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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김 뿌리찾기/뿌리찾기

고려사(현종-문종) 안산김씨 관련

by 연송 김환수 2008. 8. 3.

⊙ 고려 현종(顯宗) 992~1031

 

 

고려 제8대 왕(재위 1010~1031), 휘(諱)는 詢, 자는 안세(安世), 시호는 원문(元文), 태조의 여덟째 아들인 안종(安宗) 욱(郁)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경종의 둘째 비(妃)인 헌정왕후(獻貞王后)(孝肅太后)이다.

 

 비는 성종의 두 딸 원정왕후(元貞王后)와 원화왕후(元和王后), 시중(侍中) 안산김씨 김은부(金殷傅)의 딸 원성왕후(元成王后), 대종의 손녀 원용왕후(元容王后)이다.

 

1009년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강조(康兆)의 옹립으로 왕위에 올랐다 이 해에 강조가 목종을 살해한데 대하여 문책한다는 구실로 거란의 성종(聖宗)이 쳐들어오자 참패하고 친조(親朝)할 것을 조건으로 화의가 성립되어 거란군은 물러갔으나 끝내 친조를 하지 않았다고 또 6성을 요구해 온 것도 거절하였다.

 

1018년(현종9)거란의 장군 소배압(蕭排押)이 6성을 빼앗고자 침입 했으나 강감찬의 활약으로 물리쳤다 다음해 부터 거란과 국교를 열어 평화정책으로 일관하여 우호관계를 회복하고 모든사치와 호화로운 의식. 제도를 폐지하고 승려의 횡포를 엄금하는 한편 기민(飢民)의 구제에 만전을 가하였다    능은 개성의 선릉(宣陵)이다.

 

 

북한 개성 교외 만수산 기슭 언덕에 있는 고려 8대 임금 현종의 선릉. 병풍석이 묻힌 채 민묘처럼 퇴락한 무덤을 훼손된 석물들이 쓸쓸히 지키고 서 있다. 무덤 바로 앞에 옥수수밭이 펼쳐져 있다. 장경희 교수 제공

 

 

⊙ 고려 덕종(德宗) 1016~1034

 


고려의 제9대 왕(재위 1031~1034), 자는 원량(元良), 이름은 흠(欽), 시호는 경강(敬康), 현종(顯宗)의 장자(長子), 모후(母后)는 원성태후(元成太后) 안산김씨 1022년(현종13) 태자로 책봉 즉위한뒤에 거란(渠丹)에 억류된 고려인 송환을 요구했으나 거란의 반대로 하정사(賀正使)를 중지 하였으므로

 

삭주(朔州). 영인진(寧仁鎭). 파천(派川)과 동북(東北)의 여진(女眞)이 대립하고 있어 이 양 적을 방어 하기 위하여 평장사(平章事) 류소(柳韶)에게 명해서 압록강 어구로 부터 영원(永遠)등14성을 거쳐 동해안의 도련포(都連浦)에 이르는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축성하게 하자


동여진인(東女眞人)과 거란인들의 투항이 속출하였다 천리장성은 규모가 매우 웅대하여 길이 천리와 높이와폭이 각각 25측의 석축(石築)이었다.

 

 전략무기를 창안하여 새로운 병기를 만들었고 덕종 즉위년에 국자감시(國子監試)를 비로소 시행하여 부(賦)와 시(詩)로써 인재를 등용했다 현종때 시작한 국사 편찬사업을 완성하였으며 능은 개성의 숙릉(肅陵)이다

 

⊙ 고려 정종(靖宗) 1018~1046

 


고려 제10대 왕(재위 1035~1046), 휘(諱)는 형(亨), 자는 신조(申照), 시호는 용혜(容惠), 현종(顯宗)의 둘째아들이며 덕종(德宗)의 동생, 어머니는 원성왕후(元成王后) 안산김씨 비(妃)는 용신왕후(容信王后) 한씨(韓氏), 용의왕후(容懿王后) 한씨 용목왕후(容穆王后) 이씨 1027년(현종18)개부의동삼사 . 검교태사 겸 내사령이 되었다.

 

34년(덕종3)즉위하여 명주성(溟州城)을 수축 다음해에는 북계(北界) 송령(松嶺) 동쪽장성을 수축 하였으며 또 창주(昌州 :平北昌成)에도 성을 쌓았다.

 

36년(정종2) 각 도(道)의 양전(量田)을 다시 실시하고 여러 위(衛)의 군인중 경전(耕田)이 부족한 자에게는 공전(公田)을 더주었다.


이후 북방 민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1044년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완성시켰다 또 같은해 예성강(禮成江)의 병선(兵船)180척으로 군수물자(軍需物資)를 운반하여 서북계 주진(州鎭)의 창고에 보관케 하는등 국방정책에 힘을 기울렸다.

 

이듬해 비서성(秘書省)으로 하여금 예기정의(禮記正義) 모시정의(毛詩正義)등을 간행하게 하였고 46년 장자상속법(長子相續法)과 적서(嫡庶)의

구별을 법으로 정하였다

 

⊙ 고려 문종(文宗) 1019~1083

 


고려 제11대 왕(재위 1046~1083), 초명(初名)은 서(緖), 후에 휘(徽)로 개명, 자는 촉유(燭幽), 현종(顯宗)의 세째아들로 어머니는 원혜태후(元惠太后) 안산김씨 처음에 낙랑군(樂浪君)에 책봉되었으며 정종(靖宗) 때에 내사령(內史令)에 임명되었다.

 

 나중에는 정종의 뒤를 이어 고려의 제11대왕으로 즉위 하였으며 고려시대 중에서도 가장 찬란한 문화 황금기(文化黃金期)를 이룩하였다. 한편 문종은 왕자 후(煦)를 출가(出家)시켜 승려가 되게 하였으니 그가 곧 대각국사 의천(義天)이다.

 

 문종은 불교뿐만 아니라 유학(儒學)도 함께 장려하여 최충의 구재(九齋)를 비롯한12도(徒)의 사학(私學)을진흥 시켰다


문종은 특히 중국 송(宋)나라와 친선을 도모하여 선진문화(先進文化)의 수입에 힘썼다 이와같은 여러가지 현명한 정책이 차차 큰효과를 나타내어 문종의 치세(治世)에는 고려의 문화도 찬란한 빛을 발휘하게 되었다.

 

문종은 인재 등용에도 높은 안목을 가지고 있어서 적재를 적소에 배치했기 때문에 제도의 개혁 빈민의 구휼(救恤)등에도 큰 치적을 올렸다 학문을 좋아 하고 서도(書道)에도 뛰어났으며 능은 경능(景陵)이다

 

 

판문군 선적리에 있는 11대 문종(재위 1046~1083)의 경릉. 12도의 사학을 진흥시켰고 송나라와 국교를 열었던 왕이다. 능역이던 무덤 앞은 논밭으로 변했다.

 

원성태후(元成太后)

 

시대 고려

생몰년 ?-1028(현종19)

본관 안산김(安山金)

시호 광선(廣宣)

활동분야 왕비


원성태후(元成太后)에 대하여   원성태후(元成太后)

?∼1028(현종 19). 고려 제8대왕인 현종의 제3비.

 

안산김씨(安山金氏)로 시중을 지낸 은부(殷傅)의 딸이며, 어머니는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추증된 이허겸(李許謙)의 딸이다.

 

1010년(현종 1)에 거란병이 내침하자 왕은 나주로 피난하였다가 적병이 물러가자 왕궁으로 귀환하던 중 공주에 묵게 되었다.

 

이때 절도사인 은부는 왕을 영접하고, 그 딸로 하여금 어의를 지어드리게 하고, 편안히 모시게 하였다.

 

왕은 이를 맞아들여 연경원주(延慶院主)로 삼았다. 정종을 낳은 뒤 궁주(宮主)가 되고 얼마 뒤에 왕비로 봉하여졌다.

 

한편, 왕비의 두 자매도 함께 맞아들여 비로 삼았다. 세 자매가 함께 한 왕의 왕비가 된 예는 이것이 처음이며, 광종 때 왕실족내혼이 이루어진 이래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양상이다.

 

현종과의 사이에 덕종·정종의 두 아들과 인평왕후(仁平王后)와 경숙공주(景肅公主)를 두었다.

 

시호는 원성왕후이고 명릉(明陵)에 장사하였으며 현종 묘실에 합장하였다. 덕종 즉위 후에 왕태후로 추존하였고,

 

뒤에 용의(容懿)·공혜(恭惠), 1056년(문종 10)에 영목(英穆), 뒤에 양덕(良德)·신절(信節)·순성(順聖), 1140년(인종 18)에 자성(慈聖), 1253년(고종 40)에 광선(廣宣)의 시호가 거듭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 閥族에 관한 硏究(黃雲龍, 親學社, 1978). 〈鄭容淑〉


원혜태후(元惠太后)

 

시대 고려

생몰년 미상

본관 안산김(安山金)

활동분야

왕비 고려 현종의 제4비.

 

안산김씨(安山金氏)로 아버지는 시중이었던 은부(殷傅)이며, 어머니는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추증된 이허겸(李許謙)의 딸이다.

 

원성태후(元成太后)와 원평왕후(元平王后)와는 자매간이다.

 

1010년(현종 1) 거란의 침입으로 나주로 피난하였던 현종이 왕궁으로 귀환도중 공주에 들렀을 때 납비되었다.

 

이것은 그동안 왕실내에서만 이루어지던 혼인이 귀족가문으로 확대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현종과의 사이에 문종·평양공 기(平壤公基)·효사왕후(孝思王后)를 낳았다. 문종은 고려 제11대왕이 되고, 그뒤 고려왕통은 문종의 후손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그리고 평양공 기의 후손은 대대로 왕실 공주와 계속적인 혼인관계를 맺는 집안으로 고정되었다.

 

처음에 안복궁주(安福宮主)라 칭하였다가 연덕(延德)으로 개칭하였고 사후에 원혜의 시호가 추증되었다. 능호는 회릉(懷陵)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閥族에 관한 硏究(黃雲龍, 親學社, 1978). 〈鄭容淑〉


1025년에 왕비로 추봉되고 1027년에 평경(平敬)의 시호를 내렸으며 문종이 즉위한 뒤에 태후로 추존되었다.


원평왕후 김씨(元平王后 金氏)

 

생몰년 미상. 고려 현종의 제7비.

안산김씨(安山金氏)로 아버지는 시중을 지낸 은부(殷傅)이며, 어머니는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추증된 이허겸(李許謙)의 딸이다.

현종의 제3비 원성태후(元成太后)와 제4비 원혜태후(元惠太后)와는 자매간이다.

 

거란의 침입으로 나주까지 피난하였던 현종이 왕궁으로 귀환하던 도중 공주지방에 들렀을 때 납비(納妣)된 언니들을 따라 왕비가 되었다. 현종과의 사이에 효경공주(孝敬公主)를낳았다. 1028년(현종 19)에 원평왕후로 추증되었으며, 능호는 의릉(宜陵)이다.


인평왕후

생몰년 미상. 고려 제11대 문종의 제1비. 고려 제8대왕인 현종의 딸로 어머니는 현종비인 원성태후(元成太后) 김씨(金氏)이다. 문종의 모후인 원혜태후(元惠太后)와는 자매간이다. 어머니의 성을 따라 김씨로 하였다.

 

이 혼인은 친계로는 남매간 혼인이며, 모계로는 이종4촌간이 된다. 고려시대에 이와같은 근친혼은 태조가 어머니를 달리하는 그의 자녀를 혼인시키면서 비롯되었으며 이후 왕실혼의 한 특징이 되었다.

 

그러나 이복남매간의 극단적 근친혼은 광종·덕종·문종의 사례가 있을 뿐 그다지 많지는 않다. 왕자들 가운데에서도 이러한 근친혼의 사례가 있으며, 그런 경우 왕실 내부의 반대를 받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문종과 인평왕후와의 혼인은 모계 4촌이라는 면에서 종래의 혼인보다도 특이한 경우이다.

 

이는 현종이 김은부(金殷傅)의 세 자매를 모두 왕비로 맞고 거기에서 낳은 자녀를 서로 결혼시킨 결과 나타난 현상이다. 왕실내의 단결을 강화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高麗史

≪참고문헌≫ 高麗初期 婚姻政策의 추이와 王室 族內婚의 성립(鄭容淑,

                     韓國學報 37, 1984)

 

 

 현종 (왕순, 22년)

 
천추태후의 자객에도 여러차례 살아남은 현종은 강조의 옹립으로 18세에 등극하는데,
거란의 침입으로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강감찬-귀주대첩).
현종의 할머니는 신성왕후 김씨로 경순왕의 큰아버지인 김억렴의 딸로 경순왕 사촌누이이다.
현종의 어머니는 헌정왕후로 성종과 천추태후의 동생이다.
경종의 왕후였으나 경종이 사망한 뒤 사가에 나가 홀로 지내다가 삼촌인 안종을 만나 정을 통해 임신하게 된다.
이 일로 성종은 안종을 유배보냈고, 헌정왕후는 현종을 출산하고 산고로 사망하였다.
 

(1) 원정왕후 : 성종의 딸로 문화왕후 성을 따라 김씨로 하였다. 1010년 거란이 침입하자 임신한 몸이라
                 외가가 있는 선산으로 피했고 왕은 나주로 피난했다.
(2) 원화왕후 : 성종의 딸로 낙랑군대부인 성을 따라 최씨로 하였다. 거란 침입시 나주로 피난하였다.
(3) 원성태후 : 안산 김씨로 시중을 지낸 김은부의 딸이다. 현종이 나주로 피난하였다가 귀환하던 중
                공주에 묵게 되고 원성태후가 어의를 지어 드리고 편안히 모시었다. 김은부의 세자매가
                (원혜태후, 원평왕후) 모두 왕비가 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며 광종 때 왕실족내혼이
                이루어진 이래 새로운 양상이다.
(4) 원혜태후 : 김은부의 딸로 이것은 왕실내에서만 이루어지던 혼인이 귀족가문으로 확대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아들 문종은 11대왕이 되고 그 뒤 고려 왕통은 문종의 후손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5) 원용왕후 : 태조의 친손자인 경장태자의 딸로 할머니 선의왕후를 따라 유씨라 하였다.
                경장태자는 현종의 생모인 헌정왕후와는 남매간이다.
(6) 원목왕후 : 993년 거란이 침입하였을 때 이를 담판으로 물리친 서희의 손녀이며 내시령이었던
                서눌의 딸이다. 현종은 태조 이래 가장 많은 13인의 비빈을 두었고 그 중에는
                귀족가문의 타성도 다수 있었다. 광종 이래 새로운 혼인관계로 귀족과의 연결을 통하여
                왕실의 고립을 막고 많은 자녀를 두어 왕족을 번성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7) 원평왕후 : 김은부의 딸
(8) 원순숙비 김씨 : 김인위의 딸로 덕종의 1비가 된 경성왕후를 낳았다

 

 

 

 

숭의전 내부 중앙의 고려태조 위패 및 영정입니다

 

 

아래 숭의전 내부 우측의 고려 현종 위패 입니다

 

 

아래 숭의전 내부 좌측의 원종, 문종 위패 입니다 

 

 

 고려사

 

제8대 현종 (顯宗 1009~1031 재위22년)

  

현종 원문대왕의 휘는 순이며 자는 안세니 안종(추존)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효숙왕후 황보씨이다. 성종 11년 임진 7월 임진에 탄생하여 조금 자람에 대량원군으로 봉했다. 나이 12에 천추태후가 꺼려하고 핍박하여 축발(머리를 깍고 중이 되는 것)케 하니 처음에 숭교사에 우거하였다.

 

 한 중이 꿈을 꾸니 큰 별이 절 뜰에 떨어져서는 변하여 용이 되었다가 또 변하여 사람이 되니 곧 왕이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여러사람이 퍽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목종 9년 삼각산 신혈사에 이우하였던 바 태후가 자주 사람을 보내어 모해하고자 하였으나 절에 노승이 있어 방밑에 구멍을 파 숨겨두고 그 위에 와탑을 두어 불측의 변을 막았다.

 

 하루는 왕이 우연히 계수를 두고 시를 지어 「한가닥 유수가 백운봉으로부터 흘러나니 만리창명으로 갈 길이 통했도다 졸졸 흘러 바위 밑에만 있다고 말하지 말라 얼마 지나지 않아 용궁에 이를 것이다」고 하고 소사를 두고 읊어 「작고 작은 배암이 약란에 감도니 온 몸에 붉은 비단이 저절로 아롱지도다 길이 꽃숲풀 밑에만 있으리라고 말하지 말라 하루 아침에 용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로다」고 하였다.

 

또 꿈에 닭 소리와 다듬이 소리를 들고 술사에게 물으니 방언으로써 해석하여 말하기를 「닭 소리는 고귀위(고귀위)하고 다듬이 소리는 어근당(어근당)이니 이것은 즉위할 징조라」고 하였다. 12년 2월 기축에 봉앙되어 연총전에서 즉위하였다. 경인에 강조로 중대사를 삼고 이현운으로 중대부사를 삼고 채충순으로 직중대를 삼고 윤여로 상서우승겸 직중대를 삼았다. 이 달에 사농경 왕일경을 거란에 보내어 애를 고하고 사위하였음을 알렸다. 교방을 파하고 궁녀 백여명을 놓아 주었으며 낭원정을 헐고 진기한 새와 짐승이며 거북 고기 유를 산과 못에 풀어 놓아 주었다.

 

 3월에 유윤부로 문하시중을 삼고 유방헌으로 문하시랑 평장사를 삼고 강조로 이부상서참지정사를 삼고 진적로 형부상서참지정사를 삼고 유진과 왕동영으로 상서 좌우복사를 삼고 최항과 김심언으로 좌우산기상시를 삼고 채충순으로 이부시랑 좌간의대부를 삼고 김려로 병부상서를 삼고 문인위로 공부상서를 삼았다. 이 달에 개경의 나성(외성)을 쌓기를 논의하였다. 4월 병술 삭에 차공부시랑 이유항을 거란에 보내어 태후의 생신을 축하하였다. 갑오에 고비(부모)의 시호를 추상하였다.

 

무술에 사하고 늙고 병든 이를 양호하며 조조를 못바친 자를 놓아주고 요역을 가볍게 하며 공신을 상주고 현사를 표창하며 훈구를 녹용하고 여악을 제거하며 군량을 마련하고 군망과 신기에게 훈호를 가하며 문무의 관작을 더하였다. 5월 무진에 영화관을 고쳐서 회동관이라고 하였다. 을해에 연흥궁주의 딸 김씨를 맞아들여 비로 삼았다. 무인에 도죄 이하를 사하고 문무의 관계를 1급씩 올리고 만기된 자는 질을 더하며 경군에게는 포를 사하되 차등있게 하고 남도의 민호로서 동북변진을 메꾸었던 자는 전리로 돌려보냈다. 이 달에 안창영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6월에 동북계에 황해가 있었다.

 

 7월 계유에 교하되 「문관으로 상참 이상은 각기 봉사를 올려서 시정의 득실을 극언하라」고 하였다. 신사에 구정에 나아가 민인 남녀 년 80이상과 독질자 635인을 모으고 주식 포백 다약을 차등 있게 사하였다. 한림학사 최항을 사부로 삼았다. 8월 갑오에 문하시랑 평장사 유방헌이 졸하였다. 10월 임오에 위수여로 문하시랑 평장사를 삼고 진적로 내사시랑 평장사를 삼았다. 12월 병신에 교하기를 「짐이 욕되게 조업을 물려 받고 삼가히 비기를 이어 현토 봉강을 거느리게 되고 황천의 권명을 받들었도다 백성을 사랑하여 기르메 감히 편한 겨를을 가지지 못하였다.

 

 한가지 덕이라도 신실치 못할까 혹은 이윤이 패하여질까 염려하여 매양 몸소 정사를 청단함에 부지런하고 태평으로 순치하고자 바랐는데 요사이에 바야흐로 가을철에 미쳐 요무가 거두어지지 않고 음양이 교착하여 기후가 어긋나도다. 이에 탕여(수성)의 정성을 더하고 책궁의 계를 간절히 하여 정전을 피하고 상선을 감하며 늦게 먹고 일찍 일어나 마음과 입으로 빌었더니 과연 감통을 입어 문득 청화함을 이루었도다.

 

능히 공경하면 재가 없어지고 화를 돌려서 복이 된다고 이름(위)직 하도다. 진실로 더욱 외경함을 생각하여서 우러러 하늘(고명)에 부응하고 다시 나라에 근휼하여 더욱 정사에 힘을 다하고자 한다. 그러나 만기의 일을 혼자 다스리기는 어려운 것이니 진실로 신하의 공을 힘입어 다같이 건곤의 도에 맞도록 할 것이다. 바야흐로 경구을 인하여 이에 잠언을 이노라.

 

 형축의 직사는 실로 이것이 백성들의 첨앙는 자리인지라 마땅히 궐루 *윤하고 모명을 헌납하며 교화의 근원을 짐작하여 왕업을 도울 것이며 전재의 직과 선사의 권은 초택을 찾아서 어진 이가 버려짐이 없도록 할 것이며 공평함을 힘써서 아부하는 무리를 쫓지 말 것이며 혹은 과를 괘시하고 법을 설하여 옥을 단정하고 형을 심리하매 마땅히 애긍을 다할 것이며 가혹하게 행하지 아니하면 족히 화기를 부를 것이니 침원이 없도록 할 것이다.

 

모든 집사에 이르러서는 정성것 관년 처하고 삼가 직무를 지켜 맑음을 들추어내고 탁함을 제척함으로써 본보기로 하고 공을 등지고 사에 향하는가를 살필지어다. 목수의 관에 미쳐서는 각기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물건을 사랑하는 뜻을 잊지 말 것이며 진변장수에 이르러서는 수려를 훈련정제하고 효웅을 길러 힘써 불처오에 대비하고 무도함을 경계할 것이다. 아아 너희들 중외의 경사는 마땅히 숙야로 게을리하지 말고 종시 변하지 말지어다 희라 하늘의 조람하심이 멀지 않아 이미 경계함을 나렸으며 내 마음이 게으르지 아니하여 이미 감통함을 이루었도다. 다시 석상의 성을 더하여 일신의 경을 힘입을까 하나니 그러므로 함께 다스림을 구하여 장래를 보전하고자 하노라」고 하였다.

 

경무 원년 춘 정월 을축에 상원도장을 폐하였다. 윤 2월 갑오에 연등회를 복구하였다. 하 4월 계축에 친히 대묘에 사하였다. 기미에 서숭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5월 갑신에 상서좌사랑중 하공진과 화주방어랑중 유종을 원도에 유배하였다. 공진이 일찍이 동여진을 치다가 패하매 종이 한을 품었더니 때마침 여진인 95명이 내조하려고 화주관에 이르거늘 종이 이들을 모두 죽여버린 때문에 같이 유배되었다. 여진이 거란에게 호소하니 거란주가 군신에게 말하기를 「고려 강조는 임금을 죽였으니 대역인지라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서 죄를 물을 것이다.」고 하였다. 추 7월 무인 삭에 거란이 급사중 양병과 대장군 나율윤을 보내와 전왕의 연고를 물었다.

 

8월 정미 삭에 내사시랑 평장사 진적과 직중대상서우승 윤여를 거란에 보냈다. 9월 좌사원외랑 김연보를 거란에 보내어 추계문후를 하고 좌사랑중 왕좌섬과 장작승 백일승을 거란 동경에 보내어 수호하였다. 동 10월 병오 삭에 참지정사 강조로 행영도통사를 삼고 검교상서 우복사 상장군 안소광으로 행영도병마사를 삼고 소부감 최현민으로 좌군병마사를 삼고 형부시랑 이방으로 우군병마사를 삼고 예빈경 박충숙으로 중군병마사를 삼고 형부상서 최사위로 통군사를 삼아 군사 30만을 거느리고 통주에 진처 거란에 대비하였다. 계축에 거란이 급사중 고정과 합문인진사 한기를 보내와 군사를 일으켰다고 알렸다.

 

 참지정사 이예균과 우복사 왕동영을 거란에 보내어 화를 청하였다. 11월 병자 삭에 기거랑 강주재를 거란에 보내어 동지를 축하하였다. 거란주가 장군 소웅을 보내와 친정한다는 것을 고하였다. 경인 팔관회를 복구하고 왕이 위봉루에 거동하여 관악하였다. 신묘에 거란주가 스스로 보기 40만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서 흥화진을 포위하였으나 양규 이수화 등이 굳게 지켜 항복하지 않았다. 기해에 강조가 거란과 통주에서 싸워 패전하여 사로잡혔다. 경술에 거란병이 곽주를 함락하였다.

 

 임자에 거란병이 청수강(청천강)에 이르니 안북도호부사 공부시랑 박섬은 성을 버리고 도망치고 주민이 모두 흩어졌다. 계축에 거란병이 서경에 이르러 중흥사탑을 불태웠다. 갑인에 숙주를 함락하였다. 경신에 큰 유성이 곽주에 떨어졌다. 신유에 거란주가 서경을 쳐 빼지 못하매 포위를 풀고 동으로 향하였다. 계해에 서경신사에 선풍이 홀연히 일어나 거란의 군마가 모두 쓸어졌다. 하공진과 유종을 소환하여 그 작을 복구시켰다. 임신 야에 왕과 후비가 거란병을 피하여 남쪽으로 행차하였다. 갑술에 양주에 도착하여 하공진과 호부원외랑 고영기를 보내어 표를 받들고 거란영에 가서 화를 청케 하였다.

 

신해 2년 춘 정월 을해 삭에 거란주가 경성에 들어와 대묘와 궁궐과 민옥를 불태워서 남김이 없었다. 이 날에 왕은 광주에 이르렀다. 정축에 시종한 제신들이 하공진 등이 붙잡혔음을 듣고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여 흩어져 달아나고 오직 시랑 충숙과 장연우 채충순 주저 유종 김응인이 떠나가지 않았다. 무인에 왕이 광주를 출발하여 비노역에 이르렀다. 임오에 장곡역에 이르렀다. 을유에 거란병이 물러갔다.

 

병술에 왕이 인의현을 지나 수다역에 이르렀다. 정해에 노령을 넘어서 나주에 들어갔다. 을미에 왕이 회하하여 복룡역에 이르렀으며 무술에 고부군에 이르고 기해에 금구현에 이르렀다가 경자에 전주에 이르러 7일동안 머물었다. 임인에 양규와 김숙흥이 거란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계묘에 거란주가 압록강을 건너 퇴거하였다. 채충순을 비서감으로 삼고 박섬을 사재경으로 삼고 주저를 예부시랑 중추원직학사로 삼고 한창필을 합문통사사인으로 삼았다. 박섬이 안북으로부터 도망하여 서울에 돌아와 가족을 데리고 그 고향인 무안현으로 가다가 도중에서 차가(임금이 탄 수레)를 만나 따라서 나주에 이르렀다가 이내 사귀하더니 거란병이 물러갔다 함을 듣고는 와서 알견함으로 이에 이러한 임명이 있었는데 그때 여론은 이것을 비방하였다.

 

 2월 정미에 전주를 출발하여 여양현(여산)에 이르고 무신에 공주에 이르러 6일동안 머물으며 김은부의 장녀를 맞이하여 비로 삼았다. 경술에 김계부를 병부시랑으로 삼고 이단을 이부원외랑으로 삼았다. 정사에 청주에 이르렀다. 기미에 연등회를 행궁에 설하니 이 뒤로 의례히 2월 망일(15일)에 행하게 되었다. 경신에 청주를 출발하여 정묘에 서울로 돌아와 수창궁에 들었다.

 

 기사에 형부가 주하기를 유언경은 대대로 국은을 받고도 보답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앞서서 적에 강복하였으니 청컨대 처자를 유배하소서 한데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3월 무자에 탁사정을 어사중승으로 삼았다. 신축에 유진으로 내사시랑 평장사를 삼고 조지린 최사위로 참지정사를 삼았다. 하 4월 정미에 탁사정으로 우간의대부를 삼았다. 오래 가물므로 종묘에 비를 빌고 시사를 옮기고 도살을 금하고 산선을 끊고 원옥을 다스리고 궁핍한 자를 구휼하였다. 기유에 황보유의와 최창으로 모두 시어사를 삼고 유소로 전중시어사를 삼았으며 김종현과 박종검으로 모두 감찰어사를 삼았다.

 

임자에 전몰한 중승 노정에게 예빈경을 증하였다. 병진에 전몰한 대장군 채온겸 신영한과 낭장 원태 별장 최원 습유 승리인 태사승 유인택의 집에 미포를 차등있게 사하였다. 정사에 유사에게 명하여 중외의 전사자의 해골을 거두어 묻고 제사 지내게 하였다. 재상에서 교하기를 「논어에 위태함에도 붙잡아 주지 않고 엎어짐에도 붙들어 주지 않는다면 장차 그러한 재상을 어데다 쓸 것이냐고 하였고 경서에 오직 나무는 먹줄을 따르면 바르게 되고 임근은 간언을 따르면 슬기롭게 된다고 하였으니 군신의 의에 어찌 마음을 다하여 광구하지 않을까 보냐. 짐이 외람되게 왕위를 이른 뒤로부터 어렵고 위태함을 두루 겪고 숙야로 조심하고 부끄러워하여 그 허물을 면할 것을 생각하나니 경등은 힘써 부족함을 보필하고 또 면종함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정 최보성으로 상서좌우승을 삼았다. 신유에 송악에서 기우하니 큰 비가 왔다. 을축에 공부랑중 왕첨을 거란에 보내어 회군함을 사하였다. 이보다 앞서 왕이 거란에 사신을 보내려해서 태사에게 명하여 점(서)쳤더니 건괘의 고을 얻고 아뢰기를 「건은 군이 되고 부가 되나니 건이 건하면 통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구오효사에 비룡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을 이견할 것이다고 하였고 고의 괘된 것이 존자는 위에 있고 비자는 아래에 있는 것이니 이것도 또한 아래 사람이 윗 사람을 섬기는 괘상이니 길하다」고 하였다.

 

 정묘에 영빈 회선 2관을 두어 제국사신을 접대케 하였다. 5월 을해에 동북여진 추장 조을두가 그 족속 70인을 거느리고 와 방물을 올림으로 각기 의복과 은명을 사하였다. 무인에 유방으로 병부상서겸상장군을 삼고 최현민으로 공부상서를 삼았으며 김심언으로 예부상서를 삼고 최충으로 우습유를 삼았다. 정해에 평양의 목멱 교연 도지암 동명왕 등 신에게 훈호를 가증하였다. 정유에 박승으로 전중시어사를 삼았다. 6월 계묘 삭에 강감찬으로 한림학사 승지를 삼았다. 정묘에 이정으로 전중감을 삼고 손몽주로 상서좌승을 삼았다.

 

 추 7월 계유에 최사위로 서북면 행영도통사를 삼고 장연우 채충순으로 모두 중추사를 삼았다. 갑신에 형부가 주하기를 낭중 백행린은 남으로 행차하실 때 서울에 머물러 있어 자칭 어사중승이라 하고 이인례 거정 등으로 더불어 도노들을 소모하여 군사를 삼아 적을 보고는 싸우지 않고 무너졌으니 청컨대 제명하소서.」한데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임진에 교하기를 「거년에 거란이 서경을 포위하였을 때 사문 법언은 의를 보고 용기를 드날려 삶을 잊고 나라에 죽었으니 가히 수좌를 증직하라」고 하였다. 8월 계묘에 형부가 주하기를 「조용겸 유승건 이재 최집 최성의 임탁은 남으로 행차하실 때 행궁을 경동하였사오니 청컨대 제명하고 유배하도록 하소서」한데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갑진에 양진으로 어사중승를 삼았다. 을사에 문인위로 우복사를 삼고 박충숙으로 서경부유수를 삼았다. 경술에 장연우로 판어사태사를 삼았다. 병진에 강조당을 논죄하여 탁사정 박승 최창 위종정 강은을 해도에 유배하였다.

 

 정사에 황보유의로 이부랑중을 삼고 유소로 시어사를 삼고 조자기 이택성으로 모두 전중시어사를 삼고 이인택으로 감찰어사를 삼았다. 을축에 호부시랑 최원신을 거란에 보냈다. 병인에 관인전문에 거동하여 망노 고독 독질자를 향응하고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기사에 참지정사 최사위로 서경유수를 삼았다. 이 달에 송악성을 증수하였다. 서경에 황성을 쌓았다. 동여진이 100여소의 배로 경주에 침구하였다. 9월 병자에 좌복사 참지정사 조지린이 졸하였다. 최사위로 이부상서를 삼고 박섬으로 장작감을 삼고 강의로 상서우승을 삼고 박종검으로 시어사를 삼았다.

 

을유에 탐라가 주 군의 예에 의하여 주기를 사할 것을 간청하거늘 이를 허락하였다. 임진에 이방으로 서경부유수를 삼았다. 동 10월 경자 삭에 병부상서 유방으로 참지정사 서경유수겸 서북면행영도병마사를 삼았다. 을축에 도관랑중 김숭의를 거란에 보내어 동지를 축하하였다. 상서 장연제에게 명하여 궁궐을 수영하였다. 11월 임오에 형부시랑 김은부를 거란에 보내어 생신을 축하하였다. 12월 기유에 문인위로 참지정사를 삼았다. 이 달에 거란이 하공진을 죽였다.

 

임자 3년 춘 2월 갑진에 여진추장 마시저가 30성 부락의 자제를 거느리고 와서 토마를 바쳤다. 30성이란 아간돈 이홀 이방고 문질노 불차리 거질아 점한일 이질아 야라다 요게라 요열일 울언 오림대 몽골예 훈저헌 도태 야을일 나을신 나을안 동골일 지도일 어슬은 마을일 도몰니 운돌리 곤한이 노일이 배문이 불서일 만윤이이다. 을묘에 교하기를 「논어에 백성이 부족한데 임금이 누구와 더불어 족할 것이냐라고 하였는데 요사이 전쟁으로 인하여 백성이 농사를 잃고 길에 굶주려 죽은 자가 서로 잇대었다. 백성들의 이와 같음을 생각할 때 어찌 군부가 홀로 편하리오.

 

상식대관으로 하여금 상선을 감성케 하라」고 하였다. 무오에 위수여로 시중을 삼고 유진으로 문하시랑을 삼고 최사위로 내사시랑 평장사를 삼고 최항으로 이부상서 참지정사를 삼고 박충숙으로 상서좌복사를 삼고 채충순으로 예부상서를 삼았다. 3월 경오에 경주에 지진하였다. 임신에 송인 왕복 전화 양태 섭청 왕노 이태 임석이 내투하였다. 하 4월 계해에 문하시중 위수여가 졸하였다. 이 달에 서리가 왔다. 거란이 왕에게 조하여 친조하라 하였다. 5월 기사에 동여진이 청하 영일 장기현에 침구하니 도부서의 문연 강민첨 이인택 조자기를 보내어 주군병을 독려하여 격주시켰다. 경주의 조유궁을 철수하여 그 재목으로 황룡사탑을 수리하였다. 을유에 원릉에 배알하였다.

 

 병술에 승을 내전에 모으고 인왕반야경을 강하였다. 6월 갑진에 시어의 궁정이 옹색(추애)함으로 상참관으로 하여금 5월에 한 번씩 입견케 하였다. 을사에 이수화를 좌습유로 삼았다. 경술에 송인 섭거전 임덕 왕호가 내투하였다. 계축에 예관이 청하기를 「중외로 하여금 생신을 진하하도록 하소서」하니 교하기를 「모인이 일찍 민흉을 당하여 길이 공양을 저버렸다. 매양 구로하신 날을 당하면 추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거늘 어찌 슬픔을 참고 도리어 경하를 받으리요. 지금부터는 양경과 제도의 진하를 일절 금지하고 다만 축수도장만 두도록 하되 이것을 길이 항식으로 삼으라」고 하였다.

 

 감찰어사 이인택과 동북면 행영병마사 강감찬이 서로 틈이 생겨 논소하기를 말지 않거늘 인택을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가뭄으로 써 유사에게 명하여 원옥을 다스리고 경죄는 방면하고 산천에 도사케 하였다. 갑자에 형부시랑 전공지를 거란에 보내어 하계문후를 하고 또 왕이 병으로 친조할 수 없다고 고하니 난주가 노하여 조하기를 「흥화 통주 용주 철주 곽주 구주 등 6성을 취한다」고 하였다. 추 7월 무인에 교하기를 「짐이 사수(사천)에 있을 적에 언효와 효질 두 사람이 좌우에 시종(부지)하여 일찍이 근로를 나타내었으니 양전을 주어 그 수고를 포상하라」고 하였다. 8월 병신 삭에 일식하였다.

 

무술에 일본국의 반다 등 35인이 내투하였다. 임인에 탐라인이 와 대선 2소를 바쳤다. 동북주진에 풍년이 들었다. 9월 기사에 서두공봉관 문유령을 거란의 내원성에 보냈다. 동 10월 병오에 남초인 육세령 등이 와 방물을 바쳤다. 윤월에 여진의 모일라와 조을두가 부락의 30성을 거느리고 화주에 와 맹약하기를 간청하거늘 이를 허락하였다. 경오에 공부상서 참지정사 장영과 예부시랑 유징필을 거란에 보냈다. 계미에 거란의 사신 대위 한빈이 왔다.

 

 12월 정축에 경주에 지진하였다. 교하기를 「옛날 진조에서는 대실이 화재를 당하매 두예와 사곤 등이 가덕문을 수리하여 임시로 신주를 모시고 제예를 행할 것을 아뢰었다. 이제 과인의 부덕으로 청묘에까지 재화를 미치게하여 슬픈 마음이 비록 깊으나 일으켜 지을 겨를이 없으니 이에 먼저 신주를 만들어 재방에 모시고자 하노니 예관으로 하여금 의의하여 주문케 하라」고 하였다. 경인에 장영이 거란의 인진사 이연홍과 같이 왔다. 이 달에 서경 목멱사 신상을 만들었다. 중광사를 창건하였다.

 

계축 4년 춘 정월 정유에 예빈소경장박를 거란에 보냈다. 경술에 송의 민인 대익이 내투하니 유림랑수궁령을 제수하고 의물과 전장을 사하였다. 신유에 김작빈으로 어사중승을 삼고 한창필로 우보궐을 삼고 황주량으로 시어사를 삼았다. 임오에 경주에 지진하였다.

 

계미에 교하기를 「짐이 미약한 몸으로 외람되게 원수가 되어서 허물과 잘못이 쌓이게 되어 변이가 서로 잇대었다. 재앙은 헛되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매 이것을 근심하고 두려워하노라. 유사로 하여금 재앙을 가시는 길을 강구하여 써 아뢰도록 하라」고 하였다. 경인에 중추원사 채충순을 거란에 보냈다. 3월 신축에 금주에 지진하였다.

 

무신에 거란사신 좌감문위대장군 야율행평이 와 흥화 등 6성을 토삭하였다. 하 4월 을축에 우상시 전보인이 글을 올려 치사(해임)하기를 빌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병자에 서리가 내려 풀이 말랐다. 계미에 공부상서 참지정사 장영으로 서경유수를 삼았다. 5월 정묘에 거란이 와 통화(연호)를 개태로 고쳤다고 고하였다. 임인에 여진이 거란병을 인도하고 장차 압록강을 건느려 하거늘 대장군 김승위 등이 쳐 물리쳤다.

 

 계묘에 경장태자의 딸을 맞이하여 비로 삼았다. 6월 정묘에 차상서우승 김작빈을 거란에 보내어 개원함을 축하하였다. 계유에 송악이 무너졌다. 추 7월 무신에 거란사신 야율행평이 다시 와 6성을 토색(토색)하였다. 8월 을해에 의릉에 배알하고 사하였다. 9월 병오에 과인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임유간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경술에 교하기를 「보국대장군 송능 표기대장군 유손은 태조에게 체사하여 종군에 공로가 있었고 지금도 아직 무양하여 이미 기(90세) 신(100세)에 이르렀으니 각기 대광을 가자하라」고 하였다. 병진에 이부상서 참지정사 최항으로 감수국사를 삼고 예부상서 김심언으로 수국사를 삼고 예부시랑 주저와 내사사인 윤징고와 시어사 황주량과 우습유 최충으로 모두 수찬관을 삼았다. 동 10월에 공신당을 수리하였다. 11월 정미에 금주에 지진하였다. 12월 무오 삭에 일식하였다. 병술에 금 경 2주에 지진하였다.

 

갑인 5년 춘 정월 갑오에 궁궐이 낙성되었다. 임자에 혜성이 오차(방위)에 나타났다. 2월 경신에 혜성이 대릉(방위)에 들어갔다. 갑자에 신궐에 입어하였다. 철리국주 나사가 여진의 만두를 보내어 와 마 및 초서 청서피를 바쳤다. 병자에 교하기를 「백성의 나이 70 이상으로서 관작이 없는 자에게는 모두 정위급을 가하라」고 하였다. 갑신에 광휴 양일 거정을 모두 낭장으로 삼아 써 전공을 상주었다. 3월 경인에 백홍이 관일하였다.

 

신축에 백기가 관일하였다. 임자에 교하기를 「조고를 추존하여 공훈을 밝힘은 인자의 뜻이다. 짐이 내월에는 비궁에 향사하고자 하나니 소사에게 위촉하여 의정하라」하니 예관이 선왕 선후의 존시호를 가상할 것을 아뢰었다. 하 4월 갑술에 치사한 문하시중 유윤부에게 내사령을 가하였다. 병자에 친히 재방에 체하였는데 처음으로 목종을 부제하고 유형 이하를 사하였다. 유진으로 검교태사 수문하시중을 삼고 최사위로 문하시랑 평장사를 삼고 김심언으로 내사시랑 평장사를 삼았다. 정축에 우현부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5월 신묘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병오에 중추원부사 전공지가 졸하였다.

 

 6월 경신에 교하기를 「방수군으로 도중에서 죽은 자는 관에서 감구를 주어 그 유골을 담아 본가에 역송하고 상여로 죽어 성명과 본관을 알 수 없는 자는 소재의 관사가 임시로 매장하고 그 노장 형모를 기록하여 의오가 없도록 함을 영식으로 하라」고 하였다. 이 달에 진적과 이예균을 가관하여 문하시랑 평장사를 삼고 왕동영은 내사시랑 평장사를 삼고 윤여는 사재경을 삼고 왕좌섬은 장작소감을 삼으니 이것은 거란에 봉사하였다가 붙들려서 돌아오지 못한 때문이다. 추 7월 경인에 사직단을 수리하였다. 8월 갑자에 내사사인 윤징고를 송에 보내어 금선직성 용봉안복과 수용봉안복 각 두벌과 양마 22필을 진상하고 인하여 옛날과 같이 귀부하기를 청하니 송제는 등주에 조하여 「해안(해차)에 관사를 고 대접하라」고 하였다.

 

 기사에 명복궁으로 이어하였다. 병자에 경주에 지진하였다. 기묘에 내사시랑 평장사 김심언으로 서경유수를 삼고 노전으로 어사중승을 삼았다. 계미에 양진으로 이부시랑 중추부사를 삼았다. 9월 을유에 손몽주로 한림학사승지를 삼고 이공으로 한림학사를 삼았다. 병신에 거란이 장군 이송무를 보내어 또 6성을 토색하였다. 동 10월 기미에 거란이 국구상온 소적열을 보내와 통주에 침입하거늘 흥화진장군 정신용과 별장 주연이 쳐 패북시켜 700여급을 참하니 강에 빠져 죽는 자도 심히 많았다. 11월 계미 삭에 상장군 김훈과 최질 등이 여러 위군을 거느리고 난을 일으키니 중추원사 장연우와 일직 황보유의를 유배시켰다. 을유에 김훈 등이 청하기를 「무관으로 상참 이상은 모두 문관을 겸하도록 하소서」한데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경인에 와언이 돌아 북산제사의 중이 군사를 이끌고 온다 하니 서울이 크게 놀라매 계엄하였다. 12월 정사에 유죄 이하를 사하고 모든 사죄을 감하여 장류하고 황보유의와 장연우 및 상사불면자를 제외한 모든 유배인은 모두 양이를 베풀었다. 그리고 해독과 산천의 신기에 각기 훈호를 가하였다. 경중인호에 곡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고 효자 순손 의부 절부에게도 차등있게 분물을 주고 문관 7품이상으로 입사한지 20년 되는 자에게는 복장을 갈게 하고 도관은 차제의 직을 가하였다.

 

을묘 6년 춘 정월에 거란이 압록강에 다리를 놓고 다리를 끼고서 동서로 성을 쌓거늘 장수를 보내어 공파하고자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계묘에 거란병이 흥화진을 포위하거늘 장군 고적여와 조익 등이 쳐 물리쳤으나 갑진에 또 통주에 침구하였다. 3월 계미에 서경에 행차하였다. 갑오에 군신을 장락궁에서 향연하고 김훈과 최질 등 19인을 베었다. 기해에 거란이 용주에 침구하였다. 여진이 배 20소로 구두포에 침구하므로 진명도도부서가 이를 격패하였다. 하 4월 경신에 거란사신 장군 야율행평이 와 또 6성을 토색하매 포류하고 보내지 않았다. 이 달에 왕이 서경으로부터 돌아왔다. 5월 신축에 큰 유성이 서남에 떨어졌다.

 

 계묘에 김은부로 지중추사를 삼았다. 6월 기유 삭에 일식하였다. 윤월 갑진에 이주헌으로 형부상서를 삼고 장연우로 호부상서를 삼았다. 송의 천주인 구양징이 내투하였다. 추 7월 경신에 무관이 청건하였던 관호를 혁파하였다. 도병마사가 주하기를 「장군 정신용과 임영함 및 군사 1만5천5백인은 다 변공이 있으니 청컨대 급을 더하여 써 상주소서」한데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8월 을미에 내사령 유윤부가 졸하니 3일간 철조하고 시호를 경안이라 하였다. 9월 갑인에 거란사신 감문장군 이송무가 와 6성을 토색하였다. 기미에 거란이 통주를 내공하였다.

 

 계해에 흥화진대장군 정신용과 별장 주연 산원 임억 교위 양춘 대의승 손간 태사승 강승영 등이 군사를 이끌고 거란군의 뒤로 나가서 700여명을 쳐 죽였으나 신용 등 6인이 전사하였다. 정묘에 거란이 영주성을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물러갔다. 경오에 대장군 고적여와 장군 소충현 고연적 산원 김극 별장 광참 등이 추격하다가 전사하였으며 단병이 병마판관 왕좌와 녹사 노현좌를 사로잡아 갔다. 11월 기사에 호부상서 장연우가 졸하였다. 갑술에 경주에 지진하였다. 이 해에 거란이 선화 정원 12진을 취하여 성을 쌓았다. 민관시랑 곽원을 송에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 인하여 거란이 해마다 내침함을 고하였는데 그 표에 「성위를 빌리시고 예략을 보이셔서 혹 위태할 때에 이르면 미리 구급의 은을 베푸소서」라고 하였다.

 

 

병진 7년 춘 정월 경술에 거란의 야율세량과 소굴열이 곽주를 침공하니 아군이 싸워서 죽은 자가 수만명이 되었으며 치중을 노획하여 돌아갔다. 갑인에 거란사 10인이 압록강에 이르거늘 받아들이지 않았다. 을묘에 수창궁으로 이어하였다. 정신용에게 상서우복사 상주국을 주년게 장군을 임억에게 중랑장을 양춘에게 낭장을 손간에게 상약봉어를 강승영에게 태사령을 증직하고 신용의 아들 균백으로 낭장겸 상승봉어를 제수하였다. 무오에 강민첨으로 내사사인을 삼았다. 임술에 병부가 주하기를 「낭장 진명 유고가 강효 등 74인에게 청컨대 작 1급씩 더하여 변공을 상하소서」하니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병인에 고장군 고연적이 국사에 죽었으므로 그 집에 쌀 50석과 보리 30석과 포 100필을 부사하였다.

 

 정묘에 김은부로 호부상서를 삼고 이수화 최충으로 좌우보궐을 삼고 이작충 구양징으로 좌우습유를 삼았다.

 

 무진에 윤징고로 중추원부사를 삼았다. 기사에 장영으로 좌산기상시를 삼고 채충순으로 다시 예부상서를 삼았다. 임신에 태조재궁을 받들어 다시 현릉에 반장하였는데 경술년 난 때 재궁을 부아산(삼각산) 향림사에 옮겼다가 이에 이르러 환장한 것이다. 곽원이 송으로부터 돌아왔다. 송제가 조하기를 「짐은 사목하는 자리에 있어 뜻을 안민에 두노라. 비록 지역은 나누어져서 각기 다름이 있으나 오직 정성을 밀어(추) 간연(간연)함이 없다. 경의 본도(본국)를 생각할 때 진실로 마음에 깊이 걱정되는 바이나 저 이웃나라(거란)를 돌아보건대 또한 맹호를 쫓은지 오랜지라 바라는 바는 서로 화목하여 써 백성들을 평안하게 함에 있다」고 하였다. 2월 기묘에 김노현으로 상서우복사를 삼았다.

 

 경진에 병부가 주하기를 「중랑장 채굉과 이강 등 119인은 다 전공이 있사오니 청컨대 작 1급씩을 올리소서」하니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임오에 거란의 왕미 연상 등 7인이 내분하였다. 갑신에 김훈 등의 부모 처 자매 조손 숙백으로 녹좌된 자는 모두 방면하고 아들과 동복형제는 본관에 돌려 보내어 상사에는 유죄치 않도록 하였다.

