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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절 방/인사말,계촌,문상

상석(上席) 위치는 - 동양의 방위

by 연송 김환수 2016. 11. 26.
상석(上席) 앉는 자리(서열위치)는


상석(上席이란 차례나 위계가 있어 자리에서 윗사람이 앉은 자리를 말한다.


‘좌상우하(左上右下)’ 이것만 가지고 판단하면 실수를 하게 된다.  좌측의 기준이 동양의 방위 개념이므로 일반적인 방위개념으로 보면 안된다는 의미이다.


동양의 방위개념은 일반적인 방위 기준이 아닌 북쪽에 임금이 앉아서 바라보는 개념을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서양식(西洋式)의 방위(方位)와 우리 동양(東洋)의 방위(方位)가 다르다는 데 기인을 한다.


"좌상우하"는 임금 또는 천자가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바라보고 앉아 있을때 임금을 기준으로 좌측과 우측을 나누고 그 기준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착각을 할수 있다.


예를 들면 임금을 바라보는 입장에서 좌의정은 오른쪽(우측)에 위치하고 있지만, 임금님 기준(동양의 방위기준)으로 말한다면 왼쪽(좌측)에 있다. 예전에는 모든기준이 동양방위 개념으로 정하고 있기 때문에 햇갈리는 것이다.


우의정보다 좌의정이 서열이 높은데 어느쪽 방향에 있는지를 말할때  동양의 방위개념인지 아니면 일반적인 방위의 개념으로 바라보는 방향기준인지가 중요한 것이다.


동양의 방위개념으로 살아 있는 사람의 공간인 양택에서는 왼쪽이 오른쪽보다 서열이 높다. 이를 ‘좌상우하(左上右下)’라고 한다. 다시 정리해 보면 바라보는 입장의 기준에서는 른쪽이 서열이 높은 "우상좌하"가 되는 것이다.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공간은 크게 두 곳으로  살아있는 사람의 집은 ‘양택(陽宅)’이고, 죽은 사람의 집은 ‘음택(陰宅)’이라 하는데, 양택과 음택의 경우 왼쪽과 오른쪽의 우선순위는 정반대로 적용을 한다.


죽은 자의 공간인 음택(陰宅)에서 "우상좌하(右上左下)"는 오른쪽이 왼쪽보다 서열이 높다. 이 또한 동양의 방위 개념이 적용된 기준이다. 

무덤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일반적인 방위기준 입장에서 방향을 말한다면 왼쪽이 서열이 높은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선조들이 바라보는 공간에 대한 전통시각인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동양의 방위 개념은 북쪽에서 남쪽을 바라보는 기준으로 좌상우하, 우상좌하 라고 정하고 있다. 임금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일반적인 방위개념으로 바라보는 입장이므로 반대방향으로 해석을 해야 하는 것이다.  


 "좌상우하(左上右下)" 원칙을 확인해 보려면, 궁궐, 사찰, 서원, 사대부 가옥을 보면 알수 있으며, "우상좌하(右上左下)" 원칙 적용을 확인하려면, 종묘나 사당, 왕릉, 일반인의 무덤 등을 답사해 보면 알수 있다.


"좌상우하"의 원칙이 적용되는 대표적인 문화재는 "궁궐(宮闕)" 인데 궁궐 내에서 가장 핵심적인 공간은 정전으로 경복궁의 정전은 ‘근정전’이다. 이 곳 앞의 넓은 공간을 "조정(朝庭 : 조회를 하는 마당)"이라 한다.


‘조정대신’이란 말은 바로 이 곳 조회를 하는 마당에 설 수 있는 신분을 말하는데 이러한 신분에는 문반과 무반이 있고 이들을 "양반(兩班)"이라고 불렀다.


조정대신들의 조회위치는 근정전 용상에 좌정해 남쪽을 바라보는 임금이 있고 임금을 기준으로 왼쪽(동쪽) 품계석 쪽은 문반이, 오른쪽(서쪽) 품계석 쪽은 무반이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즉, 동양의 방위개념이 적용된 것을 지금 방위개념(보는 사람위주) 시각으로 보면 햇갈리게 되는 것이다.   


이당시 문반은 무반보다 더 높은 지위를 갖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조선사회가 문인을 무인보다 우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본지식을 갖고 있다면 조선 최고의 관직인 3정승 가운데 좌의정이 우의정보다 높은 관직이라는 것을 쉽게 알수 있게 되는 것이다.


좌상우하의 원칙은 ‘서원(書院)’의 경우도 똑같이 적용되는데 서원의 중심 건물인 강당의 뒤쪽에는 사당이 위치하고, 강당에서 전면을 보았을 때 앞마당의 좌우에는 각각 건물이 한 채씩 있고, 강당 정면에는 루(樓)가 있다. 이것이 일반적인 서원건물의 배치법이다.


이 경우 강당에서 본 좌우의 건물들은 유생들의 기숙사인데, 왼쪽의 건물을 동재, 오른쪽 건물을 서재라 부른다.

이곳에서 좌상우하의 원칙을 적용하면, 좌측의 동재가 우측의 서재보다 서열이 높다. 따라서 유생들 가운데 선배들이 동재에 거주하는 것이 자명한 이치이다.


그런데, 죽은 자의 공간 즉, 음택(陰宅)에서는 이러한 상하질서는 정반대로 적용하고 있다. 바로 ‘우상좌하(右上左下)’의 원칙이 적용된다. 다시 말하면 오른쪽인 서쪽이 왼쪽인 동쪽보다 지위가 높다고 보는 시각이다.


