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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건신 묘(차릉) - 부산 기장

by 연송 김환수 2021. 3. 27.

신라 승상 차건신(車建申) 묘는 부산시 기장군 기장읍 만화리에 있다.

고분 차릉(車陵)은 연안차씨(車氏)와 문화류씨(柳氏)의 시조인 차건신 公(공)의 묘라 전한다.

 

차릉(車陵) : 차건신(車建申) = 차건갑(車建甲)의 묘.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만화리 산72

집필자 : 이종봉

 

[정의]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만화리에 있는 통일 신라 시대 차건갑(車建甲)의 묘.

 

[개설]

차릉(車陵)은 『연안 차씨 세보(延安車氏世譜)』에서 신라 소성왕(昭聖王)의 고명신(顧命臣)이던 차건갑, 혹은 차건신(車建申)의 무덤으로 설명하고 있다. 1985년 11월 7일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158호로 지정되었다가, 기장군이 부산광역시로 이관되면서 1995년 3월 1일 해제되었다. 1963년 무덤을 단장하며 성균관장 의성(義城) 김창숙(金昌淑) 선생이 찬한 비석이 있다.

 

차릉의 피장자인 차건갑에 대해서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뿐만 아니라 조선 전기 지리지의 인물조에도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차건갑과 차릉에 대해서는 조선 후기 『기장현 읍지(機張縣邑誌)』와 『기장읍지(機張邑誌)』[을묘식, 1846]에도 능침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필사본 『기장읍지』[경오식, 1870] 고적조에 의하면 “차릉은 현의 북쪽 5리에 있다. 신라 애장왕 때 승상 차건갑이 죽자 국가에 큰 공로가 있어 왕이 예로써 이곳에 장사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교남지(嶠南誌)』 기장군 총묘조에 “일광면 만화리에 있다. 신라의 태사로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업고 있는 그림을 받은 소성왕의 고명신이 되었다. 죽자 왕이 예로써 장사 지냈다. 세칭 차성현의 명칭은 차릉에서 유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은 일제 강점기에 편찬된 『동래군지(東萊郡誌)』와 『동경속지(東京續誌)』 등의 여러 문헌 자료에도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차릉은 1870년대 이전에 전혀 기록되지 않다가 이후에 알려졌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연유는 명확하게 알 수 없다.

 

[위치]

차릉은 기장군 기장읍 만화리의 본동 마을인 동서 마을을 지나 산 쪽으로 약간 올라가면 있다. 동서 마을 어귀 왼쪽에 ‘차릉 참배자 방명 기록소’가 있다. 소재지 주소는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만화리 산72번지이다.

 

[변천]

차릉은 언제 조성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1870년(고종 7) 이전에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63년부터 3년에 걸쳐 새롭게 단장하였다.

 

[형태]

차릉은 봉토분으로 십이지신상의 호석(護石)으로 둘러져 있다. 무덤 앞에는 문인상과 무인상이 무덤의 피장자를 수호하고 있으며, 인위적으로 조성한 3단의 석축 위에 정남향으로 배치된 채 잘 보존되어 있다. 심산(心山) 김창숙이 찬한 묘비명이 있고, 무덤 주위에는 울창한 소나무가 둘러싸고 있어 무덤의 유구함과 의미를 알려 주고 있다. 면석(面石)과 탱주(撐柱) 사이는 모르타르로 접착하였으며, 면석의 십이지신상은 평복 차림이다. 전체적으로 경주 괘능의 배치와 형태를 모방한 것이다. 봉분은 둘레 22.3m, 바깥 경계석 둘레 31.8m, 높이 2.5m이다. 호석은 높이 95㎝, 면석은 높이 67㎝, 너비 60㎝이고, 탱주는 너비 30㎝이다.

 

[현황]

현재 부산광역시 연안 차씨(延安車氏)와 문화 유씨(文化柳氏) 종친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차릉은 기장 지역에서 읍지에 무덤의 피장자와 위치가 기록된 유일한 자료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신라 승상 차공 지 묘

 

차릉 오른쪽에 근세에 세운 비문의 내용이다.

 

차건신공(車建申 公)은 신라통일시대의 인물이다.

제39대 소성왕이 어린 태자를 차건신공에게 부탁하였고,

태자는 12세의 어린나이에 즉위 하였으니 이분이 신라 제40대 애장왕이다.

 

차건신은 소성왕의 부탁에 따라 어린 신라제40대 애장왕을 섭정 돌보아 국정을 보는 재상인 보상역을 맡았다.

차건신이 죽자 제40대 애장왕은 왕과 같은 예를 갖추어 장례지내고 소성왕묘에 배향하였다.

 

신라 제39대 소성왕과 제40대 애장왕 때 재상으로써 왕의 각별한 신임을 받던 차건신공이 돌아가신 뒤 그의 무덤을 여기 기장 만화리에 쓰고, 그의 성을 따서 기장을 차씨의 성, 차성(車城)으로 명명 했다.

 

차건신공이 돌아 가신 뒤 그의 아들 차승색공이 아버지를 이어 애장왕을 보필했다.

그러나 10년에 숙부 김언승의 쿠테타로 조카 애장왕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아 제41대 헌덕왕이 된다.

 

이후 좌승상 차승색 공은 아들 사공공숙과 더불어 애장왕의 원수를 갚기위해 헌덕왕을 죽이려 했지만 기밀이 사전에 누설되어 유주(황해도 신천군) 구월산으로 피신하여 성을 조모의 성인 楊氏(버들양씨)를 모방하여 柳氏(버들유씨)로 바꾸어 살면서 류씨의 시조가 되었다.

 

공숙의 동생 사공 공도는 화를 피하여 중국 강남으로 도피하여 차씨를 중국 강남 왕씨로 바꾸어 그 자손들이 이어서 살게 되었다.

이후 차승색에서 류승색으로 바뀐 류승색의 5대손인 류차달대승공이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우자 태조 왕건은 차씨성을 회복하도록 하였다.

 

왕건은 류차달대승의 큰아들 효전 대광백으로 하여금 연안차씨(延安車氏)로 복성케하고 둘째아들 효금 좌윤으로 하여금 문화류씨(文化柳氏)로 이어가게 하였다.

 

이런 연유로 지금도 차씨와 류씨는 같은혈통으로 지금도 서로 혼인을 하지 않는다.

차씨. 류씨 양성의 근원이 기장 차릉이다.

 

이상이 비문의 내용이지만, 차건신은 16세기 후반 위서(僞書) "차원부설원기"에서 등장한 가공인물이다는 주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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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릉에 관한 소고(小考) : 가공인물이다는 주장 스크랩 본문 하단 등재

http://moonhwaryu.kr/jryu/roots2/chareung/chareung.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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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토분으로 십이지신상의 호석(護石)으로 둘러져 있다. 면석(面石)과 탱주(撐柱) 사이는 모르타르로 접착하였으며, 면석의 십이지신상은 평복 차림이다. 전체적으로 경주 괘능의 배치와 형태를 모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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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류씨(文化 柳氏)

 

황해도 신천군 문화면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류차달(柳車達)은 후삼국시대 유주(儒州) 출신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군을 정벌할 때 군량보급에 문제가 생기자 류차달은 수레 1천량을 만들어 군량을 조달하였다고 한다.