 

 기축에 수창궁에 괴이가 자주 나타나므로 명복궁으로 이어하였다. 신축에 태백(성)이 경천하였다. 병부가 주하기를 「장군 황호맹 등 36인은 모두 전공이 있사오니 청컨대 직 1급을 가하소서」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갑진에 거란의 조은 고홀 등 6인이 내투하였다. 하 4월 갑신에 이응보로 섭사헌대부를 삼고 서눌로 중승을 삼고 유소로 잡단을 삼고 조자기로 시어사헌을 삼고 김우보 이원공으로 전중시어사헌을 삼고 안재균 이원수 유현좌 이회 곽신 이주좌로 감찰을 삼았다. 사헌대 뜰의 백자 나무가 말라 죽은지 몇 년 만에 이에 이르러 다시 살아났다. 5월 을사에 궁인 김씨가 왕자를 낳으니 이름을 흠이라고 사하고 인하여 연경원에 금은기 필은 전장 노비 염분 어량을 사하였다. 신해에 거란의 마아 보량 왕보 가신 등 13호가 내투하였다. 을축에 상서성이 주하기를 「구주군의 귤선과 영몽이 모반하였으므로 참하였나이다」고 하였다.

 

거란의 요두 등 3인이 내투하였다. 6월 병자에 김은부로 중추사상호군을 삼고 곽원으로 형부시랑 우간의대부를 삼고 황보유의로 급사중을 삼고 김맹으로 중추직학사를 삼았다. 무인에 거란의 지보 등 3인이 내투하였다. 경진에 왕자가 항춘전에서 탄생하니 이름을 수라고 사하였다. 을유에 거란의 장렬 공현 신두 유아 왕충 등 30호가 내투하였다. 추 7월 갑진에 도병마사가 주하기를 「장군 고적여와 중랑장 서긍과 낭장 수암 등 3108인은 일찍이 통주의 싸움에서 살호이 심히 많았으니 청컨대 생존 사몰에 상관없이 직 1급을 더하소서」한데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신해에 명복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김현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경술에 이주헌으로 상서우복사를 삼았다. 정사에 거란의 유도 고종 등 9인이 내투하였다. 경신에 교하기를 「요사이 듣건대 추곡이 장차 익어가는데 비황이 해를 끼친다하니 아마도 형정이 혹은 잘못되어 재앙을 그처럼 함인가 하노니 내외의 인도로서 유죄 이하는 보증을 받고 출옥시키고 소리할 것은 빨리 판결하라」고 하였다. 8월에 거란의 주간 종도 등 8인이 내투하였다. 9월 기유에 교하기를 「남계의 주 현에 황해와 한해가 중첩 였다 하나 기민을 생각할 때 어찌 나를 책함이 없으리요. 마땅히 정전을 피하고 상선을 감할 것이며 모든 관원에서는 술마시고 풍악 잡힘을 금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거란의 나간 등 5인이 내투하였다. 갑인에 이주헌으로 서경유수를 삼았다.

 

 병인에 손몽주로 예부상서를 삼았다. 신해에 거란의 봉대 고리 등 19인이 내투하였다. 동 11월 신축 삭에 정신용 집에 양전 20결을 사하였다. 계축에 최항으로 내사시랑 평장사를 삼고 유방으로 형부상서 참지정사를 삼았다. 병진 군망에 눈오기를 빌었다. 거란의 광예아 등 10인이 내투하였다. 12월 신사에 원우를 공부상서로 삼고 지채문으로 우상시를 삼으니 모두 무직으로써 겸임하였다. 을미에 거란의 슬불달 등 6인이 내투하였다. 이 해에 다시 송의 대중상부연호를 행하였다.

정사 8년 춘 정월 정미에 검교대위 좌산기상시 참지정사 장영이 상표하여 퇴직하기를 빌었다. 3월 갑진에 정배걸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병오에 백기가 관일하였다. 정사에 이단으로 사헌중승을 삼았다. 하 4월에 문하평장사 최항과 중추부사 윤징고를 사주에 보내어 안종의 재궁을 봉천하였는데 왕은 법가를 갖추어 동교에서 맞이하였다. 5월 무신에 이공으로 지중추사를 삼았다.

 

 임자에 중추사 호부상서 김은부가 졸하였다.

 

을축에 고비의 존익을 가상하였다. 6월에 명이 있었다. 추 7월 무술에 거란의 광정 등 7호가 내투하였다. 경자에 병부가 주하기를 「정보 이용봉과 정조 임술광 등 30인은 모두 변공이 있사오니 청컨대 향직 1급을 가하소서」한데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신축에 송의 천주인 임인복 등 40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기유에 여진의 말갈목사가 부락을 이끌고 내조하매 작과 의물을 사하였다. 거란의 매슬 다을 정신 등 14인이 내투하였다.

 

형부시랑 서눌을 송에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무오에 상장군 상서우복사 안소광이 졸하였다. 8월 계유에 거란의 과허이 등 3호가 내투하였다. 을해에 건릉에 배알하였다. 을해에 동여진의 개다불 등 4인이 내투하여 변공에 힘 쓸 것을 청하거늘 허락하고 우예하여 물을 사하였다.

 

 임진에 서여진의 개신이 거란의 동경 숭성사 승 도준을 사로잡아 왔다. 계사에 거란의 소합탁이 흥화진을 포위하여 공격하기 9일에 이기지 못하였다. 장군 견일 홍광 고의가 나아가 싸워 크게 패북시켜 참획이 심히 많았다. 갑오에 흑수말갈 아리불 등 6인이 내투하였으므로 나누어 강남의 주 현에 살게 하였다. 9월 갑진에 거란의 군기곤기와 여진의 고저 등 10호가 내투하였다. 기유에 병부상서 김징우가 상표하여 치사하였다. 임자에 거란의 오두 등 8인이 내투하였다. 무오에 선정전에 거동하여 열병하였다.

 

 이 달에 가물고 황이 있어 왕은 정전을 피하고 상선을 감하였다. 동 10월 임신에 현릉을 수보하였다. 11월 병신에 이원으로 용호군상장군겸 호부상서를 삼았다. 기해에 태백(성)이 경천하였다. 12월 병인에 채충순으로 좌산기상시 중추사를 삼았다. 을해에 현릉에 배알하고 사하였다. 이 달에 교하기를 「고구려 신라 백제왕의 능묘는 다 소재의 주 현으로 하여금 수치케 하고 초채를 금하며 지나는 자는 하마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무오 9년 춘 정월 을미 삭에 사신을 서경에 보내어 성용전에서 태조를 제하였는데 초상을 중신한 까닭이었다. 병신에 서여진의 미알달 등 7인이 와 갑주와 마를 바쳤다. 정안국인 골수가 내분(분)하였다. 경자에 재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상표하여 정전에 돌아오고 상선을 회복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임자에 동여진의 서율불과 서여진의 아주 등 40여인이 와 마와 갑주 기치며 초서 청서피를 바쳤다.

 

 무오에 군신이 여러번 상선을 회복하기를 청하거늘 허락하였다. 2월 무진에 해 노 2군의 교위 선두 이하에게 다포를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기사에 서여진의 능거 거이 등이 와 피물 철갑 및 마를 바쳤다. 을해에 교하기를 「예기에 계춘의 달에는 영어(옥)을 살피고 질곡을 풀라고 하였으니 내외의 법사는 월령을 쫓아 양화를 유도함으로써 항식을 삼으라」고 하였다. 노전으로 중추부사 상호군을 삼았다. 기묘에 동여진의 노어가 부락을 거느리고 와서 마 및 초피를 바치므로 의대와 화물을 사하였다. 갑신에 문하성이 주하기를 「용천교위 박명금이 변공으로 받은 바 계직을 그 아비에게 대수하여 주시기를 원한다」하니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을유에 국내 산천의 신기에 훈호를 가하였다. 서여진의 마문 마알달 등이 와서 토마를 바치매 화물을 사하였다. 병술에 거란의 장정 등 4인이 내투하였다. 3월 갑오 삭에 거란의 송광공 이개 등 10여인이 내투하였다. 계묘에 교외에서 굶주려 죽은 사람의 해골을 거두어 묻어 주었다. 갑진에 정충절 김승위로 모두 병부상서를 삼았다. 동여진의 아리고와 서여진의 능거 등 100여인이 와서 방물을 바치므로 모두 작을 사하고 또 필단을 사하였다. 경신에 백기가 관일하였다. 하 4월 무진에 왕후 김씨가 현덕궁에서 붕어하였다. 경오에 황무가 사방에 자욱한지 무릇 4일에 서울에는 장역을 앓는 이가 많았으므로 왕이 의원을 나누어 보내어 치료하게 하였다.

 

 신사에 동여진의 구타라와 서여진의 거일 등 20여인이 와서 토마와 기장을 바치므로 의대와 화물을 사하였다. 서여진의 목사 목개 등 2백호가 내투하였다. 윤월 무술에 동여진의 추장 아로대 등이 와서 토마와 초서피를 바치므로 의물을 사하였다. 계묘에 송의 강남인 왕숙자 등 24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이 달에 개국사탑을 수리하여 사리를 봉안하고 거란을 설하여 3200여 승을 득도(도승)시쳤다. 5월 을축에 거란의 사부가 내투하였다. 무인에 10만의 승을 공양(반승)하였다. 동여진의 우나특 오이불 등 3000여인이 와서 토마와 병기를 바치므로 모두 작과 의물을 사하였다. 기묘에 강감찬으로 서경유수 내사시랑 평장사를 삼고 양진으로 예부상서겸 중추사를 삼고 이공으로 한림학사승지를 삼고 서눌로 좌간의대부를 삼았다. 경진에 좌윤 강윤봉 등 19인에게 전공으로 직 1급을 더하였다. 서북계에 명이 있었다.

 

임오에 교하기를 「을묘년에 거란이 입구할 때 여러 주 진의 장졸로서 공적이 있는 자는 증급하고 죽은 자는 부증을 우가하라」고 하였다. 계미에 황정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갑신에 서여진의 타억 실불 등 10인이 와서 마 및 갑주를 바치므로 모두 증직하고 물을 사하였다. 6월 을미에 채충순으로 이부상서 참지정사를 삼았다. 무술에 서북여진의 가을불 등 30인이 와서 마 및 병장을 바쳤다. 기해에 이공과 주저로 좌우상시를 삼았다. 무신에 처음으로 대자은현화사를 창건하여 써 고비의 명복에 이바지하였다.

 

경술에 혜성이 나타나니 길이가 4장여나 되었다. 계축에 동여진의 이골이 와 서여진의 제모 등이 내조하였다. 경신에 병부가 주하기를 「장군 양악과 중랑장 함진 등 449인은 모두 변공이 있사오니 직 1급을 더하여 주옵소서」하니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추 7월 을해에 구정에서 대초를 지내었다. 정축에 왕자가 연경원에서 탄생하니 이름을 형이라 사하고 원을 고쳐서 궁이라하고 인하여 예물을 사하였다. 이 달에 제위원을 수리하였다. 동여진의 오두주 등 30여인이 와서 토마와 병장을 바치므로 의물을 사하였다. 8월 임진에 진함조로 호부상서를 삼았다. 9월 무인에 주덕명으로 공부상서를 삼았다. 정해에 내사시랑 평장사 김심언이 졸하였다. 동여진의 이우불이 내조하매 향직을 증수하였다. 윤징고로 중추사를 삼았다. 교하기를 「사죄을 범한 자는 사죄을 면하여 먼 곳에 장류하고 유죄 이하는 사하라」고 하였다. 동 12월 병오에 우복사 김노현이 졸하였다. (노현은) 일에 근간함으로써 알려져 매양 영조가 있을 때에는 반드시 감독하게 하였다. 정미에 구주의 여진 목사 등 34인에게 견 주 포 50여필을 사하여 포적한 공을 상주었다. 무신에 내사시랑 평장사 강감찬으로 서북면 행영도통사를 삼았다. 신해에 수창궁으로 이어하였다. 동서여진의 추장 염지거이나 서을나 등 50인이 와서 마 및 갑주 병장을 바치매 모두 의물을 사하였다. 이 달에 예빈소경 원영을 거란에 보내어 청화하였다.

 

송의 천희년호를 행하였다. 11월 계해에 보신이 혜성이 이미 멸하였으므로 상표하여 정전에 나아가고 상선을 복구하도록 청하니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병인에 전인보로 상서좌복사를 삼고 한빈경으로 시강학사를 삼았다. 우산국이 동북여진의 침구를 입어 농업을 폐하므로 이원구를 보내어 농기를 사하였다. 12월 신묘에 동북여진의 아차오 을불 소손녕이 군사 10만으로 내침하매 왕은 평장사 강감찬으로 상원수를 삼고 대장군 강민첨으로 부원수를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흥화진에 이르러 크게 패북시키니 손녕이 군사를 이끌고 바로 서울로 나아가려 하거늘 민첨이 자주에 추급하여 또 크게 패북시켰다. 신해에 태조의 재궁을 받들어 부아산의 향림사에 옮겨 모셨다. 갑인에 서울을 계엄하였다. 병진에 유죄 이하를 사하였다. 정사에 혜성이 나타났다.

 

기미 10년 춘 정월 신유에 소손녕이 신은현에 이르니 서울을 상거하기 백리라 왕이 명하여 성외의 민호를 거두어 성내로 들어오게 하고 들을 비워(청야)서 기다리게 하니 손녕이 야율호덕을 보내어 서장을 가지고 통덕문에 이르러 회군한다고 고하고 가만히 척후병 200여기를 보내어 금교역에 이르거늘 우리 측에서는 군사 100명을 보내어 밤을 타 엄살하였다. 병자에 동여진의 추장 우나 등이 내조하였다. 2월 기축 삭에 난병이 구주를 통과할 새 감찬 등이 맞어 싸워 크게 패북시키니 생환자가 겨우 수천인이었다. 임진에 우복사 전보인이 졸하였다. (보인은) 명경출신으로 여러번 학관에 제수되니 시인이 숙유라고 칭하였으나 성품이 경조하였다. 갑오에 강감찬이 개선하니 왕이 친히 영파역에서 맞이하였다. 임자에 장수를 명복전에서 향연하고 아울러 3군을 위로하였다. 3월 무오 삭에 일식하였다. 신유에 상서좌복사 문인위가 졸하였다.

 

계해에 통주도부서 유백부 등 173인이 역전하다가 전사하였으므로 관을 추증하고 그 집에 미맥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라고 명하였다. 갑자에 이응보로 우복사를 삼고 강민첨으로 응양상장군주국을 삼고 유참으로 예빈경을 삼고 김종현으로 예부원외랑을 삼았다. 무진에 철리국주 나사의 사인 아로태가 와서 토마를 바쳤다. 갑신에 여수하고 경죄(경계)는 소결(소통정리)하였다. 하 4월 계묘에 신사에 비를 빌었다. 병진에 진명선병도부서 장위남 등이 해적 8소를 잡아 적이 약취한 일본 생구 남녀 259인은 공역령 정자량을 보내어 그 나라에 압송토록 하였다. 5월 병인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무진에 거란 동경의 문적원소감 오장공이 와서 알견하였다. 신사에 가뭄으로 여수하였다. 임오에 사신을 철리국에 보내어 보빙하였다. 6월 병술 삭에 동여진의 추장 나사불 등이 무리를 거느리고 내조하였다. 무자에 나민으로 상서예부시랑겸 우간의대부를 삼았다. 추 7월 신유에 이응보 이원으로 좌우복사를 삼았다. 기사에 송 천주의 진문궤 등 10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경오에 서여진의 추장 아라불이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마를 바쳤다. 임신에 송 복주의 우선 등 100여인이 와서 향약을 바쳤다. 기묘에 우산국 민호로서 일찍이 여진에게 노략이 되어 내분한 자를 모두 돌아가게 하였다. 8월 기축에 예빈경 최원신과 이수화를 송에 보내어 하정하였다. 신묘에 거란의 동경사 공부소경 고응수가 왔다. 을미에 고공원외랑 이인택을 거란의 동경에 보냈다.

 

 을사에 문하시중 유진이 졸하였다. 임자에 동여진의 모일라가 무리를 거느리고 내조하니 계직을 더 주었다. 9월 갑인 삭에 태사가 일식을 주하였으나 음운으로 보이지 않았다. 을묘에 수창궁으로 이어하였다. 임술에 중양절(9월9일)이므로 송 및 탐라 흑수 제국인에게 저관에서 사연하였다. 동 10월 갑신 삭에 유소로 사헌중승을 삼았다. 갑오에 양절(중국의 절동 절서)의 망난 등 60인이 왔다 11월 계축 삭에 강감찬으로 문하시랑 동내사 문하평장사를 삼았다. 경신에 강남 주 현의 정호를 옮겨 써 상산 이천 수안 신은 협계 우봉 등 현을 채웠다. 신사에 태조 재궁을 받들어 다시 현릉에 장사하였다. 12월 계미 삭에 왕자가 안복궁에서 나매 이름을 서라 사하고 궁호를 고쳐 연덕이라 하였으며 인하여 예물을 사하였다. 경인에 동흑수국 추장 구돌라가 와서 토마와 병장을 바쳤다. 임진에 대한이므로 옥수을 소결하였다. 정유에 최사위로 청하현 개국남을 삼았다. 무술에강민첨으로 우산기상시를 삼았다. 갑진에 유방으로 천승현 개국남을 삼고 채충순으로 제양현 개국남을 삼았다. 병오에 현릉에 배알하였다. 신해에 혜성이 나타났다.

 

경신 11년 춘 정월 계해에 진함조로 우복사겸 도정사를 삼고 최원으로 호부상서를 삼고 이가도로 상서우승을 삼고 이수화로 기거랑을 삼고 최충으로 기거사인을 삼고 이작충으로 우보궐을 삼았다. 병인에 흑수말갈 알시경 고지문 등 24인이 와서 토물(방물)을 바쳤다. 신미에 박유인 김가로 좌우습유를 삼았다. 서여진의 추장 고두화가 와서 방물을 바쳤다. 2월 무자에 수안현의 대정 혁연과 군사 이증과 군사 시음달이 전사하였으므로 처자에게 화물을 우사하였다. 기축에 전고부령인 사유한과 그 아들이 번인에게 납치되었다가 도망쳐 돌아왔으므로 왕이 그 노고를 생각하여 특히 관직을 가하고 의량을 사하였다. 임인에 동여진의 검불라 등 7인이 와서 거란관인 1과와 토마를 바쳤다. 갑진에 문하시랑 진적 이예균과 내사시랑 왕동영과 사재경 윤여와 장작소감 왕좌섬과 소부승 김덕화와 장작주부 김징호와 인의감 김득굉이 거란에 억류되었으므로 그들의 처에게 각기 미곡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고 좌섬의 처는 개성군군을 봉하고 아들 이보에게는 예부주사를 제수하였다.

 

 기유에 송의 천주인 회지 등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이 달에 이작인을 보내어 표를 받들고 거란에 가 번을 칭하고 공바치기를 종전대로 할 것을 청하게 하고 또 구금한 사람 지자리를 돌려보내었는데 지자리는 억류된지 무릇 6연이 되었다. 3월 계축에 거란사신 야율행평을 돌려보내었다. 기미에 거란사신 검교사도 한소옹이 왔다. 신유에 강민첨으로 병부상서를 삼았다. 갑자에 여진의 귀덕장군 불나가 무리를 거느리고 내조하였다. 정묘에 장군 팽홍패 등 10인은 변공이 있음으로 모두 1급을 더하였다. 특히 고장군 정신용 집에 곡 300석을 사하였다. 하 4월 경자에 왕이 임간하여 문하시랑 최사위와 지중추사 강민첨을 보내어 아들 흠을 책하여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수사도겸 내사령 상주국 숭인광효보운공신을 삼고 연경군으로 봉하였다.

 

 계묘에 문무상참 이상관을 명복전에서 향연하고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정미에 예부상서 양진과 형부시랑 한거화를 거란에 보내어 왕자 책봉함을 고하고자 할 새 재신 유방 등이 간지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유에 동여진의 추장 달노가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번미 300석을 바쳤다. 5월 신해 삭에 사자좌 100을 내정에 설하고 인왕경을 3일동안 강하였다. 정사에 윤징고로 우산기상시를 삼았다. 을해에 명복전에 복시하고 이원현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흑수말갈의 오두나 등 70여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경진에 최원신 이수화가 봉사에 오욕이 있으므로 모두 귀양보냈다. 안홍점으로 사헌잡단을 삼았다. 6월에 서북계에 황이 있었다. 계사에 지서사 차사재소경 노집중을 거란의 동경에 보냈다. 기해에 불나국 추장 사가문이 여진의 노울달을 보내어 토물을 바쳤다. 추 7월 을축에 오래 가물음으로 여수하니 계유에 큰 비가 왔다. 8월 병술에 왕이 안서도 둔전 1240결을 현화사에 시납하매 양성이 재삼 논박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해에 신라 집사성시랑 최치원을 내사령으로 추증하여 선성의 묘정에 종사하게 하였다.

 

 경자에 대내를 중수하므로 수창궁에 이어하였다. 9월 정사에 군신을 관인전에서 향연하였다. 기미에 왕이 현화사에 가서 친히 새로 만든 종을 치고 또 군료들로 하여금 치게 하고 각기 의물과 필단을 희사하게 하였다. 동 10월 기축에 현화사 승 법경으로 왕사를 삼았다. 윤 12월 경술에 이현재로 전중시어사헌을 삼았다. 계해에 연주에 지진하였다. 이 해에 최제안을 거란에 보내어 천령절을 하하고 김맹을 송에 보냈다.

 

신유 12년 춘 정월 경진에 백기가 관일하였다. 기축에 거란 동경사 좌상시 왕도충이 와서 그 임금이 장차 책례를 받는다고 고하였다. 을사에 자신전을 고쳐 경덕전이라 하고 토양궁을 정양궁이라 하고 좌우조천문을 조종이라 하고 유원문을 숭복이라고 하였다. 이 달에 흑수말갈 추장 아두타불 등이 와서 마 및 궁시를 바쳤다. 2월 정미에 거란의 검교사공 어사대부 요거신이 내빙하였다. 신해에 오관산이 무너졌다. 계유에 동여진의 회화장군 마저개가 무리를 거느리고 내조하였다. 갑술에 서울의 남녀 90세 이상된 자에게 주식 다약 포백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3월 임오에 유방으로 내사시랑 평장사를 삼고 주덕명으로 상서좌복사를 삼고 김현섭으로 형부상서를 삼고 박눌암으로 공부상서를 삼고 서눌로 국자제주 지리부사를 삼았다. 을유에 서여진의 모일라 나홀라 등이 와서 토마와 초서피를 바쳤다.

 

 계사에 철리국이 사신을 보내어 전과 같이 귀부할 것을 표청하였다. 을미에 거란 동경사 검교산기상시 장징악이 내빙하였다. 병신에 현화사 북산이 무너져 옥박이 출토되었다. 문공전을 고쳐 문덕전이라고 하였다. 하 4월 기사에 인왕경을 구정에서 3일간 강하였다. 경오에 비를 빌었다. 5월 경진에 토룡을 남성 뜰에 만들고 무격을 모아 비를 빌었다. 병술에 여수하였다. 무자에 상서좌승 이가도에게 명하여 경주에 가서 고선사 금라가사와 불정골과 창림사의 불아를 가져오게하여 모두 내전에 두었다. 무인에 비가 왔다. 6월 정묘에 장영으로 상서좌복사 동내사문하 평장사를 삼고 인하여 치사하게 하고 주저로 한림학사승지를 삼았다. 한조를 송에 보내어 사은하였다. 추 7월 갑술 삭에 일식하였다. 병자에 탐라가 방물을 바쳤다. 계사에 동여진의 흑수 추장 거울마두개가 왔다. 계묘에 명경전을 고쳐 선정이라 하고 영은전을 명경이라 하고 경덕전을 연영이라고 하였다. 8월 신해에 김인위로 상서우복사를 삼고 인하여 치사하게 하였다. 기미에 왕이 현화사에 나아가서 친히 비액을 전하였는데 일찍이 한림학사 주저에게 비문을 짓게 하고 참지정사 채충순에게 비음을 짓게 하고 아울러 글씨를 쓰게 하였던 것이다. 무진에 왕자가 연덕궁에서 탄생하니 이름을 기라고 사하였다. 신미에 왕자 흠에게 호국공신호를 가사하고 최사위로 검교태사 수문하시중을 삼고 최항으로 검교태부 수문하시랑 동내사문하 평장사를 삼고 유방으로 검교태보를 삼고 채충순 윤징고로 모두 검교태위를 삼았다. 임신에 관인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조패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이 달에 동여진의 실빈 아리고가 내조하였다. 9월 계유 삭에 이공으로 중추사 검교사공을 삼았다. 을미에 흑수말갈의 소물개 고지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중추사 이공과 병부시랑 유종을 거란에 보내어 수책을 축하하였다. 동 10월 기유에 이주헌으로 상서좌복사 참지정사를 삼았다.

 

을묘에 동서여진의 추장 아로대와 아개 등이 내조하였다. 11월 계미에 지중추사 병부상서 강민첨이 졸하였다. 12월 을사에 중추사 우산기상시 윤징고가 졸하였다. 무오에 최사위로 판상서이부사를 삼고 김맹으로 이부시랑을 삼았다.

임술 13년 춘 정월 정축에 곽원으로 우산기상시를 삼고 이작인으로 동지중추사를 삼고 김맹으로 권지중추사를 삼았다. 정해에 흑수 추장 사일라와 만투불 등이 내조하였다. 갑오에 신라 한림 설청을 홍유후로 추증하고 선성묘정에 종사하게 하였다. 정유에 유징필로 한림학사비서감을 삼았다. 2월 신축 삭에 서여진의 저라가 와 인구(생구)와 방물을 바쳤다. 임인에 이공으로 형부상서를 삼았다. 기유에 탐라가 방물을 바쳤다.

 

 군기소감 김인유를 거란에 보내어 춘계간후를 하였다. 임자에 거란의 맹유 연거 등 4인이 내분하였다. 병진에 궁성동북랑 150여간이 불탔다. 정묘에 참지정사 박충숙과 국자 사업 이경을 거란에 보냈다. 3월 계유에 이가도로 동지중추사를 삼았다. 을해에 상서우복사 이주헌이 졸하였다. 하 4월에 거란이 어사대부 상장군 소회례 등을 보내 와 왕을 책하여 개부의동삼사 수상서령 상주국 고려국왕 식읍 1만호 식실봉 1천호로 하고 인하여 차복 의물을 사하니 이로부터 다시 거란의 연호를 행하였다. 정묘에 채충순으로 내사시랑 평장사겸 서경유수를 삼았다. 5월 경오에 군망에 비를 빌었다. 을해에 명주에서 상언하기를 은광이 정선현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병자에 한조가 송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송제가 성혜방 음양2택서 건흥력 석전1장을 사하였다. 계사에 아들 연경군 흠을 책하여 왕태자로 삼았다. 흑수말갈의 소의 등 30여인이 내조하였다. 6월 경자에 아들 형을 책하여 평양군을 삼았다. 계묘에 아들 서를 책하여 악랑군을 삼았다. 을사에 유방으로 문하시랑 평장사를 삼았다. 임자에 동궁 관속을 두었다. 무진에 연덕궁주 김씨가 졸하였다. 추 7월 병자에 도병마사가 주하기를 「우산국민으로 여진의 노략을 입어 도망하여온 자는 예주에 두고 관에서 자량을 급여하여 아주 편호를 삼으소서」하니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동서여진 아라대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8월 경자에 거란 동경의 지례사 이극방이 와서 말하기를 「지금으로부터 춘하계문후사를 한 번씩만 보내되 천령절하례사와 정단사와 동행하도록 하고 추동계문후사도 한 번씩 보내되 태후생신하례사와 동행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갑인에 송의 복주인 진상중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철리국의 수령 나사가 흑수의 아부한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신유에 광남인 진문수 등이 와서 향약을 바쳤다. 갑자에 국자제주 서눌의 딸을 맞이하여 숙비를 삼았다. 9월 기사에 서울에 남녀의 나이 80 이상된 자와 독 폐질자에게 주식과 다포를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병자에 거란 동경사 왕수영이 왔다. 계미에 도관랑중 윤종원을 거란에 보내어 태후생신을 축하하였다. 정해에 좌산기상시 곽원과 상서우승 왕서를 거란에 보냈다. 무자에 거란의 수우매 오어을 등 19인이 내투하였다. 동 10월 경술에 여수하였다. 을묘에 연경궁주 김씨를 책하여 왕비를 삼았다.

 

 임우가 그치지 않으므로 군망에 비 개이기를 빌었다. 기미에 서눌로 중추사 우산기상시를 삼고 이가도로 중추사 국자제주를 삼고 한조와 유소로 좌우간의대부를 삼았다. 신유에 주저로 예부상서를 삼고 이작인으로 사헌대부를 삼고 김맹으로 중추부사를 삼았다. 11월 을유에 거란의 동경사 고장윤이 왔다. 12월 신축에 거란의 불대 등 11인이 내투하였다. 계축에 서여진의 어니저가 와 고하기를 「고모가 일찍 투화인 매나를 따라 와서 대국의 서울에 산지 이미 수년이 지났으나 고향(본번)을 생각하고 있사오니 토마로써 속바지 하고자 하나니다」고 하거늘 곧 돌려 보내도록 명하고 그 말(마)도 돌려 주었다. 기미에 동여진의 수령 사빈이 와서 마 및 궁시를 바쳤다.

계해 14년 춘 정월 임신에 재추(재상 추상)를 내전에서 향연하였다. 을해에 채충순으로 태자소사를 삼고 서눌로 참지정사를 삼고 곽원으로 중추사를 삼았다. 정축에 유방으로 서북면 행영도통사를 삼았다. 무인에 거란인 초복 등 11호가 내투하였다. 임오에 진함조와 주덕명으로 상서좌우복사를 삼았다. 이 달에 흑수말갈의 오사불 등 80인이 와서 마와 방물을 바치거늘 각각 포백을 사하였다. 2월 무술에 이공으로 서경유수를 삼았다. 병오에 최치원을 추봉하여 문창후라 하였다. 동여진 추장 아로불과 서여진의 나알개가 내투하였다. 3월 정묘에 비서감 유징필을 거란에 보냈다.

 

 하 4월 경자에 거란이 좌산기상시 무백 야율극공 등을 보내와 태자 흠을 책봉하여 보국대장군 검교태사 수태보겸 시중 고려국공으로 삼았다. 이 달에 여진 말갈 군두 등 70여인이 와서 토마를 바쳤다. 5월 병인에 거란의 동경지서사 노지상이 왔다. 을해에 금주에 지진하였는데 처음으로 지진이 일어난 곳에 해괴제를 거행하게 하였다. 정축에 거란 마허저 등 13호가 내투하였다. 무자에 문무참내의 군료들을 천복전에서 향연하고 사람마다 말 한 필씩 사하였다. 임진에 거란의 대세노 제화나 등 8인이 내투하였다. 여진의 이우불이 내투하였다. 6월 무술에 한재로 말미암아 여수하였다. 을사에 천덕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장교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추 7월 계해 삭에 거란이 태보 황신을 보내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기묘에 이부가 주하기를 [전대상재랑 전언이 모상을 추복하여 효로써 알려졌으니 청컨대 차제직을 가하여 장래를 권장하소서]하니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8월 임자에 본궁으로 돌아왔다. 9월 기사에 말갈수령 아령주가 내조하였다. 계유에 구정에서 크게 초제하였다. 병자에 최보성으로 병부상서를 삼았다. 기축에 노전으로 삼사사를 삼았다. 윤월 경자에 거란사신 율수상이 내조하였다. 임인에 거란의 동경사 고인수가 왔다. 동 10월 신미에 이주좌로 시어사를 삼고 황보영으로 전중시어사를 삼고 허원으로 좌습유를 삼았다. 11월 병신에 흑수 추장 야힐라 등이 내조하였다. 송의 천주인 진억이 내투하였다. 12월 정축에 입춘절이므로 재추와 상장군을 건덕전에서 향연하였다. 기묘에 유방으로 태자태보를 삼고 이공으로 내사시랑 평장사 감수국사를 삼고 이원으로 검교태자태보를 삼았다.

 

갑자 15년 춘 정월 갑인 삭에 곽원으로 형부상서를 삼고 유징필로 예부상서를 삼았다. 거란의 마사도 등 3인이 내투하였다. 무술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정사에 경흥원주 김씨를 책하여 덕비라 하였다. 3월 신묘에 이자연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갑오에 서여진의 고두노와 동여진의 슬불달 등 90인이 내투하였다. 신축에 왕희걸로 서경부유수를 삼았다. 하 4월 기묘에 군묘에 비를 빌었다. 임오에 흑수말갈의 고도매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5월 정해에 태사국이 주하기를 [마땅히 일식할 것인데 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계사에 비가 왔다. 봄부터 가뭄이 심하매 백성들이 모여 하늘에 부르짖어 기도하더니 이날 새벽에 왕께서 일어나 그 소리를 듣고 곧 식사를 거두고 목욕재계하고 분향하며 전정에 서서 하늘을 우러러 빌기를 [과인에게 허물이 있거든 청컨대 곧 벌을 나리시고 백성에게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과인이 또한 당하겠사오니 바라건대 은택을 나리사 백성을 구하여 주시옵소서]하더니 크게 비가 내렸다. 경자에 동여진의 회화장군 아알나가 내조하였다.

 

 경술에 예부상서 주저가 졸하였다. 6월 신유에 문하시랑 평장사 최항이 졸하였다. 추 7월 병술 삭에 거란이 검교사도 고수를 보내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임진에 서여진 추장 도라와 동여진의 노을견 등이 와서 말을 바쳤다. 을사에 서눌로 서북면 행영도통을 삼고 곽원으로 그 부(부도통)를 삼았다. 임자에 탐라 추장 주물과 아들 고몰로 모두 운휘대장군 호군을 삼았다. 9월 을미에 김인위로 상서좌복사 참지정사를 삼고 인하여 치사하게 하였다. 갑인에 흑수말갈의 아리고가 왔다. 이 달에 대식국(아라비아제국)의 열라자 등 100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대식국은 서역에 있음) 동 10월 병진에 거란이 검교좌복사 이정윤을 보내왔다. 11월 을유 삭에 태사국이 주하기를 [마땅히 일식할 것인데 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경인에 이공으로 상서좌복사 동내사문하 평장사를 삼았다. 병오에 이가도로 호부상서를 삼았다. 기유에 상주에 지진하였다. 12월 임신에 황주량으로 어사중승을 삼고 최충으로 중추직학사를 삼고 이인택으로 시어사를 삼고 최상여로 전중시어사를 삼았다.

 

을축 16년 춘 정월 경인에 여진회화장군 야고가와 귀덕장군 아골타로 등이 내조하매 각각 작위와 의류를 사하였다. 을미에 유방으로 판상서 병부사를 삼고 채충순으로 판상서 예부사를 삼았다. 정유에 피위종 등 6인을 사하여 복작하게 하였다. 처음에 위종이 병부랑중으로 있었을 때 요외에 순행하다가 거란장군 야율살할의 사냥함을 보고 예빈주부 정민의 등 5인과 더불어 달려가 죽이고 돌아와서 그것으로써 공상을 받을려고 하매 소사가 병사를 함부로 움직여 새에 나갔다는 이유로 원방에 유배하였던 것인데 이에 이르러 방환된 것이다. 신해에 여진 추장 모일라가 내조하매 변경에 공로가 있으므로 대광을 가수고 의물을 우사하였다. 2월 무진에 곽원으로 추성문리공신 상주국을 삼고 이가도로 치성공신을 삼고 김맹으로 선춘현 개국남을 삼고 나민으로 치군문덕공신을 삼고 유소로 동지중추사를 삼았다.

 

 임오에 한식으로써 문무상참 이상관을 내전에서 향연하였다. 3월 기축에 백기가 관일하였다. 경인에 모든 영작을 정지하고 농민들을 방환하였다. 갑인에 연경궁주 김씨가 졸하였다. 하 4월 갑자에 교하기를 [농사가 바야흐로 한참인 때에 가물음이 심하여 백성의 식량이 핍절될까 하노니 나의 소우의 걱정이로다. 마땅히 정전을 피하고 상선을 감하며 도재를 금하고 악현을 거두며 원옥을 심사하고 군망에 기도할 것이다. 이는 오직 과인만이 깊이 책궁해야 할 일이 아니라 모든 백관들도 또한 마땅히 스스로 힘 쓸 지어다]라고 하였다. 신미에 영남도의 광평 하빈 등 10현에 지진하였고 임신 을해에 또 지진하였다. 6월 갑인에 궁인 유씨로 귀비를 삼았다. 기미에 교하기를 [하늘에 본받고 때에 순응한 연후에 가히 재앙을 막고 화평을 이룩할 것이어늘 이제 내사문하성 및 제관사들의 주행하는 바가 시정에 어그러짐이 많으니 음양의 조화를 바람이 어찌 그릇됨이 아닐까. 마땅히 각자가 마음을 다하여 힘써 월령을 지켜 써 나의 듯에 맞도록 하라]고 하였다.

 

추 7월 신사 삭에 거란이 감문위대장군 한순을 보내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을유에 한수량으로 시어사를 삼고 김충찬 유백인으로 모두 전중시어사를 삼고 김석지 한연조 최연가 김영기로 모두 감찰어사를 삼았다. 정해에 경상 청주 안동 밀성에 지진하였다. 정미에 유소로 태자빈객을 삼았다. 9월 신사에 대식만의 하선 나자 등 100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동 11월 기묘 삭에 태사가 주하기를 [마땅히 일식할 것인데 하지 않았다]고 하니 군신이 표축하하였다. 12월 무오에 최충으로 한림학사 내사사인 지제선를 삼았다. 교하기를 [무릇 범죄로 직전을 압수 당한 자에게 사를 입게 하되 진도 및 공사문서를 위조한 자 재물을 받고 법을 굽힌 자 감임하면서 자신이 도둑질한 자 첨곡간아한 자의 범죄를 제한 외에는 다 직전의 환급을 허하라]고 하였다.

 

 

병인 17년 춘 정월 정해에 이단으로 어사대부를 삼았다. 임진에 동여진 귀덕장군 거려울 등이 내조하였다. 2월 계해에 거란이 태빙 이지순을 보내어 내빙하였다. 을축에 백기가 관일하였다. 3월 경인에 최황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하 4월 경오에 지채문으로 우복사를 삼았다. 윤 5월 임자에 동서여진 추장이 각각 부락자제들을 거느리고 와서 토마와 궁노를 바쳤다. 갑자에 거란이 어원판관 야율골타를 보내와 길을 빌려 장차 동북여진으로 가기를 청하거늘 허낙하지 아니하였다. 6월 무인에 이단으로 우상시지중추사를 삼고 황보유의로 어사대부를 삼았다. 추 7월 갑인 삭에 거란이 감문위대장군 왕문간을 보내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정미에 큰 비가 4일간 내리니 경성민가의 표훼된 자가 심히 많았다. 8월 임오에 송 광남인 이문통 등 3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9월 갑자에 해주 신광사에 행차하였다. 동 10월 계유 삭에 일식하였다. 임오에 해주로부터 돌아왔다. 11월에 황주량으로 태자소첨사를 삼고 최제안으로 태자우서자를 삼고 최충으로 태자중윤을 삼았다.

 

정묘 18년 춘 정월 신해에 최사위로 태자태사를 삼고 채충순 이공으로 모두 문하시랑을 삼고 서눌로 내사시랑을 삼고 곽원 이가도로 모두 참지정사를 삼고 이단 김맹으로 모두 중추사를 삼고 양진으로 좌복사를 삼고 최충으로 급사중을 삼았다. 임자에 동여진 추장 창부 등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병인에 문하시랑 유방이 표를 올려 걸해하거늘 허락하고 특진문하시중을 가하였다. 무진에 거란이 이정윤을 보내왔다. 2월 무자에 대묘를 수리하고 다시 신주를 봉안하였다. 갑오에 흑수말갈 귀덕대장군 아골아가가 와서 토마와 기장을 바쳤다. 3월 을묘에 여진 수령 슬불달 등 100인이 내조하였다. 하 4월 갑술에 서리가 내렸다. 임오에 대묘에 배알하고 선왕선후에게 존호를 가상하고 배현경 홍유 복지겸 신숭겸 유검필 최응을 태조에 배향하고 박술희 김견술을 혜종에 배향하고 왕식렴을 정종에 배향하고 유신성 서필을 광종에 배향하고 최지몽 박량유를 경종에 배향하고 최승로 최량 이지백 서희 이몽유를 성종에 배향하고 한언공 김승조 최숙을 목종에 배향하고 유죄 이하를 사하였다.

 

5월 경자 삭에 군망에 비를 빌었다. 갑인에 한재로 정전을 피하고 상선을 감하고 옥수를 소결하였다. 을묘에 두 번째 우제(기우제)를 지냈다. 정사에 공주에 서리가 내려 묘를 살하였다. 경신에 왕자 형을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겸 내사령으로 삼고 서를 개부의동삼사 검교태부겸 상서령으로 삼았다. 병인에 비가 내렸다. 6월 기묘에 황주량으로 형부시랑을 삼고 이주좌로 기거사인을 삼고 허원으로 시어사를 삼고 이유량으로 전중시어사를 삼고 진현석으로 우보궐을 삼고 이응년으로 감찰어사를 삼았다. 계미에 양주가 주하기를 [장의 삼천 청연 등의 사승들이 금을 범하여 양주한 쌀이 합계 360여석이오니 청컨대 의율 단죄하소서]하거늘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갑신에 교하기를 [전 공부시랑 유품렴 등 143인이 비록 첨곡간사의 죄를 범하였으나 이미 누차의 사를 거쳤으니 모두 죄명을 삭제하고 서용할 것이다]고 하였다. 탐라(제주)가 방물을 바쳤다. 신묘에 동여진 추장 모일라 등 20여인이 내조하였다. 추 7월 기해 삭에 거란이 태부 이광일 야율호도곤을 보내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경자에 영광군에서 산호수를 바치니 높이는 8척이요 가지는 81이었다. 계해에 송악이 무너졌다. 8월 무진에 거란의 동경사 고연이 왔다. 정해에 송의 강남인 이문통 등이 와서 서책을 바치니 무릇 597권이었다. 9월 무술 삭에 혜일중광사를 창건할 것을 명하고 인부와 공장을 징발하게 하니 보신 간관들이 모두 주하기를 [백성들이 노폐하니 공사를 이르킴이 적선치 못하오이다]고 하였으나 좌승선 이괴가 홀로 주하기를 [부처님을 위하여 절을 지으면 공덕이 무량한 것이오니 백성들을 수고롭게 한들 무엇이 해로우리까]라고 하였다. 임술에 곽숭원 이능봉이 연고자임으로 모두 장군을 삼았다. 동 10월 임오에 인왕경을 구정에서 강하였다.

무진 19년 춘 정월 무술에 임유간으로 우습유제고겸 동궁시독학사를 삼았다. 이 달에 여진의 귀덕장군 고두 등 70여인이 내조하고 또 골부가 부락 500호를 거느리고 내부하였다. 2월 신미에 검교우복사 김경렴이 졸하였다. 경렴은 큰 글씨 잘 쓰기로 당대에 유명하였다. 갑술에 예부원외랑 김가를 거란의 동경에 보냈다. 정해에 경계(경죄의 옥수)를 방면하였다. 계사에 대부경 김작빈을 거란에 보냈다. 3월 기해에 경계를 방면하였다.

 

 기미에 문덕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정재원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신유에 거란이 장군 야율소와 방주방어사 양연미 등을 보내어 내빙하였다. 이 달에 동여진 귀덕장군 아골이 왔다. 하 4월 신미에 우박이 내렸다. 5월 신축에 여진이 평해군을 침공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는데 적선 4척을 추포하여 모두 죽였다. 6월 기사에 비가 심하므로 군묘에 비 개이기를 빌었다. 윤월 갑인에 북번 추장 아홀 등 57인이 내부하였다. 추 7월 을미에 거란이 심주자사 소경과 박주자사 부용원을 보내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정유에 동여진 쾌발부락 300여호가 내부하였다. 을묘에 왕비 김씨가 붕어하였다. 이 달에 동서여진 추장 이오불 두로개 등 200여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8월에 서북계에 황해가 있었다. 9월 병신에 송의 천주인 이선 등 30여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무신에 좌사랑중 임복을 거란에 보내어 황후의 생신을 축하하였다. 동 10월 계유에 상서우승 정장을 거란에 보내어 사은하였다.

 

 정해에 동여진 적선 15척이 고성에 입구하고 기축에 용진진을 침공하여 중랑장 박흥언 등 70여인이 사로잡혔다. 11월 계묘에 대복경 왕희걸 전중시어사 이유량을 거란에 보내어 생신을 축하하였다. 12월 임진에 동여진 사일라 등이 와서 마를 바쳤다.

기사 20년 춘 정월 계사에 천추태후 황보씨가 숭덕궁에서 붕어하였다. 2월 경진에 궁인 한씨의 부빈경으로 태자빈객 동지중추사 주국을 겸하게 하였다. 정해에 왕의 이름(순)과 상근한 음을 피휘하여 순성을 고쳐 손으로 하였다. 윤월 기해에 여진의 적선 30여척이 동비에 내침하거늘 선병도부서판관 조윤정이 쳐서 쫓아버렸다. 이 달에 동서여진 아홀사 일라골개 등 100여인이 와서 토마와 병기를 바치거늘 작 1급씩을 더하였다. 3월 경오에 오관산이 무너졌다. 경진에 동여진 적선 10소가 명주에 입구하거늘 병마판관 김후가 쳐서 물리쳤다. 하 4월 무술에 왕자 형에게 곡2000석 전 300결 장획(노비) 30구를 사하였다. 경자에 장경도장을 회경전에 설하고 승10000을 구정에서 공양하였다. 경술에 거란이 대장군 야율연 영해북주자사 장령의를 보내어 내빙하였다. 거란인 조기이 가족을 거느리고 내분하여 왔다.

 

 을묘에 왕이 대묘의 변두를 증설할 것을 의논할새 예부가 왕제의 [풍년에 사치하지 않고 흉년에 검약하지 않는다.]는 뜻에 의거하여 굳이 불가하다 하므로 이를 중지하였다. 5월 을축에 동여진 400여인이 동산현에 침구하였다. 6월 계축에 탐라세자 고오노가 내조하거늘 유격장군을 제수하고 포 1습을 사하였다. 광주 산수에 도적이 일어났으므로 을묘에 용호군 장교를 보내어 잡게 하였다. 병진에 유처승을 징발하여 중광사 역도에 충당하였다. 추 7월 무오 삭에 거란이 장군 야율관녕과 숭록소경 이가봉을 보내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탐라가 방물을 바쳤다. 문희현에서 수정과 옥박 40000여매가 나왔다. 을유에 탐라인 정일 등이 일본으로부터 돌아왔다. 처음 정일 등 21인이 항해중 바람에 밀리어 동남 극원도에 표착하니 도인들은 장대하고 전신에 털이 나고 언어가 다른데 7개월동안 억류를 당하였다. 정일 등 7인이 가만히 소선을 타고 동북으로 일본 나사부(장기)에 이르렀다가 이에 생환하게 된 것이다. 8월 정해 삭에 일식하였다. 을미에 동여진 대상 쾌발이 그 족속 300여호를 거느리고 내투하거늘 발해의 고성지를 주어 살게 하였다.

 

기해에 송 광남인 장문보 등 8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계묘에 왕이 서으로 순행할새 경술에 평주에 이르고 갑인에 백주에 이르렀다. 이 달에 개경 나성이 이룩되니 무릇 21연만에 준공하였다. 9월 무오에 거란의 동경장군 대연림이 대부승 고길덕을 보내와 건국을 고하고 겸하여 구원을 청하였다. 연림은 발해 시조 대조영의 7대손으로서 거란에 배반하여 국호를 흥료라 하고 건원하여 천흥이라고 하였다. 갑자에 염주로 옮겨 행차할새 노상에서 중양영국시 1수를 지어 한림학사 이하에게 선시하고 곧 화진토록 하였다. 정묘에 드디어 해주에 행차할새 지나는 바 주 현의 기노(60이상의 노인)와 독질자에게 주식 포화를 사하되 차등있게 하고 장리에게는 직 1급을 가하였다. 을해에 교하기를 [근간 들으매 궁원 소속의 장호에 요역이 번중하여 백성들이 살아갈 수 없다 하니 전중성은 조사하여 구휼하라]하였다. 정축에 호종문무상참관 이상에게 향연하고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동 10월 갑오에 왕이 해주로부터 돌아왔다. 11월 경신에 박종검을 예빈경좌간의대부로 삼았다. 병인에 개경라성 및 중광사조성도감원리에게 직 1급을 사하였다.

 

 평장사 서눌로 판서경유수사를 삼고 상서좌복사 이단으로 서경유수사를 삼고 황주량으로 국자제주 한림학사를 삼고 최충으로 우간의대부를 삼고 이작충으로 급사중을 삼았다. 정묘에 이가도로 검교대위행이부상서겸 태자소사 참지정사를 삼았다. 무진에 형부상서 참지정사 곽원이 졸하였다. 경오에 광종의 궁인 김씨에게 현비를 증하였다. 갑신에 동여진의 구두 등 30여인이 내조하였다. 12월 경인에 뇌진하였다. 흥료국 대사 대연정이 동북여진을 끌고 거란과 서로 싸울새 사자를 보내 구수을 빌거늘 왕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더니 이로부터 길이 막혀 거란과 통하지 못하게 되었다. 임진에 서북면 판병마사 유소를 명하여 진에 나아가 써 흥료에 대비하게 하였다.

