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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김 뿌리찾기

화수회 어원 (花樹會 語原)

by 연송 김환수 2012. 8. 5.

 

화수회(花樹會) 어원(語原)를 찾아 봅니다.

(花 꽃 화, 樹 나무 수, 會 모일 회)

 

화수회(花樹會)란 종친회(宗親會)와 그 명칭만 달리할 뿐 모두 동성동본의 일족이 모여 조직한 친목조직이며 친목단체이다.

 

정확한 구분은 본문 아래에 올려 놓은 종친회와 화수회를 구별하는 내용을 참고하시면 되는데 요즘은 동일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같은 성씨의 문중에 종친회나 화수회가 존재하고 있다면 종친회는 전체를 아우르는 대종회 개념의 단체이고 화수회는 일정지역의 동성동본 파조(派祖) 개념의 친목단체 모임이다.

집안에 따라 대종회의 명칭대신 화수회를 사용하는 집안도 있다.

 

사전적인 의미로는 같은 성(姓)을 가진 사람들이 친목을 위하여 이룬 모임이나 잔치를 말한다.

 

화수(花樹)'란 꽃나무를 뜻하며 하나의 뿌리에서 많은 가지가 나와 달린 열매란 뜻이고, 종친회의 “종(宗)”자는 같은 할아버지의 후손이란 뜻으로 한 집안 한 가문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들 명칭 외에도 각 성씨에 따라서 대종회(大宗會), 종문회(宗門會), 동종회(同宗會), 종회(宗會), 대동종약원(大同宗約院) 등의 명칭도 사용하고 있다.

 

 

이들 명칭은 다르지만 조직의 기본성격은 같으며 자손이 크게 번성하여 파계(派系)가 많은 집안은 중시조(中始祖) 또는 파조(派祖)로 구분하고 입향조(入鄕祖)를 중심으로 하는 종회(宗會)도 조직하고 있다.

 

파별(派別) 또는 지방별(地方別)로 조직되어 있는 경우도 많으며, 이때 대종회나 중앙종회는 이들의 중앙본부 내지 연합체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화수회란 명칭은 지금으로부터 약 1200년전부터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있다.

 

당나라 때의 위씨(韋氏)들이 섬서성 장안현(陝西省長安縣)에 있는 위곡(韋谷)에서 집안 친목회를 결성하고 대대로 살았는데 그 후손인 당나라 시대의 위장(韋莊. 836~910)이 섬서성(陝西省) 장안현(長安縣)에 있는 위곡(韋谷)의 명승지 '화수(花樹)'에 친족을 모아 놓고 술을 마신 종회법(宗會法)에서 그 유래를 찾고 있다.

 

종족의 모임에 화수(花樹)라는 공식적인 명칭의 사용은 당나라 잠삼(岑參. 715~770)의 “위원외화수가(韋員外花樹歌)” 라는 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당나라 때 위씨(韋氏)들의 화수회(花樹會)를 보고 잠삼(岑參. 715~770)이 ‘위원외화수가(韋員外花樹歌)’의 시를 지은 것이 그 유래인 것이다.

 

잠삼(岑參)의〈위원외화수가(韋員外花樹歌)〉시

 

君家兄弟不可當 (군가형제불가당)

그대의 집 형제를 당할 수 없나니

列卿御使尙書郞 (열경어사상서랑)

열경과 어사와 상서랑이 즐비하구나.

朝回花底恒會客 (조회화저항회객)

조정에서 돌아와서는 늘 꽃나무 아래 모이나니

花撲玉缸春酒香 (화박옥항춘주향)

꽃이 옥 항아리에 떨어져 봄 술이 향기로워라.

 

위씨(韋氏)들이 친족을 모아 놓고 술을 마신 고사에 의해서 화수회(花樹會)라는 말이 생겼지만 처음 화수라는 명칭의 사용은 잠삼(岑參. 715 ~770)의 "위원외화수가(韋員外花樹歌)" 의 시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중국 북송(北宋) 시대의 문인 소순(蘇洵, 1009년~1066년)의 ‘화수회 효시’ 설은 馬琦聲(마기성)씨 작 書藝槁選(서예고선)에 “蘇洵(소순)이 돈목지정(敦睦之情)이 남달라 봄에 화초와 수목이 우거진 동산에서 일족을 모아놓고 친목회를 개최한 것이 花樹會(화수회)의 嚆矢(효시)라고 하지만 잠삼(岑參, 715~770)과 위장(韋莊, 836~910)보다 후대의 인물에 해당된다.