 

그 공으로 대승(大丞)에 올라 삼한공신(三韓功臣)에 봉해졌다고 한다. 류차달의 원래 이름은 류해(柳海)였으나 태조가 이차위달(以車爲達)하였다고 하여 류차달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그 독자인 좌윤공(佐尹公) 류효금(柳孝金)이 일찍이 구월산을 지나다가 큰 범을 만나 그 입 속에 걸려 있던 비녀를 빼내 주었는데 그날 밤 꿈에 범이 나타나 이르기를 나는 산신령인데 무슨 물건이 목에 걸려 심히 괴롭던 중 공이 나를 구해 주었으니 그 음덕으로 공의 자손은 반드시 대대로 경상(卿相)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7세손인 문간공(文簡公) 류공권(柳公權)이 고려 명종(明宗)때 정당문학(正堂文學)과 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을 지내고 문장과 글씨로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아들 류언침(柳彦琛)과 류택(柳澤)으로부터 크게 두 갈래로 갈라져서 그 후손들이 현재 문화류씨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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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柳)씨와 차(車)씨 논란 일부 발췌

 

류(柳)씨와 차(車)씨가 동조동본(同祖同本)이라고 주장한 《차원부(車原頫)설원기》에서 비롯한 문제이다.

연안 차씨에서는 《차원부설원기》의 주장을 지지하고 있지만, 문화 류씨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차원부설원기》의 기록을 뒷받침할 근거는 전무하다. 삼국유사, 삼국사기, 고려사 등 어느 자료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이 책이 어명으로 박팽년에 의해 저술되었다는 것도 조선왕조실록을 포함해서 어느 자료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문화 류씨 초기족보도 차씨와의 연관성은 전혀 저술해놓지 않았으며, 특히 외손 6~7대까지도 적어놓은 가정보(嘉靖譜)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처음으로 류씨와 차씨가 같은 조상에서 내려왔다는 《차원부설원기》의 내용에 대해서 언급된 건 1689년에 발간한 문화 류씨 족보인 기사보(己巳譜)로, "망매(茫昧: 흐리터분하고 밝지 못함)하지만 실어서 훗날 연구하게 한다."라고 기술하였다.

아마 이때부터 차원부설원기가 퍼진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류씨대종회에서는 "2008 문화류씨세보(世譜)에서 류씨와 차씨는 관계없음을 천명함"을 올렸다.

 

참고로 차원부설원기에 통일신라시대 승상이라는 표현이 쓰인다는 것을 가지고 위작이라는 시비가 있었다. 그러나 실제 삼국유사를 보면 신라의 재상급 고위관료들에 승상이라는 표현이 쓰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三國遺事 卷 第四 제5 의해(義解第五) 의상전교(義湘傳敎) 의상이 귀국하여 국난을 면하게 하다(670년 (음)) 이미 본국의 승상(承相) 김흠순(金欽純)

三國遺事 卷 第五 제6 신주(神呪第六) 밀본최사(密本摧邪) 밀본이 귀신을 쫓아 김양도의 병을 고치다 승상(承相) 김양도(金良圖)가 어린 아이일 때 갑자기 입이 붙고 몸이 굳어져서 말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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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차문이 족보를 5개국어로 만들면서 또 대전 뿌리공원에 차씨유래비를 만들면서 "문화류씨는 가짜성씨이고 문화류씨 시조는 류효금이다"라는 말을 하지 않았으면 지금도 차문을 큰집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 문화류씨 원로들이 차문을 수차례 방문하여 망발을 중지 하라고 했으나 당시 차문 회장 부회장이 중심이 되어 계속 류씨 시조 류차달은 차달(성이 차, 이름이 달)이며 문화류씨 시조는 류효금이라 했다.

 

그런데 차문이 이런 말을 한 후 문화류씨에서 자료를 조사해 보니 차문과 관련이 없다고 하여 차문 류문이 합의하여 2007년 차류종친회를 해체하고 재산을 정산하고 차문에서 설치한 고려대전에 대승공 위패를 내렸는데 차문은 대승공 위패를 파주 고려 대전에 모시면서 매년 시제 비용을 납부하다가 2012년경에 위패를 내린 것에 대하여 일절 언급을 하지 않고(과거 집행부가 잘 못 했지만 신 집행부가 이정도 했으니) 2000년 이전으로 돌아가지고 합니다.

출처 : 차원부 설원기 설명 / 작성자 Ryu하곡

https://blog.naver.com/2642415/221550362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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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원부 (車原頫)

 

1320(충숙왕 7)∼?. 고려 말 조선 초의 학자·화가.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사평(思平), 호는 운암(雲巖). 지방어사(知防禦使) 차종로(車宗老)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한 이후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이르렀다. 당대의 대학자인 정몽주(鄭夢周)·이색(李穡) 등과 함께 명성을 떨치던 유학자로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고려 말 정치가 문란하여지자 수습할 수 없음을 알고 관직을 사퇴한 뒤 평산(平山)의 수운암동(水雲巖洞)에 은거하였다. 이성계(李成桂)가 요동(遼東)을 공격하게 되어 그 계략을 묻자 출병을 반대하였다.

 

뒤에 위화도회군으로 조선이 개국하였을 때 태조가 공신으로 책록하려 하였으나 굳이 사퇴하고, 이어 정언·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등의 벼슬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찍이 정도전(鄭道傳)·하륜(河崙) 등이 차씨(車氏) 외손의 서속(庶屬)이었음을 사실대로 족보에 기재하여 그들의 원한을 받아오던 중 평산으로 돌아가려고 송원(松原)에 이르렀을 때, 숙적 하륜 등이 보낸 자객에게 가족 및 일당 80여 인과 함께 살해되었다.

 

당시 고려에 충성을 다하던 두문동(杜門洞) 72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림을 잘 그렸으며, 특히 매화에 뛰어났다. 세종 때 황보 인(皇甫仁)의 청원으로 신원되어 시중에 추증되고, 순천의 운암사(雲巖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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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원부 설원기는 1500년 후반부터 1700년 초반까지 사대부들이 믿어왔고 1750년대 이후에 일부의 학자들에 의해 의심히 제기되었고 1790년대 눌재집을 간행하면서 공적인 사실여부를 판단하고 1804년에 증시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출처 : 차원부 설원기 설명|작성자 Ryu하곡

 

차원부의 증시(贈諡)

 

나라로부터 시호를 내려받으면(贈諡) 영구히 제사를 지낼 수 있는 불천지위의 자격이 부여되고 나라에서 인정한 국불천위가 되거나 유림에서 인정한 향불천위가 되거나 문중에서 인정한 사불천위가 되는 것이 문중의 자랑이었고 불천위 선조가 있어야 종가라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시호를 내려 받고(贈諡) 불천위 선조를 모시기 위해 후손들은 많은 노력들을 하였다.

 

증시(贈諡)는 왕의 특별한 교시가 있거나 후손이나 유림에서 증시(贈諡)를 요청하고 왕이 승인할 경우 시호를 받을 사람의 행장을 예조에 제출하고 예조에서 행장을 검토한 뒤 봉상시에 보낸다. 봉상시에서 세가지 시호를 정해서 홍문관과 함께 검토하고 이를 이조에 넘기면 이조에서 국왕에게 올려 낙점을 받는다. 이렇게 확정된 시호은 국왕의 교지로 증시된다.

 

시호가 결정되면 시호를 내려주는 행사인 선시(宣諡)를 진행하고 집안에서는 시호를 받는 행사인 연시(延諡)를 진행한다. 증시(贈諡)가 대단한 영광이었기 때문에 연시(延諡) 행사도 엄청났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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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류씨 종사 바로 알기 / 하곡 류재균

https://cafe.daum.net/gwangsun21/Elms/56

 

1. 문화류씨의 종사(선조 존칭 생략함)

대승공 류차달의 부 조부 증조 등은 더 연구하여야하며 현재는 알지 못함.