 

경오 21년 춘 정월 정사에 동여진 오을나 등 50인이 와서 마를 바쳤다. 병인에 흥료국이 또 수부원외랑 고길덕을 보내어 상표하고 군사를 청하였다. 2월 병술에 채충순으로 판서경유수사를 삼고 이작인으로 참지정사를 삼고 유소로 중추사를 삼았다. 갑오에 교주 익령동산현에 지진하였다. 을미에 동여진의 모일라가 와서 토마를 바쳤다. 신축에 적경궁주가 졸하거늘 익을 효혜라 하고 평릉에 장사지냈다. 3월 계유에 곽신으로 우승선을 삼고 최연수로 고공랑중겸 어사잡단을 삼고 유운으로 시어사를 삼았다. 하 4월 을유에 교하기를 [상년 12월이 송력에는 대진(30일)이 되어 있는데 아국태사의 올린 역에는 소진(29일)이 되어 있고 또 금년 정월 15일에는 주하기를 일식하리라고 하였는데 마침내 하지 않았다. 이는 반드시 술가가 미정한 소치이니 어사대는 추국하여 아뢰도록 하라]고 하였다. 무자에 동여진의 만투 등 60여인이 와서 과선 4소와 고시 117600개를 바쳤다. 갑오에 문덕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최유선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기해에 철리국주 나사가 여진 계타한 등을 보내와 초서피를 바치고 역일을 청하거늘 이를 허락하였다.

 

5월 갑인에 김맹으로 태자소부를 삼고 유징필로 태자빈객을 삼고 황주량으로 태자우서자를 삼고 최충으로 태자우론덕을 삼았다. 을묘에 동여진 봉국대장군 소물개 등이 와서 마 9필 과선 3소 고시 58600개와 기장을 바쳤다. 을축에 거란의 수군지휘사 호기위 대도 이경 등 6인이 내투하니 이로부터 거란 발해인의 내투함이 심히 많아졌다. 신미에 강감찬에게 문하시중을 가하였다. 6월 신묘에 수사 2죄를 특사하여 먼 곳에 유배하고 그 나머지는 다 면죄하게 하였다. 나성을 쌓고 중광사를 경영한 원리 승속공장에게는 모두 관계 직위를 가하고 부역자에게는 금년의 조포를 감하고 모든 주 군 현의 포흠된 세금은 무진년에 한해서 면제하게 하고 인주 위원 정융진에 성을 쌓은 자 및 서순에 호종하여 공로가 있는 자에게는 차제직을 가하고 백신 에게는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추 7월 갑자에 적경공주가 졸하였다. 을축에 흥료국 행영도부서 유충정이 영주자사 대경한을 보내어 표문을 가지고 와 수조를 빌었다. 기사에 송의 천주인 노준 등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무인에 내사시랑 진함조가 졸하였다. 함조는 술수를 닦아 매양 국가 유사시에는 문득 도참으로써 질정하여 드디어 대용에 이르렀으므로 시론이 이를 경히 여겼다. 8월 무신에 왕가도로 내사시랑 판삼사사를 삼고 이주좌로 어사중승을 삼았다. 9월 신해 삭에 탐라가 방물을 바쳤다. 병진에 흥료국 영주자사 이광록이 와서 급함을 고하였는데 이윽고 나라가 멸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드디어 머물러 돌아가지 아니하였다. 갑술에 김가를 거란에 보내어 동경의 수복을 축하하였다. 을해에 거란이 천우장군 나한노를 보내오니 조에 말하기를 [요사이 사인들이 왕래하지 않음은 응당 길이 막힌 까닭이리라. 이제는 발해의 투주(위주)가 다 위폐를 당하여 이미 귀강하였으니 마땅히 배신을 보내어 속히 부국케 하면 반드시 염려는 없으리라]고 하였다.

 

동 10월 신사 삭에 한조를 지서경유수사로 삼았다. 이 달에 거란의 해가와 발해인 500인이 내투하거늘 강남주군에 살게 하였다. 11월 을축에 서여진의 만투 등 27호가 내부하거늘 동계에 살게 하였다. 계유에 어사잡단 최연수가 탄주하기를 [참지정사 이작인이 태조공신의 후예라고 사칭하고 그 아들에게 음직을 내리게 하였으니 관직을 파면시키소서]라고 하였다. 12월 신묘에 서눌로 문하시랑 동평장사 판상서 이부사를 삼았다. 정유에 중추사 김맹이 졸하였다. 계묘에 최제안으로 중추사를 삼고 황주량으로 중추부사를 삼았다. 이 달에 동여진 영새장군 목사아골 유원장군 알나 귀덕장군 아개주가 와서 마 및 철갑 호시를 바쳤다. 경성에 역질이 돌아 사람이 많이 죽었다.

 

신미 22년 춘 정월 신유에 동여진의 이우불이 와서 마 및 기장을 바쳤다. 을해에 적전을 친경하고 유죄 이하를 사하고 원구와 방택에 승단집례하는 이원 및 효자 순손 의부 절부 기노 독질자에게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병자에 좌복사 양진으로 동경유수사를 삼았다. 2월 기묘에 문무상참관 이상을 문덕전에서 향연하였다. 기축에 왕자 기를 수태위겸 상서령 개성국공으로 책봉하였다. 이 달에 동서여진 80여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3월 갑인에 궁인 한씨로 상궁을 삼고 김씨로 상침을 함고 한씨로 상식을 삼고 서씨로 상침을 삼았다. 이 달에 여진의 사일라 등 40여인이 와서 토마를 바쳤다.

 

 거란 발해민 40여인이 내투하였다. 하 4월 정해에 서리가 내렸다. 무자에 군망에 비를 빌었다. 을사에 왕이 불예하였다. 좌복사 이단으로 참지정사를 삼았다. 5월 임자에 유소로 이부상서 참지정사를 삼고 황보유의로 중추사를 삼았다. 정사에 최사위로 내사령을 삼아 인하여 치사하게 하고 이공으로 사공좌복사 판동경유수사를 삼았다. 무오에 공죄로서의 도형 이하를 사하였다. 정묘에 왕림으로 검교우복사 나주목사를 삼았다. 신미에 왕의 병환이 위독하매 태자 흠을 불러 후사를 부탁하고 이윽고 중광전에서 붕어하니 수가 40이요 재위 22년이었다. 왕이 어려서 총오 인혜하더니 장성함에 미쳐 학문에 민첩하고 서도에 정묘하고 사한을 좋아하여 무릇 한 번 듣고 본 것은 다시 잊지 않았다. 시호를 원문이라 하고 묘호를 현종이라 하고 송악의 서록에 장하여 능을 선릉이라 하였다. 문종 10년 시호를 대효라 가하고 인종 18년 덕위를 가하고 고종 40년 달사를 가하였다.

 

사신 최충이 찬하기를 [전에 일컫기를 하늘이 장차 일어나게 함에 뉘 능히 이것을 폐하리요라 하였거니와 천추태후가 제마음대로 음황하여 가만이 경탈을 도모하매 목종께서 백성의 촉망을 알아차려 천추의 악당을 배제하고 멀리 사명을 달려 써 신기를 전수하여 근본과 기엽을 굳게 하였으니 이른바 하늘이 장차 일어나게 함에 뉘 능히 이것을 폐하리요 라는 말을 어찌 믿지 아니하랴. 그러나 고모의 끼친 화근으로 말미암아 융신(강조)이 반역을 꾸미고 강린이 틈을 타게 되매 경궐이 다 재가 되고 승여가 파천하여 간난비운이 극도에 달하였도다. 반정한 후에 융장과 화호하여 병혁을 쉬고 문덕을 닦으며 부세를 엷게 하고 요역을 가볍게 하며 준량한 인재를 등용하고 정사를 수행함이 공평하여 백성을 안도하게 하니 내외가 안정되고 농상이 자주 등풍하여 주의 성왕 강왕과 한의 문제 경제에 비하여도 또한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제현이 말하기를 [최충의 말은 세상에서 이른바 천명이라 하는 것이다. 구천 은 상담하여 회계의 치욕을 씻었고 소백은 거의 고난을 잊었기 때문에 화를 제인에게 남기었다. 인군이 천명 만 믿고 욕심을 함부로 하고 법도를 어기면 비록 얻었을지라도 반드시 잃는 것이니 이러므로 군자는 치세에도 난을 생각하고 평안할 때에도 위태함을 생각하며 끝을 조심함을 처음과 같이하여 써 천휴를 기다리는 것이니 현종과 같은 이는 이른바 나는 간연함이 없다하리라]고 하였다. 

 


 

제9대 덕종 (德宗 재위1031~1034 재위3년)

  

덕종 경강대왕의 휘는 흠요 자는 원량이니 현종의 장자로 어머니는 원성태후 김씨이다.

 

현종 7년 병진 5월 을사에 탄생하여 21년 연경군에 피봉되고 13년 태자가 되었으며 명년에 거란이 고려국공으로 책봉하고 22년 5월 신미에 현종이 붕어하니 중광전에서 즉위하여 익실(翼室 본채의 좌우 양편에 달린 방)기거하면서 조석으로 애임하다가 갑술에 군신을 거느리고 성복하였다. 6월 정축 삭에 서눌로 검교태사를 삼았다. 기묘에 강감찬으로 검교태사시중을 삼았다. 을유에 서여진 영새대장군 아지대 등 27인이 와서 양마를 바쳤다. 을미에 동여진장군 대완 사이라 등 58인이 와서 양마를 바쳤다. 철리국주 무나사가 약오자 등을 보내와 초서피를 바쳤다. 송의 태주 상객 진유지 등 64인이 왔다.

 

병신에 현종을 선릉에 장사지냈다. 무술에 왕이 복을 벗었다. 경자에 경령전에 알견하고 즉위함을 고하였다. 계묘에 신봉루에 거동하여 계간을 구정에 걸고 사를 베풀었다. 추 7월 무신에 보신에게 제도의 진상마를 사하였다. 기유에 유소로 중군병마원사를 삼았다. 경술에 장극맹으로 병부상서를 삼고 홍빈으로 형부상서를 삼고 이유섬으로 공부상서를 삼고 김종현으로 우간의대부를 삼고 황보영으로 어사잡단을 삼고 문사명으로 전중시어사를 삼고 손위로 전중승을 삼고 박의부로 감찰어사를 삼았다. 기미에 거란 보애사 공부랑중 남승안이 와서 성종의 죽음을 보고하거늘 조를 현종의 반혼당에서 선포하였다. 신유에 왕이 거란의 보애사를 인접하여 내전에서 거애하였다.

 

병인에 정유원으로 시어사를 삼았다. 정유에 발해의 감문군대도 행랑 등 14인이 내투하였다. 기사에 발해제군판관 고진상 공목 왕광록이 거란으로부터 첩문을 가지고 내투하였다. 거란의 하선왕생신사 야율온덕 조상현이 오매 임신에 반혼당에 전명하였다. 8월 정축에 동여진장군 고어부 등 30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갑신에 제하기를 여진장군 아두한 등 340호가 내투하매 가 철 2주의 땅에 늑유하였으나 아두한은 본래 동번자 항사의 족속이니 마땅히 동번에 견치할지어다]라고 하였다. 임진에 왕가도가 비를 맞이할 것을 청하였다. 계사에 이단으로 좌복사 참지정사를 삼았다. 을미에 시중으로 치사한 강감찬이 졸하였다. 신축에 검교태보 박눌암과 좌복사 주덕명이 졸하매 하룻동안 철조하였다. 9월 병오 삭에 외제역원에 행차하였다.

 

 기유에 황보영으로 어사중승을 삼고 김영기로 시어사를 삼고 이자연으로 우보궐을 삼아 비어를 사하고 문재선으로 전중시어사를 삼고 이경응으로 감찰어사를 삼아 금어를 사하였다. 경술에 노전으로 호부상서를 삼고 민가거로 공부상서를 삼고 허원으로 내사사인을 삼았다. 병진에 진현석으로 어사잡단을 삼았다. 동여진 회화장군 오어나 개로 등 67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병인에 밀직학사 비서소감 박유인으로 권지좌승선을 삼았다. 기사에 비를 추존하여 왕태후로 삼았다. 신미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동 10월 을해 삭에 서눌로 문하시중을 삼고 왕가도 유소로 모두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를 삼았다. 정축에 거란의 왕수남 등 19인이 내투하거늘 남지에 살게 하였다. 무인에 재보가 상선회복을 표청하거늘 허락하였다.

 

경진에 국노를 구정에서 향연할제 악기는 달기만하고 주악은 하지 않았다. 신사에 왕가도의 여를 맞이하여 비를 삼았다. 공부랑중 유교를 거란에 보내어 회장하게 하고 낭중 김행공은 즉위를 하하게 하고 압록강의 성교를 헐고 피유된 우리 사신들을 돌려 보내도록 표청하였다. 을유에 동여진 원보 개로 등 46인이 내조하거늘 작을 더하고 물을 사하였다. 헌대가 주하기를 [상서좌복사판동경유수사 이공이 재물을 횡감하고 또 가노로 하여금 역마를 차승하였으니 법대로 논단하소서]하거늘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정유에 구정에 행차하여 승 3만을 공양하였다. 계묘에 좌복사 이응보에게 수사도를 가하고 우복사 김여탁에게 수사공을 가하였다. 윤월 기유에 비로소 국간감시를 설하였다. 기미에 외제역원에 행차하였다. 임술에 용흥사에 행차하였다. 갑자에 왕씨를 봉하여 현비로 삼았다. 11월 을해에 동경유수사 호부상서 이작인이 졸하였다. 경인에 유사에게 명하여 제국 내투인에게 의복과 면서를 사하였다. 임인에 동여진장군 모이라가 와서 마를 바치고 또 말하기를 [번지가 벽원하여 회장에 불내하였으니 원컨대 능침을 배알케하여 주소서]하거늘 허락하였다. 계사에 동여진 오두내 등 40여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신축에 김행공이 회보하기를 [거란이 우리의 주한 바를 쫓지 아니하나이다]고 하거늘 드디어 하정사를 정지하고 성종의 태평년호를 그대로 썼다.

 

임신 원년 춘 정월 신사에 어사대가 탄핵하기를 [대부경 왕희걸 우사랑중 유백인 예부랑중 최복규 원외랑 이응년이 서경에 분사하여 전지를 구하고 재화를 증식하니 청컨대 출면하소서]하거늘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갑신에 임유간으로 우승선이부랑중을 삼고 김자를 사하였다. 을유에 거란의 유류사가 내원성에 오거늘 받아들이지 않고 드디어 삭주 영인진 파천 등 현에 성을 쌓아 이에 대비하였다. 정해에 외제역원에 행차하였다. 기축에 왕의 생일인 인수절을 고쳐 응천절이라고 하였다. 정유에 서여진 자곤 등 8인이 내투하였다. 무술에 제하기를 [좌복사 이응보에게 사도를 가하고 우복사 김여탁에게 사공을 가하니 그 반열이 참지정사의 하요 중추사의 상에 있는지라 아울러 봉록을 가하라]고 하였다. 발해의 사지 명동 등 28인이 내투하였다. 2월 임인 삭에 통주의 진위부위 호장 김거와 별장 수견은 경술(연) 거란병의 내침에 당하여 견벽고수하였고 또 그 대부 마수를 사로잡았으므로 김거에게는 낭장을 가하고 수견에게는 낭장을 증하였다. 정미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무신에 발해의 사통 등 18인이 내투하였다. 철리국이 사신을 보내와 수호하였다. 임자에 황보유의로 참지정사를 삼고 황주량으로 중추사를 삼았다. 을묘에 연등으로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3월 임신 삭에 백가이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계유에 거란의 전직 고선오와 전전 고진성 등 15인과 좌상도지휘사 대광 보주회화군사판관 최운부 향공진사 이운형 등이 내분하였다. 을해에 박유인으로 한림학사를 삼고 임유간으로 어사잡단을 삼았다. 계사에 왕가도로 감수국사를 삼고 이단으로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를 삼고 황주량으로 수국사를 삼고 유징필로 상서좌복사를 삼고 나민으로 예부상서를 삼았다. 갑오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무술에 경술년 이래 전사자의 공을 논하여 반희악에게 소부감을 김연경에게 군기감을 전인영에게 예빈소경을 유백부에게 위위소경을 김양좌에게 소부소감을 양백에게 전중승을 증하였다.

 

경자에 한재로 말미암아 봉은 중광 양사의 역부들을 놓아 보냈다. 하 4월 임인 삭에 정전을 피하고 상선을 멸하고 도살을 금하고 경계죄인을 역방하였다. 정미에 동여진의 원윤 고두로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무신에 거란 해가의 내을고 등 28인이 내투하였다. 신유에 친히 구정에서 초제를 행하고 비를 빌었다. 5월 임신에 양음으로 응천절 축하를 정지하였다. 정축에 발해의 살오덕 등 15인이 내투하였다. 계미에 상선을 회복하고 정전에 거동하여 조회를 보았다. 정유에 왕이 황고의 휘진도장으로 현화사에 행차하였다. 6월 신축에 왕이 태조의 휘진도장으로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병오에 경복이므로 써 경죄를 역방하였다. 기유에 서여진 회화장군 이동 등 8인이 내조하거늘 작1급을 더하였다. 신해에 발해의 우음약기 등 12인이 내투하였다. 임자에 동여진 귀덕장군 야어포 등 8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갑인에 왕이 보살계를 응건전에서 받았다. 을묘에 발해의 소을사 등 17인이 내투하였다. 추 7월 임신에 이예균 등 8인이 거란에 사행하였다가 피유되어 돌아오지 못하였으므로 그 처자에게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을해에 서여진 대상) 야반 등 25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정축에 동여진 정조 가이로 회화장군 야반 귀덕장군 개로 원보 고도화 등 91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경인에 왕이 황비의 휘진이므로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병신에 발해의 고성 등 20인이 내투하였다. 무술에 김종현으로 우산기상시를 삼았다. 8월 임인에 대상 주오가 어미를 구타하였으므로 기시(시장에서 죽이는 것)하였다. 경술에 유종으로 좌산기상시를 삼고 황보영으로 상서우승 지어사대사를 삼고 진현석으로 어사중승을 삼았다. 계축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을묘에 동여진 정보 두어보 등 2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정사에 이단으로 평장사를 삼고 황보유의로 이부상서 참지정사를 삼았다. 무오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여 승 법경으로 국사를 삼았다. 경신에 동여진의 보윤 대유 등 3인이 내조하였다. 9월 계유에 동여진 대상 야을한 등 30인이 내조하였다. 병자에 내외죄인를 심사하여 도죄(노역의 형) 이하를 역방하였다. 경인에 동여진 봉국대장군 요을내 등 50인이 내조하였다. 을미에 외제역원에 행차하였다. 동 10월 병오에 발해 압사관 이남송 등 10인이 내분하였다. 신해에 상주계 10여현에 지진하였다. 임자에 거란 주부 유신사 등 5인이 내분하였다. 병인에 거란의 제을남 등 10인이 내분하였다. 11월 병자에 우릉(울능)성주가 그 아들 부어잉다랑을 보내와 토물을 바쳤다. 서여진 정조 대포 고지문 등 14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12월 신축에 이작충으로 좌간의대부를 삼고 노우 박양명으로 감찰어사를 삼았다. 갑진에 거란의 나골 등 10인이 내투하였다.

 

계유 2년 춘 정월 신미에 동여진장군 개다한 등 25인이 내조하였다. 철리국이 사자를 보내와 양마 초서피를 바치거늘 왕이 갸륵하다하여 회사함을 심히 후하게 하였다. 을해에 송의 유수금 등 14인이 내분하였다. 기묘에 황주량으로 판어사대사를 삼고 최충으로 우산기상시를 삼고 민가거로 예부상서를 삼고 유종으로 공부상서를 삼고 이주좌로 우간의대부를 삼았다. 신사에 동여진장군 보기 아어내 등 113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정해에 예부상서 나민이 표를 올려 퇴관을 빌었다. 을미에 거란의 구내 등 18인이 내분하였다. 좌우위맹교위 오행 이황 신선입 등이 거란의 병사 7인을 초략하였으므로 직1급씩을 사하였다. 2월 임인에 서여진의 지인 고음파 및 거란의 대사 고성환 등 11인이 와서 토물과 병장을 바쳤다. 기유에 동여진 회화장군 거어울 등 49인이 내조하였다. 을묘에 김충찬으로 예빈경지중추원사를 삼았다.

 

3월 신미에 서여진 장군 이우불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해적이 간성현 백석포에 침구하매 50인을 사로잡아 바쳐왔다. 최희목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거란 해가의 고요 등 11인이 내투하거늘 강남에 살게 하였다. 하 4월 무술에 발해 수을분 등 18인이 내투하였다. 기해에 동여진 귀덕장군 고어부 등 26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무오에 발해 가수 등 3인이 내투하였다. 임술에 해적이 삼척현에 침구하거늘 40여인을 사로잡았다. 5월 무자에 서여진 정위사어하 등 3인이 내조하였다. 계사에 발해 감문대정 기질화 등 19인이 내투하였다. 6월 신축에 발해 선송 등 7인이 내투하였다. 임인에 안동부 합주에 지진하였다. 갑진에 서여진 회화대장군 거이라 등 24인이 내조하였다. 송의 신유 등 12인이 내분하였다. 병진에 동여진 대상 고 지문 등 41인이 내조하였다. 임술에 서여진 중윤 고사 등 6인이 내투하고 고모한 등 25인은 와서 방물을 바쳤다. 추 7월 임진에 동여진 좌윤 아포 등 43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8월 갑오 삭에 송의 천주상 도강 임애 등 55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무오에 현종을 대묘에 부제하였다. 평장사 유소에 명하여 북경에 관성을 창치하게 하였다. 9월 계해 삭에 날빛이 혜성과 같았다.

 

유종으로 병부상서를 삼고 한빈경으로 공부상서를 삼고 임유간으로 어사중승을 삼고 이자연으로 이부랑중 어사잡단 우승선을 삼고 염현으로 우보궐을 삼고 이유도로 감찰어사를 삼았다. 동 10월 계사에 동여진 귀덕장군 요빈과 유원장군 고지문 등 37인이 내조하였다. 기해에 서여진 대사(여진 추장의 직) 아각팔 등 14인과 동여진 원보 오두나 등 63인이 내조하였다. 황주량으로 호부상서를 삼고 민가거로 형부상서를 삼았다. 갑진에 선대의 공신 최응에게 사도를 유신성에게 태부를 최승노에게 대광을 최량에게 3중대광을 서희에게 태사를 이지백에게 대광을 이몽유에게 사공을 한언공에게 태부를 김승조에게 사공을 최숙에게 태사를 강감찬에게 대승을 최항에게 정광을 증가하였다. 정미에 거란이 정주(평북의주)를 침범하였다.

 

기유에 교하기를 [짐이 망녕되게 선조의 업을 이어 받아 3한을 통어하매 뜻은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평안하게 함에 돈독하고 마음은 선조를 받들고 효도를 생각함에 간절하다. 이제 협향(선조의 합동향*)의 해를 당하여 잘 친행의 예를 갖추었다 수은을 널리 베풀어서 내외가 즐거움을 같이 하고자 하노니 국내에 대사하되 불충 불효 수회 간도는 제외하고 유죄 이하는 다 사하고 참죄 교죄는 유인도에 유배하고 일찍 유죄에 처해 있는 자는 재량하여 옮기고 수속자는 면방하라]하였다. 11월 계해 삭에 원영으로 서경부유수 지분사호부사를 삼았다. 신묘에 서여진 우화 등 156인이 관성을 개척할 때에 모두 공노가 있었으므로 작1급씩 가하였다. 12월 신축에 서여진 보윤 보실 등 39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갑진에 문사명 문재선으로 시어사를 삼고 이신으로 전중시어사를 삼고 임사행으로 감찰어사를 삼았다. 계축에 발해 기질화 등 11인이 내투하거늘 남지에 살게 하였다.

 

갑술 3년 춘 정월 정묘에 왕의 자씨를 책하여 연경궁장공주를 삼았다. 신미에 교하기를 [검약절용함은 민생을 풍족하게 하는 길인즉 상의국에게 어의를 염색하는 홍지초를 1연간 지용할 것만을 계정하고 그 외에는 더 많이 취하지 말라]고 하였다. 병술에 동여진 정조 다노한 등 58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정해에 황주량으로 정당문학 판한림원사를 삼았다. 무자에 황보영으로 중추부사를 삼고 임유간으로 한림시강학사를 삼았다. 2월 임진 삭에 동여진 유원대장군 주달 등 36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기해에 경흥원 장녀 김씨를 맞이하여 후를 삼았다. 동여진 좌윤 아도한 등 42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3월 정축에 김정으로 공부상서를 삼고 장극맹으로 상서우복야를 삼고 이유섬으로 병부상서를 삼고 이작충으로 어사대부지한림원사를 삼고 이주좌로 국자제주 좌간의대부를 삼고 진현석으로 중추직학사 지제고를 삼고 노우로 전중시어사를 삼고 김원정 김경화 박정고로 모두 감찰어사를 삼았다. 무인에 동여진 봉국장군 아도한 등 32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경진에 교하기를 [농상은 의식의 근본이니 제도 주 현의 관리들은 힘써 조지(정부의 *지)에 따라 3시(춘하추)를 빼앗는 일이 없도록 하어 써 만성을 편안하게 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정해에 군신을 문덕전에서 향연하였다. 하 4월 병신에 동여진 회화장군 이라 등 25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기유에 이단에게 추충좌리공신 상주국을 사하였다. 5월 경신 삭에 동여진 귀덕장군 골보 등 27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정축에 문하시랑 평장사 왕가도가 졸하였다. 갑신에 한림학사 박유인으로 평양군문학을 삼고 중추원직학사 진현석으로 낙랑군문학을 삼았다. 병술에 최보성으로 상서좌복사를 삼았다. 6월 기축 삭에 황성 주작문랑옥에 벼락쳤다. 임진에 동여진 영새장군 이구도 등 3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추 7월 경인에 서여진 원윤 모오 등 22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병신에 이단으로 문하시랑 평장사를 삼고 민가거와 유징필로 상서좌우복사를 삼고 김정으로 병부상서를 삼고 장윤함과 임간으로 모두 공부상서를 삼았다.

 

신해에 황보유의로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를 삼고 황주량으로 이부상서를 삼고 최제안으로 호부상서를 삼고 유지성 으로 예부상서를 삼았다. 임자에 원태진으로 시어사를 삼았다. 계축에 최충으로 형부상서 중추사를 삼고 김충찬으로 우산기상시를 삼았다. 9월 계묘에 왕의 병이 중하매 고명하기를 [짐의 병이 낫지 않고 이미 위경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애제 평양군 형으로 보위를 계승토록 하라]고 하고 드디어 연영전에서 붕어하니 선덕전에 빈소를 모셨다. 재위 3년이요 수는 19이었다. 왕은 나서부터 숙성하여 집성이 강직과단하였고 이미 장성하매 벽돌을 밟으면 문득 깨어지니 사람들이 덕이 무거운 까닭이라고 하였다.

 

 시호를 경강이라 하고 묘호를 덕종이라 하며 북교에 장사지내니 능을 숙릉이라 하였다. 문종 10년 시호를 선효라 가하고 인종 18년 강명을 가하고 고종 40년 광장을 가하였다.

이제현이 찬하기를 [경릉(충열왕 능호)조에 두타산인 이승휴가 선진한 제왕운기에 덕이 어찌 4년만 그쳤는지 봉오도 와서 상서을 나타냈도다고 한 것이 보인다. 그러나 실록을 상고하건대 그런 기사는 보이지 않고 다만 속담에 서로 전해 말하기를 봉오가 위봉문에 와서 용의를 보이매 군오가 따라 지저귀니 봉이 날아간지라 국인이 가마귀를 미워하여 소년과 장년들이 활을 가지고 쏘았던 바 덕종 1대에는 경성에 가마귀가 없어졌다고 한다.

 

대저 봉이란 우족의 장이어늘 군오에게 쫓긴바 되었으니 어찌 봉이라 하리오. 대개 운기의 말은 근거없는 것이다. 덕종이 상에 거하매 능히 아들된 효성을 극진히 하였고 정치를 하매 부도를 고치지 아니하여 구신 서눌 왕가도 최충 황주량과 같은 이를 임용하니 조정에는 기만은폐함이 없고 백성은 그 생을 편안하게 하였도다. 비록 봉오가 아니라 하더라도 존호를 덕이라 함이 또한 마땅하지 아니한가]라고 하였다.


 

제10대 정종 (靖宗 1034~1046 재위12년)

  

정종 홍효안의강헌용혜대왕의 휘는 형이요 자는 신조이니 덕종의 동복형제로 현종 9년 7월 무인 탄생하였다 숙성하고 명민하여 5세에 내사령 평양군에 봉케 되었으며 덕종 3년 9월 계묘에 고명을 받아 중광전에서 즉위하였다

 

동 10월 정사 삭에 대묘에 삭을 고하였다. 경오에 덕종을 숙릉에 장사지냈다. 보신을 보내어 서경에 팔관회를 베풀고 2일간 크게 잔치하였다. 12월 경인에 신봉루에 거동하여 크게 사하고 중외군신들의 하례를 받았다. 송의 상객과 동서번과 탐라국이 각기 방물을 바쳤다. 경자에 팔관회를 설하고 신봉루에 거동하여 백관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저녁에는 법왕사에 행차하였다가 익일의 대회에 또한 잔치를 베풀고 관락하니 동서 2경 동북양로의 병마사 4도호 8목이 각기 표를 올려 진하하였으며 송의 상객과 동서번과 탐라국도 또한 방물을 바치매 좌석을 사하여 관례하게 하니 이후로는 상례로 삼았다.

 

 10월 기사에 왕제 서로 수태사겸 내사령을 삼고 기(왕제)로 수태보를 삼고 황주량으로 예부상서 참지정사를 삼고 최제안으로 이부상서를 삼고 유지성으로 공부상서를 삼고 이진으로 호부상서를 삼고 곽신으로 전중감을 삼고 금령기로 어사중승을 삼고 김충찬과 이작충으로 좌우산기상시를 삼았다.

 

을해 원년 춘 정월 병술 삭에 조하를 쉬었다. 임인에 최충으로 중추사형부상서를 삼았다. 동여진 회화장군 모이라 등 57인이 내조하니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정미에 유창으로 전중승을 삼고 유운으로 기거랑을 삼고 김연준으로 전중시어사를 삼고 정배걸과 김현으로 좌우습유지제고를 삼고 풍순지로 감찰어사를 삼았다.

 

신해에 왕자가 연흥궁에서 탄생하니 이름을 동이라고 사하였다. 2월 기유에 서여진 추장 가아고 등 12인이 내조 하였다. 신사에 동여진의 봉국장군 고지문 등 35인이 내조 하였다. 3월 을유에 이단으로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를 삼고 황보유의로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를 삼았다. 병술에 김무체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 계묘에 연흥궁주 한씨를 책봉하여 혜비로 삼고 익일에 도죄 이하를 사하였다. 하 4월 갑인에 국로로서 80세 이상 남녀를 구정에서 친히 향연하였다. 정사에 예부가 주하기를 [경성의 명산에는 초채를 금하고 두루 수목을 심게 하소서]하니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5월 갑진에 천상에 비개이기를 빌었다. 거란의 내원성사 검교우산기상시 안서가 흥화진에 통첩하기를 [사사로이 생각컨대 당군은 가장 귀국에 가까우므로 조금이라도 편의한 일이 있으면 곧 알려 드렸던 것입니다 생각컨대 귀국은 원래 부용국이라 선제께서 매양 우대함을 베풀었으므로 적년간에 조공함을 게을리 하지 않더니 지난번 벌죄한 해를 계기로하여 내정의 예가 막혀졌습니다.

 

 이미 흉역이 제거되었으니 마땅히 공수를 계속하여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수년이 넘도록 구호를 계속하지 않고 석성을 쌓아 대로를 차단하려 하고 목채를 세워 기병을 방해하고자 합니까 촉나라 가운데 따로이 석우의 길이 있음을 알지 못하시는지 이렇고야 금후 깊이 질책을 당하리다. 이제 황상께서 열성의 기업을 계승하여 8방의 국계를 통합하매 남하의 제왕이 길이 의를 사모하여 교환을 통하고 서토의 제왕들이 길이 풍화를 향모하여 성의를 바치는데 오직 홀로 동명의 지역만이 북극의 존전에 내빈하지 않으니 혹시 뇌정같은 격노에 부딪치게 되면 어찌 백성들을 안녕하게 하리오. 바라건대 이 뜻을 어기느냐 또는 쫓느냐 하는 것은 스스로 변통이 있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6월 병진에 경성에 지진하였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계해에 치사한 형연기로 검교상서 우복사를 삼고 이징좌로 상서병부시랑을 삼으니 노인을 우대함을 보인 것이다. 신미에 동여진 오어고 등 27인이 내조하였다. 이 달에 영덕진이 거란 내원성에 회첩하기를 [사사로히 생각컨대 공문이 이에 이르니 친절하심을 잘 알겠나이다마는 책유가 매우 많으므로 모름지기 상세히 해명하여야 할 것이오나 생략하여 요지만을 말하고 다변에 이르지 않도록 하겠나이다.

 

그 내시에 이르기를 과반 벌죄한 해를 계기로 내정의 예가 막혀졌다하고 이미 흉역이 제거되었으니 마땅히 공수를 계속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사사로히 생각컨대 우리 나라로 보면 연림이 난을 일으키던 초기에는 즉 대국이 흥병할 무렵이라 도로가 어렵고 막혀서 사신이 정지되었다가 그 뒤 내사사인 김가경이 동도에 통사를 다시 하였고 호부시랑 이수화가 계속하여 나아가 그 방물을 바쳤으며 선대왕께서 별세하시매 합문사 채충현이 왕명을 받들고 종명을 고하였으며 선황제께서 승하하시매 상서좌승 유교가 빨리 가서 회장하였고 금황제께서 황통을 계승하시매 급사중 김행공이 전마를 타고 가서 조하하였습니다.

 

 그런즉 흥요를 평정한 이래로 사행(취일)이 계속하였는데 어찌 내정의 예가 막혀졌다고 하오리까 또 말하기를 석성을 쌓아 대로를 차단하려하고 목채를 세워 기병을 방해하려 한다고 하였지마는 희효에도 험요에 설비함은 국토를 보유하는 상규라 하였고 노국이 관소를 철폐함은 통인의 깊은 경계가 되었나이다. 그러므로 이 성채를 나열하여 우리의 영지를 방비함은 대개 변민의 안도를 도모함이요 황화를 배반하랴는 것은 아닙니다.

 

또 말하기를 오직 홀로 동명의 지역만이 북극의 존전에 내빈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전자에 입공한 여섯 사신이 상국중에 늑유당해 잇고 선 정 양성을 우리 제봉(강토)내에 들어와 쌓아 놓고 아직 돌려 보내지도 않으므로 지금 간절히(돌려주시기를)빌고 있는 터이외다. 다행히 황제폐하께서 유신의 운을 열어 백성으로 더불어 갱신하는 때를 만나니 황제(천상)의 혜택이 사방에 흡족하며 일변의 장주를 거듭 올려서 행인(입공육사)을 석방함과 동시에 앗아간 땅을 돌려 달라고 빌(걸)고 싶으나 청할 길이 없어 오늘에 이르었습니다.

 

혹시 이 간곡한 성의 가 용납된다면 감히 낙수의 예를 게을리 하겠습니까? 다만 은명이 있을 따름이니 어찌 책언을 번거로이 할 것이야 있겠습니까 또 말하기를 혹 뇌정같은 격노에 부딪치게 되면 어찌 백성을 안녕하게 하리오라고 하였는데 엎드려 생가컨대 금황제께서는 소국을 애휼하시는 정이 깊고 비자의 말을 들으시는 길이 넓으시니 이에 인빈의 지역을 돌아보시사 반드시 추치의 은을 더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죄과가 없거늘 무엇을 빙자하여 노여워 하시리오 내회를 자세히 살피건대 희언인 듯 하나이다.]고 하였다.

 

추 7월 정해에 김충찬으로 병부상서를 삼고 이회로 삼사사를 삼고 이유도로 전중시어사를 삼고 김현과 조패로 좌우습유를 삼고 이공현과 은백으로 모두 감찰어사를 삼았다.

 

계묘에 상서이부가 주하기를 [전상서좌복사 이공이 일찍이 오욕의 죄를 범하였지마는 누차 사유를 거쳤사오니 청컨대 그 직을 회복하소서] 하거늘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가 어사대가 탄핵하므로 미구에 파면하였다. 갑오에 황보영으로 중추사겸 어사대부를 삼았다. 왕의 생일로 장령절을 삼았다. 경술에 제하기를 [선왕의 우복을 마치지 못하였으니 참죄를 범한 자는 무인도에 장배하고 교죄를 범한 자는 유인도에 장배하라]고 하였다.

 

 8월 경신에 이자연으로 급사중을 삼고 김령기로 내사사인을 삼았다. 계해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신미에 경성에 지진하니 소리가 우뢰와 같았다. 갑술에 서여진 대장군 이간불 등 44인이 내조하였다. 경진에 동여진 대완 개다한 등 52인이 내조하였다. 9월 무자에 동번 귀덕장군 오다 등 23인이 내조하였다. 계묘에 경주 등처 19주에 지진하였다. 이 달에 서북로 송령 이동에 걸쳐 장성을 쌓아 변구의 요충을 공제하였다. 동 10월 신유에 동여진 수령 어불로 등 6인이 내조하였다. 임술에 임종한으로 감찰어사]를 삼았다. 병인에 식목도감이 주하기를 [황주 등 10주 군의 승관인을 거두도록 하소서]라고 하였다. 11월 계미에 동여진 추장 아노간 등 65인이 내조하였다. 12월 임자에 동번 대완 고도화 등 30인이 내조하였다.

 

병자 2년 춘 정월 경진 삭에 조하를 쉬었다. 을유에 동번 회화장군 사라 등 83삼인이 내조하였다. 갑오에 공도로서 사장 이하를 범한 것과 및 모든 징속자는 다 면사하게 하였다. 2월 경술 삭에 방택에 유사하였다. 임자에 정전에 거동하여 시조하고 백관에게 녹패를 사하였다. 유소로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를 삼고 최제안으로 상서좌복사 중추사를 삼고 이작충으로 이부상서 한림학사 승지를 삼았다. 제하기를 [대위 상서좌복사 이응보가 연만퇴직하였으나 공이 사직에 있는지라 내 감히 잊지 못하나니 그 자손으로 관직이 없는 자에게는 초직을 양수하라]고 하였다.

 

 갑인에 동번 수령 대신 등이 와서 낙타를 바쳤다. 기미에 동번 영새장군 아골 등 135인이 내조하였다. 기사에 동번 장군 개로 등 71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경오에 이주좌로 우산기상시를 삼고 진현석으로 위위경 좌간의대부를 삼고 원태진으로 기거랑을 삼고 한연조로 시어사를 삼았다. 신미에 동번 적선이 삼척현 동진술에 입구하여 인민을 노략하거늘 수장이 풀 숲에 복병하여 적의 돌아옴을 기다려 북을 울리고 고함을 지르며 엄격하여 40여급을 부참하였다. 임신에 문사명을 어사중승으로 삼았다. 3월 계미에 황보유의를 문하시랑 동내사문하 평장사로 삼고 유징필을 참지정사 겸서경유수사로 삼았다. 무자에 삼각산에 행차하시였다가 계사에 환궁하였다.

 

무신에 동번 추장 귀정 등 92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하 4월 임자에 입하절임으로 얼음을 진상하거늘 제하기를 [금년은 일찍 덥지 않으니 5월을 기다려 얼음을 진상하라]고 하였다. 유사가 주하기를 [해가 북륙에 있을 때 얼음을 저장하고 서륙에 있을 때 내는 것이온데 낼 때는 새끼 염소를 바쳐 제사하고 문을 여는 것입니다. 얼음 저장을 주밀히 하고 씀을 고르게 하면 건복강고의 재앙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얼음을 사용하는 법은 춘분에서부터 입추까지에 마치게 되는 것이오니 만약 5월에 비로소 진상하게 되면 고법에 어김이 있어 음양을 순조롭게 하는 바가 아니옵니다. 청컨대 입하절로 써 진상케 하옵소서] 하거늘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계축에 우박이 내렸다. 경신에 동여진 추장 오부하 등 86인이 내조하였다. 신유에 서리가 내렸다.

 

 을축에 동북여진의 수령 태사 아도한 등 58인이 내조하니 유사가 말하기를 [태사는 거란의 직명인 바 아도한이 이제 이미 귀화하였으니 청컨대 태사를 고쳐 정보를 제수하소서]한대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문하시랑 평장사로서 치사한 채충순이 졸하였다. 계묘에 기우제를 지냈다. 정축에 제하기를 [전상서좌복사 이공이 비록 두 번째 탄주를 당하였으나 선조의 재상으로 오랫동안 문한의 임에 있었으니 그 관작을 회복하고 인하여 치사(은퇴)케 함이 가하다]고 하였다. 정월 기묘에 내외의 명산에 초채(수목벌채)함을 금하였다. 신묘에 제하기를 [무릇 사자를 둔 사람은 일자의 출가를 허하노니 영통 숭법 보원 동화 등 사의 거란에서 소업의 경률을 시험토록 하라]고 하였다.

 

유사가 주하기를 [봄부터 비가 적으니 청컨대 고전에 의하여 원옥을 심리하고 궁핍을 진휼혈하고 들어난 해골을 덮어주고 썩은 살을 묻어주며 먼저 북교에서 악진(산악신) 해독(해신)과 모든 산천의 운우를 일으킬만한 것에 빌고 다음에는 종묘에 빌되 매 7일 일차식 빌어도 비가 오지 않으면 다시 악진 해독으로부터 처음과 같이 할 것이며 가뭄이 심하거던 우제를 행하고 시장을 옮기며 산선을 꺾고 도살을 금하며 관마에 곡식을 먹이지 말게 하옵소서] 하거늘 왕이 이를 청종하고 정전을 피하며 상선을 감하였다. 기해에 우박이 내렸다. 계묘에 도장을 문덕전에 설하고 5일간 기우하였다. 6월 을묘에 도장을 문덕전에 설하고 기우하였다. 을축에 친히 초제하니 이에 비가 내렸다. 병인에 보신이 상언하기를 [옛날 성제 명왕이 다 재변을 면치 못하였으되 오직 능히 덕을 닦고 정치를 잘 행하였기 때문에 재가 변하여 복이되었습니다.

 

이제 봄으로부터 가뭄이 더욱 심해져서 성상께서는 전을 피하고 선을 감하며 주야 걱정하시고 노력하시며 몸을 꾸짖고 스스로 반성하시매 시우가 응기하여 넓게 전야를 적시어 풍년을 기약하게 되었사오니 청컨대 정전에 나아가시고 상선을 회복하시고 전과 같이 일을 보시옵소서]라고 하니 제하기를 [과인이 부덕하여 이같은 한재가 생겼으니 이제 비록 비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후일의 염려가 있다. 그러나 대신의 청도 어기지 못할 것이라]고 하고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무진에 경성 및 동경 상 광 2주 안변부 등 관내 주 현에 지진하여 가옥을 많이 무너뜨렸는데 동경은 3일만에 그치었다. 임신에 유사가 주하기를 [문하시중으로 치사한 유방 등 17인에게는 청컨대 입추절까지 한하여 매 10일에 1회씩 사빙하소서]라고 하니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추 7월 무인에 중추원이 주하기를[제지에 인삼 300근을 올리라 하였사오나 근일에 올린 1,000근만 하여도 족히 어용에 공할 것입니다. 국부의 공물은 다 인민의 고혈이오니 함부로 감출함이 불가하나이다 청컨대 다시 올리지 말게 하옵서서]라고 하니 왕이 좋아하지 않는지라 문하성이 반박하여 주하기를 [옛 제왕이 기욕을 절제하여 사치를 버리며 자기를 공손히하여 몸을 닦으며 마음을 비워 간언을 용납함은 민서를 기르고 태평을 이룩하는 소이었습니다. 이제 재변이 자주 일어나니 마땅히 마음을 정제하고 몸을 꾸짖으셔야 할 것이어늘 어찌 가히 무익한데 낭비하여 백성의 고혈을 손모하오리까 바라건대 중추원의 상주한 바를 쫓으소서]라고 하니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신사에 송상 진량 등 67인이 토물을 바쳤다. 임오에 제하기를 [근자에 천지가 괴이함을 나타내어 부덕함을 경계하니 날마다 근신하여 감히 편안할 겨를이 없다. 군공과 서요들도 휴가와 철조를 제한 외에는 시무에 게으름이 없게하여 써 재변을 막도록 하라]고 하였다. 경인에 지중추사 병부상서 김충찬이 졸하니 시호를 공정이라 하였다. 임진에 제하기를 [을묘년에 거란이 변경을 침범하였을 때 대사승 강승영이 선봉이 되어 전사하였으니 그 공이 가상하도다. 군기소감을 추증하고 그 아들 화에게는 초직을 제수하라]고 하였다. 일본국이 우리의 표류인 겸준 등 11인을 돌려보냈다. 경자에 혜비 한씨가 붕어하였다. 이 달에 진봉겸 고주사 상서우승 김원충이 송에 가다가 옹진에 이르러 파선되어 돌아왔다.

 

8월 임술에 황보영으로 병부상서를 삼고 이작충으로 중추원사를 삼고 곽신으로 어사대부를 삼았다. 계해에 승 만명을 구정에서 공양하였다. 병인에 제하기를 [전일에 형부가 주한 바 참 교 이죄를 범한 것을 보았다. 짐이 바야흐로 복중에 있으며 누차 변괴를 이르게 하였다. 호생의 덕을 베풀어 서 휼민하는 마음을 표시하고자 하나니 그 참 교 이죄를 범한 자는 형을 감제하여 무인도에 유배하고 비록 참 교 이죄를 범하였다 할지라도 정장에 가긍한 점이 있는 자는 유인도에 유배하라]고 하니 이에 사형을 면한 자가 116인이었다.

 

 무진에 진현석으로 직문하성을 삼고 김령기와 임유간으로 좌우간의를 삼고 박양명으로 시어사를 삼고 서유걸으로 상서좌사랑중우승선을 삼았다. 동경관내 주 현 및 김주 밀성에 지진하였는데 소리가 우뢰와 같았다. 9월 정축에 동여진 장군 아골 등 135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동 10월 정묘에 동여진 봉국장군 요야 등 74인이 내조하였다. 11월 기축에 팔관회를 설하였는데 송상 및 동여진 탐라가 각기 방물을 바쳤다. 정유에 동여진 장군 오을나 등 78인이 내조하였다. 12월 무신에 동여진 봉국대장군 요을도 등 74인이 내조하였다. 신유에 덕종을 대묘에 부제하였다.

 

정축 3년 춘 정월 갑술 삭에 조하를 쉬었다. 2월 병진에 문하시랑 평장사로 치사한 박충숙이 졸하니 시호를 정신이라 하였다. 기미에 서북로병마사가 동여진으로 거란과 교통하는 자 사이라 등 55인을 잡아 서경에 보냈다. 계축에 혜성이 다섯이나 나타나니 길이가 각각 5∼6척이 되었다. 3월 기해에 노연패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하 4월 정묘에 친히 대묘에 체제하고 사하였다. 서번(서여진) 추장 사온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윤월 임진에 동여진 정보 아도한 등 53인이 내조하였다. 5월 계축에 동여진 귀덕장군 이구두 등 57인에게 직 일급씩 사하였다. 을축에 왕이 현화등에 행차하였다. 6월 기유에 친히 국로를 구정에서 향연하였다. 추 7월 임술에 모후의 휘진이므로 백관이 표를 올려 진위하였다. 을축에 건덕전에 거동하고 선마하여 유징필로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서경유수사를 삼고 황주량으로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를 삼고 최제안선으로 상서좌복사 참지정사 중추사를 삼고 최충으로 참지정사 수국사를 삼았다.

 

 8월 을해에 제 약랑군 서를 수태사겸 내사령으로 책봉하고 임오에 제 개성국공 기를 수태보로 책봉하였다. 을유에 송의 상인 주여옥 등 20인이 내조하였다. 정해에 송의 상인 임윤 등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9월 기유에 귀 삭 박 태 등 주와 위원진에 지진하였다. 병인에 왕이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이 달에 거란 내원성이 황제의 선지를 받들고 영덕진]에 첩하기를 [고려가 일찍이 조공에 힘쓰더니 근년에 와서 점차 체궐한다고 들린다. 곧 직공을 닦으려면 마땅히 먼저 표문을 올릴 것이다. 진실로 성실함이 보이면 별도로 유명을 내릴 것이다]고 하였으므로 문하시중 서눌 등 14인이 협의하여 주하기를 [마땅히 사자를 보내어 고주하옵소서]라고 하였다. 동 10월 경오에 동여진 장군 아유대 등 59인이 내조하였다.