이는 종묘(宗廟), 사당 또는 왕릉 등을 답사할 때 확인해 보면 된다.  종묘는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셔둔 왕가의 사당으로 중심 건물은 정전(正殿)이다. 정전의 내부에는 왕과 왕비의 위패가 19칸에 각각 모셔져 있다.


조선의 창업자 태조 이성계의 위패는 당연히 오른쪽(서쪽) 맨 끝 자리에 놓이게 된다. 죽은 자의 공간에서는 오른쪽이 높은 지위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어서 동쪽으로 차례로 태종, 세종, 세조 등의 순서로 위패를 모시고 여기에서 누락된 임금과 왕비의 위패는 영녕전으로 옮겨간다.




종묘 정전 (宗廟 正殿) 


정면 19, 측면 3, 맞배지붕, 일출목() 이익공() 집이다. 1395(태조 4)에 준공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8(광해군 즉위년)에 제111실을 완공한 이래 1726(영조 2)에 제1215, 1836(헌종 2)에 제16·17, 그리고 1870(고종 7)에 제18·19실을 이어서 증축하여, 한국에서 가장 긴 목조건물이 되었다.


여기에 모신 신위는 제1실의 태조를 비롯하여 태종 ·세종 ·세조 ·성종 ·중종 ·선조 ·인조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정조 ·순조 ·문조 ·헌종 ·철종 ·고종 ·순종 19왕과 그의 비인데, 이곳에 모시지 않은 왕의 신위는 이 건물 서쪽에 있는 영녕전(殿:보물 821)에 봉안되어 있다.



참고로 중요한 건물을 지을 때에도 기본 원칙들이 있었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좌묘우사 (좌측에 종묘, 가운데 경복궁, 우측에 사직단)는 고대 도성의 주요시설을 배치하는 원칙이다.


궁궐을 중심으로 곡신과 토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사직단은 그 우측인 서쪽에 두고, 왕실의 사당에 해당하는 종묘는 그 좌측인 동쪽에 배치하는 것을 가리킨다.


좌묘우사는 역대의 도성에서 일관되게 지켜진 중요한 원칙으로 전조후시와 달리 우리나라에서도 엄격하게 준수되었다.


*** 전조후시(前朝後市)의 원칙은 궁궐 앞뒤에 관청과 시장을 두고, 전조후침(前朝後寢) 원칙은 앞쪽에

      조정을 뒤쪽에 침전을 두는 것이다.


종묘의 배치에 대하여 『주례(周禮)』 「동관(冬官)」 고공기(考工記) 의 [장인]에 “오로지 왕이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할 때에는 왼쪽에 종묘를 두고 오른쪽에 사직을 설치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원문에는 좌조우사(左祖右社)라고 되어 있으나, 지금은 통상 같은 의미로서 좌묘우사(左廟右社)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 뜻은 종묘를 도성 안에 세웠다는 사실과 그것이 궁궐의 왼쪽에 있다는 점을 나타낸다.


조선시대에는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북쪽을 높게 생각하여 남면하도록 궁궐을 배치했으므로, 경복궁을 중심으로 왼쪽인 동쪽에 종묘를, 오른쪽인 서쪽에 사직을 배치하였다.


조선 왕릉은 북한에 있는 2기를 제외한 40기가 2009년 6월30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왕릉에서 좌우 우선순위는 주인공인 왕과 왕비이므로 조형물은 돌아가신 분들이 누워 계시는 봉분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다.


왕릉(봉분)에서 정자각이나 홍살문을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좌우를 정한다.

봉분에 서서 정면을 보았을 때 쌍분인 경우 오른쪽(右上)이 왕의 무덤이고 왕릉(봉분)을 앞에서 바라보는(관람객) 입장에서는 왼쪽이 왕, 오른쪽이 왕비의 무덤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궁궐이나 왕릉, 기타 건축물 등에도 우리선조들의 전통적 시각인 동양의 방위개념이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세종(世宗) 영릉


능      호 : 영릉 

위      치 :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영릉로 269-50 

지정번호 : 사적 제195호 

조성시기 : 1469년(예종 1) 


영릉은 조선 제4대 임금 세종과 비 소헌왕후의 합장릉이다. 

조선왕릉 중 최초로 한 봉우리에 다른 방을 갖춘 합장릉이며, 

무덤배치는 국조오례의에 따라 만든 것으로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었다. 

 

1469년(예종1) 여주로 천장하면서 세조의 유명(遺命)에 따라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만 설치하였으며, 봉분 안에는 석실이 아니라 회격(灰隔: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하고, 혼유석 2좌를 마련하여 합장릉임을

표시하였다.  

 

또한 기존의 왕릉에는 난간석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여 방위를 표시하였는데, 영릉은

이를 간소화하여 십이지를 문자로 표현하였다. 

 

입지는 풍수사상에 따라 주산을 뒤로 하고 산의 중허리에 봉분을 조영하였으며,

좌우측에는 청룡, 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멀리 안산인 북성산을 바라보고 있다. 

 

능의역사 

1446년(세종 28)에 세종의 비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당시 광주 (廣州, 현재의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헌릉의 서쪽에 쌍실의 능을 조영하였다.  

오른쪽 석실은 세종을 위해 미리 만들어 놓았다가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하였다.  

 

세조대에 영릉의 자리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하다가 1469년(예종 1)에 이곳 여주로 옮겨 왔다. 

