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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묵함 용문양, 사은연 벼루 소개

by 연송 김환수 2026. 7. 27.

입체적인 용문양(목각)이 정교하게 조각된 필묵함(벼루함)의 뚜껑(오동나무 원목 케이스)이다.

외관 및 조각: 뚜껑 전면에 구름(운문) 속을 유영하는 용의 모습이 깊은 양각(서각) 기법으로 표현되어 있어 고풍스럽고 입체감이 뛰어납니다. 

1980년대 전후로 한국 및 아시아권에서 기념품, 서예 애호가용, 혹은 고급 문방사우 세트용으로 널리 제작되던 전형적인 원목 함의 형태를 띠고 있다.


원목 함 내부에는 함 모양에 맞춘 용문양 석벼루, 서예용 붓, , 연적, 문진 등이 흔히 짜임새 있게 들어 있다.

특정 연도에 대량 또는 소량 제작된 빈티지 제품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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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묵함(筆墨函)은 붓, , 벼루, 연적 등 서예 및 문방사우를 보관하는 전통 수납함이다.

실용적인 용도와 골동품으로서의 가치는 희소성과 보존 상태, 조각의 정교함이 예술적 가치를 결정한다.

 

조선 시대 이전의 골동품이거나 유명한 장인, 역사적 인물이 사용한 진품이 아니라면 중고 거래 시장에서의 환금성이 낮다.

중고나라나 당근 사이트에서 무료 분양도 많은 실정이다.

예전 선비에게 문방사우(文房四友: ,,종이,벼루)는 단순한 필기도구를 넘어 인격을 수양하고 학문을 함께하는 이고, 부와 권위의 상징이었다.

 

(), (), ()를 가까이했던 선비들에게 질 좋은 문방사우는 곧 학문적 깊이와 정신적 가치를 상징했다.

중국과 조선에서는 당대 최고 명장들이 만든 진귀한 문방사우(명품 벼루,오래된 먹)은 부와 권력의 척도이자 수집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은 탄력과 부드러움의 완벽한 조화.

()은 깊고 맑은 먹빛과 은은한 향기.

종이()는 먹물이 번지지 않으면서 부드럽게 스며드는 필기감.

벼루()"돌은 차갑고 물이 젖어 있어야 한다"는 수분 흡수력과 발묵성.

 

옛 선비들은 벼루를 연전(硯田)이라 했다.

농군에게 문전옥답이 필요한 것처럼 글농사를 짓는 선비는 좋은 벼루가 수양과 일상의 기본으로 최상품 벼루의 가격이 한양(서울)의 기와집 한 채에 달하던 시절도 있었다.

벼루는 중국 광동성의 단계연, 감숙성의 도하연, 한국의 남포석 벼루가 최상품으로 꼽힌다.

단계연(端溪硯)은 중국 광둥성 자오칭(조경) 지역에서 채석되는 명품 벼루이다.

단계연의 표면은 '청화(靑花)', '어뇌(魚腦)' 등 아름다운 미세 무늬와 천연 안료를 머금고 있다.

이 돌을 물에 적시거나 완전히 담그면 숨겨져 있던 미세한 무늬가 선명하게 드러나며 본연의 깊고 영롱한 색감을 감상할 수 있다.

남포석 ( 藍浦石 )  벼루

충남 보령 남포지방에서 생산되는 입자가 곱고 치밀한 남포석(藍浦石) 벼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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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지정문화재인 보물 제1382호 ‘청자 상감 신축명 국화모란문 벼루’(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이다.

국가 지정 문화재이므로 시장에서 사고팔 수 없는 가격 측정 불가(무가, 無價)의 국보급 문화재이다.

 

높이 2.9cm, 길이 13.4cm, 10.2cm의 아담한 직사각형 크기이다.

일반적인 돌 벼루보다 작고 가벼운 편에 속한다.

 

안바닥 넓은 면 오른편으로 신축오월십일조(辛丑五月十日造) 위대구전호정서감부(爲大口前戶正徐敢夫)’라 새겨 넣고, 왼편에는 청사연대쌍황하사(淸沙硯壹雙黃河寺)’라는 명문을 백상감하였다. 여기서 신축년(辛丑年)1121, 1181, 1241년에 해당되는데, 유약의 상태와 상감문양 등으로 볼 때 1181년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신축년 60년주기)

이 유물은 1181(고려 명종 11)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현존하는 예가 매우 드문 청자 벼루입니다.

