10월 16일에 산신제를 지냈다. 고리봉 정상 바위틈에는 마을에서 위하는 향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일제 때 어느 교인이 자기 집 정원에 옮겨 심으려 하였으나 곡괭이·삽 등이 부러지곤 하여 전혀 나무에 손을 대지 못하였다. 그리고 한국전쟁 후 이번에는 군인들이 부대장의 명령으로 나무를 베려 하였으나 갑자기 톱이 부러졌다. 그러나 군인들은 끝내 이 나무를 베어 버렸다. 그런데 이 군인들은 귀로중 군포와 안양 사이에서 교통사고로 모두 사망했다고 한다. -`최남규(崔南圭;1915. 11. 5), 고잔 2동 주공APT 7-201. ㆍ샘골 삼리 서쪽으로, 현 월드아파트 서쪽에 있던 마을이다. 이곳은 샘이 많이 나는 곳이라 하여 ‘샘골[泉谷]’이라 칭했다고 한다. 일제 때 화성군 반월면에서 수질검사를 한 결과 이 마을 샘 우물의 수질이 제일 우수했다고 한다. 샘골은 조선왕조 말엽에 남양 홍씨 문희공파(文僖公派) 23세손인 홍의경(洪義卿;자는 三龍)이 처음으로 세거한 이래 그의 후손인 남양 홍시가 대대로 살아 온 곳이다. 폐동 때(1979년) 40여 호 중 절반이 남양 홍씨였을 만큼 홍씨의 집성촌이었다. 이 마을은 신도시개발 전 반월면에서는 기독교(감리교)가 최초로 전래된 곳이기도 하다. 현존해 있는 천곡교회(泉谷敎會)는 샘골의 첫 입주자인 홍의경의 아들 원삼[元三;1867. 8. 18~1945. 12. 26. 묘는 안산시 사동 36에 있고, 부인은 남원 양씨인데 슬하에 천유<1919년생>, 백유<1923년생>가 있다]이 1907년 7월 안산시 사동 63 김정태(金正泰) 소유의 땅을 빌려 6칸짜리 예배당을 지은 것이 그 시초이다. 그후 1931년 최용신(崔容信)이 농촌계몽운동 지도자로 부임하면서 내외에 널리 알려졌다. -`홍천유(洪千裕;1919. 3. 9), 고잔 2동 주공APT 408-1303. ㆍ석호 뒷골 서쪽으로, 현재 한양대학교가 들어선 곳이다. 이 마을은 한양대 초입에서 구라 사이에 있는 산에 흰 차돌(쉰돌박이라 칭함)이 많이 박혀 있는 데다가, 한국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바닷물이 이곳까지 들어왔다고 하여 차돌에서 석(石)자를 취하고, 바다에서 호(湖)자를 취해 ‘석호(石湖)’라 불렀다고 한다. 석호마을은 양주 최씨, 김해 김씨 등의 세거지로 폐동 때(1979년) 27호가 있었다. 석호초등학교도 이곳에 있었으나 신도시개발로 삼리로 이전하였다. 현재는 택지로 조성되어 대학동으로 통칭되고 있다. -`최만규(崔晩圭;1919. 10. 29), 사동 1154-6. ㆍ승지골 삼밭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 중엽에 좌승지(左承旨)를 지내다 퇴임하고 낙향해 살다가 이 마을에 묻힌 최홍개(崔弘漑)의 관직명을 따서 ‘승지골[承旨谷]’이라 하였다. 이 마을에 최초로 산 사람은 수원시 율전동 출신인 염석주(廉錫柱)로 알려졌는데, 그는 일제 중엽에 이곳에서 염소를 비롯하여 닭·거위·돼지·소 등을 기르며 살았다고 한다. 그후 그의 집안인 염석원을 거쳐 이창훈·이경훈 등이 세거했다. -`최종관(崔鍾寬;1939. 3. 25), 사동 1151-5. ㆍ초당 감자골과 긴곳 사이에 있던 마을이다. 양주 최씨(楊州崔氏) 9세손 독선당(獨善堂) 최혼이 1498년(연산군 5년) 무오사화를 피해 감자골로 입향한 이래 유망한 자제들을 모아 훈학에 전념하였는데, 그의 차남 화은(華隱) 홍주(弘澍)가 휴암산(부엉재산) 중턱에 강당을 지어 초당(草堂)이라 이름짓고 인재를 양성하기 시작한 이후 마을 이름도 초당이라 하였다. -`최안묵(崔安默;1935. 7. 19), 사동 1157-8. ㆍ항가울 이곳에 처음으로 취락이 형성되었을 때에는 바닷가에 위치해 있어 이웃 마을과 왕래를 하려면 배를 이용했다고 하여 ‘항가울[杭湖;또는 항갈]’이라 불렀다고 한다. 분대와 긴곳 사이에 있던 항가울은 초당·분대·긴곳·삼밭 등과 더불어 양주 최씨가 배판한 마을이다. 서북쪽지역을 웃말, 남쪽지역을 아랫말이라 칭했으며, 폐동 때(1979년)에는 24호가 살았으나 신도시개발로 주택지로 조성되었다. 폐동 전만 해도 마을에서는 삼밭 뒤에 있는 고리봉에서 해마다 음력 10월 16일 산신제를 지냈다. -`최용식(崔用植;1924. 9. 15), 사동 1167-17. (17) 본오동 조선 시대에는 광주군 성곶면 본오리(廣州郡 聲串面 本五里)와 분오리(分五里)라 했다가, 1906년 9월 24일 칙령 제49호에 따라 안산군 성곶면 본오리(安山郡 聲串面 本五里)와 분오리(分五里)로 되었으며, 1914년 3월 1일 부령 제111호에 의거 수원군 반월면 본오리(水原郡 半月面 本五里)로 개칭되었다. 그후 1949년 6월 15일 대통령령 제161호에 따라 화성군 반월면 본오리(華城郡 半月面 本五里)로 되었고, 이어 1986년 1월 1일 법률 제3798호에 의거 안산시 본오동(安山市 本五洞)이 되었다. 본오동은 조선 시대에 성곶면의 행정구역을 조정할 때 1리~4리는 쉽게 마을 명칭이 결정되었으나 배옷 주민들과 선암동(仙岩洞;오목골) 주민들은 서로 이해가 엇갈려 배옷은 본오리로, 선암동은 분오리로 나뉘어 불리게 되었다. 그후 1914년 부군을 통합하면서 분오리를 본오리에 흡수해 본오리로 하였고, 시제(市制)가 실시되면서 ‘본오동(本五洞)’으로 개칭하였다. 본오동은 신도시건설로 대부분의 지역이 폐동되어 택지 등으로 조성되었다. 폐동 전 본오동의 자연취락은 ① 각골[角谷], ② 배옷[梨湖], ③ 오목골[梧木洞], ④ 염전, ⑤ 작은반월[小半月] 등이다.