 

여주로 천장하면서 원래의 영릉 터에 있었던 상석, 망주석, 장명등, 문석인, 무석인,

석수, 신도비 등은 그 자리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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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은 1446년 소헌왕후 사망 후 헌릉 서쪽 대모산(현 서초구 내곡동)에 동릉이실로

조영된 능이다. 우측 석실은 왕의 수릉으로 삼았다가 1450년 세종이 사망하자 합장

해 조선 최초의 합장릉이 되었고 조선 전기 능제의 기본을 이루었다. 

 

현재의 영릉은 풍수지리상 최고의 길지 중 하나라고 불린다. 

 

그런데 세종의 능은 조성될 때부터 풍수지리상 불길하다는 주장 때문에 논란이

잦았다.

지관들이 강력하게 능 자리를 철회하자고 권했지만 세종은 "다른 곳에서

복지를 얻는다고 하지만 선영 곁에 묻히는 것만 하겠는가?"라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일단 세종의 고집대로 능을 조성했지만 세조 때 다시 강력한 천장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서거정이 "천장함은 복을 얻기 위함인데 왕이면 되었지 다시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라며 반대해 옮기지 못했다. 

 

결국 예종 1년(1469)에 천장했는데 그곳이 풍수지리상 최고의 길지 중 하나라는 현재

의 영릉이다. 이때는 세조의 유언으로 병풍석과 석실 제도를 폐지하고 회격각주1)

으로 합장했다.  

 

한편 구 영릉에 있던 석물들은 모두 그 자리에 묻었는데, 1973년 석상, 장명등,

망주석, 문·무인석, 세종대왕 신도비 등이 발굴되어 세종대왕기념관 앞뜰로 옮겨

졌다. 

 

영릉은 이장하면서 예종 때 선포된 『국조오례의』에 따라 병풍석과 석실 제도를

폐지하고, 회격으로 하는 조선 전기 능제의 기본을 이루었다.  

 

합장릉인 봉분 둘레에는 12면으로 꾸민 돌난간을 둘렀으며 난간석을 받치고 있는

동자석주에는 한자로 십이지를 새겨 방위를 표시했다.  

 

병풍석 없이 2개의 혼유석과 장명등, 좌우에 망주석을 놓았는데 혼유석의 고석은

선대의 5개에서 4개로 줄었다. 또한 2개의 격실 사이에 48센티미터의 창문(창혈)을

뚫어 왕과 왕비의 혼령이 통하게 해 합장릉의 의도를 더욱 명확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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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東洋)방위(方位)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 일상 생활에서 많이 듣는 말이다.

 

좌청룡이란 좌측에 있는 산을 말하고 우백호란 우측에 있는 산을 말한다. 풍수지리에서 산을 용(龍)이라고 표현하며 좌청룡이라고 한다.


우백호의 뜻은 주역(周易)의 학문과 연관이 있으며 남좌여우(男左女右)란 말이 있는데 남자는 좌측, 여자는 우측을 뜻함이다.

                                 

사신도 동쪽에는 청룡, 서쪽에는 백호, 남쪽에는 봉황과 비슷하게 생긴 주작을, 북쪽에는 뱀이 거북을 감고 있는 현무를 그렸다.

방위는 동쪽이 우측(오른쪽), 서쪽은 좌측으로 우청룡, 좌백호라 하지않고 왜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라 할까 ? 이것은 서양식(西洋式) 방위(方位)와 동양(東洋)의 방위(方位)를 보는 기준이 서로 다르기 때문인데 아래에 자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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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에서 뿐만 아니라 동양철학에서는 우리 인체에도 남자일 경우에 좌측은 양으로 보고 우측은 음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여자는 반대로 좌측은 음(陰)이요 우측을 양(陽)으로 보니 남자와 여자는 서로 반대가 되는 것이다.


 

풍수지리에서는 묘지 자리에서 보게 되면 좌측은 청룡(靑龍)이요, 우측은 백호(白狐)가 되는 것이다.


 

우리 인체를 비교하게 되면 사람의 얼굴이 명당의 자리라면 좌측 팔이 좌청룡이 되고 우측 팔이 우백호가 된다.


묘지에서 길흉화복을 논할 때 좌측(좌청룡, 좌측 산)은 남자요 양(陽)이라 했으니 아들의 출세를 판단하고, 우측 산(우백호)은 딸의 득세나 성공여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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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도(四神圖)

사방의 별자리를 상징적인 동물상으로 나타낸 것으로 동쪽에는 청룡을, 서쪽에는 백호를, 남쪽에는 봉황과 비슷하게 생긴 주작을, 북쪽에는 뱀이 거북을 감고 있는 현무를 그렸다.  우리나라에는 한대의 한사군(漢四郡) 문화를 통해 전래되었으며, 고구려에서 무덤의 수호신으로 적극 수용되었다.

 

청룡

모습은 일반 용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지만, 이름 그대로 몸이 푸른색을 띠고 있다

청룡은 생명의 시작을 알리는 동쪽(東)을 수호하며 오행 중 나무(木)의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봄에 나타난다고 여겨졌다. 또한 바람을 다스린다고도 합니다.
 

백호

사신(四神)의 하나로 서쪽(西)을 관장하고 있다. 청룡, 주작, 현무와는 달리 사신들 중 실제로 존재하는 동물이다. 일반적으로 홀쭉한 몸매를 갖춘 백호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사신들 중에서는 가장 젊은 존재라고 알려져 있다. 오행 중에서는 쇠(金)를 상징하며, 계절 중에서는 가을을 관장한다.
 

 주작

모습은 두 날개를 활짝 펼친 붉은 봉황이다. 때문에 봉황과 동일시 되는 경우가 많으며, 인도 신화에 등장하는 가루다와의 유사성도 제기되고 있다

주작은 남쪽(南)을 수호하며 오행 중에서는 불(火)의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계절 중에서는 여름을 관장한다. 경복궁의 남쪽 문인 광화문의 천장에도 그려져 있다.
 