벼루 바닥에 제작 시기와 제작자, 사용자의 관직(대구전호정 서감부)이 상감 기법으로 명확히 새겨져 있어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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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퇴화문 두꺼비모양 벼루 (보물 제1782호) 고려시대 청자 벼루 중 유일무이한 동물 모양(상형) 벼루로, 해저 유물 발굴 역사상 최고의 수확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높이 6.8cm, 길이 11.5cm, 8.3cm 내외이다. 크기가 매우 작고 콤팩트하여 고려시대 선비들이 야외나 먼 길을 이동할 때 가지고 다녔던 휴대용 벼루로 추정된다.

제작 연대: 12세기 전반 고려

전기소장처: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태안해양유물전시관

발굴 경위: 2007년 충남 태안군 대섬 앞바다에 침몰해 있던 고려시대 청자 운반선(태안선) 유물들 사이에서 출수되었다.

특징: 웅크리고 앉아 있는 귀여운 두꺼비 모양을 하고 있다.

두꺼비의 울퉁불퉁한 피부를 표현하기 위해 붓으로 흰색과 검은색 안료를 점찍듯 바르는 퇴화(堆花) 기법을 사용했다.

두꺼비의 등 부분에 유약을 바르지 않고 납작하게 다듬어 먹을 갈 수 있는 연당(硯堂)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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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전 세계 경매 시장과 문화재 감정 시장을 통틀어 가장 높은 가격을 기록했거나 호가하는 벼루는 중국의 황실용 단계연(端溪硯)’이다.

 

벼루는 희귀성과 역사적 가치에 따라 가격이 급등하는 대표적인 이색 투자 품목이다.

현재 시장 및 역사적 경매에서 확인된 최고가 수준의 벼루는

 

1. 역사상 역대 최고 낙찰가 벼루 (중국 단계연)

2010년 전후 중국 고미술품 경매 시장에서 청나라 건륭황제 시기 혹은 명나라 시대의 명품 '단계연(Duan Inkstone)'이 약 2,300만 위안 (당시 한화 약 40억 원)에 낙찰된 기록이 기록적인 최고가이다.

중국 광둥성 조경시 단계에서만 나오는 '단계석'은 먹이 부드럽게 갈리면서도 발색이 좋아 벼루 중 으뜸으로 친다. 특히 황실 문양이 정교하게 조각된 유물은 부르는 게 값이다.

 

2. 대한민국 수집 시장에서의 최고가 수준(수천만 원~측정 불가)국내 고미술 경매 및 전문 수집가들 사이에서 거래되거나 감정된 최고 수준의 가격대는 다음과 같다.

감정가 3,000만 원 ~ 4,000만 원 선으로 벼루 중앙에 거북이 문양이 섬세하게 새겨진 '일월연'이나 북한 자강도 위원군에서만 나오는 화초석으로 만든 '위원 화초석 벼루' 등이 방송 및 고미술 감정가 기준 수천만 원대를 호가한다.

 

조선 시대 정조대왕이 스승 남유용에게 하사했다고 전해지는 '정조대왕 사은연' 같은 유물은 역사적 가치가 높아 가치를 매길 수 없을 정도의 벼루가 되었다.

정조가  자신의 스승이자 아버지 사도세자의 스승이기도 했던 대제학 남유용(1698~1773)에게 하사(下賜)한 정조대왕사은연(正祖大王謝恩硯) 벼루다. (크기 20.2 × 27.7 × 3.5cm)

 

중국 광둥성 자오칭(조경) 지역에서 채석되는 단계(端溪)벼루 앞면에는 물고기와 용이 그려져 있고, 뒷면에는 정조가 대재학 남유용에게 이것을 하사한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

정조대왕사은연의 뒷면은 청나라 최고급 벼루의 소장 역사와 더불어, 정조의 애민 정치 철학, 그리고 스승과 제자 사이의 깊은 신뢰와 효심이 한데 어우러진 조선 시대 왕실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귀중한 기록입니다. 

벼루 뒷면 한자 명문 

1. 오른쪽 테두리 명문(銘文) : 萬川明月主人 奉贈 (만천명월주인 봉증)

    만천명월주인(정조임금의 별호) 삼가 선물을 드린다.