풍수로 보아 소[牛]가 누워 있는 와우혈(臥牛穴)이므로 ‘각골[角谷]’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 일설에 의하면 마을 동쪽에 있는 산이 코끼리 형상이라 하여 상봉(象峯)이라 했고 마을 이름도 산 봉우리를 따 상촌(象村)이라 했다고 한다. 전주 이씨 가승에는 ‘가골[佳谷]’로 기록되어 있다. 각골은 오목골 동쪽 마을로, 신안 주씨를 비롯하여 전주 이씨, 순흥 안씨 등 55호가 살았는데 동쪽지역은 웃말, 서쪽지역은 아랫말, 북쪽지역은 집너머 또는 웃각골[上角谷]이라 불렀다. 1985년 신도시계획에 따라 폐동되자 원주민들 대부분이 본오동으로 이주했으며, 이곳은 주택지로 조성되어 1988년부터 민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월 15일 경이면 길일을 택하여 마을 내에 있는 3개의 대동우물에서 소머리를 놓고 정제(井祭)를 지내는데, 마을의 연로한 노인 중 부정타지 않고 행실이 바른 사람을 제관으로 선정해 마을의 안정과 풍년·무병장수를 기원한다. -`주병두(朱柄斗;1922. 3. 18), 본오동 676-5. -`이병화(李丙和;1938. 3. 22), 본오동 667-2. ㆍ배옷 조선 시대에는 안산군 성곶면 본오리(安山郡 聲串面 本五里)라 했던, 맛살과 염밭(소금)으로 유명했던 마을이다. 조선 중엽 이 마을 동쪽 연안에 배가 들어왔다 하여 ‘배옷[梨湖]’이라 칭했으며, 포구는 ‘이호포(梨湖浦)’라 불렀다. 신도시개발 이전에는 전체 호수가 103호나 되어 화성군 반월면 관내 자연취락 중 가장 컸던 마을이다. 마을 북쪽지역을 웃말, 서남쪽지역을 아랫말, 동남쪽지역을 동끝, 동북쪽지역을 우중굴이라 불렀는데, 광복 전까지만 해도 마을에서는 웃말 소재 대동우물에서 해마다 7월 초에 길일을 택해서 정제(井祭)를 지냈다. 배옷은 1986년에 폐동되어 원주민들은 본오동·수원·인천·안양·구반월 등지로 이주하였다. 현재 일부는 택지로, 일부는 수리안전답으로 남아 있다. -`이홍재(李弘載;1921. 5. 15), 본오동 822. ㆍ오목골 본래의 마을명은 이 마을 남쪽에 있는 산에 신선이 놀던 바위가 있다 하여 신선동(神仙洞)이라 했는데, 그후 조선 말엽에 인동 장씨 후손이 자기 집 울타리 뒤에 오동나무가 있다는 연유로 ‘오목골[梧木洞]’로 개칭하였다. 그 오동나무는 일제 말엽까지 있었다고 한다. 오목골은 배옷 서쪽으로, 처음으로 마을이 생긴 이래 영천 이씨, 김해 김씨, 파평 윤씨 등이 세거했다. 1946년 4월 1일 이곳에 본오초등학교가 생기면서 호수가 급격히 늘어 폐동 때(1985년)는 60여 호가 있었는데, 신도시개발로 원주민들 대부분이 본오동·수원 등지로 분산 이주했다. -`윤태성(尹泰聲;1913. 12. 12), 본오동 86-11. ㆍ염전 사동 한가울 동남쪽에 있던 마을로, 한국전쟁 직후 인천 출신 이준성(李俊成)이 이곳에 염전을 만들고 염부(鹽夫)를 위한 염부사(鹽夫舍)를 건립하면서 취락이 이루어졌다. 한때 염전(鹽田) 마을은 20여 호가 있을 만큼 취락의 형태를 갖추었으나 1982년 이준성이 염전을 매각한 후 이곳이 농경지로 변모되자 주민 또한 점차 외지로 나가 현재는 민가 1호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홍재(李弘載;1921. 5. 15), 본오동 822. ㆍ작은반월 예전에 화성군 반월면 관내에서 팔곡동 담너머마을을 큰반월[大半月]이라 칭한 데 반하여, 이 마을은 담너머보다 호수가 적다 하여 ‘작은반월[小半月]’이라 불렀다 한다. 본래는 화성군 매송면 월리와 본오동 경계(현재 농경지)에 사람들이 살았으나 그곳이 지대가 높고 식수도 좋지 않아 조선 말에 담너머 서쪽인 현재의 위치로 이주하였다. 광주 이씨와 제씨 등 67호가 살았던 작은반월은 마을 동쪽을 웃말, 서쪽을 아랫말, 중앙을 가운뎃말이라 칭했는데, 신도시개발로 1986년 폐동되어 원주민 대부분이 본오동·수원·남양·인천 등지로 이주했다. 현재 일부는 안산시 외곽도로로 편입되었고, 일부는 시설녹지로 되어 옛 작은반월의 정취는 찾아볼 수가 없을 만큼 변모되었다. -`이용덕(李容德;1922. 3. 18), 본오동 676-5. -`참고문헌:「내 고장 안산」, 1990. 2. 28, 이승언. (18) 팔곡동 조선 시대에는 광주군 북방면 팔곡 1리와 팔곡 2리(廣州郡 北方面 八谷一里, 八谷二里)라 했다가, 1906년 9월 24일 칙령 49호에 따라 안산군 북방면 팔곡 1리와 팔곡 2리(安山郡 北方面 八谷一里, 八谷二里)로 되었으며, 1914년 3월 1일 부령 제111호에 의거 수원군 반월면 팔곡 1리와 팔곡 2리(水原郡 半月面 八谷一里, 八谷二里)로 개칭되었다. 그후 1949년 8월 15일 대통령령 제161호에 따라 화성군 반월면 팔곡 1리와 팔곡 2리(華城郡 半月面 八谷一里, 八谷二里)로 되었다가, 1986년 1월 1일 법률 제3798호에 의거 팔곡 2리가 안산시 팔곡 2동으로 되었고, 1994년 12월 26일 대통령령 제14434호에 의거 화성군 반월면 팔곡 1리가 안산시 팔곡 1동으로 편입되었다. 수리산 남쪽 기슭 8개의 골짜기 안에 위치해(또는 8개의 골짜기가 모이는 곳) 있다 하여 팔곡동(八谷洞)이란 동명이 생겨났다. 팔곡 1동에는 ① 남산들[南山平], ② 능앞[陵前], ③ 선학골[仙鶴洞], ④ 구장터[舊場址], ⑤ 우묵골[井洞] 등의 자연취락이 있고, 팔곡 2동에는 ⑥ 담너머(澹園), ⑦ 샛골[間谷] 등 자연 취락이 있다. -`민병일(閔丙一;1920. 2. 12), 반월동 62.