 

 병자에 서북로병마사가 주하기를 [거란이 선병으로 압록강을 침략하나이다]고 하였다. 11월 계축에 공장죄 이하를 유면하였다. 12월 정해에 전중소감 최연하를 거란에 보내어 주하기를 [본국이 엎드려 생각건대 전황태후 성제께서 책명을 내려서 선지를 반포하고 토봉을 나누어 직분을 정함으로부터 다만 이 동역은 북진(거란황제)을 앙대하여 해마다 근왕함을 끊지 않고 대대로 전해서 술직하여 왔나이다. 근자에 선신 망형(덕종)이 조업을 찬승하여 황조에 귀부할새 일덕(순일의 덕)의 군주가 임위하여 새로이 경사로운 은택을 반포하심을 듣고 양조의 공사를 가지고 오로지 신총에 상주하였던 바 아직 윤허하시는 은혜를 내리시지 않으니 도리어 지의한 생각이 쌓여집니다. 그 해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비록 해가 자주 바뀌어 왔으나 아직 그대로 조공이 정지되어 있습니다. 근자에 예지를 받자오니 자못 저의 소회에 부합한지라 삼가 마땅히 태후의 유언을 준수하여 굳게 번병이 되며 소방의 폐속을 존무하여 삼가 궐정(황조)을 받들고자 하나이다.

 

 다시 문궤에 따라 정성을 바치어 길이 제항에 힘써 예를 펴겠나이다]고 하였다. 을미에 현덕궁주 김씨에게 만령궁을 사하였다.

무인 4년 춘 정월 무술 삭에 거란이 마보업을 보내왔다. 신유에 동여진 귀덕장군 고지문이 내조하거늘 회화장군으로 개수하고 수종원들에게도 다 직을 제수하였다. 2월 계미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여 태조의 진영을 알현하고 연등하는 밤에는 반드시 친히 진전(영전)에 행향함을 상례로 삼았다. 3월 신해에 최연하가 거란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조에 이르기를 [주상한 바를 살펴보니 조공 바침을 원한다는 일을 상세히 알겠다. 소국으로서 대국을 섬김은 열국의 통규요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도모함은 제후의 격훈이다. 경은 본래 대대로 성삭을 받고 해마다 조공을 받들어 왔다.

 

 선국공이 바야흐로 번국을 계승할 때 드디어 임토(책봉의 의)함이 지체되었다. 시후는 회관이 여러번 바뀌어도 천조는 아직 사정을 잘 알지 못하였더니 근일에 상주한 글을 보고 성의가 간절함을 자세히 알았노라. 동이의 풍속을 따라 거듭 고요를 바치던 의식(욕솔대궁지속 천진고요지의)을 베풀겠다 하니 그 정성기우림 생각하매 진실로 애대하는 바가 되었도다. (조공을) 윤허 함은 물론 가탄할 바 실로 많도다 힘써 영도를 생각하여 술직함을 공결치 말지어다]고 하였다. 경신에 동여진의 귀덕장군 구지라 등 32인이 그 소속 회팔 등 30인을 유도하여 내조하였다. 하 4월 정묘 삭에 궁인 한씨를 책봉하여 여비를 삼았다. 무진에 평장사 유소가 졸하였다. 이 달에 상서좌승 김원충을 거란에 보내어 문안 사은하고 인하여 연호를 청하였다. 6월 을유에 시중 유방이 졸하였다. 추 7월 신축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무신에 상서형부가 주하기를 [경외의 참 교 이죄인이 103인이로소이다]고 하니 제하기를 [참죄는 내려(강) 무인도에 장배하고 교죄는 유인도에 장배하라]고 하였다.

 

갑인에 김원충이 거란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조하기를 [올린 표문을 살피고 하계문안한 일을 자세히 알았노라 경은 방략에 뛰어나 세봉을 잘 진무하여 동한에서 애대함을 받고 북궐에 정성기우림을 다하였도다. 증염의 절후에 글월을 보내어 문안하니 가찬한 마음 매양 더욱 간절하도다]고 하였다. 또 조하기를 [상표한 바를 살피고 조공케한 것을 사은함과 아울러 김흡병 은약병 복두 사정포 공평포뇌원다 대지 세묵 용수등석 등을 진정한 일도 자세히 알았노라 경은 국토를 권사하여 조정(황조)을 흠봉하고 이번에는 사신을 보내어 멀리 충성을 베풀어 누대로 공납을 바쳐온 절의를 존 준수하고 근년의 격조된 이유를 주달하며 거듭 조공에 힘 쓸 것을 빌어 길이 심병될 것을 원하였도다 그 공순함을 보아 이어 윤종함을 표시하였더니 번거로이 감사의 글월을 보내고 인하여 공물의 상자를 베풀었도다.

 

이것을 고열할 제 괴탄함이 진실로 깊도다]고 하였다. 또 조하기를 [주한 바를 살펴보고 이미 중희 연호를 사용하고 있다는 일을 자세히 알았다. 경이 지난번 조공바침을 빌거늘 곧 받아들어 시행함을 허락하였더니 사자가 돌아옴에 우리 연호을 서문상에 사용하였음을 알고 그 사대하는 지성을 보았도다 성람한 나머지 가탄하여 마음에 잊혀지지 못하겠도다]고 하였다. 8월 을축 삭에 비로소 거란의 중희 연호을 사용하였다. 장마비가 화곡을 손상하므로 제도에 추역군의 징발을 정지하였다. 병인에 동번 회화장군 아두 등 49인이 내조하였다. 정묘에 지예사합문기후 김화언을 거란의 동경에 보냈다. 정축에 사북번 귀덕장군 야반 등 26인이 내조하였다.

 

무자에 송의 명주상인 진량과 태주상인 진유속 등 147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동 10월 신묘에 거란이 마보업을 보내 와서 조하기를 [경은 인정에 맞추어 국무를 분장하도다. 전일에 표문를 보내어 멀리 궐정에 주달하여 조절한 녹유를 진술하고 공수하려는 간독한 정성을 나타내었기에 비록 이미 고주한대로 청종하였으나 마땅히 수존함을 특시하나니 생각함이 깊은 것을 마음에 잊지 못하겠노라 이제 동상합문사 좌천우위대장군 마보업을 그곳에 보내어 안무케 하노라]고 하였다. 11월 갑인에 황주량으로 문하시랑 평장사를 삼고 이작충으로 참지정사 주국을 삼았다. 을묘에 거란 동경회예사 의용군 도지휘 강덕영이 왔다. 기미에 최충공을 거란에 보내어 영수절을 하하고 인하여 하정하였다. 12월 갑술에 동여진 귀덕장군 고지문 등 50인이 내조하였다.

 

 계미에 내사문하성이 말하기를 [동지의 백학 아압 산양유에 날마다 벼와 기장을 먹여 소비됨이 많습니다. 전전에 말하기를 개와 말은 그 토성이 아니면 기르지 않고 진금과 기수는 나라에서 기르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조수 곤충은 각기 그 본성대로 살게 할 것이라 하였으니 대개 완호의 목적으로 써 물성을 상해하지 말라는 것이니 빌건대 해도에 놓아 주도록 하소서]한데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기묘 5년 춘 오월 신축에 우사(우신)를 제하였다. 병오에 공부상서 원영으로 춘하번서북로병마사를 삼고 대부소경 양대춘으로 부사를 삼고 우산기상시 진현석으로 동로병마사를 삼고 전중시어사 임종한과 왕이보로 부사를 삼았다. 2월 임술 삭에 전중감 이성공을 거란에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 정묘에 호부랑중 유선을 보내어 안무함을 사례하고 인하여 압록강 동편에 성보를 가축하는 것을 파하도록 청하였다.

 

 을해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고 병자에 중광전에 거동하여 관락하였다. 임오에 노인성을 남교에서 제하였다. 신묘에 황항지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3월 신축에 동북로병마사가 주하기를 [여진 제번의 자제 등 60인이 예물을 가지고 입조함을 청한다]고 하거늘 이를 허락하였다. 하 4월 신유 삭에 유선이 거란에서 돌아왔는데 조하기를 [고주한 바를 살펴보고 압록강 동편의 성벽이 경작과 착정에 방해된다는 일을 자세히 알았노라 이제 돌이켜 보건대 연성은 선묘 때에 쌓은 것이라 대개 변방의 상비이니 강토에 있어서 무엇이 손상되리오 짐은 성규를 지키기에 힘쓰노니 때를 따라 고치기가 어렵도다. 선신 흠(덕종)은 일찍이 고주함을 번잡하게 생각하여 조공함을 끊었는데 경이 습작한 처음에 공장이 겨우 이르렀다 바라는 바는 마땅히 종전대로 준수할 것이요 정성은 다시 공근함을 힘쓸 것이다.

 

 이것이 영구한 계책인 것이며 겸하여 나의 지극한 뜻에 부합함이니 그대로 개간 증식을 하도록 하고 경소함이 생길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였다. 거란이 대리경 한보형을 보내 와 왕을 책봉하고 조하기를 [땅은 동성을 걸치고 별은 북진을 둘렀도다. 더욱 봉상하는 마음을 견고하 하니 책훈의 전례를 거행함이 마땅하도다 멀리 사신을 달려 보내어 왕의 봉역을 계행케 하노라. 이것을 은영이라 하는 것이니 마땅히 공손히 받들지어다. 이제 대리경 한보형을 보내어 그곳에 가서 경에게 관고 일통과 내첩 일도를 사하노니 도착하거던 공손히 받을지어다]고 하고 관고에 말하기를 [짐은 하늘을 법받아 널리 덮고 고래의 통규를 참작하여 안으로는 황가의 회원하는 성의를 미루어 밖으로 왕국의 전정하는 권병(전정지병)을 부여하노니 선잔에 경솔하게 들어오지 말 것이며 차서는 망녕되히 동일하게 하지 말 것(차서불가이망동)이니 바라건대 군웅과 더불어 길이 대의를 보전하라. 헌원이 호시를 익히고(헌습호시) 하우가 간척(간과)을 베푸는 것보다 주가 번병을 분치하고(주분번병) 한이 산하에 맹서함(한서산하)만 같은 것이 있으리요 그대는 공업이 환문보다 무겁고 덕망이 진 변(진한변한)에 높았도다.

 

선조의 국토를 계승한 시초에 선왕(덕종)의 불공함을 고쳐서 강토를 바치어 나의 영토를 넓게 하고 옥폐를 바침이 여러나라에 앞섰도다 안화를 돌이킴에 힘쓰고 충숙함으로 용의를 삼았으니 마땅히 이장을 들어 특히 총수를 베푸리라 권지고려국왕은 기특한 자태가 옥과 같이 맑고 위대한 도량이 못과 같이 깊도다. 오구는 바다에 다리 놓는 웅자로 솟아서 널리 수발한 기를 모았고 용숙은 하늘에 빛나는 광채를 드날려 아래로 정영을 내렸도다. 스스로 명구를 지키고 크게 패부를 열었도다. 동정은 먼저 전칙에 따르고 매흥은 능히 교긍을 제하였도다. 천리의 전기에 먼저 당서함을 이룩하였고 일방의 민속이 다 은영을 입었도다. 누대의 영명을 이루고 전방의 이략을 얻었도다. 이러므로 오로지 비비(사신의 의)를 달려서 멀리 용륜(조칙)을 내리나니 현토의 전봉에 은영이 일자(왕)에 가하였(영가어일자)으며 따뜻한 초■와 높은 질품은 삼사를 겸시하였도다.

 

귀는 숭계에 올랐고 공은 의호로 포창하였다. 널리 정부를 나누어서 크게 충적을 포장하노라 아아 성진이 공북의 궤도에 있어야(성진재공북지전) 곧 도수에 합하고 강한이 조종의 길을 얻어(강한득조종지로)야 이에 순류하나니 힘써 이말에 따라서 상훈을 번란케 하지 말라 개부의동삼사 수대보겸 시중 상주국 고려국왕 식읍 7,000호 식실봉 1,000호를 제수하고 인하여 수충보의봉국육자공신을 사하노라]고 하였다. 5월 경자에 일본민 남녀 26인이 내투하였다. 추 7월에 거란이 소부감 진매를 보내와서 생신을 축하하였다.

 

 우산기상시 임유간을 거란에 보내어 책봉을 사하였다. 8월 경신 삭에 송상 유적 등 50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동 11월 신축에 팔관회를 설하고 신봉루에 거동하여 포를 사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12월 정사 삭에 호부시랑 송융을 거란에 보내어 영수절을 하하고 겸하여 하정하였다. 제하기를 [절후가 대한이 되어 풍운이 엄응하도다 빈궁한 사람을 생각하매 반드시 얼고 굶주릴 것이니 그 외국 투화인 및 번인에게 잡혀 갔다가 도망해온 사람들 남녀 합 80여인에게 유사는 그 노유를 헤아리어 각기 면포를 사하라]고 하였다. 윤월 정해 삭에 거란 동경회예사 대견제 등 9인이 왔다.

 

경진 6년 춘 정월 병진 삭에 일식하였다. 최연하로 서경부유사를 삼았다. 신유에 동여진 봉국대장군 요어 등 5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임신에 우산기상시 진현석을 거란에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병자에 안산군대군 김씨가 그 아들 이공협이 불효하다고 고발하거늘 기시하였다. 경진에 동여진 수원장군 파걸 등 40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갑신에 서북여진 귀덕장군 고두 등 46인이 와서 마와 토물을 바쳤다. 2월 경인에 승평문랑옥 수백간이 불타고 어사대가 연소하였다. 정유에 이부원외랑 김연준으로 권지승선을 삼았다. 무신에 동여진 회화장군 요두 등 48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임자에 유사에게 명하여 권형(저울)을 일정하게 하고 두량을 균평케 하였다. 갑인에 여비 한씨를 책하여 왕후를 삼고 익일에 대묘에 고하니 백관이 하례하였다.

 

3월 신유에 동여진 봉국장군 아골등 33인이 와서 마 15필을 바쳤다. 임술에 서북여진 영새장군 잉보 등 25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갑술에 서북여진의 추거 고사문 등 26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임오에 제하기를 [내사시랑 평장사 유징필이 세족으로 여경을 이어 문한으로 써 누대의 조연을 보좌하여 그 공이 가히 기록할만하니 그 아들 작에게 공부서령사를 제수하라]고 하였다. 하 4월 병술에 거란 동경민 무의로 오지걸 등 20여인이 내투하거늘 물품 및 전택을 사하여 영남에 거주케 하였다. 신축에 거란 횡선사 진주방어사 마세장 등이 왔다. 정미에 임해원에서 비를 빌었다.

 

임자에 동여진 추거 오타로 도령장군을 삼았다. 갑인에 서북여진 봉국장군 아이화 등 27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5월 을묘 삭에 북악에 비를 빌었다. 신유에 회경전에서 초제를 지내어 비를 빌었다. 임술에 큰 비가 와 한달동안 계속하였다. 이령간으로 사관수찬을 삼고 이상선으로 감찰어사를 삼았다. 6월 을사에 상서우승 유백인을 거란에 보내어 사은하였다. 동여진 영새장군 모이라 등 5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계축에 새북 해가 적을구 등이 내투하였다. 추 7월 을축에 의춘루에 벼락쳤다.

 

숭화궁 왕비가 졸하였다. 거란이 하주 관찰사 조안인을 보내 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무진에 상서좌복사로서 치사한 양전진이 졸하였다. 8월 을유에 형부상서 판어사대사 이주좌가 졸하였다. 공부시랑 유창을 거란에 보내어 황태후의 생신을 축하하였다. 계사에 동여진 고도달 등 53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9월 을묘에 이회로 상서우복사를 삼고 원영으로 공부상서를 삼았다. 서북여진 장군 야반 등이 와서 준마를 30필을 바쳤다.

 

 정사에 이자연으로 지중추원사를 삼고 왕총지로 중추원지주사를 삼았다. 경신에 거란 동경회예사 도지휘사 고유한이왔다. 임신에 북여진 장군 이우화 골보가 내투하거늘 전택을 사하여 기내에 살게 하였다. 동 10월 갑신에 서북여진 잉화로 등 13인이 내투하거늘 명하여 과호에 채워 넣었다(충위). 을유에 서북여진 정조 부거 등 100여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경인에 지중추원사 김원충의 딸을 맞이하여 비를 삼았다. 계묘에 동녀진 장군 사이라와 서북여진 장군 동화노가 각 200여인의 민중을 거느리고 와서 토물을 바쳤다.

 

이 달에 유창이 거란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조하기를 [근자에 여러 사람들이 의론하여 휘호를 올리려고 하는 것을 비록 여러번 받자 하지 아니하였으나 궐문에 부루짖음(규혼)을 물리칠 수 없도다. 그 간곡함을 가긍히 여기고 묵과키 어려워 윤허하였다. 번국과 동경할 것을 권념하니 조함을 총석(사)함직 하도다. 이제 이미 12월 상순에 예책을 대행키로 정하였기에 이에 조시하노라]고 하였다. 11월 병인에 대식국 객상 보나합 등이 와서 수은 용치 고성향 몰락 대소목 등물을 바치거늘 유사에게 명하여 후하게 관대하고 돌아갈 때에 금백을 후사하였다. 신미에 공부시랑 이인정을 거란에 보내어 영수절을 하하고 겸하여 하정하였다. 12월 정유에 동여진 원윤 아두간 등 50인이 와서 마 35필을 바쳤다. 거란의 동경민 2,000여호가 내투하였다.

 

신사 7년 춘 정월 경술 삭에 조하를 쉬었다. 병진에 서여진 대승 고지지 등 15인이 와서 마를 바쳤다. 2월 경진 삭에 상서공부가 주하기를 [송악산의 동서산록에 식송하여 써 궁궐을 장엄하게 하소서]하거늘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을축에 유창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임인에 서여진 봉국장군 이우대 등 18인이 와서 명마를 바쳤다. 3월 경술 삭에 동여진 중윤 야사로 등이 내조하였다. 하 4월 기묘에 동여진 추장 대상 이개 등이 내조하였다. 계사에 장경도장을 회경전에 설하였다. 춘추 이계절에는 정예적으로 이 회를 설하는데 봄에는 6일간 가을에는 7일간이었다. 5월 을묘에 현릉에 배알하고 병진에는 선릉에 배알하였다. 제하기를 [성조께서 삼한을 통일할 때에 호종하던 신료의 자손으로 노복이나 서민에 전락되어 입사의 자격을 가지지 못한 자는 유사가 불러 문무재예를 시험하여 다 등사함을 허하라]고 하고 인하여 상호군 홍빈 윤수기 대장군 위정 김탁마 석충 양포질 하흥휴 지맹 오금보 한소보 부창 감찰어사 김경에게 마를 각각 1필씩 사하였다.

 

 경오에 금강명경도장을 문덕전에 설하고 기우하였다. 을해에 비가 내렸다. 6월 을유에 동여진 정보 오부 등 26인이 내조하였다. 추 7월 기미에 서여진 귀덕장군 소지라 들이 내조하엿다. 신유에 거란이 위위소경 경치군을 보내 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8월 을미에 동여진 유원장군 파을달 등 50인이 내조하였다. 이 달에 혜성이 동방에 나타나니 길이가 30척 가량이며 20여일만에 소멸하였다. 9월 정미 삭에 상서병부가 주하기를 [선군별감의 문무반 7품 이상원의 자제를 선취하여 글을 익혀 과거를 보는 자를 제하고는 모두 군오에 충당하게 하니 이는 비록 평안할 때에도 위태로움을 잊지 아니한다는 생각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다 누대 훈구의 자손인 고로 조종 이래로 병역에 참여하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물며 갑자년과 병자년간에 있어 이미 금제가 있었으니 (이제와서 이와 같이 한다는 것은) 다만 그 선대의 공을 잊어버리는 것이 될뿐만 아니라 또한 구제에도 어긋나는 것이니 청컨대 대오에 충당치 마옵소서]하거늘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동 10월에 호경(서경)에 행차하였다.

 

 길이가 30척 가량되는 혜성이 동방에서 10여일간 나타났다. 신사에 어가가 대동강에 이르니 유수사 참지정사 황보영이 강두에서 봉영하는지라 왕이 용선에 나아가 보신들에게 연을 사하고 장군 승개 등에게 명하여 활을 쏘게 하니 우습유 금상빈이 나와 간하거늘 이에 그치고 선은관에 들어갔다. 을축에 팔관회를 설하고 영봉문에 거동하여 백관의 하례을 받고 주연을 사하고 흥국사에 행차하여 행향하고 장락궁으로 이어하였다. 기해에 최충으로 내사시랑 평장사를 삼고 황보영으로 수사공좌복사를 삼았다.

 

11월 병오 삭에 호경으로부터 돌아왔다. 서눌 홍빈 유섬 안보 고열 등에게 중대광을 가하였다. 기미에 송상 왕락 등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동여진 유원장군 사이라 영새장군 야어개 등 62인이 와서 마를 바쳤다. 12월 신사에 동지 귀령각에서 활쏘는 것을 사열하였다. 임오에 동여진 봉국장군 아가주 등 55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이 해에 한림학사 승지 박유인과 우승 이유형을 거란에 보내어 책례(6년 12월 대행예정이던 책례)를 하하고 판위위사 유삼은 방물울 바쳤다.

임오 8년 춘 정월 병오 삭에 조하를 쉬었다. 기유에 동여진 수령 곤두 등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갑인에 김오위상장군 형부상서 안보가 표문를 올려 연로치사를 청하거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경신에 서북로병마사가 압록강 이동의 청새진에 이르는 관하의 입석촌에 있는 번호를 입적시켰다고 아?다. 기사에 동여진 귀덕장군 아두간 등 49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2월 무인에 동여진 유원장군 고지문 등 36인이 와서 토물을 바치거늘 직을 제배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무자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병신에 서여진 추장 고지지 등 12인이 와서 토물을 바치매 예빈성이 주하기를 [고지지 등은 왕년 평로와 영원 양성을 개탁할 때에 자못 공노가 있었으니 예물을 우사하소서]하거늘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기해에 동경부유수 최호 판관 나지설 사록 윤렴 장서기 정공간 등이 제령을 받들어 양한서(전한서 후한서)와 당서를 신간하여 진상하거늘 모두 작을 사하였다. 3월 을사에 내사문하가 주청하기를 [정전에 거동하여 시조하는 날에는 백관으로 하여금 각각 스스로 주대케하소서]하거늘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병진에 서북여진 영새장군 야어개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갑자에 장군 이우불 등 47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하 4월 병술에 서리가 내렸다. 임인에 동여진 대상 오어달이 경우를 청하거늘 이에 동로둔전사의 소 10두를 사하였다. 5월 기사에 왕이 현화사에 행차하였다. 6월 을해에 왕이 태조의 휘진도장으로 개국사에 행차하였다. 정축에 제하기를 [농사가 바야흐로 성할 때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니 무릇 구한할 수 있는 것을 유사는 상세히 주문하라]고 하였다. 경진에 종묘와 산천에 비를 빌었다. 갑신에 내사령 서눌이 졸하였다. 병술에 도병마사가 주하기를 [동로 열산현 영파술 대정 간홍이 적과 싸울제 중과불적으로 화살이 떨어지(진)고 힘이 다하여 죽었사오니 청컨대 직상을 추가하소서]하거늘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동여진 귀덕장군 야이불 등 25인이 내조하였다. 을미에 내사시랑 평장사 유징필이 졸하였다. 추 7월 을사에 연창궁비가 졸하였다.

 

을묘에 거란이 이부랑중 풍립을 보내 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8월 무인에 이자연으로 중추부사를 삼았다. 경진에 동여진 유원장군 사이라 등 68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갑신에 선정전에 거동하여 형부의 주상하는 옥발미(죄옥의 평의)를 청단하였다. 9월 정유 정사에 동여진 귀덕장군 아개 등 58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을축에 서북여진 유원장군 고두로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동 11월 신묘에 거란이 검교예부상서겸 어사 왕영언을 보내 와 조하기를 [짐이 관남십현은 아국의 구기임으로 장차 군사를 일으켜 강토를 회복하려 논의하였더니 송조가 누차 전사를 보내어 거듭 간곡한 말로 약정하기를 구공인 은 30만양 견 30만필 이외에 매년 금과 회의 진물을 별도로 바쳐서 부여의 물품에 대하겠다기에 재차 맹약을 논의하여 영구히 화호함을 복정하였다.

 

 그 제도의 병마 등은 급여를 후히 하고 부조를 면제하는 동시에 이미 본부에 방환기켰으니 그 어찌 내 미세한 몸으로 이러한 성사를 이룩할 수 있었던가 이제 문무백관과 내외제관들이 누차 봉서를 올리고 전고를 상고하여 내가 원공 대략을 지녔다 하고 나에게 아름다운 칭호와 큰 이름을 가상하고자 하므로 굳이 사양하지 못하여 힘써 군청에 따르기로 하였노라 이미 11월 3일을 선정하여 양궁이 함께 대례를 거행하게 되었으니 경은 번병을 일컫고 상국을 섬기며 궁궐을 향하여 충성을 바쳤으니 멀리 생각건대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반드시 경열함을 더할 것이다. 이제 예부상서 왕영언을 보내어 조서를 가지고 그곳에 가서 논시케 하노라]고 하였다. 정유에 동여진 영새장군 동불 등이 와서 마를 바쳤다. 12월 계묘에 치사한 문하시랑 평장사 황보유의가 졸하였다. 갑인에 이령간으로 비서소감겸 한림시강학사를 삼았다.

 

계미 9년 춘 정월 경오 삭에 조하를 쉬었다. 경진에 황주량으로 수태보겸 문하시중판상서이부사상주국을 삼았다. 갑신에 서여진 귀덕장군 골개 등 36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2월 임인에 최제안으로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상주국을 삼고 이작충으로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판상서례부사를 삼고 김정준과 고숙성으로 좌우승선을 삼았다. 임자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3월 병자에 서여진 추장 고두로 등 4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기축에 백좌도장을 회경전에 설하고 승려 1만을 공양하였다. 임진에 동여진 장군 개로 등 40인이 와서 마를 바쳤다.

 

하 4월 무술에 동북로병마사가 주하기를「여진 유원장군 사이라가 수륙의 적수 나불 등 494인을 유치하여 화주관에 와서 입조하기를 청하나이다」라고 하매 유사가 의주하기를「이 무리들은 인면 수심이니 마땅히 병마사로 하여금 인수를 멸하고 차례로 나누어 입조하게 하소서」하니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임인에 제하기를「비가 시기를 어기니 농사가 염려된다 어찌 형벌이 공정치 못하여 민원이 있음인가 유사는 유죄 이하를 심사하여 모두 석방하게 하라」고 하였다. 계묘에 동여진 장군 이다불 등이 내조하였다. 5월 정유 삭에 일식하였다. 제하기를 「과인이 부덕함으로 이러한 한건을 이루고 누차 재변이 있으니 마땅히 상식국으로 하여금 응요군을 놓아 보내고 또 ■호로써 고기 잡는 것을 금하라」고 하였다. 갑술에 사사하였다.

 

무인에 정전을 피하였다. 기유에 비가 내렸다. 을미에 비가 내리거늘 백관들이 건덕전에 나가 표축하하였다. 6월 병오에 김령기로 병부상서를 삼았다. 정사에 동여진 추장 유불달 등 25인이 내조하였다. 동북로 병마사가 주하기를「연해분도판관 황보경이 홀로 전함을 거느리고 대양에 멀리 들어가 수적을 분격하여 사로잡고 벤 것이 심히 많사오니 청컨데 포상을 행하옵소서」하거늘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추 7월 정묘에 거란이 시어사 요거선을 보내 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정축에 동여진 추장 아두간 등 66인이 내조 하였다. 8월 기미에 내외의 사형을 결정하고 정전을 피하며 소선하고 악을 철하였다. 9월 임신에 친히 구정에서 초제하였다. 정축에 유사가 주하기를「중광사의 성조도감사인 정장이 사서인 승적으로 더불어 감림의 물건을 도적질 하였으니 법에 준하여 장배하기를 청합니다」고 하거늘 제하여 경전에 따르라 하였는데 어사대가 형률대로 처단하기를 논청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경진에 동여진 영새장군 동불로와 유원장군 사이라 등이 화외여진 80인을 거느리고 내조하여 주하기를「화외인이 난폭한 마음을 망녕되게 품고 일직 변경을 요란케 하였으나 관대히 길러 주심을 입음에 미쳐 완전히 전죄를 고쳤습니다. 이제 수륙번장을 인솔하여 궐문에 나와 맹세를 들이고 변민되기를 원하오며 금후 항시 인구의 동정을 살펴서 보고하리다」고 하거늘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특히 김백을 사하고 관등을 가하였다. 동 십월 임인에 동여진 영새장군 야사개 등 80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11월 무인에 동경회례사 검교좌복사 장창령이 왔다. 신사에 거란이 책봉사 소신미 부사 한소문 도부서 이천관내 관찰유후 유일행과 압책사 전중감 마지유와 독책 장작소감 서화흡과 선전 검교좌산기상시 한이손 등 130인을 보내왔다. 정해에 왕이 단을 설하고 책명을 받으니 조에 이르기를「짐이 외람되게 부덕한 몸으로 제업을 이어 받으니 6성의 드리우신 경사를 힘 입어서 팔방이 두루 태평함을 이루었도다 요즈음 여러 사람의 간청에 따라 삼가 큰 이름을 받게 되니 무릇 조림 있어 경상을 두루 균등하게 할 것이다. 경은 대대로 성삭을 흠수하였고 강역은 토모를 이어 받았다. 심해를 항행하여 술직의 의를 극진히 하였고 대국을 섬겨서 신하된 절개를 다하였도다 마침 대례를 베풀게 되매 곧 이장을 들어 특히 질록을 올리는 은혜를 추급하고 아울러 공적에 보답하는 예(수)를 성하게 하노라 이제 사신 좌감문위상장군 소신미와 부사 상서예부시랑 한소문을 보내어 절을 가지고 예를 갖추어 책명하며 아울러 차복 관검 인수 및 국신물(양국교환의 선물) 등을 별록과 같이 갖추어 보내니 도착하거든 삼가 받을지어다」고 하였고 책문에는「짐이 하늘의 기탁을 받아 조종의 기업을 소승하니 4방이 인덕에 귀화하므로 영기를 쉬어 패업을 정하고 백관들이 예문을 상고하여 보책에 새겨 써 존호를 가하였다.

 

 멀리 제신(경)을 권고컨데 국사를 천개하여 항해(조공)의 성을 게을리 하지 않고 대하의 맹서를 더욱 굳게 하였다. 바야흐로 경사를 널리 베풀 때이니 마땅히 은혜를 펴서 원방에까지 미치게 할 것이다. 휘전에 따라 특히 총장을 보내노라 아아 그대 수충보의 봉국공신 개부의동삼사 수태보겸 시중 상주국 고려국왕 식읍 7,000호 식실봉 1,000호 왕형은 영철함이 당대에 드물며 인자하여 나라를 계승하였도다 강토를 확장하매 일역(동방)에 걸쳐서 경역을 나누고 천조를 존숭하매 황궁을 우러러 정성을 바쳤도다 순임금을 받들어 필성의 업을 세우고(대순 수필성지업) 주나라를 바로 잡아 협보의 훈을 도모하도록 하라(광주 규협보지훈) 덕화는 천애에까지 미치고 성교는 청견(동방)에 펴졌도다 짐이 지난 번에 엄가를 갖추러 경기를 순무할 제 방백(방윤)에게는 알현의 예의를 펴게하고 도인들에게는 내소(임금이 오니 백성들이 소생하다는 의)의 희망에 계합하도록 하였다.

 

 간과를 쓰지 않고 재판(옥시)을 공평하게 하니 여러 지방이 의를 사모하고 풍화에 향하여 옥백을 서로 보내오고 인국은 위엄을 두려워하고 덕을 회앙하여 금겸을 증납하였도다 이에 태평이 상승된 시기에 이르러 마침 허명의 보책을 받았도다 이에 은택을 베풀음에 있어 먼저 왕번(고려)에 미치게 하노라 절석의 숭자에 나아가게 하고 전차의 준질을 바르게 하니 원전으로 부세를 더하고 미호로 공을 포하노라 이에 사신 소신미와 부사 한소문을 보내어 절을 가지고 예를 갖추어 그대를 책명하여 수태전겸 중서령을 삼고 식읍 3,000호 식실봉 300호를 가하여 인하여 동덕치리의 사자공신(호)을 사하고 산관훈작은 본래대로 하노라 아아 군자국을 지켜 제후왕에 으뜸이로다 도를 논하여 주의 태사가 될지며 공훈을 드날려 한의 승상에 오를지어다 신절을 굳건히하여 황가에 보답할 것이며 창성할 때에 부귀를 향수하고 공명을 길이 세상에 전하여 청사(죽소)에 그 빛이 흐齪 것이니 길이 공경할 지어다] 고 하였다. 병인에 동번적이 선 팔소로 서곡현에 입구하여 40여인을 사로잡아 가거늘 방비에 불근한 소치로 그 장졸들을 죄주었다. 12월 경신에 탁(탐)나국 성주 유격장군 가리가 주하기를 [왕자 두라가 요새 졸하였는데 일일이라도 후사자가 없어서는 아니될 것이오니 청컨대 호잉으로써 왕자를 삼으소서]하고 인하여 방물을 바쳤다.

 

갑신 10년 하 4월 경술에 동여진 1,045인이 예물을 바치고 맹약을 청하거늘 각각 의복과 은기를 사하였다. 금원현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5월 정묘에 동여진 장군 구라 등 25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6월 을사에 왕이 보살계를 건덕전에서 받았다. 추 7월 계묘에 거란이 검교태보 유종정을 보내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우복사 이괴와 상사봉어 최희정을 거란에 보내어 책봉을 사하였다. 8월 계묘에 동여진 장군 아도한 등 46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9월 신유에 동여진 장군 사이라 등 66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계해에 동여진 장군 포기 등 59인과 서여진 대장군 고두로 등 27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정묘에 동여진 장군 구니도 등 26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동 11월 을해에 병마사 김령기가 주하기를 [이제 장 정 이주 및 원흥진에 성을 쌓아 불일내에 필역케 되었사오니 노고가 심히 많았습니다 그 독역한 주 진의 관리에게 1과의 7품 이상에게는 정직 1급을 초배하여 부모에게도 봉작하고 8품 이하에게는 정직 1급을 초배하여 차제계직을 가하고 2과에게는 정직 1급과 아울러 계직을 가하소서 또 이 3성의 지대는 원시 적의 소굴이라 침요될까 염려되오니 병마군사를 요해의 곳에 나누어 주둔시켜 수륙으로 막아 적으로 하여금 접근함을 얻지 못하게 하고

 

그 군사로서 1과의 별장 이상에게는 정직 1급을 초배하여 부모에게도 봉작하고 대정 이상에게는 정직 1급과 아울러 향직을 초배하고 군인에게는 향직 1급을 초배하도록 하옵고 2과의 대정 이상 및 선두에게는 정 향직 1급을 가하고 군인 및 초공(사공) 수수(수부)에게는 향직을 가하고 또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시고 축성시를 당해서 출전하여 공이 있는 1과의 섭병부상서 고열 등 10인과 차 1과의 소부감 유교 등 5인과 2과의 대락승 정패 등 5인에게 또한 포상을 가하여 써 장래를 권장하소서]라고 하니 제하여 가타 하였다. 계미에 동녀진 장군 오을달 등 남녀 144인이 와서 준마를 바치고 주하기를 [우리들이 귀국과 접경하여 살며 왕화를 모앙하여 신복한지 오래오나 항상 추로가 내침할까 염려되어 정주함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 3성을 쌓아 써 적의 통로를 막게 되었기 때문에 내조하여 사은하나이다]고 하거늘 왕이 상을 넉넉하게 주어 돌려 보냈다.

 

을유 11년 춘 정월 무오 삭에 조하를 쉬었다. 정축에 동북교에서 풍사(풍신)를 제하였다. 동여진 귀덕장군 아두주 등 5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2월 무자 삭에 임진강의 과교원에 호를 사하여 자제사라고 하였다. 앞서 이 나루터에 선교가 없어 행인이 다투러 건느다가 물어 빠지게 되는 일이 많더니 유사에게 명하여 부교를 반든 이후로는 인마가 평지와 같이 밟게 되었다. 갑오에 동여진 유원장군 파을달 등 6105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3월 기사에 동여진 회원장군 염한 등 75인이 내조하였다. 경오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병자에 곡우절인데 서리가 내리었으므로 녹수하였다.

 

하 4월 정해 삭에 태사가 주하기를[마땅히 일식하여야 할 것인데 음운으로 보이지 않나이다]고 하니 군신들이 표축하하였다. 무술에 동여진 수령 사어두 등 35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기해에 동여진 장군 요어나 등 70인이 와서 양마를 바쳤다. 경자에 영새장군 고도화 등 7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병오에 서북로 병마판관감찰어사 이춘이 주하기를[번적 100여인이 영원진 장평술에 침입하여 군사 30여인을 노략하여 갔으니 청컨대 장교가 능히 수어하지 못한 죄를 다스리옵소서]하거늘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무신에 뇌사(뇌신)를 서남교에서 제하였다. 기유에 비서성이 신간한 예기정의 70본과 모시정의 40본을 올리거늘 명하여 1본은 어서각에 장치하고 여분은 문신들에게 사하였다.

 

5월 경신에 제하기를 [소서가 장차 닥쳐오니 중한 죄수는 정하고(죄수을 뽑아내어 관대하게 다루는 것) 경죄는 석방하라]고 하였다. 병인에 대송 천주 상인 임희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동로군사로써 번적과 싸워 전승한 자에게 각각 내구의 마를 사하였다. 윤월 신축에 오랜 비로 말미암아 여수하고 경죄를 석방하였다 6월 기묘에 거란 횡선사 검교태부 판3반원사 야율선이 왔다. 경진에 영성(가색을 맡은 별의 이름)을 제하였다. 추 칠월 정유에 거란이 검교상서우복사 고유기를 보내 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9월 경인에 동여진 장군 고지문 등 45인이 내조하였다. 동 12월 경인에 혹한이므로 경한 죄수를 석방하고 급하지 않는 역사를 정지하였다. 동여진 고차 등 36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12월 임자에 여수하였다.

 

병술 12년 춘 2월 병인에 연등으로 포를 사하였다. 임신에 마조를 제하였다. 3월 신사 삭에 일식하거늘 왕이 정전을 피하고 소란을 입고 구일(구식)하였다. 신묘에 이인정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신축에 시중 최제안에게 명하여 구정에 나아가 행향하고 가구의 경행을 배송케 하였는데 경성가구를 나누어 3도로 하고 (길마다) 채루자로써 선약경을 메고 앞서 가게 하고 승도들이 법복을 갖추어 걸어가면서 경을 독송하고 감압관도 또한 공복을 입고 도보로 따라가면서 가구를 순행하며 백성을 위하여 복을 비는 것이니 이름하여 경행이라 하였다. 이로부터 해마다 상례를 삼았다. 하 4월 신해에 중농을 제하였다. 정묘에 왕이 병환으로 산호전에 이어하였다가 정축에 대내법운사로 이어하였다.

 

병술에 백관들이 불사에 기도하였다. 5월 을미에 이부가 주하기를 [위위경 지대(태)사국사 서웅이 질환으로 청고(사가를 청함)한지 이미 180여일이 경과하였습니다. 국제에 무릇 현재관으로 걸가하여 만백일이 된 자는 파직하게 되어 있사오니 청컨대 서웅의 직을 해직하소서]하거늘 제하기를 [서웅이 그 업에 정려하여 일관의 장이 되었으니 특별히 200일을 사고하라]고 하였다.

 

정유에 왕의 병환이 더하였으므로 왕제 낙랑군 휘를 불러 병석에 들어오게 하고 명하여 국사를 권총하게 하며 조하기를 [짐이 선왕의 말명(임종시의 유명)을 받고 열성의 비도를 계승한지 12년 동안에 하늘의 휴징을 힘입어 국내가 평안하더니 춘하 이래로 우노가 화기를 잃게 하매 약석이 무효하여 드디어 위독함에 이르렀으니 신기를 유덕자에게 돌리고자 하노라 내사령 낙랑군 휘는 짐의 애제라 인효 공검함이 인국에까지 들렸으니 마땅히 대보를 전하여 써 경광을 나타내게 하리라]하고 이날 붕어하니 수는 33이요 재위 12년이라 빈전을 선덕전에 옮기었다 왕은 관인 효우하고 식견과 도량이 홍원하며 영무 과단하여 소절에 구애되지 아니하였다.

 

시호를 용혜라 하고 묘호를 정종이라 하고 북교에 장하여 능을 주릉이라 하였다. 유사가 유명을 받들어 산릉제도를 다 검약하게 하였다. 문종 10년 시호를 홍효라 가하고 인종 18년 영렬을 가하고 고종 40년 문경을 가하였다.

 

이제현이 찬하기를 [거란이 탐모하여 족히 신을 보전할 수 없으므로 태조가 깊이 경계하였다 그러나 그 일재(대연림의 난)를 다행으로 삼아 구호를 버리는 것도 또한 좋은 계책은 아니었다 현종은 어려운 때에 반정하매 미쳐 여가를 가지지 못하였고 덕종은 방강한 나이에 미달하였으니 더욱 쟁투함을 경계하여야 하였으므로 왕가도의 화친을 끊자는 의론은 황보유의의 화호를 이어서 백성을 쉬게 하자는 의론만 같지 못하였다. 정종은 사위한지 3연만에 우리의 대부 최연하가 거란에 갔고 4년 거란의 사신 마보업이 오니 이로부터 다시 환맹을 잇게 되었다. 감동시킴이 지성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면 이것은 반드시 기책이 있었을 것이다. 이러므로 군자는 [선계선술함으로써 그 나라를 보전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제11대 문종 (文宗 1046~1083 재위37년)

  

문종 장성인효대왕의 휘는 휘요 자는 촉유며 고휘는 서이니 현종의 제3자로 어머니는 원혜태후김씨인데 현종 10년 기미 12월 계미에 탄생하였다

 

13년 낙랑군을 봉하고 정종 3년 책하여 내사령을 삼았다 12년 5월 정유에 정종이 몽하매 추전에서 즉위하니 백관이 국새를 받들고 중광전에 나아가 축하하였다. 기해에 제하기를 「선조께서 쓰시던 의상과 답두 등은 모두 금은으로 장식한 못을 썼고 또 금은실로 짠 계금으로 인욕을 만들었으니 마땅히 유사로 하여금 동철과 능견으로써 바꾸도록 하라」고 하였다. 경자에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빈전에 나아가 애절하게 곡 하였다. 6월 갑인 상서공부랑중 최원준을 글단에 보내어 고애하였다. 기미에 대내에서 본명을 초하니 매양 이날에는 반드시 친히 초하였다. 정묘에 신봉루에 거동하여 대사하고 모든 유직자들에게 1급씩을 가하였다.

 

추 7월 기묘 삭에 모후의 휘신도장으로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신사에 제하기를 「8음도 수군 은질과 양도수군 광협 관달 영길은 적을 사로 잡은 공이 있으니 모두 중윤을 제수하라」고 하였다. 무술에 제하기를 「왕자에 동적(동번의 적)이 정변진을 포위하였을 때 별장 정광순은 역전하여 적을 물리치고 진하에서 죽었으니 그 공이 심히 크다 마땅히 금오위랑장을 추증하라」고 하였다. 8월 임자에 건덕전에서 화엄경도장을 설하였다. 경신에 건덕전에 거동하여 시조하고 선정전에 물러나와 시중 최제안과 평장사 최충 등을 불러서 시정의 득실을 논하였다.

 

 9월 기묘에 왕이 보제사에 행차하여 승을 공양하였다. 계미에 치사한 상서좌복사 최보성과 우복사 조옹과 상장군 이응보와 김홍광이 연로하므로 주식과 의복을 사하였다. 을유에 내전에 백좌인왕경도장을 3일간 설하였다. 정유에 임진현인 배행이 제지를 천단(교)하여 조경 등 7인의 직을 제수하였으니 법대로 하면 마땅히 교수될 것이나 때마침 사로 말미암아 방면되어 귀향하였다. 을해에 구정에서 친히 년 80 이상의 관원과 백성 남녀의 효자 순손 의부 절부 환과 고독 폐병자들에게 향연을 베풀고 물품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병오에 묘통사에 행차하여 행향하였다. 동 10월 계축에 유사가 주하기를 「궁전 성문 사원 관명 부호로 어명과 동음인 것은 모두 고치도록 하옵소서」라고 하였다. 병진에 회경전에서 소재도장을 설하였다. 11월 무자에 시중 최제안이 졸하였다. 경인에 8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11월 병오 삭에 백관이 건덕전에 나아가 성평절을 하하니 재추와 급사중승 이상의 시신을 선정전에서 향연하였다. 성평절은 왕의 생일이다 매양 이 절일을 맞이하면 국가는 외제석원에서 기상영복도장을 7일간 설하고 문 무 백료는 흥국사에서 동서 양경 사도호 8목은 각기 소재의 불사에서 행함을 항식으로 하였다. 임술에 글단이 기거사인 주종백을 보내 와 부의하였다.

 

정묘 원년 춘 정월 병술에 제하기를 「갑신년중에 관적이 동북로를 침략할 때 군사 이섬한 등 40인이 선봉이 되어 전승하였음을 아뢰어 왔으니 각기 차등있게 상직하라」고 하였다. 정해에 제하기를 「작고한 중추원사 임유간은 충정으로 보필하여 공적이 실로 많으니 마땅히 특례로서 그 아들 양개에게 8품직을 제수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정유에 제하기를 「제주 부 군 현에서 는 해마다 성대하게 윤경회를 설하는데 외리들이 이것을 빙자하고 취감하여 써 (백성들을) 피폐케 할까 걱정되니 지금부터는 취포 오락하는 일은 다 마땅히 금단할 것이라」고 하였다.

 

임인에 사재경 노우로 지동북면 병마사를 삼고 형부시랑 삼사부사 이인정으로 서북면 병마부사에 충보하였다. 2월 병오 삭에 서북로 병마사 양대춘이 주하되 「관하의 연주방어장리 군민 등 800인이 고하기를 방어부사 소현은 부임(하차) 이래로 농상을 권과하고 민서를 서휼하여 정적이 현저하다 하므로 이에 승문하나이다」고 하거늘 제하여 상서이부로 하여금 규제에 준하여 양용토록 하였다. 기미에 연등으로 봉은사에 행차하고 이튿날 친왕과 근신을 향연하였다.

 

임술에 글단이 충순군 절도사 소신미와 수전중소감 강화성 등을 보내와 정종으로 우궁에 제하거늘 왕이 나아가서 참제하였다. 정묘에 도병마사가 주하기를 「동번추장 아두간은 내부한 이래로 오래 은상을 입어 왔는데 우리를 배반하고 글단에 투화하니 죄가 막대하나이다 그 당의 수령 고지문 등은 지금 번경에 있사오니 청컨데 가만히 군사를 보내어 붙잡아 관내로 끌어들여 그 연유를 추고하고 율에 비추어 죄를 과하소서」한데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갑술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3월 을묘에 일식하였다 어사대가 주하기를 「춘관정 유팽과 태사승 유득소 등은 천상에 혼미하여 밀 아뢰지 않았사오니 청컨데 그 직을 파하소서」한데 제하여 「용서하라」하거늘 다시 박주하기를 「일월식은 음양의 상도이므로 역산이 어그러지지 않으면 그 변을 험증할 수 있사온데 관원이 그 적임자가 아니고 사람이 그 직책을 다하지 못하였사오니 이찌 마땅히 관전을 쫓으리까 청컨데 전주데로 죄를 과하소서」하니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계미에 건덕전에서 친히 선약도장을 5일간 설하였다. 병술에 동여진의 봉국장군 사이라 등이 와서 토물을 바침으로 귀덕장군을 가수하였다. 신묘에 문하시랑 평장사 황보영이 상언하기를 「신이 후사가 없사오니 바라옵건데 외손 김록숭로 후사를 삼게하소서」한데 이를 청종하고 녹숭에게 9품 벼슬을 주었다. 무술에 동여진장군 야어해 등 8인이 각기 그 무리를 거느리고 색(관)에 와서 납관하거늘 전택을 사하여 내지에 살게 하였다. 하 4월 병오에 건덕전에 거동하여 시조하고 또 선정전에 거동하여 재신과 어사대를 불러서 시정의 득실을 논하였다. 정미에 최충으로 문하시랑을 삼고 김령기로 문하시랑평장사를 삼고 김원충으로 내사시랑평장사를 삼고 박유인으로 상서좌복야 참지정사를 삼고 이자연으로 이부상서 참지정사를 삼았다.

 

무오에 치사한 수태위 이응보에게 개부의동삼사를 가수하였다. 계해에 왕이 봄부터 비가 오지 않으므로 정전을 피하고 상조를 철하며 도재를 끊고 다만 포해만 쓰고 중외로 하여금 여수케 하였다. 갑자에 대묘에 체하였다. 을축에 무신 고열로 수사공 상서좌복사를 삼고 하흥휴로 수공부상서를 삼았다. 정묘에 친히 백좌인왕도장을 회경전에 설하고 구정에서 승 10,000명을 공양하였다. 신미에 김정신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계유에 동여진의 아가주 등이 와서 토물을 바침으로 평원대장군을 제수하였다.

 

5월 정축에 동여진 장군 오어내가 내조하였다. 기묘에 크게 비가 왔다. 을미에 문하성이 주하기를 「시우가 이미 흡족하오니 청컨데 상선을 회복하소서」한데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무술에 동여진의 대상 오불차가 내조하였다. 기해에 왕이 현종의 휘신도장으로 현화사에 거동하였다. 6월 을사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무신에 제하기를 「법률은 형벌의 단례이다 밝으면 형에 왕람이 없고 밝지 않으면 죄가 경중을 잃게 된다 지금 시행되는 율령은 혹 많이 잘못됨이 있을까 진실로 걱정되니 시중 최충으로 하여금 여러 율관을 모아 거듭 상교를 가케 하여 힘써 타당함을 쫓고 서산업도 역시 고정토록 하라」고 하였다. 을묘에 왕이 공경대부를 거느리고 봉은사에 행차하여 왕사 결응으로 국사를 삼았다. 정사에 최충 등을 문덕전에 소견하고 군국의 서무를 하문하였다. 경신에 동녀진의 영새장군 노도와 귀덕장군 야사로 등이 와서 토물을 바치므로 사고를 회화장군으로 제수하였다. 을축에 글단이 고무제 등이 내투하였다. 경오에 동여진의 사이불 등이 내조하였다.