2. 왼쪽 테두리 雷淵老師(뇌연로사  [弘濟]  홍제) [정조낙관]

    뇌연 노스승님께(대제학 남유용의 호) 홍제 낙관(정조 임금의 호)

3. 하단 테두리 臣南有容 祈受珍藏 (신남유용 지사진장)

    신 남유용 임금님께서 내려주시어 받은 보배

4. 벼루 중앙  淸溪馬氏珍藏 蘭田題刊 청계 마씨 소장 귀중품 난전조리

    [成親王] 성친왕 [관인]

    [怡王府印] 이왕부인 [관인]

1. 전면 중앙의 명문 淸溪馬氏珍藏(청계마씨진장) 蘭田趙利(난전조리) / 인장

중앙 부위(청나라 소장가 기록)

  淸溪馬氏珍藏(청계마씨진장) "청계(淸溪) 지방의 마씨(馬氏) 가문에서 소중히 보관하며 대대로 비장(秘藏)해 온 보물이다.

조선 왕실에 기증되거나 전래되기 전, 중국 청나라의 유명한 문방사우 수집가 집안의 애장품이었음을 보여준다.

18세기 중국 청나라 시대의 명품 벼루로 이 벼루가 조선 왕실로 흘러들어오기 전, 마씨 집안의 귀한 소장품이었다. 

蘭田趙利 (난전조리) "난전(蘭田) 땅의 조리(趙利) 벼루의 원소유주 

사각형 인장 成親王(성친왕)은 청나라 건륭제의 11번째 아들이자 당대 최고의 서예가였던 성친왕(成親王, 영성)의 수장인(收藏印)이다. 인장 문구 성친왕(成親王) 

인장의 주인공: 성친왕 영성(成親王 永瑆, 1752~1823) 청나라 제6대 황제 건륭제(乾隆帝)11남입니다.

성친왕은 옹정제의 아들인 홍력(건륭제)처럼 서예와 문방사우 수집에 미쳐있던 인물로, 청나라 중기 4대 서예가(유용, 철보, 옹방강, 성친왕)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당시 청나라 황족과 고위 문인들은 자신이 소장한 문방구 중에서 예술적 가치가 극치에 달한 명품에만 자신의 개인 직인(낙관)을 새겨 넣었습니다.

성친왕의 인장이 찍혀 있다는 것은 중국 현지에서도 이 단계연이 왕실급 보물로 취급받았음을 뜻한다.

성친왕(成親王)의 직인 아래에 나란히 위치한 사각형의 관인(官印) 인장은 이왕부인(怡王府印)이다.

이 인장은 벼루가 마씨 가문과 성친왕의 손을 거쳐 청나라의 또 다른 명문 황실 가문인 '이친왕부(怡親王府)'의 공식 소장품이 되었음을 증명하는 도장이다.

怡王府印(이왕부인) "이왕부(怡王府, 이친왕의 저택 및 가문)의 공식 인장 역사적 사실과 의미

청나라 황실 최고 명문가 '이친왕(怡親王)'의 가보 '이친왕'은 청나라 옹정제(건륭제의 아버지)를 도와 전성기를 이끌었던 핵심 황족이자 철모자왕(세습이 보장되는 최고의 왕작)인 윤상(胤祥)의 가문이다.

청나라 최고의 권력과 재력을 자랑하던 이친왕 가문의 공식 서재(도서관)나 보물창고에 보관되었던 물건이라는 일종의 '황실 공식 소장 보증서' 역할을 한다.

성친왕 인장과의 연계성: 바로 위에 찍힌 '성친왕'의 낙관과 아래의 '이왕부인'이 함께 찍혀 있는 것으로 보아, 당대 최고의 문인 황족들이 서로 이 벼루를 돌려보며 감상했거나, 황실 가문 간의 교류 과정에서 이왕부로 전해져 소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2. 주변부 우측 및 좌측 글귀: 萬川明月主人奉贈 (만천명월주인봉증) / 雷淵老師(뇌연로시) [弘濟]홍제 낙관

우측 세로 글귀 萬川明月主人(만천명월주인)정조의 자호이고 奉贈(봉증)은 선물한다.

정조의 호는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지만, 벼루를 선물할 당시에는 호에 '옹(翁)' 자를 붙이기에는 젊은 나이였기 때문에 벼루 뒷면에 ‘만천명월주인’으로만 친필을 남긴 것이다.

만천명월주인 글자의 뜻은

만 개의 강을 비추는 달빛처럼, 세상 모든 백성에게 공평하게 통치의 은혜를 베푸는 주인공이 되겠다.

하늘에 뜬 하나의 달()이 모든 강물(백성)을 차별 없이 골고루 비추듯, 특정 당파에 치우치지 않고 백성 모두에게 공평한 정치를 펼치겠다는 정조의 강력한 탕평책 철학과 왕권 강화의 의지를 상징합니다.