남산뜰[南山平]은 협소한 계곡으로 이루어진 상단부와는 달리 광활한 평야를 이루고 있는데, 구전에 의하면 삼국 시대 때 이곳을 도읍지로 삼으려 하자 갑자기 우뢰산(雨雷山)이 울면서 밀려와 현 위치에 머물러 도읍지 이전 계획을 멈추고 말았다고 한다. -`민병일(閔丙一;1920. 2. 12), 반월동 62. ㆍ능앞 마을 뒷산에 조선 세조 때의 세도가 한명회(韓明澮)의 장인 민대생(閔大生)의 무덤이 있어, 뒷날 사람들이 이 무덤을 능으로 잘못 알고 부른 데서 ‘능앞[陵前]’이란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ㆍ선학골 이곳 지형이 풍수지리상 선학혈(仙鶴穴)이고, 1940년대 말까지만 해도 선학골[仙鶴洞] 노송지대에 학로 떼가 모여들어 선학의 서식처 같았다고 한다. ㆍ구장터 예부터 5일 장시가 섰던 곳이나 1925년 을축년(乙丑年) 대홍수 때 시장이 폐지되고 면사무소도 건건동으로 옮겨가자 이곳을 구장터[舊場址]라 불렀다. ㆍ우묵골 이곳의 지형이 마치 우물처럼 우묵하게 생기고 샘이 많이 나는 곳이라 하여 우묵골[井洞]이라 하였다. ㆍ담너머 조선 시대에는 안산군 북방면 팔곡 2리라 칭했던 마을로, 본오동 작은반월 보다 큰마을이라 하여 ‘큰반월’이라 하였다. 이곳은 샛골 남쪽에 위치해 있는데, 샛골에서 이 마을로 가자면 샛골 남쪽에 동·서로 길게 늘어져 있는 쪽박산 능선을 넘어야 했으므로 이 마을을 ‘담너머[澹園]’라 칭하였다. 이 마을의 서쪽지역을 공말(또는 웃말), 동쪽지역을 아랫말이라 부른다. 담너머는 광주 이씨가 배판한 이래 신안 주씨, 전주 이씨 등이 세거해 왔는데, 현재는 광주 이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마을 뒤에 있는 당봉(堂峯) 정상에 당집을 짓고 당제를 지내 왔으나 본오동을 왕래하는 주민들이 마을 앞을 가자면 말굽이 붙는 등 주민들의 피해가 크므로 현재는 샛골 뒷산에서 샛골 및 우묵골, 건건동 주민들과 함께 해마다 음력 10월 1일에 당제를 지내고 있다. -`주만동(朱萬東;1920. 2. 6), 팔곡 2동 420. ㆍ샛골 담너머와 팔곡 1동의 우묵골 사이에 위치해 있어 샛골[間谷]이라 부르는데, 일명 쇄골이라 부르기도 한다. 샛골은 마을 서쪽지역을 웃말, 동쪽지역을 아랫말이라 칭하고 있다. 이곳에 취락이 처음으로 이루어진 것은 조선 중엽에 평택 임씨가 배판한 후부터이다. 그후 해주 오씨, 원주 변씨, 김해 김씨, 경주 김씨 등이 세거해 현재는 평택 임씨와 해주 오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샛골 뒷산에서 당제를 지내고 있다. -`임철호(林哲鎬;1907. 2. 6), 팔곡 2동 369. (19) 건건동 조선 시대에는 광주군 북방면 건건리(廣州郡 北方面 乾乾里)라 했다가 1906년 9월 24일 칙령 제49호에 따라 안산군 북방면 건건리로 되었으며, 1914년 3월 1일 부령 제111호에 의거 수원군 반월면 건건리로 개칭되었고, 그후 1949년 8월 15일 대통령령 제161호에 따라 화성군 반월면 건건리로 되었다가 1994년 12월 26일 대통령령 제14434호에 의거 안산시 건건동으로 편입되었다. 건건동이란 지명은 조선왕조 중엽 한응룡(韓應龍)이란 사람이 광주(廣州)로 이사하던 날 하루종일 날씨가 건건(乾乾)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건건동의 자연취락은 ① 건지미(乾芝味), ② 구장터[舊場址], ③ 용담(龍潭)뿌리, ④ 창말[倉村] 등이다. -`김계태(金癸泰;1917. 11. 25), 팔곡 2동 365. ㆍ건지미 건건동의 끝 부분에 위치한 자연취락으로 처음에는 꼬리 ‘미(尾)’자를 써서 건지미(乾芝尾)라 했으나 그 뒤 미(味)자로 바꿔 건지미(乾芝味)로 쓰고 있다. ㆍ구장터 옛날 5일장이 서던 곳이다. 1925년 대홍수 때 폐허화된 이후 옛 장터 자리라 하여 구장터(舊場址)라 하였다. ㆍ용담뿌리 마을 뒷산의 형상이 서쪽은 용이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이고 동쪽은 꼬리 형태로 보인다 하여 용담(龍潭)뿌리라 했다 한다. ㆍ창말 조선왕조 초부터 고을 일대의 양곡을 저장하던 창(倉)이 설치되었던 곳이어서 ‘창말(倉村)’이라 불러 왔고, 건건동 353번지 농지를 ‘창밭(倉田)’이라 부르고 있다. (20) 사사동 조선 시대에는 광주군 북방면 사사리(廣州郡 北方面 沙士里)라 했다가 1906년 9월 24일 칙령 제49호에 따라 안산군 북방면 사사리(安山郡 北方面 沙士里)로 되었으며, 1914년 3월 1일 부령 제111호에 의거 수원군 반월면 사사리(水原郡 半月面 沙士里)로 개칭되었다. 그후 1949년 8월 15일 대통령령 제161호에 따라 화성군 반월면 사사리(華城郡 半月面 沙士里)가 되었다가, 1994년 12월 26일 대통령령 제14434호에 의거 안산시 사사동(安山市 沙士里)이 되었다. 조선왕조 말(1860년경) 형성된 마을로, 이 지역에 아름다운 모래가 많고 선비들이 많이 살았다고 해서 사사동(沙士洞)이라 불려졌다고 한다. 사사동의 자연취락은 ① 밝기울[內谷], ② 대촌(大村), ③ 상촌(上村) 등이다. ㆍ밝기울 큰 마을에서 바라볼 때 취락이 골 안의 깊숙한 곳에 형성되어 있어 예부터 ‘밝기울’ 또는 내곡(內谷)이라 하였다. ㆍ대촌 이 마을은 인근 자연부락에 비해 가장 먼저, 그리고 크게 형성되었다고 하여 대촌(大村)이라 하였다. ㆍ상촌 조선 시대에 지체 높은 양반들이 살았고, 또 마을에서 가장 윗쪽에 위치해 있다고 해서 상촌(上村)이라 하였다. -`참고문헌:「화성군지」, 1990. 11. 30, 崔洪奎. (21) 수암동 조선 시대에는 안산군 군내면 수암리(安山郡 郡內面 秀岩里)와 서정리(西亭里)였다가, 1914년 부령 제111호에 따라 시흥군 수암면 수암리(始興郡 秀岩面 秀岩里)로 되었다. 그후 1989년 1월 1일 법률 제4050호에 의거 시흥시로 승격하면서 시흥시 수암동(始興市 秀岩洞)으로 되었다가 1995년 4월 20일 대통령령 제14629호에 의거 안산시 수암동(安山市 秀岩洞)이 되었다. 이 마을은 수암봉(秀岩峯) 아래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수암동이라 칭했으며, 동사무소를 비롯해 학교·농협·우체국·파출소 등이 자리잡고 있다. -`강영덕(姜永德;1930. 5. 16), 수암동 125.