왕건 아버지(용건) 할아버지(작제건), 견훤(상주견씨)아버지 이(정주이씨)아자개 등

고려초 성씨개념이 확실하지 않아 류차달호족의 아버지 할아버지 자료 연구 필요

공도가 왕씨로 변성하여 왕건의 선조라는 원파록은 거짓임.

용건은 도선국사의 지시로 용건에서 왕륭(개성왕씨시조)으로 바꾸고 아들 왕건을 낳음

문화류씨 시조는 류차달임.

고려대전에 대승공 문화류 차달선생위패 모심

차달 류보림 류무선 류진부 류공숙 류승색은 차문이 원파록에서 조작한 이름임.

 

2. 차문의 역사 바로세우기 운동

평택 의덕사에 차달(차무일38세손) 차보림(대승공 부) 차무선(대승공 조부) 차진부(대승공 증조) 차공숙(대승공 고조) 차승색(데승공 5대조) 위패를 모심

파주 고려대전에 대승문도 연안차 달 선생위패 모심

문화류씨 시조는 류효금이다.

문화류씨는 가성이며 차해 차달이라고 5개국어로 2004년 차문 대동보 만듬

 

3. 종중 역사

천년동안 차문과 형제가 아니고 405년전 원파록에서 차문과 형제라고 하였음

1911년 차문이 대승공신도비를 세웠으나 1925년대 시제에 참여하지 않음

원파록이 나온지 366년후인 1976년 류차달의 장자로 차효전을 족보에 넣음

51년전 부터이며 43년동안 차문과종친회를 함께하였으며 8년전 차류종친회 해체됨

1946년 대동사 창립 이후 1997년부터 차문이 참여하여 성금을 냄

 

4. 차문과 화합하려면 문화류씨가 수용해야할 내용

문화류시 시조는 류효금이다

류차달의 이름은 차달이며 영락보 가정보는 오류가 있는 족보다.

고려 개국공신록에 있는 류차달의 공적은 없고 차효전이 왕건을 도운 공신이다.

호랑이를 구해 준 사람은 류효금이 아니고 차효전이다.

차문이 류차달의 큰아들이므로 류차달의 이름 호 시호 공적을 차문에서 마음대로 바꾸어도 작은아들 류문은 큰아들이 하는 일에 의의를 제기하지 않아야 한다.

 

5. 문화 류씨 종사 연보

참고 자료--2008년 무자보, 유주춘추, 구월청풍, 대호하루 등

880년 대승공 류차달 탄생(추정).

1196년 대승공 7세 공권 묘지명 발견--노일(4) 보춘(5) (6).

1344년 권부처 류씨(류승 딸) 묘지명--시령류씨 대승차달 후손.

134911세 돈 묘지명--문화인 차달은 태조 공신, 아들이 호랑이를 구해 줌.

141614세 량 졸--왕조실록 태종항목에 대승공 류차달(삼한공신)

1423년 문화류씨 영락보 영(14세 검한성공파)--아들 효금

1456년 차원부설원기--문성인 류차달의 첫째 아들 대광지백 류효전

1530년 신증 동국여지승람--대승공 아들 류효금 소개(효전 기록 없음)

1543년 대승공 차달 묘갈문(홍춘경 지음)--대승공이 효금을 낳고 좌윤이 금환을 낳으니

1565년 가정보 희잠(20세 충경공파)--삼한공신 대승공 류차달 아들이 좌윤 효금이다.

1610년 류용수의 원파록 황제-왕씨-차씨-류씨-류차달에서 차효전과 류효금으로

1678년 묘갈개견문(류상운 지음)대승공 묘비 개수

1689년 기사보 처후 (22세 하정공파)--류용수 원파도는 흐리명명하니 후대에 연구하라

1742년 경신보 환문(27세 좌상공파)편찬류차달 아들 류효금

1812년 차씨 종친회 경상감영 공소--차헌기 강렬공파보 원파록은 조작되었다고 판결.

1863년 대승공 신도비(남병철 지음)--원파록 내용을 기록함

1864년 갑자보(류승기 편찬)--문헌편에 원파록 기록

1911년 차문에서 대승공 신도비 세음(이용원 지음)--원파록 내용을 씀.

1926년 병인보 대승공 향사 시도기에 10년간 차문이 시제에 참여한 기록 없음.

1946년 대동사 창건

1964년 차류 대종회 창립

1976년 병진보차효전을 류차달 장자로 처음 기록(이전까지는 문헌편에 기록)

1997년 대동사 보존회 초대회장으로 차문 참여하여 성금을 냄

1999년 차씨유래비--문화류씨 시조는 류효금이다.

2000년 차씨역사바로세우기 운동--류문에서 선조를 조작했다는 글 발표

2001년 차씨유래비--문화류씨 가성을 변성으로 수정함

2004년 연안차씨 갑신대동보--대승공 본성명은 차해(車海)이며 차무일의 38세손이다.

2007년 파주 고려대전에 대승문도공연안차공 달大丞文悼公延安公車達선생 위패 모심

2007년 차류 대종회 해체

2008년 무자보--원파록 파기

2012년 의덕사 세향--차승색 차공숙 차진부 차무선 차달 위패로 시제 지냄

2012년 대동사 시향--아사류선생 대광차공 좌윤류공 위패로 시제 지냄

2012년 차문에서 류차는 천년간 형제였다는 주장을 함

2015년 차문회장--차문에서 잘 못하였으니 2000년 이전으로 돌아가자고 고려대전에서 2015년 차달위패를 철수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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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릉(車陵)에 관한 소고(小考)

 

- 채하 류주환 (彩霞 柳朱桓) / 충남대학교 공과대학 바이오응용화학부 교수

 

◇ 요약 ◇

부산 기장군 기장읍에는 현재 세칭 "차릉(車陵)"이라 불리는 묘가 있는데, 신라 때 재상이었다고 하는 차건신(車建申; 차건갑(車建甲)으로도 표기)의 묘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각종 역사적 사료와 기장(機張)의 별칭(別稱)인 '차성(車城)'의 이름의 내력을 고찰하면, 차건신은 16세기 후반 위서(僞書) "차원부설원기"에서 비로소 등장한 가공인물이고, 차릉은 순 우리말 지명(수릿벌 혹은 수릿말 등으로 추정됨)의 차자(借字)일 따름인 차성(車城)의 '차(車)'자와 성씨의 '차(車)'자를 그릇 연관지어 그 가공인물에 붙인 것으로 보인다. 묘 자체는 예부터 전해오는 것으로 보이므로 앞으로 '만화리 묘' 등으로 명칭을 달리 부르거나, '차릉'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한다 해도 단순히 '차성의 큰 무덤'이라는 뜻으로만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키워드: 차릉, 차능, 기장, 차성, 차건신, 차건갑

목차:
1. 차릉에 대한 일반적 기술
2. 차릉에 대한 차문의 기술
3. 구체적인 사항들
3-1. 지명 차성(車城)
3-2. 삼국사기 제10권 소성왕(昭聖王) 기사
3-3. 삼국사기 제10권 애장왕(哀莊王) 기사
3-4. 차건신(車建申)
3-5. 차씨
4. 종합 토론 및 맺는 말


1. 차릉에 대한 일반적 기술

1-1. 엔사이버 백과사전

차건신의 묘 (車建申의 墓)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에 있는 신라시대 재상 차건신의 묘.
소재지 : 부산 기장군 기장읍 만화리 산 72
시대 : 신라시대
분류 : 묘

1985년 11월 7일 경남문화재자료 제158호로 지정되었다가, 1995년 3월 1일 해제되었다. 차릉이라고도 부른다. 신라 39대 소성왕이 어린 태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기가 불안하여 늙은 재상인 차건신에게 태자를 부탁했다. 어린 애장왕의 보상(輔相)이 되어 정사를 돕다가 죽으니 왕의 예로서 장례를 지냈다.