참고로 어제만천명월주인옹자서(御製萬川明月主人翁自序)는 정조가 자신이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는 아호(雅號)를 짓게 된 내역에 대해서 밝히고 있는 서문(序文)을 전서(篆書)와 예서(隸書) 그리고 해서(楷書)로 작성한 탁본첩(拓本帖)이다. 정조는 홍재(弘齋) 등의 아호를 가지고 있었다.

좌측 세로 글귀 雷淵老師(뇌연로사)정조대왕이 자신의 평생 스승이었던 대제학 남유용(南有容) 선생을 지극히 높여 부른 말입니다. [弘濟]홍제 정조임금의 호 낙관이다.

'뇌연(雷淵)'은 대제학 남유용 선생의 호(號)로 "뇌연(雷淵) 노사(老師)은 스승" 또는 "뇌연 남유용 선생"을 지칭하는 말이다.

정조가 자신의 영원한 스승이자 세자 시절부터 학문을 지도해 준 대제학 남유용(南有容, 호 뇌연) 선생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이 명품 벼루를 특별히 하사했다는 상징적인 표식으로 이 벼루가 왕에게 사은(謝恩)받은 유물'임을 한눈에 증명해 주는 명문이다.

萬川明月主人奉贈 (만천명월주인봉증)  / 雷淵老師 (뇌연로사) [弘濟] 홍제 낙관 

정조대왕의 실제 친필 어필(친필 글씨)과 낙관을 그대로 본떠 새긴 것이다.

침고로 ‘萬川明月主人奉贈(만천명월주인봉증)’ 명문에 늙은이 옹() 자가 없는 이유는 정조대왕이 스승 남유용에게 이 벼루를 선물한 시기(젊은 시절)만천명월주인옹이라는 호를 공식적으로 선언한 시기(말년)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정조대왕이 왕세손일때 중국 청나라에서 입수한 단계석(端溪石) 벼루를 아버지 사도세자와 정조 자신의 사부인 대제학 남유용 (南有容)에게 하사했다는 정조대왕 사은연 (正祖大王謝恩硯)은 선물할 당시 정조는 20대로  '노인()'이라 칭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벼루에 萬川明月主人(만천명월주인)’까지만 새겨 넣은 것이다.

정조(正祖, 1752.10.28.~1800.8.18, 재위: 1776.4.27.(음력3.10)~1800.8.18.(음력6.28) 임금의 호  萬川明月主人(만천명월주인) '옹(翁)'이 추가된 시기는 승하 2년 전인 1798 47세이다.

정조가 자신을 '만천명월주인옹()'이라 부르고 창덕궁 존덕정에 만천명월주인옹자서현판을 걸게 한 것은 재위 22년인 1798년입니다.

당시 정조의 나이는 47세로, 조선 시대 기준으로는 말년에 접어든 나이로 수많은 정치적 풍파를 겪은 후였다.

스스로 세상을 통달한 노인이라는 의미를 더해 ()’ 자를 붙여 호를 완성하고 통치 철학을 선언한 것이다.

◇  정조가 중국 청나라 황실의 최고 안목(성친왕)이 보증하고, 마씨 가문이 대대로 비장했던 천하의 명연"을 하사한 것이다.

이는 사도세자와 자신을 지켜준 스승의 은혜를 청나라 황실의 권위에 빗대어 가장 극진한 방법으로 예우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3. 테두리의 하단 가로 글귀 臣南有容(신남유용) / 祗笥珎藏(지사진장)

"신하 남유용이 왕의 은혜에 감사하며 이 벼루를 대대로 상자()에 받들어 소중히 간직(珍藏)하겠나이다." 임금인 정조에게서 최고의 문방사우를 하사받은 스승 남유용이 군신 간의 두터운 정과 가문의 영광을 기리기 위해 새겨 넣은 다짐의 글이다.

 

‘정조대왕사은연’ 구입 일화(一話) 

1973  창덕궁 벼루 전시회 명연전에서 이근배 시인(벼루 수집가)을 매료시킨 작품이 있었다

창덕궁에서 열린 '명연전(名硯展)' 국가유산청 간행물 상세에서 '벼루 중의 벼루', 이른바 왕중왕으로 꼽힌 최고 명품 예술품은 '정조대왕사은연(正祖大王謝恩硯)'이다.

20여년 뒤, 전시된 벼루 중에서 가장 떨어지는 것 하나라도 갖고 싶다고 생각한 그에게 그 최고의 벼루가 수집되었다.