 현무

암수가 한 몸이고 뱀을 몸에 칭칭 감아 얽혀 뭉쳐 있는 다리가 긴 거북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암컷인 거북의 머리와 수컷인 뱀의 머리가 원을 그리며 교차하는 모습으로 자주 그려지는데,
이는 암수가 서로 합하여 조화를 이룬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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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좌청룡 우백호의 방위에 대해 알아보자 우리가 사는 세계의 동서남북(東西南北) 네 방위(方位)를 지키는 수호신(守護神)으로 방위신(方位神)을 일컫는데 사신도(四神圖)라고도 한다.

청룡(靑龍), 백호(白虎), 주작(朱雀), 현무(玄武)가 그것이다.

 


이 네 방위신(方位神)은 각각의 방위(方位)를 수호(守護)하는데, 청룡(靑龍)은 동쪽을 수호하고, 백호(白虎)는 서쪽을, 그리고 주작(朱雀)은 남쪽을, 또 현무(玄武)는 북쪽을 수호한다.

   

우리가 아는 방위는 분명 동쪽이 오른쪽이고 서쪽은 왼쪽인데 왜 왼쪽의 좌청룡(左靑龍)이 동(東)쪽이며, 오른쪽의 우백호(右白虎)가 서(西)쪽일까 ?   여기에 대한 궁금증이 생길 것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서양식(西洋式)의 방위(方位)와 우리

동양(東洋)의 방위(方位)가 다르다는 데 기인한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천자(天子)는 남쪽을 바라보고(面) 있을 때 좌측을 동쪽(양陽), 우측을 서쪽(음陰)으로 본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동양의 모든 천자는 배북남면(背北南面,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향함)을 정사(政事)의 기본으로 삼았다.

 

위 오른쪽 그림처럼 아래의 북을 등지고 앞을 바라보면, 분명 뒤(아래)가 북(北)이고 앞이 남(南)이며왼쪽이 해가 뜨는 동(東)쪽이고, 오른쪽이 해가 지는 서(西)쪽이 된다.

 

음양(陰陽)의 개념을 일상에 비유하면, 양(陽)은 활동성이 있는 동(動)의 개념으로, 한낮의 밝은 태양, 밝음, 남성, 해뜨는 동쪽, 그리고 왼쪽을 뜻하며, 음(陰)은 조용한 정(靜)의 개념으로 밤하늘의 달, 어두움, 여성, 해가 지는 서(西)쪽 그리고 오른쪽을 뜻한다.

 

따라서 우리 전통 문화에서는 항상 기준을 북(北)쪽으로 하여 왼쪽이 양(陽)으로 남자의 위치가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결혼식장에서는 주례의 자리가 북(北)쪽이며, 제사(祭祀)를 지낼 때에는 신위(神位)를 모시는 곳이 북(北)쪽이다.

 

 

또 행사장이나 강의실, 사무실, 회식자리 등에서는 단상이나 연장자가 있는 곳이 북(北)쪽이 되고, 이 북쪽에서 볼 때 왼쪽이 동(東), 오른쪽이 서(西)가 되는 것이다.

 

즉 기준점의 중심에서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늘 ‘왼쪽’에 연장자나 상사 또는 남자(男子)가, ‘오른쪽’에는 연하자나 여성(女性)이 위치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리고 세배를 할 때나 절을 할 때의 손가짐도 음양(陰陽)에 따라 ‘왼손’과 ‘오른손’의 손가짐이 각각 다른데, 기본적으로 살아 있는 분께 절을 할 때에는 남성의 경우 ‘왼손’이 위로, ‘오른손’이 아래에 향하는 것이 기본이다.

 

남성=왼손(좌)=하늘(위)이기 때문이다. 즉 엄지를 약간 엇갈리게 깍지를 끼고 왼손을 위에 놓고 절을 하는 것이 예법에 맞는 손가짐이다. 여성의 경우는 남자와는 반대로 오른 손이 위에 위치하게 된다.

 

문상(問喪) 등에는 남자의 경우 「오른손」을 위에 오게 하고, 여성은 반대로 「왼손」이 위로 오게 절을 한다. 

남좌여우(男左女右) - 기준의 위치(북쪽)에서 봤을 때,

                               남자는 왼쪽, 여성은 오른쪽

 

자! 이제 오행이 실제로 현상계에 적용되는 것을 공부해 봅시다. 먼저 방위를 파악해 봅시다.

 

우리가 쉽게 볼 수 있는 지도는 西洋의 方位 개념으로 北쪽이 위에 있고 南쪽이 밑에 있습니다.

 

 

위의 그림을 보니 낯설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동양의 방위도를 보면은 낯설어 보이고 어딘지 모르게 생소하며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것은 우리는 서양의 방위도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서양의 방위도와 비교해 보면 거꾸로 뒤집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 북쪽이 밑에 있고 남쪽이 위에 있습니다.  서양의 방위도와 비교해 보면 거꾸로 뒤집어져 있습니다.

 

 

왜 동양의 일반적인 방위도는 남쪽이 위에 있고 북쪽이 밑에 있을까요 ?  먼저 내가 사방을 관찰하는 관찰자의 입장이 되어 봅시다.

 

관찰자의 입장에서 사방을 두루 살피려고 하면 동서남북의 어느 곳에 서 있어야 합니까 ?