안산동사무소 북쪽, 수인산업도로 동쪽에 자리잡은 마을로서 본래 나무와 숲이 우거졌던 곳이다. 한국전쟁 후 황해도 해주 출신의 해주 오씨(海州吳氏) 등 난민들이 정착하면서 취락이 형성되었다. 그후 1973년 취락구조 개선사업으로 말끔히 단장되었다. 이 마을은 이곳 동쪽에 있는 연암사(延岩寺) 법당 뒤에 남사(南蛇)바위가 있어, 이 바위 밖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남사(南蛇)박’이라 부르고 있다. -`오중근(吳重根;1918. 8. 29), 수암리 57-2. ㆍ안산 수인산업도로와 수암봉 사이에 위치한 마을이다. 조선 시대에는 안산군 관아가 있었을 만큼 안산군의 중심지였으나, 1914년 일제가 부·군·면을 통폐합하면서 면 행정의 중심지로 변모되었다. 이곳은 조선 시대 안산군의 관아가 있었으므로 ‘안산(安山)’이라 부르고 있는데, 갯다리[介僑]에서 동쪽으로 옛 안산군 관아가 있었던 직선 길을 따라 북쪽 지역을 ‘독수리[西亭里]’ 그 남쪽 지역을 ‘수암리’라 칭하고 있다. 수암동 안산은 조선 시대 안산의 명실상부한 중심지였다. 또 마을회관 주변을 ‘개울께’, 동사무소 서쪽을 ‘샛터말’, 수암봉 밑을 ‘웃골’이라 부르고 있다. 이 마을은 조선왕조 제2대 정종 2년(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는데 큰공을 세워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으로 연성군(蓮城君)에 봉해진 김정경(1345~1419년)이 옛 안산군 관아 뒤에 살면서부터 취락이 이루어졌다. 그가 세거할 때 심은 은행나무가 세 그루라고 하는데, 그 중 한 그루가 남아 있다. 조선 시대에는 솥점[鐵鼎]으로 유명했던 안산은 수암봉 아래에서 해마다 음력 10월 1일에 수암봉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안산군, 「안산군 읍지」, 1899. -`이수경(李壽慶;1914. 3. 5), 수암리 349. ㆍ지장골 연암사(延岩寺) 동쪽 수암저수지 위에 있는 마을이다. 고려 시대에 이 마을 뒷산 중턱에 있던 사찰(현재는 절터만 있음)에서 어느 스님이 수도 중 지장보살를 친견(親見)했다 하여 이 사찰을 지장사(地藏寺)라 했으며, 그후 마을 이름도 ‘지장골(地藏谷)’이라 했다고 전한다. -`이수경(李壽慶;1914. 3. 5), 수암리 349./`안산군, 「안산군읍지」, 1899. ㆍ긴논들 안산동사무소 앞에서 분지고개(조남 3리) 사이에 있으며, 들이 길어 ‘긴논들’이라 부른다. -`이수경(李壽慶;1914. 3. 5), 수암리 349. ㆍ남사바위 연암사 법당 뒤(서북쪽)에 있는 바위로 이곳에 뱀이 많았다고 한다. 이 바위로 인해 마을 명칭이 남사(南蛇)박이 되었다. -`오중근(吳重根;1918. 8. 29), 수암리 57-2. ㆍ귀뜸이고개 안산과 현 안양 3동 소재인 담배촌을 왕래하는 고개로 조선 시대에는 ‘작은재[小峙]’라 불렀다. 안산과 안양 사이에 도로가 개설되기 전에는 큰 통로였다. 귀뜸이는 안양 3동의 자연취락인 후두미동(後頭尾洞)을 말한다. -`이태만(李泰萬;1918. 3. 7), 수암리 130-14. ㆍ망해정터 망해정터[望海亭址]는 옛 안산군 관아가 있던 곳에서 서쪽에 있으며, 옛 지명은 안산군 군내면 서정리(西亭里;독수리)였다. 「안산군읍지」 승지고적(勝地古跡)조의 “邑治西亭有望海亭舊址官舍後有士ㆍ形止此郞蓮城君金定卿之棲……”라는 기록으로 보아, 이 정자는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여 공을 세워 연성군에 봉해진 김정경(金定卿)이 살던 곳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 밖의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다. -`안산군, 「안산군읍지」, 1899.
안산 독수리와 지장골 사이에 있다. 구전에 따르면 아주 먼 옛날 서해의 바닷물이 들어왔을 때 이곳 일대는 염밭[鹽田]이었다고 한다. -`이수경(李壽慶;1914. 3. 5), 수암리 349. ㆍ수암봉 수암동과 안양시 안양 3동과 경계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395m이다. 수리산의 연봉으로 조선 초기부터 옛 안산군의 진산(鎭山)이었다. 본래의 산명은 독수리와 같다고 하여 독수리봉[鷲岩]이라 불렀는데, 조선 말엽에 이르러 산봉이 수려하므로 ‘수암봉(秀岩峯)’이라 칭하였다. 1914년 부군 폐합 때 이 산명을 따서 수암면(秀岩面)이라 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 권 148`/`안산군, 「안산군읍지」, 1899. ㆍ수암저수지 안산 북쪽 지장골에 있다. 저수지의 규모는 몽리면적 8ha에 계획 저수량이 4만1천톤이다. 이 수암저수지로 인해 수암 1리와 수암 2리 등의 논은 수답(水畓)이 되었다. -`이수경(李壽慶;1914. 3. 5), 수암리 349. ㆍ안산군 여단터 여귀(ㆍ鬼)라 하여 제사를 못 받는 귀신이나 못된 돌림병으로 죽은 귀신을 위해 각 고을에서 제사를 지내 이들 영혼을 위로하는 단이 여단(ㆍ壇)이다. 「안산군읍지」에 “ㆍ壇 在邑後北距二里”라 하여 안산읍 관아 뒤 북쪽 2리 지점에 여단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지금의 지장골 뒤 산 중턱을 말한다. 현재 안산군 여단터[ㆍ壇址]는 그 터만 있을 뿐 건물은 없으며, 깨진 기왓장과 장대석 등이 출토되고 있다. -`안산군, 「안산군읍지」, 1899. ㆍ안산천 안산천(安山川)은 수암동 수암봉에서 발원하여 개다리를 지나 양상동·월피동(月陂洞)·성포동(聲浦洞)·고잔동(古棧洞) 등을 거쳐 서해바다에 합류되는 하천으로, 조선 시대에는 서해 갯벌 물이 이곳까지 이르렀다 하여 ‘개교천(介橋川)’이라 하였다. -`안산군, 「안산군읍지」, 1899`/`안산군, 「안산군읍지」, 1841. ㆍ안장바위 수암사지[秀岩寺址] 아래에 있으며, 바위가 말의 안장처럼 생겨 ‘안장바위’라 부르고 있다. -`이수경(李壽慶;1914. 3. 5), 수암리 349. ㆍ연암사 연암사(延岩寺)는 남사박과 지장골 사이에 위치해 있다. 태고종으로 1960년대에 창건되었다. ㆍ원골 안산 북쪽, 봉안지골 동쪽에 있는 산골이다. -`김용환(金龍煥;1928. 5. 6), 수암리 128.
수리산 낙맥으로 수암봉 옆(북쪽)에 있으며 산봉이 콧등처러 생겼다. -`김용환(金龍煥;1928. 5. 6), 수암리 128. ㆍ큰골 안산 북쪽, 원골 동쪽에 있다. 골짜기가 크고 넓다. -`김용환(金龍煥;1928. 5. 6), 수암리 128. ㆍ타래골 큰골에서 남서쪽으로 지장골에 속해 있는 골짜기이다. -`김용환(金龍煥;1928. 5. 6), 수암리 128. ㆍ햇골고개 지장골과 안양시 박달동 햇골 사이에 있는 소로이다. 비포장 길로서 현재는 사용되지 않고 있다. -`김용환(金龍煥;1928. 5. 6), 수암리 128. (22) 장상동 조선 시대에는 안산군 군내면 장상리(安山郡 郡內面 獐上里)였다가, 1914년 부령 제111호에 따라 시흥군 수암면 장상리(始興郡 秀岩面 章上里)로 되었다. 그후 1989년 1월 1일 법률 제4050호에 의거 시흥시로 승격하면서 시흥시 장상동으로 되었다가 1995년 4월 20일 대통령령 제14629호에 의거 안산시로 편입되어 안산시 장상동이 되었다. 장상동은 노리울 뒤에 있는 고깔봉에서 마을에 이르는 산세가 노루의 입처럼 생겼으므로 장구혈(獐口穴) 장상리(獐上里)라 하였는데, 1914년 일제에 의해 장상리(章上里)로 개칭되었다가 1995년 7월 26일 광복 50주년을 맞아 민족정기 회복 차원에서 안산시의회 의결을 거쳐 다시 장상동(獐上洞)으로 한문자를 고쳤다.