 

우리나라 기록을 보면 고전번역원의 번역서 중「성호전집 제2권」의 시(詩) ‘꽃을 구경하며. 옛 시에 차운하다. 3수’ 가 있는 마지막 3수에

[新歡花樹未全空 / 새 기쁨이라 화수는 전혀 헛되지 않아라]에서 시의 ‘화수(花樹)’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 [주D-008] 화수(花樹) : 친족의 모임을 뜻한다.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1681∼1763)

 

종친회(화수회)가 이념으로 하는 중요한 기능중 하나는 족보를 편찬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에 간행된 족보는 문화류씨(文化柳氏)의 족보라 알려지고 있다. 문화류씨 족보는 1522-1566 (중종 16-명종 21) 가정년간(嘉靖年間) 에 나왔기 때문에 이를 흔히 ≪ 가정보(嘉靖譜)≫라 한다.

 

문화류씨 ≪가정보(嘉靖譜)≫서문 가운데는 가정보다 140년 전이 되는 명나라 영락년간(永樂年間)-세종5년 계묘(癸卯)에 이미 문화류씨보가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영락보≫가 과연 간행본인지 혹은 필사에 그치는 정도의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전하여지고 있는 족보중 가장 오래된 족보는 1401년(태종 1) 오선경(吳先敬)이 작성한 해주오씨의 족도 이다.

 

다음은 1423년 조선 세종5년계묘(癸卯)년에 발간된 문화류씨 영락보(榮樂譜)인바, 구월산(九月山) 대승공(大丞公) 묘하 재실(齋室)에 보관중이나 서문(序文)만 전하고 실물(實物)은 없다.

 

이후 1476년 成宗7년 丙申년 발간된 안동권씨의 성화보(成化譜)인데 이 성화보는 태종조 집현전 대제학이였던 권제, 세종조 영의정이였던 소한당(所閑堂) 권람(權擥)부자의 손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1565년(명종 20년)에는 “문화류씨 '가정보'(文化柳氏嘉靖譜)”가 혈족 전부를 망라하여 간행되면서 이를 표본으로 하여 명문세족들이 앞을 다투어 족보를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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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삼 [Ts'en Shen, 岑參]중국 당 [唐] 시인

태어난 때 : 715

태어난 곳 : 중국 형주(荊州) 장링[江陵 : 지금의 후베이 성(湖北省)에 있음]

죽은 때 : 770

죽은 곳 : 쓰촨 성[四川省] 청두[成都].

소속 국가 : 중국 (唐)

직업 : 시인

 

(병) Cen Shen (웨) Ts'en Shen. 715 중국 형주(荊州) 장링[江陵 : 지금의 후베이 성(湖北省)에 있음]~ 770 쓰촨 성[四川省] 청두[成都].

중국 당대(唐代)의 저명한 시인.

 

잠가주(岑嘉州)라고도 한다. 잠삼은 몰락한 귀족 출신이라 관직을 얻기 위해서는 문학적 재능에 의존하여 과거에 급제하는 수밖에 없었다.

 

750년대에 당나라 세력권 안에 있던 중앙 아시아의 변경 식민지에서 관리로 일했지만, 755년에 안사(安史)의 난이 일어나자 중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황제에 대한 충성을 지켜 안사의 난이 진압된 뒤 768년에 은퇴할 때까지 계속 여러 지방의 지방장관 자리를 유지했다.

 

당나라 시의 전성기를 이룩한 성당(盛唐) 시인들 중에는 이백(李白)과 두보(杜甫) 같은 거장들이 있는데, 이 세대에 속하는 잠삼은 어법과 운율을 혁신함으로써 '율시'(律詩)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그의 능숙한 표현양식, 특히 틀에 박히지 않은 은유와 풍부한 상상력을 찬양했다.

 

그는 젊을 때 직접 경험한 이국적인 중앙 아시아를 자주 시의 무대로 삼아 '변경 시인'으로 널리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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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장 (Wei Chuang, 韋莊) 당(唐)·오대(五代) 시인

 

태어난 때 : 836(?)

죽은 때 : 910

죽은 곳 : 중국 쓰촨 성[四川省] 청두[成都].

소속 국가 : 중국 당(唐)·오대(五代)

직업 : 시인

 

(병) Wei Zhuang (웨) Wei Chuang. 836(?)~ 910 중국 쓰촨 성[四川省] 청두[成都].

중국 당대(唐代) 말기에서 오대(五代) 초기의 뛰어난 시인, 사(詞) 작가.

 

자는 단기(端己)이며 장안(長安) 두릉(杜陵:지금의 산시 성[陝西省]) 사람이다. 한때는 집안의 명성이 대단했으나 그가 태어날 쯤에는 가세가 기울었고,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어린시절을 매우 힘들게 보냈다. 그러한 빈곤함에도 불구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게을리하지 않았다.