 

 추 7월 갑술 삭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경진에 제하기를 「수사도 좌복사 장극맹은 오랫동안 변방에 현저한 공을 세워 오직 나라만을 생각하고 집을 잊었으니 마땅히 수총을 내려서 권회함을 보이도록 하고 그 자손은 상례로 음보하는 이외에 가히 일자에게 관을 특사할 것이라」고 하였다. 장연현민 문한은 신들렸(탁신)다고 가언하고 미쳐서 그 부모를 죽이고 또 친매와 소아 등 4명을 죽이니 기시하였다.

 

상서형부가 주하기를 「현령 최덕원과 위 최숭망 등은 선정으로 화민하지 못하고 불상의 변을 일어나게 하였사오며 또 신보함이 늦었사오니 마땅히 그 직을 파하도록 하소서」한데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신사에 예부상서 이수화로 서북면 추동번병마사를 삼고 병부시랑 삼사부사 박종도로 동북면병마부사를 삼았다. 임오에 재상을 문덕전에 소견하고 시정의 득실을 하문하였다.

 

무자에 최유선으로 어사잡단을 삼고 김의진으로 전중시어사를 삼았다. 임진에 중추사 왕총지로 서북면중군사겸 행영병마사를 삼았다. 8월 무신에 어사대가 주하기를 「근일에 이희로와 홍덕위를 감찰어사에 제수하였사오나 희로는 성질이 조급하여 중외관을 역사하면서도 치적을 이룬 것이 없고 덕휘는 정종의 상제가 다하지 않은 금년의 등석에 위위주박 서성의와 더불어 술을 마시고 음락을 벌려 마음껏 환락을 극하여 조금도 신자의 의가 없사와 모두 풍헌직으로는 합당하지 않사오니 청컨데 파출하옵소서」한데 허락하지 않으므로 다시 박주하기를 절직하게 하니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신해에 친히 금강도장을 문덕전에 5일간 설하였다. 갑자에 동녀진의 유원장군 무이로와 아두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기사에 몽라고촌 앙과지촌 등 30부락의 번장이 무리를 거느리고 내부하였다. 9월 을해에 왕이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정축에 송상 임기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임오에 글단이 복주관내 관찰사 송린을 보내 와서 왕을 책봉하니 그 책문에 이르기를 「마한 땅을 생각하니 본래 용절의 나라라고 일컬었다.」대대로 왕봉을 이어 받았고 질품은 인작이 높았으니 금려를 나누어 주어 영관을 제후에게 표시하였고 동로를 주어 사방에 전정케 하였다. 이에 그대는 시대에 걸출한 재능에 속하니 진실로 찬복의 권을 받을만 하도다. 좋은 때를 가려서 휘전을 펴노라. 권지고려국왕사 왕휘는 기운의 수에 부응하고 영특한 영기를 모았도다. 천린이 구룡보다 훨씬 뛰어나니 멀리 가서를 밝혔고(천린향수어구룡) 일관이 숭산과 화산보다 높았으니(일관편숭어숭화) 일찍 유경을 빛나게 하였다. 문무의 전재를 지니고 충효의 대본을 알았도다. 어릴 때(승의)부터 도가 있어 실가를 이루매 현량을 추대하였도다.

 

고요히 정순을 지키고 움직이면 예악을 따랐도다. 환 문의 패업을 사모하고 위 곽의 병부를 정통하였도다. 그 영도를 당하게 하고 이 숙회를 쌓았도다. 사신이 궐정에 고함에 미쳐 번국의 귀존이 빠르도다. 능히 혜택은 일방에 흡족하고 정의는 군망에 충협하도다. 노장이 이에 이르렀으므로 총수를 지체하기 어렵도다. 이러므로 들어나게 자륜을 내려서 특히 현사를 세우게 하노라 의지하여 좌상으로 삼고 높혀서 삼사에 올리며 뛰어서 어귀한 숭계를 밝게하고 넉넉하게 공을 표창하는 이름을 사하노라 가득히 실부를 통하고 크게 청훈을 움직이게 하라.

 

아아 주천왕(주무왕)이 강태공을 중히 여겼으나(비웅) 다만 제나라 땅을 멀리 나누어 줌에 그쳤고 한고조가 백마를 형하였으나 인하여 유씨종족을 납약하였으니 옛일을 상고하여 보아도 은례가 이러함이 드물다. 유원한 복조를 점쳐서 더욱 광합의 성을 굳게 할지어다. 힘써 훈언을 지켜서 우러러 신우를 순히 하라. 가히 개부의동삼사 수태보겸 시중 상주국을 특수하여 고려국왕을 봉하고 식읍 7,000호에 식실봉 1,000호로 하며 겸하여 광시리치갈절공신호를 사하노라」고 하였다. 동 10월 갑진에 치사한 문하시랑 평장사 황보영이 졸하였다. 을사에 동여진 장군 고도달 등 4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정미에 동여진 몽라 등 촌의 고무제 등 312호가 내부하였다. 경신에 진주목사 사재경 최복규가 주하기를 「포민 13,000여호를 초안하여 그 업에 복귀시켰나이다」고 하거늘 왕이 가장사지냈다. 11월 정축에 동여진 장군 마지 고사 등 46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을축에 재신을 문덕전에 소견하고 시정의 득실을 의론하였다. 병신에 상서이부가 주하기를 「엎드려 선지에 준거하오면 모든 내외 대소위문의 관원을 모두 한 사람씩 감하도록 하고 다만 순변관사는 그대로 두라고 하였사온데 지금 살펴보니 패서 산남도의 주목은 일은 많은데 사람은 적어서 사무가 많이 옹체되어 심히 불편하오니 청컨데 악 목 주 부 원수는 모두 본래대로 하여서 길이 정제로 삼으소서」한데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12월 신축 삭에 치사한 문하시랑 평장사 이단이 졸하였다. 기유에 연덕궁비 이씨가 아들을 낳음으로 이름을 휴라고 사하였다. 경술에 상서이부가 주하기를 「구제에는 모든 관료가 의례히 스스로 상장하여 청로하지 않을 경우에는 나이 69세가 되면 세말에 해면시켰습니다 이제 다방의 태의소감 김징악은 치사할 나이가 되었사오니 마땅히 해임하게 하소서」한데 제하기를 「징악은 명의라 직이 또한 근시이고 보니 수년만 더 공직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병진에 호부상서 박성걸로 서북면 행영병마사를 삼았다. 정사에 동여진의 야고와 서여진의 고사 등이 내조하였다.

 

무자 2년 춘 정월 경오 삭에 조하를 쉬었다. 을해에 동여진의 회화장군 구라마리불 등 40인이 와서 명마를 바치므로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윤월 경자 삭에 대묘에 고삭하였다. 병오에 동여진의 귀덕장군 사이라와 유원장군 사시하 등 35인이 와서 토마를 바쳤다. 경술에 동여진의 회화장군 도구라 등 38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신해에 동여진의 영새장군 고지지 등 24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글단이 천우위 대장군 왕택 등을 보내 와 국신을 전하였다.

 

 2월 신사에 여수하였다. 갑신에 연등하였다 망일(15일)인 계미는 한식이었기 때문에 이날에 와서 행하였다. 3월 경자에 어사대가 주하기를 「먼젓달에 내리신 제령을 엎드려 살피건데 파종이 시작되었는데 비는 시기를 어기니 깊이 두려워하는 바이다 병술년의 사사를 베풀고 반시한 진제조목중에 가히 시행할 수 있는 일을 아직 시행하지 못한 것은 빨리 유사로 하여금 거행토록 하라 하옵기에 신등은 이미 제지를 쫓아 시행하였나이다 다만 지금 대운(금제) 대안(개풍) 양사의 역이 바야흐로 일어나서 정장들이 농사를 제폐하고 있사오니 일부가 불경하면 반드시 주린자가 있다 하였사온즉 삼시의 농무를 어찌 빼앗을 수 있겠나이까 또한 하물며 사서에 말씀하시기를 일체의 토목역사는 3연간 정파하라고 하니 온 나라가 기뻐하여 모두 덕음에 감격하였는데 끝내 시행되지 않았사오니 신은 나라의 큰 보배라 버릴 수 없사온즉 식언한 비난이 혹시 이로 말미암아 일어나지 않을까 하나이다 엎드려 바라옵건데 양사의 역사는 모름지기 농한기를 기다려서 하옵소서」한데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계묘에 정종의 정신왕비를 높혀서 용신왕후라 하였다. 신해에 소재도장을 내전에 설하고 경죄는 방면하고 (조세)포흠을 면제하여 주었다. 갑인에 연창궁주 노씨가 졸하였다. 을축에 우제하였다. 하 4월 경오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여 헌난설경을 들었다 고사에는 산림에 행차하였다가 환궁할 때는 반드시 이 원에 머물러 불승에게 명하여 봉련을 타고 헌란에서 강법하도록하여 이것을 항식으로 삼았던 것이다. 갑술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갑오에 토산현에 서리가 왔다. 5월 갑자에 왕이 현화사에 행차하였다.

 

 6월 무진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계미에 중류를 제하였다. 정해에 후농을 제하였다. 동여진 수령 오사 등 26인이 내조하였다. 추 8월 경오에 금강명경도장을 회경전에서 설하였다. 병자에 정종을 대묘에 부제하였다. 9월 갑인에 동여진의 귀덕장군 아두 등 26인이 내조하였다. 병진에 백좌인왕도장을 회경전에서 3일간 설하고 구정에서 승 10,000명 외산 명사에서 승 20,000명을 공양하였다. 동 10월 갑술에 왕이 상로를 타고 제궁에 지숙하였다가 을해에 대묘에 협제하고 돌아와 신봉루에 거동하여 사하였다.

 

 11월 을미에 문하시중 최충 이하 양부 및 상참원으로 협향에 집사한 자는 모두 추은 하여 증급하였다. 무신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을미에 글단이 숭록소경 형팽년을 보내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신유에 글단이 동경회례사 체주자사 고경선이 왔다. 12월 을축 삭에 건덕전에 거동하여 생신축하를 받았다. 갑오 회일에 일식하였다.

 

기축 3년 춘 정월 을사에 동여진의 아골 등 32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글단이 소유덕과 왕수도를 보내 와 왕을 책봉하고 조하기를 「경은 왕봉을 이어 받아서 조업을 일으키고 제관에 장주를 올려서 직비 닦음을 가상한다 곡대에 예를 고람하니 마땅히 책함을 현사하고 겸하여 반사를 펴서 권회함을 보일 것이다

 

이제 정사 천우위상장군 소유덕과 부사 어사대부 왕수도를 보내어 절을 가지고 예를 갖추어 책명하고 아울러 차복 관검 인수 및 의대 필단 안마 제물을 별록과 같이 갖추어 사하노니 치착하거든 기수하라」고 하였고 책문에는 「짐이 궁궐에서 승조함은 조의 공이요 종의 덕이로다 청번에 건사하니 대자는 왕이요 소자는 후로다 비록 군웅에는 무위로써 엄하게 하였으나 또한 원예에게는 회유하여 이에 대의를 온전케하고 길이 홍도를 보전하도록 한다

 

그대는 왕봉을 계승하여 영화를 누리고 장주를 올려서 술직을 하여 왔다 일역에 군림하니 창용열숙의 방위(동방)에 살고 천정을 존숭하니 백마형생의 맹약(삽혈의 맹서)을 받들었도다 이에 정주의 명을 들어 책배의 의식을 행하노라 아아 그대 광시치리갈절공신 개부의동삼사 수태보겸 상주국 고려국왕 식읍 7,000호 식실봉 1,000호 왕휘는 옥조가 따스함을 먹음고 김구가 전아함을 풍겨서 도량은 발해를 평탄하고 풍채는 곤륜산보다 준수하며 승자의 서를 읽어 경륜의 방략을 깊게 탐구하였고 학령비술을 쌓아서 전벌의 기략을 깊이 알았다 삼한(삼수)이 나뉨으로부터 오패를 소흥하도다 인하여 윤지의 반시를 받게 되어 토성의 장이 되었도다 사방에 선시하니 광합의 명성이 신사에 빛났고 일변하여 도에 이르니 부순의 화가 조민에 흡족하도다 더구나 정공하여서 교만한 태도가 없고 충효하여서 공수의 절이 있도다 풍성하게 비거를 베풀어 제항을 계속하여 보내니 마땅히 곡대에 예를 상고하여 성부에 훈업을 그릴(도) 것이다 반열을 절석에 올리고 품질은 전차에 높이노라 왕봉을 승습하여 부세를 증가케 하고 인하여 공을 표창하는 명호를 주고 아울러 무상의 은전을 베풀고자 정사 천우위상장군 소유덕과 부사 어사대부 왕수도를 보내어 절을 가지고 예를 갖추어 그대를 책명하여 수태전겸 중서령을 삼아 고려국왕으로 책봉하고 식읍 3,000호에 식실봉 300호를 가하고 잉하여 자충봉상사자공신호를 사하여 계훈은 본래대로 하노라 아아 주가 동궁을 사하니 더욱 전정의 병을 중하게 하였고 한이 현월을 반하니 더욱 번국의 권을 웅하게 하였다

 

고금에 걸쳐 총령함이 이와 같으니 힘써 방가를 진정하는 부탁에 부응하고 봉국의 정성을 잊지 말 것이다 공경히 짐의 말(비언)을 받들어 복록을 편안히 누릴 것이라」고 하였다 병오에 왕이 남교에서 책명을 받았다. 2월 을해에 최충으로 수태보를 이자연으로 수사도를 왕총지로 수사공 상주국을 정걸로 동지중추원사를 삼고 채충현으로 예부상서를 삼고 최연가 양감으로 좌우산기상사를 삼았다. 갑신에 제 평양공 기를 수태사 겸내사령으로 책봉하였다. 3월 계사 삭에 동북로감창사가 주하기를 「교주 방어판관 이유백은 성지를 잘 수리하고 기계를 수비하여 제군에서 으뜸갈 뿐만 아니라 또한 그가 부서하는 연성(회양) 장양(회양의 고현)의 이민 등이 말하기를 유백이 취임한 이래로 농사를 권장하고 백성을 존휼하였다 하오니 비록 만기로 교찬할 때라 하더라도 유임하도록 하옵소서」한대 왕이 가상히 여겨 상서이부에 부의케 하였다.

 

경자에 8월 이상의 국로인 상서우복사 최보성과 사재경 조옹과 태자첨사 이택성 등을 합문에서 향연하였는데 왕이 친림하여 술을 내리고 인하여 보성 옹 등에게 각기 공복 1습과 복두 2매와 뇌원다 30각을 사하였으며 택성에게는 공복 1습을 사하여 합문에서 말을 타고 정아문으로 나가도록 허하니 3노가 굳이 사양하였다 다음날 서로의 남녀와 및 의부 절부 효자 순손 환과 고독 폐병자를 구정에서 향연하고 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계묘에 위정으로 상서좌복사를 삼고 위숭으로 섭호부상서를 삼고 오연으로 섭공부상서를 삼았다. 을사에 글단에 잡혀간 봉주의 희달 등 30인이 돌아왔다.

 

갑인에 동여진의 마리해 등 20인이 와서 양마를 바쳤다. 무오에 이인정으로 상서좌복사 주국을 삼고 김정준으로 중추원사판어사대사를 삼고 정걸로 비서감 지중추원사를 삼고 김원정으로 예빈경 동지중추원사를 삼았다. 하 4월 을축에 서여진의 부거 등 20인이 와서 양마를 바쳤다. 정해에 동여진의 봉국장군 사이라 등 79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무자에 평장사 김원충의 딸을 맞아 비를 삼았다. 5월 갑자에 문덕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박인수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6월 무진에 동번해적이 임도현(강원도 통천 남 20이)에 침관하여 17명을 잡아갔다. 임신에 동북로 병마사가 주하기를 「운암현(강원도 통천남 50이)의 절충군 대정 유고 등 11인이 밤에 순행하여 천정술(함남덕원)에 이르렀을 때 번적 40여인이 있어 둔중에 돌입하니 군졸이 모두 도망하여 숨는지라 유고가 몸을 날려 분격하니 적이 드디어 흩어져 도망하였다고 하오니 청컨데 공을 헤아려 수직하소서」라고 하였다. 무자에 제하기를 「해마다 6월로부터 입추까지 얼음을 나누되 치사한 여러 보신들에게는 3일에 한 번씩 하고 복사 상서 경 감 대장군 이상에는 7일에 한 번씩 함을 영제(정제)로 하라」고 하였다. 추 7월 정유에 동번해적이 금양현(강원도 통천)에 침관하여 20명을 잡아갔다. 8월 기사에 송의 태주 상인 서찬 등 71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신사에 송의 천주상인 왕이종 듣 62인이 와서 진보를 바쳤다. 9월 경자에 연덕궁비가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증라고 사하였다. 동 10월 정해에 여수하였다. 11월 임인에 탐라국의 진위교위 부을잉 등 77인과 북여진의 수령 부거 등 2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무오에 동남해선병도부서사가 주하기를 「일본 대마도관이 수령 명임 등을 보내어 우리나라의 표풍인 김효 등 20인을 압송하여 금주에 이르렀읍니다.」고 하니 명임 등에게 예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12월 기미 삭에 글단이 전중소감 마우를 보내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경인 4년 춘 정월 기축 삭에 조하를 쉬었다. 동북면 도병마사 박성걸이 주하기를 「상년(작년)10월에 해적이 진명(함남 덕원남 24이)병선 2소를 빼앗아 갔으므로 병마록사 문양열이 ? 병선을 거느리고 원흥(함남 정평)도부서판관 송제한과 더불어 적혈에 추지하여 여사를 불사르고 20여급을 목베고 돌아왔사오니 그 공이 상줌직하나이다」고 하거늘 제하여 「도 병마사에 회부하라」고 하였다. 계묘에 문하시중 최충으로 수태부를 삼았다.

 

 병오에 동북면 병마록사 위위주부 박용재가 계사(임지 부임의 인사)하매 제하기를 「번인으로서 내조코자 하는 자가 있어도 적수 나불이 아니면 입조를 허하지 말도록 하라」고 하니 이것은 번류 300인이 경관에 늑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을묘에 김원충으로 문하시랑 평장사 판상서형부사를 삼고 이자연으로 내사시랑 평장사를 삼고 정걸로 중추원사 한림학사승지를 삼았다. 3월 병오에 동여진의 영새장군 염한 등 12인과 유원장군 아가주 등 30인과 중윤 잉우헌 등 4인과 장군 요라나 등 38인이 와서 양마를 바치고 회화장군 아가주 등 6인은 표서피를 바치므로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는데 염한 등 15인은 일찌기 변방을 침범하였으므로 늑류하도록 하였다.

 

하 4월 신유에 현릉과 선릉에 배알하고 사를 베풀었다. 계유에 발해의 개호 등이 내투하였다. 계미에 유사에게 명하여 동여진의 대걸라니촌과 소걸라니촌의 강계를 검정하여 써 관적에 대비하였다. 6월 무진에 동번 해적이 열산현(강원도 간성북 30이)의 영파술에 입관하여 남여 18인을 노략하여 갔다. 을묘에 제하기를「동북계 연해 성보의 군민이 소업에 안정하지 못하니 원인을 회유하고자 할진대 원사를 신중히 가림만 같지 못한지라 마땅히 병부상서 양감으로 금년추동번병마사를 삼을지어다」고 하였다.

 

추 7월 병술 삭에 동번의 적이 파천현(함남 안변동 90이)에 입관하였다. 경자에 복더위로 나성 수축을 정지하였다. 무신에 동여진의 추장 골라개 등이 와서 토물을 바치고 또 번인에게 납치된 남녀 4인을 속환하였으므로 금백을 사하였다. 8월 신사에 동여진의 아가주 염한 사이라 등이 번인에게 납치된 우리의 정변진부사 황보충과 대정 송영을 돌려 보냈다. 9월 정해에 글단의 동경회례사 충용군 도지휘사 고장안이 왔다. 을해에 동북면 병마사가 주하기를 「해적이 열산현을 노략하였으므로 병마록사 문양열을 보내어 전함 23소로 초자도에 까지 추지케 하였더니 분격하여 크게 패퇴시켜 9급을 목베고 그 부락의 옥사 30여소를 불사르고 전함 8소를 파훼하고 병기를 노획한 것이 백으로 헤아릴 수가 있사오니 청컨데 그 공을 상하소서」한대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을사에 백고좌 인왕도장을 회경전에서 3일간 설하였다.

 

 동 11월 을유에 진명도부서 부사 김경응이 주사를 거느리고 해적 2소를 열도에서 격패하여 수십급을 목베어서 바쳤으며 빠져 죽은 자도 심히 많았으므로 유사에게 명하여 논상하도록 하였다 윤월 임술에 글단의 횡선사 광의군절도사 소질이 왔다. 신미에 글단의 한아 조일이 내투하였다. 12월 갑신에 글단이 고주관찰사 소옥을 보내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신묘 5년 춘 정월 계축 삭에 조하를 쉬었다. 계해에 진관사에 행차하여 새로 이룩된 화엄 반야경을 전독하였다. 2월 계사에 경시서에서 불이 나서 120호가 연소되었다. 유사에서 명하여 재와를 급여하였다. 기미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가 다음날 명하여 화연을 베풀고 근시를 불러 동연하였다. 경자에 백령진의 성낭 28간 및 민가 78호가 불 탔다. 안찰부사 상서병부원외랑 유숙이 탄핵하여 주하기를 「진장 최성도와 부장 최숭망 등이 근신하지 않아서 화재를 일으킨 것이오니 청컨데 현임을 삭제하여 죄를 과하소서」한대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3월 임술 천상에 도우하였다. 무진에 상서좌복사 이수화가 졸하였다.

 

임신에 천상에 도우하였다. 하 4월 신사 삭에 우제하였다. 최석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임오에 보제사에 행차하여 오백나한제를 설하였다. 을미에 제하기를 「광인관에 포류한 동여진의 적수 아골 등 77인을 방환하라」고 하였다. 경자에 내사문하사가 주하기를 「중흥 대안 대운사 등의 새것을 창건하고 옛것을 보수하는 토목의 역사가 일어났사온 바 모든 영위하는 공사가 급절한 것이 아니어늘 장부는 주야로 피곤하고 향궤는 운반에 수고로워 처가 돌아오면 자식이 가고 하여 도로에 서로 잇달아 춘 하 이래로 조금도 쉴 사이가 없읍니다 황차 거년은 흉년이 들어 백성들은 식량이 결핍되어 힘이 능히 감당하지 못하나이다 꼭 공사를 하여야 한다면 농한기를 기다려서 하옵소서」한대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정미에 내사문하가 주하기를 「제하여 황보연으로 응양군 대장군 겸섭대부경을 삼고 진언으로 좌우위대장군을 삼고 노능훈으로 신호위 대장군을 삼으셨으나 세 사람은 일찍 죄를 지어 삭직당하였으며 비록 사로 인하여 복관되었으나 다시 공효가 없사오니 천탁됨이 합당하지 않습니다 청컨데 파직하소서」라고 하니 제하여 가타하였으나 오직 황보연은 파직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무신에 구정에서 친초하였다. 5월 정사에 한재로 사하였다. 신미에 재우하였다. 추 7월 경술에 흥왕사에 행차하였다.

 

기미에 일본 대마도가 사인을 보내어 피죄도인 양한 등 30인을 압환하였다. 무인에 동여진의 원보 고사 등 26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8월 기묘 삭에 중추사 예부상서 정걸이 졸하였다. 신축에 친히 년 80 이상의 승속 남여 1843인과 독 폐병 승속 남여 653인과 효자 순손 절부 14인을 구정에서 향연하고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갑진에 구주랑장 강린과 창주별장 강언 최립 등이 번적 6인을 포살하였다. 을사에 동여진의 귀덕장군 두야불 등 21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9월 을유 삭에 동북면 병마부사 김화숭이 주하기를 「여진이 변방에 침관하므로 군사를 보내어 59급을 격참하였나이다」고 하거늘 합문통사 사인 서단을 보내어 사교하기를 「너는 병모에 온오가 많아 멀리 곤기를 분담하고 융추가 난을 일으켜 우리 변방을 침요함을 정탐하여 묘한 계획을 써서 기습을 하고 이에 전첩을 상주하니 부괵이 많음을 돌아볼 때 가히 그 노고를 포장하겠도다 이제 합문통사사인 서단을 보내어 그곳에 가서 선유케 하고 너에게 의대 채단 은기를 사하고 그 군전의 원장에게는 등차에 따라서 또한 필단을 사하노라」고 하였다.

 

갑인에 서북면 병마사 박종도가 주하기를 「일전에 군장을 거느리고 관외를 순행하다가 동번적을 만나서 10여급을 격참하고 전마 20필과 개복을 무수히 빼앗았나이다」하거늘 왕이 이를 우장하였나이다. 동 10월 정해에 동북면 병마사가 주하기를 「번적이 변방을 침관하기에 병마록사 윤보경과 충 장주 방어사 김단 등을 보내어 추격하여 20여급을 참하였나이다」고 하였다. 경인에 삼각산에 행차하였다가 임인에 경도에 돌아왔다. 정해에 글단의 회례사 검교 공부상서 야율수행이 왔다. 11월 경신에 팔관회를 설하였다. 월식이 망월에 되므로 13일로서 초회를 하였다. 12월 무인 삭에 글단이 은주자사 유종비를 보내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임진 6년 춘 정월 무신 삭에 조하를 쉬었다. 무인에 최유선으로 한림학사를 삼았다. 병진에 동여진의 회화장군 포가주 등이 와서 양마를 바쳤다. 병인에 동여진의 정보 마파 등 48인이 정주관외에 들어와서 편호되기를 청하거늘 전택을 사하여 내지에 살게 하였다. 갑술에 서여진의 영새장군 고반지와 동여진의 귀덕장군 다로 등 수십인이 와서 양마를 바쳤다. 2월 정축 삭에 안서도호부에 지진하였다. 무인에 연덕궁주 이씨를 책하여 왕비로 삼았다. 경진에 동번의 원보 아린 등 29인이 와서 양마를 바쳤다. 신사에 황성내 서쪽에 사직단을 새로 세우고 무자에 친히 행차하여 제사하고 집사원리에게 작 1급을 사하고 수가한 군사에게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으며 또 축단감역원리에게 직 1급을 사하였다. 3월 정미에 왕이 대안사에 행차하여 승을 공양하였다.

 

경술에 이자연으로 수태위를 삼았다. 을묘에 김원정으로 어사대부를 삼았다. 무오에 명하여 태사 김성택에게 십정력을 찬케하고 이인현에게 칠요력을 찬케하고 한위행에게 견행력을 찬케하고 양원호에게 둔갑력을 찬케하고 김정에게 태일력을 찬케하여 명년의 재상을 가시도록 하였다. 임술에 왕이 현화사에 행차하여 승을 공양하였다.임신에 삼사가 주하기를 「탐라국의 세공하는 귤(귤자)을 개정하여 100포로 하고 길이 정제로 삼으소서」한데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하 4월 을묘에 왕무숭으로 중추원 좌부승선을 삼고 최성절로 중추원 우부승선 전중시어사를 삼았다. 병술에 대안사에 행차하여 수리공사가 필하였으므로 낙성도장을 설하였다. 정해에 이인정으로 검교사도 상서좌복사를 삼아 잉하여 치사케 하였다. 임인에 번인에게 잡혀갔던 모아진이 남부 16인을 거느리고 돌아왔다.

 

 5월 경술에 북로 삼살촌(북청지방)의 적괴 고연이 번병으로 더불어 치담역을 포위하니 병마록사 김충간과 자주방어판관 장립신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싸워 크게 파하고 승승추격하여 50여급을 베고 사로잡았다. 갑인에 왕이 한재로 정전을 피하고 상선을 감하고 중외로 하여금 여수케 하였다. 을묘에 동여진의 추장 고지문 등 25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무오에 제하기를 「지난 통화연간에 글단병이 입관하였을 때 우리 황고 현종께서는 난을 산남으로 피하셨는데 그때 상서좌복사 박섬은 부설(말고삐 잡는것)호종하여 근로가 현저하였고 경성을 수복함에 미쳐서도 종시 일절로 사직을 안정시켰으니 가히 각상에 도형하여서 후인에게 보이도록 하라」고 하였다.

 

계해에 문무상참 이상 및 치정(치사)한 구신에게 명하여 각기 봉사를 올려 시정의 득실을 진술하게 하였다. 6월 을해에 금강도장을 문덕전에 설하고 비를 빌었다. 큰 비가 왔다. 무인에 송의 진사 장정이 내투하매 비서교서랑을 제수하고 교하기를 「위의 악의는 저 연왕을 돕고 오의 육기는 진실로 돌아갔으니 모두 때를 만나매 계합이 동일하도다 너는 이사의 명류요 삼장의 세습으로 준조에 올라 성가를 날리고 유아함을 빛내어 몸을 바르게 하도다 천하를 주유하여 매인 바가 없으니 장부의 뜻을 폄이요 인연이 본래 있어 군자의 나라에 이르렀도다 이미 선비를 얻은 창운에 합하니 깊이 어진이를 생각하는 안타까움을 위로하도다 너에게 문직을 제수하여 나의 조강을 돕게 하나니 타산의 돌은 진실로 나의 소용에 부합함이요 합포의 구슬은 돌아감을 생각지 말고 미리 신임할 수 있는 한결같은 마음(견일지심)을 밀어(추) 마침내 천승의 국운(응천지운)을 도울지어다 지금 너에게 교서 1통과 아울러 의대와 채단과 백은 등 물을 사하나니 이르거든 받을 지어다」고 하였다.

 

을묘에 동여진의 고지문 등이 배를 타고 와서 삼척현의 임원술을 공격하니 수장 하주려가 군사를 거느리고 성을 나와 군중에 말하기를 「적군은 많고 우리 군사는 적으니 만약 사람마다 스스로 싸움을 하되 그 몸을 아끼지 않으면 싸움은 반드시 이길 것이다」라고 하고 드디어 방패를 끼고 칼을 휘두르며 돌진하였다 때마침 안변도호판관 김숭정이 소관제술을 순행하다가 근경에 이르매 적이 그 고각소리를 듣고 원병이 곧 이를 것이라고 생각하여 드디어 놀라서 서성거리거늘 주려군이 승승하여 쳐서 10여명을 사로잡고 목베니 적이 분궤하였다. 추 7월 무오에 최유선으로 형부상서를 삼고 이령간으로 예부상서를 삼고 왕조로 호부상서를 삼고 유규로 공부상서를 삼고 김현으로 산기상시를 삼았다. 8월 계유 삭에 제하기를 「한식 문질 우기리 김열 등은 성고께서 남순하실 때 호종하여 공이 있으므로 모두 좌우위상장군을 추증하라」고 하였다. 을유에 치사한 검교태사 상서좌복사 최보성이 졸하매 하룻동안 철조하였다.

 

송의 상인 임흥 등 35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신묘 송의 함주인으로 번인에게 잡혀갔던 고사문이 동여진으로부터 내투하였다. 9월 계묘 삭에 김원정으로 동지중추원사를 삼고 이영간으로 한림학사를 삼았다. 송의 상인 조수 등 26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임자에 송의 상인 소종명 등 4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기미에 동여진의 장군 사시하 등 40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경신에 백고좌도장을 회경전에서 3일간 설하고 구정과 제명사에서 승 20,000을 공양하였다. 동 10월 계미에 질 경을 책하여 수태보 겸상서령을 삼았다. 병술에 소강한의 평로진에서 전사한 공을 녹하여 흥위위상장군을 증하였다. 갑오에 질 개를 책하여 수태위 겸상서령을 삼았다. 11월 갑진에 선정전에 거동하니 어사대가 시정의 득실을 주론하였다. 을축이 장정으로 우습유를 삼았다. 12월 임신 삭에 글단이 영주자사 야율사청을 보내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갑오에 치사한 문하시랑 평장사 김령기가 졸하매 3일간 철조하였다.

 

계사 7년 춘 정월 병오에 백기가 관일하여 하늘에 펼쳐졌다. 병진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2월 을해에 혜성이 고루에서 나와 익으로 들어가니(혜 출고루입익) 길이가 장여나 되었다. 정축에 동여진의 아부한 등 33인이 와서 준마를 바치고 또 번인에게 잡혀간 사람 6명을 속환하였으므로 직상을 차등있게 주었다. 탐라국 왕자 수운나가 그 아들 배융교위 고물 등을 보내 와 우황 우각 우피 나육 비자 해조 구갑 등 물을 바치므로 왕은 왕자에게 중호장군을 제수하고 공복 은대 채단 낙물을 사하였다. 3월 무신에 우상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하 4월 정유에 친히 구정에서 초하였다. 6월 계미에 왕이 보살계를 건덕전에서 받았다. 추 7월 무오에 예사가 주하기를 「삼가 당서를 상고하오면 현종 천보 8연(서기 749연) 윤 6월에 경인에 상이 친히 대청궁에 알현하고 성조 현원황제(노자) 등 다섯 존호를 책상하고 함원전 거동하여 군신의 상책함을 받고 천하에 대사하였사오니 이 제도에 의하여서 매 윤월 삭에 는 편전에 거동하와 시조하옵소서」한대 제하기를 가하다 하였다.

 

 기미에 이자연과 왕총지로 문하시랑 평장사를 삼고 김정준과 박성걸로 모두 참지정사를 삼았다. 신유에 동여진의 회화장군 고도달 등 30인이 와서 말(마)을 바치고 아울러 번인에게 잡혀간 사람을 돌리니 물을 사하되 등급을 가하였다. 윤월 계미에 동북로의 문 용 2주에 대수가 져서 표몰한 민호가 100여나 되었으므로 사신을 보내어 선위하였다. 8월 정유에 어사대가 상언하기를 「상서공부에서 받자온 제지에 의하면 나성 동남우의 언덕을 높인 것은 도읍의 허결함을 비보한 것인데 지금 냇물이 차서 평평하게 무너졌으니 마땅히 역부 삼사천인을 징발하여 수방하여야 되겠사온데 당사(어사대)에서 조사하여 본즉 그 안변부근은 모두 전답이 되어 있으므로 화곡을 손상할까 두려워 하오니 청컨데 수확을 기다리소서」하니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9월 갑신에 어사대가 주하기를 「궁성 밖의 제조 시신들이 숙야로 시종하옵는데 우숙할 곳이 없사옵니다 가만이 중국의 제도를 살펴보면 모든 사신들은 같이 사인원에 모인다 하오니 지금 제고원료들은 청컨데 한림원에 우숙하도록 하옵소서」한대 제하기를 가하다 하였다. 병술에 서경에 행차하였다. 경인에 안서도호부에 이르러 3일을 유하고 신묘에 북숭산 신광사에 이르러 나한제를 설하고 제왕 재추 시신을 향연하였으며 계사에 도호부의 남산에 올라가서 친왕 재추 시신을 불러 주연을 베풀고 밤에 이르러 파하였다. 동 10월 병신 삭에 일식하였다. 경자에 어가가 대동강에 이르러 누선을 타고 제왕과 재추를 향연하였다. 임인에 흥복사에 행차하였다가 드디어 대동강 누선을 타고 상장군 이상의 신료를 향연하였다. 갑진에 효순 의절 환과 고독을 향연하고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기유에 팔관회를 설하고 흥국사에 행차하였다.

 

계축에 동반 상참 이상과 서반 낭장 이상을 장락전에서 향연하고 포백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갑인에 중흥사에 행차하였다. 을묘에 차가가 서경을 출발하여 대동강 누선을 타고 동으로 강안을 바라보며 장군 정증 등 8인에게 활 쏘기를 명하니 낭장 유현의 쏜 화살이 강을 넘은지라 왕이 가장하고 드디어 제왕 재추 시신을 향연하였다. 병진에 유수사 호부상서 왕이보 등이 생양역(중화)에 이르러 하직하거늘 각기 공복 1습을 사하였다. 정사에 자비령의 미륵원에 이르러 행향하고 의복을 시주하였다 행차가 절령을 지날 때 한 부인이 길에서 두 아이를 안고 있거늘 왕이 가련하게 생각하여 쌀을 사하였다. 신유에 서경으로부터 돌아왔다. 11월 을축에 제하기를 「서경에 이르기를 한 사람이 원랑(319)하면 만방이 써 바르게 된다고 하였으니 태자는 나라의 근본인지라 태자를 정해 세움에는 적서의 분별이 있으니 이것은 종통을 중히 하고 민심을 귀일시키고자 함이라 무릇 국가를 가진 자는 이것을 급무로 삼는 것이니 연덕궁비의 장자 휴를 개명하여 훈이라 하고 책립하여 태자로 삼겠노라」고 하였다. 12월 병신 삭에 글단이 이주자사 소소를 보내 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갑오 8년 춘 정월 병인 삭에 조하를 쉬었다. 임신에 동여진의 중윤 영손 등 18인이 와서 명마를 바쳤다. 2월 계묘에 훈을 책하여 왕태자로 삼으니 그 책문에 이르기를 「생민이 있은 뒤로 임금을 두어 만기를 살펴 다스리게 하고 후사를 세우되 반드시 그 아들로 함은 백세를 지나도 변치않는 것이니 이는 통규인 것이오 사사로운 애정에 연유함이 아닌 것이다 짐이 그릇되히 백성의 원수가 되어 영원히 경복을 넓히고자 하는 바이다

 

나라의 근본은 안녕함을 세우는데에 굳어지고 손어머니는 신명이 복상을 많이 주는데 (석??(319))에 빛나게 된다 다만 면시(왕관)를 드리우고 생각에 잠기어 바야흐로 신기를 맡아 어진이를 기다렸더니 과연 능히 하늘의 도움을 입어 선궁(후궁)에서 왕같은 아들을 길렀도다 이미 진실로 총명하여서 이름이 높으니 마땅히 태자로서의 영귀를 누릴것이다 아아 너 장자 훈은 도량이 넓어 관용하고 숙성한 용자가 뛰어났도다 어릴 때부터 군희에 섞이지 않고 연로하고 유덕한 사람들과 친닐하여서 선도를 즐겨 들으니 사(중)해의 구가가 서로 흡족하고 뜰에 가득한 촉망이 모두 같도다 이러므로 자전의 부존에 올려서 청장의 준급을 보이노라 길진을 가려서 윤음의 택을 특히 풍성하게 내리노라 이제 정사겸태위 수문시랑 왕총지와 부사 겸사도 상서우복사 박성걸 등을 보내어 절을 가지고 예를 갖추어 너를 책명하여 왕태자를 삼노라 아아 유철이 7세에 태자가 되니(유철지칠세등저) 진실로 아름다운 일이요 주창이 삼조할 제 내수에게 물음(주창지삼조문수)은 가히 성근함을 기특하겠도다 너도 영도에 힘써 이 방열을 따르라 높은 지위에 나아갈수록 더욱 조심하고 정언을 오직 스승으로 삼을 것이다 가숙함을 들어내게 하고 또한 무감함을 소홀히 하지말라 나의 훈언을 명심하면 그 아니 갸륵하랴」고 하였다.

 

병오에 신봉루에 거동하여 대사하고 모든 유직자에게 1급을 가하였다. 계축에 종묘 산릉에 존향하고 군신을 건덕전에서 향연하며 폐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3월 갑술에 늑류된 동여진의 아골 등 59인에게 포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하 4월 경술에 이자년게 태부를 가하고 제하되 전에 파면된 원리를 특사하여 모두 복관시키도록 하였다.

 

 임자에 북(동)여진의 영새장군 고차 등 39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기미에 유선여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이 달에 급사중 김양지를 글단에 보내어 태자 책립을 고하였다. 5월 기묘에 국내 명산 대천의 신기에 총정이자의 공호를 가하였다. 탐라국이 사자를 보내어 태자 책립을 하하였으므로 사자 13인에게 직을 가하고 사공과 수행원에게는 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을유에 회경전에 벼락이 쳤다. 6월 정미에 왕이 내전에서 보살계를 받았다.

 

추 7월 경오에 송의 상인 조수 등 69인이 와서 서각 상아를 바쳤다. 을축에 왕자가 탄생하매 이름을 옹이라고 사하였다. 이달에 글단이 비로소 포주성의 동야에 궁구문란을 설치하였다. 8월 임자에 중추원사 김원정으로 서북면 병마사를 삼았다. 경신에 동로 병마사가 주하기를 「장주는 지대가 높고 또 험하며 성중에 우물이 없사오니 비옵건데(걸) 남문밖 평지에 설책하고 백성을 옮겨 살게 하되 위급할 때는 성중으로 들어가게 하소서」한대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9월 기사에 임진년 치담역의 적을 파한 공을 녹하여 군사에게 직을 차등있게 상하고 물품을 우후하게 사하였다. 경오에 송의 상인 황조 등 28인이 왔다. 동 10월 을미에 동여진의 유원장군 이다불 등 28인이 와서 준마를 바치고 우리나라 사람으로 잡혀간 신금 위봉 섬례 등 세 사람을 돌려보내고 또 말하기를 「번인 실빈 염한 비단 마리불 등 4인은 일찍 글단의 관작을 받고도 왕께서 이토 사람을 혜애하신다는 말을 듣고 입관하기를 원하였으므로 같이 다리고 왔나이다」고 하매 이다불 실빈 염한 비단 마리불에게는 직을 가등하여 사하고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갑진에 글단의 횡선사 익주자사 야율방이 왔다. 11월 갑자에 글단의 선유사인 익주자사 야율간이 왔다.

 

12월 경인에 글단이 복주자사 야율신을 보내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유사가 태조 공신 대광 천명 등 3,200인 에게 차제직을 추증할 것을 청하거늘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신해에 동궁의 시위 공자와 급사를 간택할 것을 명하였다.

을미 9년 춘 2월 을사에 동여진의 봉국장군 이다불 등 27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무신에 한식이므로 송의 상인 섭덕총 등 87인은 오빈관에서 황증 등 105인은 영빈관에서 황조 등 48인은 청하관에서 탐라국 수령 고한 등 158인은 조종관에서 향연하였다. 하 4월 신축에 우박(우박)과 눈이 왔다.

 

 5월 신유에 글단이 야율혁과 진의를 보내 와 왕을 책하니 조하기를 「경은 세훈을 이어 세워 문교를 성하게 닦고 진기한 직공을 바쳐서 황가에 존장사지냈다 번규를 크게 경사롭게 하여 청구를 무령하였다 예를 행함에 당하여서 함께 휴경할 것을 생각하노라 이에 특히 책함을 내리고 인하여 넉넉하게 회명을 가하여서 권상함을 밝히나니 응당 은영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제 광의군절도사 야율혁 등을 보내어 그 곳에 가서 예를 갖추어 책명하고 인하여 차로 관복 규검 등과 특사제물은 별록과 같이 갖추어서 사하니 지착하거든 영납하라」고 하고 책문에는 「왕자는 군후를 예우하고 만방을 회화하나니 동궁로월을 주어서 대번의 공무를 우례하고 번조를 주어서 왕실의 경성을 표하노라 전규를 상고하매 진실로 휴전을 받음직하다 짐은 가운을 크게 모으고 홍명을 힘써 따르노라 면절의 의가 마침 조신간(조우)에 교수되니 요소의 택이 마땅히 멀리 해우에 까지 입혀질 것이다 영진(길일)을 잘 가려서 곤명을 발하나니 광시치리 갈절자충 봉상공신 개부의동삼사 수태보 겸중서령 상주국 고려국왕 식읍 10,000호 식실봉 1,300호 왕휘는 원융하고 순유하여 충숙으로 이륜을 잡고 본덕으로 인을 사하며 한편 순수함이 모여서 주형이 정이하고 뛰어나게 영표함을 타고나서 나라를 이어 일으키고 전업(열)을 찬복하므로부터 환 문의 하업을 수립하고 진 하의 전봉을 무존하니 선정은 백성을 소생시켜 환요(즐거운 가요성)가 진실로 화하도다 빈왕하여 삭을 청하니 오래 사대의 성을 굳게 하였고 후율로 절후 바람을 점치니(후율점풍) 능히 수방의 직분을 삼가하도다.

 

 황가의 외폐가 되어 융마(한)의 중군(권)을 장하게 하였으니 실로 동고의 우려를 덜게 하고 따라서 북면의 힘을 바쳤도다 나라의 경사를 맞이하매 길이 세훈을 생각하고 이에 사행을 보냄에 임하여 특히 조책에 진가하여 태사로 승질하고 식읍도 증봉하여 유원의 은을 펴 보공의 전례에 맞도록 하노라 이제 정사로 광의군절도사 요주자사 겸어사 대부 야율혁과 부사로 숭록경 호군 진의를 보내어 절을 가지고 예를 갖추어 그대를 책명하여 수태사로 삼고 식읍 5,000호에 식실봉 500호를 가하며 다른 것은 본래 대로 한다 아아 난면팔장으로 그 예수를 특이하게 하고 상로구기로 그 문채를 밝게 한다 비물을 곡대에 읽히니(강) 영휘가 열국에 넘쳐 흐르도다 수례를 공손히 받아 길이 영도를 힘쓸지어다 더구나 융성한 시대를 당하여서 더욱 광영의 업적을 나타내어 군후에게 의표가 되고 후손에게 좋은 꾀(모)를 남겨 줄지어다 짐의 훈언을 보감으로 삼아 번영한 복사를 받도록 하라」고 하였다.

 

왕이 책명을 남교에서 받았다. 계해에 이주자사 소록이 와서 왕태자를 책하니 관고에 이르기를 「옛날에 제후들이 세자를 두게 됨은 열방을 정고하게 함을 중히 여기고 총사를 지킴이 어려움을 생각하여서이다 길이 조종을 빛나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적자를 세울 것이다 근자에 보내온 상주를 살펴보니 깊이 그대의 정성을 가상이 여기노라 이에 정삭을 받고 존왕함을 생각케 되도다 무릇 전봉하는 예가 없으므로 천조에 우러러 청명함은 진실로 근본을 부식하는 은택을 구하는 것이라 특히 구장을 쫓아서 힘써 영전을 받으라 광시치리 갈절자충 봉상공신 개부의동삼사 수태부 중서령 상주국 고려국왕 식읍 10,000호 식실봉 1,300호 왕휘의 아들 훈은 적덕의 두터움을 의지하고 이모의 아름다움을 받아서 어릴 때부터 울연히 아기를 이루어 모년 있어서는 어른에게 사양하고(모연양치) 사석에 나아가서 참현하였다 더구나 보계가 한정이 없을 것이고 창성한 연원이 점점 장원하리라 긍당긍구하니 이미 세풍을 극소하였고 배후배전 하니 이는 아울러 조전을 부연함이로다 삼한의 요지를 돌아보매 백제의 구명을 포괄하였으며 영화는 부모의 나라에서 나누었었고 작휘는 다시 공후의 처음이 되도다 나의 수원함을 보여서 너의 선상함을 넓게 한다 아아 어린 나이(환기지령)를 당하여서 사륜(조칙)의 은총을 흑번의 이등이요 현곤의 승화로다 마땅히 효경을 숭상하여 친안을 받들고 신후함을 돈가히 하여 공족들에게 의표가 될지어다 교만하지도 말고 게으르지도 말며 처음이 있고 끝이 있게하여 이 체명을 공경하고 자훈을 욕되게 하지말라 이에 특히 삼한국공을 봉하노라」고 하였다. 태자가 책명을 합문정에서 맞이하였다.

 

 을해에 크게 우박이 왔다. 추 7월 정사 삭에 도병마사가 주하기를 「글단의 전 태후황제께서 조칙으로 압록강 이동을 사하여 우리나라 봉경을 삼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혹은 성교를 두고 궁구란자를 두어서 점차로 구한계선을 넘어오니 이것을 말하여 그칠줄 모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새로 우정을 세우고 우리 강토를 잠식하여 오니 노사에 이른 바 자만함이 없도록 하라(노사소위 무사자만) 자만하면 처치하기 어렵나니라고 함과 같습니다 마땅히 국서를 동경유수에게 보내어 그 불가함을 말하고 만약 듣지 않으면 사신을 보내어 고주하소서」한대 이에 동경유수에게 치서하여 말하기를 「당국은 기자의 나라를 승습하여 압록강으로 써 경계선을 삼았으며 하물며 전 태후황제께서 옥책으로 반은하고 모토를 사하여서 따을 나뉘되 또한 압록강으로 한계를 삼았는데 요사이 상국이 우리 봉계에 들어와서 교루를 설치하였다 제산항해하여 납관(진납서사)함에 있어 더욱 천조에 조공함을 부지런히 하고 어전에 장주를 들어 구토회복을 빌었으나 지금까지 윤허를 받지 못하여 바야흐로 간절히 기원하는 바이다 근일에 내원성(압록강상의 검동도)의 군부가 우리성에 가까이 다가와서 궁구문을 이설하고 또 정사를 세우고자하여 목재와 석재를 이미 적치하니 변민들이 놀라고 있다

 

아지 못커라 무슨 뜻인지 바라건대 대왕유수는 이웃과의 화친에 생각을 간절히 하고 회원에 자비를 베풀어서 잘 황제께 주달하여(주(#330)총) 전에 사한 땅을 돌리도록 하고 그 성교 궁란 정사는 모두 훼파토록 하라 」고 하였다. 경신에 최충으로 내사령을 삼아 인하여 치사하게 하고 이자연으로 문하시중 판상서 이부사를 삼고 김정준으로 내사시랑 평장사를 삼고 박성걸로 내사시랑 평장사 상주국을 삼고 김원정으로 상서좌복사 참지정사 겸태자소보를 삼았다. 글단의 강경준 등 15인이 내투하고 번인에게 잡혀간 우리나라 사람 33구를 돌아오게 하였다. 계해에 지맹으로 수사공을 삼고 구승으로 형부상서를 삼고 김소보로 호부상서를 삼고 황보연으로 공부상서를 삼아 모두 무직으로 겸하게 하였다. 임신에 동여진의 수령 야시로 등 26인이 와서 토물을 바치니 직상을 차등있게 사하였다.