-`김기성(金基成;1909. 2. 26), 장상리 173. ㆍ동막골 조선 시대에는 안산군 군내면 동곡리(安山郡 郡內面 東谷里)라 칭했던 마을로, 고구려 때 안산군 관아가 있던 곳(노리울)에서 동쪽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동막골[東谷]’이라 부른다. 안산 김씨가 처음 세거한 마을로 현재도 안산 김씨(또는 연성 김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마을회관 동쪽 지역은 ‘웃말’, 서쪽 지역은 ‘아랫말’, 고깔봉 아래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은 마을은 ‘양단말’이라 부르고 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1일 마을 동쪽 저수지 위에서 산신제를 지내 오고 있다. -`이회덕(李會德;1912. 12. 15), 장상리 422-1.
노리울과 수암동 원당골 사이에 있는 고개로, 수암동에 살던 박돌구니(ㆍ~1986년)라는 농부가 노리울에 전답이 있어 농사를 짓기 위해 이 고개를 왕래하였다 하여 그의 이름을 따서 ‘돌구니고개’라 부르고 있다. 일명 ‘풀무고개’ 또는 ‘부뚜고개’라 부르기도 한다. -`정재형(鄭載亨;1922. 4. 25), 장상리 126-6. ㆍ동곡교 동막골 초입, 수인산업도로 도중에 있다. 동곡교(東谷橋)는 길이 9.6m, 교폭 18m, 다리 높이 3m이다. 본래의 다리는 1944년에 가설되었고, 1976년 수인산업도로 포장공사로 다시 가설되었는데, 그후 1982년에 다리를 넓혔다. -`경기도, <교량현황>, 1986. ㆍ똥바위 동막골 저수지 위에 있는 바위이다. 짐승들이 이 바위에서 뒤를 보아 바위가 검어졌다고 한다. 힘센 장수가 손으로 눌렀다는 손자국이 남아 있다. -`정시엽(鄭時燁;1911. 5. 16), 장상리 387. ㆍ매봉재 산봉우리가 매처럼 생겼다. 능어리고개 서편에 있다. -`정재형(鄭載亨;1922. 4. 25), 장상리 126-6. ㆍ멱골 바람개비 고개(風嶺) 밑에 있는 골짜기이다. 아주 먼 옛날 서해 바닷물이 들어왔을 때 이곳에서 미역을 채취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이곳 골짜기에서 멱(수영)을 감았다고 하여 ‘멱골’이라 했다고 한다. -`정시엽(鄭時燁;1911. 4. 16), 장상리 387. ㆍ바람개비고개 동막골과 군포시 속달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고개가 바람개비고개(風嶺)이다. 가파르고 험준해 속달리 사람들이 안산장(安山場;수암동 소재)으로 이용하던 고개이다. 비포장 소로이다. -`이회덕(李會德;1912. 12. 15), 장상리 422-1. ㆍ불당골 동막골 동남쪽에 있다. 이곳에 절이 있었다고 하여 ‘불당골[佛堂谷]’이라 부르고 있다. -`이회덕(李會德;1912. 12. 15), 장상리 422-1. ㆍ삼신우물 고깔봉 산신나무(소나무) 서쪽에 있는 우물이 산신우물(三神井)이다. 노리울 부녀자들이 해산을 하면 이 우물물로 미역국을 끓여 먹기도 하고, 산신제를 지낼 때 정한수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김기성(金基成;1909. 2. 26), 장상리 173. ㆍ삼층고개 동막골과 부곡동(개멸)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이곳을 오르자면 세 계단을 거쳐야 했으므로 ‘삼층고개’라 한다. 고개 밑에는 전설 깃든 은우물이 있다. -`이회덕(李會德;1912. 12. 15), 장상리 422-1. ㆍ새골 노리울 앞 골짜기로, 황새의 서식처이므로 ‘새골’이라 칭하였다. -`김기성(金基成;1909. 1. 26), 장상리 173. ㆍ선비바위 수리산 정상에서 서쪽으로 산 중턱에 있는 바위로, 선지바위 위에 있다. 조선 중엽에 어느 선비가 공부를 했던 곳이라 한다. -`정시엽(鄭時燁;1911. 4. 16), 장상리 387. ㆍ선지바위 수리산 정상 서쪽 산 중턱에 있으며 바위에 큰 구멍이 뚫려 있다. 임진왜란 때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이곳에 와 조선에 큰 인물이 나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바위에 구멍을 뚫었는데, 이때 선지가 치솟았다고 한다. -`이회덕(李會德;1912. 12. 15), 장상리 422-1. ㆍ수탕골 피나뭇골 동쪽에 있다. 이곳에서 수탉이 울었다 하여 숫탉골이라 하였으나 그것이 변음되어 ‘수탕골’이라 부르고 있다. -`정시엽(鄭時燁;1911. 4. 16), 장상리 387. ㆍ신당미 노리울 밤석골[栗谷] 서쪽 논 구렁텅이에 산신을 모시는 당집이 있어 이곳은 ‘신당미’라 칭한다. -`김기성(金基成;1909. 2. 26), 장상리 173. ㆍ쓰레봉 동막골 동남간에 있는 산으로 수리산 낙맥이다. 산봉우리가 흡사 쓰레처럼 생겼다. -`정시엽(鄭時燁;1911. 4. 16), 장상리 387. ㆍ은우물 동막골과 부곡동 개멸 사이 3층고개 아래에 있는 우물로 다음과 같은 전설이 구전된다. 아주 먼 옛날 어느 부자가 이곳에서 살았는데, 전란이 일어나자 은비녀를 우물 속에 넣고 피난을 갔다. 이것을 알게 된 마을 주민들은 이 비녀를 찾으려고 애를 썼지만 그때마다 뇌성벽력이 일어나 결국에는 찾지를 못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한발이 오래 계속되면 동막골 주민들이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던 유서 깊은 우물이다. -`이회덕(李會德;1912. 12. 15), 장상리 422-1. ㆍ작은골 노리울 산신나무(소나무) 서쪽에 있다. 작은 골짜기로 현재 농경지이다. -`김기성(金基成;1909. 2. 26), 장상리 173.