소성왕의 묘에 배향하고 묘는 기장군 기장읍 만화리에 정했다 한다. 한편 이 묘를 이위의 묘라고 후손들이 주장하여 논란이 있었으나 2000년 현재 차씨 집안에서 조상의 묘로 관리하고 있다.

만화리 주민들은 이곳에서 당산제를 지낸다. 차건신은 큰 공신으로서 백성들에게 추앙받았으며 죽은 후에는 수호신으로 숭배된 듯하다. 또 옛날부터 이 묘소에 벌초하고 소원을 빌면 소원을 이루었다 한다.

 

만화리 묘 전경 (사진: 류재준)

 

1-2. 기장군 홈페이지

차건신의 묘는 기장읍 만화리에 있는 고분이다. 신라39대 소성왕이 어린 태자에게 위를 물려주기가 불안하여 늙은 제상[재상의 잘못인 듯]인 차건신에게 유언을 남기니 즉위한 12세의 상장왕[애장왕의 잘못]의 보상이 되었다.

그 후 공이 죽으니 왕의 예로서 장례하고 소성왕묘에 배향하고 묘는 이곳에 정하였다. 그리고 기장을 차성으로 성격[승격의 잘못인 듯]시켰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는 이 묘를 두고 33세의 이위의 묘라고 후손들이 주장하기도 해 분쟁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지금은 차씨 집안에서 조상의 묘로 관리하고 있다.

어쨌든 만화리 사람들은 이곳에 먼저 동신제를 드리고 그 다음에 당산제를 거행하는 것으로 관행을 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묘는 옛날 나라의 큰 공신으로서 백성들과 고을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고 사후에도 수호신으로 숭배를 받게된 분의 묘로 추정된다.

차릉으로 불리는 이곳 차건신의 묘는 누구의 묘로 중요성을 갖기보다 이곳이 고대부터 마을사람들의 수호신 역할을 했다는 데 더 의미를 두는 사람도 많다. 옛부터 차릉에 먼저 벌초하고 소원을 빌면 소원성취를 이룬다는 전설이 있는 것으로 봐서 그런 의미는 더욱 확실해 진다고 할 수 있겠다. 잘 다듬어진 이곳도 한번쯤 방문해 볼 만한 곳이다.

 

만화리 묘 주변: 중앙의 작은 소나무 숲에 묘가 있음 (사진: 류재준)


2. 차릉에 대한 차문(車門)의 기술

- 차문의 현존 선조 묘소 중 가장 오래된 묘소.
- 신라 조정에 의하여 왕례(王禮)로서 봉안(奉安)하였기 때문에 세칭 차릉으로 불림.
- 차무일(車無一) 득성시조(得姓始祖)의 32세손 이신 신라 승상공(丞相公) 차건갑(車建甲)의 묘소
- "공께서는 신라 39대 소성왕조(昭聖王朝)의 노재상(老宰相) 이셨는데 소성왕(798-800)이 운명 직전에 공(公)을 불러 옛날 중국의 주공(周公)이 어린 성왕(成王)을 등에 업고 조회를 하면서 여러 제후(諸侯)들을 이끄는 그림을 친히 하사 하시며 열두 살에 불과한 세자의 장래를 부탁하였다."
"왕이 붕어(崩御)하자 세자(世子)가 왕위에 올라 40대 애장왕(哀莊王) (800-809)이 되고 공(公)께서 보상(輔相)으로서 모든 국사를 섭정하시다가 돌아가시니 {아들 승색(承穡)에게 다시 왕을 잘 보필할 것을 부탁하고 별세하시니} 왕을 비롯하여 조야가 모두 슬퍼하며 왕명으로 국상을 치루고 모든 행사를 왕례(王禮)에 준하도록 하였으며 기장군 만화동에 안장하고 소성왕묘에도 임금과 같이 제사를 모시도록 하였다. {신위도 소성왕 종묘(宗廟)에 배향되었다.} 그리고 왕명으로 기장현을 차성(車城)으로 승격시켰다."
- "옛 기장군지에 의하면「차릉은 기장현 북쪽 5리지점 만화동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2001년 9월 3일자 발간된 기장군지의 상권에「차릉은 기장군 기장읍 만화리에 있다」라고 기록 하고 있다."
"이러한 고증(考證)에 따라 행정 구역이 경상남도 기장군으로 있을 때 기장군 문화재의 가치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문화재 조사자료 등록번호 제158호로 등록된 바 있으나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고 있다."

한편 "연안차씨 대동보 백서: 부록"(2004년 12월)에 차릉에 대한 고증자료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제시되어 있다. (한문 글들은 필자가 해석함.)

① 동래군지(東萊郡誌)
"차릉이 동쪽 30리에 있다. 차건갑은 신라 애장왕의 섭정이었다. 따라서 왕례(王禮)로 장사지냈다."
* 동래군지-권지사(卷之四) 1899년 편찬된 동래부읍지(東萊府邑誌)를 근간으로 1937년 문기주(文錡周)가 간행한 지리지.
② 기장읍지(機張邑誌)
"차릉이 현의 북쪽 5리에 있다. 신라 애장왕 때 승상 차건갑이 죽으니 큰 공훈이 있어 국가왕례(國家王禮)로 이에 장사를 지냈다."
* 지리지-읍지20 경상도4 (1832년쯤 간행 추증(추정의 잘못인 듯))
③ 경주읍지(慶州邑誌) 하(下)
"차건갑이 신라 소성왕을 받들었다. 왕이 친히 주공(周公)의 성왕을 업고 제후를 조회(朝會)하는 그림을 보여주며 태자를 부탁했으니 애장왕이 어렸기 때문이다. 애장왕이 즉위하고 공(公)은 보상(輔相: 대신을 거느리고 임금을 도와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되었고 죽으니 왕례로 기장 만화동(萬化洞)에 장례를 지내고 차릉이라 불렀다."
* 지리풍속지-경주읍지권지팔(卷之八)
④ 교남지(嶠南誌) [교남 = 영남을 뜻함]
"차건신묘는 일광면(日光面) 만화리(萬化里)에 있다. 신라태사가 소성왕의 고명(顧命: 임금이 유언으로 뒷일을 부탁함)을 받든 신하로서 주공이 성왕을 업은 그림을 받았다. 죽으니 왕례로 장사지냈다. 세칭 차릉이라 한다. 현의 이름인 차성이 여기서 나왔다 한다."
* 지리풍속지-교남지4권 권지50의 기장읍편(1867~1875 경상도 관찰사 김세호(金世鎬) 편찬)
⑤ 경주시지(慶州市誌)
"차건갑 및 차승색: 차건갑은 소성왕을 섬김에 왕이 주공부성왕조제후도(周公負成王朝諸侯圖)를 친수(親授: 친히 줌)하였더니 왕의 붕시(崩時, 죽을 때) 태자(애장왕)가 유충(연소함, 13세)하였으므로 애장왕조 건갑이 보상(輔相)으로서 죽음에['죽으매'의 잘못] 그 식읍(食邑) 차성(기장)에 왕례로 장(葬)하였다."
* 경주시지-제4편 31장 상신(相臣)

그리고 이런 자료 외에도 동경잡기(東京雜記), 양산군지(梁山郡誌), 기장군지(機張郡誌), 기장의 역사와 문화(기장군 문화원), 구(舊) 기장군 향토지(기장 향인회) 등에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차건갑(건신)의 보상, 섭정 같은 역할이 명시되어 있고 기장이 그의 식읍(食邑)이었다는 말도 추가되고 있다. 이런 자료들은 예외 없이 19세기 이후에 들어와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3. 구체적인 사항들

3-1. 지명 차성(車城)

차성(車城)은 두 지역을 가리킨다. ["한국역사지명사전"]
A. 경기도 수원(水原) 남쪽에 있었던 용성현(龍城縣)의 신라시대 이름.
B. 경상남도 기장(機張)의 옛이름.