 

881년 장안으로 가서 진사시험에 응시했으나, 때마침 황소(黃巢)가 난을 일으켜 수도를 점령하는 바람에 결국 장안에서 객지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진부음 秦婦吟〉을 지었다. 이 작품은 진(秦)나라의 부녀자를 주인공으로 하여 당시 백성들이 의지할 곳을 잃고 떠돌아다니는 고통스런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위장은 이 장시(長詩)를 통해 처음으로 문명(文名)을 떨치게 되었다. 당시 시국이 불안했기 때문에 그는 오(吳)·초(楚) 지방을 여러 해 유랑하다가 894년에 비로소 진사가 되었다.

 

907년에 당이 망하자 촉(蜀)의 왕건(王建:847~918)이 그 지역을 점거하고 황제라 칭한 뒤, 국호를 전촉(前蜀:907~925)이라 했다.

 

위장은 전촉의 조정에서 요직을 맡아, 모든 개국(開國)의 제도를 대체로 그가 기획했다. 문학에 있어서 주요한 공헌은 사의 체제 형성에 끼친 그의 영향이다.

 

그의 사는 독특한 풍격을 지니고 있어서 그 이전 작가인 이상은(李商隱)·온정균(溫庭筠)과는 다르다.

 

이욱(李煜)과 기타 10세기 중엽의 사 작가들이 모두 위장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영향으로 인해 사는 곧 송대 서정문학 작품의 주요한 체재가 되었다.

 

위장의 사 작품은 현재 54수밖에 전하지 않는데, 대부분이 〈화간집 花間集〉에 수록되어 있다. 기타 시(詩) 작품은 903년 그의 동생 위애(韋靄)가 〈완화집 浣花集〉에 수록했다. 1969년 장충핑[江聰平]이 편찬한 〈위단기시교주 韋端己詩校注〉가 타이베이[臺北]에서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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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순(蘇洵,1009년 ~ 1066년)

 

중국 북송의 문인이다. 자는 명윤(明允), 호는 노천(老泉)이다. 미주 미산(지금의 쓰촨 성 메이산 시) 사람이다.

 

27세 때부터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했지만 그때마다 낙방하자 자신이 지었던 글을 모두 불태우고 새로 시작했다.

 

그렇게 공부를 계속하자 소순은 육경과 제자백가에 능통한 학자가 되었다. 1056년 소순은 두 아들을 데리고 상경해 학자들을 방문했는데 소순의 학식과 글은 많은 이를 놀라게 했고, 과거를 보러 온 이들 중에는 과거를 포기하고 돌아간 사람도 있었다.

 

이듬해 소순은 아들들에게 과거를 응시하게 하고, 자신도 몇 년간 써 온 20여편의 글을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구양수에게 보이도록 했다.

 

구양수는 소순의 글재주와 지식을 인정하고 그를 조정에 천거했고, 사대부들이 앞다투어 소순의 글을 읽었다.

 

두 아들 모두 과거에 급제해 진사가 되면서 세 부자의 이름은 유명해졌다. 소순은 비서성 교서랑, 패주 문안현 주부 등을 지냈고 57세에 죽었다. 소순의 글은 아름다우며 날카롭고 잘 정돈된 것이 특징이었다. 소식·소철 두 아들과 함께 '3소'(三蘇)라고 불리며, 그를 특히 노소라 부른다. 저서에 《권서》 《소로천 전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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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종친회와 화수회의 개념은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구별하였지만 지금은 같은 개념의 용어로 쓰인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모임의 명칭제정시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종친회[宗親會]  이칭별칭 : 화수회

 

정의

집단적인 정체성(正體性)을 가지는 부계 친족집단(父系親族集團)의 조직.

 

내용

종회(宗會)라고도 한다. 신분제도를 바탕으로 하던 전통사회에서는 죽은 조선(祖先)과 산사람의 업적 및 명예 같은 친족집단이 가지고 있는 상징적 자산에 따라 신분이 결정되었다.

 

따라서 친족집단은 그 상징적 자산을 유지, 확대하기 위해서 통합을 추구하고 협력적인 조직을 형성하려고 하였다. 친족집단의 그러한 조직을 종친회라고 한다.

 

전통사회에서는 전체 부계 친족집단 즉, 동성동본집단이 하나의 통합적인 조직의 기능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가 곤란하였다.

