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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김씨 족보

안산김씨 족보(1958년), 1776-2007 족보(세보) 이미지

by 연송 김환수 2008. 2. 8.

황토색 표지로 편철된  족보는 1958년(단기4291년) 발간된 족보 15권 + 별책1권 입니다

검은색 표지 족보는 1989년판 4권이며 다른 1권은 향토지(영동문화원) 입니다.

황토색 표지 1959년 족보

 

  검은색 표지 족보는 1989년판 4권

 

 

 

 1776년 간행 족보

 

1776년 간행 족보

 

1815년(을해보) : 1802년 족보를 강진 죽사재에서 중간(重刊 = 재발행)

안산김씨 족보 중간서(重刊序)

안산김씨 족보 중간기 : 숭정2년(1802년) 족보를 1815년에 중간(출판)

안산김씨 족보 범례

안산김씨 족보 권 지 하

을해 맹하 강진 죽사재 중간

 1854년 안산김씨 족보

 

 1939년 족보 파보

사재정공파(안산파) 소장 족보 (* 연성성보)

실물확인은 못했지만 갑자년은 1984년, 1924년, 1864년으로 책의 형태로 보아 최근판으로 보임

 

 

 

 1776년 안김족보 영인본(복사본) 및 신라삼성연원보, 고문서실은 일반인 개방불가(대출 가능)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 6층 고서실의 일반인 개방 일반실 책장 중간 아래서 3번째 최근 안산족보 사진  

 

 1989년 족보

  족보 2002년, 세보 2007년     

 

 

 

 

 

 

  안산김씨세보 : 사직공파(강진파) 1-2   1978년판으로 보입니다( 김응구 편,  강진죽사동 영모당) 

 

 

 

1958년 족보 

 

 

김은부(金殷傅)

 

○金殷傅水州安山縣人性勤儉

김은부는 수주 안산현(水州安山縣) 사람이니 성품이 부지런하고 검박하였다.

 

주) 1009~1031년 현종 초에 양광도() 남경수부 양주 소속의 수주군() 안산현()이

      되었다가 1308년(충렬왕 34)에 덕종·정종·문종이 탄생한 명예로운 곳이라 하여 안산군()으로

       승격된 뒤 지사()의 다스림을 받았다.

 

成宗朝授甄官丞穆宗時累遷御廚使顯宗初爲公州節度使.

 

성종(成宗) 때에 견관승(甄官丞)으로 임명되었다가 목종(穆宗) 때에 어주사(御廚使)로 되었고 현종(顯宗) 초년에 공주 절도사(公州節度使)로 되었다.

 

王避契丹南下次公州殷傅備禮郊迎曰:

 

왕이 거란군의 침공으로 인하여 남녘으로 피난가던 도중 공주에서 머물렀더니 김은부가 예의를 갖추고 교외까지 마중 나와 말하기를

 

"豈意聖上跋涉山川凌冒霜雪至於此極." 獻衣帶土物王遂更衣以土物分賜扈從官.

 

“성상(聖上)께서 험한 산천을 지나시며 찬서리 눈바람을 무릅쓰고 이곳까지 오실 줄이야 어찌 뜻하였으리까?”라는 위로의 인사를 드리고 옷과 띠며 지방 산물을 바치니 왕이 드디어 옷을 갈아 입고 호종 관리들에게 물건을 나누어 주었다.

 

王至巴山驛吏皆遁御廚闕膳殷傅又進膳羞分供朝夕

 

왕이 파산(巴山)역에 이르니 역의 아전들이 모두 도망가고 식사 공궤조차 못 하게 되었는데 김은부가 또 반찬을 장만하여 조석으로 왕에게 식사를 공궤하였다.

 

契丹兵退王還次公州殷傅使長女製御衣以進.

 

그 후 거란군이 철퇴하고 왕이 국도로 돌아오는 길에 또다시 공주에게 유숙하였는데 김은부가 맏딸을 시켜 왕의 의복을 지어 바쳤다.

 

 因納之是爲元成王后元惠元平二王后亦其女也

 

이것이 인연으로 되어 그의 딸이 궁으로 들어 가게 되었으니 그가 바로 원성(元成) 왕후이다. 원혜(元惠), 원평(元平) 두 왕후도 역시 그의 딸이었다.

 

尋除刑部侍郞如契丹賀生辰還至來遠城契丹 女眞執之以歸數月乃得還.

 

그는 미구에 형부 시랑으로 승차되어 거란 왕의 생일 축하 사절로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 내원성(來遠城)에 도착하였을 때 거란이 여진을 시켜 그를 붙잡아 갔다가 몇 년 지난 후에야 돌려 보냈다.

 

進知中樞事轉戶部尙書拜中樞使上護軍八年卒以王后故贈推忠守節昌國功臣. 開府儀同三司守司空上柱國安山郡開國侯食邑一千戶妻封安山郡大夫人又贈其父尙書左僕射上柱國安山縣開國侯食邑一千五百戶母安山郡大夫人妻父李許謙亦贈尙書左僕射上柱國邵城縣開國侯食邑一千五百戶.

