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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족보 보는법

한국 족보의 진위(眞僞)에 대한 올바른 이해(理解)

by 연송 김환수 2013. 10. 13.

한국 족보의 진위(眞僞)에 대한 올바른 이해(理解)

 

-한국 족보에 대한 사학자(史學者.一部)의 견해-

 

한국 족보들에 대한 검토

 

일부 족보들은 세록실록 지리지에 의한 성씨조를 제쳐 놓고 처음부터 잘못된 성관지식과 조작된 자료를 갖고 성과 본, 조상의 세계(世系)와 파계(派系)를 기록하므로 서,

 

- 한국의 성관 유래를 중국의 경우와 동일시 한 점

 

- 한국 성관의 주체가 토성인 데도 그 시조가 중국으로부터 왔다는

   시조 동래설을 강조하는 점

 

- 특수한 몇몇 예외적인 것을 제외하면 동성(同姓)도 이본(異本)

   타성과 다름없다.

 

- 신라의 박(). ().() 3성과 이. , . . . 설 등 6성 및

   기타 왕실. 귀족성을 제외하면 나머지 성관은 모두 고려 초기에 나

   왔다.

 

- 중국처럼 봉후건국(封侯建國)한 데서 사성(賜姓).수씨(受氏)

   것이 아니고, 고려 초기 토성을 분정 받은 뒤에 공신.외척. 고관

   등으로 인해 본관별로 봉작읍호(封爵邑號)를 받은 것이며,

    어떤 고을에 봉군(封君)됨으로써 본관을 받게 된 것이 아니다.

 

- 고려초기 이래 려말선초까지 지방의 신흥세력들은 그 주류가 향리

   가계에서 출자하였는데도 조선후기 족보에서는 그 선조가 향리

   였음을 수치스럽게 생각한 나머지 향리 관련자료를 삭제함으로써

   조상의 세계와 직역이 잘못 기재되었다.

 

- 여말이래 문벌을 숭상하는 풍조가 고조되자, 왕실.외척. 부마 및

   삼한(태조)공신 등과 같은 국내 고귀한 기성 벌족과 연결시키기

   어려운 성관 들은 그 시조의 유래를 중국에서 구하는 풍조가 조선

   초기에 만연하여 후기로 올수록 더욱 심해졌다.

 

그 성관이 '세종실록지리지소재 군현토성으로 나타나는 한, 그러한 시조 동래설은 후대에 와서 조작. 윤색된 것으로 설득력이 없다.

 

- 조선시대 편찬된 족보 가운데 고려개국공신 내지 삼한공신을 시조

  로 내세운 조상의 세계에 있어서 실제 가문을 일으킨 기가조(起家

  祖)와 시조 사이에 조상들은 세대수와 연대 및 조상의 직역이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는 기가조 이래 여말선초에 와서, 가계 기록

  또는 족보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고려 초기 공신을 시조로 내세워

  3-4백 년간의 공백상태를 적당히 보충 연결하는 데서 대수와 직역

  이 맞지 않는 것이다.

 

- 고려후기 문집이나 '동문선’ (속동문선 포함) 소재 기(). . 발문

  중에는 족보 관련 서. 발문은 전혀 발견되지 않음을 보아, 15세기

  전반까지는 판각편책(板刻編冊)하여 간반(刊頒)된 명실 상부한

  족보는 나오지 않았다.

 

- 고려시대는 고승들의 비문(탑비만)만 있었고, 관료들은 묘지만

   남겼고, 15세기 이후처럼 신도비와 묘갈명은 하지 않은 것 같다.

 

- 조선 초기 또는 중기에 중간정리단계를 거친 조선 전기 족보는

   대체로 사실에 충실한 반면, 18세기 19세기 이후에 창간된 족보는

   당대인들의 수록에는 큰 문제가 없었으나 그 성관의 유래와 선대

   세계에 관한 서슬은 크게 사실과 어긋나 있다.

 

한국 족보의 진위(眞僞) 대한 이해 (理解)

 

- 1152(의종6)에 작성된 김의원(金義元)의 묘지에 옛날에는 족보

   가 없어 조상의 이름을 모두 잃었다고 한바와 같이 고려초기에는

   사가(私家)의 가계기록인 보첩과 같은 것은 없었다.