노리울 산신나무(소나무) 동쪽에 있는 큰 골짜기로 고깔봉 상봉이 된다. -`정재형(鄭載亨;1922. 4. 25), 장상리 126-6. ㆍ피나뭇골 동막골에 속해 있는 골짜기이다. 불당골 동쪽으로 피나무가 많이 자생하였던 곳이다. -`정시엽(鄭時燁;1911. 4. 16), 장상리 387. ㆍ해방꽃우물 노리울 앞(서쪽) 논 가장자리에 있는 우물이다. 이곳에서 1944년에 꽃이 피자 다음 해(1945년)에 광복이 되었다고 한다. 일명 ‘큰우물’이라 부른다. -`김기성(金基成;1909. 2. 26), 장상리 173. ㆍ황새골 동막골에 속한 골짜기로 수탕골 위에 있다. 황새의 서식처이므로 ‘황새골’이라 부른다. -`이회덕(李會德;1912. 12. 15), 장상리 422-1. (23) 장하동 조선 시대에는 안산군 군내면 장하리(安山郡 郡內面 獐下里)였다가, 1914년 부령 제111호에 따라 시흥군 수암면 장하리(始興郡 秀岩面 章下里)로 되었다. 그후 1989년 1월 1일 법률 제4050호에 의거 시흥시로 승격하면서 시흥시 장하동으로 되었다가, 1995년 4월 20일 대통령령 제14629호에 의거 안산시로 편입되어 안산시 장하동이 되었다. 이 마을은 장상동 아래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장하동이라 칭하는데, 1914년 일제에 의해 장하리(章下里)로 개칭되었다가 1995년 7월 26일 광복 50주년에 즈음하여 민족정기 회복 차원에서 안산시의회 의결을 거쳐 다시 장하동(獐下洞)으로 한문자를 고쳤다. -`김기환(金基煥;1932. 8. 16), 장상동 215.
사진 3-26 쌍록원 터. 오래 전 길손에서 숙식을 제공하던 곳이다. “쌍록원雙鹿院”이 있었다고 합니다. 관청은 아닌 것 같은데 정확히 무엇인지는 설명을 보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장하리에 있다. 고려시대에 송도로 가는 길이 그곳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은 그 터도 알 수 없다.” 장하리를 지도에서 찾아보면 지금은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옛날부터 아주 중요한 길목이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원래 길은 이렇게 사람이 잘 다니는 곳, 사람은 다니기 쉬운 곳이 길이 되었습니다. ㆍ벌말 본래 마을과 개다리 사이에 취락이 있었는데, 서해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아 넓은 벌판이 되자 조선 말엽에 이르러 이곳 벌말[坪村]에 곤양 배씨(昆陽裵氏), 풍양 조씨(ㆍ壤趙氏), 순흥 안씨(順興安氏) 등이 차례로 정착하면서 취락이 이루어졌다. -`배차준(裴且俊;1920. 9. 23), 장하리 57. ㆍ원뒤 고려 시대 남양·서신 지방에서 개성·인천·서울을 가려면 반드시 이 마을을 거쳐야 할 만큼 이곳은 교통의 요충지여서 행려자(行旅者)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는데, 이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원(院)이 지금의 조양목장 밑(동쪽)에 있었다. 「동국여지승람」 안산군 역원(驛院)조에 보면 “雙鹿院 在郡南五里”라 하여 이 원명이 쌍록원임을 알 수가 있는데, 쌍록원이 언제까지 이곳에 있었는지에 대하여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쌍록원이 생긴 후 안산군수를 지낸 이동직(李東直;신평 이씨)이란 사람이 처음으로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아 마을이 이룩되었는데, 이동직은 재직시에 선정을 베풀어 당시 이곳 주민들이 세운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마을 어귀에 남아 있다. ‘원뒤[院後]’란 마을 명칭은 쌍록원 뒤(院後)에 자리잡은 마을이란 뜻이다. 이곳에는 민정당 최고위원을 역임했던 백남훈(白南勳;1885~ 1967년)의 묘가 있었다. 이 마을에서는 마을 뒤에 있는 우물에서 해마다 음력 7월 1일에 우물제(井祭)를 지내오고 있다. -`김좌현(金佐鉉;1918. 12. 30), 장하리 224. ㆍ긴배미 채나뭇골 아래에 있는데 논이 길어 ‘긴배미[長畓]’라 부르고 있다. 수답으로 토질이 좋은 곳이다. -`배명호(裴明虎;1946. 1. 5), 장하리 59. ㆍ군웅나무터 장하동(원뒤) 마을회관 자리에 3백 년 된 큰 소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이곳에서 마을 주민들이 군웅제를 지냈다. 1950년대에 자연사하였다. -`김좌현(金佐絃;1918. 12. 30), 장하리 224. ㆍ꽃두래봉 원뒤 서쪽, 당재봉 남쪽에 있으며 원뒤와 양상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이다. 일명 ‘꽃봉’이라 부르기도 한다. -`김좌현(金佐絃;1918. 12. 30), 장하리 224. ㆍ당재봉 원뒤 뒤(북쪽)에 있는 산으로, 조선 시대에 원뒤 주민들이 산 중턱에 사당을 짓고 마을의 안정을 위해 당제를 지냈다. ‘당채봉’이라 부르기도 한다. -`김좌현(金佐絃;1918. 12. 30), 장하리 224. ㆍ뒷골 원뒤 동북쪽으로 마을 뒤에 있는 골짜기이므로 ‘뒷골’이라 부른다. -`김좌현(金佐絃;1918. 12. 30), 장하리 224. ㆍ목다리 벌말 남쪽으로 송장산 앞(동쪽)에 있는 다리이다. 본래 나무다리[木橋]인데 일제 말엽에 새로 가설했다. 현재의 다리는 1953년에 준공되었으며 길이 8m, 교폭 6m이다. -`김좌현(金佐絃;1918. 12. 30), 장하리 224. ㆍ병풍바위 ① 벌말 입구 다리에서 북쪽 개울을 따라 약 70m 지점에 있는 바위이다. -`안상순(安相順;1919. 1. 13), 장하리 57. ㆍ병풍바위 ② 당재봉과 꽃두래봉 사이에 있는 큰 바위로 가운데에 구멍(1자 가량)이 있는데, 장수가 소변을 볼 때 생긴 것이라고 한다. -`김좌현(金佐絃;1918. 12. 30), 장하리 224. ㆍ비성거리 목다리와 벌말 초입 사이에 비석이 있어 ‘비성거리[碑石巨里]’라 부르는데, 이들 비석은 1960년대 초에 4-H구락부 표시 및 마을 이정표로 사용했다. -`장종훈(張鍾勳;1945. 11. 14), 장하리 229. ㆍ사직단터 벌말 뒷산 정상에 있으며, 조선 시대 안산군에서 지신(地神)과 곡신(穀神)에게 제사를 지내고 또 한발이 있으면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 현재 벌말 주민들은 벌말 마을회관에서 서쪽으로 약 150m 지점인 장하리 63번지에 있는 우물물을 떠다가 이곳 사직단터[社稷壇址]에서 매년 음력 7월 1일에 우물제[井祭]를 지내고 있다. -`안상순(安相順;1919. 1. 13), 장하리 57. ㆍ사탯말우물 원뒤와 탑골 사이에 있는 우물로 마을의 식수원이었다. 당제에 정한수로 쓰일 만큼 마을에서 신성시하는 우물이다. -`김좌현(金佐絃;1918. 12. 30), 장하리 224. ㆍ삼형제바위 똑같은 모양의 바위가 셋이 있다. 품골 뒷산 정상에 있다. -`양기수(梁琪洙;1946. 11. 24), 장하리 61. ㆍ새밭머리들 원뒤 장바다들 개울(안산천) 건너에 있는 들로 약 6천여 평에 이른다. -`장종훈(張鍾勳;1945. 11. 14), 장하리 229. ㆍ서낭당 원뒤 탑골 밑(남쪽)에 서낭이 있었다 하여 ‘서낭당’이라 부르고 있는데, 현재는 논이다. 일명 ‘돌무더기’라 칭하기도 한다. -`장종훈(張鍾勳;1945. 11. 14), 장하리 229. ㆍ선녀개울 원뒤 뒤(북쪽)에 있는 개울로 물이 맑고 깨끗하다. -`김좌현(金佐絃;1918. 12. 30), 장하리 224. ㆍ송장산 목다리 옆(서쪽)에 있으며, 송장이 누운 형상을 하고 있는 산이다. 뱀이 많아 일명 ‘뱀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양기수(梁琪洙;1946. 11. 24), 장하리 61. ㆍ아랫고개 벌말 서편으로 이 고개를 넘으면 원뒤에 이른다. 비포장 소로이다. -`배차준(裵且俊;1920. 9. 23), 장하리 57. ㆍ앞고래실논 원뒤 앞(남쪽)으로 장바다들 내에 있는 논·수답(水畓)으로 비옥하다. -`김좌현(金佐絃;1918. 12. 30), 장하리 224. ㆍ양찰배미 원뒤 가게 밑(동쪽)에 있는 약 5백 평 정도의 논으로, 본래 위토여서 제사에 쓰기 위해 양찰벼만 심었다고 한다. -`김좌현(金佐絃;1918. 12. 30), 장하리 224. ㆍ옥배들 원뒤[院後] 개울(안산천) 건너에 있는 들이다. 장하동과 양상동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대부분의 지역이 논인데, 이곳 둑에 소나무와 큰 구덩이가 있어 주민들이 접근하기를 꺼려했다. -`장종훈(張鍾勳;1945. 11. 14), 장하리 229. ㆍ원앞논 쌍록원과 송장산 사이에 있는 논으로, 원(院) 앞에 있어 ‘원앞논’이라 했다. -`장종훈(張鍾勳;1945. 11. 14), 장하리 229. ㆍ용당골 벌말과 조남리 방화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조선 중엽에 용씨(龍氏)가 큰 부자로 살았던 곳이다. 용당골[龍堂谷]은 외딴 산골이므로 도둑과 강도 등에 시달리다가 다른 곳으로 이사했다고 한다. -`배차준(裵且俊;1920. 9. 23), 장하리 57.