 

바로 정북쪽입니다.동양에서 말하는 정북쪽은 물질과 에너지가 한 점으로 수렴되어 있는 곳으로 모든 방위 중 가장 어두운 곳입니다.

그 곳에 서 있어야만이 사방팔방을 두루두루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동양의 방위도를 볼 때 여러분이 내려다보고 있는 위치가 어디입니까 ?  정북쪽에 서 있는 것입니다. 사방이 나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것을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만일 위의 방위도가 뒤집어져 여러분이 서 있는 곳이 남쪽으로 된다면 가장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을 보는 것으로 사방팔방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으나 반대로 밝은 곳에서는 어두운 곳을 관찰할 수 없다.

 

동양 역학에서는 정 북쪽은 물질과 에너지가 한 점으로 모여 있는 곳으로 어두운 곳이다.  그리고 동남서는 밝은 곳이다.

 


  

플래시로 비유해 볼까요 ? A라는 사람이 북쪽에서 플래시를 들고 서 있습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동, 남, 서쪽이 다 보입니다.

 

그러나 B라는 사람은 플래시의 반대쪽인 남쪽에서 서 있습니다. B는 눈만 부실 뿐 아무것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동양의 방위도에서 관찰자는 북쪽에서 사방을 조망하고 있습니다.

 


인체(人體)의 방위

 

사람의 등이 陰이되니 북쪽 방향이고 배는 陽이되니 남쪽이 된다.

그러면 자연히 왼쪽은 東이 되고, 오른쪽은 西가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등을 북쪽이라 하는 이유는 대부분의 동물들은 등을 하늘로 향하여 햇빛을 많이 받는다. 햇빛을 많이 받으면 몸에 있는 기(氣)가 등쪽으로 모인다.

 

즉 등을 陰이라 하고 배를 陽이라 하는 것은 인체의 기가 흘러가는 것을 중심으로 陰陽을 나눈 것이다. 등을 北이라 한 것은 활동을 중심으로 보기 때문이다.

 

사람은 앞으로 전진하며 활동하기에 배가 남쪽(陽)이 되고 등은 단단한 척추 뼈로 물질이 응고된 모습을 보이니 북쪽(陰)이 된다.

 

이와 같이 기(氣)의 측면과 활동의 측면에서 관찰하는 것이 정 반대의 결과를 나타나게 되는데 이를 체(體)용(用)이라 한다.

 

나무의 나이테에서 북과 남을 잘 관찰해 보자.

北쪽은 水의 힘으로 응축되어 있고 반대 방향인 南쪽은 火의 퍼지고 뻗치는 힘의 영향이 나타난 것이 보인다.

東은 상승하는 木의 기운과 西는 하강하는 金의 압축과정을 알 수 있다.

 

 

사람의 뒤쪽 등을 한자로 배(背)라 하고 앞쪽을 복(腹)이라 한다.

           배 (背 : 등쪽배=北+月)

 

나무는 기립지물(氣立之物)이라 움직이지 않고 있어 동서남북의 방향 구별이 쉽지만 사람은 신기지물新機之物이라 스스로 남쪽을 향하지 않고는 방위를 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는 집이나 죽은 후 묘지 등의 방향을 정할 때는 남쪽을 많이 선호하고 있다. 이것이 자연스럽게 자연에 순응하는 것이다.

 

  

 

인체오행


사람이라고 해서 오행의 기운과 아주 다르진 않다. 그 어떤 사물보다도 오행이라는 것을 신체에 그대로 담아낸 것은 없을 거라 생각한다. 인간의 신체 즉, 오장육부에 그 모든 성질이 내포되어 있다.


먼저 얼굴부위를 살펴보자면 얼굴의 왼쪽 관골은 木, 얼굴의 오른쪽 관골은 金, 이마는 火에 해당하고, 턱은 水이며, 코는 土에 해당한다.


오장육부 우리의 내장기관을 설명하자면 오장은 간(肝),심(心),비(脾),폐(肺),신(腎)이고, 육부는 담(膽),(小腸),위장(胃腸),대장(大腸),방광(膀胱),삼초(三焦)를 뜻한다.



동양의 4대 방위 개념은 인의예지

 

동(東) : 인(仁)

서(西) : 의(義)

남(南) : 예(禮)

북(北) : 지(智)


우리나라 성문을 예로 들면

 

동대문 : 흥[인]지문

서대문 : 돈[의]문

남대문 : 숭[례]문

북   문 : 홍[지]문   이렇게 나타내어 진다.

 

음양오행이라는 말에서 음양은 + 양의기운, - 음의기운 나타내고

오행은 수水, 목木, 화火, 금金, 토土로 나타낸다

 

 북   : 수 水

 동   : 목 木

 남   : 화 火

 서   : 금 金

중앙 : 토 土

 

풍수사상이라고 하면 요즘은 흔히 좋은 묘자리를 찾기 위해서 사용된다고 많이 생각한다.

 

풍수에는 양택풍수와 음택풍수가 있는데 묘자리에 해당하는 것은 죽은 사람이 묻힐 자리를 찾는 음택 풍수만을 얘기하는것이고, 양택풍수란 집과 마을, 도읍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살아갈 터를 찾는것을 말한다.

 

 

남쪽을 바라보는 성인  

 

태극도를 보면 처음에는 평면 위에 그려진 그림으로만 보입니다.그러나 시간이 흘러갈수록 태극도가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며 입체적으로 느껴지게 됩니다. 시간의 궤적까지 느껴질 때면 마침내 시공을 다 담고 있는 4차원의 도형임을 알게 됩니다.