기장(機張)에 대한 "한국역사지명사전"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현(縣) 이름. 경상남도 양산군(梁山郡) 기장면(機張面) 지역에 있었다. 본래 신라의 갑화량곡현(甲火良谷縣)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 때 기장현으로 고쳤다. 조선 고종(高宗) 32년(1895)에 군(郡)으로 승격되었고, 1913년에 동래군(東萊郡)에 편입되어 기장면이 되었다가 뒤에 양산군에 이속되었다. 차성(車城). <삼국사기>,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위의 차문(車門)의 설명처럼 기장(機張)을 차성(車城)으로 '승격'시킨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경덕왕이 고구려의 상홀현(上忽縣) 또는 차홀현(車忽縣)이라 불리던 지역을 차성현(車城縣)으로 '개칭'한 일은 있지만["삼국사기" 제35권, "고려사" 제56권], 이것은 기장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수원 남부에 해당하는 용성현의 이야기이다. 기장의 설명에 나오는 차성은 항상 "별호(別號, 딴이름)를 차성이라고 한다"고 나온다["신증동국여지승람" 제23권, "연려실기술" 별집 제16권, "조선왕조실록 세종지리지" 경상도 경주부 기장현 항목]. 곧,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 전국의 지명을 한자명으로 바꾸는 일이 있었는데, 이때 수원 남부 지역은 '차성'으로 바뀌고, 기장은 다른 이름에서 그 이름('기장')으로 바뀐 것이다.

그런데 기장을 왜 '차성'이라는 이름으로도 부르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차문(車門)의 설명대로 차건신이라는 인물 때문이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 홈페이지가 자세히 논하고 있다: http://wondreams.hihome.com/temasogo_gijang_gojangmyong.htm

이에 따르면 기장은 처음 이름인 갑화량곡(甲火良谷)이나 차성(車城), 그리고 기장(機張)이 모두 '큰 성, 큰 마을'을 뜻한다고 한다.

"甲火良谷이나 車城, 그리고 機張이라는 지명은 甲은 크다로서 大, 火良은 벌로서 城이므로 甲火良谷은 큰성의 뜻으로 大城이라 번역되고, 車는 수리(정수리)로서 首, 城은 벌로서 城이므로 車城은 으뜸되는 큰성 머리성의 뜻으로 首城으로 번역되고, 機는 '크다'로서 대(大), 張은 ['벌']로서 [마을(城)]이므로 '큰 성'의 뜻으로 機張은 大城으로 번역된다."

"차성은['차성'의 '차'는] 수레로서 사라(斯羅) 사로(斯盧) 신라(新羅) 서라(徐羅) 등과 같이 모두 수리(首)의 뜻을 가졌다. 즉 車는 首와 같은 뜻으로 수레는 수리로서 정수리(首)의 옛말이 된다."

이런 설명은 타당성이 무척 큰데, 이는 용성현에서도 마찬가지로 생각된다. 곧 학자들은 용성현의 고구려시대의 명칭인 차홀(車忽) 혹은 상홀(上忽)이 모두 '수릿골'로 훈독(訓讀)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삼국유사" 제2권의 문호왕 법민(文虎王 法敏 = 문무왕)편에 "속(俗)에 단오(端午)를 차의(車衣)라 한다"는 구절이 나온다. 차의(車衣)는 '수리'의 차자(借字)로 본다. 단오는 지금도 수리 혹은 수릿날로 불린다. 곧 차홀(車忽)이나 차의(車衣)는 모두 우리말 명칭을 한자로 임시로 표현한 것이다. 이때 車자는 그 뜻이 수레와 직접 관련이 있을 수도 있고('수레'의 차자) 없을 수도 있다('수리'의 차자). 한편 이상에서 車자는 모두 역사학자들도 사람에 따라 '차'로도 읽고 '거'로도 읽는다. 여기서 한자는 우리말을 표기하려고 빌려 쓴 글자일 따름이기 때문에 한자음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보면 기장의 차성(車城, 거성)이라는 별호(別號)는 차씨와 연관을 짓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 수 있다.

 

3-2. 삼국사기 제10권 소성왕(昭聖王) 기사

○ 昭聖王(소성[또는 昭成(소성)]왕)이 즉위하니, 諱(휘)는 俊邕(준옹)으로, 元聖王(원성왕)의 太子(태자) 仁謙[인겸:諡(시) 惠忠(혜충)]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金(김)씨요, 비도 金(김)씨, 桂花(계화)부인이니 大阿飡(대아찬) 淑明(숙명)의 딸이다. 元聖大王(원성대왕) 원년에 아들 仁謙(인겸)을 봉하여 太子(태자)를 삼았는데 7년에 죽으니, 元聖(원성)이 그의 아들[俊邕(준옹)]을 宮中(궁중)에서 길렀다. 俊邕(준옹)은 [元聖王(원성왕)] 5년에 唐(당)에서 奉使(봉사)하고 대아찬의 位(위)를 받앗으며, 6년에는 波珍飡(파진찬)으로 宰相(재상)이 되고, 7년에는 侍中(시중), 8년에는 兵部令(병부령), 11년에는 태자가 되었다가 元聖(원성)이 돌아가자 그 位(위)를 계승하게 되었던 것이다.
○ 원년 3월에 菁州[청주:州治(주치)는 지금의 晉州(진주)]의 居老縣[거로현:지금의 巨濟(거제)]으로 國學生(국학생)의 祿邑[녹읍:食邑(식읍)]을 삼았다. ○ 冷井縣令(냉정현령) 廉哲(염철)이 白鹿(백록)을 進上(진상)하였다. ○ 5월에 아버지 惠忠太子(혜충태자)를 追封(추봉)하여 惠忠大王(혜충대왕)이라 하였다. ○ 牛頭州都督(우두주도독)이 사람을 보내 (王(왕)에) 말하기를, "소와 같은 이상한 짐승이 나타났는데 몸은 길고 높으며, 꼬리의 길이가 석 자 가량에 털은 없고 코는 긴데, 峴城川(현성천)에서 烏食壤(오식양)으로 향하여 갔다"고 하였다. ○ 7월에 (길이) 9자나 되는 人蔘(인삼)을 얻어 매우 기이하게 여겨, 사신을 唐(당)에 보내 그것을 進奉(진봉)하였는데, 德宗(덕종)은 인삼이 아니라 하여 받지 아니하였다. ○ 8월에 어머니 金(김)씨를 추봉하여 聖穆太后(성목태후)라 하였다. ○ 漢山州(한산주)에서 흰 까마귀[白烏(백오)]를 獻上(헌상)하였다.
○ 2년 정월에 왕비 金(김)씨를 봉하여 王后(왕후)를 삼고, 忠芬(충분)으로 侍中(시중)을 삼았다. ○ 4월에 暴風(폭풍)이 불어 나무를 부러뜨리고 기와를 날리며, 瑞蘭殿(서란전)의 발[簾(염)]이 날려 간 곳을 모르고, 臨海(임해)·仁化(인화)의 두 門(문)이 무너졌다. ○ 6월에 王子(왕자)를 封(봉)하여 太子(태자)를 삼았다. ○ 왕이 돌아가니 諡(시)를 昭聖(소성)이라 하였다.