ㆍ장바다들 벌말 목다리에서 남쪽으로 월피동 초입에 이르는 들이다. 조선 시대에는 서해 바닷물이 들어왔으나 조선 말엽의 간척지공사로 인해 이곳 일대가 농경지로 변모되었다. 바다같이 긴 들판이다. -`양기수(梁琪洙;1946. 11. 24), 장하리 61. ㆍ채나뭇골 백남훈(白南薰) 묘터와 조양목장 사이에 있는 골짜기이다. 대부분의 지역이 다랑치논으로 5마지기 가량 된다. -`배명호(裴明虎;1946. 1. 5), 장하리 59. ㆍ탑골 원뒤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안양 한국병원 농장이 있는 곳이다. 이곳은 안산 김씨의 사패지로 조선 시대 중엽에 김진사라는 사람이 충청도에서 이곳으로 이사해 살았다. 그런데 구걸하러 오는 사람이 들끓어 스님에게 이를 하소연했다. 스님은 골짜기 뒤의 산이 가재혈이라 이 혈을 끊으면 된다고 일러 주었다. 그후 가재혈의 발 되는 곳을 끊으니 과연 구걸하러 오는 사람이 끊어졌다. 그러나 그 일 이후 김씨네는 망해 이 탑골[塔谷]을 떠났다고 한다. 골짜기 안에 있던 안산 김씨 선대 묘 앞의 탑은 일제 때 없어졌다. -`김좌현(金佐絃;1918. 12. 30), 장하리 224. ㆍ탑골고개 원뒤 탑골 안에 있는 고개로 조선 시대 원뒤 사람들이 안산 서촌(西村;현 시흥시 군자동)을 가자면 반드시 거쳤야 했던 고개이다. 비포장 소로로 마루턱에 서낭이 있다. -`김좌현(金佐絃;1918. 12. 30), 장하리 224. ㆍ품골 벌말 용당골과 웃버대로 넘어가는 고개(보대고개)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조선 시대 품씨가 살았다고 하여 품골[品谷]이라 한다. -`배차준(裵且俊;1920. 11. 24), 장하리 57. ㆍ향교산 당채봉 북쪽에 있는 산을 말한다. 조선 시대 안산향교(安山鄕校)에서 관리했던 산이라 하여 향교산(鄕校山)이라 하였다. ㆍ흔들바위 매봉 정상의 바위로 큰 바위 위에 또 바위가 있어 ‘흔들바위’라 칭한다. -`장석규(張錫奎;1933. 10. 31), 하중리 660. (24) 화정동 조선 시대에는 안산군 잉화면 화정리(安山郡 仍火面 花井里)와 광곡리(廣谷里)였다가, 1914년 부령 제111호에 따라 시흥군 수암면 화정리(始興郡 秀岩面 花井里)로 되었다. 그후 1989년 1월 1일 법률 제4050호에 의거 시흥시로 승격하면서 시흥시 화정동으로 되었다가, 1995년 4월 20일 대통령령 제14629호에 의거 안산시로 편입되어 안산시 화정동이 되었다. 이 마을은 풍수로 보아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인데, 마을 앞(폐교된 구 화정초등학교 앞)에 있는 큰 우물에서 아주 오랜 옛날에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 하여 이 우물을 ‘꽃우물[花井]’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마을 이름도 우물 이름을 따서 화정동(花井洞)이라 불렀다. 화정동에는 가래울·고주물·너빌 등의 자연취락이 있다. -`김종한(金鍾漢;1930. 8. 16), 화정리. ㆍ가래울 고주물과 능곡과 능골 사이에 위치해 있는 마을이다. 이곳은 고주물과 능곡을 왕래하는 분기점으로, 마을 뒤에 가래나무가 많아 ‘가래울[楸谷]’이라 하였다. 이 마을은 남쪽지역을 웃말, 동북쪽지역을 외딴말, 외딴말 서쪽지역을 양지말, 외딴말 북쪽지역을 아랫말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용희(李容熙;1932. 12. 7), 화정리 655.
ㆍ고주물 밀양 박씨가 처음으로 터를 잡은 마을이다. 구 화정초등학교 앞에 있는 우물이 풍수로 보아 매화꽃이 떨어지는 형국(梅花落地形)이고, 아주 오랜 옛날 이곳에서 매화꽃이 피었다 하여 ‘꽃우물’이라 했다. 그후 마을 이름도 우물 이름을 따 ‘꽃우물(→고주물)’로 하였다. 고주물[元花井]에서는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마을 중앙에 있는 도당나무 앞에서 해마다 음력 12월 30일 경에 당제(堂祭)를 지냈다. -`박흥룡(朴興龍;1929. 9. 11), 화정리 592.