 

 

동서남북 방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동양의 방위도는 평면에 그려졌지만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연계는 입체로 되어 있지 평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횡적인 동서남북을 그려봅시다.

 

나무의 나이테에서 북쪽은 치밀하고 촘촘합니다. 의 힘에 의해 응축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반대로 남쪽은 물질적으로 가장 확대된 모습으로 火의 힘에 의해 최대한 펼쳐져 있습니다.

 

자연히 동쪽상승(上升)하는 의 과정이며 서쪽하강(下降)하는 의 과정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단면을 봅시다.등을 한자로는 [背(月+北)]라고 합니다.

 

  

정북쪽에서 남쪽을 향하고 있을 때 등은 자연스럽게 북쪽이 되고 배는 남쪽이 됩니다. 단단한 척추뼈(vertebral column)가 북쪽에서 물질이 응축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내경(內經)'에 나오는 성인 남면(聖人南面 : 성인이 남쪽을 향하고 있다)이라는 말은 위의 상황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나무는 기립지물(氣立之物)이라 움직이지 않아 동서남북의 구별이 쉽지만, 인간은 신기지물(神氣之物)이라 스스로 남쪽을 면(面)하지 않고는 방위를 정할 수가 없습니다.

 

성인 남면에서 알 수 있듯 사람은 북쪽을 등에 두고 남쪽을 바라보는 것이 자연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남향의 집을 짓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사람이 남쪽을 보고 있을 때 자연스럽게 왼쪽은 동쪽이 되고 오른쪽은 서쪽이 됩니다.

 

임금이 근정전에 앉아 정사를 펼치는 모습 역시 성인남면의 방향이며, 경복궁의 건축물 배치도 이에 준하여 형성되었습니다. 한옥과 사찰 등 전통 건축물들도 남면(南面)을 기준으로 합니다.

 

경복궁의 정문이 광화문이라는 것 외에도 동, 서, 북에 문이 있다. 왕은 북쪽을 등지고 앉아 남쪽을 바라보는 위치여야 하기 때문에 남쪽에 있는 광화문이 정문이다.

 

이전되기 전 광화문

 

 

사진은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지기 전까지 걸려있던 임태영(任泰瑛)의 글씨인데, 1916년경에 촬영된 사진의 유리 원판을 디지털 기술로 복원한 것이다.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1927년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을 때 건춘문 동쪽으로 이건되기 전 모습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식민지시대 유리건판 사진으로 이를 확대하면 '光化門'이란 현액 글씨가 뚜렷하다. 나아가 그 전면 월대를 포함한 광화문 전경이 비교적 잘 드러난다. 열린 우협문 안으로 보이는 흰색 가건물 지붕 일부는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당시 건물로 추정된다. 이로써 보건대 조선총독부 청사 착공 직후에 촬영했다고 판단된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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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중건당시 광화문 현판을 쓴 임태영(任泰瑛)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공간(公澗). 훈련대장 성고(聖皐)의 아들이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고, 1840년(헌종 6)길주목사로 재직하던 중 함경도암행어사 이은상(李殷相)의 탄핵을 받고 삭직당하였으나 곧 복직되었다.

이듬해 경상좌도수군절도사가 되고, 1842년 전라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851년(철종 2) 좌포도대장으로 재임하던 중 견책을 당하였다.

1857년 평안도병마절도사에 이어 1858년 금위대장, 1861년 우포도대장, 1862년 총융사를 지냈다.

1863년 어영대장·좌변포도대장 등을 지내고, 1865년(고종 2) 경복궁을 중건하게 되자 훈련대장으로 영건도감제조(營建都監提調)를 겸하였다. 시호는 정의(靖毅)이다.

 

광화문 현판 글씨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

 

광화문운 1395년(태조 4) 9월에 창건되어 정도전(鄭道傳)에 의해 사정문(四正門)으로 명명되었으나 1425년(세종 7) 집현전에서 광화문이라고 바꾸었습니다.

 

광화문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270여 년 간 중건되지 못하다가 1864년(고종 1)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재건으로 다시 옛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한일합방 후 1927년 조선총독부가 경북궁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북쪽에 이전시켰고, 그 후 6·25전쟁으로 소실된 것을 1969년 2월 철근큰크리트 구조로 현재의 자리에 복원시켰습니다.

 

여기에서의 관심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복원할때인 1865~1867년 경복궁 중건 당시 세운 광화문 현판 글씨입니다. 이와 관련해 문화재청은 최근 현판 자료를 수집하던 중 흥미로운 기록을 찾아냈습니다.

 

현판을 쓴 이가 학계에 그동안 알려졌던 조선 말 서화가 몽인 정학교(1832~1914)가 아니라 경복궁 훈련대장이던 무관 임태영(?~?)임을 알려주는 공사일지 <경복궁영건일기>의 기록을 발견한 것입니다.

<경복궁 영건일지>에는 임태영이 ‘광화문 현판 서사관(書寫官)’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서사관이란 글씨를 쓰는 임시직을 뜻합니다. 그의 이름은 ‘함원전’ ‘천추전’ ‘영추문’ 등 주요 전각 현판을 쓴 다른 서사관 이름들과 함께 적혀있습니다.