 

- 한국의 최초의 족보인 '안동권씨 성화보에 서거정(徐居正)은 그

  서문에서 '우리 나라는 옛부터 종법도 없었고 또한 보첩도 없었다.

  비록 거가대족이라도 가승이 전무하여 수대만 겨우 전해져도 고증

  조고(高曾祖考)의 명휘를 기록하지 못하는 자가 있다고 하여 족보

  의 편찬이 중국보다 훨씬 뒤 졌음을 말해 주고 있다.

 

- 그러므로 17세기 중엽이전에 족보를 발간했거나 초고 또는 초안해

   놓았던 가문들은 조상세계와 족계에 대해 일단 중간적인 정리단계

   를 거쳤기 때문에 후기에도 내용이 충실한 족보를 속간 할 수 있었

   다.

 

그러니 17세기이래 최근까지 300년간을 문호를 차린가계에서는 가통이 계승 될 수 있었으나 17세기 이전은 아무리 명문 벌족이라 하더라도 무자(無子)로 인한 세대단절이 많았다.

 

그런데 현존 족보상에 고려 또는 조선 전기 10대 내지 15대가 줄 곧 세대가 연접되어있는 것은 대개 족보 편찬 때 조작. 윤색된 것으로 유아사망률이 높고 양자를 하지 않던16세기 이전에는 무자로 인한 가계단절이 많았다.

 

- 17세기 말이래 현조를 확보하지 못한 신흥세력들은 기존의 명문.

   거족과 연결시키기 위해 개관하거나 투탁하기도 하며 동성이 라도

   파계(派系)에 따라 현조가 없는 계열은 현조가 있는 계열과 세대를

   적당히 연접하여 합보하는 예가 많았다.

 

- 또한 신흥세력 들은 가첩.가보,호구.분재기.입양문서. 등을 위조하

   거나 가짜 비석을 발굴하거나 명문족보의 선대무후계와 연결하거

   나 형제 수를 늘려 끼우거나, 한 대수를 삽입해서 연결하는 등

   협잡을 자행했던 것이다.

 

- 그리고 한미한 가계나 신흥세력들은 자기 조상을 여말의 수절인사

   와 단종 충신과 결부시켜 조상세계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조상세계

   의 조작과 위보가 속출하게 되었고, 또한 비양반이 일정한 부를

   갖고 가난하거나 궁벽한 기성사족을 찾아서 족보편찬 경비를 부담

   함으로써 합보하는 경우 등도 있었다.

 

18세기 이후 족보의 특징

 

- 시조 또는 선조가 신라 내지 고려 왕실 부마.공신이거나 또는 고관.

   요직을 역임했거나 명문출신이고, 또 가문의 유래가 오래 되었다

   는 사실을 강조한 데서 선대의 세계가 지나치게 소급되었다.

 

- 족보상에 기재된 선조들의 관직도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

 

- 고려 사족들은 대개 모화사상에 젖어 시조의 유래를 중국에서 찾

   았다는 데서 현존 족보상에는 그 시조가 중국 출신이 많다. 이는

   대개 후대에 와서 조작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 신흥세력들은 미천한 조상세계 은폐하고 혈통과 가격(家格)

   보증하기 위해 개관하거나 조상의 세계를 적당히 조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 조선시대 양반사회가 발달하여 향리의 지위가 격하되고 천시를

   받자 선대의 신분을 은폐하기 위해 본관을 바꾸거나 사족(士族)

   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불복신벌정(不服臣罰定)’ '사족

   강리(士族降吏)’의 구실을 내세워 족보와 가승 등에 기술하고 있으

   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 한말과 일제 때는 조선 전기부터 족보를 편간했던 명문.거족들의

   족보 속간도 활발했고 북한지방의 신흥세럭들에 의한 족보도 많이

   창간되었다.

 

- 일제 때 편간된 족보는 그 견본이 현재 국립 중앙도서관에 소장

   되어 있는데 각 성관의 득성유래와 조상세계. 관직 등은 사실의

   고증 없이 조작되어 있다.