 

계유에 제하기를 「선비태후의 친자 김씨는 과인과 덕종이 어릴 때 보호에 노고하였으므로 짐이 작읍을 봉숭하여 전일의 노고에 보답하고자 하나니 중추원으로 하여금 제도에 준하여서 시행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8월 경인에 여수하였다. 을해에 상서이부가 주하기를 「검교장작소감 유공의는 대광 검필의 증손으로 전에 범한 바가 있어 오래 산질에 머물러 있사온데 일찌기 제지를 내려서 태조에 배정된 공신의 후손은 비록 범죄가 있다하여도 다 모름지기 서용하라고 하였사오니 이제 공의는 숙주방어사를 제수함이 옳을까하나이다」고 하니 문하성이 주하기를 「공의는 일찌기 첨유죄를 범하여 이름이 죄적에 실려 있사오니 서용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목민하는 직은 비단을 재단하기 보다 중한 일(목민지기 중어제금)로서 진실로 그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면 반드시 그 손(수)을 상하는 것이니 청컨데 파하소서」한대 제하기를 가하다 하였다.

 

9월 계해에 글단 흥종의 고애사 홍려소경 장사복이 내조하였다. 왕은 사복이 압록강을 건넜다는 말을 듣고 상선을 감하고 음악을 중지하고 도재를 금하고 익렵을 금단하였다. 을축에 왕이 소복을 입고 백관을 거느리고 창덕문전에 나가니 사복이 조서를 전하였다. 거애하여 복을 행하고 3일간 조시를 철하였다. 신미에 예빈성이 아뢰되 송 도강 황흔이 상장하여 일컫기를 「신이 자식 포안과 세안을 데리고 내투하였는데 82세 된 노모가 본국에 있어서 슬프게 생각하기를 마지않는다 하오니 청컨데 큰아들 포안을 돌려 보내서 공양토록 하게 하여 주소서」한대 왕이 말씀하시기를 「월나라 새도 남쪽 가지에 깃든다(월조소남지)고 하였거늘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서랴」하고 이를 허락하였다. 병자에 지중추원사 최유선과 공부시랑 이득로를 글단에 보내어 조상회장하게 하였다. 동 10월 을해에 생신회사사 호부시랑 최종필이 글단으로부터 돌아와 주하기를 「종필이 마땅히 우리 나라가 휘자를 알지 못하여 잘못 범한 것이라고 답하여야 할 것이요 표장에 실린 것은 감히 함부로 고치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저쪽에서 강요한다면 점화만을 감함이 거의 예에 합당하옵거늘 종필이 함부로 표문을 고쳐서 사명을 욕되게 함이 있사오니 청컨데 과죄하소서」한대 이를 용서해 주었다.

 

병신에 제하기를 「옛날 제왕들은 석교(불교)를 존숭함이 재적에 상고할 수 있으며 더구나 성조 이래 대대로 불사를 창건하여 복경에 자하였으니 과인이 종통을 이어 덕정을 닦지 못하매 재변이 여러번 나타나도다 바라건데 법력에 의지하여 방가를 복리케 하고자 하노니 유사로 하여금 땅을 가려서 절을 세우도록 하라」고 하니 문하성이 주하기를 「옛적부터 성제 명왕이 사탑을 세움으로써 태평을 이룩한 것은 없습니다 오직 법문을 숭중하고 정교를 신중히 살펴서 민력을 상하지 않으면 곧 자연히 종사가 영장할 것입니다 옛날 달마가 무제(양)에게 대답하여 말하기를 절을 짓고 탑을 세워도 특별히 공덕됨이 없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무위의 공덕을 숭상함이요 유위의 공덕을 숭상함이 아니옵니다 또 성조께서 창사하신 것은 하나는 통합의 지원에 보답함이요 하나는 산천의 위배를 압승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새 절을 더 세우실려고 하시면 백성을 급하지 않는 역사에 수고롭게 하는 것으로 원망이 연달아 일어날 것이요 산천의 기맥을 상하여서 재해가 반드시 생겨 신인이 공노할 것으로 태평을 이룩하는 길이 아니옵니다」고 한 대 받아들이지 않았다. 11월 을축에 동지에 행차하였는데 검교위위소경 최성절이 무고한 장전을 앞에까지 들어오매 왕이 놀라서 하옥을 명하니 법사가 주하기를 「함부로 어소에 뛰어든 자는 참죄에 처하나이다」고 하거늘 왕이 말하기를 「비록 율에 명문(정조)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으로써 가형함은 가혹한 처리(가정)이며 또 문필이 쓸만하니 용서하도록 하라」한대 문하성이 박주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글단의 동경회례사 검교공부상서 야율도가 왔다. 12월 갑인 삭에 글단이 금주자사 야율장정을 보내 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병신 10년 춘 정월 신미에 황주에 운석이 떨어지니 소리가 우뢰와 같았다. 갑술에 동여진의 봉국장군 아가주 등 15인이 와서 준마 33필을 바쳤다. 2월 갑오에 유사가 주하기를 「번인에게 잡혀간 염가칭은 군기승 위의 아들로 삼한 공신 사도 형명의 손자이온데 경술년중에 환위공자의 군역에 충당되었다가 때마침 글단병이 경성에 난입하였으므로 놀라서 양친을 받들고 고향인 봉성현(경기도 파주)으로 피난가다가 도중에서 적을 만나 잡혀갔던 것입니다 청녕 원년 정월 아들 하나를 데리고 도망하여 왔사오니 청컨데 가칭에서 부조의 영업전사(세습전사)를 다 환급하도록 하옵소서」한대 제하기를 「가칭은 공신의 묘예로서 정년에 포로되어 번토에서 처자를 버리고 한 아들만 데리고 백발이 되어 돌아오니 참으로 애처로운 일이다 구업전려를 돌려 주도록 하라」고 하였다. 계묘에 흥왕사를 덕수현에 창건하기 시작하였다.

 

 기유 탐라국(제주도)이 방물을 바쳤다. 3월 갑인에 아들 증을 책하여 국원후를 삼고 왕이 가만히 편전에 나아가 전례를 관람하고(예가) 끝나매 시중 이자연과 참지정사 김원정과 상서좌복사 지맹 등을 불러서 주연을 설하여 새벽에 이르렀다. 윤월 계미 삭에 대묘에 고삭하였다. 을유에 수사공 상서우복사로 치사한 고열이 졸하였다. 열은 활을 잘 쏘아 여러번 군공을 세우고 일시의 명장이 되니 졸함에 듣는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3일간 철조하고 백관으로 하여금 회장케 하였다. 하 4월 병인에 지맹으로 수사공을 삼았다. 병자에 건덕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이간방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추 7월 정유에 동번적이 변경을 자주 침관하므로 동로 병마이사 시어사 김단을 보내어 토벌케 하니 단이 부하들에게 맹세하기를 「적을 맞이하여 집을 잊고 몸으로써 나라에 순함은 본분이니 나의 사생은 정히 오늘에 달렸다」고 하니 삼군(좌.우.중)이 감격하여 분려하므로 용기가 저절로 배가하여서 그 둔락 20여소를 깨뜨리니 적이 크게 무너지는지라 병장과 양 마를 무수히 노획하였다. 8월 무진에 내외의 사형수를 결재하고는 정전을 피하고 소선하며 낙을 정지하였다. 서경유수가 보고하기를 「경내의 진사 명경 등 제업거인들이 공부하는 서적은 대개 전사한 것이므로 글자가 많이 틀려있사오니 청컨데 비각소장의 구경 한 진 당서 논어 효경 자사 제가문집 의 복 지리 율 산 제서를 분사하여 여러 학원에 두도록 하소서」한대 유사에게 명하여 각 일본씩 인쇄하여 보내도록 하였다.

 

경오에 승 30,000을 공양하였다. 9월 갑신에 제하기를 「제주의 목 자사 통판 현령 위 및 장리의 정적의 근만 청탁과 백성의 빈부고락을 사신을 보내어 안험토록 하라」고 한대 소사가 이에 정역의 민리가 영접에 피로할 것임으로 이것을 정지하도록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짐이 생각컨대 선대에는 자주 사신을 보내어 민막을 채방하였으므로 제도의 목민관들은 다 청렴을 힘써서 백성들을 편안케 하였는데 근자에 와서는 강기가 이문하여지고 또 징계하여 개혁함이 없으므로 공사에는 부지런하지 않고 다만 사리만을 꾀하며 권문호족에 결탁하여서 이항에는 낭탁의 수회가 많고 전원에는 상마의 권장이 드물며 혹은 어염 재칠 생산되는 지방이나 혹은 축산 자재가 있는 가정은 모두 침탈당하며 만약 인색한 자가 있으면 곧 일에 기탁하여 엄하게 가장하여 그 성명을 상케한다 원통함을 품고도 호소할 곳이 없으며 간혹 이것을 바로잡으려고 하는 자가 있어도 또한 권귀요로의 청탁으로 인하여 끝내 이것을 행할 수 없게 되니 백성을 좀먹는 해독은 날로 더하고 달로 불어나게 되었다

 

관리가 이미 이러하거늘 소민이 어찌 살아갈 길이 있겠는가 짐이 조석으로 자자한 마음으로 그 번폐함을 풀어줄가 하는데 당국집정자(당축병조자)가 찬성하기는커녕 논설이 분분함은 어찌됨인고 이제 겸시어사 형부원외랑 이유적으로 산동남의 충 경 상주 삼도무문사를 삼고 겸어사잡단 병부낭중 김약진과 예부낭중 최상과 함께 산남의 진 나 전 청 광 공 홍주 칠도무문사를 삼고 겸감찰어사시전중내급사 안민보로 관서 북 관내의 삼도무문사를 삼고 감찰어사 민창수로 관내 동도무문사를 삼노니 길을 나누어 발정하되 지체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기축에 태일을 수춘궁에 사하여 써 화재를 가시었다. 계사에 태자에게 명하여 제왕으로 더불어 동지루에 주연을 설케하여 수호 최응 이서 어실충을 불러서 동지심승시를 짓게 하고 각기 필단을 사하였다. 제하기를 [근자 일관의 상주를 보니 자주 천변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대개 과인이 덕이 박하고 정령이 한결같지 못한 소치라 걱정스럽고 두려워하여 밤낮으로 마음이 설레니 이달부터 정전을 피하고 상선을 감하여서 하늘의 견책에 답하고자 하노라 모든 경사(공경사대부)들은 각기 너희들의 직위를 삼가고 나의 허물을 직언하여 숨김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병신에 제하기를 [석가가 천교함에 청정을 먼저하고 멀리 구루를 떠나 탐욕을 단제하였다 요사이 피역의 무리가 사문에 탁호하고 재물을 불려 생계를 경영하며 경전 축산으로 업을 삼고 고판을 풍습으로 삼으니 나아가선 계율의 조문에 위배하고 물러가서는 청정의 규약이 없도다 단견의 승포(가사)는 써서 주앵의 덮개(복)가 되고 불경을 강(송)하는 장소는 베어(할)서 총산의 이랑이 되었도다 통상 매매로 객인과 교급하여 취하고 즐기며 화원을 훤잡하게 하고 난분의 예취를 피우며 속관을 쓰고 속복을 입고 사원수영을 빙자하여 기#(고337)와 가취를 갖추어서 여염에 출입고 시정에 당#(돌338)하여 사람들과 더불어 서로 싸워 유혈의 상처를 내기도 한다. 짐은 선악을 구분하여서 엄숙히 강기를 바로잡고자 하노니 마땅히 중외의 사원을 걸러(사태)서 그 계행을 정수하는 자는 모두 안주하도록 하고 범하는 자는 법으로써 논케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동 10월 기유 삭에 일본국사 정상위권이 등원조신 뇌충 등 30인이 와서 금주(경남 김해)에 머물렀다(관). 신해에 왕태자가 대묘에 배알하였다.

 

 임술에 친히 대묘에 협하여 구묘(태조 이하의 제왕)의 존호를 가상하고 제가 필하매 제궁에 거동하여 군신의 하례를 받고 신봉루에 환어하여 사하고 제하기를 [짐이 그릇 조녜의 유업을 계승하여 산하를 거느리고 대업을 지킬새 일신일일하여 비록 쉴수 있어도 쉬지 않고 종사(보도)의 장구하기를 빌고 종석에 봉선의 힘을 다하였다 이제 몸소 협예를 경건하게 모시고 덕음을 진발하여 군생과 더불어 이 큰 경사를 같이 하고자 하니 중외에 대사할지어다]고 하였다. 11월 신사에 송의 상인 황증 등 29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이날에 처음으로 눈이 오니 백관이 표축하하였다. 임오에 내제석원에 행차하여 승 해린으로 왕사를 삼았다. 임진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갑오에 동여진의 야사로 등 5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12월 무신 삭에 글단이 영주자사 소유신을 보내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병진에 중외가 전을 올려 왕태자의 (탄생일)을 수춘궁에서 축하하였다. 동여진의 유원장군 사복하 등 2인을 참하니 일찌기 삭주의 인물을 겁략하였기 때문이다. 이 해에 장원정을 서강병악의 남쪽에 지었다.

  정유 11년 춘 정월 무인 삭에 조하를 쉬었다. 기축에 고유로 우습유를 삼으려 하니 중서성이 주하기를「유는 탐라의 계출이오니 간성에는 맞지 않읍니다 만약 그 재질을 아끼신다면 청컨데 타관을 제수하소서」한대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을미에 황주에 운석이 떨어지니 소리가 우뢰와 같았다. 2월 계유에 소재도장을 건덕전에서 5일간 설하였다. 3월 을유에 거란이 소계종과 왕수졸을 보내 와 왕을 책하고 조하기를 「경은 조상의 영지에 공임하여 황가의 번병이 되었도다 호를 용정에 천거하니 바야흐로 추숭의 예를 마침에 있어 현토의 지역에도 경사를 같이 할 것이라 마땅히 책배의 은전을 행할 것이다 총혜의 반작을 보이어 써 따뜻한 정의(온권)를 밝히고자 하노라 이제 천덕군절도사 소계종과 좌천우위대장군 왕수졸 등을 보내어 봉책하는 정사와 부사로 삼고 아울러 경에게 관복 차로 은기 필단 안마 궁전 등을 별록과 같이 갖추어 사하나니 도착하거든 영납하라」고 하였고 책문에는「우리 나라는 하늘의 권명을 받고 열성은 휴경을 드리워(수) 은신을 만방에 다 펴매 어찌 중외를 구분하여 공훈을 모든 직위에 표창하매 어찌 원근을 달리 하리오 삼한 강역의 웅대함을 돌아보니 하우씨 방역의 밖에(백우방우지표) 한계하였도다 그 동방에 사직을 열고 멀리 자정을 받들어 광합의 웅도를 계승하고 공수의 신절을 닦았도다

 

비록 고구려 후예(일중유자)라고 하더라도 일찍 왕봉을 신석(사)하였고 천하가 동문이 되어 곧 제화를 도와 이루었다 때마침 대경을 같이함에 있어서 큰 공훈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고 이에 길진을 복하여 총전을 반시하노라 아아 그대 광시치리갈절자충봉상공신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겸중서령 상주국 고려국왕 식읍 15,000호 식실봉 1,800호 왕휘는 정기를 용숙에 쌓아서 계림에 걸출하니 박통하여 어려서부터 시서를 숭상하였고 총오하여 날 때부터 예악을 알았도다 굉모를 깊이 간직하여 항상 금궤의 서(편)를 탐구하였고 영민한 생각은 굳세고 아름다워 이미 금루의 집을 저술하였도다(이저금루지집) 주몽의 나라에 습작함으로부터 현토의 고을에 풍교를 선양하였다

 

관맹으로 웅사를 신칙하고 혜화로 아속을 빛내니 기름진 비는 일방의 혜택을 흡족하게 하였고 경성은 천고에 상서가 되었다. 성고께서 임조하실 적에는 자못 존주(광주)의 예를 다하였고 과인이 등극한 이래로는 봉계하는 성의를 더욱 굳게 하였다 화저(좋은 종이)를 다듬어서 장주를 올리고 청모를 동여서 입공하였다(궤청모이입공) 그 충의심을 살펴 볼 때 경공함이 쇠체하지 아니하였다 근자에 군신들의 간절한 주청으로 과매한 나에게 우숭한 호를 추가하려는데에 못이겨 근청함에 면종하여 드디어 성의를 거행하였다 바야흐로 상위의 은을 폄에 있어 먼저 환문의 방략을 권장하노라 이러므로 진상전차의 질을 옮겨서 한신독좌의 반열에 올리고 겸하여 호봉을 더하며 아울러 근장함을 밝히노라 이제 정사 천덕군절도사 소계종과 부사 좌천우위대장군 왕수졸을 보내어 절을 가지고 예를 갖추어 그대를 책명하여 겸상서령을 삼고 식읍 5,000호 식실봉 200호를 가하노라 아아 비룡이 좌운하니 백마로 맹서하고 동궁을 총석하니 휘는 오후 구백에 으뜸이요 옥현을 영조하니 권은 사보 삼공에 높았도다 하물며 선인의 누리던 나라에 살아 백씨(형)의 경략의 기탁을 이어 받으니 보필함에는 가히 선의 뒤끝이 길 것(선선)을 희구하고 애무함에는 가히 화적할 것(우우)을 생각할지어다 마땅히 방유를 세우고 특별히 무적을 일우어 복겸을 신도에 부응하고 조순을 천심에 계합할지니 이에 경계하여 길이 부귀를 지키라」고 하였다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남교에서 책명을 받았다.

 

거란이 또 소소와 시덕자를 보내 와 왕태자를 책봉하고 조하기를「경은 경사로움이 모인 왕윤으로 어려서 총오한 이름을 드날렸고 작휘는 국공에 반열하여 일찍 풍우한 책명을 받았도다 속절은 예를 이룸에 행하는 것이며 편균은 특수한 경사(휴)에 흐뭇한 것이니 마땅히 총반이 있어야 권촉에 부합할 것이다 이제 이주관내 관찰사 소소와 사농경 시덕자를 보내어 봉책정부사로 충당하고 아울러 경에게 관복 차로 은기 필단 안마 궁전 등을 별록과 같이 갖추어 사하나니 도착하거든 영납하라」고 하고 책문에는 「짐이 비도를 사수하여 금우(우내)를 암택하도다 진신들의 항소(상소)에 따라서 모절을 묶어서 성의를 베풀었다 위로 자안(모후)을 받들어 바야흐로 의호를 가상하고 아래로 묘덕(요제자신을 가리킨 것)을 포장하여서 또한 허칭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연상의 은전을 생각컨대 마땅히 습봉의 전을 거행할 것이다 아아 그대 광시치리갈절자충봉상공신 개부의동삼사 수대사 겸중서령 상주국 고려국왕 식읍 15,000호 식실봉 1,800호 왕휘의 아들 훈은 원추와 같은 서질에 녹이와 같은 기종으로 기억한 영자에 빼어나고 온량한 묘덕을 간직하여 긍당에 훈계를 이으니 진실로 작실이라는 말에 부합하고 양야가 방업을 전하니 위구의 업에 닮음을 기하도다(양야전방 기초위구지업) 어릴 때(환기지세)부터 이미 윤발(윤음)의 영광을 입었고 이제 옥검으로 추존하니 소금의 운을 당하였도다

 

천하가 다 경유에 젖으니 승가한 그대도 마땅히 총령을 입을 것이다 특히 균편(책문)을 내려서 소택(은택)을 성하게 고루 입힐 것이다 이러므로써 정사 이주관내관찰사 소소와 부사 수사농경 시덕자를 보내어 절을 가지고 예를 갖추어 그대를 책명하여 순의군절도사 삭 무등주관찰처치등사 숭록대부 검교태위 동중서문하평장사 사지절삭주제군사 행삭주자사 상주국 삼한국공 식읍 3,000호 식실봉 500호로 삼노라 아아 작을 오등으로 나누매(작소오등) 후봉보다 위에 있고 소임은 십련보다 중하다(기중십련) 겸하여 상인을 가졌으니 이 휴미함을 복응하여서 길이 흠경할지어다」고 하였다 태자가 궁관 백료를 거느리고 남교에 나아가 책문을 받으니 왕이 가만히 행차하여 책예를 바라보았다.

 

 병신에 이부가 주하기를「배향공신 시중 최숙의 증손 무를 청컨대 병신년의 협예사문에 의하여 음직으로 호부령사동정을 가수하소서」한대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계묘에 이유충으로 동지중추원사를 삼고 임종일로 상서좌복사를 삼고 왕무숭으로 어사대부를 삼고 김원황으로 공부상서를 삼았다.

 

하 4월 병진에 불일사에 행차하여 승을 공양하였다. 임수에 제하기를 「거년에 사신을 보내어 궁구문 밖의 우정을 파하도록 청하였는데 아직 철훼하지 않았고 또 송령의 동북쪽에 점차로 간전을 넓혀서 혹은 암자를 설치하고 사람과 물건을 둔축하니 이것은 반드시 장차 우리 경토를 침범하고자 함이리라 마땅히 곧 파하기를 청하라」고 한데 중서성이 주하기를 「거란(피조)은 지금 변방이 무사하고 또 신 황제가 즉위하여 책명을 내가 하였는데 아직 회사도 못하고 먼저 강장의 일을 말하는 것은 옳지 않을가 하나이다」라고 하니 왕이「저희가 만약 먼저 성책을 두게 되면 다만 후회막급의 일(서제)이 될뿐만 아니라 저들은 반드시 우리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할 것이니 중추에는 마땅히 먼저 사신을 보내어 책명을 사하고 계속하여 주청을 행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병인에 조하기를「양행봉책(왕급태자봉책)의 정부사가 동시에 같이 이르러 중외리민들이 접대에 피로하였으니 혹 그때의 착오로 좌죄에 해당되는 자는 모두 방면하여 주도록 하고 그 통과한 주현에는 금년 조세의 반분을 삭감하여 주도록 하고 수책시의 제집사와 승단배위관으로 상참 이상은 다 증급하도록 하고 향직 이하는 동정직을 가하도록 하고 장고 산사 서수 근장군두는 모두 등사함을 허하고 그 나머지 군졸에게는 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라」고 하였다. 계유에 이준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5월 정축에 소재도장을 수춘궁에 3일간 설하였다. 무인에 예부가 주하기를 「초여름부터 비가 때를 맞추어 오지 않았고 또 광주에서는 전야가 건조하여서 거의 흉년을 면하지 못할 것을 보고하여 왔사오니 청컨데 송악 동신당과 제신묘와 산천 박연 등 5개소에 매 7일에 한 번씩 기도하고 또 광주 등 주군으로 하여금 각기 기우제를 행하도록 하소서」한대 제하기를 가타 하였다. 임오에 제신묘에 비를 빌었다. 병술에 동여진의 회화장군 고도달 등 25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정해에 흥성궁비 서씨가 졸하였다. 무자에 다시 도우하니 비가 왔다.

 

 6월 정미에 거란의 동경지례 회사사 검교공부상서 야율가행이 왔다. 무진에 동여진의 유원장군 요어내 등 25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추 7월 무자에 소재도장을 건덕전에서 5일간 설하였다. 임진에 유사에게 명하여 송의 투화인 장완의 소업인 둔갑삼기법과 육임점법을 시험하고 태사감후의 벼슬을 주었다. 갑오에 년 80 이상의 남녀와 효순 의절 환과 고독 폐질자를 구정에서 향연하고 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신축에 선정전에 거동하여 중외의 중형을 청단하였다. 8월 정미에 송의 상인 섭덕총 등 25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병인에 비서성교감 경정상으로 권지직한임원을 삼으매 중서성이 말하기를「정상은 금실장의 후예로서 청요직에는 합당하지 않사오니 청컨대 삭직하소서」한대 왕은「무(봉)를 캐고 순무(비)를 캐매 뿌리(하체)를 따지지 않음(변봉변비무이하체)은 대개 그 쓸 수가 있는 부분을 귀하게 여기는 것인지라 정상의 재와 식은 가히 쓸만한 것이 있으니 어찌 그 세계를 논할 것이냐」하고 듣지 않았다. 정묘에 송의 상인 곽만 등 33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신미에 서경에 행차할새 시중 이자연과 평장사 왕총지 등을 명하여 상도(개경)를 유수하게 하였다. 9월 갑신에 왕이보와 최원준을 거란에 보내어 책명을 사한 것을 사례하였다. 동 10월 정사에 팔관회를 설하고 장경사에 행차하였다. 계해에 거란 횡선사 태주자사 야율굉이 왔다. 11월 병자에 서경으로부터 돌아왔다. 정축에 김정준으로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를 삼았다. 12월 계묘 삭에 거란이 우간의대부 왕종량을 보내 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정미에 상서호부시랑 안민보를 거란에 보내어 태황태후의 생신을 축하하였다.

 

기유에 상서공부시랑 최계유를 보내어 천안절을 축하하였다. 신해에 좌복사 지맹이 연로함으로써 퇴직하기를 원하거늘 우조하여 허락하지 아니하매 중서성이 주하기를「70에 치사함은 예입니다 청컨대 허락하소서」한대 제하기를「여가 일찍이 지맹의 선대가 국가에 유공하였으므로 청로하기 전에 이미 수년 더 시조할 것을 허락하고 이어 궤장을 사하였는데 지금 상주로 인하여 갑자기 전언을 고친다면 맹은 짐이 희롱한 것이라고 할까 저허 하노라」고 하였다 중서성이 또 상주하기를「엎드려 예제를 살펴보오니 무릇 노신으로 천지의 일을 아는 자에게는 궤장을 하사한다고 하였사온데 지금 맹은 한갓 문음만 의지하고 천지의 일을 알지 못하며 또 시석(싸움)의 공로도 없고 그밖에 정사에도 자방할 것이 없사오니 만일에 선신의 공로를 생각하신다면 1연쯤 시조하게 함은 가하오나 만약 수년을 더 하도록 하고 또 궤장을 하사하셨다면 은례가 너무 지나칠가 저허하오니 청컨대 성명을 거두소서」한대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신유에 금원정으로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를 삼고 금현으로 상서좌복사 참지정사를 삼고 한공서로 상서우복사를 삼으니 어사대가 주하기를「관제를 상고하니 좌우복사는 각기 한 사람씩이온데 지금 임종일에게 이미 우복사를 제수하고 공서를 또 (우복사로) 삼으니 우복사 한 사람을 더함은 구제에 맞지 않사오니 청컨대 공서를 파직하소서」한대 윤허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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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 12년 춘 2월 신해에 도병마사가 주하기를「국내에서 바치는 철은 옛날에는 병기를 만드는데 충당하였사온데 근자에 흥왕사를 짓는데 또 철을 가부하게 하오니 백성이 그 노고를 견디지 못하나이다 청컨대 염 해 안 삼주가 정유 무술 양년에 군기용으로 바친 철을 덜어 흥왕사의 용도에 오로지 쓰게 하여 백성들의 노폐를 풀게 하옵소서」한대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식자들은 말하되 당사에 이르기를 여러 절들이 시가에 가득하여도 위망의 화를 구함이 없고 치의(승)가 길에 차 있어도 어찌 근왕의 군사에 도움이 되리요라고 하였으니 국가의 이번 일은 어찌 큰 잘못이 아니리요라고 하였다. 무오에 내사사인 지동궁시독사 최상이 주하기를「전일에 거란의 사신 왕종량을 반송할 때에 밤에 금교역에 도착하였더니 종량이 나열된 횃불을 보고 말하기를 교전의 주연 때문에 밤이 되었도다 저 횃불을 가진 도예들이 홋옷을 입고 있었으니 대단 민망하다 이후에는 마땅히 일찌기 계행할 것이다 일찌기 듣건대 귀조에서는 객사를 인견함에 밤이 되도록 술을 권한다 하더니 이번에 와서 보니 예악이 다 중화와 같은 것은 탄미하여 마지않는 바이나 내가 세번이나 왕부에 나아갔는데 연회할 때마다 반드시 등불을 밝히니 우리 나라의 법은 다만 혼석(혼석)에만 화촉을 쓰는 것을 허락하고 인신이 회객함에는 비록 밤이 늦게 되어도 촛불을 켜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에도 역시 왕자는 밝은 것을 향하여 다스리는 것이오니 마땅히 대낮에 빈객을 접견할 것입니다 하물며 등촉도 또한 백성의 고혈을 짠 것인즉 비용이 태다하면 검박한 덕이 손상될까 두려워 하나이다 옛날 진경중이 환공께 술을 대접할제 환공이 불을 켜고 계속하자는 명(화계지명)을 사양하여 말하기를 신은 낮만 택(복)하였지 밤은 택하지 않았나이다고 하였사오니 지금부터 연호의 예는 다만 낮을 택하도록 하고 사귀의 예는 마땅히 회조할 때를 이용하기를 바라나이다」고 하니 왕이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신유에 거란이 검교상서 우복사 소희를 보내 와 태황태후의 상사를 고하니 왕이 현관소복으로 영접하였다. 하 4월 임자에 지진하였다. 병진에 동여진의 유원장군 다로 등이 와서 양마를 바쳤다. 5월 경진에 동여진의 귀덕장군 상곤 등 33인이 와서 양마를 바치니 의복과 기명을 차등있게 사하였다.

 

무자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여 해린을 책하여 국사로 삼고 난원을 책하여 왕사로 삼았다. 임진에 제하기를「때는 성농기인데 비가 시기를 어기니 원옥이 있어 천재를 이르게 함인지 두려워 하노라」고 하고 드디어 경범죄수를 석방하였다.

 

6월 임인에 거란이 좌령군위상장군 소인품을 보내와서 태후의 유물을 전하였다. 무신에 중서문하성이 주하기를「엎드려 제지를 살펴보니 태사감후 이신황이 풍 운 수 한의 징후를 관찰하여 어긋남이 없으니 고적에 구애됨이 없이 8품을 탁수하라」고 하였사오나「신황은 세계를 알지 못하고 처음 조정반열에 들어왔을 때 두번이나 논박을 당하였고 또 기후를 관찰함이 그의 직책인즉 벼슬을 뛰어올리는 것이 옳지 못한 일입니다」고 하거늘 제하기를「그 기술에 정통하기를 신황같은 자가 없으니 전제대로 실행하라」고 하였다. 계축에 동여진 정조 분대 등 23인이 와서 토물을 바치니 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갑인에 왕이 보살계를 건덕전에서 받았다.

 

추 7월 기묘에 중서문하성이 주하기를「엎드려 제지를 의준컨대 경창원에 소속된 전시를 흥왕사에 이속하고 그 어량 주즙 노비는 모두 관에 돌리게 하라 하였사오나 대개 궁원에 선왕께서 전민을 우사하신 소이는 그 자손에게 만세까지 전하여 생활에 궁핍함이 없게 한 것이온데 지금 그 종지(자손)가 더욱 번성하여져서 만약에 전시를 궁원에 각기 사하려 하여도 오히려 부족할까 두렵거든 하물며 관의 전시를 거두어 불사에 부치시니 삼보에 귀중함은 비록 좋은 일이라고 하옵더라도 나라와 집의 근본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오니 청컨대 전민 어량 주즙을 전과 같이 돌려 주옵소서」라고 하니 제하기를「전시를 이미 삼보에 바쳤으니 도로 찾아 들이기는 어려운 것인즉 마땅히 공전으로써 그 원수대로 줄 것이요 기외는 주한대로 쫓으리라」고 하였다.

 

경인에 제하기를「수년 이래에 수한이 고루지 못하여 재변이 자주 나타나니 이는 다 형정이 잘못되어 원분의 부른(초)바이니 만약 위로 하늘의 꾸지람에 답하고 아래로 백성의 바램을 위로하려면 마땅히 죄형을 너그럽게 하고 자신을 반성하여 덕을 닦을 것이다 양경의 문무 남반 원리 가운데에 범죄가 있어 강출 당한 자와 제주 부군 진의 장리 장교로서 죄를 범하여 파출된 자가 있으면 주사는 그 경중을 참작하여 전에 의하여 서용하되 그 첨곡 간사한 것과 사죄를 재범한 자는 비례에 부재케 하고 공도사장 이하는 면죄하여 주라」고 하였다 8월 을사에 송의 상인 황문경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왕이 탐라와 영암에서 재목을 베어 큰 배를 만들어 장차 송과 통하고자 하거늘 내사문하성이 상주하기를「국가가 북조(거란)와 우호를 맺어 변방에 급한 경보가 없고 백성은 그 생을 즐기니 이로써 나라를 보전함이 상책이옵니다

 

옛적 경술년에 거란의 문죄서에 말하기를 동으로 여진과 결탁하고 서로 송국에 왕래하니 이것이 무슨 꾀를 쓰고자 함인가고 하였고 또 상서 유참이 사신으로 갔을 때 동경유수가 남조(송)와 통사한 일을 물은만큼 혐시함이 있는 듯 하오니 만약 이런 일이 누설되면 반드시 틈이 생길 것이요 또 탐라는 땅이 척박하고 백성이 빈곤하여 오직 해산물과 배를 탐(목도)으로써 생계를 도모하는 바(승목도경기모생) 왕년 추에 재목을 베어 바다를 거쳐 불사를 신창한데 피로가 이미 많거늘 지금 또 이 일로써 거듭 괴롭히게 되면 다름 변이 생길가 두려워 합니다 더구나 우리 나라는 문물예악 흥행된지 이미 오래며 상선이 연락부절하여 진보가 날로 들어오니 중국에 대하여서는 실로 자뢰할 것이 없습니다.

 

만일 거란과 국교를 영절하지 않는다면 송조에 통사함이 따땅치 않읍니다」고 하니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9월 기사 삭에 충주목이 새로 조성한(목각판) 황제 팔십일난경과 천옥집 상한론 본초괄요 소아소씨병원 소아약증병원일십팔론과 장중경(경)의 오장론 99판을 진상하니 조하여 비각에 두게 하였다. 을해에 거란 동경회례사 검교좌산기상시 야율연령이 왔다. 동 11월 경오에 제하기를「정종의 혼당에 있던 김은기와 북조에서 적제한 예물인 증채로써 장경을 화성하여 정종을 추복하라」고 하였다. 을유에 동여진의 유원장군 다로 등 22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12월 정유 삭에 거란이 연주자사 곽재귀를 보내 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동여진의 회화장군 이동화 등 26인이 와서 토물을 바치니 각기 작을 증하고 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윤월 병자에 동여진의 영새장군 고도달 등 50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병신 회일에 일식하였다.

 

기해 13년 춘 5월 정유 삭에 건덕전에 거동하여 조하를 받고 인하여 제왕 보신을 향연하였는데 평장사로 치사한 김정준도 나오게 하여 밤이 늦어서 파연하고 각각 구마 일필씩을 사하였다. 을사에 동여진의 정위 몰어금 등 18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정미에 동여진의 중윤 야시로 등 35인이 와서 양마를 바쳤다. 2월 정묘에 동여진의 정보 오사 등 22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갑술에 안서도호부사 도관원외랑 이선정 등이 새로 조성한 주후방 73판 의옥집 11판 천옥집 10판을 올리고 지경산부사 전중내급사 이성미가 새로 조성한 수서 680판을 올리니 조하여 비각에 두게 하고 각기 의대를 사하였다. 고주사 상서공부원외랑 최석진을 거란에 보냈다. 을해에 동여진의 영새장군 거다불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건덕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양신린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3월 임술에 기거주 이유적과 감찰어사 이병양과 금오장군 방현에게 명하여 죄수를 검찰하여 경범자 63인을 석방케 하였다. 하 4월 병자에 친히 대묘에 체제할제 송의 상인 소종명 등이 가로에 나가서 법가(왕가)를 첨망하기를 빌거늘 허락하고 이날에 사를 베풀었다.

 

경진에 지남원부사 시례부원외랑 이정공이 새로 조성한 삼례도 54판과 손경자서 92판을 올리니 조하여 비각에 두게 하고 인하여 의대를 사하였다. 5월 을미에 도둑이 현릉묘실에 침입하였으므로 능실시위대장군 은정 등을 옥에 내려 죄를 주었다. 병진에 제하기를「양경백료의 초소지는 마수령으로 한정하고 금표를 세워서 위반하는 자는 엄중히 다스리라」고 하였다. 6월 을유에 제하기를「정종궁인 한씨와 소한씨와 위씨에게 매년 내장택의 갱미(멥쌀) 3000석을 공급하라」고 하였다. 추 8월 무진에 송의 천주상인 황문경 소종명과 의인 강조동 등이 장차 돌아가게 되었거늘 제하여 종명 조동 등 3인은 머물 것을 허하였다. 계유에 년 80 이상인 공부상서 홍개와 상장군 하흥휴를 각문에서 향연할새 왕이 친히 화주를 권하고 종일토록 탄연하다가 인하여 의복을 사하고 또 일반 노인과 독질 폐질의 남녀와 효순 의절 1,280인에게 구정의 낭하에서 잔치를 베풀고 서경과 제주군에도 또한 같은 날에 잔치를 베풀었다. 을유에 송의 상인 부남 등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정해에 제하기를「양경 및 동남 주 부 군 현에 한집에 삼자를 가진 자는 아들 하나는 나이 15세가 되면 머리를 깎고 중되는 것을 허하라」하였다.

 

9월 병신에 거란의 동경회사사 검교우산기상시 야율연녕이 왔다. 동 10월 갑신에 거란의 다우이 남우릉 등 2인이 내투하였다. 11월 을사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갑인에 동여진의 귀덕장군 모하 등 24인과 정보 고사 등 23인 와서 준마를 바쳤다. 12월 신유 삭에 일식하였다. 거란이 검교사도 야율덕을 보내 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여수하였다.

 

경자 14년 춘 정월 신묘 삭에 조하를 쉬었다. 계축에 천제석도장을 문덕전에서 7일간 베풀었다. 2월 계해에 장원정에 행차하였다. 갑술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3월 정사에 이정공으로 시어사를 삼았다. 하 4월 기미에 왕총지로 수태위를 삼고 김원정으로 수사도를 삼고 금현으로 수사공을 삼았다. 5월 갑오에 친히 구정에서 초제하였다. 6월 경오에 김의진으로 지상서리부사를 삼고 양국정으로 지어사대사를 삼았다. 추 7월 을사에 송의 상인 황조 등 36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계축에 동남해 선병도부서가 주하기를「대마도에서 우리 표풍인 예성강 백성 위효남을 돌려보내 왔습니다」고 하니 왕이 그 사자에게 예물을 후하게 사하였다. 8월 무오에 제하기를「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장마가 그치지 않으니 원죄가 있어 화기를 상함인가 염려된다」고 하고 어사중승 박충 좌부승선 강원광 좌습유 최석 신호위대장군 조옥을 시켜 여수하게 하였다. 계해에 송의 상인 서의 등 39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을해에 송의 상인 황원재 등 49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9월 무술에 동여진의 회화장군 아린 등 19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계묘에 송의 진사 노인이 문재가 있으므로 비서성교서랑을 제수하였다. 을사에 이유충으로 중추원사를 삼았다. 계축에 여수하였다. 동 11월 경인에 거란의 선사사 고주관내 관찰사인 소오이 왔다. 무술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동여진의 귀덕대장군 아가주 등 37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12월 병진 삭에 거란이 영주관내 관찰사 야율열을 보내 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갑자에 내사문하성에 불이 나서 회경전의 동남 낭에까지 연소하였다.

 

신축 15년 춘 정월 무자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계축에 이유충으로 형부상서를 삼고 김화숭으로 한림학사를 삼고 왕무숭으로 호부상서 판어사대사를 삼고 김원황으로 병부상서를 삼았다. 2월 신유에 임종일로 상서좌복사 중추사를 삼았다. 계미에 제하기를「형정은 왕화의 첫째가 되는 바이니 준엄하면 백성이 쇠잔하고 관대하면 백성이 태만하는 것이다 형벌이 그 중도를 얻으면 음양이 화하고 풍우가 순조로우나 법이 그 적의함을 잃으면 원기가 쌓여서 재앙이 생기는 것이다 포악한 신하와 혹독한 관리가 세상에 항상 있는지라 짐이 훈고를 쫓아서 전형을 돈독히 삼가나 매양 신하가 포학하고 관리가 혹독하여 적중함을 얻지 못할가 염려되나니 지금부터 형부(추부)의 원리를 정택하여 위임하고 원옥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3월 임진에 최순한으로 호부상서를 삼고 정층으로 섭공부상서를 삼았다.

 

 정유에 거년 문하성에 숙직하던 날에 화재가 있었으므로 참지정사 금현의 벼슬을 강등하여 좌복사를 삼고 우산기상시 최원준도 판소부감사를 삼았다. 기유에 나계함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하 4월 병진에 거란의 동경회례사 검교공부상서 소수사가 왔다. 갑술에 장중영으로 공부상서를 삼았다. 6월 계축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가 드디어 국자감에 나아가서 시신에게 말씀하기를「중니는 백왕의 스승이라 감히 치경치 않으리요」하고 드디어 재배하였다. 정유에 송의 진사 진위로 비서교서랑을 삼고 소정 소천으로 각문승지를 삼고 섭성 로 전전승지를 삼았는데 휘는 문예가 있고 정 등 3인은 음율에 밝았다. 기묘에 아우 내사령 기를 고쳐서 중서령으로 삼고 그 나머지도 일찍이 내사가 되었던 자는 다 중서로 고쳤다. 추 8월 임자에 동로병마사가 주하기를「정주별장 경보가 20여인을 거느리고 적을 정찰하다가 문득 적의 괴수인 아하비 등 200여인을 만나 싸워서 이것을 패하게 하고 십수급을 참살하였사오니 청컨대 그 공을 상주소서」한대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김행경으로 한림학사를 삼았다. 무진에 최유선으로 판상서예부사를 삼았다.

 

병자에 송의 상인 곽만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윤월 신사 삭에 대묘에 고삭하였다. 9월 정묘에 도병마사가 주하기를「적의 추장 아라불 등이 변경을 침범하여 변민을 겁략하므로 평로진의 병마록사 강영과 서북면 병마록사 고경인이 병사를 거느리고 강마진에까지 추급하여 적을 패하게 하고 수십급을 참획하였으며 병기도 많이 노획하였사오니 포상함이 좋을까 하나이다」고 하거늘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무인에 임종일로 참지정사를 삼고 왕무숭으로 지중추원사를 삼았다. 동 10월 정미에 한공서로 검교사공 수상서좌복사를 삼았다. 11월 경술 삭에 최유부 김양으로 태자좌우서자를 삼고 최상 이유적으로 좌우유덕을 삼고 박충으를 중윤을 삼고 정공지 황항지로 좌우찬선대부를 삼았다. 신미에 최유선으로 참지정사 권판한림원사를 삼았다.

 

12월 경진 삭에 거란이 검교태부 영주자사 소술을 보내 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병신에 왕총지로 문하시중 판상서리부사를 삼고 김원정으로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를 삼고 최유선으로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를 삼고 이유충으로 참지정사 주국을 삼고 김원황으로 중추원사를 삼고 김의진으로 좌산기상시 동지중추원사를 삼고 김량지으로 어사대부를 삼았다. 병오에 송인 소종명으로 권지각문지후를 삼았다.

 

임인 16년 춘 정월 임술에 동경회례사 검교상서우복사 야율장이 왔다. 김원정을 파직하고 내쳐서 서경류수사를 삼았다. 2월 기해에 아들 도를 책하여 검교상서령 수사도를 삼았다. 을사에 탐라의 고협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하 6월 병자 삭에 동여진의 귀덕장군 분대 등이 내조하였다. 을사에 예빈경 지어사대사 최상으로 지서북면 추동번병마사를 삼고 예부시랑 좌간의대부 홍덕위로 동북면 추동번병마부사를 삼았다. 추 7월 경신에 중추사 병부상서 김원황이 졸하니 의경이라 시하고 그 일자에게 벼슬을 주었다. 임신에 동여진의 모내 등이 내조하였다. 8월 무인에 동여진의 늑어을여 모내 등이 내조하였다. 을유에 흥왕사에 행차하여 제하기를 「이 절은 중력을 모아서 공사한지(구잔) 이미 오래되어 큰집이 장차 낙성되려 하니 이제 내가 그 공을 친히 보고 특히 은전을 펼 것이다 마땅히 내외의 중형은 모두 강등하여 유배시키고 공도사장 이하는 다 면죄하여 주고 동역(감독)한 관리는 모두 작상을 가하라」고 하였다. 임인에 개성후 (왕)개가 졸하였다. 동 10월 기묘에 탐라성주 고일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경자에 동여진의 귀덕대장군 마리해 아가주가 내조하였다. 12월 갑술 삭에 거란이 태주관내관찰사 고수정을 보내 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계묘 17년 춘 정월 계묘 삭에 건덕전에서 군신을 향연하고 백(비단)을 차등 있게 사하였다. 무신에 3사가 주하기를「익령현과 서북면 성주의 수전장지에서 황금이 산출하오니 청컨대 공적에 붙이소서」라고 하였다. 2월 갑술에 형부시랑 우간의대부 이유적으로 서북면 춘하번병마부사를 삼고 소부소감 이득로로 동북면 춘하번병마부사를 삼았다. 정축에 동여진의 귀덕장군 회화 등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을축에 동여진의 귀덕장군 상곤 등이 와서 양마를 바쳤다. 경인에 장영으로 시어사를 삼고 윤조명으로 전중시어사를 삼았다. 3월 병오에 거란이 대장경을 보내니 왕이 법가를 갖추어 서교에서 맞이하였다. 신해에 탐라의 신성주인 두량이 내조하니 특히 명위장군을 제수하였다.

 

 하 4월 을해에 태자에게 비각에 있는 구경과 사전 백가서를 사하였다. 신축에 이황으로 호부상서를 삼고 박희중으로 섭공부상서를 삼았다. 5월 갑진에 문덕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홍기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추 6월 경신에 태복경 민창소로 지서북면 추동번병마사를 삼고 상서우승 김석조로 동북면 추동번병마부사를 삼았다. 무진에 김원정으로 수태위 문하시중을 삼았더니 얼마 안되어 졸하였다. 8월 신묘에 왕무숭으로 동북면 행영병마사를 삼고 이유충으로 판삼사사 서북면 중군마병사를 삼고 왕이보로 겸서경유수사를 삼았다. 9월 경자에 제하기를「금년에 비가 내리지 않아서 서성(추숙)을 기대치 못하게 되었으니 주군으로 하여금 구황에 예비토록 하라」고 하였다.

 

임인에 송의 상인 곽만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경술에 박성걸에게 검교태위 문하시중을 가하고 임종일에게 중서시랑 평장사 주국을 가하여 모두 구례에 의하여 치사하게 하였다. 동 10월 경오에 송의 상인 임녕 황문경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임진에 장원정에 행차하였다. 11월 계유에 거란이 익주자사 소격을 보내어 내빙하였다. 갑자에 동여진의 귀덕장군 마리해와 수원장군 다로대 등이 내조하였다. 12월 무진 삭에 거란이 우간의대부 이일숙을 보내 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병자에 병부시랑 정동조로 서경부류수를 삼고 대부소경 박신후로 동경부류수를 삼았다.

 

갑진 18년 춘 정월 정유 삭에 조하를 쉬었다. 신유에 서북로 병마사가 주하기를 「지난 임인년에 몽포촌적이 우리 영토에 침입을 꾀하고 가만이 평로진에 들어와 절충 융마 양술 사이에 복병한 것을 우리 영내에 귀화하여 살고 있는 번장 제준나가 이것을 알고 와서 고하므로 평로진장이 먼저 풀 덤불 속에 복병하여 오기를 기다렸더니 과연 적이 돌입하므로 우리 병사가 일제히 발사하여 많이 사로잡고 베었사오니 금백으로 준나에게 후히 상주소서」하니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3월 계유에 제하기를「구례에 의하면 춘추로 외산제고사를 십여도에 보내게 되니 사명이 번다하여 역로가 시들고 피폐케 되었다 지금부터 동북양계는 감창사와 패서도는 안찰사가 다 그 제고사를 겸하고 산남제도만은 구례에 의하여 사신을 보내는 것을 항식으로 삼으라」고 하였다. 3월 갑인에 인왕도장을 회경전에 3일간 설하고 승 10,000명을 구정에서 공양하였다. 하 4월 경오에 제하기를「대운사는 선왕이 처음으로 창건한 절로서 방가의 복을 비는 곳인데 사급한 공전이 땅이 척박하고 세입(수조)이 근소하여 제공이 부족하니 양전 100경을 가사하라」고 하였다.