 

임태영은 본관이 풍천으로 좌우 포도대장, 어영대장 등을 지낸 고위급 무관입니다. 경복궁 중건 때 공사 감독기구인 영건도감의 제조를 겸직했다고 기록에 전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역사학계에서는 현판의 원래 글씨는 괴석(기이한 돌) 그림과 글씨의 대가였던 정학교의 것으로 생각해왔습니다. 근대기 서화가인 위창 오세창(1864~1953)이 고금 서화가들의 일대기와 작품 품평 기록 등을 요약한 <근역서화징>에서 정학교가 광화문 편액을 썼다고 기록한 데 따른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문화재청쪽은 “공식기록인만큼 서사관 기록이 틀렸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정학교보다 후대에 태어난 오세창이 잘못 기록했을 공산이 크다”고 밝혔습니다. 고문서 연구자 김영복씨도 “경복궁 중건시기인 1865~1867년 정학교가 30대 초반인데 그런 대작 현판을 썼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며 “ 영건일지의 기록이 신빙성이 높아 광화문 현판 원작자에 대한 통설은 바뀌어야할 것으로 보인다 ”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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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은 봄의 뜻을 담아 건춘문, 서문은 가을을 뜻하는 영추문이고

북문은 신무문입니다. 신무문은 청와대 쪽에 있다.

 

 2006년까지 광화문에 걸려 있던 현판의 글씨는 박정희(1917~1979년) 전대통령이 썼으며,

 한글체이다.

△ 박정희 대통령이 1968년 제막식 당시 올렸던 친필 현판(왼쪽)과 이듬해 3월 다시 고친

    현재의 현판 (오른쪽). 한눈에도 필체가 구별된다. 노형석 기자, <정부기록사진집>


광화문은 문이 세 개이고, 가운데 문이 양 옆보다 더 큽니다. 왕이 드나드는 문의 천장에는 사신도의 주작 그림이 그려져 있다.

 

경복궁의 동쪽문인 건춘문(建春門) 천장에 있는 청룡

서쪽문인 영추문(迎秋門)의 천장에 있는 백호

 

북쪽 신무문(神武門)에 있는 현무

 

  광화문에는 세개의 문이 있는데 중간에 임금이 드나드는 문의 주작

 


경복궁은 상월대의 각 중앙에 사방신(사신도)을 새겨 놓았을 뿐 아니라 근정전 천정에 황룡를 그려 놓았다. 오방신의 개념으로 볼 때 중앙은 노란색이며 수호신은 용이다.

 

다섯가지의 맛

 

다섯 가지 맛을 오미(五味)라고 하며(酸 : 신맛), (苦 : 쓴맛), (甘 : 단맛), (辛 : 매운 맛), (鹹 : 짠맛)을 뜻합니다. 산고감신함은 순서대로 목화토금수에 배속합니다.


구분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

신맛

쓴맛

단맛

매운맛

짠맛


 산미(酸味)가 木으로 추상된다는 것입니다. 왜 산(酸)이 木일까요?자! 봅시다. 간(肝)이 木이 아니듯 산(酸)역시 木이 아닙니다.

 

산(酸)을 木이라고 하는 것은 산의 알맹이가 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모든 존재는 형(形)과 기(氣)로 이루어져 있고 형(形)은 껍데기고 기(氣)는 알맹이라고 했습니다. 그런즉 산(酸)을 그림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산(酸)의 껍데기는 金을 쓰고 있고그 알맹이는 木입니다. 다른 맛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산고감신함은 목화토금수의 알맹이를 금수목화토의 껍데기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시큼한 것을 먹으면 그 형(形)이 수렴되어 의 힘이 작용하고쓴 것을 먹으면 그 형이 굳어져 의 힘이 작용하고단 것을 먹으면 그 형이 느슨해져 의 힘이 작용하고매운 것을 먹으면 그 형이 흩어져 의 힘이 작용하고짠 것을 먹으면 그 형이 부드러워져 의 힘이 작용합니다. 맛의 이런 성질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또한 산고감신함의 껍데기와 알맹이를 잘 보면 상극(相克)의 관계를 볼 수가 있습니다. (酸)은 금극목(金克木)하고 있고(苦)는 수극화(水克火)하고 있고(甘)은 목극토(木克土)하고 있고 (辛)은 화극금(火克金)하고 있고(鹹)은 토극수(土克水)하고 있습니다.

 

 오행일람표

구분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

음양

성질

생성

성장,분열

조화,완성

수렴,결실

휴식,응집

방위

동방

남방

중앙

서방

북방

천간

甲,乙

丙,丁

戊,己

庚,申

壬,癸

지지

寅,卯,辰

巳,午,未

-

申,酉,戌

亥,子,丑

계절

여름

긴여름

가을

겨울

기후

바람

뜨거움

습기

메마름

차가움

기운

광명의 신

사대문

동대문

남대문

중궁

서대문

북대문

경복궁

동문

남문

경복궁

서문

북문

사단

색깔

푸른색

붉은색

노랑색

흰색

검은색

상징동물

청룡

주작

-

백호

현무

창조덕성

元(放)

亨(蕩)

통합

利(神)

貞(道)

오욕(五慾)

情慾

色慾

-

貪慾

老慾

오관(五官)

오성(五星)

목성

화성

토성

금성

수성

오제(五帝)

청제

적제

황제

백제

흑제

오성(五聲)

오수(五數)

신체

근육

혈맥

신맛

쓴맛

단맛

매운맛

짠맛

감정

분노

기쁨

사려

슬픔

두려움

오장(五臟)

심장

비장

허파

콩팥

육부(六腑)

쓸개

작은창자

위,삼초

큰창자

오줌보

정신

짐승종류

들짐승

날짐승

사람

갑각류

어류

종교

기독교

신교

불교

오대양

태평양

남빙양

인도양

대서양

북빙양

육대주

아시아주

구라파주

오세아니아주

아메리카주

아프리카주

한글발음

ㄱ,ㅋ

ㄴ,ㄷ,ㄹ,ㅌ

ㅇ,ㅎ

ㅅ,ㅈ,ㅊ

ㅁ,ㅂ



다섯까지의 색깔

 

색깔의 오행 배속은 선조의 문화유산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고구려나 백제 고분의 현실(玄室) 속에서 오행의 방위에 맞추어

그려진 사신도(四神圖)를 볼 수 있습니다.