 

 그 후 벼슬이 지 중추사(知中樞事)로 올라갔다가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전직되었고 중추사 상호군(中樞使上護軍)으로 재직하다가 현종 8년(1017)에 죽었는데 왕후들의 부친이라 하여 추충 수절 창국 공신 개부의동삼사 수 사공 상주국 안산군 개국후(推忠守節昌國功臣開府儀同三司守司空上柱國安山郡開國侯)를 추증하고 식읍 1천 호(戶)를 주었으며 그의 처(妻)는 안산군 대부인(安山郡大夫人)을 봉하고 또 그의 아버지에게는 상서 좌복야 상주국 안산현 개국후(尙書左僕射上柱國安山縣開國侯)를 추증하고 식읍 1천5백 호를 주었으며 어머니에게는 안산군 대부인으로 추증하였고 장인 이허겸(李許謙)에게도 상서 좌복야 상주국 소성현 개국후(尙書左僕射上柱國邵城縣開國侯)를 추증하고 식읍 1천5백 호를 주었다.

 

 고려사. 열전(신하)

고려사 기록 오류 (1072년 문종26년 경덕국사 묘지명 참조)

안산군 대부인(安山郡大夫人) ===>  안효국대부인(安孝國大夫人)

 

복흥사 경덕국사묘지명 (福興寺景德國師墓誌銘) (1072년 문종26년)

 

 

 

 

구룡산 복흥사(九龍山 福興寺)의 돌아가신 왕사 도승통(王師 都僧統)이며 시호 경덕국사(景德國師)의 묘지명 및 서문


국사의 이름은 난원(爛圓)이고, 속성은 김씨(金氏)이며, 선조는 안산군(安山郡) 사람이다.


돌아가신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긍필(兢弼)이 조부이고, 돌아가신 검교태사 상주국(檢校太師 上柱國)으로 시호가 안평공(安平公)인 은부(殷傅)가 아버지이며,돌아가신 안효국대부인 이씨(安孝國大夫人 李氏)가 어머니이다.


돌아가신 중추사 병부상서(中樞使 兵部尙書)인 충찬(忠贊)이 형이고, 돌아가신 수좌(首座) 홍주(弘疇)가 은사이다. -----생략--------

 

九龍山福興寺故 王師都僧統」贈諡景德國師墓誌幷序」
國師諱爛圓俗姓金氏其先安山」郡人也故尙書左僕射諱兢弼祖」
也故檢校太師上柱國諡安平公」諱殷傅父也故安孝國大夫人李
氏妣也故中樞使兵部尙書忠賛」兄也故首座弘睡師也 師自削」
周羅脫身于豪戚間遭遇累朝歷」揚緇秩纔及順耳陟爲 王師智」
慧花果自然成就賛謂人中之師」子矣烏乎以咸雍二年丙午冬十」
月八日示化報年六十八僧夏五」十七▨▨震悼咸▨迦文定入涅」
槃卽以其月 詔護葬事權之于」五龍山南崗更取▨子冬十月竪」
碑塔▨九龍山福興寺軋隅尋奉」靈骸移安于玆地順也門弟等弗」
杇是圖乃爲墓誌」
  九龍山兮山之秀」  景德師兮師之尊」
  彼佛刹兮旣證果」  此靈本兮且安魂」

 

 

 

 

 

 

 

 

 

 

 

 

계남(繼男) 행장을 쓰신 한유는 한효원의 아들로 사헌부 감찰(정6품), 이조정랑(정5품), 부사(府使) 지냈다.

 

한효원(韓孝元 : 1468~1534) 영의정, 본관은 청주

 

사도시정 한증(韓曾)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머니는 돈녕부의 부정(副正) 이삼로(李三老)의 딸이었다. 1489년(성종20)에 사마시를 거쳐 같은해 문과에 올라 사관(史官)으로 벼슬길에 들어섰다. 공조판서에 올랐다가 나라의 재정을 관장한 호조판서가 되고, 이어 이조판서로 옮겨 조정의 인사권을 관장하였다.

 

이어 좌참찬·우의정·좌의정을 거쳐 67세 나이로 영의정에 올라, 왕세자를 훈육하는 세자사를 겸하였다. 그러나 한효원은 영의정에 오른지 한달 열흘만인 같은해 12월, 그만 몸에 병을 얻어 숨지고 말았다. 시호가 장성공(章成公)으로 내려졌다.

한효원은 두아들을 두었는데, 장자 유(維)는 사헌부감찰이었고, 차남 관은 호조정랑이었다. 장자 한유는 인조임금의 아버지인 원종의 손자 이함(李?)의 사위가 되어 수덕(壽德)·수복(壽福)·수록(壽祿)·수억(壽億)·수백(壽伯) 등 다섯 아들을 두었고, 한관은 아들 수민(壽民)이 있는 등, 한효원은 후손이 많았다.

배위(配位)는 정경부인 상주 김씨(貞敬夫人 尙州 金氏)로 참봉 자숙(參奉 自淑)의 따님이며 아들은 부사 유(府使 維), 정랑 관(正朗 관), 감정 서(監正 緖)이다.

 

조금 더 아시고 아래 싶으시면 한효원 신도비 판독문을 보세요.

http://gsm.nricp.go.kr/_third/user/viewer/viewer03.j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