 

첫째, 세대가 지남에 따라 규모가 커지면서 지역적으로 널리 퍼져 거주하게 되었으며 그러한 전체 집단이 하나의 통합된 조직을 이루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둘째, 동성동본집단 내지 일정한 공동조건을 중심으로 하는 하위의 친족집단이 상징적 자산을 달리함으로써 다른 사회적 지위를 부여받고 본래의 친족집단과 다른 집단적 정체성을 발전시키게 되기 때문이다.

 

즉, 명신·거장·석학 등을 공동의 조선으로 하여 종전의 전체 친족집단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지는 집단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에 성을 같이하면서 본을 달리하는 수도 있었으나 성과 본을 같이하면서 파만 달리하는 수가 많았다. 그리고 이 파가 흔히 독자적인 하위의 친족조직을 구성하였는데 그러한 조직을 파종회(派宗會)라고 한다. 그에 대해서 동성동본집단 전체의 조직을 대종회라고 한다.

 

동성동본집단이 구성하는 대종회는 주기적으로 족보를 편찬하고(그것을 대동보라고 한다) 조선숭배를 위한 제사와 사업을 행하고, 동성불혼제를 실시하는 정도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현재까지 연구된 바에 따르면, 기록된 대종회로서 가장 오래된 것은 1580년(선조 3)의 안동 김씨 종약소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 족보의 편찬역사가 이미 15세기에 시작되고 있으므로 대종회의 역사는 더 오래일 것 같다.

 

족보의 편찬이 그러한 조직을 필요로 하고 또 그것을 가능하게 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파종회는 대종회보다 더 실질적인 협력체계를 유지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그러한 협력적 체계를 물질적으로 뒷받침하고 많은 파종회에서 공동재산을 오래 전부터 설립, 운영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다.

 

공동재산은 대종회의 경우에도 있었지만 그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자산으로서 집단의 세력과 지위를 나타내는 지표가 되기 때문에 세력과 지위를 비교적 같이하는 파종회의 경우에 더 발전하고 있는 것 같다.

 

또 파종회는 집단운영의 기초로 삼고, 집단의 상징적 자산을 유지, 과시하며 독자적인 집단적 정체성을 확인, 강조하기 위해서 독자적인 족보(그것을 파보라고 한다)를 편찬하고, 서원·재각(齋閣) 등을 다투어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보다 친밀하고 일상적인 협력체계를 유지한 것은 혈연적으로 보다 가깝고, 따라서 신분 지위가 보다 유사하며, 또 생활기반을 같이하는 자연촌락 중심의 친족조직이었다. 그러한 조직을 일반적으로 종친회 혹은 문회(門會)라고 한다.

 

종친회가 이념으로 하는 중요한 기능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족보를 편찬하는 것이다. 친족의 집단적 정체성은 공동의 남자 조선에 대한 관계에 의해서 형성되며, 족보는 그 관계를 확인하기 위해서 필요하기 때문이다.

 

둘째, 조선숭배를 위한 제사와 사업을 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대내적으로는 친족집단의 유대를 확인하고, 대외적으로는 조선의 업적과 명예를 드러냄으로써 신분을 유지, 과시하기 위하여 필요하기 때문이다.

 

셋째, 집단성원간의 혼인을 금하는 동성불혼제를 지키는 것이다. 그것은 혼인에 따른 집단성원간의 갈등을 막기 위해서 필요하기 때문이다.

 

넷째, 법률적·도덕적 질서에 바탕을 두면서 집단성원에 대해서 사회 통제를 시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친족집단의 명예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섯째, 친족집단 공동의 복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빈한한 성원을 돕는 것과 청소년의 교육을 뒷받침하는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그것은 성원 공동의 상징적 자산을 유지, 확대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종친회는 이러한 기능을 협력하여 수행하기 위해서 친족집단 공동의 재산을 장만하여 운영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종친회는 대체로 친족집단의 상징적 자산의 유지와 발전을 꾀하고 공동재산을 장만, 운영하면서 보다 실질적인 협력체계를 발전시키고 있다.

 

즉, 그들은 공동의 재산으로 조선숭배를 위한 제사와 사업을 행하는 것은 물론이고 종손(宗孫)을 보호, 유지하며 빈한한 성원을 돕고 청소년의 교육을 지원함으로써 집단의 공동복리를 추구하며, 또 법률적·도덕적 규범에 위반하는 성원에 대해서는 경고·매질·추방 또는 친족관계의 단절을 의미하는 할보(割譜) 등의 형태로 직접 제재를 가함으로써 사회 통제의 기능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종친회는 하나의 독자적인 협력체계를 형성하면서 동시에 상위조직인 파종회 또는 대종회의 활동에서 중요한 기본 단위의 구실을 하였다.