미국으로 팔려간 정조대왕사은연을 한 기업가가 다시 한국으로 가져왔고, 사업이 어려워진 그가 경매에 내놓은 벼루를 이근배 시인이 구입한 것이다.

1990년대 외환 위기 무렵 경매에서 약 3,000만 원에 구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는 가격을 매기기 어려운 국보급 유물로 평가받고 있으며, 현재 해당 벼루는 가나아트센터 등에 소장 및 전시되며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근배 시인은 40여년 동안 1천여점의 다양한 벼루를 수집한 세계 최고의 벼루 수집가로 알려져 있다.

세계의 어떤 박물관이라도 벼루 전시를 하려면 그에게 작품을 빌리지 않을 수 없다.

중국과 일본의 벼루 전문가들도 그의 수집품을 보고 감탄해 한숨만 쉬었을 정도다.

 

참고로 가격 측정 불가(무가, 無價) 벼루는 대한민국 역사상 학술적·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된 대표적인 청자 벼루(청자 상감 신축명 국화모란문 벼루 보물 제1382, 청자 퇴화문 두꺼비모양 벼루 보물 제1782) 2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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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과  스승 남유용(南有容)의 애틋한 일화

 

정조대왕과 대제학 남유용(호 뇌연)은 단순한 군신(君臣) 관계를 넘어, 목숨을 위협받던 어린 세손 시절을 함께 버텨낸 운명공동체였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인 1773년, 남유용 선생은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훗날 왕위에 오른 정조는 큰 위기 속에서 자신을 지켜준 스승의 은덕을 평생 잊지 못했습니다.

 

정조는 스승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되던 해, 스승의 유고집인 뇌연집(雷淵集)을 왕명으로 직접 간행하게 하고 어제 서문(임금이 직접 쓴 머리말)까지 지어 올렸습니다.

이때 스승을 향한 절절한 그리움과 고마움을 담아 남유용 가문에 하사한 최고의 문방사우가 바로 이 '정조대왕사은연' 벼루입니다.

 

벼루 앞면 '어룡문(魚龍紋)' 조각의 숨은 뜻이 있는데 정교하게 새겨진 물고기와 용(어룡) 문양에는 조선 왕실의 정통성과 정조의 극적인 인생사가 투영되어 있다.

중국 황하의 거센 급류를 거슬러 올라간 잉어가 마침내 용으로 변한다는 '등용문(登龍門) '의 고사에서 유래한 문양입니다.

어린 잉어(세손)이 이제는 온 세상을 굽어보는 거대한 용(왕)이 되었다는 의미를 전하는 것이다.

스승의 눈물어린 가르침 덕분에 벼랑 끝에서 살아남아 성군이 될 수 있었다는 감사의 뜻을 어룡의 변신 과정으로 시각화한 조각입니다.

이 벼루는 남유용 선생의 아들이자 정조 시대 영의정을 지낸 남공철(南公轍)에게 이어진다.

소장자 변천사를 요약하면, 이 벼루는 중국 명문가  청나라 황자  청나라 황족 저택  조선 정조대왕  스승 남유용 가문  현대 대수집가 및 문학 거장’이 소장하게 됩니다.

 

정조대왕사은연(正祖大王謝恩硯)은 18세기 중국 청나라 황실과 문인 사회를 거쳐, 조선의 정조대왕과 대제학 남유용 가문, 그리고 현대의 대한민국 최고 소장가들에 이르기까지 약 250년이 넘는 세월을 이어져 왔다.

 

1단계: 청나라 문인 가문과 황실 소장 (18세기 중반)조선 왕실에 유입되기 전, 이 벼루는 중국 청나라 최고의 권력자들과 문화 예술계 거물들의 손을 거쳤다.

청계 마씨(淸溪 馬氏) 가문: 중국의 유서 깊은 문방사우 수집가 가문인 마씨 집안에서 대대로 소중히 비장(秘藏)해 오던 유물이었다.

성친왕 영성(成親王 永瑆,1752~1823) ): 건륭제의 11번째 아들이자 당대 서예의 대가였던 성친왕이 이 벼루를 입수하여 감상한 뒤 자신의 낙관을 남겼다.

이친왕부(怡親王府): 이후 청나라 황실 최고의 명문가이자 대수집가 가문인 이친왕부의 공식 소장품이 되어 관인(官印)이 찍혔다.