 

- 8.15 이후 최근에 간행된 족보들은 현재 대전시의 회상사(回想

   社)’족보도서관을 비롯하여 각 시.도의 공공 도서관 족보 실에

   소장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일제 때의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 조선 후기에서 일제시대에 창간된 족보는 충분한 고증을 하지 않

   거나 원형이 변질된것과, 성관. 조상세계가 조작 된 것이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오임의 경우 금번 을유대동보 발간시 일부 내용에 대해서, 종인들 간에 이견(異見)으로 같이 대동보를 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한데 대해서 유감으로 생각하면서, 물론 일부 종인 중에는 학자들의 논문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전통족보만이 가장 믿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위와 같은 학자들의 주장이 책으로 발간되어 공지의 사실이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특정 성씨에 대해서는 각 고증을 통해서 선대세계 선조 분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앞으로 오임의 경우도 씨족사에 관해서 종인 들간의 이견에 대해서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대한 답이 될 것 같습니다.

 

참고문헌의 저자는 위 책에서 "역사학에 있어서 실증적인 방법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의문점은 후세에 전해도 좋지만 거짓이나 명백한 잘못은 전해서는 안 된다(疑固可傳 訛不可傳也)라든지, '진신서(盡信書)면 불여무서(不如無書)’ (孟子)했듯이 진위와 허실을 제대로 검증하지 않은 문헌자료란 위험하기 짝이 없다.

 

그러한 문헌자료를 '설화문학또는 위서로 간주하고 연구하는 것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만, 그것을 역사적 자료로 이용한다는 데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하겠다고 서술하고 있다.

 

저자의 위 논문에서 일부을 발췌하여 소개하는 것도 오임의 기존 족보에 대해서 우리는 인정하되, 위와 같은 족보에 대한 일부 사학자들의 논술을 참작하여 앞으로 고증이 된 사실에 대해서는 수정 보완하여 진실이 후손들에게 유구히 전승되기를 바라는 생각에서 올리게 되었음을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참고문헌]

 

*한국의 성씨와 족보(저자 이수건 2003. 6. 10. 서울대학교출판부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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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나온다고 다 믿으면 책이 없느니만 못하다.

(盡信書 不如無書: 孟子)

 

이수건 교수의 저서 한국의 성씨와 족보(2003. 6. 10. 서울대학교출판부 발행) 4 페이지에는 역사학의 실증적 방법을 강조하고, 문헌 자료도 무조건 믿지 말고, 진실과 허위를 제대로 검증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책에 나온다고 다 믿으면 책이 없느니만 못하다.(盡信書 不如無書)"라고 맹자(孟子)를 인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수건 교수 본인이 내놓은 토성분정설은 실증적이지 않다. 근거문헌이라고는 세종실록지리지일 뿐인데, 거기에 각 지역 토성이 언제 생겨났는지, 일시에 생겨난 것인지에 대한 단서는 아무 것도 나와 있지 않다.

 

이러한 토성 기록을 보고 각 지역 2000여 토성이 고려초인 940년 토성분정 정책이 시행되면서 생겨났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고, 실증적인 근거가 전혀 없다. 각 성씨의 연원은 제각각이고, 생겨난 시기도 제각각이니 실제를 반영하지 못하는 무리한 학설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토성분정은 940년이 아닌 995년에 있었다거나, 토성분정은 아예 없었다는 다른 주장도 나오는 것이다. 여러 성씨들의 연원을 살펴보면 2000여 토성이 일시에 생겨나는 토성분정은 없었다는 것이 실제에 더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마찬가지로 역사학자들이 펴낸 책에도 오류가 많이 있을 수 있다. 한 두가지 책만 보고 무조건 믿으면 잘못 될 수도 있으니, 정확성을 요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다른 참고 문헌도 살펴보고, 다른 의견도 찾아보고 해서 종합적인 판단을 다시 해야 한다.

 

역사학에 있어서 실증적인 방법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의문점은 후세에 전해도 좋지만 거짓이나 명백한 잘못은 전해서는 안 된다(疑固可傳 訛不可傳也)라든지, ‘진신서(盡信書)면 불여무서(不如無書)’ (孟子)라 했듯이 진위와 허실을 제대로 검증하지 않은 문헌자료란 위험하기 짝이 없다.

 

그러한 문헌자료를 설화문학또는 위서로 간주하고 연구하는 것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만, 그것을 역사적 자료로 이용한다는 데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하겠다.

 

한국의 성씨와 족보 p.4

(저자 이수건 2003. 6. 10. 서울대학교출판부 발행)

 

 

조선시대 신분사 관련 자료의 비판 31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