 

 

오방신장 []


민속에서 동서남북과 중앙의 5방위를 지키는 신.

오방신 ·오방장군이라고도 한다. 동 ·서 ·남 ·북 ·중앙을 각각 청제() ·백제() ·적제() ·흑제() ·황제()라고 부르며, 청룡 ·주작 ·백호 ·현무 ·황룡(또는 기린)의 동물로 나타내기도 한다.

 

오방을 청 ·백 ·적 ·흑 ·황의 색채로 표시하는 것은 춘 ·하 ·추 ·동의 계절과도 관계가 있고, 따라서 방위 ·색채 ·계절은 서로 일련의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무당들은 오방신장을 무신()으로 섬기며, 민간에서도 마을이나 읍락을 수호하는 역할을 가진 장승에 원용되면서 ‘오방오제축귀장군()’이라 불러 모신다.

 

고구려고분벽화는 사신도가 아니라 오신도 입니다. 사방벽에 사방신이 그려져 있고 천장에 황룡(또는기린)이 그려져 있습니다. 고구려는 스스로 황제라 칭할 정도로 강했기 때문에 가능한 벽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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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청룡, 백호, 주작, 현무를 뜻하며 그 색깔이 청, 적, 백, 흑으로 목화금수를 상징합니다. 중앙의 황색을 합치면 청적황백흑의 순서로 목화토금수가 결정됩니다.

 


구분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

색깔

푸른색

붉은색

노랑색

흰  색

검은색


  

또한 풍수지리에서 음택이 자리하는 주산(主山)의 왼쪽 산줄기를 청룡으로, 오른쪽 산줄기를 백호로 부르는 것도 같은 원리입니다.  

 

또 궁중의 나례(儺禮 : 궁중에서 악귀를 쫓던 의식)나 중요한 행사에 추어 온 탈춤인 처용무를 보면 오방(五方)처용이 다섯 가지 색깔의 옷을 입고 있는데 역시 [靑], [赤], 중앙[黃], [白], [黑]의 배치로 되어 있습니다.

 

다섯 가지 냄새, 다섯 가지 소리, 다섯 가지 맛, 다섯 가지 별….삼라만상에서 오행에 배속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 가운데 오색의 응용은 미묘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청색과 적색과 황색은 잘 알다시피 기본적인 삼원색입니다. 동양에서는 청적황(靑赤黃)을 목화토라는 의 현란한 변화에 배치하고 있습니다.  또 청적황이 통합하며 이루어지는 백흑(白黑)을 라는 음의 통일 과정에 배속하여 오색을 완성하고 있습니다.

 

물론 동양의 선철들이 단순한 철학적 연구를 통해 오색을 배치한 것이라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실제로 우주에서 명멸하는 색의 상(像)을 보시고는 옮겨 적은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서양의 과학적(科學的 : scientific) 분석에 의하면 색이란 물체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모습이 아니라 광자(光子)가 부딪치며 일어나는 파동의 산란과 흡수에 의한 환각일 뿐입니다.

 

이 때 물체에 부딪치는 광자는 입자성과 파동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묘한 존재입니다.

 

또한 물체의 전자와 부딪치며 펼쳐지는 색의 변화 역시 놀라운 것입니다.  동서양의 철학과 과학이 이목을 집중하고 있는 곳 중에 하나가 색의 세계입니다.

 

여기서는 색이 숨기고 있는 상(象)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일찍이 한국이 낳은 대철(大哲)이신 김일부 선생의 오행변극론을 응용하여 그림을 남깁니다. 동도(同徒)의 연구에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어린시절과 태양인

 

 

 

 

태양인의 태양기(太陽期)를 보십시오.

 

사람들은 점점 성장하면서 어릴때 가졌던 창의적 능력들이 줄어 든다. 이처럼 창의성이란 기준을 가지고 본다면 가장 어린 유년기, 즉 태양기 시절에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몸의 모든 힘이 머리에 집중되어 있는 때입니다.  이 시기의 아이들이 신체의 다른 부위에 비해 상대적으로 머리가 큰 이유입니다.

 

두뇌의 성장이 거의 완성되며 배움이 가장 활발합니다.  키가 크는 것도 비온 뒤의 죽순이 자라듯 쑥쑥 자라나 마치 쇠[太陽]가 늘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동무 이제마 선생은 유년기의 특징을 정의하시기를 "보고 듣는 것을 좋아하며(好見聞) 사랑하고 공경하는 것을 잘한다(能敬愛)." 고 했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호기심이 많아 이것저것 묻고 또 사람을 진정으로 좋아하며 어른을 경외하는 것과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을 바탕으로 태양인의 성격으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체질에서도 태양인들은 그 성정들이 참 독특한 경우가 많다. 얼마전 신문에서 최근 기업들이 신규채용시 가장 중점을 두고 보는 것이 '창의성'이라고 하더군요. 다시 말해 점점 태양 · 소양인의 양인 기질을 가지기를 사회가 강요하고 있는 환경인 것입니다.


태양인은 따뜻한 기운을 지닌 신체로 몸통 상부가 발달되어 있고, 머리와 뒷목이 발달한다. 이는 오행적 관점에서 목. 풍의 성격이 강한 사람의 특성과 부합하여 순환이 아주 원활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