고주물과 시흥시 산현동 골월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골월에서는 ‘고주물고개’라 부르고 있으며 농로로서 포장되었다. -`박흥룡(朴興龍;1929. 9. 11), 화정리 592. ㆍ기렁재골 골월고개 마루턱과 마하산 사이에 있으며, 골짜기가 길어 ‘기렁재골’이라 부르고 있다. -`김형좌(金炯佐;1931. 4. 7), 화정리 73. ㆍ김성골 마하산과 고송정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조선 초기에 김문기의 손자 김충주(金忠柱)가 이곳에서 숯을 구우며 살았다 하여, 그의 성(姓)을 따서 ‘김성골[金姓谷]’이라 부른다. -`김용권(金用權;1908. 8. 25), 화정리 54. ㆍ나비골 안양시 공원묘지 및 와동 공동묘지 일대를 말하는데, 산세가 나비가 날개를 펴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나비골’이라 부른다. -`김만석(金萬石;1939. 10. 15), 화정리 513. ㆍ대장골 고주물 서쪽의 큰 골짜기로 고주물 최초의 주거지이다. 지금 민가는 없고 모두 농경지이다. -`박흥룡(朴興龍;1929. 9. 11), 화정리 592. ㆍ돌고개 고주물과 가래울 사이에 있다. 이곳에는 암석지(岩石地)에서 잘 자라는 개암나무(山白果·山反栗·가염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다. -`박흥룡(朴興龍;1929. 9. 11), 화정리 592. ㆍ뒷밭 가래울 아랫말 뒤에 있는 밭을 말한다. 이 밭은 토질이 매우 좋으며 2천여 평이나 된다. -`김재수(金在洙;1937. 11. 27), 화정리 655. ㆍ망월암 고송정 뒤 마하산 산록에 있다. 세조 2년(1456년) 김문기(金文起)와 그의 아들 김현석(金玄錫)이 단종 복위에 연루되어 죽자, 김문기의 손자인 김충주(金忠柱)가 이곳에서 숯을 구우며 일생을 보냈는데, 그는 영월에 있는 단종을 잊지 못해 이곳 바위에 그 마음을 손수 암각해 놓았다. 이 바위를 가리켜 ‘망월암(望越巖)’이라 부른다. -`김용권(金用權;1908. 8. 25), 화정리 54. ㆍ모청고개 조선 시대에 고주물 주민들이 너빌 주민들에게 연락할 사항이 있으면 이곳에서 목청이 터지도록 크게 소리를 질렀다 하여 ‘모청고개’라 한다. 본래의 이름은 ‘목청고개’로서 고주물과 너빌을 왕래하는 고개이다. -`박흥룡(朴興龍;1929. 9. 11), 화정리 592. ㆍ방아다리 고주물과 너빌을 오가는 삼거리의 다리로, 근래에 현대식으로 축조되었다. -`박흥룡(朴興龍;1929. 9. 11), 화정리 592. ㆍ봉바위 너빌 범바위산에 있으며, 부엉이의 서식처라 하여 ‘봉바위’라 부른다. -`김용권(金用權;1908. 8. 25), 화정리 54. ㆍ봉바위산 너빌 아랫말 앞(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이 산에 있는 봉바위 이름을 따서 ‘봉바위산’이라 부르고 있다. -`김용권(金用權;1908. 8. 25), 화정리 54. ㆍ서모고개 고주물 뒤쪽으로 고주물과 능곡리 능골 사이에 있는 고개를 가리킨다. 이 고개는 높이가 낮아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 주지 못해, 다른 마을에 전염병 등이 발생하면 막힘없이 곧바로 이 마을에 전염되어 이곳 주민이 몰살하므로 ‘수몰고개’라 했는데,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변음되어 ‘서모고개’가 되었다. -`박흥룡(朴興龍;1929. 9. 11), 화정리 592. ㆍ성지골 너빌 북쪽에 있으며, 임진왜란 때(1592년) 너빌에 사는 주민들(대부분이 금녕 김씨)이 이곳으로 피난해서 김씨의 혈통을 지탱했다 하여 성지골[性支谷]이라 부르고 있다. -`김용권(金用權;1908. 8. 25), 화정리 54. ㆍ속자리논 능골과 가래울 사이에 있는 논을 가리킨다. 가래울에서는 최상의 논으로 치는데 수답(水畓)이다. -`김재수(金在洙;1937. 11. 27), 화정리 655. ㆍ송우골 고주물과 쑥께 사이에 노송(老松) 한 그루가 있었는데, 흡사 소[牛]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므로 ‘송우골[松牛谷]’이라 했다 한다. -`박흥룡(朴興龍;1929. 9. 11), 화정리 592. ㆍ쑥께 고주물 초입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곳에 쑥이 많았다 하여 ‘쑥께’라 부르고 있다. -`박흥룡(朴興龍;1929. 9. 11), 화정리 592. ㆍ안산 고주물 앞(남쪽)에 있는 산이다. 산중에 밀양 박씨 선대의 묘가 있는데, 이곳에서 앞을 바라보면 마을(고주물)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하여 ‘안산(顔山)’이라 한다. -`박흥룡(朴興龍;1929. 9. 11), 화정리 592. ㆍ오리나뭇골 가래울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이곳이 습지이기 때문에 오리나무가 많이 자생하며 ‘오리나뭇골’이라 부른다. -`이용희(李容熙;1932. 12. 7), 화정리 655. ㆍ장밭들 가래울 북쪽에 있는 밭으로 넓고 크므로 ‘장밭들’이라 부른다. -`이용희(李容熙;1932. 12. 7), 화정리 655. ㆍ지봉재산 구 화정초등학교 뒤에 있으며, 조선 시대에 고주물 주민들이 산정에서 봉화를 올린 산이다. -`박흥룡(朴興龍;1929. 9. 11), 화정리 592. ㆍ쪽지밭 가래울 아랫말 서남쪽에 있으며, 7백 평 정도로 토질이 좋은 밭이다. -`김재수(金在洙;1937. 11. 27), 화정리 655. ㆍ큰우물 가래울 웃말에 있는 약 2백 년 된 우물인데 샘이 잘 나오고 물맛이 좋다. 마을의 대동우물이었으나 1985년 간이상수도 설치로 현재는 우물 근처 민가에서만이 식수로 사용하고 있다. -`김재수(金在洙;1937. 11. 27), 화정리 655. ㆍ통배미 가래울 중앙에 있는 논을 가리키는 말이다. 마을 뒤에 있는 산이 풍수로 보아 소의 혈이고 이곳 논은 소의 밥통에 해당되므로 흔히 ‘통배미’라고 부른다. -`김재수(金在洙;1937. 11. 27), 화정리 655. ㆍ화정팔교 고주물 초입으로 양상동과 선부동을 관통하는 외곽도로상에 있다. 화정팔교(花井八橋)는 총 연장 33m, 교폭 20m로 1986년 1월 31일에 시공하여 1986년 12월 26일에 준공되었다. 이 다리에서 북쪽으로 20m 지점인 구도로상에 화정교가 있다. 이현우(안산문화원 사무국장) 참고:이승언(李承彦), 「시흥군지(始興郡誌;1988)」 ----------------------------------------------------------------------------------------- 안산향교터. 건물은 흔적도 없고 초석과 와편만이 남아 있다. 안산시 수암동 351, 352, 356 사직단터. 장하동 벌말 뒷산에 있으나 잡초와 잡목이 우거져있고 와편만이 간혹 보인다. 원당사지. 수암동 산 13번지 일대에 있으며, 초석 몇 개와 석불 좌상 2구만이 남아 있다. 산대장터. 산대 시장에서는 주로 토산물을 교역 하였으며, 흔히 장날이면 씨름판이 열리곤 하였다. 삼거리 시장터. 한때 번창했으나 군자시장이 생기고 한국전쟁 이후 쇠퇴하여 폐시되였다. 월입피 주막터. 고정뿌리 동북쪽 길가에 있었으나 신도시 개발과 더불어 자취를 감추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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