 

3-3. 삼국사기 제10권 애장왕(哀莊王) 기사

○ 哀莊王(애장왕)이 즉위하니, 諱(휘)는 淸明(청명), 昭聖王(소성왕)의 太子(태자)요, 어머니는 金(김)씨, 桂化(계화)부인이다. [王(왕)의] 卽位時(즉위시)의 나이 13세이므로, 阿飡(아찬) 兵部令(병부령) 彦昇[언승:王(왕)의 叔父(숙부)]이 攝政(섭정)하였다. ○ 처음 元聖王(원성왕)이 돌아갔을 때 唐(당)의 德宗(덕종)은 司封郞中兼御史中丞(사봉랑중겸어사중승) 韋丹(위단)을 持節使(지절사)로 보내어 弔慰(조위)하게 하는 동시에 嗣王(사왕) 俊邕(준옹)을 책봉하여 開府儀同三司檢校太尉新羅王(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신라왕)을 삼게 하였는데, 韋丹(위단)이 운州(운주:지금의 山東省(산동성)에 이르렀을 때 嗣王(사왕)이 돌아갔음을 듣고 도로 歸還(귀환)하였다. ○ 7월에 왕은 이름을 重熙(중희)라 고쳤다. ○ 8월에 앞서 入唐宿衛學生(입당숙위학생)인 梁悅(양열)에게 豆힐(두힐[縣(현)]) 小守(소수)를 임명하였다. ○ 처음 德宗(덕종)이 奉天[봉천:지금의 陜西省(섬서성) 乾縣(건현)]에 避難[피난:長安(장안)의 軍亂(군란)]하였을 때 梁悅(양열)은 從難(종난)의 功(공)이 있어, 帝(제)가 右贊善大夫(우찬선대부)의 職(직)을 주어 돌려보냈으므로 왕이 이 때 擢用(탁용)하였던 것이다.
○ 2년 2월에 왕이 始祖廟(시조묘)에 拜謁(배알)하였다. ○ 太宗大王[태종대왕:武烈왕 (무열왕)]과 文武大王(문무대왕)의 2廟(묘)를 別立(별립)하고 始祖大王[시조대왕:味鄒尼師今(미추이사금)]과 왕의 高祖(고조) 明德大王[명덕대왕:孝讓(효양)], 왕의 曾祖(증조) 元聖大王(원성대왕), 皇祖(황조) 惠忠大王(혜충대왕)을 5廟(묘)로 삼았다. ○ 兵部令(병부령) 彦昇(언승)으로 御龍省(어룡성) 私臣(사신)을 삼았다가 얼마 아니하여 上大等(상대등)을 삼았다. ○ 죄수를 大赦(대사)하였다. ○ 5월 초하루 壬戌(임술)에 당연히 日蝕(일식)이 있을 터인데 食[식:蝕(식)]치 아니하였다. ○ 9월에 熒惑[형혹:妖星(요성)]이 달에 들어가 별이 비와 같이 떨어졌다. ○ 武珍州(무진주)에서 붉은 까마귀를 進上(진상)하고 牛頭州(우두주)에서 흰 꿩을 진상하였다. ○ 10월에 큰 추위가 있어 松竹(송죽)이 다 죽었다. ○ 耽羅國[탐라국: 지금의 濟州(제주)]에서 사신을 보내 朝貢(조공)하였다.
○ 3년 정월에 왕이 神宮(신궁)에 親祀(친사)하였다. ○ 4월에 阿飡(아찬) 金宙碧(김주벽)의 딸을 後宮(후궁)으로 들였다. ○ 7월에 지진이 있었다. ○ 8월에 加耶山[가야산:陜川(합천)]의 海印寺(해인사)를 창건하였다. ○ 삽良州(삽량주)에서 붉은 까마귀를 進上(진상)하였다. ○ 12월에 均貞(균정)에게 大阿飡(대아찬)의 位(위)를 주고 假王子(가왕자)를 삼아 日本(일본)에 볼모로 보내려 하니, 均貞(균정)이 사양하였다.
○ 4년 4월에 왕이 南郊(남교)에 行(행)하여 보리 농사를 보았다. ○ 7월에 일본과 交聘(교빙)하여 友好(우호)를 맺었다. ○ 10월에 지진이 있었다.
○ 5년 정월에 伊飡(이찬) 秀昇(수승)으로 侍中(시중)을 삼았다. ○ 5월에 일본이 사신을 보내어 황금 300냥을 進上(진상)하였다. ○ 7월에 閼川(알천)에서 軍兵(군병)을 大閱(대열)하였다. ○ 삽良州(삽량주)에서 흰까치를 진상하였다. ○ 臨海殿(임해전)을 重修(중수)하고 東宮[동궁:太子宮(태자궁)]의 萬壽房(만수방)을 새로 지었다. ○ 牛頭州(우두주) 蘭山縣(난산현)에서 伏石(복석:엎어진 돌)이 일어났다. ○ 熊川州(웅천주) 蘇大縣[소대현:지금의 泰安(태안)] 釜浦(부포)의 물이 피로 변하였다. ○ 9월에 望德寺(망덕사)의 두 塔(탑)이 相戰(상전)하였다.
○ 6년 정월에 어머니 金(김)씨를 봉하여 大王后(대왕후)라 하고 妃(비) 朴(박)씨를 봉하여 王后(왕후)를 삼았다. ○ 이 해에 唐(당)의 德宗(덕종)이 崩(붕)하여, 新主(신주) 順宗(순종)이 兵部郎中兼御史大夫(병부랑중겸어사대부) 元季方(원계방)을 보내어 喪(상)을 告(고)하고 왕을 책봉하여 '開府儀同三司檢校大尉使持節大都督鷄林州諸軍事鷄林州刺史 兼 持節充寧海軍使上柱國新羅王(개부의동삼사검교대위사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계림주자사 겸 지절충영해군사상주국신라왕)'을 삼고 그 어머니 叔(숙)씨를 大妃[대비:王母(왕모)의 아버지는 叔明(숙명)으로 奈勿王(내물왕)의 13世孫(세손)인즉 어머니의 姓(성)은 金(김)씨니 그 아버지의 名(명)으로 叔氏(숙씨)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아내 朴(박)씨를 妃(비)라 하였다. ○ 8월에 公式[공식:法規(법규)] 20여 조를 頒示(반시)하였다. ○ 11월에 지진이 있었다.
○ 7년 3월에 日本國(일본국) 사신이 오니, [王(왕)이] 그를 朝元殿(조원전)에서 引見(인견)하였다. ○ 왕이 下敎(하교)하여 佛寺(불사)의 新創(신창)을 금하고 오직 修葺[수즙:重修(중수)]만을 허락하였으며 또 錦繡(금수)로 佛事(불사)를 짓거나 金銀(금은)으로 器用(기용)을 만드는 것을 금하여 所司[소사:官吏(관리)]로 하여금 널리 布告(포고) 施行(시행)케 하라 하였다. ○ 唐(당)의 憲宗(헌종)이 宿衛王子(숙위왕자) 金獻忠(김헌충:何王(하왕)의 아들인지 미상)을 歸國(귀국)케 하고 이어 試秘書監(시비서감)의 職(직)을 가하였다. ○ 8월에 당에 사신을 보내어 朝貢(조공)하였다.
○ 8년 정월에 伊飡(이찬) 金憲昌(김헌창)[昌(창)은 혹 貞(정)으로 씀]으로 侍中(시중)을 삼았다. ○ 2월에 왕이 崇禮殿(숭례전)에 御坐(어좌)하여 奏樂(주악)을 觀聽(관청)하였다. ○ 8월에 큰눈이 왔다.
○ 9년 2월에 日本國(일본국) 사신이 오니 왕이 厚禮(후례)로 대접하였다. ○ 金力奇(김역기)를 唐(당)에 보내어 朝貢(조공)하였다. 力奇(역기)가 (唐主(당주)에게 上言(상언)하기를, "[德宗(덕종)] 貞元(정원) 16년(新羅(신라) 昭聖王(소성왕) 2년)에 詔書(조서)로 臣(신)의 故主(고주) 金俊邕[김준옹:昭聖王(소성왕)]을 책봉하여 新羅王(신라왕), 어머니 申(신)씨를 大妃(대비), 아내 叔(숙)씨를 王妃(왕비)로 하였는데, 冊封使(책봉사) 韋丹(위단)이 中路(중로)에서 왕의 薨去(훙거)를 듣고 도로 돌아가게 되어 그 冊封書(책봉서)가 中書省(중서성)에 (그대로) 있다 하니, 지금 臣(신)이 귀국하니 청컨대 그것을 臣(신)에게 주어 가지고 가게 하소서" 하였다. 唐主(당주)가 칙명에 "金俊邕(김준옹) 등의 冊書(책서)는 鴻려寺(홍려사:外務部(외무부)와 같음)로 하여금 中書省(중서성)에서 그것을 수령하여 寺(사:홍려사)에 와서 金力奇(김역기)에게 授與(수여)하여 가지고 돌아가게 하라" 하고, 이에 왕이 叔父(숙부) 彦昇(언승)과 그 아우 仲恭(중공) 등에게 門戟(문극)을 내리고 本國(본국)으로 하여금 例(예)에 의하여 주게 하였다[申(신)씨는 즉 金神述(김신술)의 딸이니 神字(신자)의 同韻(동운)인 申(신)을 氏(씨)라 한 것)은 잘못이다]. ○ 왕이 사람을 12道(도)에 보내어 諸郡邑(제군읍)의 境界(경계)를 分定(분정)케 하였다. ○ 7월 초하루 辛巳(신사)에 日蝕(일식)이 있었다.
○ 10년 정월에 달이 畢星(필성)을 犯(범)하였다. ○ 6월에 西兄山城[서형산성:지금의 慶州(경주) 西岳山城(서악산성)]의 鹽庫(염고)가 (저절로) 울어 소 우는 소리와 같았다. ○ 碧寺(벽사)의 蝦마(하마:두꺼비와 개구리)가 뱀을 잡아먹었다. ○ 7월에 大阿飡(대아찬) 金陸珍(김육진)을 唐(당)에 보내어 (前年(전년) 冊封(책봉)의) 恩(은)을 辭(사)하고 겸하여 方物(방물)을 進奉(진봉)하였다. ○ 크게 가물었다. ○ 왕의 叔父(숙부) 彦昇(언승)이 그 아우 伊飡(이찬) 悌邕(제옹)으로 더불어 군사를 이끌고 大內[대내:宮中(궁중)]에 들어와 亂(난)을 일으키고 王(왕)을 弑害(시해)하였으며 王弟(왕제) 體明(체명)도 왕을 侍衛(시위)하다가 해를 입었다. 왕을 追諡(추시)하여 哀莊(애장)이라 하였다.