 

즉, 상위조직 단위의 제사 기타 공동활동에서 대표를 선출하는 단위가 되기도 하며 족보를 편찬할 때에 명단을 수집하는 수단사업(修單事業)의 단위가 되기도 하며, 또 공동재산을 설립할 때에 그 몫을 분담하는 문배(門配)의 단위가 되기도 하였다.

 

전통사회에서 대종회-파종회-종회 등의 친족조직은 조상의 제사를 목적으로 하는 문중과 함께 전통적인 친족제도를 유지하고 중요한 틀을 이루었으며, 그러한 조직은 하위 단위로 내려갈수록 형식적으로 더 정비되고 또 실질적으로도 강한 협력인 체계를 유지하였다.

 

신분제도가 폐지되고 사회적·지리적 이동이 커지는 산업사회에서는 친족제도가 일반적으로 쇠퇴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친족제도의 틀을 이루는 친족조직이 새로운 양상으로 발전하고 있다.

 

즉, 지역사회의 인구가 도시로 떠남에 따라서 자연촌 중심의 하위친족 단위의 조직이 쇠퇴하는 반면에 파종회 또는 대종회 등의 상위친족 단위의 조직과 기능이 이전보다 더 정비, 강화되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근래에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파보(派譜) 또는 대동보의 편찬도 그러한 상위 단위의 종친회 조직에 대한 지향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상위 단위의 종친회 조직에 대한 지향성은 동성동본 단위의 종친회를 조직하는 데 끝나지 않고, 조상이 같다고 전해지는 동성이본(同姓異本) 또는 이성동본(異姓同本)·이성이본(異姓異本) 집단도 하나의 통합된 종친회를 조직하는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김해 김씨·김녕 김씨·양근 김씨가 공동으로 조직한 익화 김씨 종친회(益和金氏宗親會), 김해 김씨·인천 이씨·김해 허씨가 공동으로 조직한 가락 중앙 종친회(駕洛中央宗親會) 같은 것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위친족 단위의 종친회는 조직을 정비, 통합하고 있을 뿐 아니라 기능도 강화하고 있다. 즉, 족보의 편찬은 물론 조선숭배를 위해서 묘역(墓域)·재실(齋室)·제각(祭閣)을 보수, 강화하기도 하고 성씨의 역사서·인물지 등을 발간하기도 한다.

 

또, 친족집단 정체성을 확인하고 공동의 복리를 추구하기 위해서 회관건립과 장학사업 실시, 종보(宗報) 발간, 친족집단 공동의 공원묘지 조성, 신년하례, 종원의 구휼사업, 친목회 같은 것을 열기도 한다.

 

이는 자연촌락을 중심으로 집단거주하던 친족집단이 산업화에 따라서 도시를 중심으로 지리적으로 다시 배치되고 사회경제적으로 계층이 다시 편성되며 교통·정보수단이 발달함에 따라서 전통적인 친족제도가 쇠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적응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종친회와 유사한 친족집단 조직으로 화수회(花樹會)와 종약소가 있다. 화수회란 일정한 친족집단이 주로 친목을 위하여 일정지역을 중심으로 구성한 조직이다.

 

따라서, 대체로 두 가지 점에서 종친회와는 성격이 다르다.

 

첫째는 목적이 일차적으로 성원의 친목과 협력에 있으며, 종친회나 종약소와 같이 조선과 종중 등 친족집단 자체를 위한 체계적인 사업을 행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둘째는 그러한 목적과 관련해서 조직에 일정한 친족집단 자체가 성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일정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친족집단원이 성원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화수회는 종친회와 별도의 조직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종친회가 없는 경우에 그에 준하는 조직으로 구성되기도 한다.

 

과거에는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그러한 조직이 있었으나, 오늘날은 도시에 그러한 조직이 특히 발전되고 있다. 그리고 도시의 화수회의 경우에는 농촌지역에서보다 상위 친족집단의 조직으로 발전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가령, 조선이 같은 전의 이씨와 예안 이씨가 공동으로 조직한 전의 예안 이씨 화수회(全義禮安李氏花樹會) 같은 것이 그러한 경향을 나타낸다.

 

참고문헌

韓國家族制度硏究(金斗憲, 서울大學校 出版部, 1969)

朝鮮の聚落 後篇(朝鮮總督府, 1935)

同族集團의 組織과 機能(崔在錫, 民族文化硏究 2, 1966)

韓國의 傳統的親族制度의 組織과 그 機能에 관한 一考察(崔弘基, 曉岡崔文煥博士追念論文集, 1977)

都市·親族組織의 硏究(李光奎, 學術院論文集 人文社會科學篇 19, 1980)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