2단계: 조선 왕실 입수와 스승에게로의 하사(1780~1790년대) 청나라 황실의 보물이었던 벼루가 연행사(청나라에 파견된 사신) 등의 외교 경로를 통해 조선 왕실로 흘러 들어왔다.

정조대왕(正祖大王): 학문과 서예를 사랑했던 정조대왕이 이 벼루를 지극히 아끼며 후기 자호인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을 친필 서체로 새겼다.

대제학 남유용(南有容, 호 뇌연): 정조대왕은 자신을 목숨 바쳐 지켜주고 학문을 가르쳐 준 노스승 남유용의 은혜에 보답(사은)하고자 이 명연을 특별히 하사했다.

3단계: 의령 남씨 문중의 세습 가보(18세기 말~조선 말기) 벼루를 하사받은 남유용 선생의 가문은 이를 가문의 가장 큰 영광으로 여겼다.

영의정 남공철(南公轍)과 후손들: 남유용의 아들이자 정조와 순조 대에 영의정을 지낸 문장가 남공철을 비롯해, 의령 남씨 문중에서 대대로 소중히 비장( 秘藏)하였다.

4단계: 정조대왕사은연은 조선 말기에서 일제강점기, 그리고 6·25 전쟁을 거치는 격동의 역사 속에서 종가도 모르는 사이에 유실되어 미국으로 유출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으로 흘러 들어갔던 이 벼루를 김종학 화백이 미국 유학 무렵 발견하여 구입했다.

설악산의 화가로 유명한 서양화가이자 고미술 수집가인 김종학 화백이 한때 이 벼루를 소장했으나 유학 자금 마련 등을 위해 이 벼루를 국내에 매각(환매)하였다.

김종학 화백으로부터 벼루를 사들여 소장한 사람은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의 차남인 이창희 전 새한미디어 회장이었다.

이창희 회장이 세상을 떠난 후, IMF 외환위기 시기와 맞물려 가문의 사정 등으로 인해 유물이 한국미술품경매주식회사에 출품되었다.

5단계: 현재 소장자 이근배 시인: IMF 외환위기 무렵 고미술 경매 시장에 나온 이 벼루를 대한민국 예술원 회장이자 저명한 벼루 애호가인 이근배 시인이 약 3천만 원에 낙찰받았다.

이근배 시인은 당시 "이중섭의 황소 그림과도 바꾸지 않겠다"며 이 벼루를 자신의 인생 최고의 보물로 꼽았다.

가나아트(Gana Art): 최근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등에서 열린 이근배 시인의 명품 벼루 소장전(‘연벽묵치전시)을 통해 일반 대중에게 전격 공개되며 그 압도적인 역사적·예술적 가치를 다시금 인정받았다.

 

남유용(南有容) 1698년(숙종 24)∼1773년(영조 49) = 76세

조선 후기 경종~영조 때의 문신. 서예가. 행직(行職)은 예문관 대제학(大提學)⋅형조 판서(判書)이고, 정조의 사부(師傅)이고,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자(字)는 덕재(德哉), 호(號)는 뇌연(雷淵)⋅소화(小華)이다.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아버지는 돈녕부 동지사(同知事)남한기(南漢紀)이고, 어머니 청송심씨(靑松沈氏)는 처사(處士) 심한장(沈漢章)의 딸이다.

대제학(大提學)남용익(南龍翼)의 증손자이고, 경상도 감사(監司)남정중(南正重)의 손자이다.

이조 정랑 남유상(南有常)의 동생이고, 영의정 남공철(南公轍)의 아버지이다.

도암(陶菴) 이재(李縡)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오원(吳瑗)⋅이천보(李天輔)⋅황경원(黃景源)과 가깝게 교유하였는데, 사람들은 이들을 ‘영조 시대 4대 문장가’라고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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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장생문 벼루 <국립민속박물관>

연면(硯面) 중앙에 원형 연당(硯堂)과 초승달 모양의 연지(硯池)가 있음. 연면의 가장자리에는 소나무, 구름, 학 등의 십장생 문양이 양각됨.

 

일월연(日月硯) <국립민속박물관>

원형의 연당(硯堂)과 연지(硯池)가 겹쳐진 일월연(日月硯) 형태

뚜껑 윗면에 天保九如(천보구여연)이 묵서됨.

가장자리에 대나무, 사슴, 거북, 원숭이, 개구리, 매화, 포도 등이 조각됨. 군데군데 흠집 있고, 한쪽 모서리 마모되고 결손됨. (4-2~4 : 높이 7.6, 세로 41, 가로 2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