 

3-4. 차건신(車建申)

"삼국사기"와 "삼국사기" 등, 고려의 역사 이전의 역사서에 차씨는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차건신에 대한 기록 역시 전혀 찾을 수 없다.

지금은 근거가 없어 해체된 차류대종회에서 발행하던 "차류대종보" 특집2호(1973년 9월)에는 차건신에 대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 기사가 실려 있다. 곧 그 이름이 건신(建申)이 맞는지 건갑(建甲)이 맞는지에 대한 것인데, 양쪽 주장이 제시되고 5명의 원로들의 재고증(再考證)을 통해 건신(建申)으로 결정하는 엄숙한 기사였다. (참고로, 아직도 건갑(建甲)도 혼용되는 것을 보면 아직도 혼란이 계속되고 있는 모양이다. 예를 들어 연안차씨 대동보나 강렬공파보 등에서 그렇게 쓰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 과정에서 사용한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류씨 족보, 곧 기사보(1689년) 이후의 족보들, "차원부설원기"(1580년 전후의 위작(僞作)), 차식(車軾)의 신도비명(1619년) 등이다. (차식은 차천로와 차운로의 부친임.) 특히 설원기가, 필자는 지금도 연유를 알 수 없는 이유로, 차문의 일부 계보가 서로 다른 두 가지 본(本)이 나왔고, 그 과정에서 그 계보와는 상관없는 차건신의 이름의 신(申)자가 이본(異本)을 만들다가 (아마 실수로) 갑(甲)자로 쓰인 탓으로 설명되었다. 차식의 신도비명과 류씨 족보들은 설원기의 설명을 따르고 있을 따름이라 논의에 포함시키지 않아도 된다.

결론적으로 차건신의 실재에 대한 근거는 "차원부설원기"이다. 그러나 이 책은 위서(僞書)임이 판명이 나 있다.

3-5. 차씨

다음은 "엠파스 백과사전"의 '차(車)' 항목이다. 류씨와의 관계를 잘못 설명하고 있는 부분은 생략했다.

"문헌에 110여 개의 본관이 전하나, 오늘날 계통이 자세히 전하는 본으로는 연안(延安) · 평산(平山) · 용성(龍城) · 남해(南海) 등이 있다.

차씨의 대종을 이루는 연안차씨는 차효전(車孝全)을 시조로 한다. ....... 문학공파(文學公派) · 전서공파(典書公派) · 월파공파(月波公派) · 상장군공파(上將軍公派) · 송림백공파(松林伯公派) 등의 분파를 이루며 계대를 이어왔다.

평산차씨의 시조는 차광한(車光翰)으로 전한다. 여러 문헌에 고려시대에 문과에 급제했다는 사실이 전해오나 유래나 계통을 상고할 수 없다. 용성차씨의 시조 역시 문헌에 따라 차우상(車遇尙) 또는 차중립(車仲立)으로 전해오고 있을 뿐 시조의 행적이나 본관유래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남해차씨는 좌우위보승낭장(左右衛保勝郎將)을 지낸 차지보(車之普)를 시조로 삼아 계대를 이어오고 있으며 남해를 본관으로 삼게 된 연유는 상고할 수 없다.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의 성씨 및 본관 집계결과에 따르면, 가구수 5만 6,106호와 인구수 18만 589명으로 성씨 중에서 인구순위 39위이다."

2000년의 통계청 인구조사자료에 따르면 1000명 이상의 차씨에는 연안차씨(161,325명), 경주차씨(6,294명), 고령차씨(1,772명), 수원차씨(1,591명), 나주차씨(1,235명)의 5개 본관이 있다. 위에 언급된 평산차씨(276명), 용성차씨(359명), 남해차씨(394명)는 현재 소수의 구성원만 존재한다.

이들을 보면, 흔히 차씨들은 단일본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성씨들은 본 자체도 바뀐 경우가 많고(큰 지방의 명칭을 따서 개관한 경우 등), 큰 본관에 흡수된 경우도 많다. 따라서 현재의 인원만 가지고는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고려시대에 큰 세력을 떨친 정주류씨가 현재 679명만 존재하는 것이 좋은 예에 속할 것이다.

류씨의 경우도 "柳氏皆祖文化大丞車達"(류씨는 모두 문화류씨 대승공 류차달에서 나왔다)는 식의 개념이 조선시대 후반에 크게 퍼졌었다. 역사적 인물 중에 그 상계를 알 수 없어 대승공과의 연결을 밝힐 수 없는 경우들이 존재한다. 이들이 실제 대승공과 연결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일단은 그 상태로 두어야 할 것이다.