 

경인에 제하기를「5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 임진 보통원에서 죽수와 소채를 설비하여 행여들에게 급시하라」고 하였다. 5월 을사에 참지정사 이유충에 명하여 서여진 영원장군 고지지 등 13인을 예빈사에서 향연하게 하고 예물을 사하였다. 윤월 무진에 동여진의 적수 마질개 등 100여인이 바다로 평해군 남포에 입구하여 민가를 불사르고 남녀 9인을 사로잡아 갔다. 신미에 병부가 주하기를「군반씨족의 장적이 오래되어 좀먹고 썩어져서 이로 말미암아 군액이 불명하오니 청컨대 구식에 의거하여 장적을 개비하도록 하옵소서」하니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6월 신축에 도병마사가 주하기를「적수 마질개 등이 평해에 침입하였을 때 변방을 지키는 원장들이 능히 그를 쫓아 잡지 못하였사오니 청컨대 헌사로 하여금 단죄하게 하소서」라고 하니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추 7월 정유에 동북면 병마사가 주하기를「환가현(강원도 고성북 27이허)은 일찍 무자년에 동번해적에게 공겁을 받아 남녀 10여인이 살상을 당하였고 금춘에 또 산에 불이 나서 성보와 창고 및 민가까지 연소되어 두 번이나 화란을 당하여 백성들이 편히 살 수가 없사오니 청컨대 성을 이축하여 해적의 요로를 액거토록 하옵소서」한데 조하여 양촌에 성을 옮기게 하니 (양촌은) 구성 남쪽 2000여보 지점이였다. 병술에 송의 상인 진공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경인에 태복사가 구례에 따라서 육도선마사 보낼 것을 주청하니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8월 갑오 삭에 송의 상인 임녕 등이 와서 진보를 바쳤다.

 

동 10월 병진에 거란이 검교우산기상시 야율선을 보내 와 조하기를「짐은 누성의 홍휴를 메(하)고 일녕의 아름다운 위를 이어받아 힘써 다스리기를 구하고 경외한 마음을 가진지 이에 10연이 되었다 4방이 크게 안정되었고 원극의 우력은 뒤이어 상서를 융창한 시기에 나타내며 군벽(왕 제후)의 글월은 묘덕 나에게 추공하기를 의논하도다 근청함이 더욱 간절하므로 고사할 길이 없어서 중의에 따라 마지못해 징호(존호)를 받기도 하고 이미 내년 원일에 예를 행하기로 정하였다 그대는 칭번하여 일과 공의 지주(정간)가 되었고(칭번작한) 위를 섬김에 충성을 다했도다 이 성의를 듣고 보면 믿거니 동경하는 마음이 더할 것이다 이제 예빈사 야율선을 보내어 조서를 가지고 그곳에 가서 시유케 하노니 마땅히 잘 알아둘지어다」고 하였다.

 

 11월 기묘에 태자가 납비함으로 써 경령전에 고하였다. 임오에 호부가 주하기를「광주목은 봄부터 가을까지 오래동안 가물어 비가 오지 않고 거듭 양박으로 경내의 화곡은 조금도 수확할 것이 없고 또 봉주에는 일찍이 경자년 대수에 가옥과 화가가 거진 다 유실되어 백성이 정주할 수 없으니 청컨대 양관의 관하에 사신을 보내어 양전하는 일을 정지하소서」하니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12월 임진 삭에 거란이 사농경 호중을 보내 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거란의 고노 등 3인과 흑수의 포기 등 8인이 내투하였다.

 

을사 19년 춘 정월 신유 삭에 조하를 쉬었다. 갑신에 동여진의 이지달 등 16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3월 신묘 삭에 동여진의 수령 상곤 등 22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신축에 동여진의 장군 아부한 오화문 등 27인이 와서 양마를 바쳤다. 갑인에 아들 희를 책하여 수인보의공신 개부의동삼사 수사공 겸상서령 상주국 계림후 식읍 1,000호로 삼았다. 기미에 거란의 동경유수가 첩보하기를 황태후에게는 자의인화문혜효경현성소덕광애종천황태후의 존호를 책상하고 황제에게는 성문신무전공대략총인예효천우황제의 존호를 가상하였다고 하였다. 하 4월 계사에 거란이 야율녕과 정문통을 보내 와 왕을 책하니 그 소에「경은 충근으로 위를 받들고 화락한 시절을 만나 화헌을 곡대에 베풀어 이미 수호를 더하였으며 큰 은전을 먼 지역에까지 입혀 경사를 같이 할 것을 선희(표)하노라 가서 책배의 의를 베풀고 반선의 명을 우시하여 써 온권함을 밝히나니 마땅히 나의 지극한 회포를 휴실하라 지금 영원군절도사 야율녕과 익주관내관찰사 정문통을 보내어 봉책사와 부사를 삼고 아울러 경에게 관복 차로 은기 필단 안마 궁전주 등을 별록과 같이 갖추어 사하노니 이르거든 영납하라」고 하고

 

그 책문에「짐은 천명을 받들고 삼가 비도를 지키니 위로는 누성의 끼친 모유를 받들어서 깊이 황운을 창성케 하고 아래로는 제후를 친부케 하여 나라를 세우니 널리 번유(번국)의 운계를 세웠도다 그대는 주몽의 작위를 이었고 현토의 강토를 넓혀서 대를 연하여 크게 왕사를 열고 충성을 바쳐 멀리 제신(황실)을 도왔도다 때마침 화락한 시절을 만나 커다란(방홍) 호를 더하게 되었도다 빛나는 의식으로 띠(모)를 묶어 위차를 표시하니(속절) 바야흐로 특수한 경사를 입게 될 것이며 책명을 편차함을 있어 마땅히 특별한 예우자에게 선가하는 것이다 자호라 그대 광시치리갈절자충봉상공신 개부의동삼사 수태사중서령 겸상서령 상주국 고려국왕 식읍 20,000호 식실봉 2,000호여 왕은 경운이 누대에 모여서 도덕이 생민에 으뜸이로다 대악이 신령을 내려서 본래 웅걸을 밀어(추) 주었고 하늘로부터 덕이 생겼으니 일찍이 온인에 부하도다 표해에 봉작을 승습하고 대하의 맹서를 전하였다 덕화를 진 변에 펴니 흡족히 수무의 공을 선양하였으며 업적이 환 문처럼 성하니 묘하게 공수의 절을 다하였도다 임토하매 빈왕의 직분을 술하고 수방(방역)하매 청삭의 문범을 준행하도다

 

이에 지극한 근고를 가상하여 흠원함을 잊지 않노라 전자에 군신의 청을 마지못해 쫓아서 휘칭을 증상하였으며 이에 필합의 모유를 생각하여 특히 포숭하는 은명을 내리노라 이미 공을 생각하여 호를 사하고 인하여 읍을 주어 써 봉을 나누노라 이러므로 정사 영원군절도사 야율녕과 부사 익주관내관찰사 정문통 등을 보내어 절을 가지고 예를 갖추어 책명하여 그대에게 수정보의사자공신호와 식읍 3,000호 식실봉 300호를 가하고 기여는 종전과 같이 한다 아아 높을수록 더욱 낮춤은 지영의 격훈이요 소국이 대국을 섬김은 보국의 좋은 계책이니 왕은 일방을 거느리는데 사표가 되고 군악(제후)의 모범이 되어 신종의 도를 어기지 말며 효순의 성을 잃지 말고 그대의 선풍(선대의 유풍)을 계승하여 나의 외폐(외번)가 될지어다 이 칙계를 보배로 삼으면 길이 경사를 누리리라」고 하였다.

 

경자에 왕이 남교에서 책문을 받았는데 그 사물인즉 구류관 구장복 옥규 옥책 상로 의대 필단 궁전 안마 등물이었다 또 야율적와 마안여를 보내 와 왕태자를 책하니 소에「경은 착영의 교훈을 받아(품훈) 어려서 세자의 영광에 처하였고 설조로 분봉하니 이에 상공의 작위에 반열하였다 속절를 성례에 속행하니 편균에 홍은의 흡족함을 생각하라 겸하여 반점을 보여 이로써 권촉함을 밝히노라 지금 이주관내관찰사 야율적과 위위경 마안여 등을 보내어 봉책사와 부사를 삼고 경에게 관복 차로 은기 필단 안마 궁전 주 등을 별록과 같이 갖추어 보내노니 이르거던 영납하라]고 하고 책하기를 「짐이 하늘(원령)의 휴명을 받들고 열성의 경모를 이어받아 안으로는 제실의 무친함을 생각하여 바야흐로 화목함을 깊게 하고 밖으로는 왕번의 영주(장자)를 권애하여 다시 무안함을 두텁게 한다 거기에는 옥만에 화려함이 뻗어(연)나고 주전에는 순수한 기운이 솟았도다

 

그리하여 진역에 몸을 길러내어 믿업게도 제정에 성심을 보내었도다 마침 태평(예정)한 때를 만나 커다란 호를 더높이게 되니 마땅히 이수(특전)을 가하여서 수휴(특별한 경휴)에 흡족케 하리라 자호라 그대 순의군절도 삭 무 등주관찰처치등사 숭록대부 검교대위 동중서문하평장사 사지절삭주제군사 행삭주자사 상주국 삼한국공 식읍 3,000호 식실봉 500호 왕훈은 국가 동량의 기재며 천주와 같은 위기로서 청유를 들어서 세속을 비추고 무략을 품어서 시대를 경륜하며 군신 부자의 의례를 알고 예 악 시 서의 가르침을 알았다 더구나 일찌기 영예에 추장되고 벌써 우우를 은장에 입어 질품은 국공에 나아가 번후(제후)와 협친하였다

 

벽당(청기)으로 부하를 다스리매 절제하는 웅권을 잡았고 황각에서 조원하니 평장의 중임을 맡았다 능히 너그럽게 물건을 용납하고 근본을 살펴(원) 자신을 다스리니 그 영민한 재질을 헤아려 이에 총가하는 전장을 내린다 영광은 윤음(봉발)을 날르(비)게 하고 귀함은 초수로 이식하였다(귀이초수) 겸하여 숭계를 더하고 아울러 성기를 밝히노라 이러므로 정사 이주관내관찰사 야율적과 부사 수위위경 마안여를 보내어 절을 가지고 예를 갖추어 그대를 책명하여 겸시중을 삼고 특진을 가하되 기여의 관직은 종전대로 하노라 아아 일시의 우합은 천고에 드문 바이니 계세의 공을 생각하여 나는 장소하는 것을 잊지 아니하노니 나라를 바로잡는 뜻을 마음에 두어 마땅히 근능함을 다할 것이며 총애를 믿고 남에게 교만하지 말고 힘써 충성을 다하여 임금을 받들지이다 이 큰 훈시를 복응하면 길이 휴정을 보전하리라」고 하였다 계묘에 태자가 남교에서 수책하니 그 사물인즉 구류관 구장복 아홀 죽책 혁로 의대 필단 안마 궁전 주 등물이었다. 5월 계유에 경령전에 거동하여 왕사 난원을 불러서 왕자 후을 축발하여 중이 되게 하였다.

 

기묘에 영통사에 행차하였다. 6월 갑오에 문덕전에 거동하여 복시하였는데 시어사 노단의 주사가 왕지를 거슬렸으므로 왕이 노하여 과를 설치 않고 다만 열번이나 응시하여도 급제하지 못한 자를 취하여서 이원장 등에게 은사급제를 사하였다. 신해에 동여진의 회화장군 잉울 등 17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추 7월에 봄부터 여름까지 비가 흡족치 못하다가 이에 이르러 감우가 많이 내리니 근신에게 명하여 희우시를 짓게 하였다. 을해에 동지에 행차하여 용선을 타고 주연을 베푸니 태자와 종실들이 시연하여 밤늦게야 파하였다

 

. 8월 병오에 상서우복사 김량지와 전중소감 서정을 거란에 보내어 책명을 사하였다. 9월 계미에 송의 상인 곽만과 황종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예부상서 최상과 장작소감 김성점을 거란에 보내어 태자책명을 사하였다. 동 12월 병술 삭에 거란의 좌간의대부 부평을 보내 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병오 20년 춘 정월 병진 삭에 조하를 쉬었다. 을해에 제하기를「금년부터 3연간을 한하여 중외에 도살을 금한다」고 하였다. 을묘에 김량검으로 춘하번 지서북면 병마사를 삼았다. 2월 기해에 운흥창에 화재가 있었다. 신해에 제하기를「운흥창의 화재는 관리가 그 임무를 다하지 못하여 여러 해동안 저축한 것을 일야의 횡재로 태워버렸으니 어찌 가히 통석치 않으리오 이 뒤에는 모든 창름 부고에 금화하는 관리를 특별히 두고 어사대가 때때로 점검하되 일직을 궐하는 자는 관품의 고하를 물론하고 먼저 금고하고 뒤에 알리라」고 하였다.

 

 3월 무오에 친히 구정에서 초제하였다. 정축에 별이 건방(서남간)에서 나타났는데 크기가 달과 같더니 조금 후에 변하여 혜성이 되었다. 거란이 국호를 다시 대요라 하였다. 하 4월 경인에 경성에 지진하였다. 계사에 재우하였다. 임인에 제하기를「근시로 경성의 좌우창 및 용문의 운흥창의 별감을 삼으라」하였다. 계묘에 대묘와 별묘에 체하였다. 고중신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갑진에 사재경 고부창을 요에 보내어 국호를 고침을 축하하였다. 병오에 섭태복경 이총현이 소야하고 게으르므로 면직하였다. 5월 을묘에 제하여 국원후의 이름 증을 고쳐 기로 하였다. 비를 천상에서 빌었다. 추 7월 갑인에 조하기를「맹추(7월)의 달은 성숙할 때인데 잔염(여양)이 용사하여 한기가 아직 깊으니 이것은 반드시 형벌이 잘못되어 원망과 억울을 산데에서 나온 것이다

 

짐이 밤낮으로 염려하여 편히 있을 때가 없다 모든 중외 백사들은 형량을 심사하고 옥사를 명찰하여 원옥과 남형이 없게 하라」고 하였다. 9월 을축에 왕이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경진에 묘통사에 행차하여 마리지천도장을 설하였다. 동 11월 임자에 요의 횡사사 귀주자사 야율하가 왔다. 12월 신사 삭에 요가 숭록경 왕거혹을 보내 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정미 21년 춘 정월 경술 삭에 조하를 쉬었다. 경신에 흥왕사가 낙성되니 무릇 2,800간으로 12연만에 필역되었다. 왕이 낙성제를 베풀고자 하니 여러 곳의 승려(치류)들이 수없이 모여드는지라 병부상서 김양과 우가승록 도원 등에게 명하여 계행이 있는 자 1,000인만 선택하여 부회케 하고 인하여 상주하게 하였다. 무진에 연등대회를 흥왕사에서 오주야동안 특설하고 칙을 내려 백사 및 안서도호 개성부 광 수 양 동 수 5주와 강화 장단 이현으로 하여금 대궐 뜰에서 사문까지 채붕을 얽으되 차례 차례로 연달아 서로 잇닿게 하고 연로(왕의 차도)의 좌우에는 등산과 화수를 만들게 하니 불빛이 낮과 같았다. 이날에 왕이 노부(왕의 행차의 의장)를 갖추어 백관을 거느리고 행향하고 재물과 의복을 시납하니 이와 같이 성대한 불사는 고금에 없었다. 신미에 신봉루 동쪽 장전에 거동하여 군신을 향연하였다. 병자에 창릉에 배알하고 집사자들에게 작 일급을 사하고 시종한 군사들에게도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윤월 정해에 동여진의 회화장군 잉울(은)사하었다.

 

 경오에 제하기를「지금부터 제주현은 어포를 바치지 말라」고 하였다. 3월 기축에 중서령으로 치사한 왕총지가 졸하였다. 계사에 제하기를「고 문하시중 최항 강감찬과 참지정사 금맹은 청절직도로 누조를 역보하여 그 공이 방책(기록문서)에 실려 있고 이제 사방이 강락하여 백성들이 그 혜택을 받게 됨은 모두가 제공들의 힘인지라 가히 항과 감찬은 수태사 겸중서령을 맹은 태자태사 문하시중을 추증할 것이라」고 하였다. 무술에 왕이 장원정에 행차하였다. 을사에 제하기를「잡곡 49,400석을 삭북제주군에 조운(수로로 운반)하여 써 변방 백성들에게 주라」고 하였다.

 

하 5월 무술에 합문에서 국노(치사한 원로)들을 향연하고 의물을 사하였다. 6월 신유에 왕이 건덕전에서 보살계를 받았다. 추 7월 계사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9월 을유에 송악정에 행차하여 주연을 베풀고 사신에게 명하여 시를 짓게 하였다. 정유에 국사 해린이 늙어서 산에 돌아가기를 청하니 왕이 친히 현화사에서 전별하고 차약 금은 기명 채단 보물을 사하였다. 동 12월 을사 삭에 요가 영천관내관찰사 호평을 보내 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무신 22년 춘 정월 무술 삭에 일식하였다. 정축에 동여진의 귀덕장군 상곤 등이 내조하였다. 계사에 흥왕사에 행차하여 경성(낙성)회를 설하여 신숙(2박)하고 돌아왔다. 정유에 최유선으로 판상서리부사를 삼고 왕무숭으로 판상서형부사를 삼고 김의진으로 판상서병부사를 삼고 기여는 다 전과 같이 하였다. 무술에 김행경으로 병부상서를 삼고 이*으로 우산기상시를 삼았다. 2월 신해에 장작감 전석조로 지서북면 춘하번 병마사를 삼고 태부소경 이징망으로 동북면 춘하번 병마부사로 삼았다. 3월 정묘에 탐라의 성주 유격장군 가야잉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하 4월 갑자에 최상으로 동지중추원사를 삼았다. 병인에 문덕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최인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5월 갑오에 제하기를「봄에서 여름까지 비가 시기를 어기고 교양(여름의 열일)이 위엄을 떨쳐 가색(농작물)이 마르고 타니 이것은 아마 과인이 박덕하여 이런 구징(천구의 징험)을 이루게 된 것이니 내가 근신(측신)하여 하늘의 견책함에 답하고자 생각하나니 오늘 이전의 내외의 잡범 공유 사도 이하의 죄는 다 놓아주라」고 하였다. 6월 임인에 동여진의 귀덕장군 안구 등이 내조하였다.

 

경신에 동계병마사가 주하기를「판관 임희열 녹사 정신 장군 거흥 등이 전함을 타고 초도에 순행하다가 적선 10소를 만나 서로 싸워 적을 패하게 하여 적선 7소를 노획하고 사로잡고 벤 것이 심히 많았읍니다」하니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희열 등에게 편복(사복) 일습과 김도은대 일요를 사하고 기외 모든 전공자에게도 다 작과 상을 가해 주었다.

 

추 7월 신사에 송인 황신이 와서 왕을 알현하고 말하기를「황제께옵서 강 회 양절 형호남북로 도대제치발운사 나증을 불러서 하시는 말씀이 고려는 자고로 군자의 나라라 칭하고 조종 때부터 수관(수호)를 매우 부지런히 하였는데 후세에 이르러 조절됨이 오래 되었도다 지금 들으니 그 국주가 현왕이라 하니 가히 사람을 보내어 효유할 것이라고 하시매 이를 증이 주하여 신 등을 보내므로 와서 천자의 뜻을 전합니다」고 하니 왕이 기뻐하여 관대함을 우후하게 하였다. 송의 상인 임녕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정유에 동계병마사가 주하기를「판관 임희열 도부서부사배행지 원흥진부사 석수규 등이 또 초도에 순행하다가 밤에 염라포에 이르러 적선 8소를 만나 3소를 격파하니 남은 적이 해안에 상육하여 궤주하거늘 추격하여 30여급을 참살하였습니다」고 하니 왕이 후하게 작과 상을 가하였다. 8월 정사에 태자에게 명하여 송의 진사 신수 진잠고 저원빈 등을 불러 옥촉정에서 시부를 시케 하였다.

 

기미에 강원광으로 어사대부를 삼았다. 경신에 위위경 문양열로 지서북면 추동번 병마사를 삼고 형부시랑 홍덕위로 동북면 추동번 병마부사를 삼았다. 9월 갑신에 수태사 중서령으로 치사한 최충이 졸하였다. 동 10월 을묘에 동여진의 회화장군 아린 등이 내조하였다. 12월 기해 삭에 요가 익주관내관찰사 위성을 보내 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무신에 상서좌복사 왕현이 세번이나 글을 올려 퇴직하기를 빌었다. 이 해에 신궁을 남경(지금의 서울 지방)에 창건하였다.

기유 23년 춘 정월 무자에 동여진의 회화장군 사어하가 내조하였다. 2월 무오에 태복경 하주여 지동북면 춘하번 병마사를 삼고 대부소경 박양선으로 서북면 춘하번 병마부사를 삼았다. 3월 기사에 흥왕사에 행차하여 남봉에 올라 계음하고 상사(3월3일)시를 지어 시신들에 명하여 화답하여 올리게 하였다. 하 4월에 가물었다. 계묘에 진관사에 행차하였다. 5월 경진에 장원정에 행차하여 정하에 못 가운데에 서문석(아름다운 문채 있는 돌)을 얻었으므로 문신들에게 명하여 가시를 지어 올리게 하였다. 갑신에 비를 빌었다. 계사에 정유산으로 상서좌승 우간의대부를 삼고 양치춘으로 시어사를 삼고 한억 이덕승으로 모두 전중시어사를 삼고 손관으로 좌보궐을 삼고 조윤간 심주찬으로 모두 감찰어사를 삼았다. 6월 임인에 송의 상인 양종성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추 7월 을축 삭에 일식하였다. 정축에 송의 상인 왕녕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계사에 상서좌승 우간의대부 정유산으로 서북면 추동번병마부사를 삼고 병부시랑 이징망으로 동북면 추동번병마부사를 삼았다. 동 윤 11월 정유에 왕제 평양공 기가 졸하였다. 12월 계해 삭에 요가 어사중승 고용을 보내 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요의 동경회례사 검교우복사 야율극리가가 왔다.

 

경술 24년 춘 정월 계사 삭에 조하를 쉬었다. 병자에 별이 대구현(대구지방)에 떨어져 화하여 돌이 되었다. 기유에 김양감으로 상서우승 좌간의대부를 삼고 이정공으로 한림학사를 삼고 김공으로 우부승선을 삼고 박덕영으로 우보궐을 삼고 강안서로 전중시어사를 삼고 김총 김상기로 좌우보궐을 삼았다. 2월 병인에 흥왕사에 행차하여 자씨전(미륵전)이 신창되었으므로 경성대회(낙성대회)를 베풀고 경숙하고 돌아왔다. 임신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계유의 대회(연등)에 왕이 태자 제왕 시신으로 더불어 중광전에서 연회를 베풀고 새벽이 되어서 파하였다 한식이 15일이고 국기일이 13일임으로 이에 12일로 연등하는 밤(등석)을 삼았다. 3월 기미에 김덕부로 태자빈객을 삼았다. 하 4월 신유 삭에 왕이 상춘정에서 곡연을 베풀고 태자 제왕 시신을 시켜 각기 상화시를 짓게 하였다. 신미에 비를 천상에서 빌었다. 임인에 병부시랑 좌간의대부 문정으로 서북로 병마부사를 삼고 비서소감 고유로 동북로 병마부사를 삼았다.

 

 병자에 문덕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최익신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5월 임인에 왕이 아들 탱를 현화사에 출가시켜 머리를 깍고 중이 되게 하였다. 6월에 흥왕사에 성을 쌓았다. 추 7월 을미에 상서우승 간의대부 김양감으로 서북로 병마부사를 삼고 호부시랑 김약진으로 동북로 병마부사를 삼았다. 8월 신미에 평장사로 치사한 김의진이 졸하였다. 기묘에 어사대부 강원광이 졸하였다. 송의 호남 형호 양절발운사 나증이 또 황신을 보내왔다. 제하기를「서여진 추장인 회덕의 부 이우 불이 선조 때부터 변공이 있으니 회덕에게 봉국장군을 제수하라」고 하였다. 9월 병신에 왕이 상춘정에서 연회하고 근신들에 명하여 시를 짓게 하니 밤늦게야 파하였다. 동 10월 경오에 왕이 현화사에 행차하였다. 11월 갑오에 고수탄철고를 경성사면(변)에 설치하였다. 12월 정사 삭에 요가 위위경 화욱을 보내 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신해 25년 춘 정월 정해 삭에 조하를 쉬었다. 기해에 김행경으로 상서좌복사 판상서형부사를 삼고 최유부로 상서우복사를 삼고 홍덕위로 병부상서를 삼고 정유산으로 한림학사를 삼았다. 신축에 김양감으로 상서좌승 지어사대사를 삼고 노인으로 상서우승 좌간의대부를 삼았다. 임인에 아들 수로 검교상서령 수사공을 삼고 최유선으로 수사도를 삼고 이유충으로 수사공을 삼았다. 임자에 김행경으로 참지정사를 삼았다. 계축에 서여진의 회화장군 분태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2월 신미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무인에 연등회를 특설하고 경령전에 배알하였다. 3월 경인에 민관시랑 김제를 보내어 표문과 예물을 받들고 송에 가게 하였다 처음 황신이 돌아갈 때에 복건에 이첩하여 예를 갖추어 조공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이에 이르러 제를 보내어 등주를 거쳐 입공케 하였다. 무술에 강원광에게 태자 태사를 추증하였다. 신축에 동여진의 귀덕장군 상곤 등 22인이 피로된 우리 나라 사람을 구환하였다. 무신에 대안사에 행차하였다. 하 4월 임술에 우제를 지냈다. 정묘에 서여진 추장 노우달 등 10인이 와서 토물을 바치니 각각 직을 사하였다. 계유에 친히 구정에서 초제하였다. 무인에 왕윤사에 행차하였다.

 

임오에 서여진 추장 마호달 등 18인이 와서 토물을 바치니 귀덕장군을 가하고 예물을 사하였다. 5월 을유에 왕무숭으로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상서병부사를 삼았다. 정해에 비를 천상에서 빌었다. 계사에 서여진 요연 등이 내조하니 직과 상을 우가하였다. 무술에 헌사가 주하기를「송인으로 예빈성주부가 된 주항은 본래 문예로써 임용되었으나 지금 장죄(회뢰)를 범하였으니 청컨데 그 직전을 회수하고 돌려 보내소서」하니 제하여 가타 하였다. 신해에 왕이 현화사에 행차하였다. 6월 경신에 안공 송유는 즉 삼한공신 태부 소격달의 현손임으로 특히 그 역(안공)을 면하고 입사함을 허하였다. 갑자에 비를 천상에서 빌었다. 추 7월 갑신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8월 신유에 동여진의 귀덕장군 고사 등 15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병자에 회화장군 사어하 등 20인이 와서 양마를 바쳤다. 정축에 송의 상인 곽만 등 33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9월 을유에 송의 상인 원적등 37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경인에 왕이 중양절(9월 9일)이므로 상춘정에 거동하여 태자와 계림후 평양후 재상 이유충 왕무숭 등을 향연하고 각각 말 1필씩을 사하였다. 정유에 송의 상인 왕화 등 3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동 10월 을묘에 송의 상인 허만 등 61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11월 을미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신축에 서여진 추장 만두불 등이 여러 사람을 거느리고 내투하니 직과 상을 차등있게 주었다. 임인에 서여진 추장 인주 등 10인과 동여진 추장 다로곤 상곤 등 58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병오에 수사도 유고만이 졸하였다. 12월 신해 삭에 요가 익주자사 고원길을 보내 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병자에 유홍으로 급사중 좌승선을 삼고 은정으로 비서소감 우부승선을 삼았다.

<세가9권 문종3과 순종편이 누락되어 싣지 못하였습을 양해 바랍니다.입수하는대로 싣도록 할 것입니다.>


제13대 선종(宣宗 1083~1094 재위11년)

 

선종 안성사효대왕의 휘는 운이요 자는 계천이며 고휘는 증 또는 기라고 하였다 문종의 제2자요 순종의 동복형제로 문종 3 년 9 월 경자에 탄생하였다 어려서 총명하고 지혜롭더니 자라매 효경하고 공검하며 지견과 도량이 홍원하고 경사를 박람하였으며 더욱이 제술에 능하였다 10년 3월에 책하여 국원후가 되고 누봉하여 상서령이 되었으며 작위가 올라 공이 되었다 37년 7월에 순종이 즉위하매 수태사 겸중서령을 가하고 10월 을미에 순종이 붕어하매 병신에 유조를 받들어 곤룡포와 면류관을 착복하고 선정전에서 즉위하여 백관의 하례를 받았다. 정유에 금강명경도장을 건덕전에서 설하였다. 무술에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상복을 입고 선정전에 나아가 제례를 행하였다. 예가 끝나자 백관이 서쪽으로 나아가(예서) 합문에 올라 봉위하고 또 자수전에 진위 하였다. 11월 경신에 친히 임하여 빈전을 열고(계빈) 곡하되 애를 다하고 성릉에 장사지냈다. 정유에 한림원이 주하기를「무릇 내외의 주 부 군 현 사원과 공사문관의 (명)호 및 신료이하의 이름이 어휘를 범하였거니 음이 같은 것은 청컨대 이를 고치게 하옵소서」하니 제하여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무진에 신봉루에 거동하여 사하고 문무관에게 일급씩을 가하였다. 이 달에 시어사 이자인을 요에 보내어 상을 고하였다. 12월 임신에 화엄경도장을 건덕전에서 5일간 설하였다. 정축에 팔관회를 설하고 신봉루 앞 장전에 거동하여 백관의 하례를 받고 드디어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전월에는 국휼(국상)을 만났으므로 이에 이르러서야 이를 행하였다. 정축에 건덕전에 거동하여 시조하고 선덕전에 퇴어하였는데 문하시랑 평장사 이정공과 중서시랑 평장사 김량감과 참지정사 왕석 유홍이 시정의 득실을 진하였다.

갑자 원년 춘 정월 신축 삭에 조하를 쉬었다. 기사에 보제사의 승 정쌍 등이 주하기를「구산문

의 참학하는 승도를 청컨대 진사의 예에 의하여 3년 한번씩 뽑도록 하옵소서」한대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3월 경자 삭에 동여진장군 분나노 등 20인이 와서 마를 바쳤다. 하 4월에 요가 칙제사 익주관내관찰사 야율신과 위문사 광주관내관찰사 야율언 등을 보내 와 갑술에 문종을 제하여 가로되「오직 영은 천성이 예의의 단을 극하고 체는 중화의 정수를 함양하였다. 왕작의 귀한 자리에 올라 일찍이 청사의 봉을 이어받으니 목신(동방신)은 인자한지라 온전히 동방의 기를 받았도다 몸소 충성을 품어 힘써 행하고 직은 공의를 술하여 해마다 오도다 일광에 주를 이루니(일광치주) 조정은 그 공훈을 힘입었고 천리(방천리의 영토)의 번병이 되니 생민이 그 혜택을 받았다. 바야흐로 공수하고 공을 이루기를 바랐더니 어찌 상천이 남겨 주지 아니할 줄(불유)을 알았으랴 부음을 듣고 슬피 여겨 조회를 거두고 더욱 흐느껴 울었노라. 오호라 세음(세월)은 머물지 않고 인생은 길손(객)과 같도다 일천년의 시운을 만나 오십년간의 군신의 의를 맺아 오더니 벼란간 야학에 배를 감추매(거장야학지주) 동원의 그릇을 숨기(비)기 어렵도다 마땅히 빨리 초차로 윤음(초음)을 보내어 가서 전례를 펴는 것이니 영혼이여 앎이 있거던 이 지극한 뜻을 흠할지어다」고 하였다. 정축에 순종을 제하여 가로되「오직 영은 진상(성진)의 순정이요 악독의 수기로서 경사는 세국에 피었고(발) 재질은 왕신으로 되었도다 겨우 연소한 때로부터 이에 총가의 은명을 입고 일역을 무봉하여 천조에 술직하였도다 왕실을 익대하매 근왕의 정성을 다하였으며 바야흐로 비호를 벌려(개장) 치평을 이루었도다 번국 다운 공적이 성하였는데 벼란간에 부친의 상(척호지우)에 엉키게 되었도다 정을 어겨서라도 습작하게 할 것을 의론하고 사행에 명하여(초비)이미 떠나도록 하였는데 역부가 이에 왔음을 듣게 되었도다 다시 어진이의 죽음을 차탄하게 되니 더욱 놀라고 슬퍼하노라 어찌하여 주학이 그대로 있지 못하고 이에 사람과 거문고가 함께 망하였단(인금구망) 말인가 충도를 생각하고 풍구(풍변)를 상상하며 울면서 사행을 보내며 가서 전상을 베풀게 하노니 명신이여 앎이 있거던 나의 하의를 양찰하라」고 하였다. 5월 임술에 고민익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6월 임오에 동여진이 흥해군 모산진 농장을 침구하거늘 술졸이 이를 격패하고 5인을 사로잡았다. 무자에 일본국 축전주의 상객 신통 등이 수은 250근을 바쳤다. 을미에 왕자가 연화궁에서 탄생하였다. 추 8월 임신에 제하기「현종이 남쪽으로 행차하였을 때 문하시중 박성걸이 호종하여 공이 있었으니 삼한후벽상공신 양규 등의 녹권에 같이 등록하여 시행토록 하라」고 하였다. 갑신에 송이 제전사 좌간의대부 양경략과 부사인 예빈사 왕순봉과 조위사 우간의대부 전협과 부사 서상합문부사 송구 등을 보내 왔다 신묘에 제전사가 승도를 모아 도장을 문종혼전에서 삼주야간 설하고 임진에 또 순종혼당에 설하였다 계사에 문종을 제하니 축문에「오직 왕은 경릉을 이어 받아 후봉을 무유하니 민과 속을 교도하매 예의를 종으로 하였도다 조정에 뜻을 오로지하니 충성이 권권(권권)하고 백자의 책서(백명)로 공수를 닦으니 오래갈수록 더욱 공손하도다 중명(창해)만리에 일엽편주로 써 통하니 정성이 나타난(조) 곳에 풍도(풍파)도 순종하도다 이 중국은 사해가 다 회동하나니 공을 비교하고 덕을 추도함에 누가 왕보다 으뜸이 되리요 마땅히 오래 살아 동방에서 번병이 되리라고 생각하였더니 갑자기 이에 세상을 떠나매 슬픔이 어찌 다하리요 사신을 보내어 제전을 진설하여 써 나의 애충을 표하노라」고 하고 조하기를「부형의 상은 인륜의 큰 슬픔이요 부의를 증하는 예는 조정의 지극한 은전이라 공순하던 번국임을 상기할 제 마땅히 애영의 은전을 입게 할 것이다 특히 사신을 보내어 가서 전의를 이루어 써 권존함을 보이고 호모함을 위로 하노라」고 하였고 그 조위서에는「불의의 민흉으로 문득 부상을 당하고 다시 동기 마저 잇달아 윤망함을 들었도다 통독이 거듭 잇달으니 어떻게 견디고 있는가 내가 들으니 진실로 측은하고 슬프다 경은 부형의 뒤를 이어 본래부터 효우를 지녔도다 바라건대 잘 슬픔을 억제하여 짐의 권존에 잘 맞도록 하라 이제 사신을 보내어 조위하고 겸하여 경에게 조위물품을 별록과 같이 갖추어 사하나니 이르거던 영납하라」고 하였다 갑오에 순종을 제하여 가로되「오직 왕은 자질이 무미하고 효우가 숙성하며 신의를 행하고 공순함을 생각하여 갸륵하게도 덕망과 성예를 누렸도다 분주히 상에 복하니 예의 떳떳함을 얻었고 일국을 무수하니 진실로 민정에 맞았도다 큰 복을 받아서 이러한 안영을 보전하고 병풍(병)이 되고 울정(정간)이 되어(위병위한) 조정을 익대하리라 하였더니 무엇이 불선하여서 벼란간 고질병에 걸렸단 말인가 오직 하늘의 보시는 만물에 맞추어 불형한 것이어늘 누구가 선을 쌓고도 요절하리라고 하였으리요 나의 사신을 신칙하여 행정을 서두르게 하고 변변치 않은 제물을 진설하여서 이 정성을 표하고자 하노라」고 하였다. 왕의 생일을 천원절이라 하였다. 9월 기해에 송사를 회경전에서 향연하고 임인에 또 향연하고 갑진에 송별연을 베풀고 표문을 부하여 사예하였다

을축 2년 춘 2월 정묘에 천제석도장을 문덕전에 설하였다. 신미에 김강경도장을 건덕전 7일간 설하였다. 계유에 요가 대안이라 개원하였음을 알려 왔으므로 왕이 유사에게 명하여 대묘와 6 능에 고하게 하였다. 을해에 처음으로 가행할 때는 인왕반약경을 받들고 전도하게 하니 송제를 따름이다. 정축에 대마도 구당관이 사자를 보내어 감귤을 받쳤다. 정해에 귀법사에 행차하여 승려를 공양하였다. 3월 병신에 왕이 문고(문종)의 반혼당에 나아가 한식겸 상사제를 행하고자 하니 유사가 곡위가 없다하여 어렵게 여기거늘 왕이 말씀하기를「예는 마땅히 편의함을 따라야 할 것이다」하고 드디어 법가의 호종을 감하고 갔다. 무술에 송의 밀주에서 제가 붕하고 황태자가 즉위하였음을 알려왔다. 무신에 불정도장을 문덕전에 설하였다. 갑인에 왕이 흥왕사에 행차하여 승을 공양하였다. 하 4 월 경오에 왕제 석후가 도망하여 송에 들어갔다. 김준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무인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갑신에 친히 구정에서 초제를 지냈다. 경인에 조재로 말미암아 유사에게 명하여 운우경을 임해원에서 7일간 강하게 하고 또 산악에 기도하고 임진에 근신에게 명하여 녹수하고 경계(경죄수)를 석방하게 하였다. 5월 갑인에 금강명경도장을 건덕전에서 7일간 설하고 비를 빌었다. 6월 정축에 왕이 보살계를 건덕전에서 받았다. 추 7월 임인에 년 80 이상의 남녀를 구정에서 향연하고 의대와 예물을 차등 있게 사하였다. 임자에 문종의 대상임으로 흥왕사에 행차하여 행향하였다. 8월 신미에 호부상서 김상기와 예부시랑 최사문을 송에 보내어 조위하고 공부상서 임개와 병부시랑 이자인을 보내어 등극을 축하하였다. 정축에 문종의 신어를 경영전에 봉안하고 친히 존례를 행하였다. 무인에 선정전에 거동하여 형부가 아뢰는 사수를 청단하는데 음락을 정지하고 소선을 올리게 하였다. 9월 기유에 경계을 석방하였다. 임자에 순종의 혼전에 친히 존하였다. 요가 어사중승 이가급을 보내 와 생신을 하하였는데 기일에 이르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조롱하여 말하기를「사신의 이름은 가급인데 어찌하여 불급하였는가」라고 하였다. 동 10월 계유에 문종을 대묘에 부제하였다, 을해에 백고좌도장을 회경전에서 3일간 설하여 인왕경을 강하고 승 삼만을 공양하였다. 11월 정유에 순종을 대묘에 부제하였다. 병오에 요가 낙기부사 고주관내관찰사 야율성을 보내 왔다. 계축에 요가 보정군 절도사 소장과 숭록경 온교 등을 보내 와 왕을 책하여 특진검교태사 겸중서령 상주국 식읍일만호 식실봉일천호로 삼고 겸하여 관면 차마 규인 의대 채단 등의 예물을 사하였다. 을미에 왕이 남교에서 책명을 받았다.

병인 3년 춘 정월 을미에 외척인 예부시랑 이예의 처 왕씨 등에게 상궁 이하의 내직을 주어서 왕태후의 궁관을 삼고 녹봉을 차등있게 사하였다. 2월 경신 삭에 수태사 겸중서령 최충과 수태위 문하시중 김원충을 정종묘에 배향하고 수태위 문하시중 최제안과 수태사 겸중서령 이자연과 검교태사 문하시중 왕총지와 수태위 중서령 최유선을 문종묘에 배향하였다. 병인에 왕이 왕태후에게 상책하고 건덕전에 거동하여 중외의 하를 받고 군신에게 향연을 사하였다. 택라 유격장군 가어내 등이 와서 하례하고 방물을 바쳤다. 정묘에 적경궁주가 부여후 수에게 시집 갔다. 무진에 신봉루에 거동하여 크게 사하였다. 경인에 조선공 도와 계림공 희로 수태보를 삼고 상안후 수와 부여후 수와 금관후 (#;10-435)와 변한후 음으로 수사도를 삼고 진한후 유로 수사공을 삼았다. 윤월 갑인에 위위소경 최사설을 요에 보내어 천안절을 하하고 전중소감 곽상은 방물을 바치고 호부시랑 김사진은 생신 하함을 사하였다. 3월 신유에 선왕의 시호를 피하여 시중 최숙의 시호 인효를 고쳐 충의라고 하였다. 기묘에 대마도의 구당관이 사인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을유에 산천에 비를 빌었다. 하 4월 계사에 또 빌었다. 갑오에 노신열로 호부상서를 삼고 문간으로 섭병부상서를 삼고 왕국모로 위위경을 삼았다. 신축에 유사가 오랫동안 날이 가물므로 저자를 옮겼다. 경술에 친히 대묘에 체하고 태조 이하의 선왕과 선후에게 존호를 가상하였다. 계축에 이정공으로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를 삼고 최석과 김량감으로 모두 문하시랑 평장사를 삼고 유홍과 왕석으로 중서시랑 평장사를 삼고 노단으로 상서좌복사 참지정사를 삼고 최사량으로 중추원사를 삼고 문황으로 지중추원사를 삼았다. 갑인에 체향으로 곡사하였다. 5월 무오에 건덕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박경백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병자에 상서예부시랑 최홍사를 요에 보내어 낙기복을 사하고 예빈경 이자지는 하정하고 지중추원사 이자위와 상서좌승 황종각 책명을 사하고 또 고주사로 상서우승 한영을 보냈는데 그때 요가 압록강에서 장차 각장을 일으키려 하므로 이를 파하기를 청하였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6월 정해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계묘에 조하기를「짐이 유명을 받들어 외람히 대위(왕위)에 거하였더니 근래에 변괴가 자주 일어나고 한발이 재앙이 되는지라 불신의 음호와 군신의 광보하는 힘을 입어 음양이 순서롭고 상하가 다 화합하여지기를 바라고 내몸을 반성하고 자기를 책망하며 자주 은유를 보였으나 아직껏 비를 얻지 못하였으니 이는 대게 (짐의) 양덕(박덕)의 소치라 하겠다 그러나 아마도 군하의 소행이 혹은 의에 맞지 않거나 명세의 현재 (일세에 뛰어난 현량한 인재)가 등용되지 않아서가 아닌가 한다 오직 너희들 문무 상참관과 치정구덕(관직에서 물러난 연로한 덕망가)과 산임 삼품 이상원(품작만 있고 직책은 없는 삼품이상의 관원)은 금월 26일을 기한하여 각각 봉사를 올려 짐의 과실과 형정의 득실과 민서의 폐막(병폐)을 직언하여 숨기지 말 것이며 또 충직청렴하고 재덕이 있는 자 각 1인과 남녀 승도로서 효순을 독행하였거나 효제치 못한 자와 관직에 있으면서 공도를 지키지 않고 법도를 요란하여 소민을 침해한 자들을 들어서 자세하게 기록하여 아뢰라」고 하였다. 추 7월 병인에 조하기를「짐이 군신이 올린 봉사를 보니 세속이 사치를 숭상하여도 금제(금령)가 없다고 많이 말들을 하고 있으니 소사로 하여금 재신과 제학사와 풍헌장관과 더불어 선왕의 전례에 의거하여 무릇 의복 차마의 품제를 짐작하여 상세히 제정하여 아뢰게 하라」고 하였다. 무인에 덕종후 김씨가 붕어하였다. 8월 병술 삭에 형부상서 소태보로 서북면 병마사로 삼고 공부상서 유석으로 동북면 병마사를 삼았다. 계묘에 국노를 선위하여 합문에서 주연을 사하고 구정에 가행하여 친히 서노 남녀를 향연하고 물품을 차등있게 사하였으며 독질 폐질자에게는 따로 주식을 급하였다. 9월 무오에 양경의 무관을 소집하여 동정에서 활쏘는 것을 사열하였는데 수개월이 되어서 파하였다. 갑자에 요가 수전중감 사순직을 보내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정묘에 변한후 음이 졸하였다. 동 10월 갑진에 내외관에 명하여 태후의 생신을 표하하게 하고 또 설날과 지일(동지와 하지를 말함)과 팔관회 때에도 이와 같이 하게 하여 길이 정제를 삼았다. 기유에 기설하였다. 11월 임술에 친히 초제를 지내고 기설하였다. 무술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가 드디어 신중원에 행차하였다. 기사의 대회에 눈이 내려 연회에 배석하였던 군신이 다 옷을 적시고 저녁에 돌아오려고 할 제 하늘이 개이고 달이 밝아지므로 왕이 창덕문 밖에 연을 멈추고 제왕에게 명하여 술잔을 받들어 헌수하게 하니 간의 김상기 이자인 보궐 위계정 등이 간하매 이에 중지하였다. 12월 무술에 양경의 문관을 소집하여 동정에서 활쏘는 것을 사열하였다.

정묘 4년 춘 정월 갑인 삭에 조하를 쉬었다. 을축에 고주사 비서감 임창개를 요에 보냈다. 기사에 유사에게 명하여 산천 묘사에 제하여 신병이 싸움을 도와주기를 빌었다. 갑술에 회경전에서 친히 초제를 지냈다. 무인에 동녀진 장군 아노한 등 19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기묘에 소태보로 이부상서를 삼았다. 경진에 밀진사 합문인진사 김한충을 요에 보냈다. 2월 경인에 임개로 어사대부를 삼고 고경으로 어사잡단을 삼고 최사설로 시어사를 삼았다. 갑오에 개국사에 행차하여 대장경이 이룩되었음을 경찬하였다. 정유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동여진 장군 괴팔 등 19인이 와서 마를 바쳤다. 계묘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3월 병진에 구산사에 행차하여 승을 공양하였다. 기미에 왕이 흥왕사에 행차하여 대장경이 이룩되었음을 경축하였다. 신유에 서여진 추장 소은두 등 13인이 와서 토물을 바치거늘 작을 사하였다. 계해에 최석으로 권판상서이부사를 삼았다. 임신에 일본의 상인 중원 친종 등 32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갑술에 송의 상인 서전 등 20인이 와서 신주 화엄경판을 바쳤다. 병자에 태일 (천신)을 문덕전에서 친히 초제하고 풍우가 조순하기를 빌었다. 무인에 경계를 석방하였다. 경진에 선정전에 거동하여 정사를 보살폈는데 문하시랑 평장사 최석 김량감과 중서시랑 평장사 유홍이 시정의 득실을 진주하였다. 하 4월 병술에 송의 상인 부고 등 2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무자에 중서시랑 평장사 왕석이 졸하매 3일간 철조하였다. 경자에 귀법사에 행차하여 대장경이 이룩되었음을 경찬하였다. 을사에 금강경 도장을 건덕전에서 7일간 설하고 비를 빌었으며 무신에 또 보제사에서 빌었다. 5월 정사에 두번 우제를 지냈다. 정묘에 왕이 흰 난삼을 입고 현릉에 배알하여 죽책을 올렸다. 무인에 인왕도장을 문덕전에서 설하였다. 경오에 경릉에 배알하고 임신에 창릉에 배알하여 모두 죽책을 올렸는데 책문에「선조를 제향하는 엄숙한 의식은 희역에 풍성한 천제(은천)을 숭상하였으며 신을 감동하게 하는 도리는 우서에 지성을 귀히 여겼읍니다 효의 생각이 일어날제 마땅히 비사(신사)를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이 그릇 유충우매한 몸으로 선왕의 가유(연이)를 계승하게 되었사오니 시서에 느껴 슬픈 마음을 이기지 못하와 날을 택하여 배건의 예를 거행하나이다. 백관에게 집사 할 것을 명하여 성대한 의례를 협찬하게 하였사오며 구주의 토산물을 다하여 써 향기로운 제전을 갖추옵고 우러러 영명하신 조감을 바라오니 극경한 마음을 굽혀 받아 들이옵소서 하늘에 계셔서는 영위를 다투어 빛내사 굽혀 대복(순하)을 내리시고 역세에 있어서는 경화(대화)를 침(유의 뜻) 선하사 창기를 보전토록 하게 하옵소서」라고 하였다. 갑술에 최석으로 수국사를 삼고 김량감으로 판상서호부사를 삼고 최사량으로 참지정사 겸서경유수사를 삼았다. 을해에 김행경으로 문하시랑 동중서평장사를 삼았다. 을묘에 회경전에 친히 초제하고 비를 빌었다. 6월 임오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을유에 소재도장을 회경전에서 7일간 설하였다. 병신에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신축에 경계(경죄수)를 석방하였다. 추 7월 계축에 문황으로 서북로 병마사 겸지중군병마사를 삼고 이자위로 동북면 병마사 겸지행영병마사를 삼았다. 병진에 내정에서 초제하였다. 기사에 왕이 흥왕사에 행차하였다. 경오에 동남도도부서가 주하기를「일본국 대마도의 원평 등 40인이 와서 진주 수은 보도 우마를 바쳤읍니다」고 하였다. 임신에 선정전에 거동하여 시사하였는데 최석 김량감 유홍 최사량이 시정의 득실을 진주 하였다. 8월 계미에 선정전에 거동하여 사형을 청단하였다. 을유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기해에 숭경궁을 고쳐 보령이라 하고 경흥원을 원희궁이라 하였다. 병오에 서경에 행차하였다. 정미에 어사대부 임개로 서북로 병마사를 삼고 사재경 윤익상으로 지동북로 병마사를 삼았다. 9월 경술 삭에 왕이 회교역에 머물었는데 밤에 호위의 군영에서 불이났다. 신해에 시신을 대동강 누선에서 향연하였다. 계축에 장락전에 거동하여 시사하였다. 무오에 요가 고주관내관찰사 고혜를 보내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갑자에 최석으로 검교태보를 삼고 최사량으로 검교 태자태사를 삼고 문황으로 검교 태자태부를 삼고 이자위로 검교사공을 삼았다. 계유에 흥복사에 행차하였다. 병자에 경계(경죄수)를 석방하였다. 무인에 연등도장을 흥국사에 설하고 또 궁성내외의 거리에 점등하였다. 동 10월 기묘 삭에 흥국사에 거동하였다. 계미에 중흥사에 행차하였다. 을유에 내전에서 친히 초제 하였다. 정해에 왕이 관풍정과 구제궁을 유람하고 드디어 영명사에 행차하여 행향하고 용선을 타고 대동강에 이르렀다가 밤이 되어서 이에 돌아왔다. 임진에 팔관회를 설하고 영봉루 부계에 거동하여 관락하고 드디어 흥국사에 행차하였다. 고주사 예빈소경 유신을 요에 보냈다. 계사에 친왕과 시신을 부계에서 향연하였다. 을미에 흥복 금강의 두 절에 행차하였다. 병신에 홍복 인왕의 두 절에 행차하고 드디어 제년 행차하여 누선을 타고 주연을 베풀고 물 흐름을 따라 대동강에 이르러 활 쏘는 것을 구경하였다. 백좌도장을 상경 회경전에 설하고 승 삼만을 구정에서 공양 하였다. 무술에 군신을 장락전에서 향연하였다. 11월 을묘에 서경으로부터 돌아왔다. 병진에 위위소경 유석을 요에 보내어 생신 하함을 사하였다. 임술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기사에 전중소감 김덕균을 요에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신미에 유단으로 분사병부상서 지서경유수사를 삼고 황종각으로 위위경 서경부유수를 삼았다. 정축에 상서우복사 임희열이 졸하매 하루동안 철조하였다. 12월 기묘 삭에 출추사 시어사 최사설을 전 진 나주도에 보내고 상서병부원외랑 이위를 경 상주도에 보내고 합문기후 윤관을 광 충 청주도에 보냈다. 기축에 형부시랑 최저를 요에 보내어 천안절을 축하하였다. 경인에 최석으로 수태위 판상서이부사 감수국사를 삼고 김량감으로 수태위를 삼고 유홍으로 수사공을 삼고 최사량으로 수국사를 삼고 문황으로 지중추원사를 삼고 이자위로 동지중추원사를 삼고 김충의로 호부상서를 삼고 박인량으로 한림학사 승지를 삼고 이예로 한림학사를 삼았다. 갑오에 경계를 석방하였다.