* 현재 연안류씨(622명)도 있고 문화차씨(613명)도 있음.
* 이상의 숫자는 모두 2000년 통계에 의함. 물론 북한은 빠져 있어 그것이 포함되면 이야기가 약간 달라질 수도 있을 것임.

차씨가 문헌상으로 최초로 나타난 것은 "고려사"이다. 이것은 류씨나 많은 다른 성씨들과 유사한 상황이다. 반면 고려금석문에는 차씨 관련 항목이 나오지 않는다. "고려사"에는 車로 시작되는 이름을 갖는 원나라 사람 차라대(車羅大) 등이 나오고, 연안차씨와 연관을 찾을 수 없는 차지보(車之普) 등이 나오며, 연안차씨의 인물로는 차중규(車仲圭), 차송우(車松佑), 차약송(車若松), 차신(車信), 차척(車倜), 차포온(車蒲溫) 등의 10명이 좀 넘는 사람들이 나온다. 이 중 가장 먼저 사람이 19대 명종 때 사람인 차중규(1095-1174)이다. 특이한 것은 "고려사"에 대승공 류차달의 이름(名)과 동일한 차달(車達)이란 인물이 6대 성종 때인 990년의 기사에 나오는데 운제현(雲梯縣, 전주 지방) 지불역(祗弗驛)이란 곳의 백성으로서 효자로서 '역(驛)과 섬에서 해방'되는 상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 '차달'은 전체가 이름으로 판단되며, 車를 성으로 보기 어려울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의 세종실록지리지 황해도 연안도호부(延安都護府) 항목에는 "토성(土姓)이 7이니, 송(宋) · 이(李) · 홍(洪) · 고(高) · 강(康) · 전(田) · 김(金)이요, 망성(亡姓)이 1이니, 정(鄭)이요, 촌락성(村落姓)이 2이니, 차(車) · 노(魯)요, 속성이 3이니, 단(段) · 황(黃) · 최(崔)이다.【지금 모두 향리가 되었다.】" 라고 하여 차(車)씨를 촌락성으로 밝히고 있다. 성씨의 연구에 따르면, 군현의 읍치를 본관으로 하는 성은 지배층에 속했고, 촌락성이나 향 ·소 · 부곡성 등은 국가에 대한 조세 · 공부(貢賦) · 역역(力役) 등의 부담을 져야 하는 피지배층이었다.

이로 미루어보면 대략 차씨도 고려 초기에 국가적으로 시행된 성씨 분정을 통해 성립된 다른 많은 성씨와 같은 범주에 속한다고 생각된다. 차중규의 역사적 등장도 이에 잘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만화리 묘 옆에 설치된 5대단: 모두 가공인물임 (사진: 류재준)


4. 종합 토론 및 맺는 말

위에서 대부분의 구체적인 사실이 제시되었고, 이미 결론은 자명하다고 생각된다.

기장에는 어떤 무덤이 내려오고 있고 주민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 생긴 것인지 누구의 무덤인지 알 수가 없다. 1-1의 엔사이버 백과사전의 항목이나 1-2의 기장군 홈페이지 내용에서 언급되어 있는 '이위'는 차씨인지 이씨인지 불명확한데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알려진 무덤에는 도장(盜葬)하는 일도 있었으니 이미 무덤이 있던 곳에 다른 무덤이 거듭 써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흥미롭게도 인터넷 사전(엠파스 백과사전)에 '차건신의 묘'의 소유자와 관리자가 문화류씨대종회로 되어 있었고 문화재자료 158호로 지정되었던 사실만 지적해 놓고 있었다. 문화재도 아니며, 기껏 그 '문화재자료'에서도 그 후 10년 후에 해제되었는데 그 해제 사유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누구나 역사책을 조금만 떠들어보아도 신빙성이 없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라 짐작된다.

'차성'이라는 지명은 신라시대부터 있었고, 차건신이라는 인물은 16세기 후반에 "차원부설원기"에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그 둘 사이에 연관된 이야기가 지어져서 19세기에는 읍지(邑誌)와 군지(郡誌) 등에 들어가게 되었음이 확실해 보인다. 이런 책자들은 그 내용의 기술이 엄밀하지 않은 경우가 많고 해당 지방에 관해 전해오는 이야기를 그 사실 여부에 그다지 구애 받지 않고 가급적이면 많이 실으려는 경향이 있다. 나라에서 간행했던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증보문헌비고"에도 검증되지 않고 당대에 만연되어 있는 이야기들을 그대로 실은 경우가 부지기수임을 보면 잘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다.

이렇게 보면 2번 항목에서 다룬 차릉에 대한 차문(車門)의 기술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왕명'이란 말의 남용을 여기서도 목격하는데, 예를 들어 행정구역 개편이 있어서 어느 지역의 이름이 변경이 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왕명'이라 부를 이유는 없다. 물론 모든 것이 왕의 이름으로 행해진 시대였지만 그것을 강조하는 것은 분위기를 호도하기 위한 것임에 분명하다. 요즘 시대에 그런 강조가 오히려 거부감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을지 염려스럽다.

3-2와 3-3의 신라 소성왕과 애장왕 기사는 길지만 나중에도 참고로 쓰기 위해 제시해 보았다. 여기서 누구나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차건신, 차승색 등의 가공인물들의 그림자라도 보이는지 스스로 판단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승상(丞相), 좌상(左相)이었다는 이들의 관직명조차도 당시에는 없던 명칭이며 승상은 우리나라에서 쓰이지도 않았다. 아무리 그 시대의 사료가 많이 전해져 오지 않고,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충분치 않다고 해도 이 비교적 상세한 기사들에서 보상(輔相) 혹은 섭정(攝政)이었다는, 왕에 버금가는 비중의 차건신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은 단 하나의 결론밖에 줄 수 없음은 자명하다. 그것은 그런 사람이 실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위에서 언급했지만 차건신의 이름에 대해 논증한 여러 사람들이 겨우 근거로 삼는 것은 실질적으로 "차원부설원기" 하나뿐이었다. 이 책이 조작된 가장 큰 목적은 선계를 만들어내기 위한 것임은 이수건 교수의 평생 연구에서 밝힌 내용 중 하나이다. 차건신이란 인물의 조작이 그 일부분임은 의심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결국 차릉은 '차성(車城)'이라는 지명에다 적절히 역사적으로 실재성이 증명되지 않고, 대개 실재하지 않았던 가공인물의 성씨를 맞추어 만들어낸 이야기로 생각된다. 게다가 '차성'이란 지명의 '車'자는 車라는 한자를 직접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우리말 훈(訓=한자의 새김)을 딴 차자(借字)일 따름인 것이 확실해서 차씨와의 연관을 짓는다는 것이 오히려 이치에 닿지 않아 보인다.

이러한 견강부회는, 문화류씨 시조인 대승공 류차달(柳車達)의 '車'는 수레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높으며 성(姓)의 車와는 연관이 없는데도 그 연관성을 암시하며 차씨를 류씨에 꾸며 붙인 위서(僞書) "차원부설원기"나 지금은 폐기된 문화류씨 원파록(源派錄)의 견강부회와 동일한 맥락의 일이어서 흥미롭다. 이제는 이런 일들은 말끔히 털어내고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역사적 묘사라는 탄탄한 지반 위에 아름다운 집안의 역사를 세워 그 구성원과 사회에 큰 이익과 도움이 되는 역사(役事)에 매진할 때임을 강조하고 싶다.


2008년 10월 19일
채하 류주환
충남대학교 공과대학 바이오응용화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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