무진 5년 춘 정월 기유 삭에 조하를 쉬었다. 무오에 요가 횡선사 어사대부 야율연수를 보내왔다. 2 월 갑오에 요가 각장을 압록강안에 설치할 것을 의논하므로 중추원 부사 이안을 보내어 장경소향사로 가탁하고 구주에 가서 가만히 변사에 대비하게 하였다. 3월 기유에 중서시랑 평장사 유홍과 우승선 고경에게 명하여 전성에 초제를 베푸니 구례를 수한 것이다. 갑자에 금부필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무진에 최사제로 중추원사를 삼았다. 하 4월 병신에 한재가 심하므로 왕이 백요(백관)를 거느리고 남교에 거동하여 다시 우제를 지내고 육사(육개사항)로써 스스로를 책하니 가로되「정사가 한결 같지 않았는가 백성이 직을 잃었는가 궁실이 높아서인가 여알이 성행하였는가. 포저(회뢰)가 행하였는가 참부가 횡행하였는가」라 하고 동남 동녀 각 8인을 시켜 춤추면서 우를 부르게 하며 정전을 피하고 상선을 감하며 음악을 거두고 노천에 나와 앉아 정사를 듣고 임인에 또 종묘 사직과 산천에 기도하였다. 5월 신해에 송 명주가 우리 나라 나주의 표풍인 양복 등 남녀 23인을 돌려 보냈다. 기미에 요의 동경회례사 검교우산기상시 고덕신이 왔다. 계유에 조기를「짐이 덕에 밝지 못하므로 황천이 견책을 나타내어 석달이나 비가 내리지 않으니 두렵고 송구스럽도다 아마도 중외의 영어(옥)에 잘못이 있는가 보다 그 경수와 박죄는 모두 용서하여 주라」고 하였다. 추 7월에 송 명주가 우리 나라 탐라의 표풍인 용협 등 10인을 돌려 보냈다. 9월에 태복소경 김선석을 요에 보내어 각장을 파하기를 빌었는데 표문에「세 번 앙청하여도 들어주지 않으시니 비록 번거롭게 함이 비례임을 두려워 하나 우리의 원하는 바를 어찌 입을 봉하고 침묵을 지켜 말씀하지 아니할 수가 있겠습니까 더욱이 옛적에는 공물을 드리고(투궤) 글을 올리면 만성이 다 곤난한 호소를 통하게 되고 궁문에 부르짖으며 북을 치면 사총에 등문함을 막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신감의 지공하심을 만나니 어찌 백성의 실정을 다시 주달하지 않으리요 신이 엎드려 살피건대 승천황태후께서 조정에 임하여 칭제하실 때 경계(이)를 사하시고 봉토를 획정하여 주시니 무간은 순문에 이르게 되었고(무간비격어순문) 집옥은 비로소 우회에 참여케 되었나이다(집옥보참어우회) 신절을 장련히 여기시고 예은을 점피하게 하시어서 천황학주의 성으로부터 서으로 피안을 수복하고 일자별교의 수를 한하여서 동쪽은 우리 나라 강토로 분할하여 주셨습니다. 통화 12 갑오년에 입조한 정위 고량이 천보황제의 조서를 가지고 왔는데 고려국왕 왕치에게 칙하기를 동경유수 손령이 아뢴 것을 살펴보니 경이 9월 초부터 정부를 발하여 성채를 수축하여 10월 상순에 이르러 공사를 이미 마쳤다고 하니 경은 하늘이 준 재질로써 지략은 시기에 통달하였도다. 즐거이 사대의 정성을 바치고 멀리 내정의 예를 받들었다 때마침 농한기를 이용하여 멀리 정부를 모아서 광야의 도둑을 막으려 먼저 요진에 성루를 쌓으니 보다 조지에 부합하고 깊이 시정에 알맞도다 하물며 저 여진은 일찍 황화에 돌아와 우리 위신에 복종하고 있으니 감히 비위한 일은 하지 않을 것이지만 속히 완수함을 힘써서 진실로 길이 통태함을 기할 것이다. 그 권애함에 있어서 어찌 자나 깨나(매흥) 저버리겠는가고 하시었습니다. 그때 배신 서희가 경계를 맡아 관임하고 유수 손령이 선지를 받들고 상의 하여 각각 양쪽 경계에다 제성을 분축하게 되었습니다. 이러므로 하공진을 안문에 보내어 압록의 구당사를 삼아 낮에는 나가서 동사(동쪽 물가)를 감독하고 밤에는 들어와서 내성에서 숙직하면서 드디어 천위에 의지하여 점차로 좀도둑을 제거하였으므로 이후로는 방비가 없어도 변후가 더욱 한정하여졌습니다. 성종의 칙묵이 아직 마르지 않았고 태후의 인자하신 말씀이 어제와 같사온데 갑인년에 강에 다리를 놓고 배를 만들어 길을 통하여 을묘세에 우리 주성 경내에 들어와 군을 두고 을미에는 궁구를 설하여 역정을 세우더니 병신에는 비답(수두)으로 윤허하여 옥사를 철훼하고 조하기를 자여의 세소한 일은 항규를 지키도록 하라고 하였고 또 임인년에는 매매원을 의선군 남쪽에 설치하려고 하시므로 논신하였던 바 즙수하는 것을 파하더니 갑인세에 비로소 탐수암을 정융성의 북쪽에 배설하고 회보하시기를(탐수암을) 기공한지 여러 해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당국은 대대로 충근하고 연년이 공근하여 왔습니다. 몇차례나 사행의 장주를 보냈사오나 암수의 성교를 제거하시지 않고 더욱이 이제와서 신시를 경영하려고 하시니 선조의 유지를 어기고 소국이 충성을 다하고 있음을 어여삐 여기시지 않는듯 하옵니다. 수천리에 차마의 왕래가 게으름을 잊었는데 90년 동안 공물을 바쳐옴이 공로가 없게 되었습니다. 모든 구설이 탄식을 하고 뭇사람의 마음이 원망하고 있습니다. 지금 신이 비로소 선대를 이어받아 삼가 외번을 지키게 되매 얼마간의 즐거움이 다시 격앙(격분)으로 쏠리게 되니 어찌 조그마한 이익을 가지고 서로 원망을 맺을(체구) 것이 있겠습니까 경계가 대초에 연하였으니 환화하여 관과를 본받기를 맹세하였으나 땅이 장사처럼 협소하매 기쁘게 춤추려고 해도 오히려 소매자락을 돌리기 어렵습니다(지협장사 변무상난어회수) 자주 겸주(비단에 쓴 표주문)을 올렸으나 윤허(윤유)를 받지 못하였으니 위로는 하늘을 두려워 하며 아래로는 백성에게 부끄럽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황제폐하께서는 곤신의 횡의를 물리치고 변부의 큰 근심을 생각하시와 전원에 경착함을 그대로 맡기시와 다시 구업을 편안케 하시고 각고의 장옥을 금하여 새로 이룩함이 없도록 하소서 다행이 경소함을 면케하여 주시면 길이 보효하기를 도모하겠나이다」고 하였다. 동 10월 정축에 요가 대상소경 정석을 보내 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11월 계해에 연화궁의 원자(세자)의 이름을 욱이라 사하고 은기 필단 포곡 안비 노비를 사하였으며 왕이 태후를 모시고 수춘궁에서 향연하였는데 조선 계림 상안 삼공과 부여 금관 이후도 시연하여서 밤이 다하여 파하였다.임신에 금선석이 요에서 돌아오니 회조하기를「여러번 봉장을 올려 각장을 그만둘 것을 청하고 있는데 진실로 사소한 일이어늘 어찌 번다한 말을 빌리리요 근일중에 편의하도록 의처할 것이다 하물며 아직 설치할 것을 기하는 바도 아니니 힘써 마음을 편안히 하여 써 성심을 지극히 할 것이며 깊은 의심을 풀고 나의 지의를 체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12월 경자에 이안으로 형부상서 참지정사를 삼고 이자인으로 전중감 중추원부사를 삼았다. 이 해에 요가 사신을 보내 와 양 이천구차 이십삼양 마 삼필을 사하였다.

기사 6년 춘 정월 임신 삭에 조하를 쉬었다. 을해에 신흥창의 곡식을 풀어 경성의 제불사에 포시하여 재를 설하고 복을 빌었다. 무술에 소재도장을 회경전에서 5일간 설하였다. 2월 신유에 친히 천지 산천을 구정에서 제사하여 써 복을 빌었다. 3월 경인에 능엄경도장을 건덕전에서 7일간 설하였다. 하 4월 신축 삭에 서리가 내렸다. 6월 신축에 종묘와 칠능에 비를 빌었다. 경신에 최사제로 참지정사를 삼고 박인량으로 동지중추원사를 삼고 서정으로 삼사사를 삼고 김상기로 우산기상시를 삼았다. 추 8월 갑진에 동여진의 귀덕장군 서해 등 14인이 와서 마를 바쳤다. 경술에 송의 명주에서 우리 표풍인 이근보 등 24인을 돌려보냈다. 계축에 국학을 수리함으로 의장을 갖추어 문선왕(공자)을 순천관에 이안하였다. 병진에 사형을 청단하였다. 일본국 대재부의 상객이 와서 수은과 진주 궁전 도검을 바쳤다. 9월 을해에 요가 영주관내관찰사 양린을 보내 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정축에 천원절임으로 요사를 건덕전에서 향연하였는데 왕이 하성조사(성조를 하하는 사)를 지으니 가론「이슬은 차고 바람은 높아 가을 밤은 맑은데 달빛은 향전 속을 밝게도 비춰 준다 삼경이 되려는데도 노래소리 드높으니 요요한 우리 인생 모두다 환같고나 영화를 탐하지 말고 좋은 술 가져와서 금잔에 가득 부어 즐거운 정 펴어보세」라고 하였다. 동 10월 기해에 송의 상인 양주 등 4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기유에 송의 상인 서성 등 59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신해에 인왕경을 회경전에서 3일간 강하고 승 삼만에게 공양하였다. 무오에 새로 주조한 13층의 황금탑을 회경전에 봉안하고 경찬회를 설하였다. 송의 상인 이주 양보 양준 등 127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신유에 왕태후가 국청사 창건을 시작하였다. 11월 정묘 삭에 일식하였다. 동여진의 추장 고사 등 21인이 와서 마를 바쳤다. 12월에 수사공 유홍의 신제가 낙성되었으므로 왕이 대복경 이자의에게 명하여 조서를 가지고 가서 은기 필단 안마를 사하였다.

경오 7월 춘 정월 정묘 삭에 조하를 쉬었다. 기축에 예빈성이 탁라 구당사의 상신장에 의거하여 주하기를「성주 유격장군 가량잉이 죽었으므로 동복형제인 배융부위 고복으로 하여금 뒤를 잇게 하고 부의물은 마땅히 구례에 준하여서 지송하도록 하소서」한대 제하여 가타 하였다. 임진에 보제사의 수륙당에 불이 났다. 이에 앞서 폐인(임금의 총애를 받는 신하) 섭호부랑중 지태사국사 최사겸이 송에 가서 수륙의문을 구득하고 왕에게 청하여 이 당을 짓다가 공역을 채 마치기 전에 불이 난 것이다. 2월 갑인에 동여진의 도령 야사 등 17인이 와서 마를 바치거늘 물품을 사하되 차등이 있게 하였다. 병진에 유홍으로 문하시랑 평장사 판병부사를 삼고 최사제로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를 삼고 이자위로 상서우복사 참지정사 수국사를 삼았다. 기미에 동여진의 도령 요어내 등 22인이 와서 마를 바쳤다. 임술에 동여진의 독달 등 34인이 내조하였다. 3월 기사에 송의 상인 서성 등 15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무자 야에 크게 벼락과 번개가 쳐서 신흥창에 화재가 일어나매 홍원 국청 양사의 공역을 파하였다. 하 5월 병인에 건덕전에 거동하여 이시하고 이경필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그때 경필의 정문(응시문자의 정식)이 격에 맞지 않았으므로 주사를 비방하였다. 6월 경자에 어사대가 주하기를「영원병마록사 우여유가 변민을 침요하여 재물을 취감하니 청컨대 정위에 회부하여 논단하소서」한대 제하여 가타 하였다. 갑진에 제하기를 재변이 자주 일어나고 시우가 시기를 어기니 내외의 공도사장 이하의 죄를 석방하고 관리사로서 법을 범하여 직에서 파면된 자는 다스려서 사곡이 없거던 고려하여 본품에 서용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추 7월 계미에 호부상서 이자의와 예부시랑 위계정을 송에 보내어 사은하고 겸하여 공물을 바쳤다. 9월 신미에 요가 이주관내관찰사 장사설 등 31인을 보내 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경진에 2차로 요사를 건덕전에서 향연하고 삼절인으로 하여금 전내에 앉게 하니 좌우의 유사가 주하기를「두 번씩이나 사자를 향연한다는 것은 옛적에 이런 예가 없었사오며 삼절이 전내에 앉는 일도 또한 들어보지 못하였읍니다.」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사자가 어제의 천경사 비문을 가지고 왔으니 마땅히 특별한 예우를 가할 것이라」고 하여 청종하지 않았다. 무자에 동여진의 회화장군 아어대 등 15인이 와서 마를 바쳤다. 동 10월 병오에 왕이 태후를 모시고 삼각산에 행차하여 경술에는 승가굴에 행차하였다가 드디어 장의사에 행차하고 계축에 인수사에 행차하여 행향하고 갑인에 대가가 산길에 머물러 있는데 백성의 나이 백세 된 자 한 사람과 팔십된 자 세 사람이 길에서 알현 하거늘 각각 물을 사하고 존문하였다. 무오에 신혈사에 행차하여 오백나한재를 설하였다. 12월 신유 삭에 삼각산으로부터 돌아와 사하였다. 12월 임진에 눈(설)오기를 빌고 경자에 다시 제신묘에 빌고 임인에 또 빌었다. 요가 횡선사 익주관내관찰사 야율이칭을 보내왔다. 송이 문원영화집을 사하였다.

신미 8월 춘 정월 정묘에 군신을 건덕전에서 향연하고 각각 구마를 사하였다. 2월 계축에 요의 동경지례회사사 예빈부사 오야여가 왔다. 3월 병자에 동여진 영새장군 개다한 등 40인이 와서 탁타(낙타) 및 마를 바쳤다. 하 4월 정미에 중추원부사 이자인이 졸하였다. 계축에 문하시랑 평장사 정유산이 졸하매 정순이라 익하였다. 5월 기미 삭에 일식하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서 70일간 경천하였다. 을축에 사직에 비를 빌었다. 왕이 흥왕사에 행차하였다. 정묘에 비를 대묘와 칠릉에 빌었다. 6월 갑오에 재차 사직에 빌고 정유에 또 대묘와 칠릉에 빌었다. 갑진에 도병마사가 주하기를「왕년에 번적이 창주를 침구하였을 때에 병마록사 안선준 등이 병졸을 거느리고 나와 덕령술에 주둔하고 낭장 고맹 등을 보내어 추포하며 분격하니 적군이 크게 무너지는지라 교위 숭검과 대정 변학 등이 적중에 돌입하니 사졸들이 사기를 높혀 사로잡고 참살한 공이 있사오니 직상을 가하여 써 장래를 권장하시기를 비나이다.」고 하거늘 제하여 가타 하였다. 병오에 이자의 등이 송의로부터 돌아와 주하기를「(송)제가 우리 나라 서적에 호본이 많음을 듣고 관반(접빈사)에게 명하여 구서목록을 써서 주면서 이에 말하기를 비록 권질이 부족한 것이 있더라도 또한 모름지기 전사하여 부쳐 오라고 하였읍니다」고 하였다. (구서목록) 백편상서 순상주역 10권 경방역 10권 정강성주역 9권 육적주주역 14권 우번주주역 9권 동관한기 127권 사승후한서 130권 한시 22권 업준모시 20권 여열자림 7권 고옥편 30권 괄지지 500권 여지지 30권 신서 3권 설원 20권 유향칠록 20권 유흠칠비 7권 왕방경원정초목소 27권 고금록험방 50권 장중경방 15권 원백창화시 1권 심사방황제침경 9권 구허경 9권 소품방 12권 도은거효험방 6권 시자 20권 회남자 21권 공손나문선수경 40권 양우노자 2권 나십노자 2권 종회노자 2권 완효서 7녹 손성진양추 33권 손성위씨춘추 20권 간보진기 22권 십육국춘추 102권 위담후위서 100권 어환위략 유번양전 30권 오균제춘추 30권 원행충위전 60권 심손제기 20권 양웅집 5권 반고집 14권 최인집 10권 급총기년 14권 사영운집 20권 안연년집 41권 삼교주영 1000권 공환문원 100권 유문 370권 문관사림 1000권 중장통창언 사서체론 제갈량집 24권 왕희지소학편 1권 주처풍토기 1권 장읍광아 4권 관현지 4권 왕상찬음악지 채옹월령장구 12권 신도방찬락서 9권 고금악록 13권 공양묵수 15권 곡양폐질 3권 효경유소주 1권 효경위소주 1권 정지 9권 이아도찬 2권 삼창 삼권 비창 3권 위굉궁서 1권 통속문 2권 범장편 1권 재석편 1권 비룡편 1권 성황장 1권 권학편 1권 진중흥서 80권 고사고 25권 복후고금주 8권 삼보황도 1권 한관해고 3권 삼보결록 7권 익부기구전 14권 양양기구전 5권 계강고사전 3권 현안춘추 3권 간보수신기 30권 위명신주 31권 한명신주 29권 금서칠지 10권 세본 4권 신자 2권 수소자 1권 호비자 1권 하승천성원 고사렴씨여지 100권 십삼주지 14권 고려풍속기 1권 고려지 7권 자사자 8권 공손니자 1권 신자 10권 조씨신서 3권 풍속통의 30권 사승지서 3권 영헌도 1권 대연역 병서접요 7권 사마법한도 1권 동군약록 2권 황제대소 30권 명의별록 3권 조식집 30권 사마상여집 2권 환담신론 10권 유곤집 15권 노심집 21권 산공계사 3권 서집 80권 응거 백일시 8권 고금시원영화집 20권 집림 20권 계연자 15권 추 7월 임술에 상서좌복사로 치사한 노단이 졸하니 시호를 광헌이라 하였다. 정축에 김상기로 호부상서 정당문학을 삼고 유석으로 동지중추원사를 삼았다. 8월 정묘에 중서시랑 평장사 최사제가 졸하였다. 제하기를「송인 전성은 서찰을 잘하고 동양은 무예가 있으니 머물러 있기를 간곡히 청하고 또 직질을 가하여 내자를 권장하라」고 하였다. 윤월 기미에 왕이 정전을 피하여 소선하고 책필로 정죄하였다. 갑자에 장경도장을 회경전에 설하여 행향하고 또 시를 지어 써 (불법에) 귀숭의 뜻을 보였다. 9월 경인에 상춘정에 거동하여 계림공 희 부여공 수 문하시랑 평장사 유홍 좌복사 소태보 병부상서 서정 상장군 왕국모 직문하성 고경 한림학사 손관 등을 불러 주연을 베풀고 조용히 변사를 물었다. 계사에 요가 영주관내관찰사 고숭을 보내 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동 11월 병오에 문하시랑 평장사 유홍이 졸하였다. 경술에 사직에 눈(설)오기를 빌었다. 12월 계해에 문하시랑 평장사 이안이 졸하니 양신이라 익하였다.

임신 9년 춘 정월 갑신 삭에 우설로 조하를 쉬었다. 기축에 중추원사 형부상서로 치사한 박양단이 졸하니 3일간 철조하였다. 정유에 김상기로 이부상서를 삼고 임개로 동지중추원사를 삼았다. 경자에 동여진의 아노한 등 28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2월 기묘의 동여진의 회화장군 삼빈 등이 와서 마를 바쳤다. 탐라성주 의인이 와서 토물을 바치거늘 정원장군을 가하고 의대를 사하였다. 임오에 선마하여 소태보로 참지정사를 삼았다. 3월 병진에 시항(시정)의 민가 640호가 불탔다. 이 달에 왕이 만기의 우노로 자못 몸이 편치 못함을 느껴 문덕전에 이어하고 내의에게 명하여 양성방약을 올리게 하더니 문득 느낀 바 있어 고풍장편을 지으니 그 끝에 일으기를「약효를 얻고 못얻고를 어찌 구태어 염려하랴 부생이 처음이 있으니 어찌 끝이 없으리오 오직 뻑뻑히 삼가 정성껏 모든 선을 닦아서 정역(서방정토)에 뛰어올라 범웅(석가여래)께 예하리라」고 하였다. 왕의 춘추가 한참(정성)인데 이런 시를 지었으므로 보는 이들이 놀라고 괴이 하게 여겼다. 하 4월 을묘에 참지정사 소태보로 권판서북면 병마사 겸중군병마사를 삼고 중추원사 서정으로 서북면 병마사 겸중군병마사를 삼고 정당문학 김상기로 권판동북면 병마사 겸행영병마사를 삼고 동지중추원사 임개로 동북면 병마사 겸행영병마사를 삼았다. 무오에 궁인 이씨를 책하여 왕비를 삼았다. 제하여 금관후 #에게 수태위 겸중서령을 가하였다. 병인에 금관후 (#10-457)가 졸하였다. 무진에 요의 동경지례사 고량경이 왔다. 신사에 문덕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금성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6월 기미에 유석으로 지중추원사를 삼고 이예로 동지중추원사를 삼았다. 경신에 조하기를「짐이 일찍이 일자 최사겸이 아뢰는 것을 듣고 경릉의 허결한 곳을 수보하였더니 요즈음 사천소감 황충현 등의 봉사를 보건대 사겸의 수보는 도리어 지기를 압양하여 장차 선령으로 하여금 현침에 안타하시지 못하게 된다 하니 형부로 하여금 사겸을 가두고 국문하라」고 하였다. 을축에 정당문학 김상기로 수국사를 삼았다. 병인에 왕이 보살계를 건덕전에서 받았다. 임신에 왕태후가 백주 견불사에서 천태종예참법을 장기간(약일만일) 동안 설하였다. 을해에 서정으로 참지정사를 삼았다. 추 7월 을유에 참지정사 최사량이 졸하였다. 8월 을축에 이자위로 상서우복사 권지문하성사 겸서경유수사를 삼았다. 처음에 자위가 재상감교로서 송에 가서 표주할 때 그릇 요의 연호를 ?으므로 송묘에서 그 표문을 각축하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문책을 당하여 파면되었는데 수월이 못되어 내폐에 간알하여 이 직에 배명되었으므로 시인이 그를 기롱하였다. 무진에 서경에 행차하였다. 기사에 최사겸을 선산도에 추방하였다. 9월 임오에 왕태후가 서경에서 붕어하였다. 을유에 요가 왕정을 보 내 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동 10월 병자에 서경으로부터 돌아왔다. 11월 경자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서 경천하였다. 12월 계해에 동여진의 여라불 등 2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임신에 지진하였다.

계유 10년 춘 정월 기묘 삭에 조하를 쉬었다. 2월 갑인에 송의 명주보신사 황중이 왔다. 3월 무인에 원자 욱에게 명하여 수춘궁에 입거하게 하고 동지중추원사 유석과 좌간의대부 손관으로 태자좌우첨사를 삼았다. 임오에 서북로 병마사가「북번인 삼인이 모화하여 내투하였다」고 아뢰매 의복 및 전택을 사하였다. 하 4월 기유에 문하시중으로 치사한 문정이 졸하였다. 계축에 장경도장을 회경전에서 6일간 설하고 왕이 친히 삼보(불 법 승)를 찬하는 시를 지었다. 을묘에 요가 고주관내관찰사 풍행종을 보내 와 왕에게 명하여 기복케 하였다. 5월 무술에 소태보로 중서시랑 평장사 판형병부사를 삼고 서정으로 상서좌복사 참지정사를 삼고 김상기로 이부상서 참지정사 수국사를 삼고 유석으로 예부상서 참지정사를 삼고 임개로 중추원사 형부상서를 삼고 이예로 지중추원사 한림학사 승지를 삼았다. 경자에 홍호사를 성동에 창건하였다. 6월 갑자에 내전에서 친히 초제 하여 써 농사를 빌었다. 추 7월 계미에 서해도 안찰사가 주하기를「안서도호부관할하에 있는 연평도의 순검군이 해선 일소를 나포하였는데 선중에는 송인이 12명 왜인이 19명이었고 궁전 도검 갑주와 수은 진주 유황 법라 등의 물건이 있었으니 반드시 양국의 해적이 함께 우리 나라의 변지를 침범하려던 자들입니다 그 병장 등물은 관가에 수납하고 생포한 해적은 다 영외에 유배하고 그 순포군사에게 상을 내리시기를 청하옵니다.」하니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임진에 병부상서 황종각과 공부시랑 유신을 송에 보내어 사은하였다. 8월 임신에 내외의 사형죄수를 감면하여 해도에 유배하였다. 9월 정축에 왕이 인예태후 반혼전에 나아가서 소상제를 행하였다. 임오에 요가 영주관내관찰사 대귀인을 보내 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12월 갑자에 요가 횡선사 안주관내관찰사 야율괄 보내왔다.

갑술 11년 춘 정월 계유 삭에 조하를 쉬었다. 임진에 해곁에 혜성이 있었다. 2월 병오에 자주 천변이 있으므로 사하였다. 무신에 왕이 장차 열병할새 어사대가 주하기를「병은 금이라 목을 이기는 것입니다 바야흐로 봄이 짙어 덕이 목에 있으니 열병함은 생기를 거슬림입니다.」고 하였으나 이를 듣지 않았다. 3월 갑술에 왕이 인예왕후를 반혼전에서 제하였다. 갑신에 국자제주 한검이 세차례나 표문을 올려 청로함으로 이를 허락하였다. 병술에 동여진 장군 잉우 등이 와서 말 9필을 바쳤다. 정해에 구정에서 초제 하였다. 갑오에 정극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하 윤 4월 임진에 왕이 병이 났으므로 갑오에 재신 추밀 및 종실이 연영전 북문에 나아가서 기거하였다. 5월 임인에 왕이 연영전 내침에서 붕어하니 곧 그날로 빈을 선덕전에 옮겼다.수는 46이요 재위는 11년이라 시호를 사효라 하고 묘호를 선종이라 하였으며 성의 동쪽에 장사지내고 능을 인릉이라 하였다. 인종 18년 관인이라 가시하고 고종 40년 현순을 가하였다.

이제현의 찬에「시라는 것은 뜻의 향하는 바이니 마음에 있으면 뜻이 되고 말로 발하면 시가 된다 선종의 문덕전 이약시를 보면 조맹의 시음척일이란 시와 비슷하니 어찌하여서인가 조맹은 열국의 경임에도 그 말이 구차하므로 군자가 오히려 비방하였거늘 하물며 왕자임에랴 선종의 총명호학으로써 성현의 서가 아니면 읽지 않고 구차한 뜻만 없었더라면 명량갱재의 노래는 아직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대풍강개의 작품쯤이야 어찌 거연히 미치지 못하랴 3연이 다 못되어 드디어 군신을 버리고 갔으니 슬프도다」고 하였다.

 

제14대 헌종(獻宗 1094~1095 재위1년)

헌종 공상대왕의 휘는 욱이니 선종의 원자요 어머니는 숙태후 이씨로 선종 원년 6월 을미에 탄생하였다. 천성이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9세에 서화를 좋아하여 무릇 견문한 바는 일찍이 잊어버리지 않았다. 11년 5월 임인에 선종이 붕어하매 유명을 받들어 중광전에서 즉위하였다. 갑인에 선종을 인릉에 장사지냈다. 6월 경오 삭에 모후를 높여서 태후라 하였다. 갑신에 소태보 이자위로 모두 문하시랑 평장사 상주국을 삼고 유석으로 상서좌복사 주국을 삼고 임개로 참지정사를 삼고 이자의로 지중추원사를 삼고 최사추로 동지중추원사 좌산기상시를 삼았다. 을유에 문종의 비 숭화궁주 김씨가 별세하였다. 무자에 신봉루에 거동하여 대사하였다. 송의 도강 서우 등 69인과 탁라 고적 등 194인이 와서 즉위를 축하하고 토물을 바쳤다. 기해에 조선공 도와 계림공 희로 수태사를 삼고 상안공 수와 부여공 수로 수태보를 삼았으며 진한후 유와 한산후 윤과 낙랑백 영으로 수사도를 삼았다. 추 7월 정묘에 송의 도강 서의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8월 경오 삭에 조하기를「정주 선덕진경내에 황충의 재해가 있다하니 군신으로 하여금 각기 봉사를 올리게 하라」고 하였다. 갑술에 송의 도강 구보 유급 양보 등 64인이 왔다. 동 11월 임자에 나이 80 이상 되는 자들을 구정에서 향연하고 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12월에 요의 내제사 숙준열 부사 양조술 위문사 숙치 기복사 곽인문 등이 왔다. 을유에 내제사가 반혼당에 나아가 선종을 제하니 왕이 조서를 맞이하여 조제하였다. 조서에「짐이 생각건대 선신은 양절을 보전하여 장차 편번의 총을 입히려 하였더니 갑자기 기약없는 먼 길(죽음)을 떠나(오만지유) 영혼이 요요하게 되었구나 마땅이 우악한 은총을 미치게 할 것이므로 제뢰(#;10-463)를 유진하여 권고의 정을 표하노라 이제 영주관내 관찰사 소준열과 위위소경 양조술을 보내어 칙제사와 부사로 삼고 제소의 여러 가지 제물은 별록과 같이 갖추노라」고 하고 제문에는 오직 영은 기범은 깊고 영특하며 자신이 수매하매 다행하게도 풍운의 기회를 만나 공순하게 일월의 정화에 의지하고 조업의 여경을 받아 왕번의 다스림을 이어 맡게 되니 표해의 구토를 쫓아 다스리고 천조에 조공함이 근성을 다하였도다. 진실로 부훈(의방)을 받아 충절을 다하여 왔음으로 장차 총상을 가하고자 하였더니 홀연히 세상을 떠나니 부음이 주달된 이래로 은포의 미치지 못함을 슬퍼하노라 특히 사신을 달려 보내어 가서 전상을 진설케 하나니 생각건대 정혼은 진실로 깊은 뜻을 양찰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제가 끝나고 왕이 환궁하매 위문사가 조서를 건덕전에서 전하니 조에「아뢴 바를 살펴 보니 고려국왕이 훙서한 일을 자세히 알겠다. 짐이 생각건대 선신은 동해의 사표로써 바야흐로 광부의 업적을 힘입으려 하였더니 갑자기 훙거하였다.(운월지재)는 비보를 듣게 되었도다. 살펴보건대 그대는 어린 나이에 이와 같은 흉변을 당하였으니 마땅히 길이 뒤를 이어나갈 일을 생각하고 조금 애최에 절제를 하여 예문에 따라 여의 멀리서 염려하는 마음에 부응하도록 하라 이제 광주방어사 숙치를 보내어 조서를 가지고 그곳에 가서 위문하게 하고 아울러 부증을 별록과 같이 갖추어 사하노라」고 하였다. 병술에 기복사가 건덕전에서 조서를 전달하니 조에「왕은 마침 가간을 만나서 이에 세사를 이어 받았다. 괴(괴#)점은 예제로 되어 있으나 그러나 유모로써 정을 모으고(유모이종정) 금혁의 권변을 따라 굳이 견복하여 정사에 나아가게 하노라 애영의 지극함을 양지하고 힘써 권고위명의 깊은 뜻에 부응하도록 하라 이제 숭록경 곽인문을 보내어 그곳에 가서 경에게 기복 고칙 각 일통씩을 사하노라」고 하였고 관고에는「효를 이룸은 오직 어버이 때문인 것이니 저마에 있어서는 예를 마땅히 슬픔으로 마칠 것이요 충을 나라로 옮겨 금혁에 순응할진대 의는 권에 따름을 귀히 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자는 발명에 의하여 싸움(융사)에 나아갔고 백금은 유위함을 인하여 섭사를 하였던 것이다 짐이 고전을 상고하여 크게 여러 나라를 위무하는데 청사(동토)의 명봉을 돌아보면 이는 황가의 큰 번병이로다. 상제가 어여삐 여기지 않아(상제불은) 국왕(열후)이 붕어하니 영사에 부탁하여 이룸이 있게 할 것이므로 마땅히 구토를 계승하게 하노라 좋은 강일(강길지단)을 가려서 곧 견복의 문을 상고하니 첨의가 다 좋다 하는지라 총장을 내리는 바이다. 고려국왕의 사자 왕욱은 경운이 융성한 세적으로서 재질이 아름답고 인품이 영준하여 용성에 칠숙의 정기가 올라서 일찌기 그 슬기로움이 모였고 목신(동방신)은 오행(금목수화토)의 수기의 으뜸이 되니 나(생)면서 인에 부하도다 이에 묘령에 있음에도 일찍 준수한 그릇으로 추중되어 바야흐로 가업을 계승하는 일을 맡았더니 갑자기 부상(척점지간)을 당하게 되었도다 부음이 주달되어 옴에 상심됨이 지극하도다 그러나 비통함이 점괴에 얽혀서 3연이라도 참아 그 정을 빼았을 수 있으리오마는 책임이 번탄(번병)에 무거우니 하루인들 그 지킴을 비우지 못할 것이다. 이러므로 특히 윤지를 내려보내어 하여금 시묵의 경을 쫓게 하고 타뉴의 숭권을 부여하며 봉지의 준질에 올려서 검계를 우사하고 훈읍을 겸신하여 국봉을 승습케 함으로써 인망을 위무하고자 하노라 아아 처음 그대의 열조가 우리 조정에 신사 하였을 때 태산을 두고 맹세를 하고 동해의 의표가 되어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비호하여 여유가 있었고 손에 남기(이)고 자를 길러(익)써 휴경을 이었도다 돌이켜 생각건대 팔세의 막대한 번영(팔세지막경)은 일유의 소사에서 얻었던 것이라 그대는 오직 선대의 유훈을 답습하여 길이 좋은 계책을 생각하라 근검으로 가히 백성을 보전할 것이요 신의로 가히 정사를 행할 것이니 이 밝은 훈계를 쫓아 지금부터 흠봉 할 것이며 가히 기복할 지어다. 표기대장군 검교태위 겸중서령 상주국 고려국왕 식읍 7000호 식실봉 700호로 하고 인하여 소사로 하여금 택일하여 예를 갖추어 책명토록 하나니 주관자는 시행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을해 원년 춘 정월 무술 삭에 조하를 쉬었다. 해(일)곁에 혜성이 있었다. 왕이 어려서 수성할 줄 모르매 다만 내의 3·4인을 데리고 방술서를 토문(토론)하며 혹은 서화를 익혔다. 경술에 왕국모로 권상서 병부사를 삼았다. 2월 경진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갑신에 동여진의 회화장군 소라 등 28인이와서 마를 바쳤다. 정해에 동여진의 봉국장군 두문 등 48인이 와서 마를 바치니 왕이 선정전에 거동하여 알현을 사하고 근신 최홍사에게 명하여 변방의 형편을 묻게 하고 주식 의대 포백을 사하였다. 신묘에 송의 상인 황충 등 31인이 자은종 승 혜진과 같이 오니 왕은 근신 문익에게 명하여 헌개를 갖추어 혜진을 맞이하여 보제사에 안치 하였다. 진은 항상 말하기를 보타락산의 성굴을 보려고 왔다 하며 가 보기를 청하였으나 조의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3월 신축에 상안공 수가 졸하였다. 하 4월 기묘에 유진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5월 병신에 태후가 현화사에 행차하여 선종의 소상재를 설하였다. 기유에 유석으로 판삼사사를 삼고 이예로 정당문학 형부상서를 삼고 이자의로 중추원사를 삼고 손관으로 지중추원사 한림학사 승지를 삼았다. 계축에 요의 동경회례사 고수가 와서 드디어 사적으로 능라채단을 심히 많이 바치거늘 왕이 건덕전에 거동하여 인견하고 근신에게 명하여 (동경)유수의 안부를 묻고 주식과 의대를 사하였다. 6월 기묘에 왕이 목차계를 건덕전에서 받았다. 추 7월 무술에 요의 수창연호를 행하였다. 병오에 대묘에 향제하였다. 왕이 양음중(상중)에 있으면서도 원구 방택 종묘 사직 및 무릇 기전에 실린 것은 거행하지 않음이 없었다. 계축에 탁라 (탐라)의 고물 등 8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경신에 이자의가 반란을 꾀하다가 복주하였다. 계해에 소태보로 권판이부사를 삼고 왕국모로 권판병부사를 삼았다. 8월 갑자 삭에 황중보로 상서우복사를 삼았다. 을축에 대숙 계림공 희로 중서령을 삼으매 백관이 저택에 나아가서 축하하였다. 갑술에 송의 상인 진의와 황의 등 62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계미에 손관으로 추밀원사를 삼고 최사추로 이부상서 지추밀원사를 삼았다. 갑신에 명하여 동경 황룡사탑을 수리케 하였다. 9월 을미에 소태보로 특진수사도 판이부사를 삼고 김상기와 유석으로 모두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를 삼고 임개로 수사공 상서좌복사 판호부사를 삼고 왕국모으로 우복사 참지정사 판병부사 주국을 삼고 황종각으로 동지추밀원사를 삼았다. 병신에 이자의의 도당인 병부원외랑 김덕충을 원지에 추방하였다. 무술에 조하기를「지난 번에 권세 있는 간신이 난을 꾀하다가 복주하였으니 이는 실로 장상들이 진력한 효과라고 하겠다. 비록 이미 화란은 뽑았으나 더욱 부지런히 수성하여야 할 것이니 무릇 모든 원옥은 모두 관대하게 용서할 것이며 내외에 동으로 속할 수 있는 소죄는 다 면제를 허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경자에 김선석으로 형부상서를 삼고 왕국모로 판도병마사를 삼았다. 동 10월 기사에 제하기를「짐이 선고의 유업을 계승하여 잘못 대위에 나아가니 나이 어리고 몸도 또한 병약하여 능히 국권을 진무하고 사민의 바람을 채워(새) 주지 못하여 음모와 횡의가 번갈아 권문에서 일어나고 역적과 난신이 여러번 내침에 범간하였다 이는 모두 박덕의 소치이니 항상 임금됨의 어려움을 생각하노라 가만히 보니 대숙 계림공은 역수가 몸에 있고 신인이 손을 빌리니 아아 너희들 유중은 받들어 비도를 잇게 하라 짐은 마땅히 후궁에 퇴거하여 잔명의 보전을 얻으리라」고 하니 이에 근신 김덕균 등에게 명하여 계림공 희를 종저에 맞이하여 선위하고 드디어 후궁에 퇴거하였다. 숙종 2년 윤 2월 갑진에 흥성궁에서 붕어하니 수는 14요 재위 1년이다 시호를 회상이라 하고 성동에 장사지내니 능은 은릉이라고 하였다. 예종이 즉위하자 시호를 고쳐서 공상이라 하고 묘호를 헌종이라 하였으며 고종 40년 정비라고 가익하였다.

이제현이 찬하기를「우임금이 아들에게 전위함은 후세를 걱정함에서이다 유복을 세우려(식) 구군의 구(위구)에 조회하여도 천하가 움직이지 않음은 분한이 본래 정해졌기 때문이다. 현종의 세 아들이 형에서 제로 상전하여 순종에 이르고 순종이 거상에 지나친 슬픔으로써 요절하고 사자가 없음으로 선종에게 전위케 되었는데 선종이 별세함에 태자가 사위하니 이가 헌종이다 나라사람들이 견문에 숙습하여서 이에 말하기를 선종에게 다섯 동생이 있었는데 어린 아들을 세웠다고 하여 이로써 그른 것으로 돌리니 생각하지 못함이 어찌 이다지도 심하리오 오직 왕친 중에서 주공과 같은 이를 얻고 신하 중에서 박육과 같은 이를 얻어서 맡겨 정사를 보필케 하지 못하면 그 위난함은 가히 발꿈치를 고이고 기다릴 것이다. 후세에 불행하게도 강보중의 후사에게 중대한 일을 물려 주고 간난한 소임을 맡기는 사람이 있다면 가히 이것으로 써 경계를 삼을 것이다」고 하였다.              

                       출처:빅스타스

 

 

 

- 제10대왕 정종(靖宗, 1018~46) 1034~1046

휘는 형(亨).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천리장성을 쌓고, 장자 상속과 적서 구별을 법으로 정하였음

 

- 제11대왕 문종(文宗, 1019~83) 1046~1083

휘는 휘(徽). 자는 촉유(燭幽). 많은 법류을 제정하여 내치의 기초를 닦음. 학문을 좋아하고 서예에 능함

 

- 제12대왕 순종(順宗, 1046~1083) 1083

문종의 맏아들로 즉위한 해에 죽음

 

- 제13대왕 선종(宣宗, 1049~1094) 1083~1094

휘는 운(運). 문종의 둘째 아들. 동생인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중국 송나라에서 불경을 연구하고 오는등 고려문화의 융성기를 이룸

 

- 제14대왕 헌종(獻宗, 1084~1097) 1094~1095
휘는 욱(昱). 즉위하자 이자의(李資義)의 난을 평정하고, 다음해에 신병으로 숙부에게 왕위를 물려줌

 

- 제15대왕 숙종(肅宗, 1054~1105) 1095~1105

문종의 셋째아들. 조카인 헌종을 폐위 시키고 즉위함. 해동통보를 주조하여 화폐제도를 시작, 고려의 황금시대를 이룸

 

- 제16대왕 예종(睿宗, 1079~1122) 1105~1122

휘는 우. 학문을 좋아하여 학교를 세우는 등 학문을 크게 진흥 시켰음

 

- 제17대왕 인종(仁宗, 1109~1146) 1122~1146

휘는 해(偕). 어린나이로 즉위하여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등을 격었으나 선정을 베품. 김부식에게 삼국사기를 편찬케 함

 

- 제18대왕 의종(毅宗, 1124~1173) 1146~1170

휘는 현(晛). 인종의 맏아들. 무신을 천대하고 문신을 우대하다 정중부(鄭仲夫)의 난이 일어나 폐위되고, 명종3년에 경주에서 살해됨

 

- 제19대왕 명종(明宗, 1131~1202) 1170~1197

휘는 호(皓). 의종의 동생. 정중부의 추대로 즉위하고 최충헌(崔忠獻)에 의하여 쫏겨남

 

- 제20대왕 신종(神宗, 1144~1204) 1197~1204

휘는 탁(晫). 인종의 다섯째 아들로 최충헌이 옹립한 왕임

 

- 제21대왕 희종(熙宗, 1181~1237) 1204~1211

휘는 영. 신종의 맏아들. 최충헌을 없애려다 오히려 쫏겨남

 

- 제22대왕 강종(康宗, 1152~1213) 1211~1213

휘는숙(璹), 정, 오. 명종의 맏아들. 명종과 함께 쫏겨났다가 최중헌에게 옹립되어 왕위에 오름

 

- 제23대왕 고종(高宗, 1192~1259) 1213~1259

몽고의 침입을 받아 강화로 천도한 뒤 28년동안 항쟁 하였으나 결국 굴복함. 몽고를 불교의 힘으로 격퇴하기 위하여 팔만대장경을 조판함

 

- 제24대왕 원종(元宗, 1219~1274) 1259~1274

휘는 정. 몽고에 굴욕을 당한 뒤 즉위. 임연의 난, 삼별초의 난 등으로 화평한 날이 없었음

 

- 제25대왕 충렬왕(忠烈, 1236~1308) 1274~1308

원(元)나라에 굴복하여, 원의 제국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이는 등 원나라의 지나친 간섭을 받았음

 

- 제26대왕 충선왕(忠宣, 1275~1325) 1308~1313

휘는 장(璋). 몽고 황실의 딸과 결혼하고 1298년 왕위에 올랐으나 7개월만에 충렬왕이 다시 복위. 이후 10년간 원나라에 머물다 다시 즉위하여 원나라에서 국정을 봄. 고려와 원나라의 학문교류에 힘을 씀

 

- 제27대왕 충숙왕(忠肅, 1294~1339) 1313~30, 32~39

휘는 도(燾). 정사에 염증을 느껴 아들 충혜왕에게 양위 하였다가 행실이 좋지 않자 2년만에 복위함

 

- 제28대왕 충혜왕(忠惠, 1315~1344) 1330~32, 39~44

휘는 정(禎). 행실이 좋지 않아 정사를 혼란에 빠뜨렸음. 원나라로 귀양을 가다 병사함

 

- 제29대왕 충목왕(忠穆, 1337~1348) 1344~1348

휘는 흔(昕). 원나라에 볼모로 있다가 8세에 원나라에 의하여 즉위함. 어머니 덕녕공주(德寧公主)가 섭정함

 

- 제30대왕 충정왕(忠定, 1337~1352) 1348~1351

휘는 저. 12세에 즉위하여 외가친척인 윤시우(尹時遇)와 배전(裵佺) 등으로 인해 정치가 문란해지고, 왜구의 침입이 잦아 3년만에 폐위됨

 

- 제31대왕 공민왕(恭愍, 1330~74) 1351~1374

원나라 배척운동을 벌여 친원파인 기(奇)씨 일족을 제거하고,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여 국위를 떨침. 말년에 왕비인 노국공주가 죽자 정사를 그르쳐 최만생 (崔萬生)과 홍륜(洪倫)에게 시해 당함

 

- 제32대왕 우왕(禑, 1364~1389) 1374~1388

공민왕의 아들. 10세에 즉위하나 1388년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에게 폐위됨

 

- 제33대왕 창왕(昌, ?) 1388~1389

이성계 등이 우왕을 내쫏은후, 창왕을 내세웠으나 1년만에 강화도로 쫓겨나 10세때 시해됨

 

- 제34대왕 공양왕(恭讓, 1345~1394) 1389~1392

휘는 요. 이성계 일파에 의해 왕위에 올랐으나 실권을 빼앗기고, 정몽주가 살해당한 후 폐위 당하고 고려는 멸망함

 

 

우지마라 / 김양

우지마라 우지마라 사랑이란 다그런거다
저마다 아픈 사연 가슴에 묻고살지
우지마라 우지를 말어라

우지마라 우지마라 사랑이란 다그런거다
저마다 아픈사연 가슴에 묻고살지
미련일랑 남기지 말어라 정해진 운명이여
팔자라더니 달려라 외길인생 후회는 없다
가지많은 나무에 바람 잘날 없구나
우지마라 우지를~ 말어라

묻지마라 묻지마라 인생이란 다그런거다
가다가 힘 들면 한번쯤 쉬어가지
미련일랑 남기지 말아라 정해진 운명이여
팔자라더니 달려라 외길인생 후회는 없다
가지많은 나무에 바람 잘날 없구나
우지마라 우지를 말어라

정해진 운명이여 팔자라~더니 달려라
외길인생 후회는 없다 가지많은 나무에
바람 잘날 없구나 우지마라 우지를
말어라 우지마라 우지를~ 말어라


♬ 우지마라/김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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